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누스 미헬스

덤프버전 :


리누스 미헬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escudo-holanda.png

28대, 34대, 36대, 39대



클럽
파일:AFC 아약스 로고.svg

20대, 25대
파일:FC 바르셀로나 로고.svg

36대, 39대
파일:바이어 04 레버쿠젠 로고.svg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E32221; font-size: 0.9em;"
레버쿠젠
19대



리누스 미헬스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World Soccer.png






리누스 미헬스의 기타 정보





네덜란드의 前 축구 감독


파일:Marinus Jacobus Hendricus Michels.jpg

이름
리누스 미헬스
Rinus Michels
본명
마리뉘스 야코뷔스 헨드리퀴스 미헐스
Marinus Jacobus Hendricus Michels
출생
1928년 2월 9일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암스테르담
사망
2005년 3월 3일 (향년 77세)
벨기에 오스트플란데런주 알스트
국적
[[네덜란드|

네덜란드
display: none; display: 네덜란드"
행정구
]]

신체
186cm
직업
축구 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AFC 아약스 (1946~1958)
감독
아서 보이스 (1963~1954)
JOS (1960~1964)
암스테르담셰 FC (1964~1965)
AFC 아약스 (1965~1971)
FC 바르셀로나 (1971~1975)
네덜란드 대표팀 (1974)
AFC 아약스 (1975~1976)
FC 바르셀로나 (1976~1978)
로스앤젤리스 아즈텍스 (1979~1980)
FC 쾰른 (1980~1983)
네덜란드 대표팀 (1984~1985)
네덜란드 대표팀 (1986~1988)
바이어 레버쿠젠 (1988~1989)
네덜란드 대표팀 (1990~1992)
국가대표
5경기 (네덜란드 / 1950~1954)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평가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2. 감독
5.2.1. 대회 기록
5.2.2. 개인 수상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토탈 풋볼'의 설계자
the architecht of ‘total football’

UEFA에서 축구계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명감독 10인을 꼽으며 남긴 평


“우승은 어제 내린 눈일 뿐이다”[1]

[2]

네덜란드축구 선수 출신 前 축구 감독. 자신의 제자인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토탈 풋볼로 대표되는 현대 축구 전술의 기반을 만든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유럽 축구의 변방에 가까웠던 AFC 아약스를 명문 구단으로 만들고, 축구계의 대표적 콩라인네덜란드 대표팀을 이끌고 1974 서독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유로 1988에서 사상 첫 메이저 대회 우승을 이루어냈다.


2. 선수 경력[편집]


1946년 AFC 아약스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뒤 1958년 은퇴를 할때까지 쭉 아약스에서만 선수생활을 하였다.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였으며 총 264경기에서 122골을 넣은 꽤 수준급의 선수였다. 네덜란드 대표팀으로도 5경기를 출장했으나 득점 기록은 없었다. 두 번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나 등 부상으로 인하여 약간은 이른 나이에 은퇴하게 된다.


