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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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가문
2.2. 초년기
2.4. 초기 정계 활동
2.6. 첫번째 집정관과 감찰관
2.9. 파르티아 원정과 최후
3. 평가
3.1. 군사적 재능
4. 가족
5. 매체에서



1. 개요[편집]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함께 삼두정치의 일원이었으며 로마 제일의 부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가문[편집]


리키니우스 씨족은 플레브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축에 속하는 가문이었다. 기원전 494년 성산 사건이 발발한 후 플레브스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도입된 호민관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고, 이 가문에 속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칼부스 에스퀼리누스가 파트리키의 전유물이었던 집정 무관에 플레브스 출신으로서 2차례(기원전 400년, 기원전 396년) 선임되었으며, 기원전 364년에는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칼부스가 가문 최초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이후 리키니우스 가문은 고위 행정관에 여러 차례 이름을 올리며 노빌레스로 거듭났다.

리키니우스 씨족의 지파인 크라수스 가문은 폰티펙스 막시무스(기원전 212년), 기병장관(기원전 210년), 감찰관(기원전 210년), 집정관(기원전 205년) 등을 역임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를 시작으로 뛰어난 인재들을 배출하면서 리키니우스 씨족 중 가장 유력한 집안으로 거듭났다. 마르쿠스의 증조부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171년 집정관을 맡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군을 지휘했고, 조부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127년 또는 126년에 법무관을 역임했다.[1] 또한 친척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당대 최고의 웅변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아버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97년 집정관을 역임한 뒤 먼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루시타니아인들과의 전쟁을 치러 승리를 거둔 뒤 기원전 93년에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레가투스를 맡아 전장에서 활약했다. 기원전 89년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어 2달 안에 무기를 내려놓고 귀순한 모든 이탈리아인을 로마 시민으로 인정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켜 로마에 반기를 든 동맹시들의 명분을 약화시켰다. 기원전 97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베눌레이아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세 아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또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낳았는데, 이중 막내 마르쿠스가 이 문서의 주인공이다.


2.2. 초년기[편집]


크라수스의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크라수스가 평소 자기 집안에서 60세를 넘긴 사람이 없었다며 걱정했지만 기원전 54년 크라수스가 갈라티아 국왕 데이오타루스를 만났을 때 60세를 갓 넘겼다고 기술했다. 이로 볼 때, 그는 기원전 115년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워낙 검소했기 때문에 작은 집에 살았고, 결혼 후에도 부모와 함께 살았으며 식탁 하나를 놓고 함께 식사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가 먼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할 때 따라갔고 3년간 그 지역에 지내면서 많은 이들과 인맥을 맺었다.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고 아버지가 레가투스로서 전쟁에 참여했을 때, 크라수스도 아버지를 따랐다. 이후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자 로마로 돌아와 변호사로 활동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웅변가에 대하여>에 따르면, 크라수스는 웅변가에게 필요한 재능이 부족했지만 부지런히 노력하고 가문의 지원과 넓은 인맥에 힘입어 변호사로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구사하는 라틴어는 순수하고 단어는 진부하지 않았으며, 연설 구성 역시 신중하게 짜여졌다. 하지만 항상 같은 성조로 발언했고 억양도 비슷했기에, 중요한 부분을 사람들에게 강조하는 면이 부족했다고 한다. 반면,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로마 최고의 연설가 중 한 명이라고 주장했다.

기원전 88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이우스 마리우스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지휘권을 놓고 분쟁을 벌인 끝에 내전이 벌어졌다. 술라는 로마에 무단으로 군대를 끌고 가서 마리우스 일당을 몰아낸 뒤, 정적들을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는 등 여러 조치를 취했다. 이때 아버지 크라수스는 술라 편에 서서 마리우스를 비난했다. 이후 술라가 동방으로 출진하고, 로마는 두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의 통치를 받았다.

기원전 87년, 킨나가 술라가 폐기했던 새로운 시민을 모든 부족에 분배하는 정책을 재추진했다가 동료 집정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축출되었다. 이후 킨나는 남부 이탈리아를 돌며 지지자들을 확보했고, 아프리카로 망명했던 마리우스도 사병대를 이끌고 킨나에게 가담했다. 이때 아버지 크라수스는 옥타비우스가 선임한 도시 방어 책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마리우스-킨나 연합의 승리로 돌아갔다. 기원전 87년 말 로마에 입성한 마리우스, 킨나 등은 대숙청을 단행했다. 숙청 대상자 명단에 든 아버지 크라수스는 장남 푸블리우스와 함께 달아났으나 추격대에게 따라잡혀 살해되거나 자살했다.[2]

아버지와 형이 처참하게 죽었을 때, 크라수스는 친구 3명, 노예 10명과 함께 먼 히스파니아 속주로 달아나 동굴에 숨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인근에 살던 히스파니아 귀족 비비우스 파키아누스가 그를 도와줬다고 한다. 그렇게 숨어지내던 크라수스는 기원전 84년 초 킨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굴 밖으로 나와서 세력을 규합했다. 일찍이 그와 인맥을 맺은 인사들이 대거 사병을 끌고 오면서, 크라수스는 2,500명의 병력을 확보했다. 한편, 그는 이 시기에 큰 형 푸블리우스의 미망인인 테르툴리아와 결혼했다.


2.3. 술라의 내전 시기[편집]


크라수스는 병력을 끌어모은 뒤 마리우스파를 적대하는 또다른 인물인 메텔루스 피우스가 군대를 모으고 있던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그와 반목한 뒤 기원전 83년 초 이탈리아에 상륙한 술라에게 가세했다. 이때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처음으로 대면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술라가 크라수스보다 어린 폼페이우스를 더욱 총애하는 모습을 보이자, 크라수스의 마음 속에 폼페이우스에 대한 경쟁 의식이 싹틔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두 젊은 사령관은 함께 행동했다. 기원전 82년, 그들은 움브리아로 진군해 스폴레티우스에서 법무관 가이우스 카리나가 이끄는 마리우스파 군대를 격파하고 포위했으며, 술라와 대치하던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가 급파한 부대 역시 격파했다. 하지만 카리나는 악천후를 이용해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이후 두 장군은 프라이네스테에서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포위한 술라에 가세했다.

기원전 82년 가을, 삼니움 족 지도자이며 마리우스파와 동맹을 맺었던 텔레시누스는 프라이네스테를 구원하려는 계획이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자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그는 로마와 자신들을 가로막은 군대가 없다는 점을 간파하고, 한밤중에 진지를 떠나 로마로 질주하여 술라가 미처 저지할 새도 없이 로마를 공략하기로 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술라는 폼페이우스 등에게 잔여 병력을 맡겨 프라이네스에 남겨둔 뒤 크라수스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달려갔다. 이튿날 정오 경에 술라군이 당도하자, 텔레시누스는 곧바로 요격에 나섰다.

