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쭝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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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초대 부총통
리쭝런
李宗仁(이종인) | Lǐ Zōngrén


출생
1890년 8월 13일
청나라 광서성 계림[1]
사망
1969년 1월 30일 (향년 78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재임기간
초대 부총통[2]
1948년 5월 20일 ~ 1954년 3월 10일
학력
광서육군소학당 3기 졸업
소속 정당

[3]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4. 초공작전과 양광사변
2.6. 국공내전과 미국 망명
2.7. 중공 합류와 말년
3. 주요 경력
4. 매체에서
5. 참고문헌
5.1. 저서
5.2. 논문
6. 관련문서



1. 개요[편집]


파일:대행총통이종인.jpg

광시성 구이린(계림) 출신의 군벌. 국민혁명, 반장전쟁, 중일전쟁에 참전했다. 전후 중화민국 부총통, 중화민국 총통 대행을 역임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이력[편집]


1890년 광서성 계림 임계현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10여년 간 전통학문을 공부하다가 1907년 광서 육군소학당 2기 생도 모집에 응시하여 1,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수석입학을 하였으나 등록기한이 10분 늦었다는 이유로 입학이 취소되었다. 하는 수 없이 1908년 3기에 응시했지만 그때는 응모자가 3배로 늘어 무려 3,000명과 경쟁을 벌여야 했는데 이때도 합격에 성공했다. 육군소학당 졸업 후 바오딩 군관학교를 거쳐 루룽팅 휘하의 임호의 부대에 입대하였다. 1910년 중국 동맹회에 가입하였다. 1916년 운남군, 광서군에서 복무하면서 영장, 통령, 로군 사령관 등을 역임하며 호법전쟁에 참여, 호남 전선에서 복무했다. 원래 구 계계군벌 루룽팅 휘하에 있었으나 1920년 루룽팅이 광동군벌 천중밍에게 패배하여 광동에서 쫓겨나고 1921년 광동의 2차 군정부를 공격했다가 다시 패배하여 타격을 입자 황소횡, 바이충시와 합작하여 1922년 광서자치군 제2로 총사령관을 자칭하고 독립하여 신계계 파벌을 조직, 심홍영, 루룽팅에 맞서 광서의 대권을 노렸다.

1923년 10월 중국국민당에 가입, 이 시점에서 광서성의 삼대 세력 중 하나로 떠올랐고 먼저 심홍영과 연합하고 루룽팅 세력을 축출했으며 이후 심홍영까지 몰아내면서 광서의 최대 실력자가 되었다. 1924년 11월 광저우 대본영 대원수 대리 후한민으로부터 광서전성수정독판 겸 광서육군 1군장으로 임명되어 광서정계군을 조직했다. 1925년 말, 광서를 노리고 쳐들어 온 전계군벌 탕지야오를 격퇴하고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심홍영, 루룽팅의 잔여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여 광서성을 장악, 자치, 자족, 자위를 구호로 삼고 공업 장려, 교육 발전, 범죄 소탕, 징병제 실시, 탐관오리 척결 등의 정책을 시행해 광서성의 정치개혁과 경제건설에 착수하고 독일인 군사고문들을 청해 광서군을 훈련시키는 등 개혁적인 군벌로 평가되었지만 광서성에서 양복 착용을 금지하는 등 일부 반동적인 정책도 행했다.

1925년 7월 1일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수립되고 성정부 조직법이 제정되자 이에 따라 광서성 정부를 조직하여 완전히 국민정부 산하에 들어갔다. 1926년 3월, 산하의 광서군을 국민혁명군 제7군으로 개편하여 국민혁명군 7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2.2. 국민혁명[편집]


파일:이장백.jpg
북벌 도중 리쭝런, 장제스, 바이충시

1926년 7월,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당의 대권을 차지한 장제스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자 7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4군 군장 리지선과 함께 8군 군장 겸 전적총지휘 탕성즈를 원조하여 호남으로 진격했다. 우한 삼진이 함락된 이후에 강서성으로 진격했으나 군비 문제로 장제스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고[4] 1927년 1월 1일에 개최된 난창 군무선후회의에서 장제스와 군비 문제로 다투기도 했다. 절강성 진공이 시작된 이후 장제스가 직접 지휘하는 중로군 산하 강좌군의 총지휘를 맡아 상하이로 진격했다.

