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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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앙리 4세의 정비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Marguerite de Valois


파일:0bd41abe285ca27a7f954200823b90e5.jpg

이름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Marguerite de Valois)[1]
출생
1553년 5월 14일
프랑스 왕국 생제르맹앙레 궁전
사망
1615년 3월 27일 (향년 61세)
프랑스 왕국 파리
배우자
앙리 4세 (1572년 결혼 / 1599년 무효화)
아버지
앙리 2세
어머니
카테리나 데 메디치
형제
프랑수아 2세, 엘리자베트, 클로드, 루이, 샤를 9세, 앙리 3세, 프랑수아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3. <여왕 마고>의 주인공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 발루아-앙굴렘 왕조공주앙리 2세카트린느 드 메디시스 왕비의 딸이었다. 앙리 2세의 뒤를 이었던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의 동생이었으며 앙리 드 나바르('대왕' 앙리 4세)의 첫 번째 왕비였다. 마르그리트의 애칭인 '마르고'(Margot. 영어로 읽으면 '마고')라고 불리기도 했다.


2. 생애[편집]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아름다운 외모로 오빠들에게 사랑을 받았다.[2]

그러다가 자라서 가톨릭 세력의 중심이었던 기즈 가문[3]의 기즈 공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려 했지만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 왕대비와 샤를 9세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이유인 즉슨 샤를 9세가 유약한데다 후계자가 없어서[4] 발루아 왕조의 존망이 어두운 가운데 샤를마뉴의 혈통인 기즈 공과 마르그리트가 결혼하게 되면, 샤를 9세가 후계자가 없는 한 기즈 공에게 발루아 왕조를 계승할 권리까지 생길수 있어서 였다. 게다가 카트린과 기즈 가문은 개인적으로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5] 더군다나 프랑수아 2세 재위기간과 1차 위그노 전쟁 당시 카트린을 능가하는 권력을 쥔 적이 있었다. 또한 샤를 9세는 즉위 초엽에 기즈 가문에 휘둘릴 뻔한 적이 있어서[6] 기즈 가문에 대해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기즈 공은 카트린샤를 9세의 명으로 포르시앵의 카트린 드 클레베와 혼인하였고 마르그리트에게는 나바르의 앙리와의 정략 결혼이 추진되었다. 앙리 나바르는 나바르의 여왕인 잔 달브레의 아들이자 발루아 왕조에 후계자가 없을 경우 왕위 계승 1순위였기 때문에 앙리 나바르와 혼인하게 되면 모계로나마 발루아 왕조가 이어질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또한 개신교 측인 나바르와의 정략혼인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화해를 통해 프랑스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르그리트 개인에게는 앙리 드 나바르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기즈 공과 비교하면 외모도 딸리는 데다 개신교도라서 그와 결혼하라는게 불쾌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어머니와 오빠의 강권에 할 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7] 하지만 그녀와 앙리 나바르의 결혼은 당초 계획된 프랑스의 화합을 불러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시기 벌어졌던 위그노였던 콜리니의 암살 미수 사건이 비극적인 사태를 불렀으니 바로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이었다. 앙리 드 나바르 개인에겐 비호감이었던 마르그리트였지만 그래도 앙리와 그의 가신들을 구해준 것은 그녀가 손을 쓴 덕이었다는게 오늘날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의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된 샤를 9세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이었던 오빠 앙리가 즉위해 앙리 3세가 되었다. 마르그리트는 앙리 3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동생인 알랑송 공 에르퀼 프랑수아를 지지했기 때문에 마찰이 일었다. 결국 그녀는 앙리 3세로부터 에르퀼 프랑수아를 지키기 위해 동생을 탈출시켰고 에르퀼은 온건 가톨릭 세력과 개신교도들을 규합해 강경 가톨릭 세력을 이끌던 기즈 공에 맞섰다. 앙리 드 나바르도 사냥을 핑계로 가신 도비녜와 마르그리트의 연인인 라 몰느의 도움을 받아 파리를 탈출해 나바르로 도망쳤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앙리 3세는 당황했고 마르그리트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졌다. 어쨌든 그녀는 나바르 국왕이자 방계 왕족 중 가장 높은 왕위 계승 서열을 지닌 앙리 드 부르봉의 부인이자 알랑송 공의 누나였기 때문. 결국 어머니 카트린이 중재에 나서 마르그리트가 파리를 떠나지 않는 대신 알랑송 공에게 앙주의 방대한 영지를 내리는 것으로 협상이 타결되고 위그노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마르그리트는 이때에 앙리 드 나바르(앙리 드 부르봉)와 부부로서 후사를 낳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게 되자 다시 서로 자유분방하게 바람을 피우고 다녔다(...)

