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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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etropavlovsk-Helsingfors.jpg
강구트급 전함 2번함 마라

1. 개요
2. 제원
3. 역사
4. 여담


1. 개요[편집]


소련 해군강구트급 전함 2번함. 위키 등에서는 취역 당시의 이름인 페트로파블롭스크(Петропавловск, Petropavlovsk)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고, 퇴역 당시에는 볼호프로 개명된 상태였지만, "마라(Марат, Marat)"라는 함명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2. 제원[편집]


기공
1909.1.16
제원
배수량
24,800톤
진수
1911.9.11
길이
181미터
취역
1915.1.5
너비
26.9미터
퇴역
1953.9.4, 이후 고철처리
최고속도
24.1노트


주무장
12인치 3연장포 4기(12문)


3. 역사[편집]


1907년, 러일전쟁에서 진 러시아 제국 해군은 함선이 부족한 지경인 데다 남은 함선들도 구식화되어가는 실정이었다. 이미 대세는 드레드노트급으로 기울던 시절이라 이대로 가다간 러시아 함대는 세계 최약의 함대가 될 지경인 데다 독일이 무슨 짓을 할지 불안한 상태였다. 의회에서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들며 반대했으나 결국 차르 니콜라이 2세가 밀어붙여 드레드노트급 전함 4척을 건조하게 된다. 이때의 요구사항이 속도 최소 21노트, 12인치 포 12문, 4.7인치 포 16문 등이었다.

그러나 드레드노트급은 기존의 전함과는 판이하게 다른 배라 아무것도 모르는 러시아 제국이 자체 건조한다는 것은 무리였고, 때문에 설계안과 조선소를 공개 입찰했다. 총 51개의 설계안과 27개의 조선소가 이에 뛰어들었는데 결국 영국의 존 브라운 사에서 건조하게 되었다.

이 전함들은 강구트급이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1909년부터 건조되던 강구트급 전함들은 러시아의 낙후된 기술력 탓에 1910년 건조가 중단되었고 2년 후 다시 건조가 재개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4척 중 3번함이 페트로파블로스크, 후일의 마라였다.

그러나 기껏 만들어 놓았건만 러시아가 함선 손실을 너무 우려한데다 독일 제국 해군영국 왕립 해군과 싸우느라 러시아 함대는 관심도 없었고, 러시아 수병들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함내 폭동이 잦아 작전 활동이 힘든 탓에 잉여하게 지냈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러시아 내전이 시작되자 소비에트 측으로 넘어가나, 함선을 운용할 장교들이 대부분 제정파로 넘어간지라 별 활약이 없다가 영국 어뢰정의 야간 기습으로 전부 침몰했다.

다행히 페트로파블롭스크는 수심이 얕은 곳에 착저[1]했기 때문에 건져내서 수리를 받게 되며, 1922년 수리를 마치고 이름을 "마라"로 바꾸고 발트 함대의 기함이 된다. 이름의 유래는 프랑스의 혁명가 장폴 마라이며, 같은 맥락에서 동형함인 세바스토폴은 "파리시스카야 콤무나"로 개명되었다. 각각 프랑스 혁명과 1871년 파리 코뮌을 기념하는 이름인 것이다. 러시아 혁명 초기까지만 해도 존재하던 이상주의를 어느정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마라는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선전물 제작, 해외 순항 등에 이용되었으며, 1926년 포신 및 기관을 교체하고, 1931년 자매함들 중 가장 먼저 현대화 개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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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 후의 모습. 뒤로 휜 연돌이 보이는가?

이후 1937년의 국제 관함식에도 참가하며 세월을 보내던 마라는 제2차 세계 대전아돌프 히틀러가 소련을 배신함에 따라 독일과 싸우게 되었다. 이때도 크릭스마리네 VS 소련 해군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마라는 자매함 옥차브리스카야 레볼루치야, 순양함 오로라 등과 함께 레닌그라드로 진격해오던 독일 국방군을 함포를 쏘며 막아냈다. 12인치 주포의 화력은 독일군에게 골치아픈 존재였고,[2] 이에 독일군은 슈투카 편대를 보내 마라를 공격했으나, 마라와 자매함들의 역할은 러시아 발트 함대의 모항인 크론슈타트 내부에 정박해서 포격 지원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항구 내에 설치된 1,000문 가까운 대공포의 보호를 받으며 운 좋게도 대부분의 폭탄을 피해갔다. 물론 다 피한게 아니라 폭탄 몇 발이 명중했지만 그 정도로는 전함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그러자 1941년 9월 23일, 슈투카 에이스 한스 울리히 루델을 불러낸 독일군은 1,000kg짜리 특별 폭탄을 제조해 가져와서는 마라를 공격했다. 루델의 폭격은 성공해서, 일단 마라는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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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마라의 격침 직전 모습. 저 직후 루델의 1톤 폭탄[4]이 날아들었다.


(워게이밍이 격침 순간을 목격한 참전 용사를 모셔와 인터뷰한 영상.)

