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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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李錫

북한의 정치인, 조선 테크노크라트.

2. 생애[편집]


1928~1929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 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1982년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80년대 초에 청진조선소 지배인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1985년 2월, 청진시 책임비서 겸 정치국 후보위원인 강희원이 철산봉청년호 진수식에 참여했을 때 그가 관계일군으로 언급되었다.

1984년 7월 6일부터 9일 사이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6기 9중전회에서 당중앙검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86년 12월 27일 조선로동당 6기 12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그리고 12월 29일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8기 1차 회의에서 정무원 선박공업부장으로 전격 발탁되었다.[1] 1988년 3월 7일부터 11일까지 열린 조선로동당 6기 13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90년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선박공업부장에 유임되었다. 1992년, 김일성의 팔순을 기념하여 여러 대형선박을 건조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김일성 말년에 화물선 100척을 건조하란 지시를 받았는데, 이를 수행하지 못하여 1994년 7월 6일 경제부문책임일꾼협의회에서 김일성이 리석을 크게 질책하였으나 이틀 후에 김일성이 요단강을 건너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김일성 장의위원에 위촉되었으며 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오진우 장의위원에도 위촉되었다.

1996년 7월 13일 오후 8시 20분에 68세를 일기로 병환으로 사망하였다. 로동신문은 7월 15일자 신문에 중앙위원회와 정무원 명의의 부고를 게재하면서 "리석동지는 당과 수령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사회주의건설을 다그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 동지는 다년간 선박공업부문의 기업소와 국가경제기관의 책임적인 직위에서 서압하면서 자립적 민족경제의 토대를 튼튼히 다지며 인민생활을 높이는데 적극 이바지하였다."라고 그를 칭송하였다. 그가 무려 10년간 몸담아온 선박공업부는 그가 죽기 직전에 폐지되었고, 따라서 마지막 선박공업부장으로 남았다가 21년이 지나 2019년에 선박공업성이 부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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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적으로 선박공업부가 1986년 12월 8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있는데 북한 언론보도를 보면 1986년 1월에 이미 선박공업부가 언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