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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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든 백작부인
마거릿 로즈
Princess Margaret, Countess of Snow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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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거릿 로즈
Margaret Rose
출생
1930년 8월 21일
영국 스코틀랜드 앵거스 글래미스 성
사망
2002년 2월 9일 (향년 72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에드워드 7세 병원
배우자
제1대 스노든 백작 안토니 암스트롱존스
(1960년 결혼 / 1978년 이혼)
자녀
장남 데이비드[1], 장녀 사라[2]
아버지
조지 6세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형제
언니 엘리자베스 2세
종교
성공회 (잉글랜드 국교회 / 신명:마거릿)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축복받은 어린시절
3.2. 사교계의 꽃
3.3. 결혼 소동
3.4. 스캔들의 여왕
3.5. 사망
4. 성격
5. 가족 관계
5.1. 조상
6. 창작물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영국공주. 영국 국왕 조지 6세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차녀이자, 엘리자베스 2세의 여동생이다.

마거릿 공주라는 칭호가 보편적이지만, 전남편 스노든 백작 안토니 암스트롱존스와의 결혼으로 얻은 칭호인 스노든 백작부인으로도 불렸다.[3] 아름다운 외모와 자유분방하고 발랄한 성격, 화려한 스캔들 때문에 당시 영국 사회에서 일종의 아이콘과 같았던 존재였다.


2. 작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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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모노그램

  • 요크의 마거릿 공녀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Margaret of York (1930년 8월 21일 ~ 1936년 12월 11일)
  • 마거릿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Margaret (1936년 12월 11일 ~ 1961년 10월 6일)
  • 스노든 백작부인 마거릿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Margaret, Countess of Snowdon (1961년 10월 6일 ~ 2002년 2월 9일)


3. 생애[편집]



3.1. 축복받은 어린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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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8월 21일, 외가쪽 조상들이 살았던 스코틀랜드의 글래미스 성에서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요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차녀로 태어났다.

1600년대 이후 최초로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직계 왕족이기도 하다.[4] 아버지 요크 공작은 아들이 아니여서 실망한 엘리자베스 공작부인에게 "릴리벳[5]이 자라면서 심심하지 않을테니 잘 되었소."라고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요크 공작 부부는 막내딸의 이름을 '앤 마거릿'으로 짓고 싶어했다.[6] 많은 사람들은 '마거릿'이라는 이름을 쓰기를 권유했지만, 보모의 이름과 헷갈릴 것을 생각했기 때문.[7] 하지만 앤이라는 이름을 싫어하던 할아버지 조지 5세가 반대해 이름을 마거릿 로즈라고 짓게 되었다. 그리고 앤이라는 이름은 훗날 조카 앤 공주의 이름으로 쓰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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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은 학교 교육을 받지 않고, 어머니의 감독 하에 언니 엘리자베스와 함께[8] 가정교사 메리언 크로포트에게 교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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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찬가지로 요크 공녀로서 비교적 평범하게 지냈지만,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의 퇴위로 아버지 조지 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영국 왕위 계승 서열 2위로 격상되며 그녀의 가족은 국왕의 관저인 버킹엄 궁전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조지 6세는 예쁘고 활달하며 애교많은 막내딸을 매우 아꼈다. 실제로 조지 6세가 마거릿을 너무 오냐오냐 했던지라 시종들은 공주가 응석받이로 자랄까봐 걱정했다. 조지 6세는 생전에 딸들을 가리켜 "릴리벳은 나의 자랑이요, 마거릿은 나의 기쁨이다.(Lilibet is My Pride, Margaret is My Joy)"라고 말했다.

3.2. 사교계의 꽃[편집]


어머니와 닮았던 언니와는 다르게 마거릿은 아버지하고 붕어빵이였으며, 굉장한 미녀였다.[9] 때문에 영국 왕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라고 칭송받았으며, 이름처럼 장미진주같은 외모를 가졌다고도 평가받았다.

