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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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장미 전쟁 당시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에드워드 4세의 동생으로 조카들이었던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 리처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섭정(Lord Protector)[2] 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돌변해서 조카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는 이른바 영국판 계유정난을 일으켜 한국에서는 영국판 세조(수양대군)라는 말이 있다. 기사, 기사 2
재위기간은 겨우 2년에 불과하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 상당히 많은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의 죽음과 함께 장미 전쟁이 종식되었기 때문에 영국 중세사를 논할 때 상당히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2. 즉위 이전[편집]
1452년 10월 2일 포더링헤이(Fotheringhay) 성에서 요크의 리처드와 세실리 네빌의 13남매 중 12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웬즐리데일에 있는 미들햄(Middleham) 성에서 보냈는데, 그 성은 사촌형이기도 한 워릭 백작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소유였다. 그곳에서 리처드는 워릭의 딸들 이사벨과 앤, 그리고 워릭의 피후견인 프랜시스 러블과 친하게 지냈고 이후 그 친구 관계는 평생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1460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아버지와 둘째 형 에드먼드가 죽자 어머니가 바로 윗형 조지와 함께 저지대 국가들로 보내어 1년간 피난 생활을 했다. 그 뒤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에드워드 4세로 즉위한 큰형으로부터 글로스터 공작위를 받았다. 다만 아직 나이가 어려 어린 시절 살던 미들햄 성으로 보내져 12살까지 기사 훈련을 받았다.
사춘기를 겪는 동안 리처드는 선천성 척추측만증으로 고통받았다는 것이 유골 검사 결과 밝혀졌다. 그리고 이 시기에 사생아 2명(내지 3명)을 낳았는데 그들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옹립공신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Richard Neville)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결혼을 계기로 반목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왕비가 되기엔 신분이 낮았는데도[3] 그녀의 미모와 재산에 혹해 즉흥적으로 비밀 결혼을 했기 때문이였다. 당연히 대부분의 귀족들은 물론 추밀원까지도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결혼에 반대했고 여론도 그닥 좋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공주와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을 추진했다가 에드워드의 갑작스런 결혼으로 부랴부랴 혼인동맹을 수습하느라 대외적으로 명예가 크게 실추당한 워릭 백작의 불만이 가장 컸다. 게다가 엘리자베스의 첫째 남동생 앤서니는 별다른 능력 없이 오로지 누나의 후광만으로 짧은 기간에 그와 맞먹는 힘을 지녔기 때문에 워릭 백작은 개인적인 자존심까지 상처입었다.
리처드는 둘째 형인 클래런스 공작 조지와 달리 에드워드 4세에게 충성했다. 클래런스 공작은 에드워드 4세가 자신이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맏딸 이사벨 네빌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졌고, 1469년에 이르러서는 워릭 백작과 손을 잡고 각지에서 반란을 사주하는 등 대놓고 에드워드 4세를 적대했다. 1470년 9월 워릭과 클래런스는 미리 잉글랜드 북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에드워드 4세의 관심을 돌린 뒤 잉글랜드 남부로 침공했다. 워릭의 동생 몬태규 후작 존 네빌이 결정적인 때에 에드워드를 배신하여 에드워드 4세는 동생 리처드, 윌리엄 헤이스팅스 등과 함께 국외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서둘러 잉글랜드를 빠져나오느라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에드워드 4세가 자신의 모피 외투로 뱃삯을 지불하려고 하자, 리처드가 상륙지의 토지 관리인에게 서둘러 달려가서 3파운드를 빌려와 뱃삯을 내 주었다고 한다. 에드워드와 리처드 형제는 자신들의 누이인 요크의 마거릿이 시집갔던 부르고뉴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요크의 마거릿의 남편인 부르고뉴 공 샤를(용담공 샤를)은 처남들의 망명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노발대발했지만, 나중에는 군사 1200명과 배 36척을 지급해서 에드워드 4세의 귀환을 도와주었다.
1471년 3월 11일 부르고뉴를 출발한 에드워드와 리처드는 요크 파에 동정적인 동앵글리아에 상륙하려 했으나 폭풍 때문에 3월 14일, 홀더네스 지역에 상륙했다. 그 지역은 처음에는 그들의 진입을 거부했지만 에드워드가 '왕위가 아닌 그저 요크 공작령만 돌려받으러 왔다.'고 주장하여 겨우 문을 열어주었다.[4] 형제는 조지의 지지를 되찾았고, 1471년 4월 14일 바넷 전투에서 리처드는 17살의 나이에 군대의 선봉에 섰다.
이 전투의 승리에 그가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논란이 있지만, 같은 해 5월 4일 튜크스베리 전투에서는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확실하다. 리처드는 두 전투 모두에서 선봉에 섰지만, 튜크스베리 전투가 끝난 뒤에는 (이후 노퍽 공작이 되는) 존 하워드와 함께 포로로 잡힌 랭커스터 파 주요 인물들을 재판했기 때문이다. 형인 클라렌스 공작은 에드워드 4세에 반역죄로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다가 처형되었는데 훗날 리처드가 포도주 통에 넣어서 살해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에드워드 4세는 1472년 북부 지역에 대한 정부의 통치력을 높이고 경제적, 행정적으로 낙후한 북부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북부자문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리처드에게 잉글랜드 북부의 통치권을 주어 자신의 대리로서 그곳을 다스리게 했다. 리처드는 그때부터 1483년까지 북부를 다스렸는데, 요크 시를 중심으로 북부 전역에서 인기가 높았는데, 북부자문위원회의 최고 민사법원장으로 일하면서 공정한 법 집행을 했기 때문이다. 북부자문위원회는 요크셔와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주로 토지 분쟁을 해결하고 왕의 평화를 지켰으며 범법자를 처벌했다. 그 결과 북부의 치안은 이전에 비해 크게 좋아졌고 경제적으로도 점차 나아졌다.
하지만 1470년대 중반부터 스코틀랜드의 잦은 침입이 문제되었고, 1480년에는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전쟁을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에게 위아래에서 협공당하는 막장 상황이 도래할 것이었다. 이에 리처드는 그해 5월 12일 북부 군대 사령관이 되어 노섬벌랜드 백작과 함께 맹렬한 반격을 했고 11월 왕과 자문위원회가 공식 선전포고를 하자 본격적 공격에 돌입하... 려고 했지만 왕이 제때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지 못했고 스코틀랜드 역시 지도부의 분열로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1482년 8월 초까지 간헐적인 접전만 계속해야 했다.
8월 초, 리처드는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 들어가 스코틀랜드 왕의 남동생 올버니 공작이 화해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공격을 늦추지 않아서 수백 년 동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서 주인이 바뀌어 왔던 버윅-어펀-트위드(Berwick-upon-Tweed)를 8월 25일 비로소 손에 넣었다. 리처드의 점령 이후 다시는 버윅의 주인이 바뀌는 일이 없었고, 바로 그날 에드워드 4세는 로마 가톨릭 교황 식스토 4세에게 리처드가 에든버러와 버윅의 시민들을 모두 살려주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3. 찬탈[편집]
1483년 4월 9일, 에드워드 4세는 낚시 여행을 떠났다가 뇌졸중으로 40살에 급사하고 말았다. 에드워드 4세는 원래 즉위 전부터 여색을 극도로 밝혔는데 나이가 들고서도 거듭된 폭식과 폭음으로 건강이 망가졌는데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4세는 유언장에서 동생들 중 생존해있는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를 섭정으로 지명해놨기에, 리처드가 조카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이 되어 새 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 정권을 잡아야했다.
하지만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유언은 물론 국왕의 죽음조차(!) 리처드에게 알리지 않고 동생 리버스 백작 앤서니에게 무장한 군사 2천명을 주어 장남 에드워드 5세의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교육을 위해 웨일스 변경에 있던 아들을 런던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에드워드 5세가 어려도 일단 대관식을 치르면 굳이 섭정이 필요하지 않으니 리처드를 이후의 정국에서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의도였겠지만, 알려지지 않은 경로로 이 소식을 접한 리처드는[5] 버킹엄 공작을 비롯한 신사 6백 명과 함께 약간의 호위병력만 대동하고 내려가 런던 근교에서 무장한 앤서니의 군대와 마주쳤다.
리버스 백작 앤서니와 만난 리처드는 앤서니는 물론 그 동료 토머스 본,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사망한 첫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리처드 그레이를 체포한 뒤 어린 왕의 신변을 확보한다. 당시 잉글랜드에 머물고 있던 이탈리아인 연대기 작가 도미니크 만치니는 리처드의 리버스 체포가 당시 강력한 대귀족 중 하나이며 왕국 자문회의 수장인 윌리엄 헤이스팅스 경의 조언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적었다. 이후 리처드는 에드워드 5세에게 리버스 백작을 반역죄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새 왕은 그의 주장을 믿지 않고 처형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쨌든 에드워드 5세와 함께 런던에 입성한 리처드는 섭정(호국경)이 되었고 새 왕의 대관식을 7주 뒤로 미룬 뒤 그를 런던탑에 모셨는데 말이 좋아 모신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연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리처드 입장에서는 조카가 자신보다 외가인 우드빌 가문과 그 수장인 리버스 백작을 더 의지하는 상황에서 대관식을 치르며 권력을 내려놓는 건 불가능했고 자신이 권력을 잡은 상황에서 자신의 적인 우드빌 가문을 제거해야만 했다.