상하이 함락 이후 우한 국민정부로부터 안휘성 정부주석에 임명되어 국민당 좌파의 회유를 받았다. 3월 말 장제스가 청당을 위해 거사가 필요하다는 의사를 타진하자 처음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4군 군장 리지선이 장제스를 적극 지지하였고 결국 장제스의 지시로 7군 주력부대를 이용하여 난징의 2군과 6군을 난징에서 축출하고 난징의 공산당원들을 체포, 수비군을 무장해제시키고 4.12 상하이 쿠데타에 참여,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하는데 동참했다. 이후 탕성즈 등이 난징을 공격하려 하자 서정토공을 외치며 이들과 대치했으나 양 국민정부가 모두 북벌에 나서면서 일단 북양군벌들을 상대하게 되었고 국공결렬 이후 후한민, 장제스 등과 함께 우한 국민정부에 2기 4중전회를 개최하여 평화적으로 분열을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1927년 8월, 쑨촨팡탕성즈, 장파쿠이 등의 공격을 동시에 받은 장제스가 위기에 처하자 장제스의 우한 공격 명령을 거부하고 답은 하야 밖에 없다고 장제스를 압박하여 하야하게 한후 우한 측과 영한합작을 논했다. 쑨촨팡이 난징 점령을 시도하자 허잉친과 함께 4월 30일, 이들을 크게 격퇴하였고 8월의 용담전역에서 승리하여 영향력이 크게 성장함으로 난징 국민정부의 실세가 되었다. 9월 15일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가 설립되자 탄옌카이, 쑨커, 장췬, 셰츠 등과 함께 이를 주도하고 국민당의 통합을 꾀했으나 이 과정에서 우한 정치분회를 중심으로 난징 합류를 거부하던 탕성즈가 무단으로 안휘성을 점령하고 휘하의 허젠을 안휘성 주석으로 삼자 긴급회의 끝에 토벌을 결정, 1927년 10월 당계전쟁을 일으켜 탕성즈를 몰아내고 호남과 호북을 장악하여 우한 정치분회 주석, 제4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장제스와 군비 문제라거나 여러 불화가 있었기 때문에 1927년 11월, 장제스가 일본 외유를 떠나 장제스-다나카 회담을 개최하자 일본의 힘을 빌려 자신들을 토벌하려는 것이 틀림없다고 여길 정도였고 장제스가 복귀하는 과정에서 장황사변, 광저우 폭동에 연루된 광동파를 감싸는 모습에 크게 불만을 품었으나 이미 장제스의 복귀는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에 서산회의파와 결렬하고 다시 장제스를 지지하여 장제스의 우위를 인정했다. 1928년 4월,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선포되자 다시 북벌에 참여했다.

베이징 함락 이후 사실상 북벌이 완성되자 1928년 6월 27일, 우한에서 베이핑으로 북상 중이던 장제스와 회담하여 재병에 관해 논의했고 장제스가 본격적으로 재병론을 내세우자 표면적으로는 찬성했으나 속으로는 불만을 품었다. 7월 6일, 장제스의 주재로 펑위샹, 옌시산 등과 함께 베이핑에서 탕산회의를 개최, 편견회의에 대해 합의했고 1928년 8월 1일, 난징에서 열릴 예정인 오중전회 참석을 위해 난징에 도착하여 오중전회에 출석했다. 여기서 정치분회 해체가 논제로 오르자 노골적으로 반대하였으나 결국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상하이로 떠나 우징헝, 장런제 등과 회동했다. 1928년 9월 18일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가 개최되자 후한민, 차이위안페이, 리스쩡, 다이지타오, 쑹쯔원 등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여 중화민국국민정부조직법, 중화민국당훈정요강 등을 의결통과시켰다. 1928년 10월 8일 중국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가 발표한 국민정부 조직법에 따라 국민정부 위원에 선출, 10월 18일에 군사참의원 주석에 임명되었다.[5]

2.3. 반장전쟁[편집]


1929년 1월 1일 편견회의가 시작되자 편견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월 5일 1차 대회에서 경리 심사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어 1월 22일의 5차 대회에서 편견위원회 상무위원 겸 편견위원회 조직부 주임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월 25일 6차 대회에서 육군군관학교가 위원제로 개편되자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리지선, 허잉친, 우징헝, 다이지타오와 함께 교무위원에 선정되었다. 하지만 편견회의가 종결되고 난 이후 편견실시를 위한 상무회의는 2월 8일에 열린 2차 회의까지만 참석하고 2월 21일 난징을 떠나 상하이로 가면서 호남성 주석 루디핑을 무단 해임하고 허젠을 신임 호남성 정부주석으로 임명하는 호남 사건을 일으켜 반기를 들었다.