언니가 성장하면서 왕위에 대한 책임감으로 조용하고 엄숙해질수록, 마거릿은 재치와 톡톡 튀는 유머로 항상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엘리자베스가 필립 공과 혼인하고 그가 해군으로 복무하던 몰타에서 조용한 결혼생활을 보내는 동안, 마거릿은 막 17살이 되고 본격적으로 사교계에 진출하며 신나게 파티를 하기 시작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모와 왕가의 둘째 공주, 그리고 이후에는 여왕의 하나뿐인 동생이라는 신분은 그녀를 사교계의 유명인사로 만들어주었다. 또한 그녀는 18인치의 허리를 가진 날씬한 몸매의 소유자로도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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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9번째 생일을 맞이한 마거릿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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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1번째 생일을 맞이한 마거릿 공주[10]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하게 21살 생일까지 맞이한 마가릿의 앞에, 인생의 쓴맛이 기다리고 있었다. 21살이 된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폐암으로 사망한 것이다. 더군다나 언니가 엘리자베스 2세로 즉위하면서 언니 가족이 버킹엄 궁전으로 들어오고, 마거릿은 어머니 엘리자베스 왕대비와 함께 버킹엄 궁전을 나와 클래런스 하우스[11]로 이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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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마거릿 공주와 언니 엘리자베스 2세
버킹엄 궁을 나온 후에도 마거릿은 '마거릿 공주의 아침 일상(Princess Margaret's morning routine)'이 공개되어 그녀의 사치스러운 생활이 화제가 되었을 정도로 엘리자베스 2세에게 풍족한 지원을 받으며 지냈다. 매일매일을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파티를 즐겼는데, 그야말로 일국()의 공주로서 모든 이들이 동경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3.3. 결혼 소동[편집]


이후 조지 6세의 시종무관이던 피터 타운센드 영국 공군 대령과 연인 관계를 맺었는데, 피터가 마거릿의 샤프롱[12] 역할을 맡으면서 사이가 가까워졌다. 피터가 엘리자베스 왕대비와 마거릿의 재정을 책임지는 감사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더욱 사이가 깊어졌고 1953년에 드디어 청혼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았는데, 이게 어느 정도였나면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도 두 사람의 결혼 발표 예정을 보도할 정도였다.당시 신문

하지만 그가 16세 연상의 이혼남이라는 이유로 왕실과 교회(성공회)[13]의 반대에 부딪혔다.[14] 대중들은 마거릿에게 동정적인 편이었고, 실제로 여론조사 결과도 마거릿을 지지했었다. 언니 엘리자베스 2세는 하나뿐인 동생이 원하는 것이니 들어주려 했으나, 의회는 "마거릿이 피터와 결혼한다면 왕위 계승권은 물론 공주 작위와 재산도 모조리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피터를 아예 벨기에 무관으로 2년 동안 보내버렸다.[15]

이혼과 재혼 경력을 가진 앤서니 이든이 총리가 되자 상황은 급변하여 마거릿과 피터의 결혼이 성사되는 듯했지만,[16] 결국 결혼을 포기했다.[17] 1955년 당시 경향신문은 "나는 의무를 택했다"는 제목 아래에 세기의 로맨스가 끝을 맺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당시 이든 총리는 마거릿의 왕족 신분을 유지하되 계승권을 박탈하고 결혼할 수 있게 하는 계획을 세웠었다고.

한동안 몇번의 짧은 연애를 하며 오랫동안 결혼 소식이 없어서 주변으로부터 평생 독신으로 살 것으로 예상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피터가 25살 연하의 벨기에 여성 마리루스 자마뉴와 재혼[18]했다는 소식을 듣고,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는지 당시 을 타고 있던 왕실 사진사인 동갑내기 안토니 암스트롱존스[19][20]의 청혼을 받아들여 약혼을 발표한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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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공주와 안토니의 공식 약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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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의 마거릿 공주.