이후 리처드는 왕국의 자문회를 움직여 우드빌 가문을 제거하고자 했으나 자문회 일원들은 그의 의도를 의심하고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비록 부정부패 등으로 별로 인기있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리버스 백작은 엄연히 왕국의 귀족이었고, 명확한 증거도 없이 그를 반역자로 몰아 체포하고 죽이려는 리처드의 시도는 다른 귀족들에게 불법적으로 보이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초조해진 리처드는 헤이스팅스 경이 은밀히 자신의 반대파와 손을 잡고 있다고 의심했고, 버킹엄 공작과 짜고 기습적으로 헤이스팅스를 체포한 뒤 반역죄를 주장하며 재판도 없이 처형하는 초강수를 두고 만다. 이 때부터 리처드가 찬탈을 생각하고 있었고 이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은 헤이스팅스에게 누명을 씌워 숙청한 것이라는 주장도 많다.
리처드의 이러한 행위는 순식간에 자문회를 공포 분위기로 몰고갔다. 헤이스팅스의 갑작스러운 처형과 더불어 리처드의 영지였던 북부 잉글랜드에서 2만이나 되는 군대가 그를 지지하기 위해 내려온다는 소식에 자문회 귀족들은 겁에 질려 그의 거수기로 전락했다. 공포를 통해 자문회를 휘어잡은 리처드는 또다시 대관식을 미루고 대관식에 참석해야 한다는 이유로 왕의 동생인 요크 공작 리처드를 왕과 함께 런던탑으로 옮겼다.[6] 동시에 그의 숙적이던 리버스 백작과 그 추종자들을 마침내 처형하는 데 성공한다.
우드빌 일가의 세력을 꺾은 뒤 리처드는 에드워드 4세가 엘리너 버틀러라는 숙녀와 먼저 결혼한 상태에서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선왕과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은 중혼이니 무효이고 그들의 자식들도 사생아라고 선포한 리처드는 자신이 에드워드 4세의 적법한 계승자라고 선언하면서 리처드 3세로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 4세의 중혼 여부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음에도) 생전에 놀아제낀 행각이며 처음 만난 과부와 바로 결혼해버렸던 전적 등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위인이라고(...) 여겨졌지만 리처드가 이를 이용해 사기친 것인지 실제로 형이 중혼했다고 믿은 건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에드워드 4세가 자신을 옹립한 네빌 일가를 견제하기 위해 처가인 우드빌 가문의 형제들을 중용하면서 평민 출신이었던 우드빌 가문은 하루아침에 외척으로 크게 출세한다. 하지만 우드빌 가문은 왕비부터가 솔선수범하는 부정부패 등으로 워낙에 악평이 거셌기에 에드워드 4세 사후 그들을 내쫓는 건 큰 무리가 없었다. 에드워드 4세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재산과 미모에 반해(?) 덜컥 결혼하고는 수많은 애첩들을 후렸고, 이런 호색한 에드워드 4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아내나 딸들을 상납(?)하는 경우도 잦았다. 특히나 우드빌 가문은 왕비 엘리자베스의 빽을 믿고 수많은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에드워드 4세도 런던시티의 상인들에게 독점권과 이권을 퍼주는 대가로 미녀들을 상납받아 후리는 등, 부부와 처가가 합심한 진상 짓으로 악명 높았다.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 때 추밀원과 잉글랜드 주교단은 모두 예비 왕비의 낮은 혈통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지만 국왕의 바람이었기 때문에 적법한 결혼이라 승인했고, 두 사람의 장남 에드워드 5세가 12살이 될 때까지 아무 말이 없다가 에드워드 4세가 죽고 나서 사생아 타령을 하는 걸 보면 어찌됐거나 정치적 이유라는 게 설득력이 있다.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이 된 리처드는 에드워드 4세의 음탕한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꾼을 고용하여 6명의 사생아를 둔 것을 런던 도처에 선전했고, 윤리와 도덕을 드높이고자(?) 에드워드 4세의 애첩과 애첩을 상납한 남편을 처형했고(애첩을 벌하긴 했으나 목숨은 붙여줬다는 버전도 있다) 에드워드 5세가 사생아일지도 모른다는 썰을 열심히 퍼뜨렸다. 실제로 에드워드 4세는 호색한에다 죽기 직전까지 평민 유부녀와 놀아났고, 6명의 사생아를 두기도 했기에 사생아설은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3.1. 왕위에 오르는 과정[편집]
- 우선 사전 작업으로 에드워드 4세의 충신이었던 헤이스팅스경을 마법(?)으로 우드빌 왕대비와 자신을 저주했다는 구실로 체포하고 재판없이 반역죄로 참수했다.
- 우드빌 가문은 몇몇은 해외로 도망간 데다 악평이 높았기 때문에 쉽게 무너졌다.
- 6월 22일 세인트 폴 대성당 밖에서 자신의 고해신부 샤 박사(Dr. Sha)가 에드워드의 자녀들이 사생아이며 그가 적법한 왕이라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 런던 시민들은 리처드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고, 6월 26일 그는 받아들여 7월 6일 왕위에 올랐다.
이 조치의 근거는 바스와 웰즈의 주교 로버트 스틸링턴(Robert Stillington)의 증언 때문인데, 스틸링턴은 리처드에게 나아가 '에드워드 4세는 전에 엘리너 버틀러(Lady Eleanor Talbot) 부인과 결혼했고 나는 그 결혼의 주례를 섰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엘리자베스의 미모에 반해 엘리너를 버리고 그녀와 결혼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엘리너는 에드워드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결혼하고 나서 얼마 후 수녀원에 들어갔고 얼마 안 되어 거기서 죽었기에 스틸링턴이 한 증언의 사실 여부는 검증되지 못했다.
3.2.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을 죽였다는 정황[편집]
리처드 3세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폐위된 에드워드 5세와 요크공작 리처드 형제를 런던 탑에 두었다. 물론 나중에 찰스 2세때 런던 탑 계단을 보수하다가 상자를 발견했는데 안에는 유골들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유골들의 사망 연대가 언제인지도 불분명하거니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어,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 유골들을 꺼내 정밀 검사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다만 2017년 1월 현재까지도 잉글랜드 국교회와 영국 왕실의 수장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망자의 안식을 방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유골의 발굴과 정밀 검사를 허락하지 않았다.[7] 그런데 일부 역사가들의 주장이나 문제제기와 달리 리처드 3세가 에드워드 4세의 두 아들 에드워드 5세와 요크공을 죽인 건 거의 확실하다. 에드워드 5세 항목 영어 위키백과의 주석근거< Horrox, Rosemary. "Edward V of England".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Oxford University Press. Retrieved 25 August 2013>,는 물론이고 국내 발간된 서적 중에서도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앙드레 모르네의 영국사, 서울대 라종일 교수의 <영국의 역사>, 역시 서울대 박지향 교수의 <영국사>에서도 일부 학자들의 다른 주장도 있지만 리처드 3세가 두 조카를 죽였음이 확실하거나 그렇게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한다.
4. 즉위 후[편집]
1483년 10월, 한때 리처드의 지지자였던 버킹엄 공작이 에드워드 5세 형제 살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진압되고 버킹엄은 참수되었으나 민심 안정이 필요해졌다.
1484년 1월 23일, 리처드는 재위 기간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회를 열어 27일 동안 사법 18개조, 공법 15개조를 통과시켰다. 18가지 사법들은 전년 10월 반란을 일으킨 버킹엄 공작 일당을 단죄하고, 존 하워드에게 노퍽 공작을 수여하고, 북부 지역의 유력 귀족인 스탠리 가문에 토지와 벼슬을 퍼주면서 왕권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특히 마지막 목적에서 만들어진 <Titulus Regius(왕의 권리)> 라는 문서는 상술한 에드워드 4세의 혼인 문제를 근거로 리처드 3세의 계승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정리했다. 이후 헨리 7세는 이 문서의 원본을 포함한 모든 사본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8] , 크로일랜드 수도원에 한 부가 살아남아 현존한다.
15가지 공법들은 덕세를 폐지하는 등 사법 체계를 개혁하고 잉글랜드 상인과 소비자를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는 전반적으로 힘없는 평민들에게 유리한 개혁이었기에 프랜시스 베이컨 경을 포함한 후대 학자들에게 호평받는다. 아래는 15가지 공법의 구체적인 내용.
1조 - "이제부터 모든 토지 양도, 토지 선물과 그와 같은 행동들은 판매자와 그 자손이 아니라 구매자에게 유리한 조건이어야 한다."
2조 - "이 왕국의 백성들은 어떠한 덕세도 부담하지 않는다."
3조 - "모든 치안 판사는 죄수에게 조건부 석방 영장을 발부할 수 있다. 죄수가 사권을 박탈당할 때까지 어떤 공무원도 그의 재산을 빼앗을 수 없다."
4조 - "신용과 토지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주 장관의 순회 때에 배심원을 선정해야 한다."
5조 - "1조는 오랫동안 내려오던 규정을 바꾼 것이 아니며, 왕은 영지 수령권을 유용할 수 없다."
6조 - "모든 파이파우더 법정[9]
에서 원고 혹은 그의 변호사는 반드시 선서해야만 한다."7조 - "개인은 민사법원의 재판관들 앞에서 부과된 재산 양도 민사소송(fine)과 그 선언서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
8조 - "브로드[10]
는 팔리기 전에 반드시 완전히 세탁되어야 하고 길이는 24야드, 너비는 2야드여야 한다. 직물 거래에 어떤 부정직한 일도 있어서는 안 되고, 하얀 직물에는 분필로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9조 - "이탈리아 상인들이 상품을 파는 방식에 어느 정도의 외국인 규제가 필요하다."
10조 - "비단 레이스, 리본, 가위, 방울, 못 따위의 수입을 금지한다."
11조 - "이탈리아 상인들은 포도주 1통당 10개의 좋은 활을 만들 막대를 가져와야 한다."
12조 - "이 왕국에 특정한 상품들을 들여오는 걸 금지한 이유는 그것들이 초래할 결과 때문이다."
13조 - "포도주와 기름은 양을 재기 전에는 용기에 담아 판매할 수 없다."
