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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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셴룽




싱가포르 초대 총리
리콴유
李光耀(이광요)|Lee Kuan Yew


GCMG CH SPMJ


파일:lee-kwan-yew-10.webp

출생
1923년 9월 16일
영국령 해협식민지 싱가포르 캄퐁 자바 가
사망
2015년 3월 23일 (향년 91세)
싱가포르 싱가포르 종합병원
재임기간
초대 총리
1959년 6월 5일 ~ 1990년 11월 28일
제2대 선임장관
1990년 11월 28일 ~ 2004년 8월 12일
고문장관
2004년 8월 12일 ~ 2011년 5월 21일
서명
파일:리콴유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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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파일:해협식민지 기.svg 해협식민지(1923~1946)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령 싱가포르(1941~1945)
파일:Flag_of_Singapore_(1952–1959).png 싱가포르 식민지(1946~1963)
(1963~1965)
(1965~2015)
학력
래플스 고등학교[1] (졸업)[2]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법학 / 중퇴)[3]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츠윌리엄 칼리지 (법학 / 학사)[4]
부모
父: 리친쿤 (李進坤, Lee Chin Koon)[5]
母: 추아짐니오 (蔡認娘, Chua Jim Neo)[6]
형제자매
5남매 中 첫째
배우자
콰걱추 (柯玉芝, Kwa Geok Choo)[7]
자녀
슬하 2남 1녀
장남 리셴룽
장녀 리웨이링
차남 리셴양
정당
[[인민행동당|

인민행동당
]]
신체
180cm
종교
무종교 (불가지론)

1. 개요
2. 생애
2.1. 청년기
2.2. 정치 입문
2.3. 원치 않았던 건국의 길
2.4. 싱가포르의 국부가 되다
2.5. 사망
3. 비판
3.1. 권위주의적 통치
3.1.1. 스펙트럼 작전(Operation Spectrum)
3.2. 경제 성장의 허와 실
3.3. 우생학에 기반한 인구 정책
3.4. 언론탄압과 인터넷 검열
4. 기타
4.1. 한국과의 인연
4.2. 개인적인 일면
5. 사진들
6. 이름에 대하여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싱가포르정치가이자 초대 총리, 독재자. 영국령 싱가포르 자치정부 총리, 말레이시아싱가포르주 총리를 거쳐, 독립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하여 31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1990년 총리직 퇴임 이후에도 후임 고촉통 내각에서 2004년까지 선임장관(Senior Minister)을 지냈고, 아들 리셴룽이 총리에 취임한 2004년부터 2011년까지는 고문장관(Minister Mentor)을 역임하면서 정계 막후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였다.[1]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며 싱가포르를 동남아시아 제일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한 지도자이지만, 재임 기간 중 권위주의적 개발독재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언론통제와 검열 등 사회 탄압이 이뤄졌다는 점 때문에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한국으로 따지면 박정희와 비슷한 포지션을 갖고 있다.


2. 생애[편집]


나는 일생동안 네 나라의 국가(國歌)를 부르며 살아야 했다. 영국의 ‘신이여 여왕을 보우하소서’, 일본의 ‘기미가요', 말레이시아의 ‘나의 조국’, 그리고 싱가포르의 ‘전진하는 싱가포르'이다.

리콴유의 자서전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From Third World to First: The Singapore Story - 1965 - 2000) 중에서. 싱가포르의 현대사를 단적으로 요약한 표현이다.



2.1. 청년기[편집]


1923년 부유한 한족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난 중국계 싱가포르인 4세다. 그의 집안은 광동성 대포현(大埔縣)에 본적을 둔 객가였다.[2]

집안은 사업을 통해 꽤 성공했는데 그 덕분에 리콴유도 좋은 교육과 좋은 가정환경 아래에서 자랐다. 본인도 열심히 공부했는지 1935년 싱가포르 최고의 명문학교인 래플스 칼리지에 수석 입학했고, 1940년 졸업시험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전체를 통괄(영국령 말레이 연방)해서 최우수 성적을 얻었다. 쉽게 얘기하자면, 영국 식민통치 기간에 형성된 일종의 현지 엘리트 집단의 일원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수석은 그의 아내이고, 리콴유는 차석이었다.

졸업 직후 한창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시기인 10대 후반인 1941년, 일본 제국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싱가포르를 침공, 영국 대신 몇 년간 싱가포르의 주인 행세를 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리콴유는 영국 식민지 시절 친영주의적인 가족 밑에서 자랐고 영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부모 밑에서 컸기에, 리콴유 역시 영어가 모어였고 영국의 싱가포르 통치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성장하였다고 한다. 백인이 아시아인을 지배하는 상황은 자연적 이치와도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자서전의 표현을 인용하면 '못생기고 이상하게 생긴' 일본인들이 무적이어야 할 영국군을 무찌르면서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백인이 항상 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에서야 깨달았다고 한다. 한편으로 그 시절 일본 군정의 억압으로 인해[3] 그는 선임장관이 된 이후 쓴 자서전들에서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반감을 유감없이 드러냈으며, 일본의 극단주의 세력들을 청산하고 제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을 임기 내내 일본의 정치인들에게 해왔다.[4]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 영국군이 싱가포르로 돌아왔지만 싱가포르인들이 영국인을 존경하는 감정은 더이상 전쟁 전과 같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결국 이 경험이 싱가포르가 더이상 영국에 의지할 수 없고, 독립을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만들었다고 소회했다. 일본이 싱가포르를 지배하는 동안엔 대학을 다니는 것은 미룬 채 타피오카를 이용해 만든 스틱파스라는 접착제를 암거래하며 생계를 유지했다.[5]

전쟁이 끝난 뒤 영국으로 유학, 1946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에 입학했다가 194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법학과로 편입했다. 리콴유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츠윌리엄 칼리지 법학과를 졸업할 당시 Double Starred First-Class Honours를 받았다. 영국 대학은 졸업시 학위를 나누는 경우가 많은데, 성적이 높을 경우 따로 우등 표창(Honours)을 주고, 세부적으로 그 표창은 First - Class, Upper - Second, Lower - Second, Third - Class Honours로 나뉜다. 그 중에서도 특출나게 잘난 학생에겐 "Starred First"라는 세부 표창을 주고, 중간 성적, 최종 성적 모두 "Starred First"로 졸업했을 때를 "Double Starred" 라고 한다. 한 마디로 두 개의(Double) 특(Starred) - 특(First-class) - 우등 표창(Honours).[6] 식민지 출신이 이 정도 성적을 받고 졸업하는데 식민당국이 주목하지 않을 리는 없었다.

한편 이 시기에 부인인 콰걱추(柯玉芝, 1920~2010)를 만나기도 했다. 콰걱추는 싱가포르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동문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유학까지 함께 했으며 1950년 결혼하였다. 싱가포르에서 공부하던 시절 리콴유는 최고 영재였는데 자신보다 공부를 잘해서 자신을 2등으로 만든 유일한 학생이 콰걱추였다고 한다.

리콴유는 졸업 후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싱가포르로 돌아와 노조, 학생운동과 연관된 소송 업무를 맡게된다. 특히 다양한 인종과 언어, 민족, 문화가 복잡하게 얽힌 싱가포르에서 소송 합의와 중재를 위해 발로 뛰며 좋은 성과를 얻어냈기 때문에 1950년대에 이미 세간에서 유명해져 싱가포르는 물론 말레이시아에도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영국 식민당국도 리콴유를 주목했다고 한다.


2.2. 정치 입문[편집]


1954년 10월 인민행동당(People Action Party, 현 집권 여당)을 창당하고 정치활동을 본격화했다. 인민행동당이 처음 시작되었을 땐 리콴유와 같은 영국 유학파 출신의 지식인과 노동운동가 중심의 좌익 세력이 연합한 정당이었다. 리콴유는 영국에서 교육받은 영어 사용자로서 친서방주의자이며 반공주의자였다.

리콴유의 출신 배경 및 신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좌익 세력과 손을 잡은 이유는 1. 당시 좌익 세력은 굉장한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었고,[7] 2. 대중적인 기반 없이 정치적 성공을 얻을 수 없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초기엔 당내 좌파에 밀려날 뻔도 했지만 이후 불어닥친 반공 바람에 힘입어 리콴유와 당내 우파는 인민행동당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활발한 정치활동으로 리콴유는 점차 주민들의 지지를 확보, 1959년 5월 주민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이 싱가포르 자치의회 의석 43석 중 41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당수인 리콴유는 자동으로 싱가포르 자치정부 수반에 올랐다.

자치 정부 수반이 되긴 했지만 싱가포르는 너무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리콴유 정부는 이웃 대국인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해서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다. 싱가포르는 자원도, 인구도, 내수시장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말레이시아를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다.[8] 처음에는 말레이시아도 해외 교역의 관문으로의 가치를 보고 싱가포르를 받아들였지만[9], 중국계가 압도적인 싱가포르와 싱가포르의 공산주의 운동은 말레이시아에게 위협적으로 보였다.


2.3. 원치 않았던 건국의 길[편집]


파일:external/i302.photobucket.com/lky-cries.jpg

싱가포르 축출되다

부서져버린 꿈... 이제는 각자의 길로



당시 영상.

1965년에 말레이시아 연방은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축출하였고, 싱가포르는 독립하게 된다. 리콴유와 그의 정부 각료들은 8월 7일에 툰쿠 압둘 라만 말레이시아 총리에게 불려가 축출 통보를 받았다.[10] 8월 9일에 말레이시아 의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싱가포르 축출안을 가결했고, 같은 날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독립을 선포했다.