3.4. 스캔들의 여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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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6일, 안토니 암스트롱 존스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당시로서는 꽤 늦은 나이인 만 29세에 결혼식을 올렸다.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공의 결혼식 이후 13년 만에 치뤄진 로열 웨딩인데다, 그 결혼식의 신부가 여왕의 하나뿐인 여동생이기 때문에 결혼식은 매우 성대하고 화려하게 치뤄졌다. 엘리자베스 2세도 아픈 손가락이던 동생의 결혼식에 많은 신경을 썼으며, 아버지인 조지 6세가 서거한 뒤라 신부 입장을 할 때 형부필립 공과 함께 입장했다. 참고로 마거릿의 결혼식은 영국 최초로 TV방영된 로열 웨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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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직후, 버킹엄 궁전에서 남편 안토니가 촬영한 사진[22]
결혼 후 안토니는 '스노든 백작(Earl of Snowdon)'이라는 작위를 수여 받게 되었고,[23] 마거릿은 '스노든 백작부인(Countess of Snowdon)'이 되었다. 1961년 아들 데이비드 암스트롱존스를, 1964년 딸 사라 암스트롱존스를 제왕절개로 얻었다. 둘 다 마거릿이 제왕절개로 낳길 희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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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신혼 초의 마거릿 공주[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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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이이자 장남인 제2대 스노든 백작(당시 린리 자작) 데이비드 암스트롱존스와 함께
하지만 남편 안토니는 양성애 성향이 다분한 데다가 결혼 전부터 연애 관계가 복잡했기 때문에, 마거릿과 안토니는 신혼 초부터 불안정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던 마거릿도 그의 난잡한 사생활을 결코 참고만 있지는 않았고, 결혼한 지 5년도 되지 않아 두 사람의 사이는 완전히 악화되었다. 오죽하면 마거릿이 둘째 아이 사라를 임신하고 있을 때 주치의가 "더 이상 화를 내면 뱃속 아기가 위험하다."라고 충고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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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의 마거릿 공주
그러다 1966년부터 마거릿도 딸 사라의 대부인 앤서니 바튼과 불륜을 저지르며 맞바람을 피우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둘의 허울뿐인 결혼생활이 완전히 금이 가게 된 것은 마거릿이 1973년에 17세 연하의 조경 디자이너 로디 르웰린과 만나면서부터였다. 1976년 카리브의 무스티크 섬에서 마거릿과 로디가 노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어 보도되었다. 이를 두고 다이애나 스펜서보다 앞선 공격적 파파라치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이 둘의 연애관계는 8년간 지속되다가 로디가 타티아나 소스킨과 결혼하면서 끝났지만, 마거릿은 로디 부부하고 평생 친분을 유지했다.[25]

보도 이후 마거릿에게 비난이 쏟아졌고 결국 결혼 18년 만인 1978년에 이혼 발표를 낸다. 이 이혼은 헨리 8세 이후 왕실에서는 처음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엘리자베스 2세의 자녀 3남 1녀 중 2 1녀는 줄줄이 이혼하게 된다. 어찌보면 이혼에 대해 관대해진 계기를 제공한 셈이다.

한편 똑같이 맞바람을 피우던 안토니는 마거릿 공주와 이혼하자마자 불륜 상대였던 루시 린제이호그와 재혼했다. 안토니는 과거 딸이 작위 하나 없는 남자에게 시집가는 모양새가 별로였는지,[26] 왕실에서 내려준 스노든 백작 작위를 마거릿과 이혼한 후에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안토니의 후처는 새로운 스노든 백작부인이 되었고, 후처 소생의 딸 또한 백작의 딸로서 레이디로 불리며 평민에서 귀족이라는 제트코스터급 신분상승을 이뤄냈다.[27]

이외에도 이혼 전후로 숱한 스캔들을 몰고 다니면서 문제의 인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로빈 더글러스 흄,[28] 믹 재거, 피터 오툴, 데이비드 니븐,[29] 피터 셀러스 등 숱한 남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심지어 갱단 두목 존 빈든과의 염문 의혹이 폭로되기도 했고,[30] 캐리 피셔가 자신의 아버지 에디 피셔와 연인이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로디와 결별하고 12년 뒤에 첫사랑 피터와 재회했는데 당시 79세였던 피터는 거동이 불편해진 노인이었지만, 마거릿은 그를 보고 자신의 절친이자 시녀였던 글렌코너 남작부인에게 "하나도 안 변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남편 안토니는 불륜 상대와 재혼한 이후에도 대놓고 정부를 들여 사생아를 낳는 등, 서민들이 생각하는 '방탕한 귀족의 삶'을 정석대로 실천하며 살았다. 그러나 왕실과는 계속해서 친분을 유지했으며 왕실의 결혼식, 아기, 가족사진 등을 찍으며 왕실 사진사로서 계속 인연을 이어왔다. 안토니 암스트롱존스는 마거릿이 2002년에 사망한 후에도 15년을 더 살다가 2017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너무 망나니처럼 살다 죽어 영국인 중 그 누구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사실 대다수의 영국인들은 마거릿의 후손이 왕실 본가와 계승권에서 한참 멀기 때문에 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다. 그래도 2017년 4월에 열린 추도식에는 여왕 부부를 비롯한 왕실 일원들이 대거 참석했다.