14조 - "성직자의 십일조(dismes)를 걷는 회계사는 재무부에서 진행되는 다른 사람의 소송에 증인으로 불려나오지 않는다."
15조 - "전임 잉글랜드 왕비 엘리자베스 그레이에게[11]
국가에서 내려준 모든 것과 영지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그러나 이전 랭커스터 왕들이 부족한 정통성을 의회의 도움으로 통치하려던것과 달리 요크 가문 왕들은 의회를 무시하고 상속권으로만 통치하려 했던게 실책으로 보인다. 뒤늦은 조치와 달리 요크 가문의 통치는 의회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리처드 3세가 급속하게 민심을 잃고 몰락한 것도 이것과 영향이 있다. 물론 이 시절 의회는 지금과 달리 상하원을 막론하고 귀족과 젠트리들이 좌우했다.
4.1. 외아들의 죽음[편집]
그런데 리처드에게 큰 타격을 준 사건은, 1484년 후계자인 외아들의 죽음이었다. 리처드는 두 조카를 죽이고 나서도 뻔뻔했다. 리처드 3세의 유일한 적자 에드워드가 죽고나자 후계자가 없었고 일단 자신의 누이의 아들인 외조카 존 드 라 폴을 추정상속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왕비 앤 네빌이 아이를 못 낳자 '왕비가 2월까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며 소원을 빌고 다녔는데 왕비는 4월에 기적적(?)으로 사망했다. 에드워드 5세를 폐위할 때까진 그나마 괜찮았지만, 유일한 적자가 죽은 데다가 두 조카를 죽인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리처드는 30살 넘고 후계자도 없는 데다가 장애인이었고, 조카들까지 살해했기 때문에 후계자도 없어졌으므로 왕권의 지지기반이 흔들렸다. 요크 가문 지지자들은 두 조카를 죽인 것에 반발했고, 리처드도 민심을 수습하고자 자신이 사생아라고 격하시킨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문제는 리처드와 에드워드 4세는 이복형제도 아닌 친형제고 엘리자베스는 친조카라는 점이다. 당연히 신하들과 성직자들은 '사촌이면 몰라도 친삼촌-조카는 개족보'라며 극렬반대했다. 리처드는 치욕스럽게도 스스로 이런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며 공개 해명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이 당시 엘리자베스는
두 사람이 결혼설이 퍼지자 비밀리에 우드빌 왕비와 동맹을 맺었던 헨리 튜더가 급히 프랑스의 지원과 랭커스터 지지자와 요크 지지자들 중 리처드에 등돌린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이 상륙하자 놀란 리처드는 전투에 나섰다.
5. 사망[편집]
1485년 헨리 튜더는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2천 병력을 끌고 웨일스의 밀포드 헤이븐에 상륙했다. 튜더 가문은 웨일스 출신이었기 때문에 웨일스는 헨리 튜더를 전폭 지지하여 헨리의 군대에 합류했고, 리처드 3세도 잉글랜드 전역의 귀족들을 소집하여 진압에 나섰다. 3주 후 잉글랜드 중부 레스터 지방 보스워스에서 양군이 맞붙었다. 양측의 병력을 살펴보면 튜더 가문의 병력은 많아야 5천을 넘지 않았고, 리처드의 병력도 많아야 1만 2천, 보통 1만 선으로 보는데 에드워드 4세가 1461년 타우턴 전투에서 요크군과 랭커스트군 양측이 합친 병력이 5만이며 요크군이 2만으로 우세한 랭커스터군 3만을 격파하며 왕위를 얻었다는 점과 비교해 보자. 한마디로 리처드가 소집한 귀족들의 5명 중 4명이 소집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리처드의 권력 기반이 심각하게 흔들렸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잉글랜드 북부의 귀족 가문인 스탠리가 변수였다. 리처드 3세도 스탠리 가문의 지지를 얻으려고 그에게 토지와 직위를 퍼주다시피 하사했지만 문제는 스탠리가 헨리 튜더의 모친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하여[12] 헨리의 의붓아버지 격이 되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리처드 3세의 뒷통수를 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리처드 3세는 이를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전황은 리처드에게 유리했는데 리처드는 군대를 이끈 지휘경험이 있고, 무예도 할 줄 아는 전사였지만, 4살 연하의 헨리는 도망다니던 신세였기에 군대 지휘 경력이 전혀 없어서 후방에서 대기했고 그의 삼촌인 옥스퍼드 백작이 실제로 군대를 지휘했다. 게다가 전투가 시작될 당시만 해도 리처드 3세의 국왕군은 언덕 위를 점하고 있었던데다 머릿수도 헨리 반군의 2배였다.
리처드는 노련한 장군 노퍽 공작이 맡고 있던 그의 오른쪽 날개를 먼저 출격시켜 언덕 아래 있던 헨리의 반군을 치도록 했다. 하지만 상대편 지휘를 맡고 있던 역시 노련한 장군 옥스퍼드 백작의 책략에 빠져, 노퍽 공작 존 하워드는 전사했고 먼저 출격한 오른쪽 날개는 진창에서 백병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에 리처드는 왼쪽 날개를 맡고 있던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에게 노퍽 공작을 도우라고 명령했다.[13] 하지만 헨리 퍼시는 명령에 불복종함으로서 사실상 배신했고, 어떤 사료에서는 심지어 헨리 7세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까지 한다.[14]
게다가 소집병력들까지 전세가 불리해지자 전투에 매우 소극적으로 나섰고 대놓고 이기는편 우리편이라며 관망분위기를 보이자 리처드는 위기에 처한다. 결국 리처드 3세는 측근들의 후퇴 요구를 거부하고 왕인 자신이 직접 전투에 앞장 섰다. 특히 후방에 있던 헨리 튜더는 전황을 지켜보기 위해 전선에 가까이 오기 시작했고 그의 깃발이 가까운 곳에 휘날리는 것을 보고 리처드 3세는 기사들만 최소 1백 명을 불러모아 함께 언덕 아래로
하지만 헨리 튜더의 친위 병력에 더해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스탠리 가문이[17] 개입했고, 결국 리처드는 몸소 앞에서 지휘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에게 적대적인 튜더 왕조의 사가들조차 '리처드 3세가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는 데에는 견해를 같이한다. 언덕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국왕군 병사들은 왕이 전사하자 겁에 질려 도망쳤고, 헨리의 군대는 그들을 추격하여 닥치는 대로 죽였다.
6. 튜더 왕조의 시작[편집]
전투가 끝난 뒤 헨리 튜더의 의붓아버지 스탠리가 리처드 3세의 왕관을 발견하고, 이걸 헨리 튜더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튜더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 7세는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했지만 헨리는 혈통 문제, 엘리자베스는 부모의 결혼 문제 때문에 둘 다
그런데 척추측만증 환자가 평상복을 입으면 어지간히 눈썰미가 좋지 않고선 일반인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리차드 3세는 왕족으로서 일반인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었을 터이니 더 눈치채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리처드 3세의 척추측만증은 아마도 직계 왕족이나 옆에서 시중을 드는 몸종이 아니면 모르는 비밀이었으나, 장미 전쟁에서 사망한 뒤 고인능욕을 당하면서 꼽추라고 세상에 알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에 리처드 3세의 척추측만증을 조롱하기 위해 세익스피어의 극 리처드 3세에는 심각한 곱추이면서[20] 함께 왼팔 전체가 오른팔보다 짧고 마른것으로 묘사하기도 했고 이후 세간의 인식도 그렇게 전해저 내려 왔다.[21] 임금님이 곱추라고 소문이 세간에 돌았다 해도, 겉으로 보기엔 잘 차려 입고 거기에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고 전투에 임해 전공을 세우는 임금의 모습을 보고 백성들이 '임금님은 곱추'라는 말을 부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고인능욕 이후로는 그런 이미지가 쫙 퍼졌지만.
6.1.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결혼[편집]
국왕이 된 헨리 7세는 이미 규합한 요크 지지자들을 회유하고자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해서 정통성을 강화했다. 그러나 1499년 헨리 7세가 요크 왕가의 유일한 남계 후손 워릭 백작 에드워드(에드워드 4세의 동생 조지 플랜태저넷의 아들)를 처형하면서 요크 왕가는 단절되었다. 이미 리처드 3세의 외아들 미들헴의 에드워드는 1484년 11세로 요절했기 때문.
헨리 7세의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는 에드워드 3세의 4남인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증손녀로, 헨리 7세는 혈통상으로는 왕가에서 멀고 멀었다.[22] 다만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 4세의 찬탈과 헨리 6세와 그의 외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살해당하면서 랭커스터 가문은 완전히 멸족했기 때문에, 남아있는 랭커스터 가문의 지지자들은 헨리 6세의 이부동생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이자 모계로 랭커스터 시조인 곤트의 존의 혈통을 물려받은 헨리 튜더를 랭커스터 가문의 후계자로 밀었다.
6.2. 헨리 7세의 숙청[편집]
헨리 7세는 리처드 3세를 교훈 삼아 리처드가 적장자 에드워드가 사망하고 당분간 추정상속자로 남겨 놓은 존 드 라 폴과 리처드 3세의 조카 워릭 백작을 살려두었다. 11세의 워릭 백작은 런던탑에서 갇히게 되어 성년까지 살아남았으나 성년이 되어 간수들을 매수하고 탈옥하려다 적발되어 처형되었으며 존 드 라 폴은 1487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을 이끌며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헨리 7세가 반란으로 찬탈했다 한들 어설프게나마 절멸한 랭커스터 혈족이고, 요크가의 에드워드 4세의 맏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정통성 시비는 있어도 에드워드 4세 시절 왕권의 위협이 된 헨리 6세와 그의 적장자 웨스터민스터의 에드워드와 같은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왕족은 거의 남지 않았다.
