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파라디 학살
덤프버전 :
영어: Le Paradis massacre
독일어: Massaker von Le Paradis
프랑스어: Massacre du Paradis
1. 개요[편집]
르 파라디 학살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1940년 5월 27일 프리츠 크뇌힐라인이 지휘했던 SS 토텐코프 사단이 영국 육군 포로 97명을 잔혹하게 학살한 전쟁범죄이다.
2. 르 파라디 전투[편집]
프랑스 북부의 르 파라디 전투에서 영국 육군 왕립 노퍽 연대 소속의 영국군은 르 파라디를 공격한 제2 SS보병여단에 맞서 5시간 넘게 저항했으나 탄약이 소진되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부대가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어떠한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던 결국 영국군은 항복을 결정했다.
르 파라디 전투에서 독일군의 사상자도 만만치 않았기에 항복 후 보복당할 것을 우려한 영국군 생존병들은 그들이 전투했던 제2 SS보병여단에 항복하는 대신 프리츠 크뇌힐라인이 지휘한 SS 부대에게 백기를 들고 항복하였고 결과적으로 이는 잘못된 선택이 되고 말았다.
3. 학살[편집]
진격하기 바쁜 마당에 포로를 받아줄 마음이 없었던 크뇌힐라인의 SS 장병들은 항복한 영국군 포로들을 인근 목초지로 압송한 뒤에 그곳에 있는 한 헛간 외부의 벽에 나란히 줄세운뒤 근거리[1] 에서 MG34 중기관총 2정으로 사격을 가해 학살했다. 수초만에 영국군 포로들은 쓰러졌고 크뇌힐라인은 부하들에게 아직 숨이 붙어있는 포로들을 총검으로 찔러죽이라고 직접 명령했다.
이 학살로 총 97명의 영국군 포로들이 살해되었으며 기적적으로 앨버트 풀리 이병(Private Albert Pooley)과 윌리엄 오캘러한 이병(Private William O'Callaghan)이 살아남았고 이 둘은 마을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숨어지내다가 독일 육군 제251보병사단 소속 육군 병력에게 붙잡혀 야전병원에 보내졌고 이 둘은 전후까지 살아남아 크뇌힐라인의 전범재판에서 증인이 되었다.
4. 여담[편집]
전후 열린 전범재판에서 크뇌힐라인은 이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학살에 가담한 다른 SS 병사나 장교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살이 이루어진 르 파라디 근처에서 영국군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집단매장된 구덩이가 또 발견되었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르 파라디 학살 외에도 다른 곳에서도 SS가 포로학살을 동시다발적으로 자행했다는 것이 거의 확실해보인다.
1943년 여름 본국으로 돌아온 풀리 이병은 영국군 지휘부에 독일군의 학살행위를 고발했으나 지휘부는 독일군이 영국군을 상대로 그러한 만행을 자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의 진술을 묵살했다. 그러나 1945년 두번째 생존자인 오캘러한이 풀리의 진술을 뒷받침하자 그제서야 학살에 대한 공식적인 조사가 이루어졌고 크뇌힐라인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1970년 학살이 이루어졌던 르 파르디의 헛간의 외벽에 추모패가 건립되었으며 2021년에는 노리치 대성당에 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폭풍 속의 씨앗의 저자인 헤르베르트 브루네거가 당시 토텐코프 사단 소속으로 이 현장에 있었다. 후에 학살에 대한 증언도 하였고 노리치 현지 언론인 이스턴 이브닝 뉴스[2] 1985년 3월 27일자 신문기사에서 보도되었다. 단 기사에서는 오류로 인해 당시 호텔 종업원이였다고 소개되어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6 06:24:27에 나무위키 르 파라디 학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