안토니가 남긴 자녀는 총 5명인데, 자녀들의 어머니는 4명이며 복잡한 사생활로 자식들의 성씨가 제각각이다. 마거릿 공주와의 결혼 전 애인에게서 1명, 마거릿으로부터 2명, 후처에게서 1명, 정부로부터 1명을 낳았다. 적법한 관계에서 낳은 세 명의 자식들 중 딸들은 결혼하면서 성씨가 바뀌었고 나머지 두 명은 사생아라 어머니의 성을 따랐기 때문이다. 거기다 애초에 5명의 자식 중 왕족으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건 마거릿과의 사이에서 낳은 데이비드와 사라 뿐이다.

3.5. 사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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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공주의 생전 마지막 공식석상에서의 사진[31]
15살부터 담배를 피웠던 터라 젊었을 때는 그럭저럭 버티다가, 나이를 먹으면서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편두통, 후두염, 기관지염 등을 앓았고, 결국 1985년 1월에 왼쪽 폐 일부를 제거했다.[32] 1991년에 금연했지만 술은 많이 마셨다. 1993년 1월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98년에는 별장에서 가벼운 뇌졸중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화장실 사고로 발에 심한 화상을 입어 거동에 도움이 필요한 상태가 되었고, 가끔 휠체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2001년 1월 10일, 추가로 뇌졸중을 겪고 식욕 부진과 음식 삼킴 문제로 입원했다. 3월에는 왼쪽 눈의 시력이 마비되었다.

결국 이런저런 질병과 장애를 겪은 끝에, 2002년 2월 9일[33] 만 71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숙모인 앨리스 왕자비의 100세 생일 축하 행사가 공식석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이에 크게 충격을 받은 엘리자베스 왕대비[34] 마거릿의 장례식을 공식 석상의 마지막으로 하고, 쇠약해지더니 4달 동안 앓던 감기가 악화되어 같은 해 3월 30일 오후 3시 15분, 작은딸의 뒤를 따라갔다. 안타깝게도 엘리자베스 2세는 자신의 재위 50주년이 되는 해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연달아 떠나보냈다.

마거릿은 유언에 따라 영국 왕실 구성원 중 최초로 화장되어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내 조지 6세 기념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매장을 해온 왕실에서 처음 있는 일로, 어쩌면 그녀의 반항적인 일생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겉으론 자유분방하고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한편으론 왕실이란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 자유를 잃은 비운의 왕족이었다는 공통점에서, 2020년도에 과도한 언론과 파파라치의 포화에 질려 왕실에서의 독립을 선언한 조카 손자 해리 왕자와 비견되고는 한다.[35][36] 하지만, 해리가 왕실 가족들을 비판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고, 회고록을 출간하는 등 왕실과의 폭로전을 이어가면서 오히려 마거릿이 선녀로 보인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37]

여동생의 사후 엘리자베스 2세는 마거릿의 절친이자 시녀였으며 마거릿의 정사를 다 꿰고 있었던 글렌코너 남작부인에게 "그 남자가 마거릿을 정말로 행복하게 해줬어.(He made her really happy.)"라며 로디를 마거릿에게 소개해주어 고맙다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 실제로 로디는 피터 다음으로 마거릿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으며 꽤 뜨겁게 연애했다. 전남편 안토니의 경우 비록 신혼 초에는 관계가 괜찮았고 나름 부부로서의 정도 있었지만,[38] 피터나 로디의 사례에 비하면 결코 열렬하게 사랑했던 사이는 아니었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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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승리의 날 기념식[40]


4. 성격[편집]


화난 표정과 웃는 얼굴 사이에 중간이 없다.

세실 비턴(Cecil Beaton)[41]

대영제국의 공주이자 여왕의 하나뿐인 동생이라는 금지옥엽으로 자라나서 그런지, 자존심 강하고 충동적일 뿐만 아니라 꽤 오만한 성격이었다. 이런 성격은 여장부였던 어머니 엘리자베스 왕대비조차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정도.