이리하여 벌어진 콜리나 성문 전투는 술라가 내전을 단행한 이래 가장 격렬한 전투였다. 술라가 직접 지휘했던 좌익 부대는 삼니움족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에 술라는 프라이네스테로 전령을 보내 그곳 병사들에게 포위를 중단하고 아군을 구원하라고 전하게 했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사이, 우익 부대를 이끌던 크라수스가 적군을 격파하고 진영을 함락시켰다. 술라는 수 시간이 지나서야 크라수스가 보낸 전령을 통해 자기가 이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텔레시누스는 부상을 입은 채 전장에 쓰러져 있다가 목이 베어졌고, 수급이 창에 꽂혀 전시되었다.

그 후 크라수스는 술라의 대숙청 명단에 들어간 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브루티움으로 향했다. 그는 이곳에서 수많은 이들을 처단하고 그들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그러나 술라와 협의하지 않고 술라를 지지하던 부자를 숙청 명단에 임의로 포함시키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가 술라에게 호된 질책을 받고 숙청 대상자 수색을 중단해야 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해 로마 최고의 부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이외에도 권력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기도 했고 임대업이나 부동산 같은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부를 쌓았다. 전문 노예들로 이루어진 단체를 거느렸으며 전문인력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노예들을 빌려주는 사업을 했고, 설계가 영 좋지 못한 건물이나 화재로 타버린 건물을 싼 값에 사들여 수리하고 개축하여 되파는 사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사업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알려진 소방서를 매수해서 불끄는 것을 늦추는 사이 불에 탄 집을 싸게 사들인 후 리모델링해 비싸게 팔아 차익을 챙겼다는 일화는 야사로 크라수스가 실제로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이 기상천외한 수익 창출 방식에 후대 사람들이 크게 감명을 받았는지 이 이야기는 크라수스의 재산 형성 과정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일화가 되었다. 거기다 일화로 소개되는 건 그나마 다행인 수준이고 내용을 깊게 다루지 않는 책에선 아예 그런 방법만으로 큰 돈을 벌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부지기수.[3]

다만 역사학자들은 그 정도로 악독한 짓을 해서 돈을 벌었다고 보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정치가로 활동하려면 가문과 재산도 중요하지만 여론과 시민들의 지지 역시 필수적이다. 때문에 로마의 정치가들은 시민들에게 성대한 연회와 오락거리를 자주 제공하고, 가난한 시민 계급에게는 빵과 포도주를 무상으로 나눠주기도 했으며, 오히려 이런 데 돈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쩨쩨하다고 공개적으로 비웃기까지 했다. 그런데 화재가 난 남의 집 불을 늦게 끄고, 거기다 그 집을 헐값으로 거저 먹는 악독한 짓을 했다면 정계 입문은 커녕 암살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고, 사회적으로 두고두고 뒷담화를 들으면서 매장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4]

친구들에게는 이자를 받지 않고 돈을 빌려주었는데, 약속한 기한이 지나면 어찌나 크라수스의 빚 독촉이 심한지 친구들이 차라리 이자를 내는 쪽이 마음 편하겠다고 생각했다는 일화도 있다.[5] 하지만 로마 제일의 부자임에도 의외로 평소에는 소박한 음식을 먹었고, 자기 사는 집 외에는 별장을 지은 적도 없었다고 한다. 2008년 포브스 지가 역사적 인물들 중에 갑부들만 뽑아 그 재산을 현재의 가치로 환산한 순위에서 전체 75명 중 8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여기서 포브스 지가 현재 가치로 환산한 크라수스의 재산은 약 1698억 달러(2022년 달러-원 환율 기준으로 203조 7260억 원).[6]


2.4. 초기 정계 활동[편집]


기원전 78년 술라가 사망한 후,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폼페이우스가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인기를 구가하는 동안, 크라수스는 막대한 부를 활용해 영향력을 얻고자 했다. 그는 종종 공개 연설을 수행했으며, 곤경에 처했거나 불우한 처지에 놓인 시민들을 기꺼이 도와줬다. 그 결과, 친절하고 동정심 많은 사람, 로마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항상 다양한 문제 해결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빠르게 얻을 수 있었다. 한편, 그는 유망한 젊은 정치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돈을 빌려주고 이를 통해 영향력을 키웠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당시 많은 인사들을 탄핵해 당대 제일의 독설가로 알려진 호민관 그나이우스 시키니우스는 유독 크라수스만은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이에 어떤 이게 왜 크라수스를 내버려두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의 뿔에 건초가 붙어 있기 때문이오."


로마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활기 넘치는 황소 뿔에 건초를 묶곤 했다. 즉, 시키니우스는 크라수스를 건드리는 건 성난 황소를 건드리는 것처럼 위험하다고 비유한 것이다. 크라수스가 이렇듯 많은 정치인들을 포섭한 덕분에, 그의 의견이 정책에 언제나 반영될 정도로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 소 카토,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등 기성 정치인들은 그를 위험한 인물로 여기고 적대했지만, 이탈리아 각지의 에퀴테스와 최근 로마 시민권을 얻은 속주민 출신 인사들은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기원전 72년, 크라수스는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얼마 후, 그가 베스타 무녀 리키니아의 집에 자주 찾아가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이들이 무녀를 유혹한 혐의로 고발했다. 일설에 따르면, 크라수스의 위세를 두려워한 정치가들이 크라수스를 몰락시키기 위해 고발을 사주했다고 한다. 크라수스는 그녀가 보유한 부동산을 구매하기 위해 찾아갔던 것일 뿐 그외에 별다른 일이 없었다고 주장했고, 배심원들은 크라수스의 호의를 얻으면 보답을 받아낼 수 있을 거라 보고 무죄를 선고했다.


2.5. 스파르타쿠스와의 전쟁[편집]


크라수스가 법무관을 맡고 있을 무렵,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노예 반란군은 이탈리아 각지를 종횡무진하며 집정관 루키우스 겔리우스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의 4개 로마 군단을 격파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원로원은 겔리우스와 렌툴루스의 잔여 병력을 수습하고 크라수스를 지휘관으로 선임했다. 크라수스가 선택된 이유는 알려진 바 없지만,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에서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수행하고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가 소아시아에서 미트리다테스 6세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그 외에는 맡길 인물이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크라수스는 막대한 재산을 풀어서 6개 군단을 새롭게 편성해 총 40,000 ~ 50,000여 병력을 확보했다. 이후 스파르타쿠스의 분견대를 피케눔(플루타르코스의 기록) 또는 삼니움(아피아노스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맞붙었다. 그 결과 6,000명의 노예군이 전사했고 900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 후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의 주력군을 따라잡기 위해 부관 뭄미우스 휘하의 2개 군단을 앞서 보냈다. 이때 그는 적과 마주쳤을 때 절대로 교전하지 말고 자신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뭄미우스는 막상 스파르타쿠스와 마주치자 명령에 불복종하고 공격했다가 크게 패했고, 이로 인해 독수리 깃발을 비롯한 여러 군기를 노획당했다.