장제스가 유화책을 제시하면서 리쭝런은 초기에 정치분회의 폐지를 포함한 중앙의 조치에 복종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냈으나 상하이에서 장제스가 중앙의 위신을 위해 잘못을 시인하고 탄옌카이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하자 자신의 조치엔 조금도 잘못이 없다고 맞섰다. 장제스는 리쭝런에게 난징으로 돌아와 사태를 해결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리쭝런의 조사를 면제해주었으나 결국 3월 26일 바이충시, 리지선 등과 함께 리쭝런에 대한 면직, 조사 처분 및 광서파에 대한 토벌령이 내려져 1차 장계전쟁이 일어났다. 리쭝런은 패배하여 호남을 잃고 5월에 광서까지 밀렸다. 리쭝런은 바이충시, 황샤오훙과 함께 호당구국군을 선포, 결국 중앙군에 대패하여 영국령 홍콩으로 달아났고 3전대회는 리쭝런과 바이충시의 당적을 박탈했다.

리쭝런의 잔여세력은 장파쿠이와 합세해 2차 장계전쟁을 일으켰다가 허잉친에게 진압당했다. 하지만 리쭝런은 포기하지 않고 1930년 2월 21일 황샤오훙, 바이충시, 장파쿠이, 호종탁 등과 연명으로 장제스의 하야와 옌시산의 전국 육해공 총사령 취임을 요구하면서 중원대전에 참여했다. 1930년 3월 15일 리쭝런은 펑위샹과 함께 육해공 부사령관에 추대, 3월 21일에 취임했다. 리쭝런은 바이충시, 장파쿠이의 병력을 규합하여 광서성에서 봉기, 호남으로 진군하여 형양, 장사, 악주를 차례로 점령하고 우한을 위협했으나 호남성 정부주석 자리를 놓고 다투는 사이 훈련총감 겸 우한 행영주임 허잉친이 8로군과 4로군을 지휘하여 이들을 격퇴했다.

1930년 9월 15일 베이핑 국민정부가 수립되자 옌시산, 펑위샹, 왕징웨이, 탕사오이, 장쉐량, 셰츠 등 7인과 함께 정부위원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북방의 옌시산, 펑위샹의 군세 역시 장쉐량이 중앙옹호를 통전하고 관내로 진출하면서 토벌당했고 11월 베이핑 국민정부가 취소되고 펑위샹과 옌시산 모두 하야 후 도주하면서 반장전쟁은 반장파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이후 난징 국민정부로부터 바이충시와 함께 영구 제명을 당했다.


2.4. 초공작전과 양광사변[편집]


하지만 1931년 2월, 장제스가 입법원장 후한민을 감금시킨 탕산 사건을 계기로 기존에 장제스를 지지하던 광동파들이 대거 반장파에 가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5월 3일 광동의 실력자 천지탕이 장제스의 탄핵을 요구하는 반장통전을 발표하자 광동파의 전에 없는 결집을 보고 놀라고 있던 리쭝런은 5월 11일, 천지탕에 호응하여 장제스 탄핵을 요구했다. 5월 27일, 서산파, 개조파 등의 반장파들이 광저우에 집결하여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 장제스 토벌을 선포하여 1차 양광사변이 발생하자 6월 2일 광저우 국민정부 산하 4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호남성 정부주석 허젠에게 호남성 주석 자리를 보장할 테니 광저우 국민정부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지만 허젠은 거부하고 중앙에 복종했다.