어머니 엘리자베스 왕대비의 친구였던 귀족 부인이 "공주님이 어머니께 너무 버릇없이 구신다."라고 말하자, 왕대비는 "걱정하지 마세요. 전 이미 익숙합니다."라고 말한 일화도 있다. 켄싱턴 궁전에서 지낼 때 똑같이 불같은 성격의 어머니와 언쟁을 벌이다 감정이 격해지면 마거릿은 궁 안의 모든 창문들을 다 열어서 그녀가 일일이 닫도록 만들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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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언니 엘리자베스 2세에겐 매우 얌전한 여동생이였다고 한다. 《더 크라운》에서 드라마틱하게 묘사된 모습과는 달리 실제 마거릿은 언니에게 심하게 반발한 적이 거의 없었으며, 여왕이 된 언니를 공주 시절처럼 매일 만날 수 없는 것에 슬퍼하기도 했다.[42] 마거릿은 언니가 있는 버킹엄 궁전에 거의 매일 전화 통화를 했을 정도로[43] 언니에 대한 유대감이 강했으며, 엘리자베스 2세 역시 하나뿐인 여동생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등 두 자매는 평생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네 살로 약간 터울이 있었고, 아버지 조지 6세의 즉위 이후 언니는 언젠가 여왕이 되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이라는 사실을 어린시절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 어린 엘리자베스가 마거릿에게 아버지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마거릿이 "언니도 언젠가 여왕이 되겠네?"하고 물었고, 엘리자베스가 "그래, 언젠가는."하고 답하자 마거릿은 "불쌍한 언니."라고 한 일화가 있다.


5. 가족 관계[편집]



5.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스노든 백작부인 마거릿 공주
(Princess Margaret, Countess of Snowdon)
조지 6세
(George VI)
조지 5세
(George V)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Princess Alexandra of Denmark)[44]
테크의 공녀 메리
(Princess Mary of Teck)
테크 공작 프란츠
(Francis, Duke of Teck)
케임브리지의 메리 애들레이드 공녀
(Princess Mary Adelaide of Cambridge)[45]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Elizabeth Bowes-Lyon)
제14대 스트래스모킹혼 백작
클로드 보우스라이언
(Claude Bowes-Lyon, 14th Earl of Strathmore and Kinghorne)[46]
제13대 스트래스모킹혼 백작
클로드 보우스라이언
(Claude Bowes-Lyon, 13th Earl of Strathmore and Kinghorne)
프랜시스 도라 스미스
(Francis Dora Smith)
세실리아 니나 캐번디시벤팅크
(Cecilia Nina Cavendish-Bentinck)[47]
찰스 캐번디시벤팅크
(Charles Cavendish-Bentinck)[48]
캐롤라이나 루이사 버너비
(Carolina Louisa Burnaby)


5.2. 자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마거릿 로즈/가족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녀
이름
출생
배우자 / 자녀
1남
제2대 스노든 백작 데이비드 암스트롱존스
(David Armstrong-Jones, 2nd Earl of Snowdon)
1961년 11월 3일 (62세)
세레나 스탠호프[49]
슬하 1남 1녀
1녀
레이디 사라 차토
(Lady Sarah Chatto)
1964년 5월 1일 (59세)
다니엘 차토
슬하 2남
앤토니 암스트롱존스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6. 창작물[편집]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 《더 크라운》에서 묘사된 그녀의 화려한 사생활로 대중의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시즌1~2까지 바네사 커비가 배역을 맡았고 시즌 3~4헬레나 본햄 카터가 배역을 맡았다.[50] 그리고 시즌 5~6에서는 레슬리 맨빌이 역할을 맡았다.

2015년 영국에서 제작한 영화 《로열 나이트 아웃》에서는 10대 시절의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945년 5월 유럽 전승기념일 당시 두 공주는 허락을 받아서 궁궐 밖으로 외출을 하는데 이 때 마거릿 공주는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한 병사와 어울리다가 나이트 클럽, 술집 등에 가보게 되고 이를 엘리자베스가 뒤쫒아 찾는 모험을 다룬 코미디 영화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을 각색한 내용으로, 실제로 두 공주는 전승기념일 때 길거리로 외출한 적이 있었다. 물론 영화에 등장하는 일들은 없었고, 수행원들과 함께 통금 시간까지 무사히 귀가했다.


