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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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2. 생애[편집]


1923년 2월 24일에 태어났다. 출생지는 평안북도 자성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전사한 김일성 빨치산 부대원이라 어려서 노동을 했고, 덕분에 해방 후 만경대혁명학원, 김일성종합대학을 거쳐 모스크바 대학으로 유학했다고 한다.

귀국 후 1958년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에 배치, 1965년 조직지도부 부부장까지 임명되었다. 이때 일을 잘 했던 모양인지 나중에 부고에 당의 규률을 강화했다고 언급되었다. 1967년 자강도 책임비서에 임명되어 지방당직을 맡았다. 1969년 즈음에 물러난 것으로 보이며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법안심의위원에 선출되었다. 1973년에 다시 자강도 책임비서에 임명되었으나 1977년에 자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1978년에 다시 자강도 책임비서로 복귀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1년 함경북도 책임비서로 옮겼으나 1984년에 다시 자강도 책임비서로 돌아왔다.

1990년, 9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 및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92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20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으로 선거되었고, 이에 따라 연형묵에게 자강도 책임비서 및 인민위원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인민위원장에서 조동됨에 따라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5차 회의에서 강성산과 함께 중앙인민위원에서 해임되었다.

하지만 검열위원장 재임 중이던 1993년 11월 9일 19시에 장기질환으로 인하여 70세를 일기로 죽었다. 당중앙위원회와 중앙위원회 검열위원회는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일찍부터 로동생활을 시작한 동지는 당과 수령의 품속에서 유능한 당일군으로 자라나 중앙과 지방 당조직의 책임적인 직위에서 당대렬을 튼튼히 꾸리며 혁명과 건설에 대한 당적지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바쳤다. 동지는 당이 제시한 주체적인 당사업방침을 받들고 당의 규률을 강화하며 당대렬의 사상의지적 통일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사업하였다."라고 발표했다. 그가 죽은 후 검열위원장은 박용석이 물려받는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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