이 소식에 격분한 크라수스는 뭄미우스의 살아남은 병사들을 일렬로 늘어서서 각각 10개의 제비를 뽑은 뒤, 9명의 전우가 1명을 쳐죽이게 하는, 데키마티오(decimatio : 10분의 1형)를 내렸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이때 희생된 병사 수는 4,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데키마티오는 그 잔혹함이 너무 심하다 하여 집단항명과 같이 당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군기를 잡아야 할 상황일 때만 집행이 가능했으며, 그렇다 해도 선고만 하고 실제로는 시행하지 않거나 혹은 소수 범법자들만 대상으로 시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도망친 병사들에게 시행했으니, 크라수스가 상황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살아남은 병사들도 전원 군단에서 추방되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다가 크라수스가 작전 재개를 결정한 뒤에야 겨우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로마군의 규율과 사기를 극적으로 끌어올린 뒤, 크라수스는 투리이 부근에 주둔한 노예군을 추격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초기에 로마 선봉대를 상대로 급습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곧 크라수스의 반격에 직면했다. 크라수스는 별도의 진영에 배치된 10,000명의 노예군을 공격하여 물리친 뒤,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주력군과 교전하여 우세한 교전비를 기록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분리하는 해협 근처에 위치한 루카니아로 이동하여 바다 건너편 메사나로 건너가려 했다. 그는 사전에 킬리키아 해적들과 협정을 맺어 그들의 배를 타고 시칠리아로 건너가려 했다.

그러나 킬리키아 해적 수장 헤라클리온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들이 노예군을 속였다고 기술했으며, 로마군이 해적들에게 뇌물을 줬다는 기록도 있다. 그 사이, 크라수스는 병사들을 독촉하여 300스타디온(55km)에 달하는 해자를 파고 성벽을 그 뒤에 세웠다. 이리하여 노예군은 레기아 반도에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이제 꼼짝없이 굶주릴 지경에 몰리자, 스파르타쿠스는 돌파를 결심했다. 어느 겨울 밤, 노예군은 그의 지휘하에 도랑의 일부를 매우고 건너 방벽을 돌파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아침에 6,000명, 저녁에 6,000명의 노예군이 전사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를 따라 탈출할 수 있었던 노예군은 전체의 3분의 1에 불과했다고 한다.

스파르타쿠스는 포위망을 뚫은 뒤 브룬디시움을 건너 발칸 반도로 건너가려 했다. 그러나 브룬디시움에서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7]의 분견대에게 저지되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병력으로는 브룬디시움을 함락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다만 칸니쿠스카스투스가 이끄는 분견대가 스파르타쿠스를 따라가지 않고 루칸 호수에 진을 쳤다가 크라수스의 군단과 맞붙어 궤멸되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12,300명의 노예군이 전사했다고 한다.

그 후 스파르타쿠스는 브루티움에 있는 페텔리안 산맥으로 후퇴했고, 크라수스는 부관 루키우스 퀸티우스 등에게 추격을 맡겼다. 스파르타쿠스는 카수엔트 강 유역에서 퇴각을 멈추고 로마군을 급습해 로마군을 다시 한 번 격파했고, 재무관 트레멜리우스 크로파는 얼굴과 다리에 부상을 입고 로마 기병에게 가까스로 구조되었다. 하지만 끊임없는 교전으로 반란군의 자원이 거의 소진되었다. 스파르타쿠스는 이런 상황에서 전투를 피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그의 군대는 크라수스와 한판 붙자고 강요했다. 결국 그는 이에 따르기로 하고, 실라루스 강 인근에 진을 치고 크라수스의 본대와 맞붙었다.

스파르타쿠스는 결전 당일 "오늘 이긴다면 말을 새로 구할 수 있지만, 진다면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라며 자신이 그동안 타고 다니던 말을 베어 죽였다. 이어진 교전에서, 그는 특공대를 이끌고 크라수스를 향해 돌진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 바로 앞까지 침투해 앞을 가로막은 백인대장 2명을 처치했지만 결국 적군에게 둘러싸여 버렸다. 전우들은 전장에서 도망쳤지만 그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는 다트가 허벅지에 박혀 걸을 수 없게 되었지만, 무릎을 꿇고 방패를 앞으로 내민 뒤 주변의 전우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플로루스는 스파르타쿠스가 최전선에서 임페라토르처럼 용맹하게 싸우다가 쓰러졌다고 서술했다.

스파르타쿠스가 쓰러진 직후 노예군은 최종적으로 진압되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크라수스는 6천 명 이상의 포로를 카우아에서 로마로 가는 길을 따라 십자가형에 처했다고 한다. 한편, 폼페이우스는 북쪽으로 달아나고 있던 노예군 잔여병 6천 명을 섬멸한 뒤 원로원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크라수스는 공개 전투에서 도망친 노예들을 물리쳤지만, 나는 전쟁의 뿌리를 파괴했다.


원로원은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승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에 대해 오랫동안 논의한 끝에 반란을 마무리지었다는 폼페이우스의 주장을 인정하기로 했다. 물론 그들이 크라수스의 공적을 모를 리 없었지만, 공화국 최고의 거부로 영향력이 높은 크라수스가 군사적 성취까지 얻음으로써 정계의 중심인물로 우뚝서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당시 폼페이우스는 어차피 스페인에서의 활약으로 개선식을 할 것이기 때문에 폼페이우스에게 이왕 거행할 개선식에 스파르타쿠스 토벌 업적을 덧씌워주고 반대로 크라수스에겐 개선식을 주지 않으려는 수작을 부린 것이었다. 때문에 크라수스에겐 개선식이 아닌 한 단계 아래인 오바티오라는 퍼레이드를 주었다. 그래도 오바티오 때 수여하는 금속 관 대신 개선식을 치른 사람에게만 수여하는 월계관을 수여했다.


2.6. 첫번째 집정관과 감찰관[편집]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폼페이우스가 로마로 돌아온 뒤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기로 하자 크라수스가 이에 질 수 없다고 여기고 선거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선 가능성이 불확실하자, 폼페이우스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폼페이우스 추종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겨우 당선되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두 사람은 로마의 권세를 놓고 다투기 위해 군대 해산을 거부하고 로마 시와 가까운 곳에 군대를 나란히 주둔시켰다. 이로 인해 내전이 일어날 기미가 보였지만, 로마 신관들의 설득을 받은 두 사람이 마음을 돌이켜 화해하면서 위험이 사라졌다고 한다.

기원전 70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두 사람은 독재관 술라가 내렸던 조치들을 모조리 취소시켰다. 호민관을 역임한 자는 다른 관직에 오를 수 없다는 법을 폐지했고, 민회에서 통과된 법은 원로원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호르텐시우스 법을 부활시켰다. 또한 전문 법원에 원로원 의원만 배석시킨 술라의 조치를 파기하고 법원의 1/3은 원로원 의원, 1/3은 에퀴테스. 나머지 1/3은 에퀴테스에 속하지 않은 부유한 시민으로 구성하게 했다.