말레이시아는 화교 인구가 다수인 싱가포르의 존재가 국가 통합성, 내부 안정에 장애를 초래하는 '혹'이라고 인식했다. 싱가포르가 떨어져나간 이후로도 1969년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하고 중국계 야당이 약진하는 일이 벌어지자 폭동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계엄령이 몇년간 실시 된 뒤에 말레이계 주민에 대한 우대정책이 시행되어 화교와 인도계에 대해서 차별정책을 진행하였다. 몇몇 화교계 가문이 재계를 지배하며 원주민보다 월등한 경제력을 자랑하는 필리핀 같은 나라를 보면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의 주류를 이루는 화교를 부담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리콴유는 독립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에게 몇백만 명의 시민들을 저버릴 셈이냐고 호소하기도 했으며,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독립당한 것을 가장 가슴 아프고 많은 사람을 실망시킨 때라고 회고하였다.(디스커버리 '건국의 아버지 리콴유'편 참조) 리콴유는 직접 쓴 자서전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에서, 강제 독립 당시의 절망적이었던 상황을 절절하게 묘사한다. 대략적으로 설명하면 군대 없고, 자원 없고, 땅 없고, 구성원들은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 타밀인 등인데 서로 싸우기나 하지 등 정말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도시 국가[11]에 불과한 상황에서 축출당했을 때의 서러움은 정말 심각하여 영연방의 기억을 되살려 영국에 빌붙어 볼까 아니면 말레이에 다시 어떻게 붙어볼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지배했다고 한다.

그러나 2015년 기밀해제되어 공개된 고켕스위에게 보낸 편지와 고켕스위가 작성한 메모를 보면 말레이시아 연방 시절 리콴유는 본인이 내키든 내키지 않았던 결국 싱가포르가 독립하는 방법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기밀해제된 자료에 따르면 리콴유는 독립한다는 전제 하에 최대한 싱가포르가 이익을 얻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고 독립 이후에 발생할 충격을 최대한 완화하기 위해서 말레이시아 측과 상호 동의하에 축출당하는 것처럼 연출하기로 미리 합의했다고 한다. 리콴유 정부는 1965년 7월 고켕스위를 말레이시아 중앙정부에 보내 최종적으로 분리 독립에 합의했으며, 기밀 해제된 문서를 볼때 이미 독립 이후에 어떻게 해야할지 대강의 계획은 세워뒀던 것으로 보인다.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와 합의해 분리독립한다는 계획을 극히 일부 각료들끼리만 진행하고 다른 각료들에게는 비밀로 한 탓에, 말레이시아 정부가 싱가포르 축출을 통보한 날인 8월 7일 아침에서야 리콴유에게서 독립 계획을 전해듣고 크게 반발한 각료들도 있었으나 이미 대세를 뒤집을 순 없었다.관련 자료

리콴유는 독립 당시 주변 대국, 특히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무력 침공을 두려워했다. 싱가포르가 독립할 때도 모든 말레이시아 정치인들이 싱가포르의 축출을 원했던 것은 아니고 중국계를 몰아내고 싱가포르 땅을 차지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싱가포르는 식수조차도 말레이시아로부터 구입하고 있었으므로 말레이시아가 행여나 마음만 먹는다면 싱가포르로의 식수 공급을 중단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12] 실제로 그 이후 초고속의 경제성장을 겪으면서도 리콴유는 이러한 식수공급의 중단을 매우 두려워했다. 특히나 말레이시아의 정세가 급변하여 싱가포르의 축출 혹은 강제 병합을 외치는 강경분자들의 힘이 세질 때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었는데 그 때마다 엘리전을 통한 무력행사를 불사하며 싱가포르의 식수공급 중단 사태는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13] 또한 당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는 반서방주의자로서 친서방 국가였던 말레이시아와 대결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리콴유는 독립 이후 체제를 정비하고 군비를 확장하면서 말레이시아 혹은 인도네시아의 침공을 제일 두려워하였다.

이렇듯 싱가포르의 독립은 마냥 급작스러운 것은 아니었고 리콴유 역시도 대비는 했으나, 마냥 상황이 내키지는 않았는지 이후로도 계속 안타깝다는 식으로 표현하곤 했다.[14]


2.4. 싱가포르의 국부가 되다[편집]


역사상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일부 지도자들의 능력과 그들이 이끄는 국가의 국력 간에 전혀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헨리 키신저


독립 후 리콴유는 우선 순위를 정하여 국가개발에 힘을 쏟았다. 특히나 제일 중요시 여긴 것은 군대 양성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원래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에 병합되어 안전을 확보한 뒤 자치권이 확보된 하나의 독립된 자치주로 살아가기를 원했었다. 특히 이 과정 가운데 화교가 축출당하면서 싱가포르가 다른 나라에 집어삼켜지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였다.

말레이시아에서 축출될 당시에 말레이시아 정치인 가운데에는 싱가포르가 합병되길 원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는데, 이들의 생각은 중국인들을 내쫓고 말레이인만 있는 싱가포르를 흡수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인부터 중국계인 리콴유는 이런 식의 합병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싱가포르가 독립한 이후에도 이러한 움직임은 끊임없이 있었고 인도네시아도 호시탐탐 싱가포르를 노렸기 때문에 리콴유는 군대 양성에 열을 올렸다. 사실상 주변국들에 비해 인구가 너무 적은 데다가 이전에 주둔해 있던 군대는 대다수가 말레이시아로 옮겨가고 남아있는 군대도 말레이 민족의 특색이 강했던터라 여러모로 싱가포르의 정체성을 갖춘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실제로 1967년에 국가예산 당 국방비 비율이 7%였던 것이 1972년에는 무려 38%를 차지했을 정도였으며, 이 돈의 대부분은 싱가포르군의 무기 체제 개선에 사용되었다.

다만 군대가 바로 만든다고 되는게 아닌지라 일정 기간동안 영국군의 보호 아래에 있었으며[15], 이후 이스라엘 장교단을 불러 군대를 육성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데, 영국과 밀접하면서도 영국이 아닌 이스라엘을 택한 것은 비슷한 상황(중동의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빠르게 군대를 조직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국식 군제를 따르면 최소한 20년이 걸릴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인재양성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현재도 싱가포르는 대한민국, 홍콩 못지않게 교육열이 높은 나라인데 이는 중국인 특유의 습성과 더불어 리콴유의 피나는 노력이 있던 탓이다. 이를 위해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이 가운데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 있다. 바로 리콴유를 지배한 법칙인 '모든 것은 상위 10%가 중요하다'였다.

그는 모두가 잘해서 모두가 복지를 누리고 다같이 잘사는 방법은 자원이 많거나 역사가 깊은 나라에나 가능하지 싱가포르에는 택도 없는 이야기라고 여겼다. 그런 이유로 리콴유는 학력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최대한 분리하는 대신 교육을 상위 10%에 집중투자하는 방법으로 경쟁에 불을 붙였다.

모든 시험과 관문에서 상위 10%만 더 좋은 대학과 더 좋은 직장에 진학하는 체제가 강한데 어느정도냐면 리콴유는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 전국모의고사를 보면 전체 평균에는 관심도 없었고 오직 상위 10%가 어느정도의 절대적 성과를 올렸는가만 관심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 기준에 맞추어 교육체제를 정비하여 1957년에 52%였던 싱가포르의 문해율이 1990년에는 90%로 증가했다. 이와 함께 대학도 열심히 손봤으며, 그 덕분에 싱가포르 국립대학은 아시아 1위대학이자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안에 꼽는 명문대가 되었다.

또한 경제발전에 항상 골몰했다. 싱가포르는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잘나가는 항구이자 태평양과 인도양의 거점으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리콴유는 자서전에서 밝혔다시피 말레이시아에서 축출당한 시점에 이미 싱가포르는 교역항으로의 이점을 잃어버렸다고 판단했다. 왜냐면 주변에 대체 항구들이 즐비했고, 특히나 싱가포르를 내쫓으면서 이미 말레이시아는 다른 항구(조호르바루)를 물류 교역의 거점으로 키워놓을 계획을 수립 중에 있었고 인도네시아 또한 싱가포르보다 더 좋은 위치를 주장하며 물류 교역의 중심지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였기 때문.

단순히 물류의 거점만 내세우며 살기에 싱가포르가 가진 장점이라고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집중한 것이 산업화였다.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을 거친 후에 물건을 파는 것이 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다른 나라에 비해 근면하고 신뢰도 높은 국민성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 것이라 생각했고 인종 통합에 골치를 썩으며 정부의 부패에 휘둘리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빌빌대는 동안 싱가포르는 리콴유의 독선적이지만 효율적인 정책을 통해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품을 되파는 무역의 거점이 되어 경제성장을 시작했다.

이러한 중개무역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라 금융업의 허브로 위치하는 것과 관광산업 또한 밥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여 현재의 싱가포르는 홍콩, 도쿄와 더불어 금융의 중심지이자 조그만한 섬나라 치고는 말도 안되는 관광 인지도를 지닌 나라로 성장했다.[16] 그 결과 싱가포르의 GDP는 1960년에 7.1억 달러 미만이었던 것이 1990년에 361.4억 달러가 되어 30년 만에 51배나 증가했고 30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4%를 기록했다. 물론 1인당 GDP도 비슷한 시기에 428달러에서 11862달러로 28배 가까이 증가하여 리콴유는 집권기간 동안 고국을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 증진시킨 세계의 유일한 지도자로 간주된다.[17]

싱가포르는 이미 1968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을 넘기긴 했으나 본격적인 경제성장은 1970년대에야 본격화되는데, 1970년 기준으로 926달러도 되지 않던 1인당 GDP가 1981년에는 5596달러를 기록, 싱가포르는 1980년대 초에 드디어 선진국 진입에 성공하게 된다.[18]

사회적으로도 1960년으로부터 1990년까지 기대수명은 65세에서 74세로, 전화 보급율은 3%에서 38%로, 관광객 수는 10만 명에서 530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런 업적들로 인해 중국덩샤오핑은 22,000명이 넘는 관리들을 싱가포르에 파견해 싱가포르의 경제 성장을 배우고자 했으며, 르완다폴 카가메의 정책도 리콴유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외환 보유고를 관리하기 위해 1981년에 싱가포르 정부 투자 공사를 설립했는데, 이렇게 마련한 기금을 통해 1997-98년에 있던 아시아 금융 위기 동안 싱가포르는 통화를 보호하며 안정적인 환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리콴유는 "국민의 사랑을 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더 중요하다.", "국가 발전에는 민주주의보다 규율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기며 다른 나라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상상초월의 방법들을 생각했는데 사실 2010년대에 들어 얘기한다면 돌 맞을만한 얘기들이었다. 싱가포르의 통제질서와 벌금제도, 태형제도는 오늘날에도 유명하지만[19] 사실 이정도는 리콴유가 재임 기간 동안 추진했던 정책에 비하면 굉장히 양호하다.