7. 둘러보기[편집]


마거릿 로즈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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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 지위
영국 공주 · 영연방 왕국 공주(인도 제국 황녀 ·캐나다 공주 · 호주 공주 · 뉴질랜드 공주) · 스노든 백작 부인 · 린지 자작 부인 · 요크 공녀
생애
생애
가족 관계
가족관계

아버지 조지 6세 ·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 배우자 안토니 암스트롱존스 · 언니 엘리자베스 2세 · 장남 데이비드 암스트롱존스 · 장녀 사라 차토
대중매체
더 크라운 (마거릿 로즈)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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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승 서열 24위.[2] 계승 서열 27위.[3] 다만 마거릿은 스노든 백작부인이라는 칭호를 정말 싫어했다. 왕녀들은 보통 공작과 결혼하기 때문에 공작부인으로 봉해지는게 일반적인데 안토니의 출신 배경이 너무 한미해 백작위밖에 내릴 수 없던 터라 낮은 직위를 받게 된 것. 비록 현재는 계승권이 밀렸지만 결혼 당시만 해도 계승 서열 3위이자 왕실의 몇 안되는 직계 공주였던 그녀에게 백작부인이 맘에 찰리 없었을 것이다.[4] 운명의 장난인지, 언니 엘리자베스 2세도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에서 사망하면서 스코틀랜드에서 숨을 거둔 최초의 국왕이 되었다.[5] 언니 엘리자베스 2세의 애칭이다.[6] 당시 요크 공작이였던 아버지 조지 6세의 작위를 따서 받을 '요크의 앤 공녀(Princess Anne of York)'라는 칭호의 어감이 예뻐서, 또 언니 엘리자베스의 이름과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7] 이 영향인지 마거릿은 가족과 50년대 전까지의 신문기사에서 미들네임까지 해서 '마거릿 로즈'로 불렸다.[8] 다만 언니와는 단 한 번도 수업을 같이 받은 적이 없었다.[9] 그렇다고 해서 엘리자베스 2세가 미인이 아니었다는 건 아니다. 여왕 또한 젊은 시절 상당한 미모를 자랑했다.[10] 사진 속 드레스는 크리스챤 디올에서 특별 제작한 드레스다. 금으로 수놓아진 벨라인에 한쪽 어깨를 드러내는 원 숄더 형태로, 우아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마거릿 공주도 가장 좋아했던 드레스 중 하나였다고 한다.[11] 원래는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공의 신혼집이었으며, 1950년에 앤 공주가 태어난 집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한 이후에는 엘리자베스 왕대비와 마거릿 공주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왕대비 궁으로 사용되었으며, 2002년에 엘리자베스 왕대비가 사망한 이후에는 찰스 3세에게 상속되어 현재는 왕세자 부부의 런던 거주지로 사용되고 있다.[12] 젊은 여자가 사교장에 나갈 때 보호자가 되어주는 사람.[13] 아이러니하게도 성공회가 탄생한 계기 중 하나는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을 교황청에서 반대했기 때문이다. 내로남불이나 다름없는 것.[14] 당시 이혼한 사람의 전 배우자가 살아있을 경우, 절대 재혼할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도 왕위를 포기한 것이다. 다만 에드워드 8세는 이혼을 요구할 당시 이미 영국의 왕위에 오른 일국의 왕이었고, 마거릿은 왕의 동생에 불과하기 때문에 일의 경중이 다르기는 하다. 이혼녀가 아니더라도 평민, 그것도 미국인을 일국의 왕비로 삼겠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왕실은 물론이고 국민들까지 들고 일어나 반대했다.[15] 피터는 1978년, 전쟁 관련 서적을 집필하기 위한 자료 수집차 부산을 방문한 바 있다. 당시에도 마거릿의 옛 연인으로 보도되었는데, 그만큼 한국에서도 관심이 컸었음을 방증한다.[16] 이와 관련해 실제로 영국 정부의 예산안에 마거릿의 결혼식 관련 예산안을 검토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앤서니 이든과 마거릿의 결혼과 관련하여 주고받은 편지도 존재한다. 