1931년 9월, 광저우 국민정부군이 북상했으나 호남 전선에서 회군해버렸다. 부로가 며칠 후인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여 거국적인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난징으로 진격하여 광저우 국민정부가 초공과 항일을 영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쑨커와 왕징웨이 모두 그렇게 하면 국민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왕징웨이와 함께 장제스의 하야를 강경하게 요구하여 장제스가 "왜구들에게는 사사건건 양보하고 비위를 맞추면서 안으로는 고압적 자세를 취한다"라고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결국 12월 25일 장제스가 하야하면서 12월 28일에 열린 4기 1중전회에서 국민당 중앙감찰위원, 서남정무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파일:이종인과장개석.jpg
1936년 9월 17일, 광저우에서 장제스에게 경례하는 리쭝런

이후 4기 1중전회의 결정에 따라 양광 지역에 중앙집행위원회 서남집행부, 서남정무위원회, 군사위원회 서남분회를 설치하여 광서지역에서 반독립적인 지위를 누렸으며 1933년 복건사변이 일어나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제5차 초공작전이 일어난 이후 1934년 6월 허젠이 찾아와 호남에 10개의 비행장을 건설하여 적극적으로 초공작전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에 동의하였다. 1934년 홍군이 대장정에 오르자 상강에서 홍군을 공격해 극심한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그의 광서왕 놀이도 슬슬 끝물에 이르렀다. 1932년 1월 장왕합작으로 권력에 복직한 장제스는 서남정치분회 취소, 화폐개혁, 광서군벌의 주 수입원인 아편 단속을 통해 차차 광서군벌을 압박했고 1936년 5월, 양광지역의 정신적 지주인 후한민이 사망하자 리쭝런은 장제스가 자신들을 토벌할 것이라 여겨 6월, 월계군벌 천지탕과 힘을 합쳐 2차 양광사변을 일으켜 항일을 구실로 호남에 출병하여 장제스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켰지만 천지탕은 부하들의 배신으로 순식간에 몰락했고 9월에 협상을 통해 장제스에게 항복하고 광서의 통치권을 보장받았다.

그해 12월, 서안 사건이 터졌을 때는 공산당 토벌을 주장하는 강경파였다.

2.5. 중일전쟁[편집]


파일:attachment/Lizhongren.jpg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제2차 상하이 사변으로 인하여 전화가 화중, 화남으로 번지자 장제스에게 항전 논의를 위하여 난징으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룽윈, 류샹 등은 이것이 장제스가 항일을 구실로 각 지방을 장악하려는 술수라고 여겨 리쭝런에게 가지 말라고 청했으나 장제스가 독일식 정예부대인 87, 88사단을 비롯한 중앙군 30만명을 투입하는 등 항전에 성의를 보이자 10월 13일, 장제스와 회담, 장제스의 항일 의지를 믿고 복종하게 되었다. 1938년 1월 15일, 옌시산, 펑위샹, 리지선, 청첸, 천사오콴과 함께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진포철로를 수비하기 위한 5전구가 설치되자 5전구 사령관에 취임하였고 30개 보병사단 및 여단을 지휘하였다. 1월 23일 군사위원회는 리쭝런에게 "진포로 남단 전방으로 전진하는 적에 대해 반드시 쉬저우, 방부 두 지역을 고수해야 한다. 명령 없이는 철수해서는 안된다."는 작전방침을 하달하며 병력을 증원해주었고 2월 3일 "전구는 진포 남당의 적과 결전을 취하여 회하 인마지역에서 적을 저지한다. 그 측방에서 지속적으로 타격하여 점차 추출하여 적을 소탕하고, 동시에 노남 산지를 견고히 한다. 진포 북단 및 농해 동단에 대해서는 측면에서 공세를 취하여 적의 남하나 서쪽 방면으로 진출을 견제함으로써 쉬저우를 지킨다."는 추가 명령을 하달했다.