1959년 만 35세라는 젊은 나이로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된 이래[20] 1990년 11월 28일에 명목상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30년이 넘게 싱가포르를 통치하였으며,[21] 후임으로 고촉통(吳作棟)이 집권한 후에도 선임장관(Senior Minister)의 지위로서 '실질적인 총리는 리콴유'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싱가포르 정부를 사실상 좌지우지했으며,[22] 2004년에는 아들 리셴룽(李顯龍)을 총리에 앉혀 사실상 부자세습에 성공했다.

이후 리셴룽 총리 시절에는 고촉통이 선임장관 지위를 물려받고 리콴유 자신은 고문장관(Minister Mentor)[23]이 되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011년 5월 21일에 리콴유는 고촉통과 함께 각각 내각고문과 선임장관에서 물러나며 권력에서 완전히 은퇴했는데, 이는 그 해 총선에서 집권당인 인민행동당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지고 야당인 노동당이 사상 최다의석을 확보한 데 따른 데 대한 위기의식의 발로로 보인다. 본인은 성명을 통해 "총선 이후 새로운 정국에 대해 깊이 생각해 이번 결정을 내렸다"면서 "리셴룽 총리와 젊은 지도자들이 새롭고 젊은 내각을 구성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5. 사망[편집]


2013년 2월 15일에 리콴유는 장기간의 심장 부정맥으로 뇌로 가는 혈류가 일시적으로 중지된 후 싱가포르 종합병원에 잠깐 입원한 적이 있고, 퇴원 후에도 항응고제 치료를 받아오다가 2015년 2월 5일에 폐렴으로 싱가포르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후 3월 18일에 사망했다는 보도까지 나올 정도로 위독해졌고,[24] 닷새 뒤인 2015년 3월 23일에 싱가포르 표준시로 오전 3시 18분에 향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리콴유의 장남리셴룽 현 싱가포르 총리가 발표하였다. 3월 23일부터 29일까지 국가애도기간이 선포되어 싱가포르에 있는 모든 국기는 조기를 달았다.

파일:external/i.guim.co.uk/1000.jpg

생전에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던 리콴유의 장례식은 2015년 3월 29일에 국장으로, 싱가포르 국립대학에서 엄수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싱가포르 국민들 대다수와 세계 각국의 전현직 국가 정부 수반 다수를 위시한 약 170만 명이 참석했고,[25][26]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비공개로 화장되어 5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의 유골함에 함께 안치되었다.


3. 비판[편집]



3.1. 권위주의적 통치[편집]


만일 간디가 싱가포르의 리콴유 정부에 대항하는 대중적인 불복종 운동을 이끌었다면, 그는 이 아시아인 수상이 이전의 서구 수상보다 더 가혹한 지배자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틀림없이 감옥의 높은 장벽 뒤로 간단히 사라졌을 것이다.

T.J.S 조지[27]


내가 한 모든 것이 옳았다는 말은 아니지만, 내가 한 모든 것은 명예로운 목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재판 없이 동료들을 가두는 나쁜 짓을 해야 했습니다.

리콴유, 2010년뉴욕 타임즈의 세스 마이단스(Seth Mydans)와 한 인터뷰 중


리콴유가 총리로 재직하던 당시의 지지율.
연도
지지율
1968년
86.7%
1972년
74.1%
1976년
77.7%
1980년
64.8%
1988년
63.2%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은 20세기 중반부터 싱가포르 정치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1965년부터 1981년까지의 싱가포르는[28] 야당의 존재를 허용했음에도 싱가포르 의회의 모든 의석을 인민행동당 한 당이 독차지하여 이 시기의 싱가포르는 사실상 일당제 국가나 다를 바 없었다. 1981년에 있던 보궐선거에서야 야당이 한 선거구에서 승리해 의석을 차지했고[29] 그리고 1984년에 있던 총선에서야 싱가포르의 야당은 79석의 의석 중 무려(?) 2석을 얻으며 본격적으로 의회에 입성하게 된다.

당시 싱가포르의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렇다 할 부정선거 의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 야당에 대한 우회적인 탄압은 상당히 자주 이뤄졌기에 야당이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을 비판하거나 위협하기 어려웠다. 덤으로 리콴유는 이후에도 타 정당이 당선된 국회의원 지역구에는 예산을 깎기까지 했다.

인도의 언론인 T.J.S 조지가 1973년에 저술한 리콴유 전기에 의하면,[30] 리콴유의 인권 탄압은 '당시 경제적 번영을 이룩한 아시아의 나라들 중 싱가포르만큼 분노를 자아낸 데는 없다'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단의 내용들은 이 책에 소개된 리콴유 집권 초기에 있었던 인권탄압 목록들이다.

당시 싱가포르의 정치범들은 가족들과 변호사와의 면회, 독서를 사실상 금지당한 채 독방에 감금당하거나 고문까지 당했고,[31] 심지어 의사가 이들을 치료하는 것도 허용되지 못했으며, 석방된 후에도 경찰의 감시 하에 직업 활동과 외출에도 제한을 받은 것은 물론, 해외 출국도 금지되었고, 심지어 시민권을 박탈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에 엠네스티가 파견한 영국 국적의 여성 조사관 에스트렐라 카레라스(Estrella Carreras)는 출국 후에 싱가포르 당국에 의해 재입국이 금지되는 등 리콴유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외국인들은 언론인, 교수 가릴 것 없이 외국으로 추방시켰다.

그리고 리콴유는 식민지 시절에 만들어진 치안유지법(Internal Security Act)과 사회안전법(Preservation of Public Security Ordinance)을 오히려 식민지 시절보다도 강화시켜,[32] 정적들과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을 영장 없이 임의로 체포하고 재판 없이 무기한 감금했으며, 이러한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33]

1968년부터는 아예 노동자의 파업을 법적으로 금지했으며, 1969년 4월 중순부터 12월까지는 리콴유가 직접 지시를 내려 싱가포르의 개정된 헌법을 비판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했다. 그리고 1970년에 리콴유는 교수들 앞에서 자신에게 비판적인 외국인 교수들에 대해 '철새들이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는 것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며 비난하고 '강의 내용이 싱가포르의 국정 방침과 일치하지 않으면 정치학과, 사회학과, 철학과를 폐쇄하겠다'는 위협까지 가했다. 리콴유에게 반대하는 학생들과 교수들은 대학교에서 쫓겨났다.[34]

덤으로 리콴유는 '군사화된 생활 방식에 의한 국가 건설의 잠재력'에 매력을 느끼고는 싱가포르인들을 군대 및 경찰간부 훈련단, 싱가포르 소년단, 대학 분견대, 교련단 등 여러 획일적인 조직들에 가입시켰는데, 실제로 당시 싱가포르는 훈련과 가두 행렬이 일상화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싱가포르의 '전시민의 군인화'는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파파도풀로스의 그리스'를 연상케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T.J.S 조지의 리콴유 전기에서 언급되지 않은 내용들을 더하자면, 리콴유 시기 싱가포르에서는 정치범들이 자백하는 모습이 TV에 공개적으로 중계되었으며, 이 책의 출판 이후 시점인 1978년자 엠네스티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싱가포르는 UN 회원국임에도 인권 조약에 서명하거나 비준하지 않았다고 한다.

덤으로 사회적으로도 엄격한 통제가 가해져 '소위 히피족이 싱가포르인의 정신을 부패시키고 싱가포르 사회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명목으로 남성의 장발을 금지시키고 이를 외국인 관광객에게까지 적용해 머리가 윗옷 칼라를 넘으면 싱가포르 입국을 제한하거나 비행기가 싱가포르를 경유하기만 할 뿐이라도 강제로 머리를 자르게 했으며, 만약 이들이 장발을 그대로 놔둔 채 싱가포르를 떠나면 몇 달 동안 재입국을 못하게 했다.[35] 게다가 사기업에서조차 장발족에 대한 차별 대우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여교사들마저 어깨 밑으로 내려가는 머리와 파마가 금지되었고, 문화부장관은 정부의 두발 정책에 반대하는 대학생에 대한 징집을 '추천'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적어도 1973년부터는 시위를 막기 위해 밖에서 10인 이상이 모이는 것까지 금지시켰으며, 오늘날에도 싱가포르에서는 도심 공원 한 곳에서만 시위가 가능하다. 이 곳에서 경찰의 허가를 받은 시위가 허용된 것이 2000년 9월이었고, 자유로운 시위는 무려 2008년 9월에야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던 판이었으니, 프리덤 하우스가 1972년부터 매년마다 발표하는 세계의 자유 지수에 따르면 리콴유가 집권한 1972년부터 1990년까지 싱가포르의 세계의 자유 지수 평균은 약 4.69였다.[36] 참고로 전두환 시기 대한민국의 세계의 자유 지수 평균이 약 4.86이었으며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시기 필리핀의 세계의 자유 지수 평균이 리콴유보다도 높은 약 4.64였다. 물론 리콴유는 이 둘과는 달리 자신의 반대파에게 누명을 씌우거나 자국민을 상대로 학살을 저지르는 일은 집권 기간 동안 전혀 하지 않았다.

