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가리타 테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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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레오폴트 1세의 황후
마르가리타 테레사
Margarita Teresa de Españ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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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스페인어
마르가리타 테레사 데 아우스트리아 이 압스부르고
(Margarita Teresa de Austria y Habsburgo)
독일어
마르가리타 테레자
(Margarita Theresa)
출생
1651년 7월 12일
스페인 마드리드 레알 알카사르[1]
사망
1673년 3월 12일 (향년 21세)
오스트리아 대공국 호프부르크
배우자
레오폴트 1세 (1666년 결혼)
자녀
마리아 안토니아[2]
아버지
펠리페 4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나[3]
형제
펠리페 프로스페로[4], 카를로스 2세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어린 시절
3.2. 약혼과 결혼
3.3. 결혼 생활
3.4. 사망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1. 개요[편집]


파일:디에고 벨라스케스 Las Meninas-시녀들.jpg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레오폴트 1세의 첫 번째 황후이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와 두 번째 왕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아 테레사의 이복여동생이자 카를로스 2세의 친누나이다.

일생은 크게 특별하지 않지만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명작 《시녀들》의 주인공이기에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실의 공주 중에선 가장 유명하다.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외숙부이자 고종사촌 겸 육촌인 개족보 레오폴트 1세와의 결혼이 결정되었고, 펠리페 4세는 궁정 화가인 벨라스케스에게 오스트리아 궁정에 보낼 딸의 성장 초상화를 그리도록 명했다. 이 초상화에서 공주는 합스부르크 특유의 외모 특징보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면모가 강조되어 있으며, 이들 초상화는 현재 빈 미술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어린 시절 천사같은 모습으로 아버지의 엄청난 애정을 받았다고 한다. 공주의 모습은 예비 시가에 보내지기 위해 초상화로 많이 그려졌기에 현재에도 수많은 초상화가 남아있다. 합스부르크 특유의 주걱턱이 있었지만 심각한 유전병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21세에 단명한 것은 결혼 생활 내내 이어진 임신과 유산, 사산으로 건강을 크게 해친 탓이었다.

2. 작위[편집]


  • 스페인의 인판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Infanta Margarita Teresa (1651년 7월 12일 ~ 1673년 3월 12일)
  • 신성로마제국의 황후 마르가리타 테레사 폐하 Holy Roman Empress Margartia Teresa, German Queen, Queen consort of Hungary and Bohemia, Archduchess consort of Austria (1666년 12월 5일 ~ 1673년 3월 12일)

3. 생애[편집]



3.1. 어린 시절[편집]


파일:1653년 2세 때의 마르가리타 테레사.jpg
파일:1656년 5세 때의 마르가리타 테레사.jpg
파일:1659년 8세 때의 마르가리타 테레사.jpg
파일:1660년 9살 때의 마르가리타 테레사.jpg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1651년 7월 12일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와 조카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부의 나이 차는 무려 29살이었다.

그녀의 친조부모인 스페인 왕 펠리페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는 서로 육촌, 외조부모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 안나(펠리페 4세의 여동생, 마르가리타의 고모)로 사촌이다.

어머니 마리아나는 원래 펠리페 4세의 아들인 아스투리아스 공(왕세자)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와 약혼했다. 왕은 후계자가 있으니 굳이 재혼할 생각이 없었지만 1646년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가 사망하면서 펠리페 4세는 하루빨리 스페인 왕위를 계승할 새로운 남자 후계자를 낳아야 했기에, 자신의 외조카(여동생 마리아 안나의 딸)이자 아들의 약혼녀였던 마리아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철저히 후사를 보기 위한 목적으로만 선택한 신부였기에 펠리페는 아내를 어린 조카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르가리타의 형제로는 펠리페 4세와 전 왕비프랑스의 엘리자베트[5]의 자녀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루이 14세와 결혼하면서 프랑스 왕비가 된 이복 언니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 훗날 스페인계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국왕이 되는 친동생 카를로스 2세가 있었다.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사이에서 5명의 자녀(3남 2녀)가 더 태어났지만, 성인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카를로스 2세 뿐이었다.

스페인의 인판타 마르가리타는 남동생들과 달리 태어날 때부터 심각한 건강 문제와 장애[6]는 없었다. 어릴 때 심각한 병을 앓고도 살아남았다. 동시대 사람들에 따르면 마르가리타는 매력적인 외모와 활기찬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마르가리타의 부모님과 가까운 친구들은 그녀를 "작은 천사"라고 불렀다. 그녀는 마드리드 레알 알카사르에 있는 왕비의 방에서 많은 하녀와 하인들에게 둘러싸여 자랐다.