마라는 1번 주포탑의 상면을 특별 폭탄, 1톤 SAP을 1~2발이나 맞았으며, 그것도 함수 구획을 관통해서[5] 1번 주포탄약고 구획이 유폭되는 바람에 선두에서 전방 마스트 직전까지 모든 구획이 대폭발해서 날아가고, 전방 마스트도 붕괴된 집처럼 구부러지면서 쓰러지는 피해를 입었다. 이 때 사격통제요원과 무전수 등 1번 포탑을 담당하던 인원과 함교의 장교진 등 300여 명이 폭발로 사망했다. 덤으로 보일러실 등 중요 구획이 침수당하고 독자적인 항해 능력 및 사격관제능력을 상실했다.[6] 이 정도면 누가 봐도 침몰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후 레닌그라드에 포격지원을 할 때 소련 해군에서는 마라에 침몰 판정을 내리고 재적시켰다. 상식적으로 함선의 1/3이 날아가서 이동도 못 하고 고정포대로 쓰면 배라기보단 포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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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번 주포탑과 연돌까지 제거된 마라

마라의 폭격 피해 사진으로 붕괴한 함수 마스트 사통장치 부근을 인양, 바지선에 싣고 와서 정박한 뒤 바로 앞에서 촬영함.
그런데 하필이면 마라가 있던 지역의 수심이 낮아서, 비록 배가 또 착저했지만 기울어진 함선의 3, 4번 포탑은 계속 가동할 수 있었다! 게다가 파괴된 곳을 절단해서 떼어버리고, 약간의 수선을 가하니 2번 포탑도 정상적으로 동작했다. 그래서 마라는 그 상태에서 함체 주변에 콘크리트 강화 구조물을 두르고 고정된 채 육군 관측반이 보내오는 좌표로 포격을 계속했다. 그야말로 불사의 전함, 레닌그라드의 수호신이 되어 레닌그라드가 해방될 때까지 독일군에게 12인치 포로 총 1971발을 발사해 인민의 불벼락을 선사했다.

전후 소련 해군은 이런 영웅이 다시 항해를 할 수 있도록 되살리기 위해 스크랩 처리된 강구트급 전함 프룬제의 선수를 떼어다 마라에게 붙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재건 계획을 세웠으나, 1948년경에 계획은 취소되었다. 이후 훈련함으로 쓰이다가 1953년에야 드디어 퇴역되었다.


4. 여담[편집]


  • 마라는 한 번도 해전에 참여한 적이 없는 전함이다. 어찌보면 전함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마라는 조국이 해방되는 그 날까지 적들의 공격을 묵묵히 받아내며 침몰한 상태에서도 적들에게 인민의 강철비를 퍼부었다. 비록 해전에 참여하지 못 했지만 마라는 전함에게 요구되는 전략 병기로서의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했다. 사실 해전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문제 삼을 수도 없는것이, 당시 독일 해군은 소련으로 해군을 보낼 상황이 아니라서 진짜로 해군을 안 보냈다. 일단 적 함대가 와야 해전을 수행할 것 아닌가.

  • 처음 개장 이후로 한동안은 잉여 전함으로 지냈었다. 몇 안 되는 신형 전함인데다 러일전쟁의 아픔도 가지고 있던 소련이 애지중지 다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적백내전 당시 배를 다루는 장교는 백군으로, 배는 적군으로 합류되는 바람에 제대로 활동할 수도 없었다. 독소전쟁에선 바로 위에서 서술했듯 독일 해군이 안 와서 지상 포격을 주 임무로 삼았다.

  • 레닌그라드의 수호자라는 별명이 가장 유명하지만, 이외에도 여러번 착저한 전적 덕분에 좀비전함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현대화 개장 이전엔 어뢰정의 어뢰에 맞고 착저, 독소전쟁에선 한스 울리히 루델의 1톤 폭탄에 맞고 착저했다. 겨우 두 번 맞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두 번의 공격은 다른 상황에선 완전히 침몰해 복구가 불가능한 치명타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진주만 공습에서 플로리다급 전함 유타와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애리조나가 마라와 마찬가지로 어뢰와 특수 철갑폭탄에 피격당해 탄약고가 폭발하고 착저했는데 지금까지도 인양되지 않고 있다.

  • 나치 독일은 이미 침몰 판정을 받은 전함에게 포격을 맞으며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패배했고, 여기에 어이가 없었던 건지 감동을 받은건지 이후 비스마르크급 2번함인 티르피츠에게 섬 인근에서 방어 포격하다가 침몰하면 착저해서 고정포대 역할을 하라는 어처구니 없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티르피츠의 상대는 독일이 특수제작한 1톤 폭탄 따위는 우습게 보이는 5톤 지진폭탄 톨보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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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 자체는 침몰되어 가라앉은 것이 맞으나 수심이 얕아 수면 밑으로 완전히 빠져버리지 않고 얕은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상태.[2] 그 위력을 가늠하자면, 마라가 장비한 소련제 12인치 52구경장 패턴 1907포의 포탄 중량은 거의 500kg에 달했는데, 이는 독일과 소련이 사용하던 155mm, 152mm 야포탄보다 최소 10배 이상 무거웠다. 마라는 이런 포를 12문 장비하고 있었으니 전탄 발사 한번으로 152mm 야포를 무려 120문이나 쏘는 것과 동급의 위력을 낼 수 있었다.[3] 대신 루델은 폭발로 인해 잠시간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겨우 수면 3m 위에 떠 있었다고 한다.[4] 위키피디아 마라 항목, 한스 울리히 루델 항목에 1톤으로 기재되어 있음.[5] 출처는 위키피디아 페트로파블롭스크(마라) 항목 함생 문단. 만약 두 발이 맞다면 저 두 발 중 하나가 루델의 전과로 보인다.[6] 다만 보일러는 다시 작동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 피해사진을 보면, 주연돌에서 연기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