한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권하던 시기에 술라의 집권 이래로 오랫동안 선임되지 않던 감찰관에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루키우스 겔리우스가 선임되었다. 두 감찰관은 전체 원로원 의원의 8분의 1에 달하는 64명을 원로원에서 제외시켰다. 이는 역대 감찰관 중 가장 많은 수치였다. 테오도르 몸젠은 이에 대해 두 사람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구축한 체제를 해체하고 자신들의 이권을 관철시킬 새 체제를 구성하길 희망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의중에 따랐을 것이라 추정했다.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집정관을 맡은 이는 속주 총독에 부임하는 관례를 거부하고 로마에 남았다. 그 이유는 알려진 바 없지만, 로마에 남아서 지지 세력을 규합하는 것이 외지에서 고생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65년, 크라수스는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갈등을 벌였다. 크라수스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의 라틴 시민권을 부여받은 인구를 조사하던 중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 역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집트의 전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죽기 전에 "자신이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이집트를 로마 공화국에 맡기겠다"고 한 유언장 대로 이집트를 로마의 속주로 삼자고 주장했다. 카툴루스는 이를 강하게 반대했고, 크라수스가 뜻을 꺾으려 하지 않자 사임했다. 감찰관 한 명이 죽거나 사임하면 다른 감찰관은 무조건 사임해야 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크라수스는 어쩔 수 없이 감찰관에서 물러나야 했다.


2.7. 카틸리나 음모[편집]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크라수스는 기원전 65~64년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음모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카틸리나와 추종자들은 새해 초에 원로원을 공격하여 제거 대상자로 낙인찍은 자들을 죽인 뒤 크라수스는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병장관을 맡고, 두 사람이 국정을 안정시키고 물러난 후에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푸블리우스 아우트로니우스 파이투스가 집정관으로 군림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 음모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기원전 50년대 초반 삼두정치를 결성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크라수스를 미워한 정적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간주한다.

다만 크라수스가 카틸리나를 지원했던 건 사실이다. 그는 성공 가도를 쌓을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젊은이들의 선거 자금을 기꺼이 지원해주곤 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카틸리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카틸리나가 집정관 선거에서 잇따라 낙선하자, 크라수스는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했다. 기원전 63년 10월, 크라수스는 곧 봉기가 있을 거라는 익명의 편지를 받고 즉시 집정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게 보여줬다. 다음날, 크라수스는 키케로의 요청에 따라 원로원 회의에서 편지를 읽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편지는 키케로가 크라수스가 어느 편에 있는 지 알아내기 위해 작성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기원전 63년 12월 3일, 원로원은 카틸리나 음모에 가담했다가 체포된 공모자들을 저명한 로마인의 집에 구금하기로 했다. 그들 중 한 명인 푸블리우스 가비니우스 카피토는 크라수스에게 보내졌다. 다음 날, 공모자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는 원로원에서 심문을 받았다. 이대 그는 자신이 카틸리나와 크라수스 사이를 오가며 양자의 의사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크라수스는 카틸리나에게 가능한 한 빨리 결정적인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카틸리나 음모 사건에 관한 저서를 집필한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이후에 벌어진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타르퀴니우스가 비정상적으로 부유하고 강력한 귀족인 크라수스의 이름을 언급하자,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이를 믿을 수 없다고 여겼다. 다른 원로원 의원들은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지만, 크라수스를 적으로 두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은 크라수스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타르퀴니우스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소리쳤고, 이를 원로원에 보고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타르퀴니우스의 증언은 공식적으로 거짓으로 선언되었다. 살루스티우스에 따르면, 크라수스는 키케로가 타르퀴니우스를 사주해 자신을 카틸리나와 엮으려 드는 것이라 여기고 키케로를 적대시했다고 한다.


2.8. 삼두정치[편집]


기원전 62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마무리하고 셀레우코스 제국을 멸망시키고 하스몬 왕조를 복속시키는 등 지중해 동방에 대한 로마의 패권을 확고하게 다진 폼페이우스가 로마로 귀환했다. 그는 대규모 개선식을 거행한 뒤 원로원에 자신을 따라 전장에서 활약하고 퇴역하는 군인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자신이 동방에서 실시한 정책을 승인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위세가 지나치게 강하다고 여긴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소 카토,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 등이 이를 막아섰는데, 크라수스 역시 폼페이우스 반대 세력을 지원했다. 이로 인해 폼페이우스의 퇴역병들은 좀처럼 땅을 받지 못했고, 폼페이우스가 취한 정책 역시 승인받지 못했다.

한편, 크라수스는 징세청부업자의 속주세 예납제 폐지를 추진했다. 당시 로마 당국은 가장 많은 금액을 제시한 징세청부업자에게 그 만큼의 속주세를 거둬들일 권한을 주는 방식으로 속주세를 거둬들였다. 그러나 가뭄, 전쟁 등 예상치 못한 악재로 인해 세금이 그 만큼 거둬지지 않으면 남은 금액을 자기 돈으로 충당해야 했고, 그렇다고 악착같이 징세했다간 현지인들의 불만이 폭발해 로마에 고발이 들어가거나 폭동이 일어나버리면 그 책임이 온전히 자신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징세청부업을 맡는 에퀴테스를 대표하던 크라수스는 이 예납제를 폐지해 그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과도한 세금 수취의 필요가 없으니 속주민들에게도 더 좋다는 논리를 제시하며 예납제 폐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법안 통과를 막은 의원들이 크라수스 역시 경계해 이를 막았고, 크라수스는 원로원에 깊은 불만을 품었다.

그러던 기원전 6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먼 히스파니아 총독을 수행한 후 로마로 귀환했다. 카이사르는 루시타니아(오늘날 포르투갈) 지역을 제패하는 군사적 업적을 세웠기에 개선식을 거행하고 싶었지만, 원로원이 집정관 후보 등록과 개선식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하자 개선식을 포기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집정관 당선을 확실히 하기 위해 폼페이우스와 접촉해, 자신이 집정관이 되면 그가 원하는 법안을 통과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에 크라수스까지 끌어들이면서, 제1차 삼두정치가 결성되었다. 다만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서로를 질시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양쪽을 오가며 합의를 이뤄내야 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59년 폼페이우스 추종자들의 투표와 크라수스의 자금에 힘입어 집정관에 당선된 카이사르는 약속대로 폼페이우스가 동방에서 행한 정책을 승인하고 농지법을 도입했다. 크라수스는 농지 분배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또한 징세청부업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임대료를 1/3으로 인하하기로 했다. 이에 만족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연말에 갈리아 키살피나,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그리고 일리리아 속주를 총독으로서 5년간 통치하도록 보장했다. 이후 기원전 58년 폼페이우스의 부관인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장인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가 집정관에 선임되어 삼두의 이권을 보장했다.

그 후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에 착수했고,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반목하기 시작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에 대항하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를 견제하기 위해 클로디우스에 추방당한 키케로를 복귀시켰다. 이에 앙심을 품은 클로디우스는 폼페이우스의 집을 포위하고 돌을 던지거나 연단에 서서 연설하던 폼페이우스를 향해 야유를 퍼붓는 등 온갖 공격을 퍼부었다. 이때 클로디우스 추종자들은 폼페이우스에게 야유를 퍼부으면서 "동방을 맡아야 할 자는 누구인가? 크라수스!"라는 구호를 외쳤다. 폼페이우스는 이 말을 듣고 크라수스가 클로디우스의 배후에 있다고 의심했다. 키케로는 친동생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에게 보낸 서신에서 폼페이우스가 자신에게 "크라수스가 나를 암살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다"고 고백했으며, 몇 달간 시골에 내려가서 경호원들의 철통 호위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크라수스로부터 막대한 후원을 받고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는 카이사르를 계속 지원할 필요성을 의심했다고 덧붙였다.

