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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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로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前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리영호
李英浩|Ri Yong-ho


파일:정치국 상무위원 리영호.jpg

출생
1942년 10월 5일 (생존 중일 경우 81세)[1]
일본령 조선 강원도 통천군
국적
[[북한|

북한
display: none; display: 북한"
행정구
]]

최종 계급
차수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1. 개요
2. 생애
2.1. 숙청
3. 경력
4. 여담



1. 개요[편집]


북한의 군인, 정치인.

2. 생애[편집]


1942년 10월 5일 북한 강원도 통천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빨치산 리봉수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리봉수는 88여단과 함께 소련에 있었으므로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인데 북한에서 고향을 조작했거나 리봉수의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1959년 8월에 조선인민군에 입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으로 진학하여 군관이 되었으며, 사단 참모장, 군단 작전부장, 훈련소 참모장, 총참모부 작전국 부국장, 부총참모장, 훈련소장 등 주요 요직들을 역임했으나 남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2002년 4월 14일, 최고사령관 명령 제00152호에 따라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2003년 8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2009년 2월 11일, 당중앙군사위원회와 국방위원회 공동결정에 따라 김격식의 후임 총참모장에 전격 임명, 김정일의 현지지도를 자주 수행하면서 권부 핵심층으로 진입하게 된다. 2009년 3월,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재선되었다. 2010년 9월 27일 국방위원회 결정 07호에 따라 조선인민군 차수로 진급,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면서 김정은 체제를 떠받들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발탁된다.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 2011년 1월, 박정순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11년 12월, 김정일 장의위원에도 위촉, 김정일 장례식에서 김정은과 함께 관을 운구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정은의 측근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2012년 2월 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2193호에 따라 김정일훈장의 초대수훈자로 선정되었다.


2.1. 숙청[편집]


김정일 사후에도 한동안 여러 행사를 다녔으며 군사대표단장으로 라오스를 다녀오기도 하였으나, 2012년 7월 15일 정치국 회의에서 '신병관계'를 이유로 모든 직무에서 해임당하고 실종되었다. 북한에서도 소문만 돌고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최소한 출당과 지방추방 이상으로 정치적 재기는 불가능한 정도의 처분을 받은것으로 본다. 2012년 11월 25일 저녁에는 중국의 신화통신과 인민일보에서 리영호가 10월경 당에서 처벌을 받았다고 보도했지만, 26일 아침에 기사를 싹 내려버렸다. 기사 삭제 조치에 대해서 중국과 북한 모두 일체의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어서, 북한 측의 항의로 내린 것인지 오보라서 내린 것인지는 확실치 않은 상황이다. 관련기사

북한 역사상 숙청을 할때 최악의 케이스가 모스크바 재판식으로 아예 공개재판을 해서 조리를 돌린 다음에 처참하게 죽이는 것인데, 지금까지 이걸 당한건 박헌영장성택 둘 밖에 없다. 그 다음이 반당종파분자라고 선포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거나 혁명화시켜서 일반 노동자로 굴리는 것인데 이는 8월 종파사건 가담자들, 갑산파, 허봉학, 김창봉 일파 등이다.[2] 여기보다 한단계 낮은 단계의 숙청이 돌연 모든 직무에서 해임시키지만 그 구체적인 이유는 고령, 질병을 핑계대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트의 해임에 대해서 보도하는 것에 대단히 인색한 북한에서 갑자기 공개적으로 정치국 회의나 주권기관의 정령을 통해서 고위급 인물을 해임했다고 보도하는 것 자체가 이 사람에게 대단히 큰 잘못이 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리영호가 딱 그 케이스인 것이다.[3] 리영호 이전에 이런 케이스에 해당하는 사람으론 김일성 시대에는 정무원 총리 리근모, 김정일 시대에는 인민무력부장 김일철, 인민보안부장 주상성이 있었다.[4] 리영호가 만약에 그 밑 단계인 혁명화로 광산이나 협동농장 벌목공장 같은곳으로 추방당했다면 복귀의 여지는 있지만 현재까지 수년이 지난 가운데 어떠한 소식도 들려오지 않기 때문에 최소 출당이상의 강한 처벌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리영호의 경우 북한 매체에서 기록삭제가 진행되었으며 2023년 현재에도 북한 매체에서 절대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처형, 숙청설이 나오는 현영철, 김원홍의 사진이 지금도 잘만 나오는 것에 비하면 큰 차이다.

