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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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장의위원회 구성
4. 여담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2. 생애[편집]


1904년 7월 17일 함경남도 단천군의 빈농 집안에서 출생했다. 1922년부터 단천군 소학교 교원으로 일했는데,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활동에 고무되어 반일 활동을 전개했으며 이 때문에 1931년에 체포되어 1937년까지 7년간 투옥되었다. 해방 이후 북조선인민위원회에 기용되어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총무부장로 일하게 되었다. 1945년 9월에 김일성과 만났으며 김일성이 그에게 그간 고생 많았다면서 같이 새 조국을 건설하자고 제안하였다고 한다. 1948년 2차 당대회에서 검사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1947년 3월, 평안남도 인민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성냥생산 목표를 달성하라는 김일성의 지시를 수행하여 칭찬을 들었다 카더라. 1948년 8월, 주소 북한 무역대표, 1950년 1월부터 초대 주중 북한 대사를 지냈다. 1951년 11월 13일, 후임 대사 권오직에게 자리를 맡기고 귀국 후 상업성 부상에 임명되었다가 1952년 10월 즈음에 상업상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6.25 이후 전후복구 3개년 계획이 진행될 때, 중공업 노선을 열렬히 주장하면서 경공업 노선을 주장하는 '종파분자'들을 호되게 꾸짖었다고 하는데, 사실 김일성도 이 시점에서는 바늘도 제대로 생산 못하는 북한 상황상 경공업이 필요한 걸 어느 정도 인정한 상황이라서 이 부분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정준택, 강영창 등이 국내파 테크노크라트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중공업 지지론자였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1954년 3월 23일, 3월 전원회의 결정에 따라 윤공흠에게 상업상 자리를 물려주었다.

1954년 11월 18일, 최창익의 뒤를 이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재정상에 임명되었으며 1956년 3차 당대회에서 검사위원장에 재선되었다. 1956년 9월, 최용건, 림해, 하앙천과 함께 중국공산당 8차 당대회에 조선로동당 대표단원으로 참석했지만 마오쩌둥으로부터 심각한 비판을 들어야 했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재정상에 재임명되었다.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 검사위원장에서 해임, 중앙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다. 3월 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박의완이 부수상에서 경질되자 후임 부수상에 임명된다. 이후 한달간 재정상을 겸임하다가 4월 24일 재정상에서 해임되어 송봉욱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58년 9월 7일, 김일, 박정애, 김달현, 정준택, 김익선, 홍명희, 박금철, 림해, 하앙천, 정일룡, 김창만, 리효순, 한상두, 남일, 홍기황, 김광협, 리종옥과 함께 북한 건국 10주년 기념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58년 9월 16일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숙청당한 주황섭을 대신하여 수산상에 임명되었으며, 부상으로 황중업이 임명되었다. 1958년 10월, 중국에 파견되는 대표단장에 임명되어 중국을 방문하였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0년 8월 9일, 림해가 농업상으로 이동함에 따라 무역상을 겸하게 되었으며 수산상은 최용진에게 물려준 것으로 보인다. 1960년 10월에도 중국에 대표단장에 파견되어 국무원 부총리 리셴녠과 회담하였다. 1961년 11월 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무역상 자리를 리일경에게 물려주었다.

1961년 쿠바, 인도네시아, 버마를 방문하였다.1961년 4차 당대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62년 3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내각 부수상에 재선되었다. 1962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12차 당대회에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참석하였으나 이때 소련을 수정주의로 비난하고 중국을 칭송하는 연설을 한 것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체코의 외교적 항의에 리주연은 중국과 소련 두 나라 사이에 끼인 북한은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편들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4년 4월 27일, 리일경이 숙청되면서 다시 후임 무역상에 임명되었다. 1964년 6월, 4기 9중전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으며 1965년 8월, 강영창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6년 6월, 소련에 파견되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회담하였으며 10월에는 버마에 가서 네윈을 만났다. 1967년 4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다시 내각 부수상에 임명되었다. 7월에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7차 당대회에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파견되었다.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68년 12월, 조소 경제 및 과학기술협의회 3차 회의에 참석, 알렉세이 코시긴 수상과 회담하였다. 이렇게 잘 나가던 리주연이었으나 1969년 2월 12일, 폐결핵으로 옥사한 통혁당 전라남도 위원장 최영도의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한 것을 마지막으로 병환으로 쓰러져 두문불출했다. 그가 병석에 있을때 김일성이 문병도 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9년 8월 20일에 병환으로 사망하였다. 8월 22일에 로동신문을 통해 부고가 발표되었으며 김일성이 직접 장의위원장을 맡는 등 후한 대접을 받았다. 소련에서도 내각 명의로 조전을 보내왔다. 이후 애국렬사릉이 조성되자 시신이 그곳에 안치되었다.

김일성은 1970년 11월 2일, 5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계림, 김경석, 강진건, 강영창, 김은순, 리봉수, 김갑순, 김태근, 안룡각, 강상호, 김원빈과 함께 리주연을 '당에 끝없이 충실하였으며 혁명을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한 동지'로 언급하였다.

김정은 시대에서 그의 생애를 칭송하는 선전물이 나오는 등 여전히 김일성 시대의 대표적 충신으로 대접받고 있다.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 운동을 했거나 조국광복회 쪽으로 간접적으로 연계된 계열(갑산파)도 아닌 국내 토착 공산주의자 계열에 속했는데도[1] 처음부터 김일성을 지지하며 충성한 경우로 비슷한 인물로는 김용범-박정애 부부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대단히 충신으로 떠받들어지진 않는다.


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4. 여담[편집]


  • 국수에 환장을 했다고 했는데, 김일성이 그것 때문에 소련에 무역대표로 나가 있는 리주연에게 생일선물로 국수분틀까지 보내줬다고 한다.

  • 딸 리연미가 있는데, 현재도 생존하여 북한 선전물에 등장하곤 한다.

  • 영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프랑스어까지 공부했다고 한다. 일요일마다 과외교사를 불러내서 열심히 외국어를 공부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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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남로당계로는 볼 수 없는데 애초에 활동 지역이 북쪽(함경도)이었고 박헌영 계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