르 줄라호 침몰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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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사고 요약도
일어난 날짜
2002년 9월 26일
유형
운항 중 폭풍으로 인한 침몰
일어난 위치
감비아 부근 해역
탑승인원
1,927명
사망자
1,863명
구조자
64명
선종
여객선

1. 개요
2. 르 줄라호
2.1. 예고된 인재
2.2. 불편한 진실
3. 사고 여파



1. 개요[편집]


파일:attachment/르 줄라호 침몰사고/Le_Joola_at_Ziguinchor_1991.jpg
1991년 세네갈에서 찍은 르 줄라 호 사진.(출처:위키피디아)

MV Le Joola

2002년 9월 26일에 터진 아프리카 역사상 최대 여객선 해난 사고이자 인류 역사상 2번째 인재 해난 사고, 과적으로 인한 2번째 사망자 해난 사고. 이런 불미스런 기록에 죄다 1위를 차지한 도냐 파즈호 침몰 사고 못지않게 이 배도 참 불미스러운 기록이 많다.

해양사고 전반으로 따지면 필리핀 선적 도냐 파즈호(여객선), 중국 선적 캉야호 침몰 사고, 프랑스 선적 핼리팩스 몽블랑 호 폭발 사고[1]에 이은 4번째로 많은 사망자를 낸 사고이다.


2. 르 줄라호[편집]


파일:attachment/르 줄라호 침몰사고/Joola_02.jpg
한참 잘 운항하던 때의 르 줄라호 링크 원본참조

르 줄라 (Le Joola)호는 1990년 독일의 게르머스하임 조선(Schiffswerft Germersheim GmbH)에서 건조된 배로 1991년 아프리카로 수출되었다. 도냐 파즈랑 달리 중고로 팔려나간 게 아닌 걸 알 수 있는데 장비면에선 그다지 문제가 없었지만 여러모로 허술한 곳이 많음이 드러났다.

세네갈 정부에서 국영으로 운영하던 이 배는 1주일에 2번씩 운행하며 세네갈 남부와 북부를 항해해 보통 서민들이 타고 다녔다. 보통 승객 대다수가 주부들로 망고 및 야자기름을 팔러나가던 이들이 많았다. 물론 싼값에 타고 다니던 외국인 배낭여행객도 많았다고 한다. 세네갈 지도를 보면 세네갈 남부와 북부 사이에 다른 나라인 감비아 땅이 끼어 있기 때문에 감비아를 거치면 입출국심사 등 절차가 번거로우므로, 배낭여행자 및 세네갈인들도 세네갈 남부와 북부를 오갈 때 감비아 땅을 피해서 여객선을 타는 경우가 많았다.


2.1. 예고된 인재[편집]


2001년 9월, 르 줄라 호를 운항하던 승무원들은 배가 이상함을 느끼고 점검에 나섰다. 포트사이드(좌측) 엔진이 고장난 걸 알아차린 이들은 대체품을 찾지 못해 1년이나 수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정박해야 했다. 사실 1년 동안 고치자고 했다면 고칠 수 있었으나 독일 제조사에 맡기자면 돈이 많이 들기에 대충 수리하는 막장으로 방치하고, 놀랍게도 그 상태로 1년 동안 쉬던 이 배는 2002년 9월, 무리하게 운항을 재개하고 만다.

2002년 9월 14일 운항을 다시하면서 처음 몇번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9월 26일 밤 12시를 넘어 세네갈 남부 카자망스(Casamance)주에 있는 지갱쇼르(Ziguinchor)시에서 북부에 위치한 다카르항으로 향하던 중 소식이 끊기고 만다.

파일:attachment/르 줄라호 침몰사고/Joola_05.jpg
완전히 뒤집어져 발견된 르 줄라호 링크

27일에서야 르 줄라 호는 감비아를 가던 길에 폭풍을 만나 침몰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드러난 사실들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2.2. 불편한 진실[편집]


파일:attachment/르 줄라호 침몰사고/Joola_01.jpg
평소 르 줄라 호의 과적수송 링크
저러고도 오랫동안 배를 운항한 것이 대단한 것이다.

당시 외신 보도를 보면 탑승자는 모두 797명으로 보도되었는데 이는 정원 563명을 한창 넘어선 것이라 비난이 터졌다. 그러나 드러난 사실에 의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그리고 이 와중에 드러난 사실은 797명의 2배가 넘는 약 1,927명(선원 44명)이 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원래 정원(608명)의 3배가 넘는 과적으로 희생자가 4375명이나 됐던 도냐 파즈호 침몰 사고보단 나을지 몰라도 앞서 서술한 대로 엔진 이상으로 배가 언제라도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같은 배에 정원의 3배 반이 넘는 승객을 꾸역꾸역 넣었으니...