존 드 라 폴은 에드워드 4세와 리처드 3세의 누이의 아들일 뿐 왕족은 아니었고, 리처드 3세의 형인 클라랜스 공작은 맏형 에드워드 4세에게 반역 혐의로 죽었기에 클라랜스 공작의 아들인 워릭 백작은 왕위 계승권 자체가 없었다. 설령 계승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1485년 런던탑에 투옥될 당시 겨우 11살로 너무 어린 나이였고, 이후 죽을 때까지 감옥 밖으로 나가지 못하여 정신병까지 있어 왕위를 계승할 상태가 아니었다. 헨리 7세시절 반란은 가짜 워릭 백작이나 가짜 요크공들을 사칭한 야심가들이 판을 쳤지만 아주 큰 위협이 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존 드 라 폴은 헨리 7세가 석방해줬음에도 보스워스 전투가 끝나고 2년 뒤인 1487년, 퍼킨 워벡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스토크 평원 전투에서 전사했다.
1499년에는 가짜 워릭 백작을 주장한 반란들도 거의 분쇄되고 왕권이 안정되었다. 가짜 워릭 백작을 사로잡은 헨리 7세는 그가 가짜임을 입증하려고 런던탑에 갇힌 진짜 워릭 백작을 꺼내서 인증도 시켜줬으며, 가짜는 죽이지 않고 궁정에서 부엌데기로 삼아 부렸다. 진짜 워릭 백작은 헨리 7세의 왕권이 안정권에 들자 꼬투리를 잡아서 22세였던 그를 런던탑에서 꺼내 참수형에 처했다.
이 일은 역시 리처드 3세처럼 당대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대표적으로 헨리 7세의 며느리 아라곤의 캐서린은 자신이 그토록 많은 유산과 사산을 거듭한 이유가 시아버지가 죄 없는 워릭 백작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워릭 백작의 죽음으로 요크 가문 남계혈통은 완전히 끊겼고 에드워드 4세의 외손인 아서와 헨리 8세가 태어남으로써 헨리 7세 이후 튜더가의 왕권은 강력해졌다.
7. 유골 발견[편집]
리처드 3세 유골 발견에 대해 다룬 슈카의 영상
7.1. 무덤의 유실[편집]
앙주 왕조의 존 왕이후 모든 영국 국왕, 여왕의 무덤은 모두 영국 국내에 존재했는데[25] 그중 레스터 지역의 리처드 3세의 무덤만 유실되어 없어졌다. 이유는 16세기에 헨리 8세가 잉글랜드 종교 개혁을 하면서 수도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 리처드 3세가 안장되었던 '그레이 수도원(Greyfriars)'이 일반인에게 판매되었기 때문이다. 수도원 자리가 과수원으로 개발되었고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기에 재건축되면서 리처드 3세의 무덤은 영영 유실된 줄 알았다. 그래서 리처드 3세의 잃어버린 유골과 관련한 민담이 레스터 지역에 내려왔다. 후대의 역사 학자들이 레스터지방에서 리처드 3세의 무덤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내전의 패배자였던 리처드 3세의 무덤을 후대 왕조에서 특별히 신경 쓴 것도 아니고 무덤이 있었다던 수도원 자리도 세월이 지나 흔적도 찾기 힘들게 되자 몇 가지 추측을 하였다.
- 수도원이 없어지고 주변이 풍경이 바뀌며 재개발되었을 뿐이다. 수도원이 없어지기 전 리처드 3세의 무덤을 방문했던 한 학자가 리처드 3세는 수도원 경당 내 양 성가대 단상 위치의 정중앙 바닥에 묻혔다고 기록을 남겼으므로 아직 수도원 자리에 묻혀있을 가능성도 있다[26]
- 잉글랜드 종교 개혁 당시 수도원 철폐령 이후 당시 같이 묻혔던 다른 유골들과 수습되어 이후 실종되었을 것이다.
- 레스터 지방에 대대로 오는 민담 내용대로 잉글랜드 종교 개혁 때 리처드 3세의 유골을 무덤에서 꺼내 주변 강에 버렸을 것이다.
세간에서는 세 가지 설들 중 민담 내용대로 '강물에 버렸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여겼다. 그래서 레스터 지방 정부는 리처드 3세의 유골을 버렸다고 알려진 다리 주변에 표석을 세웠다.
7.2. 리카디언(Ricardian)과 필리파[편집]
장미 전쟁에서 튜더 왕조의 헨리 7세가 즉위한 이후 리처드 3세를 지지했던 세력은 목숨 부지를 위해 당연히 숨죽이고 살았다. 그러다 튜더 왕조가 끝나고 스튜어트 왕조를 잠시 거쳐 장미 전쟁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하노버 왕조가 들어서면서 서서히 튜더 왕조의 리처드 3세에 관한 서사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미 1700년대부터 리처드 3세를 공개적으로 변호하고 나온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을 통칭해서 리카디언(Ricardian)이라고 부른다. 1700년대 리카디언의 시작은 장미 전쟁 이후로 보이게 안 보이게 차별받아 왔던 리처드 3세를 지지했던 지방에서 새로운 왕조에게 좀 잘 보이고자 시작한 경향이 크다.
리카디언들은 현대에 들어서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자기들끼리 협회를 조직하여 리처드 3세를 변호한다. 리처드 3세의 유골 재발견에 지대한 공을 세운 단체가 1924년에 시작한 '리처드 3세 협회(Richard III Society)'이다. 서문이 거창해서 이 협회가 무슨 저명한 고고학 학회 같이 들리지만 사실 현재의 리카디언들은 일반 동호회와 다를 바 없다.
이런 이들 중 백미가 2012년 리처드 3세의 유해를 발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리카디언 중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스코틀랜드 출신 대영제국 기사단 5등급[29] '필리파 제인 랭리(Philippa Jayne Langley MBE, 1962년 6월 12일생~)'이다. 그는 1990년대 이전부터 리처드 3세의 유해를 찾기위해 동분서주했고, 레스터 지방에선 리처드 3세 유골 발굴 이전부터 이미 유명인사였다.
그는 레스터 대학교 고고학부에서는 골치 아프고 상대하기 싫은 사람으로 손꼽혔다. 이제는 리처드 3세의 유골이 발굴돼서 당연히 레스터 대학교 고고학부의 자랑이자 대표적인 프로젝트지만, 유골 발굴 이전만 하더라도 대학에서 이미 진행 중인 여러 가지 중요한 학술 프로젝트들이 있었고, 그렇기에 필리파의 리처드 3세 유골 발굴 의뢰는 웬 듣보잡 아마추어가 스님 앞에서 염불을 외는 꼴이었다. 아마추어라서 꼭 필리파의 의뢰를 계속해서 거절했던 건 아니다. 레스터 대학 측도 리카디언 중에 향토사학자들도 있음을 알았고, 필리파가 대학 측에 제공했던 자료도 구글 따위에서 검색해서 모은 것이 아닌, 향토사학자들이 연구하고 정리한 학술적 정보였다.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발굴 의뢰를 했던 것이였다.
필리파도 어느 정도 인식했지만 리처드 3세 유골 발굴, 아니 어느 발굴에서든 가장 큰 문제는 언제나 돈이다. 장비 동원부터 시작해서 정부 허가[30] , 현존하는 건물의 유무 등[31] 말 그대로 삽을 꽂은 순간부터 돈이 들어가는데, 자금조달의 문제로 차일피일 밀려서 결국 2012년까지 왔다.
7.3. 유골 발굴[편집]
결국 2012년 필리파는 민영 방송사인 Channel 4로부터 리처드 3세 유골 발굴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았다.[32] 물론 리처드 3세 협회도 열심히 모금해주었고 발굴 현장에서 먼저 Channel 4가 전과정을 독점 촬영하는 것을 조건으로 약 4만 파운드를 기본 자금으로 필리파와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에 지원했다. 다만 4만 파운드로 리처드 3세가 매장되었다고 추정하는 옛 수도원 터 전체를 발굴할 수는 없으므로, 리처드 3세의 유해가 매장되었을 법한 유력한 후보지 두 곳에 구덩이를 파서 발굴하고, 결과물이 시원치 않으면 3번째 구덩이를 고르기로 했다.
현재의 지도와 중세시대 수도원을 포함한 지역 측량지도를 근거로 후보지를 골랐다. 첫 번째 구덩이는 리처드 3세가 왕족이나 귀족들이 종교시설 부지에 묻힐 때 누리는 특권을 바탕으로, 특히 리처드 3세의 유해는 합창대 근처에 안장되었다는 기록에 주목하여 경당 내 합창대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곳에 팠다. 두 번째 구덩이는 역시 유력한 매장 후보지인 경당 더 안쪽 제대 근처로 추정되는 곳에, 세 번째 백업 구덩이는 수도원의 건물 안쪽으로 파기로 하였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수도원 터가 있는 레스터시 소유 건물이[33] 재건축 대상이 되어 내부를 모두 비웠다. 게다가 구덩이를 파기로 결정한 세 군데 모두 큰 건물이 없는 주차장이라 발굴팀은 거리낌없이 발굴을 진행할 수 있었다. 시청 부속 건물들을 모두 비우긴 했지만, 옛 수도원 경내의 약 83%를 차지하여 실질적으로 발굴할 수 있는 곳은 약 17%에 불과했다. 게다가 발굴팀은 그중 약 1% 정도만 발굴할 수 있는 자금을 확보했기 때문에 리처드 3세의 잃어버린 유해를 찾음은 로또 1등 당첨이나 마찬가지였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2012년 9월 레스터 대학의 고고학장 리처드 버클리(Richard Buckley)를 수장으로 레스터시 주차장에 첫 삽을 떴다. 리카디언들은 600년 묵은 숙원을 풀 기회라며 흥분했지만, 레스터 대학교를 대표로 한 고고학팀은 처음부터 이 발굴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장미 전쟁 당시의 수도원을 발굴하는 데 의의를 두었을 따름이다. 유적을 발굴할 때 역사의 한 인물을 특정해 목표로 발굴하지 않음은 고고학계의 일반적인 상식이다.[34] 그러다 보니 고고학장이던 리처드 버클리는 이 발굴이 성공하면 내 모자를 먹겠다며 이 발굴이 너무 허황된 꿈을 품고 진행하는 게 아닌가 우려하기도 하였다.