리콴유는 개인적으로 검소하고 절약하는 타입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그 자체는 칭찬할 일이지만, 독재와 개인의 청렴성은 무관하기 때문에 충분한 방어의 근거는 되지 않는다. 돈을 사용함에 있어 청렴하지 못함은 사람의 부패를 가늠하는 여러 기준 중 한가지일 뿐이기 때문이다.[37]

현재 싱가포르에서 이권이 따르는 국영기업이나 관변단체의 수장, 또는 정부 요직들은 상당부분 리콴유 일가나 그 측근들이 차지하고 있다. 당장 싱가포르 최대의 기업으로 싱가포르 여러 대기업의 지주회사이자 전 세계 여러곳에 투자를 하고 있는 국영기업 '테마섹 홀딩스'의 CEO가 그의 며느리이자 리셴룽 총리의 부인인 호칭(何晶) 여사다. 물론 이들은 효율적으로 자신의 기업들을 이끄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지도자의 친인척이 국가 공기업 사장으로 있는 것이 적절한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한국에서도 리콴유의 통치를 독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리콴유 옹호자들이나, 독재임을 인정하면서도 우호적으로 보는 옹호자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경제기반은 부유하되 자유와는 동떨어진 사회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독재정치에도 성공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사회안정을 이룩했다는 점때문에 주변국 독재자들에게도 나름대로 영감을 주기도 했고,[38] 특히 중국도 싱가포르가 일당독재체제 아래에서 사회안정과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점때문에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펼칠때 싱가포르의 사례를 적극적으로 참고했다.

실제로 덩샤오핑과 리콴유는 사적으로 매우 절친한 사이였고, 이후로도 리콴유과 장쩌민, 후진타오와도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사실 말레이시아는 1957년부터 2018년까지는 야당세력이 싱가포르에 비해 강했기는 했지만 어쟀거나 국민전선(BN)이 권력을 독식했던 국가였고 비록 말레이계 우대정책 때문에 갈라섰다고는 하지만 막상 이후의 경제정책들을 보면 반공주의 등 리콴유 시절의 싱가포르와 정치적인 성향면에서 비슷한 면이 많았다.

또한 인도네시아도 1998년에 민주화 되었지만 수하르토 집권기때는 독재국가였으며[39] 태국도 수시로 군부독재정치가 펼쳐지고 캄보디아도 훈 센 독재체제에 베트남과 라오스도 일당독재체제이니 한번쯤은 참고할 만한 모델인 셈이다.


3.1.1. 스펙트럼 작전(Operation Spectrum)[편집]


싱가포르 정부는 1987년 5월 21일과 6월 20일에 '마르크스주의 국가를 건설할 목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이용해[40] 공산주의 통일전선 전술을 사용하여 싱가포르의 기존 사회 및 정치 체제를 전복하려고 한다'는 이유로 22명을 재판 없이 구속했으며, 1987년 말까지 이들 중 사회복지사 빈센트 쳉 킴 추안(Vincent Cheng Kim Chuan, 钟金全)[41]을 제외한 전원을 석방했다.

그러나 1988년 4월에 석방된 수감자 9명은 언론 성명서를 통해 당시 적용된 모든 혐의가 조작이며 당시 싱가포르 당국으로부터 고문[42]을 당했다고 폭로한다. 이에 싱가포르 정부는 수감자들의 주장을 전면 부인하며 고문을 폭로한 9명 중 8명을 다시 구금하고는 '언론 성명서에서 주장한 모든 내용을 부인하겠다'는 선언에 서명하게 한 후 다시 석방시켰다. 심지어 당시 수감자들을 변호한 변호사 2명과 언론 성명서의 초안을 작성하고 배포하는 것에 동참한 1명을 구금하기까지 했다.

한 수감자가 이런 조치에 항소하자 1988년 12월 8일에 싱가포르 항소 법원은 싱가포르 법원이 치안유지법에 기반한 구금의 실질적인 근거를 검토할 권한이 있음을 시사해야 한다며 4명의 구금자를 석방하도록 명령했으나, 싱가포르 당국은 이에 반발하며 즉시 4명의 구금자를 다시 구금한 것도 모자라 아예 헌법과 치안유지법을 수정하여 이 사건의 사법적 조사와 상소를 사실상 막아버리며 싱가포르에서 독립적인 사법 심사가 일어나는 것을 원천 봉쇄한다.

해외에서는 물론 고촉통을 포함한 당시 싱가포르의 고위 지도층조차 당시 수감된 사람들이 진짜 내란 선동을 도모했단 것에 의심을 품었다고 하며, 심지어 리콴유 본인도 1987년 6월 2일에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의 회담에서 구금자들은 '가난하고 박탈당한 사람들을 돕고 싶어하는 선행자일 뿐'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3.2. 경제 성장의 허와 실[편집]


'싱가포르에서는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안 되어 있어서 아주 부자가 아닌 이상, 70살 먹은 노인들도 알바에 나서야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라는 식의 얘기가 나올 만큼 싱가포르는 복지 제도가 아주 미약하다. 다만 주택제도만큼은 거의 사회주의에 가깝게 장기임대를 보장하고 있다.

싱가포르에는 CPF(중앙연금준비기금)제도라는게 존재하는데 자신의 소득중 일정비율을 의무적으로 저축하는 개념이다. 즉 일종의 국민연금 제도로,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하고 저축한 돈으로 노후를 편하게 보내도록 하자는게 기본 취지이고 싱가포르 정부에서는 이 CPF로 조성된 재원을 운용하여 매년 수익을 거두고 있다고 하지만 내 돈을 내 마음대로 못쓰게 하니 반발이 없을 수 가 없다.

이를 바탕으로 연금보험/의료보험으로 전용한다. 문제는 정말 싱가포르는 집/연금/의료 빼고는 어떠한 복지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저 세개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얘기이고 뿐만아니라 사회적인 안전망 측면에서는 부실한 것이 맞다.

하지만 이는 싱가포르 내에는 사회적 안전망이 얼마나 사람들을 도태시키는지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있고 리콴유가 특히나 이런 것을 매우 두려워했기 때문에 싱가포르의 복지가 개선되길 바라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철저한 엘리트주의로 상위 10%들의 능력에게 모든걸 투자해서 성장해온 나라가 싱가포르다. 따라서 계층 간 소득격차가 극심하기 때문에 지니계수는 칠레, 멕시코와 비슷한 수준으로 심각하고 빈곤율도 자그마치 28%나 된다.

그런데, 싱가포르도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심한 나라이다보니 싱가포르인들은 연금재원이 장래에 고갈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고 그에 대한 비판여론도 존재한다. 이 저출산이 심한 이유 중의 하나는 큰 빈부격차로서, 이를 통해 보면 싱가포르의 문제는 2010년대의 한국과 별반 다를 바 없다.[43]

그렇지만 오늘날 싱가포르는 관광/물류 위주가 아닌 2차 산업 기반의 견고하고 건전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계 20위 내에 드는 1인당 GDP, 2000년대 중후반까지 7% 이상의 성장률을 유지했던 행정적 역량 등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아울러 효율적으로 운용되는 공기업 역량과, 아시아 최대의 공업단지인 주롱공업단지, 싱가포르를 관광국가로 변모시키기 위해서 국가주도하에 조성된 다양한 테마시설과 국가차원의 마케팅능력도 있다는 평가도 있다.

말레이시아 역시 규모만 놓고보면 작은 나라가 아닌데 인도양을 걸쳐 물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당연히 국토 최남단에 있는 테마섹(싱가포르)을 이용하는 것이 제일 옳았다. 말레이시아 전체가 못살아서 그렇지 축출 당시에도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도시중 하나였다. 하지만 싱가포르 축출 이후 말레이시아에서는 탄중팔레파스를 주요 거점 항구로 키웠고 한국으로 치면 부산과 같은 위치로 만들었다.

물론 싱가포르의 경제력이 증가하면서 싱가포르에 인접하면서 동시에 탄중팔레파스와의 거리도 가까운 조호르바루가 부산의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 수많은 인도네시아의 항구들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가 물류 교역의 거점으로 큰 것은 그 나라의 인프라가 만든 힘이고 그 인프라를 만든 노력은 리콴유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국내의 보수언론과 경제지들은 "가난한 어촌을 세계적 선진국으로 키웠다"면서 리콴유의 독재를 옹호하는 면이 있는데,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우선 싱가포르는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말라카 해협의 끝자락에 있기 때문에 중개무역에 최적화된 위치에 있으며, 물류수송로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도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상술했듯이 말레이시아 연방이 형성될 당시에도 다른 말레이 지역에 비해 부유한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영제국은 집요하게 이곳을 노렸고, 결국 식민지로 먹어 삼킨 뒤에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중개무역항이자 군항으로 집중개발하였다. 당장 2차대전 시기까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영국의 이권을 수호하던 영국해군 동양함대의 근거지가 바로 싱가포르였으며 2차대전 시기 동남아시아 전역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본군 남방작전의 최우선 목표는 싱가포르 점령이었다. 싱가포르 전투에서 영국군이 패배하자 윈스턴 처칠 수상은 영국 역사상 가장 참담한 패배라면서 한탄했다. 그만큼 싱가포르는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리콴유의 집권 훨씬 이전부터 중요했고, 번영하던 도시였다.