이후 상황이 안정되자 앙리 3세는 1583년, 남자 관계가 방탕하고 알랑송 공을 돕는다는 이유로 마르그리트를 궁정에서 추방했다. 남편인 앙리 드 나바르와도 사이가 나빠진 가운데 동생 알랑송 공마저 네덜란드에서 크게 실패한 뒤에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하자 마르그리트의 정치적 입지가 축소되었다. 앙리 3세가 더 이상 마르그리트를 통하지 않고, 직접 앙리 드 나바르와 협상하려 하자 빡친 마르그리트는 옛 연인인 기즈 공과 손잡고 강경 가톨릭 세력으로 말을 갈아탔다, 그녀는 잠시 권력을 회복했으나 앙리 3세앙리 드 나바르가 동맹을 맺고, 기즈 공에게 맞서면서 다시 암운이 드리워졌고, 기즈 공이 앙리 3세에게 암살되자 권력을 다시 잃고 말았다.

이후 앙리 3세가 사망하여 부르봉 가문의 수장, 앙리 드 나바르가 차기 국왕으로서 앙리 4세가 되자, 그녀는 앙리 드 나바르의 왕위 계승을 막기 위해 강경 가톨릭 세력을 규합해 내전을 벌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체포되어 반역과 방탕한 생활 등을 이유로 이혼당했다.[8] 그러나 마르그리트는 앙리 4세와의 합의로 처벌받지 않고 '프랑스의 공주이자 왕비'라는 지위는 유지하게 되었다. 또한 위자료로 받은 돈이 많았기에 파리에서 매우 호화롭게 살면서 정치와는 무관하게 문화계의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자유로운 여생을 보내게 된다. 더불어 앙리 4세와 그의 새 아내 마리 드 메디시스와는 친구가 되었고, 마리가 낳은 앙리 4세의 자식들은 물론 앙리 4세의 사생아들까지 귀여워했다. 앙리 4세가 암살당하고 어린 루이 13세가 즉위했을 때 마리섭정을 맡는 것을 지지했으며 루이 13세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에 변함없이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했으며 6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9]

하지만 마르그리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발루아 왕조는 완전히 명맥이 끊겼다. 마르그리트는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생존자였고 인덕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에 애도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그랬는지 전 남편 앙리 4세의 자식들이 자신의 자식이 아닌데도 잘 돌봐주었는데, 특히 마르그리트를 많이 따랐던 루이 13세는 그녀의 죽음을 아주 슬퍼했다고 한다. 평생 임신을 하지 못한 걸로 봐서 불임이었다는 설도 있다.

3. <여왕 마고>의 주인공[편집]


그녀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1994년 <여왕 마고>[10]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어 유명해졌다.

파일:external/www.vivandlarry.com/isabelle5.png

맡은 배우는 이자벨 아자니. 이 영화에서는 마고와 라 몰르와의 사랑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그녀가 라 몰르를 사랑한 건 사실이지만 평생의 연인은 아니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6 17:32:01에 나무위키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아버지가 왕이었기 때문에 마르그리트 드 프랑스 (Marguerite de France)로 불리기도 했다.[2] 두 오빠 샤를 9세앙리 3세근친상간을 했다는 해괴망측한 설이 돌기도 했으나, 이런 혐의는 발루아 왕조를 폄하하기 위한 위그노 선전가들의 글에 주로 등장한 것이다. 마르그리트가 형제들과 근친상간 관계였다는 주장에 대해 동조하는 현대 학자들은 거의 없다.[3] '유럽의 아버지'로 불린 카롤루스 대제의 후예로, 이 때문에 프랑스의 왕위를 노렸다.[4] 엄밀히 말하면 왕위를 계승할 적자가 없었지, 사생아 앙굴렘 공작 샤를은 있었다. 샤를은 장수해서 루이 14세 때까지 살았다.[5] 기즈 가문 자체가 카트린의 연적인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의 후원을 받던 가문이었다.[6] 기즈 가문의 당주가 오를레앙을 공격했는데 그가 암살당하면서 겨우 벗어났다.[7] 결혼식 때 예법대로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 그녀가 고개를 숙이지 않아 보다 못한 샤를 9세가 나서서 억지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는 일화도 있다.[8] 말이 이혼이지 실제로는 왕비에서 폐위당한 것이다. 다만 사생활의 문란함은 앙리 4세도 마찬가지였는데다 혼외자들까지 있었다. 특히 앙리는 애첩의 출산을 아내인 마르그리트가 돕지 않자 적반하장으로 화를 낸 적도 있다. 여담으로 이 애첩인 가브리엘 데스트레가 낳은 아들, 세자르 드 부르봉의 손자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의 명장인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이다.[9] 전근대에는 평균 수명이 짧아서 그 당시로 61세면 장수한 것이다.[10] <왕비 마르고>가 바른 번역이다. 발루아 왕가의 마지막 적통 왕손이었으나 당시 여성이 왕위를 이을 수 없었던 제도로 인해 남편이었던 앙리 4세(부르봉)가 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