3.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external/24.media.tumblr.com/tumblr_m2fvqxy23s1rtys3mo1_500.jpg}}}
그의 페르소나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몇몇 아마추어팀의 감독을 맡다가 1965년 친정팀 AFC 아약스의 사령탑을 맡게 된다. 그가 감독을 맡은 6시즌 동안 아약스는 자신의 애제자이자 페르소나인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토탈 풋볼을 완성하여 축구의 진보를 이끌어 리그 3연패(1966~1968)를 포함 4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1970-71 시즌에는 유러피언컵[3] 챔피언에 오르며 전성기를 맞이한다.[4] 이로써 미헬스는 당시 펠레가 활약한 산투스와 브라질 대표팀에 비견될 만한 네덜란드 축구의 성취를 이끌었다. 이후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자리를 옮겨 1971~1975년, 1976~1978년까지 6시즌 동안 바르사를 이끌며 라리가 우승 1회와 코파 델 레이 우승 1회에 그쳤지만 현재의 바르사 축구의 뿌리를 형성하는 데 공헌을 했다. 많은 트로피 없이도 바르사 이사회가 미헬스를 신임했던 것은 비로소 팀이 원하는 아름다운 축구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확립해 낸 '전체 선수단이 함께 공을 가지고 공격하는' 축구 스타일은 크루이프 감독 시절과 펩 과르디올라 체제를 거쳐 완성되었다. 첫 시즌인 1971-72 시즌은 무관으로 끝냈지만 바르사는 당시 17경기 연속 무패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 엘 클라시코의 성적이 미헬스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미헬스 부임 전인 1971년 2월 14일 바르사는 홈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0-1로 패했다. 그러나 미헬스가 감독 자리에 앉은 이후 라 리가에서 치러진 엘 클라시코에서 바르사는 6연속 무패를 달렸고, 1974년 2월 17일 마드리드 원정에선 역사에 남을 5-0 대승을 거두며 바르사 팬들의 지지를 얻으며 그해 라리가 우승 트로피를 손에 거머쥐었다. 그러나 1974-75 시즌에는 마드리드 원정에선 0-1 패배, 홈에서는 0-0 무승부를 기록해 더 이상 면죄부를 얻지 못하고 4년 만에 사임했다.

1974 서독 월드컵때는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끌었다. 당대 최고의 스타 요한 크루이프를 앞세운 네덜란드는 토탈 풋볼의 위력을 보여주며 승승장구 하였으나 결승에서 서독에게 1-2로 역전패하여 준우승에 머물렀다. 월드컵 종료 후 아약스를 거쳐 다시 바르셀로나로 건너가게 되고 1978년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자신의 커리어에 추가한다. 이번엔 미국으로 건너가서 로스엔젤레스 아즈텍스의 감독을 잠시 맡은 후, 1980년 이번에는 분데스리가쾰른의 감독을 맡는다. 여기서 1981-82 시즌 분데스리가 준우승, 1982-83 시즌 DFB-포칼 우승을 차지한다.

파일:external/www.vi.nl/cid146535_MichelsVI01_1024_580x310.jpg}}}
14년전 월드컵 결승전에서 패배를 안겨줬던 '뮌헨 올림피아슈타디온'에서 네덜란드를 정상으로 이끌다.

유로 1988에서는 다시 한 번 네덜란드 대표팀의 감독을 맡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은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의 이른바 오렌지 삼총사가 버티고 있는 유럽 최강팀이었다. 조별리그에서 소련에게 일격을 당해 패하기는 하였으나 결승에서 소련을 다시 만나 2-0으로 설욕하며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5] 이후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감독을 맡고 다시 한 번 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하였으나 큰 족적은 없었고 1992년 대표팀 감독에서 사임하며 그의 커리어는 끝을 맺는다. 감독 은퇴 이후에도 네덜란드 대표팀과 UEFA에 여러 컨설팅을 해주다가 2005년 3월 3일에 심장 수술의 후유증으로 벨기에 알스트에 있는 한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차범근이 레버쿠젠 시절 미헬스의 지도를 받았다. 미헬스의 축구철학과 지도방식에 큰 감명을 받은 차범근은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미헬스를 꼽는다. 선수 은퇴 이후에도 문하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차두리에게는 리누스 할아버지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4. 평가[편집]


20세기 역대 축구 명장을 거론할 때 단골이며 일부 언론들의 랭킹 싸움에선 1위도 자주 하는 감독으로, 특히 현대 축구의 기본적인 철학 중 하나이자 오늘날 많은 감독들이 베이스로 삼고 있는 토탈 풋볼을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 제시하고 전파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사실 우승 경력만을 놓고 보면 미헬스를 뛰어넘는 감독은 생각보다 많다.[6][7]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문가들이 리누스 미헬스를 역대 최고의 명장 중 한명으로 꼽는 이유는 그가 축구의 패러다임 자체를 한번 크게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리베로 개념을 만들어낸 카테나치오 등처럼 전술계 혁신은 있어왔지만, 그 대상이 어떤 특정 포메이션 선수의 임무 변화처럼 부분적인 영역에 그치는 수준이었다면, 토탈풋볼은 포메이션이 아닌 공간이란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며 공수 양면에서 축구판 자체를 한번 크게 바꿔놓는다.