갈리아 전쟁을 치르면서도 로마의 정세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카이사르는 이 상황을 내버려뒀다가는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겠다고 염려했다. 그의 염려는 기원전 56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표명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카이사르의 임페리움을 회수하고 집정관 시절에 저지른 불법 행위를 고발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면서 현실로 다가왔다. 카이사르는 아헤노바르부스의 당선을 저지하고 삼두정치를 강화하기 위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회담을 갖기로 했다.

기원전 56년,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는 루카 회담을 가졌다. 플루타르코스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루카에 방문한 이들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외에도 르디니아 총독 아피우스, 히스파니아 총독 네포스를 포함하여 120명의 릭토르와 200명 이상의 원로원 의원이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는 방문자들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카이사르의 요청에 따라 루카에 찾아왔다고 밝혔다.

세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고대 사료에 전혀 나와 있지 않다. 다만 플루타르코스, 아피아노스, 수에토니우스는 그들이 루카에서 아래의 합의에 도달했다고 기술했다.

1.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55년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다.

2. 카이사르는 두 사람의 당선을 위해 군인들을 민간인 신분으로서 로마로 보내 투표하도록 한다.

3.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의 임기를 5년 연장한다.

4. 폼페이우스는 임기를 마친 뒤 히스파니아 총독에 선임되고, 크라수스는 시리아 총독을 맡는다.


루카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몇 달 동안 회담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세간에서 두 사람이 루카에서 카이사르와 밀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떠돌자. 현직 집정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는 원로원 회의에서 두 사람에게 "세간에 당신들이 카이사르와 짜고 집정관이 되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데, 정말로 집정관이 되고 싶은가?"라고 대놓고 물었다. 폼페이우스는 옵티마테스 때문이 아니라 선동을 일삼는 자들 때문에 로마의 정세가 불안하니 집정관을 맡아야 한다면 맡겠다고 답했다. 반면에 크라수스는 자신은 카이사르와 짜고 집정관으로 지명된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두 사람은 기원전 56년 가을에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비로소 속내를 드러냈다. 마르켈리누스는 이에 격분해 두 사람의 출마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두 사람은 호민관 가이우스 포르키우스 카토[8]를 회유하여 선거를 마르켈리누스가 퇴임한 후인 기원전 55년 1월로 미루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했다. 마르켈리누스는 "이것은 공화정의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다!"라며 공개적으로 항의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당대 최강의 거물인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가 출마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고 잇따라 사퇴했지만, 아헤노바르부스는 소 카토 등의 격려에 힘입어 선거 유세를 이어가기로 했다. 많은 로마인들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밀실에서 집정관 자리를 거래했다고 분개하며 아헤노바르부스를 지지했다. 이윽고 투표일에 카이사르가 보낸 병사들이 로마에 대거 밀려들어왔다. 아헤노바르부스 및 옵티마테스 파벌 추종자들은 이에 맞서 무리를 결성했다. 곧 두 무리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더니 투표장이 난장판으로 변해버렸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크라수스는 루키우스 안니우스라는 의원의 얼굴을 짓밟아 피투성이가 되게 만들고 의원들을 몰아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아헤노바르부스를 칼로 내리쳤고, 사람들은 이에 기겁하여 도주했다. 아헤노바르부스는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갔고, 다른 이들은 폼페이우스의 피묻은 옷을 집으로 가져왔다. 당시 임신 중이던 폼페이우스의 아내이자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는 이 옷을 보고 폼페이우스가 죽은 줄 알고 놀라 유산했다.

이후 기원전 55년 2월로 미뤄진 투표 결과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두 사람은 루카 회담에서 정한 대로 정책을 단행했고, 원로원 의원들은 굴욕감과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며 이를 허용했다. 이리하여 흔들리는 듯했던 삼두는 다시 굳건해졌지만, 크라수스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에 버금가거나 능가할 군사적 위업을 확보함으로서 입지를 완벽하게 구축하기로 마음먹었다.


2.9. 파르티아 원정과 최후[편집]


크라수스는 집정관 임기가 끝난 뒤 시리아를 배정받는 법이 통과된 직후부터 파르티아를 정벌하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혔다. 이에 정적들은 파르티아가 로마의 이익에 위협을 준 적이 없는데 굳이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그의 의도가 사악하다고 비난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호민관 안티스티우스 베투스(Antistius Vetus)는 릭토르들에게 로마에 무익한 전쟁을 일으키려하는 집정관 크라수스를 체포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이 나서지 않자, 그는 집정관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이를 무시하고 기원전 55년 말 집정관 임기가 끝나기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시리아로 향했다.

기원전 54년 봄 시리아에 도착한 크라수스는 곧바로 군대를 징발했고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BC 55~BC 34 재위),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 2세, 아랍 왕자 알카오도니오스(Alchaudonius)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 북부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여 이치나이 인근에서 파르티아 총독 실라케스의 파르티아 분견대를 격파했다. 이후 54/53년 겨울 시리아로 철수하면서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에 7,000명의 보병과 1,000명의 기병을 배치했다. 플루타르코스는 바빌론과 셀레우키아를 공략할 수도 있었는데 철수해버리면서 파르티아가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며, 시리아로 철수한 것은 크라수스의 큰 실책이었다고 비판했다.

기원전 54~53년 겨울, 크라수스는 예루살렘 사원과 시리아 히에라폴리스의 아타르마티스 여신의 성역을 약탈했다. 이 무렵 카이사르 휘하에서 갈리아인들을 상대로 활약하던 아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수천 명의 갈리아 기병과 함께 시리아에 도착했다. 아르타바스데스 2세 역시 시리아에 와서 파르티아의 강력한 기병대가 제대로 활약할 수 없는 아르메니아 산악지대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라고 조언하면서, 1만 기병대를 제공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시리아에서 사막을 거쳐 메소포타미아 평원으로 곧장 진격하는 계획을 선호했다. 한편, 파르티아 샤한샤 오로데스 2세는 2명의 지휘관을 파견하여 북부 메소포타미아 도시 몇 곳을 탈환하고 로마 수비대를 학살했다. 뒤이어 사절을 크라수스에게 보내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만약 파르티아를 침공한 로마군이 로마 원로원에서 보낸 것이면, 샤한샤께서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군대가 망령 들린 크라수스의 탐욕 때문에 온 것이라면 샤한샤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돌아가게 해줄 것이다."


크라수스는 격분하여 사절단을 내쫓은 뒤 파르티아를 향한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했다. 보병 30,000명에서 40,000명, 기병 4,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오로데스 2세는 친히 아르메니아를 치는 한편, 수레나스에게 1,000명의 카타프락토이, 궁기병 9,000명을 맡겨 로마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게 했다. 크라수스는 아르타바스데스 2세의 구원 요청을 받았지만, 먼저 셀레우키아를 공략한 뒤 아르메니아를 구하러 가겠다며 계획을 밀어붙였다. 부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진격하자고 주장했지만 거부당했다.