게다가 싱가포르는 전술한 것처럼 리콴유의 집권 직후인 1960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428$(2023년 환율로 4,439$)를 기록했는데, 이는 당대 아시아에서 잘 살았다고 잘못 알려진 필리핀[44]보다도 훨씬 높고 한창 성장가도를 달리던 일본[45]과도 별로 차이가 없었으며 홍콩[46]과도 사실상 완전히 똑같다. 게다가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1960년 세계은행이 추산한 세계 1인당 GDP 평균[47]과 비교해도 그렇게까지 낮지는 않았고, 심지어 스페인[48]포르투갈[49]보다도 높았다! 즉 싱가포르는 당대에도 이스라엘[50], 일본 정도를 제외하면 아시아에서는 가장 잘 사는 국가 중 하나였던 셈이며, 세계 평균에 대입해 보면 오늘날 기준으로는 아르헨티나, 말레이시아, 멕시코급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었다.[51]

3.3. 우생학에 기반한 인구 정책[편집]


우리는 한 달에 200달러도 못 벌고 많은 아이들을 양육하고 교육시킬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두 명 이상을 갖지 말라고 격려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지금 우리 사회를 육체적, 지적, 문화적으로 빈혈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추세를 바로잡기 위한 첫 번째 잠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후회할 것이다.

리콴유가 1969년에 남긴 말.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높은 출산율이 개발도상국 경제에 부작용을 줄 것이라며 저출산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 정책은 우생학 성향을 갖고 있었다.[52]

리콴유는 1970년부터 'Stop at Two' 캠페인을 개최해 둘째를 낳은 여성에게 불임 수술을 받을 것을 권유했고, 셋째와 넷째 자녀는 교육 과정에서도 차별을 받았으며, 자녀가 셋 이상인 부모도 혜택이 준 데다가 둘째 이상을 출사한 공무원들에게는 출산 휴가를 가지는 것이 금지되었고, 아이를 많이 낳을수록 병원에서 청구하는 비용도 의도적으로 상승시키기까지 했다. 물론 리콴유는 불임 수술을 받은 여성들에게는 1만 달러의 보조금을 주는 나름의 당근 전략도 내세웠다.

불임 수술은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행해졌는데, 리콴유는 이 정책들이 '무책임한 사회적 불량자들'이 더 많은 자녀를 낳으면 정부가 제공하는 더 많은 사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이 정책으로 싱가포르의 출산율은 1972년의 3.04에서 1975년의 2.07로 대폭 낮아졌지만, 이후에도 리콴유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결혼하고 출산할 가능성이 낮다'는 추세를 더 심각하게 여기고 '대졸 남성이 교육 수준이 낮은 아내를 선호한다'는 것을 우려한 리콴유는[53] 1983년부터 '남자들이 결혼을 하더라도 자기보다 지적인 여성들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취지로 싱가포르 남성들에게 대졸 여성들과 결혼할 것을 장려했고, 리콴유 본인도, 그리고 아들인 리셴룽 총리도 굉장한 엘리트와 결혼했다. 또한 대졸 여성에게 자녀를 3~4명 이상을 낳을 것을 권장하며 이 기준을 충족하면 주거와 교육에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이는 어느 한 개인의 지성을 교육으로 극복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어렵다는 사고에 근거해 결국 유전자를 잘 만나야한다는 이론에 입각하여 진행한 것이었으나, 이 정책이 싱가포르 내에서도 큰 비판을 받자 1985년에 이 정책에서 특히 논란이 된 부분들은 폐기되거나 수정되었고, 1986년에 이 캠페인은 취소되었다.[54]

이 정책은 훗날 저출산의 요인으로 평가받는 교육열을 건드리기 보다는 오히려 장려하는 정책이었기에 인적자원 투자의 효용성은 높인 대신 저출산 해결 정책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었던 데다가 정부가 가정이 해야 할 일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가족주의적 철학을 동아시아가 서구에 앞선 부분으로 평가하여 가정의 부담을 정부가 제대로 덜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는 한계점이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물론 이 제도는 전술한 것처럼 오히려 대졸 이상의 여성, 다자녀를 둔 고학력 어머니들 사이에서 반발을 일으켰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들은 리콴유 재임 당시 꽤나 성공을 거두었고 현재 아시아에서 엘리트들의 집약도로만 놓고 보면 손꼽을 만한 나라가 된 배경에는 이러한 리콴유의 정책을 무시할 수 없다.

이후 바로 다음 해인 1987년에 리콴유는 'Have Three or More(당신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다면)' 캠페인을 실시하며 세번째 자녀를 둔 부모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셋째 아이의 병원비도 낮추는 등 규제를 완화하며 출산율을 늘리고자 했고, 이에 따라 싱가포르의 출산율은 1986년의 1.43에서 1988년의 1.96으로 크게 늘었다. 그러나 이후 싱가포르의 출산율은 낮아져 2019년 기준으로 싱가포르의 출산율은 1.14에 불과하다. 싱가포르 출산율에 대한 참고자료

3.4. 언론탄압과 인터넷 검열[편집]


싱가포르의 인터넷망은 항상 감시당한다.

정부가 무상으로 보급하는 인터넷망은 항상 감시되고 있으며, 리콴유 일가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게시물과 댓글이 올라오면 바로 조사나온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SNS도 예외가 아니다. 이렇게 조사만 나오면 모르겠는데, 싱가포르의 많은 기업이 이 일가 소유이기 때문에, 만약 이 일가를 나쁘게 말했다가 찍히면, 본인 일자리를 잃거나 혹은 허위사실 유포 또는 명예훼손으로 거액의 벌금을 내야 한다.

여기에 언론기관에 대한 통제도 심해서 형식상 언론의 자유가 있으나 실제로는 없다. 다만 예전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들과 북한, 중국처럼 무식하게 자기 욕했다고 잡아가서 때리고 고문하지는 않고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고소하는 방법을 쓴다. 여기에 독재국가가 대부분 그렇듯이 사법부의 독립성은 말뿐이며, 대부분 정부에 유리한 판결을 내기 때문에 거의 100% 패소한다. 그러니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란 실제로는 없는 셈이다.

패소한 자가 돈 안내고 배쨀까봐, 아예 언론사들은 미리 거액의 보증금을 예치해 두고, 만약 정부에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여 승소하면 그대로 이 보증금은 날아가고 다시 거액의 보증금을 채워야 한다. 안넣고 배째면 등록 취소. 또 사실 많은 언론기관이 국영 투자업체 테마섹 홀딩스가 대주주라 이런 과정을 안 거치고도 압력을 가해 반정부적 보도를 걸러낼 수 있다.

그리하여 실제로 싱가포르의 언론자유지수는 2023년 기준으로 약 180여개 국 중에서 129위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잘 사는 선진국치고는 꽤나 낮은 수치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이렇게 리콴유 일가가 지배하는 싱가포르를 잘사는 북한이라고 혹평, 비난하기도 한다.

외부사이트 접속자체가 불가능한 북한이나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같은 대중적인 인터넷 사이트, 서비스도 거침없이 차단하는 중국과 달리 싱가포르에선 외국의 인터넷 사이트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다. 싱가포르의 언론매체에서도 외국의 민주화운동 관련 뉴스가 자주 보도되는 편이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소국인데다가 어쨌든 정치적으로는 서방과 같이 행동을 하므로, 서방은 중국, 베트남, 북한과는 달리 싱가포르의 정치 체제나 반민주적인 행태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중국, 북한과 달리 유튜브나 트위터를 막지 않는다. 그러니까..

1) 서방권 전반은 싱가포르의 정치 체제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에 딱히 외부 인터넷이 위험하지 않다.

2) 반정부적인 주장을 올려봤자 나라가 좁기 때문에 금방 추적되어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싱가포르에서는 중국, 북한 등과는 달리 구글, 유튜브를 자유롭게 쓸 수 있지만, 싱가포르인들은 이런 데다가 정부 비판적인 표현을 하는 것을 극히 조심스러워 한다.

이렇게 싱가포르 국내 문제에 관해서는 적극적인 통제와 각종 소송 등을 통해서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외국의 언론까지 교묘하게 입을 막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명예훼손은 자국 언론의 입을 틀어막는 전가의 보도로 쓰인다.

아니나 다를까 싱가포르에서 리콴유 사후 독재자라고 비판한 동영상을 올린 학생이 바로 체포되었다. 링크 그는 이 일로 2015년 5월에 4주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출감 후 또 다시 리콴유를 비방하는 동영상을 올려 2016년 9월에 이번엔 6주 징역형과 2,000 싱가포르 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출감 후 2017년 미국으로 가서 망명을 신청해 받아들여졌다. 링크[55]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리콴유가 수없이 많은 여러가지를 금지시키고 못하게 막았는데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막아내지 못한 것도 있었는데... 다름아닌 마작이었다. 그래서 "중국인들에게 어지간한 것들은 강요하고 금지할 수 있어도 마작은 금지할 수 없었다."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56]

T.S.J. 조지가 쓴 리콴유 전기에 의하면, 리콴유 시기에 싱가포르의 라디오, TV 뉴스는 교육 계획을 다룬 별개의 코너가 있던 것 외에는 항상 정부의 발표를 인용한 것만 방송할 수 있었으며, 싱가포르의 모든 언론사와 언론인은 매년 정부로부터 받는 면허를 갱신해야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치안판사에게는 신문사에 직접 들어가 조사를 할 수 있다는 특별 권한이 주어졌다.[57] 심지어 리콴유의 출판 담당 비서가 편집자들에게 직접 어떤 책을 출판할 수 있는가 없는가 여부까지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법에 의하면 검열을 받지 않고 내놓을 수 있는 출판물은 '초대장이나 명함, 계산서 서두나 편지지 서두'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한 리콴유는 지방 신문 기자들이 자신의 공개 연설을 취재할 수 없게 하는 등 자신을 취재하는 기자들에게까지 통제를 가했으며, 외신 특파원들은 리콴유에게 호의적인 성향의 기자들만 선발되어 싱가포르에서 활동할 수 있었고, 심지어 한 뉴욕 타임즈와 이코노미스트 소속 미국인 특파원은 원래 리콴유 정권에 호의적이었음에도 상술한 영국인 엠네스티 조사관 추방 문제를 다뤘다는 이유로 거주지가 도청되고 언론인들의 모임에서 쫓겨난 후 싱가포르에서 추방되었다.