1938년 3월, 일본군 15만명이 쉬저우 공략을 위해 남하하자 장제스는 탕언보와 쑨롄중을 보내 리쭝런을 지원하게 했고 리쭝런은 분산전략을 취하며 일본에 맞서는 한편 4월 3일에서 4월 6일에 걸쳐 타이얼좡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중일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회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타이얼좡 전투에 고무된 군사위원회는 일본군 주력을 쉬저우로 유인하기 위해 5전구에 64개 사단 및 여단, 총 60만 대군을 집결시켜 일본군을 각개격파하라고 지시했고 5월 12일, 리쭝런은 예하부대에 "전구는 적이 분산된 틈을 이용, 병력을 집중하여 회북의 적을 격파하고 다시 기타 방면으로 병력을 전환시켜 적을 각개격파한다."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일본군은 쉬저우에 중국군 대부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대규모 포위 공격을 감행했으나 5월 15일 군사위원회가 제때 퇴각 명령을 하달함에 따라 5월 16일 리쭝런은 서남 방면으로 포위를 돌파하라고 지시, 5전구의 중국군은 일본군의 포위를 돌파하고 하남, 안휘로 퇴각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우한 북쪽의 대별산맥에 주둔하며 우한 방위전에 참가했으나 10월 21일 우한 포기가 결정됨에 따라 철수하고 환서, 악북, 예남을 방어했다. 1939년 5월, 일본군이 11만 3천명을 동원하여 짜오양을 공격하자 25만명으로 반격, 짜오양을 점령하고 방심한 일본군에게 반격을 감행해 엄청난 피해를 안기고 점령지를 모두 탈환했다.

1939년 동계공세작전이 시작되자 우한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일본군이 1940년 5월 의창 공격을 시도하자 6개 집단군, 13개 군, 50개 사단 35만 대군을 동원하여 치열하게 저항, 일본군이 공세종말점에 이르러 다시 퇴각하는 순간을 노려 탕언보 등을 동원해 반격하여 일본군 3사단을 포위하는 등 활약했으나 일본군 39사단 231보병연대가 가세하면서 결국 크게 패하여 퇴각했다.

1943년 한중 행영주임이 되었으며, 1944년 대륙타통작전이 벌어지자 장파쿠이를 비롯한 대다수 부대가 맥없이 퇴각하는 가운데 그의 예하 부대가 계림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였다. 전쟁 말기에 이르러 미국과 접촉하여 장제스 제거 음모를 꾸미기도 했으나 미 해군이 장제스를 지지하면서 실패했다. 전쟁이 끝난 후 베이핑 행영주임이 되었다.


2.6. 국공내전과 미국 망명[편집]


1947년 11월 15일 국민대회 개막 이후 11월 22일 장제스, 쑨커, 바이충시, 위유런, 후스 등 46명과 함께 주석단에 선출되었다. 1948년 4월 23일 오전의 부총통 후보 선출에서 754표를 얻어 부총통 후보가 되었는데 그 외의 후보로는 쑨커, 위유런, 청첸, 모더후이, 서부림이 있었고 이 중에서 제일 많이 표를 얻은 리쭝런, 쑨커, 청첸 세 사람이 결선투표에 참여했다. 4월 24일, 리쭝런이 1100표, 쑨커가 900표, 청첸이 600표를 얻어 4월 28일 3차 투표를 실시했다. 이때 리쭝런이 1156표, 쑨커가 1040표, 청첸이 515표를 얻어 계속 과반수 득표에 실패했다. 이에 4월 29일의 투표에서 청첸을 제외하고 리쭝런과 쑨커가 결선투표에 들어갔다. 장제스는 쑨커를 부총통으로 지지했으나 미국 대사 레이튼 스튜어트 등이 장제스를 싫어하여 리쭝런을 원조하였고 리쭝런이 내건 정치혁신 구호와 좌우를 가리기 위해서는 입후보 사퇴를 할 수도 있다는 겸손한 자세가 상당한 지지를 얻은 덕분에 4월 29일, 2766표 중 1438표를 얻은 리쭝런이 중화민국 초대 부총통에 당선되어 1948년 5월 20일 취임하였다.

이후 요심전역, 회해전역 등에서 국민정부군이 참패하여 48년 9월에 쉬저우가 함락되고 난징까지 위협당하자 바이충시, 청첸 등과 함께 장제스 하야를 압박하였다. 11월에 웡원하오 내각이 사퇴하였고 계속되는 하야 요구에 장제스는 1948년 12월 31일, 난징의 총통 관저에서 리쭝런, 쑨커 등 당정의 요인 40여명을 소집하여 자신의 하야에 대해 물었고 상당수가 장제스의 하야에 찬성하자 1949년 1월 1일 신년사에 평화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거취를 생각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어 1월 21일 하야하면서 리쭝런이 총통 대행이 되어 중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리쭝런은 중공과의 화의를 주장, 1월 22일 평화회담을 제안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장강을 경계로 천하를 남북으로 분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리지선 등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의 인물들을 초빙하는 한편, 행정원장 쑨커에게 각지의 초비총사령부를 군정장관공서로 개편, 전국의 계엄령 해제, 감란건국총대 폐지, 정치범 석방, 감란에 저촉되어 폐간된 신문, 잡지 발행 허가, 특별 형사법정, 특별형사조례 취소, 특무활동 중지 등을 지시했다.