당시 편지의 내용을 보면 마거릿이 "결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17] 마거릿이 피터가 결혼하면 왕실 일원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지원을 박탈하겠다는 의회의 성명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왕실 일원으로서 모든 권리와 지원을 박탈당하면, 모든 금전적인 지원을 못받게 되고 공무에서도 제외되기 때문이다. 즉, 결혼으로 인해 왕족으로서 누려온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는 것은 하는 것 없이 혈통만으로 놀고먹는 마거릿 입장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럴 경우, 초특급 부자 남편을 만나면 어느정도 해결이 된다. 실제로 현대 영국 왕족들 및 귀족 여성들이 부자와 결혼함으로서 놀고 먹으며 품위 유지를 하고 있다. 피터도 작위만 없을 뿐이지 상류층에 속한만큼 어느정도 유복했지만, 마거릿의 씀씀이를 감당할 정도로의 부자는 아니었다.[18] 피터와 결혼했을 때 겨우 20살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10대 후반에 결혼하는 경우도 흔했지만, 마리루스는 남편 피터와 나이차이가 무려 25살이나 나서... 구글링 해보면 알겠지만 마리루스의 외모가 마거릿과 정말 닮았다. 마거릿에 비해 개구진 인상이 특징이다. 재혼 소식도 역시나 한국 대한뉴스에서 보도했다.[19] 앤서니(Anthony)가 아니라 안토니(Antony)라고 표기한다.[20] 부계는 웨일스 혈통이고 모계는 독일계 유대인 혈통이다.[21] 그러나 결혼 직전에 안토니에게 숨겨진 사생아 딸이 있으며, 딸의 생모가 친자 확인을 요구해서 곤욕을 치른 바 있고 결과는 친자로 판명났다. 그런데도 마거릿이 왜 결혼을 감행했는지 의문이라는 반응이 많았는데, 옛 연인이자 첫사랑이었던 피터가 본인과 닮은 어린 여자하고 재혼한게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2] 마거릿의 웨딩드레스는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디자인으로 평이 좋다. 여담으로 前 며느리 아너러블 세레나 스탠호프도 마거릿의 장남인 린리 자작 데이비드와 결혼했을 때 비슷한 디자인의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하지만 마거릿의 웨딩드레스에 한참 못 미치는 건 그렇다 쳐도, 겨우 23살밖에 안 된 신부를 매우 늙어보이게 스타일링해 놔서 별로 평이 좋지 않았다.#[23] 계승 가능한 귀족 작위를 수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나, 마거릿은 선왕 조지 6세의 차녀이자 국왕 엘리자베스 2세의 하나뿐인 동생인 공주였기 때문에, 아무 작위도 없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모양새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다. 훗날 조카 앤 공주도 돈 많은 평민 마크 필립스와 결혼할 때 사람들은 마크가 백작 작위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들은 작위와 호칭을 거절했다. 두 사람의 자녀들도 아이들을 평범하게 키우고 싶다는 부부의 의향에 따라 작위를 받지 않았지만, 여왕의 친손주들이라는 상당히 높은 신분이기 때문에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으며 왕족 대우를 받으며 지내고 있다.[24] 남편 안토니가 직접 촬영하였으며, 외출을 앞두고 미리 완성된 머리를 한 채 목욕을 하고 있다. 참고로 사진에서 쓰고 있는 티아라는 2년 전 결혼식에서 썼던 티아라다.[25] 작년까지 동침하던 전 애인과 계속 친밀한 사이를 유지하며, 자녀 세대까지 평생 친구로 지내는 게 영국 상류층들의 상식이다. 또 다른 예시로 앤 공주의 첫 남친이자 카밀라 파커 보울스의 전 남편(카밀라와 찰스 3세가 2005년 재혼했으므로 카밀라와 앤 공주는 올케시누이 관계)이었던 앤드루 파커 보울스가 있는데, 앤드루는 전 부인이었던 카밀라와 전 여친이었던 앤 공주와 현재까지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카밀라 역시 전 남편 앤드루하고 꾸준히 교류하고 있다. 다만 앤 공주는 "옛 정이 되살아났다"는 가십거리가 나올 정도로 현남편보다 전남친인 앤드루하고 더 자주 붙어다니는데 새언니 카밀라하고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무난한 모습을 보여줘도 실제 사이는 냉랭하다고 한다. 하긴 소싯적에 이 셋도 꽤나 복잡했던 관계여서 그럴만도 하다.[26] 신분상으로는 평민이긴 했지만 상류층 출신이다. 친할아버지는 기사 작위가 있었으고, 친할머니는 기사 작위가 있는 부친(안토니의 증조할아버지)를 두었다.