첫 번째 구덩이를 파기로 한 주차장의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조심스레 흙을 파 내려가하자 가장 먼저 빅토리아 여왕 시대 즈음에 재개발된 흔적으로 보이는 지반이 나타났고, 그 밑을 더 파내려 가자 이곳이 옛 수도원 터였음이 금방 드러났다. 중세시대의 벽돌부터 바닥에 깔린 타일과 유리 파편 등등 첫 번째 구덩이가 정확히 수도원 부지를 파고들었음을 레스터 대학 연구진들은 금방 알아차렸다. 수도원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구덩이를 더 팠는데, 예상치 못한 유골이 나타나는 바람에 유골의 양 정강이 뼈가 파손되었다.[36] 게다가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고 소낙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 리처드 3세의 잃어버린 유골을 찾을 확률은 너무 낮았다. 이 탓에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에서 정부에 발굴 허가증을 받을 때 유골 수습 허가는 따로 받지 않았으므로 1번 구덩이의 발굴을 멈추고 다시 허가증을 받아야 했다. 날씨와 허가증 문제로 어쩔 수 없이 혹시 있을지 모를 유전자 오염[37] 을 막기 위해서 유골을 다시 흙으로 덮고 그 위로 비닐을 감싸는 등 응급보존처리를 한 뒤 유골 발굴 허가증을 급하게 신청했다. 유골 발굴 허가를 받기까지 약 열흘 남짓 걸리는 관계로 발굴팀은 그동안 2번 구덩이를 파서 수도원의 정확한 모형을 파악하기로 결정했다.
2번 구덩이를 파보자 해당 위치는 수도원의 부속시설 자리였다. 중세 시절의 지도와 비교해 수도원 부지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었다. 1번 구덩이의 위쪽, 예비 후보였던 3번 구덩이 구역을 발굴해 수도원 내 경당의 위치를 더 명확하게 잡기로 하였다. 3번 구덩이가 경당 내 제대 한가운데를 가로질렀으므로 예상했던 대로 1번 구덩이, 특히 정강이뼈가 발견된 부분이 수도원 경당 내 성가대 단상 근처임이 확실해졌다. 정강이 뼈 주변을 더 파서 정리를 하자 주변의 성가대 단상 위치가 드러났다. 이 뼈가 리처드 3세의 시신이라면 성가대 단상 근처에 묻혔다는 기록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정부로부터 유골 발굴 허가를 받자 전문가를 초빙해 정강이뼈 근처를 더 파서 나머지 유골을 발굴했다. 골반뼈를 발굴하자 양쪽 손팔뼈가 X로 겹쳐서 골반뼈 왼쪽에 뉘여 있었다. 레스터 지방과 영국 중세 시대 유골을 발굴했던 발굴팀은 이런 방식이 귀족이든 평민이든 당시의 일반적인 장례법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골반뼈에서 꼬리뼈를 발굴해내고 척추 뼈를 발굴하자 점차 뼈가 이상한 방향으로 휘었음이 드러났다. 매장지 흙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망자가 생전에 앓던 질병 때문임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했다. 레스터 대학 고고학팀은 조심히 나머지 부위도 수습했지만 양쪽 발 유골은 결국 수습하지 못했다. 발굴팀은 매장층 윗쪽에 보이는 빅토리아 시대 건축물의 지반 공사 흔적을 근거로 해당 부위의 뼈가 소실되었고, 당대에 조금만 더 기초공사를 했다면 유골이 모두 소실되었을 확률이 높았다고 추정했다.
발견된 유골의 전체 모습은 생각보다 처참하였다. 처음에 발견된 해골은 몸의 유골에 비해 위쪽에 위치했는데, 정식으로 준비한 장지가 아니라 급하게 마련한 곳이라서 시신을 구겨넣은 탓이라고 추측했다. 이외에도 유골 외에 다른 매장품이 발견되지 않았고, 수의를 착용했다면 발견되었을 섬유 조직도 나오지 않았음을 근거로, 시신의 옷을 모두 벗겨 나체로 수도원 경당 한가운데에 안장했다고 추측했다.[38] 유골을 조심스럽게 수습하자 유골 전체에서 무기로 공격받은 자상이 있었고, 등에는 화살촉으로 보이는 쇳조각도 발견됐다. 이 쇳조각은 X선 검사해보니 로마시대의 못이라 리처드 3세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못이 우연히 흙 속에 섞여 들어간 듯하다. 이 전과정을 지켜보던 필리파는 발굴내내 감정의 기복을 감추지 못하고 끝내 눈물을 보였다. 유골이 박스에 담겨 구덩이를 나오자 필리파와 같이 발굴에 참가했던 향토사학자는 리처드 버클리 학장에게 이 유골이 '리처드 3세의 유골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하면서 리처드 3세의 국왕기를 둘러 레스터 대학교로 보냈다.
수도원 경당 내 제대 자리였던 3번 구덩이에서도 관과 함께 얇은 납으로 감싸 매장한 지체 높은 사람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이후 검사에서 40대 후반 여자라고 확인하였고 레스터시에 남은 장례기록을 근거로 귀족 부인이었을 매장자의 신분도 추측했지만 유전자 검사로 비교해볼 후손이 없어 추측으로 남았다.[39] 만약 3번 구덩이의 유골이 먼저 수습되었다면, 높은 신분을 암시하는 매장법 때문에 리처드 3세의 유골로 착각하고 나머지 구덩이는 그냥 내버려뒀을 가능성이 높다고 리처드 버클리 고고학장이 덧붙이기도 했다.
수습된 유해가 리처드 3세일 가능성이 높다는 뉴스가 전세계로 대서특필되었지만 레스터 고고학부는 검증에 들어갔다. 먼저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 덕에 한꺼번에 여러 가지 정보가 드러났다. 탄소연대측정으로는 리처드 3세의 시대보다 약 100년 정도 더 빠른 14세기 유골이란 결과가 나왔지만, 육식과 특히 해산물을 많이 섭취하는 귀족이나 왕족 등 고위층의 유골은 평민들이 주식으로 먹었던 곡물과는 다른 탄소가 뼈에 축적되므로 오류치를 감안하면 해당 유골은 리처드 3세가 활동한 15세기 무렵 유골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안정 동위원소 분별법으로 망자가 거주한 지역과 식생활도 추측할 수 있었는데, 문헌에 남은 리처드 3세가 살았던 지역과 거의 일치했기에 이 유골이 리처드 3세의 유골이라는 한 가지 증거가 되었다.
유골의 상태는 리처드 3세가 맞은 참혹한 죽음을 잘 보여주었다. 런던의 저명한 법의학자들을 초빙하여 조사해보니 리처드 3세가 머리 쪽을 송곳 단검[40] 으로 강하게 찔리고 핼버드(미늘창)에 머리 뒷부분이 잘려나가 죽었다고 설명하는 사료와 거의 일치하였다.
(전략) 그의 뼈에서는 많은 상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상처는 후두부에 있는데, 도끼(할버드, 빌, 폴암 등. 전승에 의하면 왕을 처치한 것은 웨일스인이라고 하므로 웰시훅일 가능성도 있습니다)로 보이는 흉기가 후두골을 강타하여 즉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후두부에는 상처가 하나 더 있습니다. 검이나 창 같은 흉기에 찔린 것으로, 뇌를 관통하여 반대편 뼈까지 도달한 깊은 상처(깊이 10.5 cm)입니다. 당연하지만 이것도 즉사할 정도의 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밖에 몸 전체에 보이는 여러 무기에 찔린 듯한 흔적들은 전투 당시 입은 상처가 아니라 사망 후에 반군이 망자를 모욕하고자 고의로 시신을 훼손한 흔적인 듯하였다.
7.4. 척추측만증 환자의 전투력 고증[편집]
고고학팀은 눈으로 보기에도 심한 척추측만증을 앓은 환자가 격렬한 전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 했는데, 도미닉 스미(Dominic Smee)라는 남자가 해당 유골과 거의 유사한 척추측만증 환자이고 보스워크 전장의 재연 배우로 일할 수 있음을 입증하여, 심한 척추즉만증 환자라도 전투 능력에 큰 장애는 없었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고고학팀과 법의학자들은 스미 덕에 훌륭한 고증 샘플을 얻자 리처드 3세의 운동신경을 연구하였다. 먼저 유연성과 근력 테스트를 했는데 또래 남자들보다 오히려 몸이 유연해 몸의 움직임이 더 재빠르고 날렵했다. 근력 또한 자신의 근육량에 알맞는 정도였고 일반인에 비해서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지구력 테스트를 하자 일반인들과 차이가 확연하였다. 척추가 크게 휘었기 때문에 갈비뼈의 모양도 기형이라 숨이 차서 숨을 크게 내쉴 때 폐가 정상인만큼 부풀지 않고, 이 때문에 산소를 충분히 들이마시지 못하는 탓이라고 판단했다.