4. 기타[편집]


권위주의적 통치, 장기 집권 속에서 국가 발전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박정희, 덩샤오핑, 수하르토, 마하티르 빈 모하맛 등 동시기 아시아의 다른 지도자들과 종종 비교되기도 한다.

특히 박정희와의 공통점이 몇 가지 있는데, 둘 다 권위주의적 통치자이자 독재자였다는 점, 국가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점, 일본의 식민지배를 겪었다는 점, 자식들(박근혜, 리셴룽)이 훗날 자국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점 등이 있다.


4.1. 한국과의 인연[편집]


한국인은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인의 풍습, 문화, 언어를 말살하려 했지만 민족적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한국인은 굳은 결의로 야만적인 압제자에게 항거했다. 일본은 수많은 한국인을 죽였지만 그들의 혼은 결코 꺾지 못했다.

리콴유 자서전(The Singapore story) 中


리콴유는 '식민시절 한국은 강압적 통치를 받았지만 민족적 자긍심이 강한 한국인의 정신을 꺾을 수는 없었다'고 발언했다. 또한 제국주의 시절에는 상당히 드물었던 현상으로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대부분의 피식민지 국가들은 식민주의에 순응하였으나 유독 한국만 끊임없이 저항을 하였다고 평하였다. 1970년대에 한국 정치인들을 만나보니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일본 문화에 익숙한 일본식 엘리트들이었음에도 일본인에 대한 반감과 미움이 어마어마해서 놀랐다라고 한다.

한편 리콴유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일본이 싱가포르를 통치했던 방식은 법치주의적이고 젠틀한 영국과는 달리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어서 학생시절 큰 충격을 받았다고 서술하였다. 일본에게 일본이 중국과 한국, 싱가포르에서 자행했던 잔인한 행위에 대하여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여러번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비유럽국가에서는 유일하게 단결을 잘 하여 선진국으로 성장한 일본에 대한 경외감 또한 동시에 존재한다고 서술하였다. 일본군이 싱가포르 거리를 깨끗이 청소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1994년, 야당시절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태재단 이사장 신분으로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라는 미국의 외교 전문지에 아시아의 민주화에 대한 글을 기고 한 후 리콴유 전 총리가 설한 "아시아적 가치"를 두고 국내외 저명한 석학들까지 가세해 수년 간 치열한 설전이 벌어졌다. 리콴유는 아시아적 특수성을 강조하는데 반해서 김대중은 민주주의의 보편성을 강조하였다. 외국에서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권위주의 정치인과 민주화 운동가의 논쟁을 꽤 흥미있게 보았던 모양이다. A Conversation with Lee Kuan Yew, Is Culture Destiny? The Myth of Asia's Anti-Democratic Values. 그래도 리콴유 자신은 한국에 꽤 우호적이다.


대한뉴스 1261호 영상.

1979년 10월 16일부터 22일까지 한국을 방문해서 피살당하기 직전의 박정희 대통령과 정상회담[58]을 했던 내용도 자서전에서 비중있게 소개했다. 당시 영부인 대행 격으로 통역을 맡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했지만, 자서전에서는 (이름은 따로 적지 않고) 그냥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가 통역을 했다" 정도로만 썼다.

아울러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일화를 인용해 공식석상에서 견해나 권고를 피력한 경우가 6차례였고, 박정희 대통령 피격 소식을 접한 후 그 부재가 단순한 지도력 공백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한국이 유무형으로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 보기도 하였다.[59][60]

미국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 덩샤오핑(鄧小平) 전 중국 최고지도자,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일본 총리와 함께 ‘아시아의 3대 위대한 지도자’로 꼽았다.

아시아의 3대 지도자를 꼽자면 중국의 경제 근대화를 일궈낸 덩샤오핑(鄧小平)과 일본을 완전한 친미 국가로 자리잡게 하여 일본의 재건을 이끌어낸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 그리고... 이 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현재 한국은 역사바로세우기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안합니다. - 리콴유[61]


동아일보

대체로 개발독재 권위주의적 지도 체제를 좋아하는걸로 보인다. 덩샤오핑과는 냉전 때 만나 중국의 빈농 문맹 출신들이 많이 모인 싱가포르도 경제성장을 해냈으니 중국도 해낼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회고록에 평을 남겼는데, "김대중은 높은 가치를 굳게 지켜낼 줄 아는 사람이며, 여러 차례의 위기를 겪으며 강해진 사람이다. 더 높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자제[62]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파일:external/pds.joins.com/NISI20150323_0010746759_web.jpg

1999년에 한국을 방문했는데, 이전에 키보드 배틀을 벌였어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그의 "아시아적 특수성"이라는 주장은 학계에도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일례로 매우 유명한 정치학자 중 하나인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경우, "동양유교문화가 민주주의와 조합되기 어렵다는 리콴유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것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동양이 고도의 경제적 번영을 이룬 가운데서도 광범위한 정치참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고 비판한 바 있으며, 위에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이에 대해 권위주의적 지도자의 군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민주주의는 크게 진전하고 있음을 주장하며 상술한 보편성을 들어 반론을 하기도 했다. 링크


4.2. 개인적인 일면[편집]


사후에 자신의 집이 국가 성지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집을 허물라고 지시했다.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도록 한 것도 묘지 만든답시고 국토라고는 도시 하나뿐인 싱가포르의 공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취지였다고.[63]

본디 영어가 모어(제1언어)인 리콴유인지라 공석/사석 할거 없이 영어를 주로 사용했으나, 어릴 때 말레이어를 배워서 말레이어를 할 줄 알았고, 표준중국어할 줄 알았다.[64] 약간 어눌하지만 표준중국어가 그에게 있어서 제2언어(제1외국어)도 아닌 제3언어(제2외국어)였던 점을 감안하면 열심히 학습한 것이다.[65] 본인 말로는 표준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해 왔다고 한다.

싱가포르라는 나라의 특성상 살아남기 위해서는 외국의 인재를 데려오든지 외국의 기업을 들여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총리 재임 시절 영어 공용어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왔는데 2009년에는 한계성을 언급하며 일부 실패를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 2006년 방한 강연에서는 한국 대학생들에게 외국어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 만큼 외국어 교육 그 자체를 부정한건 아니며,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시행착오를 일부 인정한 것이라고 보는 게 보다 타당할 듯.


1956년의 기자회견 영상. 중간중간 싱가포르 특유의 억양이 약간씩 나오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훌륭한 발음을 보여준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교육받은 엘리트였던 리콴유는 완벽한 영국식 보수적 용인발음(Conservative RP)을 구사할 정도로 영어에 능통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 국민들 역시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잘 하게 되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 영어 공용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첫 세대에서는 힘들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가 공용어로 자리를 잡으면 세 번째나 네 번째 세대쯤에서는 완벽한 영어 사용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생각은 무참히 빗나갔다. 물론 싱가포르의 영어 사용능력은 아시아에서는 대적할 나라가 없고 어지간한 유럽 국가들과 비견할만한 수준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캐나다와 같은 영국계가 주류인 국가만큼의 수준은 아니다. 이는 인종의 차이뿐만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이 너무 심해 공용어로는 영어를 써도 중국인들끼리는 중국어를 쓰고 각자 집에 가서는 자기네들 방언을 쓰는 등 중구난방으로 생활 언어의 통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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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2권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1998년의 첫 자서전인 <싱가포르 스토리>[66]는 청년기와 1965년의 분리독립 관련 내용이고, 2000년에 출간된 후속편 격인 <일류국가로의 길>은 건국 이후 싱가포르 초대 총리이자 국부로서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둘 다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정보에 의하면 이슬람에 굉장히 부정적이었다고 하며, 이슬람은 해로운 종교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리콴유도 쿨하게 인정했다. 동남아의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해 나온 비판 중에 나온 말이라고 했으며, 모든 종교가 극단적으로 가면 신념을 지킨답시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변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슬람이 그 빈도가 매우 높아서 동남아시아[67]의 대표격으로 예를 든 것 뿐이라고 했다. 거기다가 사실 그렇게 비밀스러운 내용도 아닌 것이, '리콴유와의 대화'라는 책을 보면 리콴유가 이슬람 세계에 대해 비판을 하는 부분이 한 챕터에서 나온다.

하지만 리콴유는 극단주의를 싫어하는 것이지 이슬람 신자를 싫어한 것은 아니어서, 싱가포르도 온전한 중국계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말레이계에 대해 권리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정치나 경제 요직에 이슬람 신자들을 등용하기도 했다.[68]

항상 경계하고 의심하지만 그렇다고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고 실용성을 추구하는 것은 리콴유 개인의 특성이고 이는 싱가포르에서도 현재 통용되는 뿌리깊은 바탕이다. 반대파의 새싹이 될 비판적 젊은이들을 정부에 참여시켜서 옹호자로 길들이지 않았다면 싱가포르의 체제는 오래 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영토가 작은 나라의 중국계 지도자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리콴유는 키가 180cm가 넘는 장신이었다. 부인 콰걱추 여사 또한 170cm가 넘어 그의 가족 대부분은 장신이다.

리콴유가 독재를 해도 폭력을 거의 쓰지 않은 것은 아버지 리친쿤의 영향이 컸는데, 정확히는 4살이던 리콴유가 아버지가 가지던 값비싼 병을 깨자 아버지한테 우물로 끌려나간 후 귀가 잡아당겨진 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리콴유는 자신의 세 자녀가 자신의 말을 안 들으면 폭력보다는 엄한 질책을 하는 방식을 썼다고 한다.

리친쿤은 아들이 집권한 후에도 고물상 수선공으로 일했다고 하는데, 한 기자가 “왜 수상의 아버지가 이런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까? 편안하게 사실 수 있을 텐데.”라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원래 직업에 충실할 따름이오. 내 아들이 수상이지 나는 수상이 아니지 않소?