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와 이혼한 뒤에 6대 로스 백작과 재혼해 로스 백작부인이 되었으며, 현 7대 로스 백작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친누나 수잔은 6대 베시 자작과 결혼해 자작부인이 되었고, 현 7대 베시 자작의 어머니이다. 왕족끼리의 정략결혼이 사실상 없어진 당시 영국의 기준으론 부마로서 나쁘지 않은 인물이었다.[27] 후처는 작위만 없었을 뿐이지 상류층이였던 안토니와는 다르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평민 신분이었다.[28] 보수당 소속의 총리였던 알렉 더글러스 흄의 조카. 마거릿과 헤어지자 우울증으로 자살했다.[29] 이 양반은 유부남이면서 그레이스 켈리하고도 평생을 거쳐 불륜관계였다.[30] 이에 대해서 영국 왕실은 "공주가 저질 인간과는 관계가 없었을 것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반박했다.[31] 2001년 12월 숙모 앨리스 왕자비의 100세 생일 축하 행사에서[32] 30년 전 조지 6세의 수술과 유사하다.[33] 여담으로 이날은 언니가 즉위한 지, 즉 아버지 조지 6세가 사망한 지 50주기가 되는 날에서 겨우 사흘이 지난 날이었다.[34] 당시 나이가 100세를 넘겼다.[35] 공교롭게도 해리 왕자 역시 왕실의 대표적 헤비 스모커였던 이모할머니 마거릿처럼 골초로 유명하다.[36] 또한 '앨버트 왕자 - 조지 5세', '에드워드 8세 - 조지 6세', '마거릿 공주 - 엘리자베스 2세', '앤드루 왕자 - 찰스 3세', '해리 왕자 - 윌리엄 왕세자' 등 비슷한 사례의 관계가 윈저 왕가 안에서 대를 이어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37] 마거릿은 스캔들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있지만, 적어도 공개적으로 가족들을 공격하는 행보를 보인 적은 한 번도 없다.[38] 막상 안토니와 이혼하게 되자 의외로 마거릿이 더 힘들어했다.[39] 애초에 안토니와 결혼한 것도 당시 을 타고 있었기는 했으나 결혼은 생각도 안했던 마거릿이 옛 연인이자 첫사랑이었던 피터가 본인과 닮은 어린 여자하고 재혼한 사실을 듣게 되고 마침 이 때 안토니에게 청혼을 받아 홧김에 결혼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 결혼했어도 성격이라도 잘 맞았으면 충분히 금슬 좋은 부부가 될 수 있었겠지만 마거릿과 안토니 둘 다 한 성깔하는 양반들인데다 안토니의 사생활은 마거릿도 한 수 접을 정도로 매우 문란했기 때문에(...)[40] 왼쪽부터 엘리자베스 2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마거릿 로즈[41] 20세기의 전설적인 사진작가. 런던에서 태어나 1920년대부터 상류층을 촬영하며 보그와 베니티 페어 사진작가로 활동했으며, 2차 세계 대전 때부터 영국 왕실의 행사 때마다 와서 공식 사진을 찍은 것으로 유명했다. 왕족들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테일러게리 쿠퍼같은 전세계 유명 연예인들을 찍어왔다.[42] 실제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마거릿 공주의 모습을 보면 울적한 표정이다.[43] 참고로 1940-50년대에는 전화 자체가 흔치 않았으며, 특히 왕궁 같은 경우에는 워낙 넓어 직통으로 연결되지 않고(...) 여러 명의 왕실 직원들이 방 하나에 있는 전화마다 일일이 연락해야 했다.[44] 크리스티안 9세의 장녀이다.[45] 조지 3세의 손녀이다.[46] 1855. 3. 14.~1944. 11. 7.[47] 1862. 9. 11.~1938. 6. 23.[48] 본명은 찰스 윌리엄 프레더릭 캐번디시벤팅크(Charles Willam Frederick Cavendish-Bentink). 1817. 11. 8.~1865. 8. 17. 딸인 세실리아가 태어나고 3년 후에 사망했다.[49] 결혼 27년 만인 2020년 2월 18일부로 별거에 들어갔다.[50] 재밌는 것은, 헬레나 본햄 카터는 조지 6세의 이야기인 《킹스 스피치》에서 조지 6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 즉, 엄마와 작은딸을 연기하게 되는 배우개그가 성립된다. 하지만 훌륭한 연기력과는 별개로 바네사 커비와는 달리 본햄 카터와 마거릿의 외모 싱크로율은 그렇게 좋지 않아서,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올리비아 콜먼이 마거릿을, 본햄 카터가 엘리자베스 2세를 맡았어야 한다는 평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