스미로부터 육체적인 한계를 확인한 다음 연구진들은 리처드 3세의 기마창술 능력을 알아보고자 스미를 데리고 스웨덴으로 가서 플레이트 갑옷을 제작했다. 먼저 스미의 몸에 맞게 미리 제작한 플레이트 갑옷을 입혔는데, 스웨덴의 갑옷 대장간과 레스터 대학의 연구진은 척추측만증 장애인이 일반 갑옷을 착용해서 발생하는 문제를 발견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제작한 플레이트 갑옷은 꼬리뼈 근처 허리로 갑옷의 하중을 착용자가 떠받치는 구조인데, 스미나 리처드 3세 같은 척추측만증 환자는 굽은 척추뼈 방향에 따라 몸의 중심이 기울어지고 한쪽 어깨가 조금 높아서, 허리로 갑옷의 하중을 떠받치는 게 아니라 골반 한쪽으로 갑옷의 하중을 버티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미가 갑옷을 입은 채로 간단히 무기를 휘들러보게 하니, 갑옷을 입지 않았을 때보다 확연히 움직임이 불편하였다.
스웨덴 갑옷 대장간과 레스터 대학 연구진은 몸이 갑옷의 무게를 지탱하는 위치를 중심부 꼬리뼈 쪽 허리가 아닌 어깨 쪽으로 올리고, 굽은 척추뼈의 곡선대로 갑옷을 재단하듯 새로 제작하였다. 플레이트 갑옷은 착용자 개개인의 몸에 맞춰서 제작하므로 값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왕자였고 왕으로 즉위까지 했던 리처드 3세라면 당연히 이런 맞춤 재단 갑옷을 만들어 입었을 테니 고증에 알맞는 처사.
플레이트 갑옷을 스웨덴에서 주문하고 영국에 돌아와서 바로 기마술을 시험해 보았다. 스미가 현대의 말 안장에 올라타자 레스터 대학 고고학팀은 문제를 발견했다. 척추측만증 때문에 몸의 중심이 중앙이 아니라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말의 기수를 돌리다 보면 스미는 한쪽으로 자연스럽게 쏠렸다. 즉 낙마할 위험성이 컸다. 리처드 3세가 기사들을 이끌고 기병돌격하여 직접 적을 몇 명 베어 넘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에 의구심이 생겼다. 찜찜한 가운데 중세시대 말 안장으로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현대의 말 안장을 타고도 아슬아슬했는데, 통나무를 말 위에 얹고 타는 듯하다는, 리처드 3세가 사용했을 중세시대 말 안장을 스미가 사용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연구진들, 특히 중세 기마술 전문가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스미는 현대의 말안장을 사용했을 때보다 오히려 말을 정확하게 제어하였다. 일반인들에겐 불편할 뿐인 딱딱한 중세시대 말 안장이 스미 같은 척추측만증 환자들에겐 하체를 안장에 고정시켜 오히려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안정적인 도구였던 것이다. 의도치 않았던 결과에 놀라 중세 기마술 전문가는 바로 기마창술도 연습시켰는데 여기서도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왔다. 하루 훈련만 받고 마상창기병의 자우스팅(Jousting) 창으로 정확하게 목표물을 타격하였다. 거기에 척추측만증을 감안하여 새로 제작한 갑옷이 몸의 균형을 잡아주자 무기의 숙련도까지 올라서, 약 한 달간 훈련받은 뒤 다른 중세 기마술 전문가와 함께 전통적인 마상창기병 돌진을 할 수 있었다. 리처드 3세가 1485년 보즈워즈 전투에서 기마전투를 했다는 기록은 이렇게 손쉽게 고증되었다. 심한 척추측만증 환자라도 충분히 기마전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마해서 백병전을 치르면 척추측만증 때문에 지구력이 떨어져 금방 지친다. 이 때문에 리처드 3세가 금방 적들에게 둘러싸여 전사했으리란 것이다. 또한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는 투구 위에 왕관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42] 기사들이 말을 타고 왕관을 쓴 왕을 자신들의 시야 안에 넣고 보호하기 더욱 쉬웠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43] 즉 그가 어떠한 이유에서든 낙마한 순간 죽음은 예정되었다는 것.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셰익스피어의 연극 리처드 3세에 나오는 리처드의 명대사 "말을 다오, 말을 다오. 말을 가져오면 내 왕국을 주리라."(A horse, A horse, My Kingdom for a horse.)를 보면 처절함이 이해가 된다. 말 위에서만 무예를 보일 수 있던 리처드 3세 입장에서 다시 제대로 싸울 수 있게 말을 가져오라고 악을 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해당 연구 영상
7.5. DNA 유전자 검사[편집]
모든 연구 결과가 주차장에서 수습한 유골이 리처드 3세라는 방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한 방짜리 증거가 없었다. 그래서 현재 생존한 리처드 3세와 친척관계인 후손들의 DNA 유전자 검사로 유골을 정확히 확인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부계 쪽 후손들과 모계 쪽 후손들의 유전자 검사를 시행했는데 결과는 아래와 같다.
7.5.1. 부계 Y 염색체 비교 분석/영국 여왕 정통성 문제[편집]
리처드 3세가 후사 없이 죽고 그의 형제들도 후사를 남기지 못한 관계로, 가장 가까운 부계 후손을 찾아야 했다. 리처드 3세의 고조 할아버지 에드워드 3세(Edward III)의 아들 곤트의 존(John of Gaunt)의 후손들의 유전자 정보가 필요했다. 연구에 제공된 유전자 정보는 존의 13대손 5대 보퍼트 공작 헨리 서머싯(Henry Somerset, 5th Duke of Beaufort 1744-1803)에게서 파생된 7대 후손 형제 2명, 5대 후손 남성 1명 그리고 4대 후손 형제 2명, 총 5명에게서 왔다. 검사 결과 형제 관계에 있는 유전자 정보 중 한 쌍은 아버지가 일치하지 않았고 거기에 나머지 4명의 후손도 리처드 3세의 부계 Y 유전자 정보와는 일치하지 않았다.[44] 즉 현재 살아있는 서머싯 가문의 남성들은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 아니라고 판명난 것이다. 거기에 에드워드 3세의 6대조 할아버지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Geoffrey Plantagenet, Count of Anjou 1129-1151. 풀크 5세의 장남이자 헨리 2세의 아버지) 쪽에서 내려간 부계 후손도 유전자 검사를 받았지만 마찬가지로 리처드 3세의 유전자와 일치하지 않았다.
영국 왕가의 복잡한 결혼 관계와 부계 후손의 유전자 불일치는 여러 가지 논쟁을 일으켰다. 먼저 플랜태저넷 왕조의 남자 혈통 문제가 제기되었고, 나아가 당시 영국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정통성 문제까지 야기되었다.
동양권에서 조선 왕조는 방계가 조선 후기에 왕으로 즉위했지만 입양하는 방식으로 왕통을 이어[45] 왕조의 이름이 바뀌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현재 영국의 왕사는 노르만 왕조의 윌리엄 1세(William I)를 시작으로 보지만, 왕조가 어느 정도 안정권에 들어가면 적통을 이어받을 왕자가 없었던 관계로 1-2백년 꼴로 왕조가 바뀌었다. 서양에서는 같은 가문의 시조를 중심으로 적통 혈통이 아닌 형제나 방계가 이어 받으면 왕조의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살리카법을 국법으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46] 딸이나 외가 후손이 왕위를 계승함을 인정했기 때문에, 남편의 성을 따라가는 서양권 문화상 한 갈래에서 시작은 되었으나 여왕의 남편의 성에 따라 왕조 이름이 바뀌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 영국 왕실이 좋은 예.[47] 예를 들어 조선 왕조도 이성계를 조상으로 두고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방계 왕가들이 왕위를 계승하여 왕조의 성씨인 이씨(李氏)는 안 바뀌었지만, 영국의 왕조들은 왕자의 씨가 말라(?) 버려 흡사 이성계 형제의 후손이나 혹은 딸의 후손을 중국땅에서 찾아와 조선의 국왕으로 옹립하는 꼴이 되었는데, 영국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노르만 왕조 4대 스티븐 왕이 선왕의 조카로 왕가가 한 번 바뀌고 일명 '앙주 왕조'라 불리는 플랜태저넷 왕조가 들어서고 안정이 되나 싶었는데, 리처드 3세 때 플랜태저넷 왕조의 방계 튜더 왕조로 왕위가 넘어갔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튜더 왕조는 끝이 났다. 영국 의회는 계속해서 리처드 3세의 누이의 후손들을 초청해 국왕으로 옹립했는데, 그래서 리처드 3세와 그의 형제 그리고 후손들을 플랜태저넷 왕조에서 따로 분리해 요크 왕조라고 부른다.
한동안 이 요크 왕조 계열 모계 후손[48] 을 초빙해 영국왕으로 섬겼는데, 가장 마지막에 옹립한 왕조가 현 영국 왕실의 본류가 되는 하노버 왕조이다. 하노버 왕조는 독일로 시집간 요크 왕조 공주의 후손이다 보니[49] 원래 영국 왕위계승에선 거리가 있었다. 혹 데려온 하노버 왕조 후손들이 영국에서 후사를 낳지 못한다면, 영국은 다시 다른 나라에서 국왕으로 빌려와야 하는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혹 하노버 왕조가 끝나서 영국 내 여러 다른 방계 왕족들이 서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는 심각한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제정한 법률이 영국 왕위계승서열 법이다.[50] 다행히 하노버 왕조가 안정화된 덕에 우려했던 왕위계승 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51][52] 현 영국 왕실은 요크 왕조의 후손이긴 하고 왕조의 직접적인 혈통은 하노버 왕조에서 왔지만, 법적인 정통성은 앞서 말한 왕위계승서열법에서 찾는다.