또한 1월 27일 마오쩌둥에게 담판장소를 정해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2월 1일 자기 자신이 상하이로 가서 간제허우, 옌후이칭, 장사조로 구성된 대표단을 조직해 담판을 시도했으나 중공은 리쭝런에게 전범 처벌, 헌법 폐지, 중화민국 법률 폐지, 민주원칙에 의한 정부군 개편, 관료자본 몰수, 토지제도 개혁, 매국조약 폐기, '반동분자'를 배제한 정치협상회의 소집과 민주연합정부 해체를 비롯하여 무조건 항복에 가까운 조건을 강요하였다. 리쭝런은 2월 1일, 중앙당부를 광저우로 옮기고 2월 5일에 수도를 역시 광저우로 옮겨 난징 함락에 대비하는 한편 중공과의 평화회담에 매달렸다. 3월에 행정원장 쑨커가 사직하자 리쭝런은 허잉친을 신임 행정원장에 임명했으나 베이핑으로 간 대표단들마저 중공에 줄줄이 투항하고 4월 20일 중공군이 장강을 남하하여 난징을 공격하는 등 전황은 악화될 뿐이었다.

결국 4월 22일 리쭝런은 장제스에게 총통 복직을 청했으나 장제스는 거절했다. 이에 리쭝런은 4월 23일 난징을 떠나 광저우로 가면서 군사권의 전권 부여, 대만으로 옮겨간 금, 은, 외화의 환송, 대만으로 옮겨간 무기의 환송, 모든 군사기관은 국방부장에 복종, 국민당의 정책결정권 박탈 등을 장제스에게 제안했으나 장제스는 당연히 이를 따르지 않았다. 5월 24일 상하이가 함락되자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리쭝런의 요청을 묵살했다. 상하이 함락에 책임을 지고 허잉친도 사퇴하고 리쭝런은 쥐정을 새로운 행정원장으로 지명했으나 5월 31일의 투표에서 임명안이 부결되어 다시 옌시산을 행정원장에 임명, 6월 3일 투표에서 임명안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10월에 광저우까지 위험해지면서 리쭝런은 충칭에서 같이 사천 방위에 대해 논하자는 장제스의 제안을 뿌리치고 심해지던 장출혈 치료를 이유로 11월 20일 영국령 홍콩으로 떠나 신병 치료와 미국의 원조를 구하겠다고 미국행을 선언했다. 이에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쥐정 등을 홍콩으로 파견해 리쭝런에게 충칭으로 돌아와 정부를 지휘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리쭝런은 이를 거절하고 미국의 원조를 받아내든 못받아내든 1개월 안에 귀국하여 공산당과 싸우겠다고 공약하고 12월 8일 미국으로 떠나 기독교장로회 병원에 입원했고 퇴원 후에는 뉴저지에 체류했다.

1950년 2월 3일, 국부천대를 단행한 국민대회 대표들은 연명으로 장제스 복직을 요청하였다. 2월 12일, 감찰원은 리쭝런 탄핵안을 가결하고 국민대회에 리쭝런을 탄핵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2월 12일, 국민당 비상위원회는 리쭝런에 조속히 귀국할 것을 청하였고 2월 21일, 3일안에 귀국하지 않으면 리쭝런의 총통대행직을 박탈할 것이며 장제스에게 복직을 청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리쭝런은 따르지 않았다. 리쭝런은 미국에 체류하면서 맹우인 바이충시에게 미국 망명을 권했으나 바이충시는 따르지 않고 대만으로 건너갔다. 1950년 3월 1일 장제스가 권력에 복직하자 장제스에게 전화를 걸어 장제스의 복직은 헌법 49조를 위반한 것으로 부총통이 결위되었을 시에는 행정원장이 대행하며 입법원이 새로운 총통을 선출하는 것이 헌법에 맞는 조치라고 직접 격렬히 항의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의 항의를 묵살했다.