크라수스는 현지의 아랍 부족장인 아리암네스의 안내에 따라 사막 지대를 가로질러 진군했다. 아리암네스는 과거 폼페이우스의 원정에 협력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크라수스의 신임을 받았다. 고대 로마 역사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아리암네스는 파르티아 측의 사주를 받아 로마인들을 사막 한 가운데로 유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크라수스 본인이 사막을 강행 돌파하여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기를 택했던 만큼, 아리암네스가 매수되었다는 이야기는 로마 역사가들이 외부인인 그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원전 53년 5월 6일, 크라수스의 4만 로마군은 카르헤 전투에서 수레나스가 이끄는 파르티아 기병 10,000 명과 격돌했다. 그 결과 로마군은 철저히 농락당했고,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휘하 게르만 기병들과 함께 전사했다. 아들의 수급이 창에 꽂혀 있는 것을 본 크라수스는 심히 낙담해 숙소에 틀어박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크라수스의 부관들은 열띤 논의 끝에 인근의 카르헤 성채로 피신하기로 하고, 야밤을 틈타 부상자 4,000명을 숙영지에 버려둔 채 이동했다. 크라수스는 자신이 명령하지 않았는데 군대가 철수하는 상황에서도 별다른 지시를 하지 않다가 마지막 순간에서야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다음날 적이 야간에 도망쳤다는 것을 알게 된 수레나스는 즉시 추격했다. 먼저 숙영지에 남아있는 로마 병사 4,000명을 도륙하고, 뒤이어 퇴각 도중에 낙오된 적병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이윽고 크라수스와 로마군이 피신한 카르헤 성채에 도착한 파르티아군은 그곳을 에워싸고 평화 협상을 하자고 요구했다. 크라수스는 수레나스의 의도를 불신해 협상에 불응하려 했지만, 전쟁에 신물이 난 병사들이 협상에 응하도록 강요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부관 몇 명과 함께 수레나스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플루타르코스는 이후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크라수스가 자신의 말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자, 수레나스는 "필요없소. 샤한샤께서 이것을 주실 것이오."라고 말했다. 그 순간 크라수스 옆에 황금 굴레로 장식된 말이 나타났다. 크라수스는 말을 타지 않으려 했지만 수레나스가 강요하자 어쩔 수 없이 올라탔다. 파르티아 기수들이 그를 에워싸고 말을 때리기 시작하자, 말은 미친듯이 날뛰었고 크라수스는 거의 고꾸라질 뻔했다. 옥타비우스가 먼저 고삐를 잡았고, 트리부누스 페트로니우스가 뒤따랐다. 나머지 사람들은 주위에 서서 말을 잡고 양쪽에서 크라수스를 압박하고 있던 파르티아인들을 밀어내려 했다. 이로 인해 격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옥타비우스는 칼을 뽑아 파르티아인 기수 한 명을 죽이고, 다른 기수는 옥타비우스를 뒤에서 공격해 죽였다. (중략) 크라수스는 엑사테르라는 파르티아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크라수스가 평원으로 내려가자 파르티아인들이 황금으로 장식된 말을 제안했다. 크라수스는 이를 모욕으로 간주하고 거부했고, 양자는 곧장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도중에 크라수스가 심각한 부상을 입자, 로마인 한 명이 그를 죽였다. 파르티아인들은 크라수스의 탐욕을 조롱하면서 죽은 크라수스의 입에 녹은 금을 부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크라수스의 머리와 오른손은 오로데스 2세에게 보내졌다. 당시 오로데스 2세는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가 아르타바스데스 2세를 격파하고 그로부터 봉신 서약을 받아낸 뒤, 장남 파코로스 1세와 아르타바스데스 2세의 누이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결혼식에서 그리스식 연극이 한창 진행 중일 때 크라수스의 머리와 오른손이 도착하자, 크라수스의 머리는 연극 기획자에게 주어졌고, 무대의 소품 대신에 이 머리를 사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로마군은 카르헤 전투에서 전사 20,000명, 포로 10,000명에 달하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단 10,000명 만이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인도하에 시리아로 피신했다. 또한 수많은 군기가 파르티아에 탈취당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건 군기를 잃는 것은 불명예스럽게 여겨지지만, 유달리 명예를 중시하고 시민들 대다수가 참전 군인이던 로마 사회에서 대장기를 잃었다는 건 나라 전체의 수치로 여겨졌다.[9]

여담으로 이 대장기를 되찾기 위해서 파르티아 원정은 계속되었는데, 카이사르가 시도하려다가 암살되었고, 후에 트라야누스 시기에 메소포타미아까지 진격해 최대 유프라테스 강까지 영토를 확장했지만 그러기까지 로마도 너무나 힘들었다.[10]


3. 평가[편집]


일반적으로 크라수스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매우 좋지 않았다. 우선 그 최후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카르헤 전투로마 공화정 시대의 가장 치욕적인 패전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 돈 욕심이 많았으며 인격이 영 그랬던 것도 욕먹기 딱 좋은 거리다.

그러나 크라수스에 대한 이런 평가는 너무 박한 감이 있다. 당시 역사 기록에서는 크라수스를 단순한 졸부로 평가하지 않았으며 실제로도 그는 로마 공공을 위해 많은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물론 당시 로마의 정치인들이 인기를 얻기 위해 자비로 공공사업을 벌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 후 로마에서 벌인 대규모 행사에서 재산의 10분의 1을 썼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쓸 땐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로마 정계에서 그 무게감이 대단하고 위엄 있는 인물로 묘사했다. 군사적인 재능이 취약해 말로가 비참하긴 했어도 그것만으로 지금 같은 박한 평가를 내리기엔 무리가 있다. 또한 돈 욕심과는 별개로 의외로 사생활은 상당히 검소하고 깔끔하였다. 각종 공공사업에 많은 돈을 쓴 것과는 달리 개인적인 사치는 재산의 규모에 비하면 크게 부리지도 않았으며, 여자 관계가 지극히 화려한 카이사르와는 달리 본부인에게만 충실했다.

크라수스가 그렇게 부족한 인물이었다면 아예 삼두의 일인으로 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는 후대의 2차 삼두정치 때 비슷하게 일찍 권좌에서 밀려난 레피두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데, 두 사람 모두 삼두에 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실력과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삼두정치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말은 곧 수십 명의 원로, 수백명의 로마 유력자 중 최정상의 위치를 가진 3인 중 하나였다는 뜻이니 결국 정치, 재력 어느 면에서나 최정상을 차지한 인물이었던것은 확실하다. 결국 삼두정치란 정치동맹을 뛰어넘어 3명의 로마 최고 권력자란 뜻으로 사실상 로마는 3명의 왕을 모시게 된거나 다름없었다.