명확한 숙청사유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가설만이 무성한 상태다. 권력 구도를 이유로 드는 설에서는 경제 건설을 우선하는 온건파인 장성택과 관료 출신 최룡해와의 파워 게임에서 밀려난 것이 원인이라고 본다.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한에서 경제 개발보다는 군비 증강을 주장하는 군부의 입김을 줄일 필요가 있어 그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그가 수령체제 하에서 맹목적인 충성만 한 게 아니라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인증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

일설에 따르면 김정은은 자신들의 측근들을 비밀리에 도청하고 있었는데, 리영호가 자신이 도청 대상이라는 것을 몰라 숙청당했다고 한다. 김정은이 어느 날 측근과의 대화에서 '개방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하자 리영호는 면전에서는 반대하지 못하고 김정은이 없는 곳에서 김정은의 뒷담화를 깠다고 한다. 내용인 즉 "자기 아버지는 바깥 세상을 몰라서 개방을 안 한 줄 아느냐. 우리 현실에서 개방하면 공화국이 어떻게 될 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결국 이게 도청되었고 리영호는 숙청되었다는 이야기다. # 켄 고스의 책에 따르면, 2012년 7월 정치국 회의에서 장성택이 대대적인 경제개혁안을 브리핑하자 리영호가 사회주의의 기치를 버리는 반역이라고 언성을 높이며 어떤 미친놈이 이따위 계획을 내놓았냐고 소리쳤는데, 장성택이 이건 김정은동지께서 직접 챙기시고 비준한 정책인데 이 새끼가 돌았냐는 식으로 반격을 했고, 김정은이 그 자리에서 리영호의 견장을 뜯어버리면서 나를 믿지 못하는 자들과는 혁명을 할 수 없다고 일갈하고 그를 체포하게 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설은 탈북 외교관으로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이었던 고영환이 제시한 설로, 리영호가 부대 이동 계획을 결재 받으면서 차후에 부대가 실제로 이동할 때 또 한 번 결재를 받았어야 하는데 이러한 절차를 암묵적으로 생략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호위사령부에서 이동하며 김정은에게 직접 보고하는 일이 생겼고, 이 사실을 몰랐던 김정은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군대가 움직였다는 사실에 노발대발해서 실무자를 해임시켰으나, 나중에 원인을 조사해보니 리영호가 보고를 누락하고 있었던 것이 탄로났다. 이에 경고를 주는 의미에서 김일성고급당학교로 연수를 보냈으나, 거기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왜 왔냐고 물어보자 "나도 모른다"는 식으로 불만스럽게 대답한 것이 문제가 되어 숙청되었다고 한다.[5] 사실 당학교 연수는 문책 가운데서는 가장 가벼운 징계인데, 처신의 달인으로 60년간 혁명화 한 번 간 적 없는 김영남이 여기서 6개월 연수한게 전부일 정도. 숙청 축에도 못들고, 나중에 다시 쓸 생각이라도 죄책이 어느 정도 있기만 하면 연수가 아니라 혁명화가 기본이기 때문이다. 다만 현직에서 물러나기 때문에 말이 연수지 직급만 남는 직위해제가 따라오기는 한다. 이 설은 후계자로 갑툭튀한 김정은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과민반응을 많이 하던 초기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다. 장성택의 숙청에 대해서도 장성택이 과거 김정일 시기에 김정일과 상의해서 그의 결정을 번복했던 사레를 생각하며 김정은의 지시 상황을 되돌려보겠다고 부하들에게 말한 것이 김정은이 장성택이 자신에게 공개적으로 개긴 것으로 받아들여서 숙청했다는 오해설 주장이 있다.