이전까지의 축구는 공격수는 말 그대로 공격만, 수비수는 수비만 맡아서 하는 축구였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자기가 맡은 일정 반경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미헬스는 여기에 반해 '토탈 풋볼'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8] 이것은 이전처럼 공격수는 공격만 하고, 수비수는 수비만 할게 아니라 공격을 할 때는 10명의 모든 필드플레이어가 공격에 가담하고, 수비를 할 때는 10명이 모두 수비에 가담하는데 그것을 공간을 채우는 개념으로 제시한 일종의 원칙, 원리, 시스템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전술이 완성되려면 선수들의 전술 이해도도 높아야 하며, 이를 뒷받침할 체력과 서로간의 호흡도 매우 뛰어나야 했다. 특히 공수 양면에서 일정 역할을 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의 가치는 말할 것도 없이 높아진다.[9]

리누스 미헬스의 토탈 풋볼은 말 그대로 '토탈' 그 자체였다. 공격권을 쥐고 있으면 전원 공격, 공격권을 넘겨줬으면 바로 수비로 전환한다는 생각보다 간단한 개념이지만, 실행은 녹록지 않았다. 팀에 A라는 한 선수가 있다. A가 수비 진영에 있었는데 같은 팀 선수가 볼을 끊어내서 우리팀이 공격으로 나가게 되면 A 선수도 적절한 빈 공간을 찾아 공격에 가담해야 한다. 그런데 다시 볼이 끊겨 공격권이 상대에게 넘어가는 순간 A선수는 다시 빈 공간을 찾아 수비 진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의 무한 반복(...). 이 뺑뺑이가 정규 경기에서는 90+@분, 만약 연장까지 가면 120+@분 내내 이루어져야 하는 것.

리누스 미헬스의 축구가 말그대로 '혁명'이었던 이유는 이러한 행위가 과거에도 특수한 경우에 한해 분명히 있었지만, 이것을 팀의 전체 기조로 삼고 그것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한 것은 리누스 미헬스가 이끌던 아약스, 네덜란드가 최초였기 때문이다. 마침 운도 따라줘 아약스와 네덜란드 대표팀에는 미헬스의 축구를 거의 완벽하게 구현해 줄 수 있는 요한 크루이프라는 천재가 있었다. 미헬스는 크루이프와 다른 선수들과 함께 전술을 다듬고 하나의 유기체적인 팀을 완성하였고, 아약스를 유럽 정상의 구단으로 만들었다. 그나마 당대엔 미헬스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토탈 풋볼을 발전시킨 라이벌 에른스트 하펠이 이끌던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리베로 시스템을 운영했던 헬무트 쇤 감독과 프란츠 베켄바워가 이끌었던 독일 정도가 미헬스 팀의 라이벌이었으나, 전술을 체계화시켜 후대 축구판에 끼친 영향력 측면에선 미헬스의 그것을 따라올 순 없었다.[10]

축구는 골을 넣는 것이 제1 절대 명제다. 그것은 축구가 생긴 이후에 변함 없는 진리다. 그리고 제2 절대 명제는 실점을 안 하는 것이다. 그리고 리누스 미헬스는 그 제 1, 2 절대 명제를 뒷받침하는 제3 절대 명제인, 공격에서는 공격 가담 선수가 많아야 하고, 수비에는 수비 가담 선수가 많아야 한다는 명제를 확립했다. 이제 와서 보면 이게 무슨 개떼 축구인가 싶겠지만, 현대 축구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개념인 수비에는 공격수도 수비로 가담하여 수비에 참여하는 선수가 많고, 공격일때는 수비수도 공격에 가담하여 공격에 참여하는 선수가 많아야 한다는, 이 간단한 절대 명제를 최초로 증명한 감독이 되겠다.