5. 사진들[편집]


파일:external/www.challenge.gov.sg/lky-page-image-31.png

1976년 싱가포르 국립 경기장에서 열린 '원예와 아쿠아리움 물고기 쇼' 개막식에 참석하여 부인 콰걱추(柯玉芝) 여사와 정부 요인들과 함께 시찰하고 있는 사진.

파일:external/www.straitstimes.com/istanalky0503.jpg

1966년 National Day(국경일) 기념식에서 유소프 빈 이샤크 싱가포르 대통령 내외와 회동한 사진.

파일:external/pds.joins.com/24223334.jpg

1979년 10월 19일 청와대를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영애 박근혜와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일주일 뒤에 박정희는 암살되었다.


6. 이름에 대하여[편집]


한자
李光耀
한어병음
Lǐ Guāngyào / 리광야오
객가어 발음
Lí Kông-yeu
한국어
리콴유 / 이광요
영어
Lee Kuan Yew
Lee Kwan-Yew

그의 이름은 한자로 李光耀라고 쓴다. 과거 한국의 언론에서는 리콴유뿐만 아니라 한자 이름을 한국식으로 읽은 이광요라고 하기도 했다.

그의 이름 '콴유'는 로마자로 Kuan Yew라고 쓰는데, 이 철자가 어떤 중국어 방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일단 '光'을 'Kuan'으로 발음하는 방언은 상하이 등지에서 쓰이는 오어(吳語) 정도인데 리콴유 가계가 객가인 것으로 보았을 때 오어를 구사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耀'를 Yew라고 표기한 것은 객가어 쪽에 가깝다. 그의 동생인 李天耀(Lee Thiam Yew)의 발음은 객가어에 가깝다는 느낌이지만, 역시 그의 동생인 李祥耀(Lee Suan Yew)의 경우 '祥'을 'Suan'으로 발음하는 방언이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아마도 표준중국어와 객가어 등 여러 방언이 뒤섞여서 비슷하게 흉내낸 표기로 짐작된다.[69]

파일:external/www.youngparents.com.sg/A_Boy_Named_Harry_The_Childhood_of_Lee_Kuan_Yew.jpg

그의 아버지 리친쿤은 영국령 싱가포르에 3대째 정착해 있었던 화교 집안으로서 부유할뿐더러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아 영어에 능통했고, 그래서 아들 리콴유에게도 중국어식 이름 콴유뿐만 아니라 해리(Harry)라는 영어식 이름을 붙여줬다.

리콴유의 모어는 영어였고 자라면서 사용했던 이름도 해리였으며, 그의 말년에 이르러서도 옛 친구들은 리콴유를 Harry Lee라고 불렀다. 지금도 홍콩 사람들의 경우 앞에 영어 이름을 붙이고 뒤에 중국어 이름을 붙인 일종의 영-중 혼합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70] 리콴유 역시 자라면서 사용했던 이름은 "Harry Lee Kuan Yew"였다. 그러나 리콴유 본인은 이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독교 신자도 아닌 중국계 아이가 영어식 이름이 있다고 학교에서 놀림받았기 때문.[71] 후일 정치에 입문하면서 중국계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해리를 떼고 그냥 리콴유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니셜인 LKY라고 칭해지는 경우도 많다.


7. 관련 문서[편집]