게다가 세네갈 및 감비아 정부는 사건 진상 및 대응 조치에 아주 개판이라서 지나가던 어선들이 서둘러 와서 어부들이 열심히 구조를 돕던 순간에도 진상파악이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어부들은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조금이라도 일찍 구조선이 왔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파일:attachment/르 줄라호 침몰사고/7lejoola.jpg
어선과 해군들이 사람들을 살리러 왔지만 속수무책이었다.링크
어선들이 구조를 위해 도착했지만, 수백명이 살려달라고 바다 위에서 외쳤음에도 어부들은 겨우 64명만 구해서 그 자리에서 서둘러 빠져나와야 했다. 물론 어부들을 비난할 수 없다. 그들은 아무 구조 장비도 없이 폭풍 속에서 최선을 다했고 자신들도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선은 구조용 배가 아니기 때문에 수백명을 태우려다가는 자신도 똑같이 과적수용으로 배가 뒤집혀 모두 망망대해에서 죽을 수도 있다. 거기다 이 어부들도 다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한 인명을 생각하면 평생 PTSD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2] 이걸 생각하면 오히려 어부들한테 영웅 대접을 해줘도 모자랄 판이다.

결국 어선들이 구한 64명만이 살아남은 최종 생존자들이었다! 부랴부랴 감비아 해군이 왔지만 1,863명은 이미 물속에서 명을 달리했다. 이마저도 최소 추정치인데 사망자 상당수, 아프리카에서 제대로 호적조사가 되지 않았기에 신상파악이 드러나지 않은 희생자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래서 사망자가 2,000명 이상이라는 주장도 많다.

이 배도 도냐 파즈호 못지않게 아주 개판이었는데 처음부터 배가 엉망인 상황에 구명선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으며 선원들도 비상시 대비에 대하여 속수무책이었으며 침몰한 배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나오지 못하여 죽은 점이라든지 도냐 파즈호에서 벌어진 일이 여기서도 똑같이 재현되었다.

덤으로 사람만 많이 태운 게 아니라 이 배에는 수송차량에서 트럭까지 원래 태울 수 있던 35대보다 많은 100대 이상을 태웠던 게 드러났고 온갖 화물도 가득 더 실었던 게 드러났다. 그야말로 사람도 과적에 화물까지 과적으로 싣었다가 폭풍으로 침몰당한 남영호 침몰사고와 판박이였다.


3. 사고 여파[편집]


사망자 다수가 세네갈인이었지만 감비아, 기니, 가나, 나이지리아, 프랑스, 스페인, 노르웨이, 벨기에, 레바논, 스위스, 네덜란드 같은 다양한 국적 사람들이 타고 있었으며 프랑스인들이 꽤 많이 목숨을 잃었기에 프랑스에서 폭발했다.

세네갈 정부는 사망자 1명당 2만 2천 달러를 보상했지만 당연히 유럽 나라에선 이는 헐값인지라 유럽에서 반발이 거셌고 프랑스는 책임 소재 및 보상 문제로 세네갈 정부와 갈등을 빚었고 2008년 9월 12일 프랑스 법원은 세네갈 당시 국무 총리 보예 및 전현직 고위 세네갈 정치인 9명을 기소했다. 이로 인하여 세네갈 정부는 프랑스인 입국을 불허하는 맞대응으로 나섰고 프랑스에선 세네갈인 입국 불허로 역시 맞대응했다. 하지만 프랑스어가 많이 쓰이고 경제적으로 프랑스에 의존하는 게 많은 세네갈이 더 급했기에 이 조치는 오래가지 못했으며 현재까지도 프랑스 측은 세네갈과 보상문제로 여전히 갈등을 빚고 있다. 몇번의 소송에서 세네갈 정부는 모조리 패소했지만 배째라로 대놓고 무시하고 프랑스는 그 분풀이로 세네갈에 대한 경제적 조치로 보복하고 있다(...).

세네갈 대표팀 감독인 알리우 시세는 당시 현역 선수였는데, 이 사고로 친척을 한꺼번에 9명이나 잃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세네갈과 나이지리아의 자선 경기가 열렸고, 알리우 시세 당시 소속팀이었던 버밍엄 시티 또한 자선 기금 모금을 하며 시세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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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7년 캐나다 핼리팩스 항구에서 프랑스 몽블랑 호와 노르웨이 화물선 SS 이모 호가 부딪쳐 벌어진 화재로 일어난 폭발사고다. 1차대전 와중에 화약 운반선이던 몽블랑 호는 이 화재로 대폭발을 일으켜 항구를 초토화시키고 추정으로만 2천여명을 죽였으며 부상자는 무려 1만명에 달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항구가 초토화되었는데 당시 캐나다에서 1차대전 당시 적국인 독일제국군이 쳐들어왔다라고 소문이 나며 전역에서 난리가 났다. 도시는 2년이나 걸려 재건해야 했고 2년 뒤에도 폐허가 된 곳곳에서 시체들이 계속 나왔을 정도다.[2] 비슷하게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에서도 구명보트들이 물에 빠진 사람들에 의해 뒤집어지는 것을 우려해 돌아가 구해주는것을 주저했고 비명소리가 생존자들에게 트라우마와 죄책감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