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르(그랜드체이스 for kakao)/아바타

“묻겠습니다, 평의회 여러분! 어째서 폭풍의 결계를 펼치신 거죠?”

리르가 돌아왔다.

리르는 세계의 변동을 알아보기 위해서 바깥세상으로 내보내진 엘프 중 하나였다. 대륙 전체로 확산되고 있는 전쟁, 그리고 여러 괴이한 사건들의 배후에 존재하는 카제아제를 조사하기 위해 편성된 엘프 부대 소속으로서 말이다. 이후 그녀는 위대한 추적자 그랜드체이스 일원으로서 활약을 했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에류엘 섬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불과 이틀 전에 돌아온 리르를 에류엘 섬의 엘프들은 환호성으로 맞이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리르는 귀환축하파티를 거절하고 평의회 소집을 신청했다. 힐책하는 듯한 리르의 발언에 엘프 평의원들은 물론이요, 젊은 지도자 리드미르 에류엘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니.. 이곳 에류엘 섬의 상황도 딱히 좋지만은 않았단다, 리르.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폭풍의 결계를 펼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어.”

에류엘 섬의 엘프들은 전란을 피해 아케메디아에서 이주한 엘프들이었다. 이들은 몬스터가 출몰하지 않은 작은 섬에 터전을 잡았으니, 그곳이 바로 에류엘 섬이었다.

그러하다 보니 에류엘 섬의 엘프들은 전란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이라면 1500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수십, 수백의 세대가 내려가고 그러한 기억도 과거도 모두 잊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프에게는 그저 몇 세대 전의 일일 뿐이다. 혹은 강력한 마력을 지닌 엘프라면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는 시간이다. 어린 리르에게 있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엘프들로서는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기 위해 여러 엘프들을 바깥으로 파견하긴 했으나 에류엘 섬이 현재 대륙을 휩쓸고 있는 전란에 휘말리게 방치할 수만은 없었다. 그 때문에 에류엘 섬의 엘프들은 쇄국정책을 펼쳤다. 마침 그들에게는 바람과 정령의 왕, 인나드릴의 힘이 있었다.

폭풍의 결계. 그 누구도 에류엘 섬의 안과 밖을 함부로 드나들 수 없게 만드는 결계를 펼친 것이다.

“당연하다뇨, 오라버니. 인나드릴의 힘은 그렇게 사용해선 안됩니다.”

“올바른 인나드릴의 힘은 뭡니까? 화살로써 적을 징벌하는 힘 입니까? 당신처럼?”

젊은 평의원 중 한 명이 리르에게 반발했다. 그의 섣부른 행동에 사방으로부터 눈총이 쏟아졌다. 하지만 리르는 그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왜 우리 엘프들은 바람과 정령의 왕인 인나드릴을 숭배해온 것 일까요? 저분 말씀처럼 매서운 바람으로 나의 적을 징벌할 수 있기 때문에? 아니면 지금처럼 폭풍의 결계를 펼치고 외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에? 둘 다 아니에요.”

숨을 고른 뒤 리르는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바람의 힘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이야말로 우리 엘프들의 삶의 터전인 숲에 생명을 불어넣는 근원이기 때문이에요.”

수풀과 꽃, 나무 등과 같은 식생들은 씨앗을 뿌려서 대를 이어나간다. 바람은 그 씨앗을 나른다. 바람을 타고 날아간 씨앗은 먼 땅에서 봉오리를 피운다. 본래 숲이던 것은 녹음이 더 푸르게, 숲이 아닌 황무지를 녹색으로 덮으며 숲을 확장해 나간다.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그런 우리가 폐쇄성을 고집한다면 엘프는 도태되고 그 수가 줄어들기만 할 뿐입니다. 당장 폭풍의 결계를 풀고 개방을 해야만 해요. 그것만이 에류엘 뿐만이 아니라 전 대륙의 엘프가 사는 길 이에요.”

“하지만 리르. 왜 굳이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리해야 하지? 너는 바깥 세상을 보고 왔지 않느냐? 밖은 너무 위험해.”

리드미르는 어린 동생에게 어르듯 일렀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에 리르를 키우다시피 한 리드미르였기에 그의 눈에는 리르는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돌아보며 수많은 경험을 한 리르는 더 이상 그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제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변화해야 하는 이유를..”