[1] 선임장관(Senior Minister)과 고문장관(Minister Mentor) 두 직책 모두 리콴유가 총리직 퇴임 이후에 내각의 일원으로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만들어낸 직책으로, 이 기간 동안 리콴유는 싱가포르 정부에서 사실상 상왕에 가까운 지위에 있었다.[2] 리콴유 본인은 평생 본적지에 가본 적도 없지만, 현재 대포(다부)현이 속해있는 광둥성 메이저우시(梅州市) 탕지천 정부에서는 리콴유 기념관을 세워 싱가포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관광지를 만들었다.[3] 일본의 동남아에 대한 군정은 대체로 가혹했지만, 중일전쟁의 여파로 특히 화교들은 더 크게 탄압받았다.[4] 일본을 향한 리콴유의 감정은 서양인들을 무찌른 유일한 아시아인이라는 경외감과 동시에, 싱가포르인, 중국인 및 동남아시아인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학살했던 일본인의 야만성에 대한 혐오감이 동시에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감정은 수카르노 등 일본의 군정을 겪은 동남아 민족주의 운동가들 사이에서 공유되었다.[5] 리콴유 자서전 1권 76페이지부터 일본군 보도부에서 복무하던 시절의 일화가 있다.[6] 구체적으로는 케임브리지 학부 시스템의 Tripos를 알면 이해가 쉽다. Law Tripos는 3년 과정인데, 1년차 Part IA, 2년차 Part IB, 3년차 PartII로 나뉜다. 매 학년 말에 시험을 봐서 성적을 받게 되는데, 1년차와 2년차 성적을 합산해 Part I 성적이, 3년차 성적이 Part II 성적이 되는 것이다. 이 때, Part I과 Part II 성적이 모두 First면 Double First, Starred First면 Double Starred First가 되는 것이다. 법학 단일 전공이고 중간 성적과 최종 성적이 모두 Starred First였단 얘기다.[7] 지금이야 공산주의가 실패한 실험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2차 대전 종전 직후에 공산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꽤나 매력적인 정치체계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이 당시 싱가포르는 주류 민족집단인 화교들의 조상 나라 중국이 공산화에 성공하여 국가 건설에 매진하고 있었기에 공산주의의 호소력이 매우 컸다.[8] 다만 리콴유의 오른팔이었던 고켕스위는 처음부터 말레이시아 연방 가입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는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고, 결국 싱가포르는 독립하게 되었으니 고켕스위의 생각대로 된 셈이다.[9] 싱가포르는 말레이 반도 최남단에 있어서 서방세계로부터 넘어오는 물류교역의 중심지였다.[10] 라만과 리콴유는 말레이시아 연방 시절 많이 대립했지만, 라만과 리콴유의 개인적인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둘은 독립을 위해 함께 한 동지였다. 그래서 라만은 리콴유에게 "우리가 하나의 연방에 있을 때는 적이었지만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와 다른 독립된 국가가 된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 친구이자 동지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11] 싱가포르가 번영한 항구였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레이 반도와 정치적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번영이었다.[12] 실제로 마하티르가 2018년 재집권한 뒤 상수도 공급계약의 원점 재검토를 요구하며 식수공급중단 카드를 내보이기도 했다.[13] 현재도 말레이시아에서 물을 공급받고 있지맛 정수 시설이 전세계 최고 수준인 싱가포르에서는 말레이시아에서 수입한 물을 싱가포르에서 정수과정을 거치고 병에 담고 포장해 역으로 말레이시아에 물을 되팔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부자들은 싱가포르에서 수입된 물만 먹는다. 여타의 개발도상국들이 그렇지만 병에 담긴 생수라고 해서 결코 안전하지 않기 때문. 특히나 가격이 저렴할수록 위험하고 가격이 비싸질수록 먹을만하지만 여튼 조심해야 한다.[14] 옛 영국령 홍콩 당시 신계 지역을 영국이 추가적으로 장악한 이유, 그리고 홍콩 반환 당시 홍콩 전역을 모조리 반환하기로 한 이유를 대입해보면 답이 바로 나온다. 싱가포르는 홍콩으로 치면 이 신계 지역을 제외한 초창기의 영국령 홍콩이 통째로 타국으로 갈라져 나온 격이기 때문이다. 또한 리콴유 역시도 연방 잔류파였다. 축출 여론이 연방 전체에 걸쳐 대세였던 탓에 결국 잔류 노력을 접었을 뿐.[15] 원래는 영속적으로 영국군의 보호를 받길 원했으나 1970년대영국의 경제가 파탄나면서 이 또한 굉장히 어려워졌다.[16] 비록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일본이 앞장 섰으나 1997년 아시아 금용위기 이후 싱가포르, 홍콩이 일본의 1인당 GDP를 앞섰다. 현재도 그러고 있다.[17] 이를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전체 GDP는 72.4억 달러에서 834.6억 달러로, 1인당 GDP는 4,364달러에서 27,394달러로 증가한 셈이다.[18] 1981년 당시 1인당 GDP 세계 평균이 2594달러에 불과했다.[19] 그의 자서전인 '싱가포르 이야기'에서 자신이 선생님에게 맞았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나는 서양 교육계에서 왜 매질에 그렇게 부정적인지 이해할 수 없다. 내 친구들이나 나에게는 체벌이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과거의 이런 모습이 현재의 싱가포르태형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20] 참고로 세계 최연소 수상인 캄보디아훈 센이 만 32세에 총리에 올랐다는 것을 감안하면, 리콴유는 매우 이른 나이에 집권한 셈.[21] 사실 리콴유의 집권 당시에 외국에서는 종신 총리를 예상하는 여론도 있었다. 사실 종신 총리로 집권했으면 그 피델 카스트로보다도 긴 장장 56년(!!)이나 국가원수로 집권했다는 대기록을 남겼을 것이다.[22] 다만 고촉통도 14년 동안 장기집권을 하면서 나름대로 입지를 구축하기는 했다.[23] 한국언론에서는 대부분 '고문장관'으로 표기했다. 주 싱가포르 한국대사관 역시 고문장관이라고 표기. 선임장관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시 싱가포르 정부에서 한국 신문에 실은 싱가포르 홍보광고에서는 스승장관이라고 표기했다.[24] 참고로 이 보도는 신원 미상의 미성년자가 만든 가짜 뉴스였다.[25] 이는 싱가포르 인구의 약 30%에 달하는 엄청난 수치다.[26] 현직 국가 정부 수반이 참석한 경우는 한국(박근혜 대통령), 일본(아베 신조 총리), 인도(나렌드라 모디 총리), 호주(토니 애벗 총리) 등이었고, 중국은 리위엔차오(李源朝) 부주석을 파견했다.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등과 함께 참석했다. 대만의 경우는 마잉주 총통이 '하나의 중국'을 요구하는 중국과의 마찰을 고려하여 국장 직전에 개인 자격으로, 비공개 조문을 하고 돌아갔다.[27] Thayil Jacob Sony George, 1928~, 리콴유의 전기를 저술한 적이 있는 인도의 언론인. 이 사람도 싱가포르 당국에 의해 추방되었다.[28] 이 시기에 국회의원 선거를 총 4번(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치렀다.[29] 당시에 이 안손 선거구에서의 선거에서 우승한 후보는 노동당 소속의 J.B. 제야렛남(Joshua Benjamin Jeyaretnam, 1926~2008)이었다.[30] 한국에서는 1988년에 남도문화사에서 번역 출간되었다.[31]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고문의 폭력성은 덜했다고는 하지만, 환각제를 투여당한 정치범들도 있었다고 한다.[32] 참고로 식민지 시절에는 사회안전법이 상당히 온건하게 적용되었다고 한다.[33] 실제로 리콴유 집권 시기에 재판 없이 구금된 사람들은 1,600명 이상이었고, 1959년부터 1990년까지 싱가포르에서 수감된 정치범 수는 915명에 달했다고 한다.[34] 고촉통 총리 시기에도 더 스트레이츠 타임스(The Straits Times, 1845년에 창간된 싱가포르의 최대 신문사)에 정부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대학 교수가 공금 횡령 혐의로 학교에서 쫓겨났는데, 그 '공금 횡령'이라는 게 실제로는 '복사기 불법 사용'을 과장해서 발표한 것이었다고 한다.[35] 이 때문에 클리프 리처드레드 제플린, 비 지스처럼 장발을 가진 외국인 가수들은 예정된 싱가포르 공연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36] 정확히는 1972년부터 1980년까지는 평균이 5(PR 5+CL 5)였고,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평균이 4.5(PR 4+CL 5), 1989년과 1990년은 평균이 4(PR 4+CL 4)였다.[37] 다른 국가에서 악명이 높은 독재자들 중에서도 사적으로는 청렴했던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자기 아이들에게 특혜를 주지 않았고, 스탈린의 어머니는 아들이 최고 권좌에 오른 후에도 이전부터 살던 조지아의 허름한 옛집에서 계속 살다가 타계했다. 마오쩌둥 또한 자신의 후광만으로 자녀들이 높은 정치인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 고위직에 오르지 못하도록 제약을 걸었고 마오의 자녀들은 모두 정치와 관련없는 직업에 종사했다.[38] 물론 비단 리콴유만 영감을 준 것은 아니다. 다만 스탈린 격하 이전에는 스탈린이 가혹한 독재정치를 펼쳤음에도 소련이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는 점 때문에 세계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상당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면 된다.[39] 실제로 리콴유는 수하르토와 서로 절친한 관계였다. 실제로 리콴유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동남아시아의 강력한 경제 성장은 수하르토 씨의 정책, 안정성과 경제에 대한 초점 덕분'이라고 여겼으며, 수하르토도 리콴유를 '명확하게 말하고 신뢰할 수 있고 판단력을 높이 평가하는 친구'로 호의적으로 평가했고, 덤으로 수하르토 치하의 인도네시아는 싱가포르 개발을 위한 공동 프로젝트에도 여러 번 참여하기도 했다. 참고자료 리콴유가 화교 후손이었던 것에 반해 수하르토가 화교를 탄압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흥미로운 점이다.[40] 당시 수감자 대부분이 가톨릭 평신도들이었으며, 야당인 노동당을 비밀리에 도왔다고 한다.[41] 1990년 6월 중순에야 석방되었다.[42] 당시 수감자들은 휴식 없이 서 있는 채로 가혹하고 끊임없는 심문을 받았으며, TV에서 공개적으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라고 자백하라고 강요하기, 가족과 친구들을 인질삼아 협박하기, 잠 안 재우기, 얼굴 등의 신체를 3일 동안 구타하기, 몸에 찬물을 끼얹은 후 에어컨이 강하게 틀어진 얼어붙은 방에 70시간 동안 감금하기 등의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43]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빈부차 문제와 다른 것이 비교적 빈부격차 문제가 적은 서유럽 주요 선진국들도 거의 다 저출산 문제를 겪고 있고 그래서 이민 받아들이는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출산율 높은 국가들은 대체로 개발도상국이고 빈부격차 심한 편인 국가들이다. 인식 정서 문제가 더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44] 264$, 2023년 환율로 2,738$[45] 475$, 2023년 환율로 4,927$[46] 429$, 2023년 환율로 4,450$[47] 452$, 2023년 환율로 4,688$[48] 396$, 2023년 환율로 4,108$[49] 360$, 2023년 환율로 3,734$[50] 1,229$, 2023년 환율로는 12,748$[51] 반면 당시 한국의 포지션은 오늘날 기준으로 놓고 보면 방글라데시, 인도 수준으로 최빈국까지는 아니여도 명백한 후진국들이었다. 물론 이는 당대의 빈국들이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던 것의 영향이 크다.[52] 사실 리콴유는 "사람의 지능은 유전의 영향이 80%고 양육의 영향이 20%다"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53] 중국계가 75% 이상이어서 유교적 가치가 강한 70 - 80년대의 싱가포르는 고학력 남성이 저학력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54] 다만 적어도 이 정책은 단순 우생학적인 배경으로만 실시한 것은 아니고, 보통 자식들의 교육은 어머니가 담당하니 자식들이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려는 의도도 들어있었다. 완전 동일한 예는 아니지만 유대인들은 비슷한 이유로 어머니가 유대인이여야 선천적 유대인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자식 교육은 보통 어머니가 담당한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55] 다만 이쪽은 여러 인종과 종교들이 용광로처럼 섞인 싱가포르에서 종교 비하적 영상들을 올려온 전적이 있었기에 '인종차별 발언'도 체포 사유에 들어갔다. 참고로 이 자는 미국에 가서는 무려 소아성애자를 옹호하는(!) 영상들을 올려오다가 2020년에는 아동 음란물 소지 및 유포 혐의가 발각되어 구속당했다.[56] 장제스마오쩌둥 역시 본인들이 권좌에 있을 당시 마작을 때려잡으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중화권(특히 화베이권)은 마작 없이는 하루도 못 살 정도로 마작사랑이 매우 대단하다.[57] 참고로 싱가포르의 공식 대변인은 싱가포르의 TV 뉴스를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TV 프로그램'이라고 자평했는데, 이는 당시 싱가포르 뉴스가 서로 다른 7개의 언어로 방송되는 언어적 다양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58] 이때 부산에서는 부마민주항쟁으로 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국무회의에서도 논란이 있었다.[59] 실제로 5공화국 출범 "직후", 한국은 무기 개발 부서를(특히 미사일) 축소했으며, 세계은행의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한 협상에서, 1970년대 중공업 육성 정책으로 난립한 자동차, 중공업의 구조조정을 진행할 것을 강요받았다. 물론 이 구조조정은 유신 말기에도 이미 필요성이 거론되었고 김재익 경제수석 등이 적극 찬성했던 정책이었던 건 맞다. 하지만,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것과 미국 입김이 강한 외국 금융기관이 잠재적으로 미국과 경쟁하게 될 분야 규모를 줄일 것을 강조하는 건, 그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60] 현대 정주영 창업주나 현대자동차 포니 정 회장의 자서전에는, 당시 세계은행측이 자금지원을 빌미로 우리나라의 산업 구조에서 자동차를 포함한 중공업 규모를 축소하려 한 정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61] 개인적 판단보다는 상대 국가의 정세에 척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엿보인다고 할 수 있는데, 너무 뻔하다보니 도리어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를 조소하는 듯한 멘트로 여겨지기 좋은 주장이라 조갑제 등이 이 발언을 활용하였다.[62]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1998년 홍콩의 성도일보(星島日報)에서 김대중을 평한 내용이 있다. 야당 시절 생명의 고비만 수차례를 넘긴 고초를 겪은 김대중 당선자가 속된 말로 "손볼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상황이었는데도 보복 대신 화해와 타협을 택한 DJ를 장수를 용서한 조조에 비유하면서 "간웅과 노정객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평을 남겼다.[63] 그러나 아들 리셴룽 수상은 이를 따르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추모열기를 이용하여 같은 해(2015년)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선전한다.[64] 해당 동영상 1분에 나오는 내용에 의하면 표준중국어는 그가 구사하는 언어 중 제3언어(제2외국어)이고, 그래서 본인은 그렇게 썩 유창하게 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다른 동영상 보러가기[65] 과장 좀 보태서 리콴유가 누구인지도 전혀 모르고 중국어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링크된 동영상들을 보면 그냥 중국인 할아버지가 중국어 하는 동영상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66] 한국어판은 '리콴유 자서전'이란 이름으로 나왔다.[67] 실제로 싱가포르 바로 옆의 인구대국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모두 이슬람 국가이다.[68] 리콴유가 말레이시아령 싱가포르 주 총리였던 시절의 싱가포르는 인종폭동이 빈발하던 나라였으니 다인종 공존이 필수 과제였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이 소수자인 말레이계, 인도계 등에 대한 배려이다.[69] 아들 리셴룽(Lee Hsien Loong)은 한어병음 방안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표준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하였다.(리셴룽은 1952년생이고, 한어병음방안은 1956년에 제정되었다.) 비슷한 사례가 장제스, 장징궈 부자. 장제스는 방언 발음을 바탕으로 자기 이름을 Chiang Kai-shek으로 썼지만 장징궈는 표준중국어 발음대로 Chiang Ching-kuo로 표기하였다.[70] 예를 들어 양조위도 Tony Leung Chiu-wai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홍콩 연예인 상당수가 이름이 이런 식이다.[71] 한국에 번역된 '리콴유 자서전' 40 페이지 및 162 페이지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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