현대의 기준으로도 그리고 당시 시각으로도 크라수스는 재계를 대표했던 인물로 당시 기록에도 크라수스는 소위 '기사' 계급, 즉 자산가 계급을 확실히 통제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카이사르가 (고위층 자제들이 큰 빚을 지는 게 일상화되던 시절에서도) 막대한 수준의 빚에 허덕일 때 그 빚 모두를 보증섰던 것이 크라수스고 본인부터가 최대의 채권자였다. 갈리아 전쟁으로 카이사르가 독립하기 전까지 카이사르를 막후에서 조정한 것은 크라수스였다는 것이 당대 사람들의, 또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이다.[11] 삼두정치에 참여한 직접적인 이유도 당시 새로 편입된 동방 속주의 징세 업무를 맡았던 기사 계급[12]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정치적 측면에서도 해마다 8명만이 뽑히는 법무관이 된다는 것은 시민들의 지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개중에서도 크라수스는 수석 법무관이었다. 거기다 당시 최전성기를 맞아 로마 최고의 장군이란 평가를 받으며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폼페이우스의 유일한 대항마로 여겨질 만큼 로마 정계의 거물이었다. 직위나 경력이 더 높은 인물이야 원로원에 드글드글했지만 이미 당대 최고의 유력자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두 사람으로 압축됐고 원로원이 이들을 견제하는데 골몰했던 걸 감안하면 크라수스의 정치적 위상을 알 수 있다.

물론, 술라 시대에 재산을 배로 불리고 스파르타쿠스 진압 당시 보였던 여러 비인간적인 행태를 간과할 수는 없다. 분명 능력 면에서는[13] 재평가를 받을 만하지만 그가 지닌 인격적인 결함은 충분히 비난받을 만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군사적 재능의 부족과 그에 따른 미비한 군공이 끝까지 크라수스의 발목을 잡았다. 고대 로마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을 정복하며 성장한 정복 국가였으며 시민 대다수는 참전 경력이 있거나 곧 참전할 예비군이었기에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군대와 군사적 업적을 대단히 중시하는 사회였다. 군사적 재능과 공적이 부족한 사람이 최고위에 오르기가 대단히 힘든,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사회구조[14]다 보니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이루어낸 역사적 위업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군 경력은 크라수스에겐 거대한 벽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마리우스 - 술라의 시절을 거치면서 최후의 수단으로 사병을 동원한 쿠데타가 공공연히 자행되기 시작하면서 개인적인 사병의 규모와 군사적 재능의 유무가 최고권력을 얻느냐 못 얻느냐를 가르는 조건이 되는 시절[15]이 오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업적과 능력에 대한 크라수스의 부담감은 더 늘어났을테고 실제로도 삼두정치가 진행될수록 크라수스의 위치는 점차적으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보다 한 단계 낮아진 이 둘의 조율자 정도로 내려가 있었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강행했을 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이를 결국 승인해주긴 했어도 두 사람 다 크라수스의 만용에 가까운 행동에 크게 놀랐고 지휘관급 인재와 병력을 더해줄 정도로 크라수스의 원정에 불안감을 가졌다. 이는 두 사람 모두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이 빈약함을 알았기 때문인데 그 이유로 이 두 사람은 크라수스가 현실에 안주하며 자기들의 완충지대 역할 정도에 머물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크라수스의 야망은 이 둘의 밑에서 양자를 조율하는 수준에서 머물 정도로 작은 것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이를 한 번에 만회하기 위한 파르티아 원정을 강행했다가 본인 능력의 한계로 비참하게 실패하고 만다. 결국 크라수스의 사망으로 완충지대가 사라져버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곧 서로 대립하게 됐고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전면전이 시작되게 된다.

만약 크라수스가 무리한 군사적 원정을 떠나지 않고 생존하여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을 주는 막후 2인자나 3인자 위치를 끝까지 유지했다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립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견제를 의식해 작은 충돌에서 끝나고 로마 역사가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역사가들의 의견들도 있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제거하고 종신독재관이 된 과정, 카이사르 사후에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까지 오르게 된 역사배경을 생각해본다면, 만약 제 3세력인 크라수스의 견제가 있을 경우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는 요소이다. 크라수스는 단독으로 원로원을 견제하거나 움직일 수 있는 막강한 인물 중 하나였고,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가 사망하고 인연이 끊긴 시기부터 폼페이우스가 원로원파에 접근하기 시작한 점을 고려한다면, 크라수스가 계속 생존했을 경우 폼페이우스의 독주와 원로원 장악 시도에 제동을 걸어 삼두정치가 그대로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파르티아 원정인 카르헤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패전하면서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까지 전사하여,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조율할 수 있던 핵심인물이 줄어들어 버린 것도 크다. 푸블리우스는 단순한 아들 역할이 아니라 카이사르 휘하에서 갈리아 전쟁을 치렀던 군단장으로도 활약했다. 게다가 카이사르가 '젊은 크라수스'라고 부르고 신뢰하는 인물로 직접 '갈리아 전기'에 언급했을 정도로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푸블리우스는 삼두정치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크라수스와 카이사르 쪽에 무력을 더해주고, 또한 카이사르와 크라수스 사이의 마찰을 줄여주며 폼페이우스를 견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무리한 크라수스의 원정에 말려들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의 인물 평가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는 "어떻게 죽었는가"였다. 설령 패배해서 죽었다 하더라도 로마인답게 전장에서 당당히 죽었다면 대체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16][17] 하지만 크라수스의 죽음은 그런 장렬한 최후와는 거리가 멀었고, 이것이 사후 크라수스의 평판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만약 그가 만용을 부리지 않고, 존버를 하면서 계속 막후 정치인 스타일로 남았다면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 살아남아 원로로 존경받았을지도 모른다.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매우 총애한데다 크라수스와도 서로 사이가 좋았다. 폼페이우스라면 몰라도 카이사르가 딱히 크라수스를 견제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파르티아 원정에 금쪽같은 갈리아 기병까지 붙여줄 정도였다.[18]

때문에 카이사르 암살 후에도 살았다고 가정할 경우, 크라수스는 옥타비아누스 역시 지지했을 것이고[19], 그대로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아그리파를 능가하는 원로가 되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그의 정치적 감각이나 포지션으로 미뤄보아도 자기 명운을 카이사르 암살파, 안토니우스, 키케로에 걸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20][21]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재능이 야망을 따르지 못해 파멸해버린 전형적인 유형이 바로 크라수스이다.

총평하자면 다른 라이벌인 폼페이우스는 군재는 뛰어났지만 정치력이 부족하고 카이사르는 정치력과 군재가 모두 뛰어났고 크라수스 본인은 정치력은 뛰어났지만 군재가 부족한 것이다.

그의 둘째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갈리아 원정에서 활약하여 "솔개를 낳았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아버지보다 여러모로 낫다고 평가받았는데, 여기서 또 한번 고대 로마인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뛰어난 재력을 바탕으로 한 자선 사업으로 로마 사회에 꾸준히 기여하면서 원로회에서의 정치력 역량도 돋보여 끝내 삼두정치의 일각을 차지했던 위대한 인물보다 갈리아 원정에서 여러 전공을 세운 그의 아들을 더 우위에 놓았다는 기록은 당시 로마인들이 어느정도로 전공을 중시하는 풍조였는지 상상해볼 수 있게 한다. 안타깝게도 그런 아들조차 역시 아버지를 따라 파르티아 원정에 종군하다가 카르헤 전투에서 전사했다.[22]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함께 카이사르에게 총애받았던 인물.