“......”

평의회는 곧바로 그녀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리르 본인도 평의회가 바로 변화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실망하지 않고 열심히 에류엘 섬의 엘프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설파하고 다녔다. 실제로 바깥을 경험하고 온 그녀의 이야기에 젊은 엘프들부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리르가 일으킨 바람은 마침내 폭풍의 결계를 해체하게 만들었다.

결계를 풀었을 뿐만이 아니라 바람에 수많은 식목의 씨앗을 실어서 멀리멀리 날려보냈다. 리르의 주장은 옳았다. 에류엘 섬에서 세계 전역으로 뻗어나간 식생의 씨앗이 대륙 곳곳에 뿌리를 내리며 숲을 확장해 나갔다.

삶의 터전이 확대되자 엘프들의 수는 자연스래 늘어났다. 엘프들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리르는 새로운 젊은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엘프들의 여왕 리르 에류엘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리르는 방이 휑하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그랜드 피아노를 치워버린 탓이다. 경영 수업을 시작하며 정리한 것들 중 하나였다. 오너가의 일원으로써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섭섭함과 아쉬움을 떨칠 순 없었다.

그 대신에 방 한 켠에는 전자 키보드가 예쁘장하게 가방에 포장되어 있었다. 리르가 피아노를 그만두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아르메가 선물한 것이다. 종종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자신과 합주를 하자는 제안과 함께 말이다. 아르메는 자신이 최근 베이스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거리 공연에 도전할 거라고 얘기했던 것 같다. 리르는 아르메의 첫 공연을 응원하기로 마음 먹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그녀와 합주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르는 기분이 들뜨는 것을 느끼며 키보드백을 들고 방을 나섰다.

“어디 가십니까, 아가씨?”
“네. 음, 저기 그러니까.. 찾아볼 게 있어서 요 앞 서점에 잠시 다녀오려고 해요.”

리르는 키보드백을 등 뒤로 숨기며 서점 핑계를 댔다. 키보드가 다 가려지지 않고 훤히 보였지만 사용인들은 이를 못 본 척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다.

“이 동네 서점은 작아서 찾으시는 서적이 없으실 수도 있습니다. 역 앞에 있는 큰 서점에 들리시는 게 어떨까요?”
“아.. 운전기사가 잠시 자리를 비웠네요. 콜 택시를 부를까요, 아가씨?”
“마침 잘 됐.. 아니, 흠흠. 괜찮습니다. 이왕이면 전철을 타고 천천히 다녀올게요.”
“예. 그럼 아가씨, 저녁은 천.천.히 준비할 테니 부디 느긋한 외출 되시길 바랍니다.”
사용인들은 현관을 나서는 리르를 향해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거실에 숨 죽이고 있던 운전기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나가셨어?”
“예. 지금 막 친구분이랑 만나셨어요.”
“어휴, 우리 아가씨. 이왕 나가시는 거 그럴싸한 핑계 좀 만들어 두시지.”
“어쩌겠어요? 거짓말은 아가씨 체질이 아니신 걸요.”

사용인들은 한숨을 폭 쉬었다. 리르가 피아노를 그만둔 것은 그들도 아쉬워하는 일중 하나였다. 이왕이면 이 작은 외도가 아가씨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

“알리바이 시간은 벌어드렸으니 오늘은 천천히 돌아오시겠죠?”
“그럼. 지난 번엔 정말 친구분을 만나자마자 바로 돌아오시는 게 어찌나 안쓰럽던지.”
“그냥 아가씨가 피아노를 계속하고 싶어한다고 주인 어르신께 말씀드려보는 건 어떨까요?”
“그건 안돼. 주인 어르신 성격에 아가씨가 하고 싶다고 하시면 극성을 부려서 오히려 아가씨가 부담스럽게 느낄 게 분명해.”
“맞아, 주인 어르신은 그냥 모르는 게 도와주시는 거야.”

동생 사랑이 지극하다 못해 민폐의 영역에 도달한 에류엘의 총수 리드미르는 모르는 게 약이다. 회장님만 모르는 아가씨의 작고 소박한 외도는 계속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