"내가 총통의 직무에 복귀한 것은 국민대회 대표들의 건의에 의한 것이고 각 방면의 간절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군중들의 뜻에 순응하였던 것이다."


미국에서 장제스를 막을 수단은 없었고 1954년 국민대회에서 탐오하고 나라를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또다시 탄핵안이 제출되었다. 1950년에 제출된 탄핵안은 1952년 감찰원 통과 이후 국민대회에서 부결되었으나 이번 탄핵안은 국민대회에서 1468표 중 1403표의 찬성으로 통과됨에 따라 천청에게 부총통 자리를 내주게 되면서 공직을 잃었다.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장제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리쭝런회고록을 집필했는데 현대 중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로 여겨진다. 하지만 한국에 정발된 적은 없으며 현재는 원서로조차 구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한편 이 리쭝런회고록에서 리쭝런은 장제스의 복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장선생의 복직은 결코 나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실상 그는 일찍이 이미 대만의 독재자였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굳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질책을 한 이유는 대리총통의 신분으로서 적어도 반역을 없애야 한다는 나의 입장을 표시함으로써, 국가의 법통을 위하여 일말의 존엄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2.7. 중공 합류와 말년[편집]


미국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던 중 저우언라이의 초청을 받고 1965년 7월 20일, 비행기를 타고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귀환하여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와 베이징 시장 펑전의 환영을 받았다. 이후 마오쩌둥과 회견하였으며 류사오치, 주더, 덩샤오핑, 허샹닝, 쑹칭링 등 당정의 중요 인물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후 혁명열사릉을 참배하고 중국공산당의 업적을 칭송하며 대만 문제에 미국은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여는 등 국공내전 이후 중화민국에 합류하지 않고 외국을 전전하던 국민당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파간다에 활용되었다.[6] 1966년, 같이 귀국하였던 부인 궈더제(郭德洁)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자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중국공산당의 주선으로 27세의 간호사 후여우쑹(胡友松)과 재혼하였으며 이후 베이다이허에서 신혼을 즐겼는데 부부관계는 이때 괜찮은 편이었다.

문화대혁명이 발생한 후에 박해를 받았지만 1966년 국경절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받는 등 심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1968년에 암 진단을 받았고 1969년 1월 30일, 베이징에서 십이지장암으로 사망했다. 사망 직전에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에게 자신을 돌봐준 것에 대한 감사함과 마오쩌둥의 업적에 대해서 아부하는 글을 바쳤다. 2월 1일에 장의식이 거행되었으며, 그의 사망 소식은 1969년 2월 2일인민일보에 게재되었다. 이후 시신은 팔보산 혁명공묘에 매장되었다.

저우언라이가 장례식에 참여하여 타이얼좡의 승리와 중국으로 귀환한 두개의 큰 업적이 있다고 추도하였다. 한편 중화민국 측에서는 리쭝런이 가치가 떨어진 꼭두각시 노릇만 하다가 비참하게 죽었다고 비난했다.

남은 아내 후여우쑹은 베이징에서 추방되어 하방되었다가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에 복권되어 국가 제1역사 당안관에서 일했다.

3. 주요 경력[편집]


중화민국 역대 총통
파일:중화민국 총통부 휘장.svg
1대

총통 대행

총통복귀
장제스

리쭝런
(1949년 1월 21일 ~ 1950년 3월 1일)

장제스

중화민국 역대 부총통
파일:중화민국 총통부 휘장.svg
헌정 실시

1대

2대
리쭝런
(1948년 5월 20일 ~ 1954년 5월 20일)

천청


4. 매체에서[편집]


파일:external/farm3.static.flickr.com/4110873007_9f1078c333_o.jpg
영화 건국대업에 등장한 리쭝런. 중국 배우 왕학기가 분했다. 어찌 생긴건 리쭝런보단 천청과 비슷한 듯 하다. 옆에서 대화하는 인물은 구주퉁이다.