검사로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은 것은 검사를 받은 보퍼트 공작의 후손 서머싯 가문의 후손들이었고, 이걸 이유로 검사도 받지 않은 나머지 보퍼트 공작 후손들이 요크 왕조의 후손이 아니라고 주장하기엔 무리가 있다. 거기에 추가 검사로 밝혀낸 건 '5대 보퍼트 공작 헨리 서머싯'의 4대 후손즈음에 일어난 일이란 것까지다. 덧붙여 리처드 3세의 하플로 그룹은 G-P287, 서머셋 남계 5명 중 4명은 모두 R1b-U152로 나왔는데 그나마도 1명은 다른 형태인 R계열이 아닌 I-M170으로 나와서 한 집안의 후손들 5명 안에서 자기들끼리도 불일치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위의 결과를 토대로 '서머싯' 가문의 조상이며 튜더 왕조의 시조가 되는 '곤트의 존'과 그의 아버지 형제가 모두 플랜태저넷 왕조의 혈통이 아니라는 해괴한 논리가 도출되었다. 이에 따라 튜더 왕조의 정통성은 무너졌고 튜더 쪽과 혼인관계가 있었던 하노버 왕조의 정통성도 무너져서 당시 영국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왕위에 계속 있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도 나왔다.
예를 들어 경주 김씨의 문파 중에 유명한 사람의 유골이 하나 발굴되었다고 치자. 유골의 주인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알려진 남성 후손의 유전자 검사를 했는데 일치하지 않았다. 검사로 밝혀진 사실은 후손이라고 알려진 남성이 김해 김씨 문파의 혈통적 후손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생각해보자. 웃대 조상의 누군가가 바람을 피웠거나 족보를 샀다거나 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소속 가문과 실제 혈통이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남자의 집안, 경주 김씨 문파 전체의 혈통성을 부정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신라왕들의 정통성까지 부인할 수 있을까? 달 보라고 손가락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고 달이 없다고 부정하는 꼴이다.
혹 부계 정통성이 깨지는 확실한 결과물이 나와도 바뀌는 건 없다. 영국 의회가 새 임금으로 옹립할 인물을 모셔올 때 아무나 데려오지 않았다. 하노버 왕조의 경우 이미 독일 소국의 왕으로 요크 왕조의 모계 혈통이 흐른다고 봐서 모셔 왔다. 즉 요크 왕조 쪽 혈통이 부정되어도 이미 하노버 왕조의 왕가 혈통이다. 결정적으로 영국 국왕의 정통성은 앞에서 지적한 '영국 국왕 승계법(Act of Settlement 1701)'에서 나오고 그 다음이 혈통의 정통성으로 요크 왕조 모계에서 나온 하노버 왕조인 것이다.
장황하게 의미 부여할 일도 아닌 것이 계보만 훑어도 답이 나온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정통성은 리처드 3세가 아니라 에드워드 3세 - 곤트의 존 - 증손녀 마거릿 보퍼트 - 헨리 7세 - 딸 마거릿- 제임스 5세 - 메리 스튜어트 - 제임스 1세 - 딸 엘리자베스 - 딸 소피아 - 조지 1세 - 조지 2세 - 프레데릭 - 조지 3세 - 켄트 공작 - 빅토리아 여왕 - 에드워드 7세 - 조지 5세 - 조지 6세 - 엘리자베스 2세 순으로 이어졌다. 마거릿 보퍼트를 빼면 형들이 많거나 딸이라 계승 순위만 멀 뿐 모두 왕의 자식이나 손자이고, 법적인 문제니 왕위계승법까지 갈 것도 없이 리처드 3세나 서머셋 후손, 조프루아 백작의 서자손 중 누구 혈통이 바뀌었든 현 엘리자베스 여왕의 정통성 문제와는 무관하지 않을까. 다만 저 계보 중, 혹은 에드워드 3세 조상 중에 다른 혈통이 끼어들었다고 밝혀지면 좀 문제가 되겠지만.
#튜더 협회[53] 의 유전자 분석정보 해설
7.5.2. 모계 미토콘드리아 비교 검사[편집]
부계 쪽 유전자 검사로 리처드 3세의 유골임을 증명할 수 없게 되자 모계 미토콘드리아 검사 쪽으로 시선이 몰렸다.[54] 부계 쪽 유전자 검사는 이른바 '가짜 부모 현상(False Paternity Event)'[55] 이 자주 일어나 원래부터 미토콘드리아 검사에 비해서는 신뢰성이 떨어졌다. 특히 리처드 3세가 후사 없이 전사해서 리처드 3세와 똑같은 미토콘드리아를 유전받은 리처드 3세의 누이들의 후손들을 검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서 딸, 외손녀, 외증손녀 등 여자 후손들에게 이어지는 미토콘드리아 특성상 아들인 리처드는 자기 자식들에게 미토콘드리아를 물려줄 수 없지만 누이들과 똑같은 미토콘드리아가 있다. 그러니 이 누이들의 딸의 후손들을 찾아 그의 것과 비교할 수 있다는 말. 리처드 3세 누이들의 여성 후손들이 자연스레 주목을 받았고 생존해 있는 후손들을 찾아 검사를 하면 됐는데..
이미 2004년에 리카디언계 향토사학자들은 요크 왕조의 방계, 특히 리처드 3세의 누이 '앤 공주(Anne of York)'의 후손들을 주목하여 의외로 쉽게 족보를 구성할 수 있었다. 문서가 부족한 중세시대였지만, 앤 공주와 그 일가가 왕가/공작가의 귀족 신분이라 분할해야 하는 유산이 많았기 때문에 유산 관련 문서를 많이 남겼고, 따라서 현존하는 중세시대 유서를 바탕으로 족보를 구성할 수 있었다. 또한 교회에서 세례증명서나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영국에 거주하면서 목수로 일하는 캐나다인 남성이자 16대 후손 마이클 입센(Michael Ibsen)을 찾았다. 무려 엘리자베스 2세의 40촌(!) 동생 정도 된다!
모계 미토콘드리아 검사를 하는데 왜 남성인 마이클 입센을 검사했는지 이상하게 여길 이유는 없다. 마이클 입센의 어머니 '조이 입센'이 바로 리처드 3세의 누이 '앤 공주'로부터 내려오는 여성 직계 후손이라 마이클 입센의 미토콘드리아 역시 리처드 3세의 미토콘드리아와 유전자가 같았다. 당연히 리처드 3세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견되자마자 레스터대학 고고학부는 마이클 입센을 초대해 신문사와 방송사 앞에서 유전자 채취를 하였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몰라도 마이클 입센은 평생 독신으로 살아서 더 이상 후손은 기대할 수 없고 그의 형제자매 역시 독신이거나 결혼했어도 아이가 없었다. 만일 마이클 입센 사망 후 리처드 3세의 유해가 발견됐으면 유전자 검사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가 발표되기 전에 여러 방송사가 입센을 찾아가 그를 귀찮게 하였다. 이를 먼 거리에서 지켜 보던 제3자도 있었다. 웬디 덜디그(Wendy Duldig)라는 사람은 앤 공주의 또 다른 모계 직계 후손으로 입센과는 18촌 숙부 조카쯤 사이이다.[56] 리카디언계 향토사학자들도 이 사람의 존재를 인지했지만, 입센이 황색언론의 먹잇감 정도로 다루어지는 꼴을 보고 덜디그는 무명의 제보자로 남기를 원했다. 덜디그는 어느 정도 대중과 언론의 관심이 시든 뒤에야 제3의 후손으로 대중 앞에 나왔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덜디그 역시 독신에 미혼이라 리처드 3세의 유해가 2-30년만 늦게 나왔어도 생존 후손의 유전자 검사가 무척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레스터대학 고고학부에선 최적의 유전자 검사 시료를 얻은 셈이었다. 일단 같은 조상을 두었다고 추정만 할 뿐 거의 남이라고 봐도 되는 이 셋의 유전자 정보가 일치할 확률은 무척 낮았다. 리처드 3세 추정 유골과 입센의 유전자 비교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을 터인데, 여기에 입센과는 조상만 같을 뿐 전혀 관계 없는 제3의 추정 친척의 유전자 정보까지 같이 비교할 수 있다면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입장에서는 부정할수 없는 스모킹 건을 얻는 셈이었다. 그리고 99.99% 확률로 이 3명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정보가 일치함을 확인했다.[57] 더해서 유전자 분석 결과 드러난 특이점은 리처드 3세의 미토콘드리아가 하플로타입 J1C2C라는 굉장히 희귀한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였다는 것.(거기다 리처드의 부계 유전 타입도 자국 내에선 드물고, 웨일즈에 몰려있는 특이한 유형이라고) 이는 유럽 인구 전체에서 겨우 1~2%밖에 보유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검사로 드러난 위 3명의 미토콘드리아 일치는 발굴된 유골이 리처드 3세라는 증거에 무게를 더했다.
여담이지만 리처드 3세 부계 유전자 문제가 더 시끄러웠던 건 당대에 떠돌던 소문의 영향이 있었다. 그의 형 에드워드 4세는 요크 공작의 아들이 아니라 공작부인이 바람을 피운 결과물이라는 의혹이 지금껏 따라붙는데, 정작 리처드 3세의 부계 유전자가 현존하는 사람들과 불일치로 나오자 그 소문의 주인공은 혹시 에드워드가 아닌 리처드였을지 모른다고 보는 것. 일부의 의혹이지만 에드워드 5세 형제라는 유골과 대조하거나 다른 부계 후손이 갑툭튀해서 그들과 일치해야 완전히 해명될 듯 하다. 에드워드 3세의 왕비도 한 때 바람으로 사생아를 낳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잉태 시기 때 남편과 엇갈리는 행적 등으로 말이 있었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 사생아 소문의 주인공이 곤트의 존이라는 것. 이렇게 되면 뭐...
결론은 에드워드 3세의 당대 자손인 리처드와 현대 후손들은 같은 조상의 유전자가 불일치하여 둘 중 하나는 핏줄상 후손이 아니다.