NHK에서 방송한 다큐에 따르면, 리영호가 김정은의 허가 없이 군퍼레이드에 참여한 부대를 움직여서 숙청당했다고도 한다. 장성택 일당이 리영호의 집을 급습해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설도 있다. 이 과정에서 20여명이 사망하고 리영호도 부상을 입거나 죽었다고도 하는데 근거는 없는 가설이다. 어째서인지 장성택 처형 때에는 언론에서 이것을 정설처럼 말했다.

어찌되었든 모종의 원인으로 숙청된 리영호는 이후 북한에서 모든 기록이 말살되어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은 관료가 되었다.[6] 이러한 조치가 취해진 것으로 보아서는, 단순한 실각이 아니라 정말로 모종의 중대한 죄를 범해서 숙청된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추가적인 소식이 들려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가 전체가 쥐도새도 모르게 몰살당했을 가능성이 확실시되고 있다.

다만 다니엘 튜더와 제임스 피어슨이 쓴 'North Korea Confidential'에서는 리영호가 죽지는 않고 유배당했다고 언급된다. 명예는 보존해 주고, 시골에 삐까번쩍한 저택도 지어줬지만 거기서 나올 수 없다고.[7] 이처럼 북한 고위층 관련 내용들이 다 그렇지만 출처에 따라 내용이 다 판이하게 다르다보니 실각했다는 사실 외에는 믿을 만한 내용이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는 통일 후가 되어야 알 수 있을 듯하다.

주성하 기자의 최신 보도에 따르면 마약 히로뽕에 빠져 숙청 당했다고 한다. 기사 단, 죽지는 않고 좌천 당했다고.

3. 경력[편집]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2009년 2월 11일
2012년 7월 15일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공동결정으로 임명
정치국 회의에서 숙청
조선로동당 6기 정치국 상무위원
2010년 9월 28일
2012년 7월 15일
3차 당대표자회에서 선거
정치국 회의에서 숙청
조선로동당 6기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2010년 9월 28일
2012년 7월 15일
3차 당대표자회에서 선거
정치국 회의에서 숙청

4. 여담[편집]


  • 김일성 시대에 해군사령관, 주중 북한 대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리영호와는 동명이인이다.


  • 외무상을 지낸 리용호와도 다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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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2년 숙청된 이후의 행적 알 수 없음.[2] 이 단계까지도 억세게 운이 좋으면 살아나서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도 있다. 최광의 경우가 그렇다.[3] 여담으로 이것보다 낮은 단계라고 한다면 해임을 굳이 보도하지 않고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경우에 해당한다. 부주석 김동규, 선전선동부장 김창만, 박정애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꼭 죄가 더 낮다고 할 순 없다. 공개적으로 숙청하거나 죽이기엔 부담스러웠을 뿐일 수도 있으니까.[4] 다만 리근모는 복권되어서 함북 책임비서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이후 죽었는지 살았는지 역시 알려진 것이 없다. 주상성도 이후 복권되어 다시 공개석상에 나왔다.[5] 이 말이 사실이라면 리영호가 어벙하게 내가 여기에 왜 있지~?라고 했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난 죄가 없는데 김정은이 실무도 모르는 주제에 뭣도 모르고 애먼 나를 잡았다는 식으로 불평한 셈이 된다.[6] 가령 보도에서 언급이 되어야 할 때 익명으로 넘어간다든지 아니면 김정은과 찍은 사진이 더이상 공식적인 출판물에서 나오지 않는다든지.[7] 참고로 다니엘 튜더는 한국 맥주가 대동강 맥주보다 맛없다는 인터뷰를 해서 한국 대중에게 알려진 인물인데, 이 책에서도 북한이 한국보다 잘하는 유일한 것이 맥주 만드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