전통적으로 Hearts of Iron 시리즈에 광서 파벌의 지도자로 등장했으며 해당 시리즈의 최신작인 Hearts of Iron IV에서도 광서 파벌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근데 동시에 중화민국 육군 참모진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자기나라의 정치고문이기도 하다.(...) 뭐 국민당의 여러 파벌로 갈려져 있어도 필요에 따라 초파벌적인 내각을 자주 구성한 전례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아주 말이 안되는 건 아니지만 HOI IV 시스템을 고려하면 그냥 고증이 미비했거나 중국 쪽에는 관심이 없었던(...) 모양. 처음에는 아예 초상화 조차 없었다가 나중에 패치로 추가되었다. 이후 Waking the Tiger DLC가 나오면서 과거보다는 좀 풍부해졌는데 그래도 2차 양광사변을 비롯해서 과거에는 고증했던 이벤트들조차 사라졌다. 중화민국에 복속되면 디시전 합병 테크 1단계인 군대 통합 디시전 선택 이후 중화민국 장성진에 추가된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광서성장으로 2차 대공황이 터지고 중화민국이 박살나자 쿠데타를 일으키나. 장제스에게 진압, 홍콩으로 도망갔다고 나오는데 작중 묘사를 보면 항복이 아니라 대공항이 터져서 영국이 정신없는 틈을타 항복을 빙자한 점령을 한듯하다. 영국의 보호를 받지못하는 홍콩정부가 리쭝런의 패잔병들을 치안,안보자산으로쓰는듯.

THE LAST EMPIRE에서는 왕징웨이와 국민당 좌파가 광동을 장악하자 이에 반발한 일부 국민당 우파 세력[7]을 이끌고 도망쳐 광서성과 귀주성을 장악하고 있다. 2차 북벌 후에는 중앙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청천백일도 떼어버리고 아예 따로 놀게 되며 이후 광동 땅을 집적거리다가 국민정부에게 토벌당한다.

5. 참고문헌[편집]



5.1. 저서[편집]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기세찬, 경인문화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5.2. 논문[편집]


  • 蔣介石과 4·12 政變, 배경한, 동양사학연구 38권, 동양사학회.
  • 蔣介石의 '第1次 下野'와 復職, 김영신, 중국학보 44권, 한국중국학회.
  • 中央特別委員會의 役割과 活動, 김영신, 동국사학 36권, 동국역사문화연구소.
  • 唐生智와 武漢國民政府, 나현수, 중국근현대사연구 29권 29호, 중국근현대사학회.
  • 北伐完成 직후 蔣介石의 中央軍體制 確立 努力과 編遣會議, 배경한, 동양사학연구 48권, 동양사학회.
  • 국민당 3전대회 전후의 반장운동, 김영신, 중국학연구 30, 중국학연구회.
  • 동북군의 관내진출과 그 결과, 송한용, 중국 근현대사연구 6, 중국 근현대사학회.
  • 訓政時期約法 제정 논란과 ‘蔣·胡合作’의 파국, 김영신, 동양학 42권 42호,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원.
  • '湯山事件' 後의 政局과 蔣介石의 對應, 김영신, 중국학연구 50권 50호, 중국학연구회.
  • '湯山事件' 후의 정국과 '反蔣派'의 動態, 김영신, 중국학연구 53권 53호, 중국학연구회.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권 55호, 중국학연구회.
  • 9·18 사변 전후의 정국과 南京政府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61권 61호, 중국학연구회.


6. 관련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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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중화인민공화국 광시 좡족 자치구 구이린시[2] 총통 권한대행 1949년 1월 21일 ~ 1950년 3월 1일[3] 국공내전 이후 중공에 가담했기 때문에 사실상 출당당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4] 리쭝런은 이때 중앙에서 한푼의 군비도 주지 않아 모든 군비를 광서성의 수입으로 충당했다고 회고록에서 불평하고 있다.[5] 이때 펑위샹이 행정원 부원장 겸 군정부장에 임명되었는데 리쭝런이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와 리쭝런이 기자회견을 열어 해명하는 등 집단군 영수들 사이의 불화의 조짐을 드러냈다.[6] 국공내전 이후 리쭝런을 제외하고도 장파쿠이, 쉬충즈를 비롯해서 중공 측에도 대만 측에도 합류하지 않던 인사들이 상당수 있었다.[7] 장제스는 북벌실패후 권력상실한뒤, 다시권력을 얻기위해 좌파와 타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