에드워드 3세 이전 조상인 조프루아 백작의(헨리 2세의 부친) 서자의 후손까지 끌어다 검사했지만 이 사람 유전자 타입은 R-DF27로 드러나 리처드 3세, 서머셋 후손들과도 전부 불일치하며 카오스 상태가 된다. 조프루아 백작의 아들 헨리 2세랑 이 서자는 이복 형제이고, 조프루아에게서 내려오는 부계 유전자가 셋 다 맞아야 하는데 셋 다 불일치(...)
모계 쪽 미토콘드리아 검사 결과는 리처드 3세는 분명 요크 공작의 부인 세실리 네빌이 낳은 친자가 맞지만 현재로선 요크 공작의 아들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는 정도. 하지만 이것이 리처드의 형제 자매 모두가 요크 공작의 자식이 아니라는 증거도 아니고, 리처드만 사생아일 수 있거나 요크 공작의 친자가 맞거나 중 1.
결국 다른 부계 유전자나 역대 왕의 무덤을 발굴해 시료를 채취하지 않는 이상 누가 진짜 플랜태저넷 가의 자손인지는 모를 것이라는 점. 셋 중 하나이거나, 셋 다 아닐 수도 있고.
7.6. 재장례[편집]
원래 레스터대학교 고고학팀은 발굴을 시작하면서 어떤 유골이라도 발굴했다면 영국 고고학 발굴 법령에 의거하여 교회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골인 만큼 현재 운영하는 인근 그리스도교계 묘지로 재매장하려고 했다. 하지만 연구 결과 이 유골이 리처드 3세의 유골이 확실해지자 재매장이 아닌 재장례를 두고 활발한 논의가 나왔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생겼다.
- 먼저 왕의 유골이었기에 먼 친척인 현 여왕 엘리자베스 2세에게 영국 왕실에서 리처드 3세의 재장례를 주관할 것인지 의견을 물었다. 영국 왕실은 리처드 3세 재장례에 공식적으로 관여하지 않기로 하였다.
- 그 다음 언성을 높인 곳은 영국 국회였다. 레스터 지방 국회의원과 요크 지방 국회의원들이 서로의 역사적 관련성을 주장하며 논쟁을 시작했는데 의외로 이 논쟁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레스터시 시장이 내 시체를 밟고 리처드 3세의 유골을 요크로 가져가라고 한 것.
- 세간에 알려진 레스터 시정부와 요크 시정부의 법적분쟁은 도시 대 도시의 소송이 아닌 '플랜태저넷 연합(Plantagenet Alliance)'이라고 불리는 리카디언계 협회에서 장지를 문제로 레스터 시와의 법적분쟁을 일으킨 것이다.
리처드 3세를 레스터 지방에 재매장하기로 결정되자 장례식을 누가 주관하는가 문제가 생겼다. 영국 성공회는 당연히 성공회식 국왕 장례식을 주장했고, 영국 가톨릭은 잉글랜드 종교 개혁이 튜더 왕조 헨리 8세 때의 일이므로 성공회 시작 이전 가톨릭 신자로 살았던 리처드 3세에게는 당연히 가톨릭식 장례식이 알맞다고 맞섰다. 결국 영국법 문제와 영국 왕실의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언, 그리고 판결에 의해서 재매장과 장례식에 관한 모든 권한은 레스터대학 고고학부에 돌아갔다. 고고학부는 고증에 따라 가톨릭식으로 성공회 레스터 대성당에 재안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기사 장례식 비용으로 든 40억 원가량의 대부분은 레스터시가 부담하기로 했는데, 레스터가 리처드 3세로 벌어들일 관광수익이 천문학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 영국 왕실이 주체가 된 장례식은 아니었지만 국왕의 예우를 갖춘 장례식으로 리처드 3세의 유해는 레스터 대성당에 안장하게 되었다.#
리처드 3세가 새로 안치될 재궁(梓宮)은 다름아닌 후손 마이클 입센이 제작했는데, 위에도 나와있듯 입센이 우연히 목수기에 가능했던 일. 입센은 오크나무로 재궁을 짜고 요크 가문의 장미 문양을 새겨넣었다. 장례 행사는 발굴과 연구를 주도한 레스터대학에서 시작했다. 재궁은 국왕기를 두르고 국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깃발과 현직 군인들의 호위를 받는 가운데, 리처드 3세가 전사한 보스워스 전투지로 옮겼고, 이후 예포 발포 및 그의 넋을 달래는 가톨릭 의례를 진행했다. 그후 장례식을 거행할 레스터 대성당으로 향하였다. 일반 시민들이 경의를 표할 수 있도록 리처드 3세의 관을 사마(駟馬)가 끄는 유궁(柳宮)에 실어 운구하면서 여러 영빈과 호위병들이 따르는 가운데 레스터 시내를 행진했다. 재궁이 지나갈 때마다 시민들은 리처드 3세 국왕기를 흔들고 요크 가문의 상징인 흰 장미를 던지며 리처드 3세를 기렸다. 레스터 지역 학생들은 자신들만의 형형색색 깃발을 흔들며 왕의 귀환을 반겼다.
레스터 시가 행진 장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며느리이자 에드워드 왕자의 아내 웨식스 백작부인 소피 리스존스와 여왕의 사촌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왕가를 대신해 장례식에 참석했다. 리처드 3세의 후손인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영국 계관시인 캐롤 앤 더피의 시 '리처드'를 낭독했고#[61] 유전자 연구에 결정적 역할을 한 후손 마이클 입센, 또 다른 후손 웬디 덜디그도 참가했다. 발굴을 처음부터 주도했던 필리파 제인 랭리, 레스터대학 고고학장 리처드 버클리가 상주 역할을 했고, 천주교 웨스트민스터 대교구[62] 의 교구장 추기경과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주교[63] 의 입회 아래 레스터 대성당 주임사제[64] 의 집전으로 재장례를 하였다.
이렇게 1485년 전사하고 2012년 발굴되어 법적 분쟁을 거치기까지 500년을 넘는 한 많은 시간을 보낸 리처드 3세는 2015년 3월 26일, 영면에 들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장례식이 끝나기 무섭게 이 지역의 축구팀인 레스터 시티 FC는 왕의 은총을 받았는지 축구 역사에 남을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65]
이 팀이 우승을 거머쥐자 가디언에서는 이렇게 1면을 내보냈다.
이렇듯 리처드 3세의 유골 발견 과정부터 정말 행운에 행운이 겹쳤고, 600년 전에 죽은 왕의 원한이 2000년대를 살고 있는 후손들에 의해 해소되고 그 후손들의 노력으로 무사히 장례식을 치르게 된 것도 충분히 감동적인 스토리인데, 게다가 그 왕의 영혼이 영면한 도시를 축복했다는 판타지 동화 같은 이야기가 리처드 3세 유골 발굴 전후로 실제처럼 나타나면서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다.
유골발견 및 유전자 분석에 관한 첫 다큐멘터리 영상
유전자 분석 도중 고증한 척추측만증 환자와 전투 신경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상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리처드 3세 발굴 학술대회-과학적 결론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리처드 3세 발굴 학술대회-유골 발굴지 보고 영상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리처드 3세 발굴 학술대회-DNA검사와 결론 영상[66]
#레스터 대학에서 네이처(Nature) 지에 공개한 리처드 3세 유전자에 관한 논문
8.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그의 일대기를 극으로 만들기도 했다. 리처드 3세(연극) 참조. 이 극을 원작으로 한 리메이크도 많은데, 그 중 하나가 1995년판 영국 영화 리처드 3세(영화)이다.
- BBC에서 1980년대 초에 방영한 로완 앳킨슨 주연의 역사 시트콤 블랙애더 시즌 1에서는 첫편부터 자신을 말도둑으로 오해한 애드문드의 칼에 맞아 목이 잘려나간다(...).[67] 이후 유령이 되어 애드문드의 앞에 나타나 멘붕시키고 욕설을 퍼붓는다.
- 조세핀 테이(Josephine Tey, 1896.7.25 - 1952.2.13)의 추리소설 《시간의 딸(The Daughter of Time)》[68] 에서 중요한 소재로 다뤄진다. 이 소설은 수사 도중 맨홀에 빠지는 바람에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된 주인공 그랜트 형사가 그의 친구인 마르타 핼러드가 심심풀이용으로 보라고 가져다준 초상화들 중 리처드 3세의 초상화를 본 것을 계기로 런던탑에 갇혀 있던 에드워드 4세의 아들들(에드워드 5세 등)을 살해한 자가 그때까지 알려진 대로 리처드 3세인지 병실 안에서 지인의 도움을 받아 추리하는 내용의 소설이다.
- 2013년부터 영국 BBC에서 셰익스피어 희곡들을 원작으로 방영하는 연작 시대극 <할로우 크라운>[69] 의 후속작 장미전쟁 편에서 셜록(BBC)에서 셜록 홈즈로 출연했던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이 리처드 3세 역을 맡았다. 리처드 3세의 유골이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방영되는 것이라 어떻게 묘사될지 주목받았다. 덧붙여 셜록에서 짐 모리어티로 출연한 앤드류 스콧이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 역으로 출연했다. 공교롭게도 셜록에서 존 왓슨 역을 맡은 마틴 프리먼도 2014년 연극에서 리처드 3세 역을 맡았다. 기사
- 셰익스피어가 쓴 연극을 원안으로 한 일본 만화 장미왕의 장례 행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여기선 양성구유로 등장한다.
- 앞서 언급된 주차장 유골 발굴 건 관련, 샐리 호킨스가 주연 필리파 랭리 역을 맡은 영화 The Lost King (2022) 에 등장한다. 리처드 3세보다 발굴에 집착하게 되는 필리파에게 포커스를 맞춘 영화로, 주인공의 상상 속 인물로 나와 대사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