지금이야 풀백의 공격가담, 혹은 좌우 윙백의 오버래핑, 최전방 공격수의 2선 수비 가담 등의 개념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변화였다. 아약스와 네덜란드의 성공을 보며 다른 팀들도 토탈 풋볼을 받아들여 나갔고 머지 않아 세계 축구의 대세가 된다. 토탈 사커는 1980년대 말 등장한 또 한 명의 혁명가 아리고 사키의 '압박 축구'와 함께 현대 축구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으로 굳건히 자리잡았고, 이는 현재까지도 계속 유효하다.


5. 기록[편집]



5.1. 선수[편집]



5.1.1. 대회 기록[편집]




5.2. 감독[편집]



5.2.1. 대회 기록[편집]







5.2.2. 개인 수상[편집]


  •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1988
  • FIFA 세기의 감독: 1999
  • UEFA 역대 최고의 감독 10인: 2017
  • 네덜란드 세기의 감독: 1999
  • 네덜란드 프로 축구 50년 최고의 감독: 2004
  • 베를린-브리츠 10년의 감독: 1970년대
  • 프랑스 풋볼 역대 최고의 감독: 2019
  • KNVB의 기사: 2002
  • UEFA 평생 공로상: 2002


6. 둘러보기[편집]




[1] 네덜란드를 유로 1988 정상에 올리고 한 말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는 미헬스 감독의 제자기도 했던 차범근 감독이 스승에게 전해 들은 잠언으로 언급하며 유명해졌다.# 이후 홍명보 감독 또한 이 발언을 인용하기도 했다.[2] 다만 이 기사를 보면 시기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결승이 아닌 4강 독일전 이후에 남긴 말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제 내린 눈'도 88년 네덜란드의 우승 이후 다시 새 출발을 말하는게 아니라 독일전 승리로 인해, 74년 월드컵에서 독일과 치른 네덜란드의 결승전 패배가 지난 일이 되었다는 일종의 리벤지 매치 승리 느낌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재미있는건 74년 월드컵, 88년 유로 모두 개최지가 독일(서독)이었다.[3]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4] 아약스의 트레블은 후임인 슈테판 코바치가 이뤘다.[5] 이것이 현재까지 네덜란드 최초이자 최후의 메이저 대회 우승이다.[6] 맨유 등에서 현역 감독 시절 무려 49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린 명장 알렉스 퍼거슨이 대표적이다. 2020년대 기준 현역 중에선 펩 과르디올라가 대표적. 사실 펩은 크루이프의 제자이니 미헬스는 어찌보면 펩의 태사부이기도 하다.[7] 다만 그렇다고 미헬스가 아예 축구판에서 성과가 없는 감독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다. 상기되어있듯 일정 수준은 넘어서는 성과를 냈고 거기에 영향을 받아 이후 축구 전술판에도 큰 영향을 남겼기 때문에 그의 전술도 오늘날 평가받는 것이지, 아니었다면 미헬스 역시 그냥 무명의 축구 이론가 중 한명으로 남았을 것이다.[8] 이런 개념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잉글랜드 출신의 아약스 감독 잭 레이놀스였다. 그러다 신인 선수 시절 아약스에서 뛰며 레이놀스를 스승으로 모신 미헬스가 이를 다듬어 훗날 감독이 되고 하나의 매력적인 전술로써 완성시킨 것.[9] 2002 월드컵 당시 유상철, 박지성 등 멀티플레이어를 히딩크 감독이 중용한 이유 역시 마찬가지였다.[10] 물론 그 전에도, 예를 들어 1970년 월드컵의 펠레의 브라질이나 발키레지 감독이 이끌던 이탈리아 등이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리누스 미헬스는 그것을 거의 완벽하게 다듬어 구현했고, 그 모습은 세계 축구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6 08:01:42에 나무위키 리누스 미헬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