마르가리타는 특히 사탕을 좋아했는데 치아의 건강을 돌보는 의사들에게서 끊임없이 사탕을 숨겼다고 한다. 아버지 펠리페 4세와 외할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는 이 아이를 깊이 사랑했고, 펠리페 4세는 사석에서 그녀를 "나의 기쁨"이라고 불렀다. 동시에 마르가리타는 마드리드 궁정의 엄격한 예절에 따라 양육되었고 좋은 교육을 받았다.

3.2. 약혼과 결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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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6년 아버지 펠리페 4세의 사망으로 검은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7]
1666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가 되기 위해 스페인을 떠나게 되었다.

1650년대 후반 빈에서 스페인계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의 사이를 공고히 해주고, 특히 프랑스 왕국에 대한 양국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혼인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처음에는 펠리페 4세의 장녀 마리아 테레사합스부르크 제국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는 것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1660년 피레네 조약에 따라 마리아 테레사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와 결혼하였다.

이후 여동생인 마르가리타가 레오폴트 1세[8]의 신붓감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측에서 마르가리타가 스페인 왕위 계승 명분을 포기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자 스페인 왕실은 당황했다. 당시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가 낳은 아이들 중 살아남은 자녀는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카를로스 2세 뿐이었는데, 마르가리타 공주는 건강하고 총명한 10대인 반면 왕세자인 카를로스는 몹시 허약한 아기였다. 누가 봐도 공주가 차기 여왕이 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인데 스페인이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을 턱이 없었다.

이를 방증하듯 펠리페 4세는 1665년 사망할 때도 딸의 약혼에 대해선 언급을 남기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죽는 시점까지 딸을 정략결혼 대상으로 넘기기 보단 왕위 계승자로서 지켜줘야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듯 하다. 당시 카를로스 2세는 고작 만 4세였고 유모 젖도 못 뗄 정도로 체력이 약했으므로 펠리페 4세는 아들이 몇 년 못 버티고 요절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1662년 10월, 스페인 왕국의 신임 황제 대사인 푀팅 백작 프랑수아 에우세비우스는 인판타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황제의 결혼을 축하했다. 스페인 측의 협상은 메디나 데 라스 토레스 공작 라미로 누녜스 데 구스만이 주도했다. 그러다 1663년 4월 6일, 마르가리타와 레오폴트 1세의 약혼이 공식적으로 발표된다.

이 결혼은 치열한 제국 외교 협상 후에 원만히 합의되었다. 1666년 4월 25일 마드리드에서 제7대 메디나첼리 공작 안토니오 데 라 세르다가 신랑을 대리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1666년 4월 28일에 인판타 마르가리타는 삼촌 레오폴트의 신부로서 자신을 홍보하는 전단지를 발행했다. 데니아에 도착하여 며칠간 쉬었다가 7월 16일 스페인 왕실의 함대에 올라탔고, 차례로 몰타 기사단과 토스카나 대공국의 함대의 호위를 받았다.

그곳에서 밀라노 총독 루이스 구스만 폰세 데 레옹의 영접을 받은 후 인판타 마르가리타는 베네치아를 거쳐 10월 초에 트렌토에 도착했다. 10월 8일 스페인 수행단은 로베레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제8대 알버커키 공작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데 라 쿠에바는 레오폴트 1세의 대리인인 디트리히슈타인의 공작 페르디난드 요제프와 트렌토 주교 에른스트 아달베르트 폰 하라흐에게 인판타 마르가리타를 공식적으로 건네주었다. 10월 20일 새로운 오스트리아 코르테주는 로베레도를 떠나 카린티아와 슈티리아를 거쳐 11월 25일 황제 레오폴트 1세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온 빈에서 12마일 떨어진 쇼트비엔에 도착했다.

3.3. 결혼 생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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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가리타 테레사는 1666년 12월 5일 공식적으로 빈에 입성했다. 공식적인 결혼식은 7일 후에 거행되었다. 빈의 황실 결혼 축하 행사는 바로크 시대에 열린 것 중 가장 화려했으며 약 2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후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이자 오스트리아 대공비, 보헤미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왕비가 되었다.

파일:1663083212449.jpg
남편이자 외삼촌이었던[9] 레오폴트 1세
황제는 현재의 부르고뉴 인근에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 극장을 건설할 것을 명령했다. 1668년 7월 마르가리타의 생일을 맞아 오페라 일 포모도로(황금사과)의 초연을 열었다.

외삼촌과 조카라는 관계, 11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금슬이 몹시 좋았다. 마르가리타는 남편을 "삼촌"(De: Onkel)이라고 불렀고, 레오폴트는 아내를 "그레첼"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이 부부는 특히 예술과 음악에서 많은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 레오폴트는 일생 세 명의 부인을 맞았고 각각의 부인들과 모두 원만하게 지냈지만, 그가 가장 사랑한 아내는 마르가리타 테레사였다고 전한다.

결혼 생활 6년 동안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그 중 장녀 마리아 안토니아만이 유아기를 넘겨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다.

3.4. 사망[편집]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1673년 3월 12일 2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6년간 6번에 걸친 임신으로 쇠약해진 상태였고 결국 7번째 임신 4개월 도중 사산하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녀는 빈에 있는 카푸친 교회의 납골당에 묻혔다. 불과 4개월 후 레오폴트 1세는 마르가리타의 죽음에 대한 슬픔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티롤 분파인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10]와 2번째 결혼을 했다.

사후 스페인 왕위에 대한 그녀의 권리는 유일하게 생존한 딸이자 바이에른 선제후비인 마리아 안토니아에게 상속되었고, 안토니아가 1692년 사망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권은 안토니아의 유일한 아들 요제프 페르디난트 폰 바이에른에게 상속되었다. 이는 스페인 왕위가 서로에게 넘어가는 꼴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그나마 세력이 약한 바이에른 선제후에게 주자고 퉁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요제프 페르디난트마저 1699년 갑자기 죽으면서 다시 싸움이 불붙는다.

이후 스페인 왕위 계승권은 펠리페 4세의 사위들인 합스부르크 제국의 레오폴트 1세와 프랑스의 루이 14세에 의해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러한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는 다른 국가들까지 가세하면서 마침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비화되었고, 마르가리타의 이복 언니 마리아 테레사의 손자인 펠리페 5세가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스페인계 부르봉 왕가가 탄생했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스페인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Margaret Theresa of Spain)
펠리페 4세
(Philip IV)
펠리페 3세
(Philip III)
펠리페 2세
(Philip II)
오스트리아의 안나[11]
(Anna of Austria)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Margaret of Austria)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12]
(Charles II, Archduke of Austria)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13]
(Maria Anna of Bavaria)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Mariana of Austria)
페르디난트 3세
(Ferdinand III)
페르디난트 2세
(Ferdinand II)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Maria Anna of Bavaria)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
(Maria Anna of Spain)
펠리페 3세
(Philip III)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14]
(Margaret of Austria)


4.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바이에른 선제후비 마리아 안토니아
(Maria Antonia, Electress of Bavaria)
1669년 1월 18일
1692년 12월 24일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슬하 1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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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마드리드 왕궁의 전신.[2] 네 자녀들 중 유일하게 생존해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결혼해서 바이에른의 선제후비가 되었다.[3] 1634년 12월 22일 ~ 1696년 5월 16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딸. 원래 마리아나는 펠리페 4세의 아들 발타사르 카를로스와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그가 요절하는 바람에 시아버지가 될 예정이었던 펠리페 4세와 결혼한다. 참고로 마리아나의 어머니인 마리아나는 펠리페 3세의 여동생, 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는 펠리페 4세의 고종 사촌이니 마리아나는 삼촌 겸 오촌과 결혼한 것이다. [4] 펠리페 4세의 후계자 발타사르 카를로스가 사망하고 11년 만에 태어난 남자 후계자이지만 몸이 약해 4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죽고 5년 뒤 또 다른 남자 후계자인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난다. 다행인지 아닌지는 카를로스 2세 문서 참조.[5] 스페인식으론 이사벨. 앙리 4세마리 드 메디시스의 딸.[6] 부모부터가 삼촌-조카 관계였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아라곤 왕국의 트라스타마라 왕조,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 포르투갈 왕국의 아비스 왕조 등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근친혼이 막 겹친 결과였다.[7] 당시 14살이었고 같은 해 외삼촌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8] 마르가리타에겐 외삼촌(어머니 마리아나의 남동생)이자 고종 사촌(고모 마리아 안나의 아들)이다. 부모인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가 3촌 겸 5촌 관계였기 때문에 이런 원형 족보 친가와 외가와 시가가 죄다 같은 집안인 상황이 펼쳐진 것. [9]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마찬가지로 사촌 관계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조카 겸 사촌동생인 신부와 결혼한 전형적인(...) 합스부르크 집안 사람. 가문 특유의 돌출형 눈, 혹코와 주걱턱이 두드러져 보인다.[10] 티롤 대공 페르디난트 카를의 딸로, 어머니는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의 막내딸 안나 데 메디치이다. 클라우디아는 레오폴트 1세와의 사이에서 딸 안나 마리아 조피(1674), 마리아 요제파 클레멘티네(1675~1676)를 낳았고 결혼 생활도 원만했지만 합스부르크가 염원하던 남자 후계자를 낳지 못한 채 1676년 결핵으로 죽었다. 이후 레오폴트 1세는 후계자를 얻기 위해 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마그달레네와 3번째 결혼을 했다.[11] 막시밀리안 2세의 장녀이자, 카를 5세의 외손녀이다.[12] 페르디난트 1세의 3남이자, 울라슬로 2세의 외손자이다.[13] 페르디난트 1세의 외손녀이다.[14] 페르디난트 1세의 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