3.1. 군사적 재능[편집]


군사적 측면에서 능력자라고 보기는 힘들다. 군재가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실질적인 지휘능력은 총사령관으로서는 실격이고, 상급자의 명에 따라 전투를 수행하는 일선 지휘관 정도.

크라수스가 처음으로 참여한 전투는 확실치 않지만, 기록상으로는 아마 "콜리네 성문 전투"로 보인다. 여기서는 술라를 보좌하며 우익을 지휘해 삼니움군을 괴멸시켰다. 최소한 군재가 있긴 하다는 걸 보여준 대목.

그의 가장 큰 군사적 공적이라 할 수 있는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의 경우,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스파르타쿠스가 초인적인 지휘력을 발휘하여 거의 오합지졸에 가까운 노예나 거지로 이루어진 군대로 로마 정규군을 박살낸 거물 중에 거물이었고, 또한 그가 이끌던 군단병들이 노예군 앞에서 등돌려 도망치는 바람에 몇 개 중대를 상대로 그 유명한 10분의 1형을 집행하여 공포로 겨우 부대를 통제할 수 있었을 정도로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던 만큼 당대 로마인들의 의도적인 외면을 감안한다면 스파르타쿠스를 격파한 그의 군사적 재능도 나쁘지 않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동시대 그의 경쟁자가 다름아닌 그 풍운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위대한 자"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였고 심지어 노예반란 당시 크라수스가 이끌던 부대는 정규군이었으므로 그 정도의 재능으론 당대는 물론이고 현재의 평가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기는 힘들었을것이다.

카이사르의 경우 당시 갈리아가 대규모의 내전과 게르만족의 침공으로 약화됐다고는 하나 늘상 더 적은 병력으로 압도적인 숫자의 갈리아 군대를 번번히 격파했으며 특히 스파르타쿠스와 비견될 만한 베르킨게토릭스와의 결전에서는 초반의 패배를 극복하고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었던 베르킨게토릭스를 격전 끝에 항복시켰다. 갈리아 군대도 로마 정규군에 비하면 현격한 질 차이를 보이지만 아무리 그 차이를 크게 잡아도 스파르타쿠스가 이끌었던 노예 군단의 질과는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거기다 카이사르는 수배의 병력 차이를 극복하고[23] 승리했지만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군보다 더 많은 병력[24]인 5만이 넘는 병력으로 승리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의 수에비족중 가장 강력한 세력인 아리오비스투스와 브리튼족의 세력중 가장 강력한 카시벨라우누스를 고전 끝에 이이제이로 제압하였다. 그리고 갈리아족중 인망이 두터웠던 인두티오마투스와 가장 교활하기로 소문난 암비오릭스를 계략으로 몰락시켰다. 정리하면 갈리아 정복이라고 하지만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갈리아족 하고만 싸운 건 아니었고 오히려 처음에는 게르만족으로부터 로마에 우호적인 갈리아 부족을 보호하기 위해 참전했으며, 갈리아 내부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은 물론 예방 전쟁 차원에서 라인 강을 넘고, 심지어 브리타니아에까지 상륙하고, 결국엔 카이사르(로마)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갈리아족의 반발과 전면 봉기를 맞아 이를 분쇄함으로써 갈리아를 제패한 것이다. 그만큼 카이사르는 다양한 전략적/전술적/외교적 상황에서 다양한 지형에서 다양한 적을 맞아 전투를 벌였으며,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갈리아 전쟁은 카이사르에게 단 한 번의 치명적인 실패도 용인될 수 없는 뛰어난 군대지휘관 겸 외교정치가로서의 역량을 요구했으며 카이사르는 단 한 번도 어긋남이 없는 성공을 거두어 냈다. 그에 반해 크라수스는 노예 반란을 진압한 기간도 고작 1년 이하인 데다 요구되는 역량도 훨씬 단순했다. 게다가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병사들을 어떻게든 통솔해서 데려가거나 처벌 대상자만 최소한으로, 병사들이 납득할 만한 기준을 제시해 처벌하는 역량도 부족해서 닥치고 데키마티오[25] 같은 혹형을 남발했고, 당연히 억울하게 중벌을 받은 병사들의 불만이 원로원까지 전해져서 전투에서 이기고도 평판이 바닥을 달렸다. 이러하니 박한 평가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폼페이우스와의 비교에선 더더욱 초라해진다. 폼페이우스 문서에서도 나오듯 폼페이우스의 군공은 화려함이라는 말조차도 치장하기에 모자란 그야말로 전설적인 경력 그 자체로 괜히 로마 수천년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으로 꼽히는것이 아니다. 특히 지중해 해적 토벌과 폰토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26]와의 전투는 왜 폼페이우스가 천재 장군이라고 불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폼페이우스가 싸운 군대들도 대부분 크라수스가 싸웠던 스파르타쿠스의 군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예군들[27]이었고 미트리다테스 6세나 세르토리우스[28]같은 적 지휘관들도 스파르타쿠스만큼은 아니더라도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다. 다시 한번 스파르타쿠스 반란에 대한 로마인의 의도적 외면을 감안하더라도 크라수스의 공적이 폼페이우스와 비교할 수준이 못 되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이 내부 인물로는 더이상 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29]에 처했을 때 사실상의 비상수단으로 법률을 어겨가며[30] 전권을 위임하여 투입한 인물이다. 당장 로마가 위태로울 때 법률따위를 초월해 구국의 영웅으로서 로마의 운명을 맡길만한 명장이었다는 말이다. '마그누스'란 별명[31]이 괜히 붙은 게 아닌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비교는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카르헤 전투에서의 어마어마한 대삽질이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크라수스의 인생과 행적 모두에 있어 박한 평가를 내리게 만드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원정은 명분과 실리를 따지고 하였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입지를 높이는 동시에 갈리아 속주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고[32], 폼페이우스는 동방에 있는 로마의 동맹국을 폰토스 왕국이 침공하여 그들을 지원하고 폰토스를 응징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자신의 군공을 과시한다는 개인적인 실리를 추구하지만 파르티아는 딱히 로마를 침공하지도 않았고 속주에 무력도발도 하지 않았는데 국가적 실리를 고려하지 않고 공격한다는 만용을 부리고 있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군공을 세워 자신의 입지를 다진다는 개인적 실리도 있지만 로마의 국익에 따라 국가적 실리 또한 분명히 고려하였다.

문서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카르헤 전투는 시작부터 크라수스의 오판을 바탕으로 억지로 이뤄졌으며[33] 그렇게 억지로 시작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크라수스는 적국에 대한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34] 병력을 제대로 훈련시키고 전장에 기꺼이 나가 싸울 수 있도록 동기부여도 제대로 해야 했으나 그 전처럼 도망가면 또 처형하지 이런 생각으로 돈 아끼려고 대충 훈련시켰고, 동맹국의 조언[35]을 무시함은 물론, 적국의 계략에 휘말린 데다[36] 부하의 조언[37]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지휘관인 크라수스가 최악의 판단만을 고집한 결과 로마군은 기병 위주의 적군에게 유리하고 보병 위주의 아군에겐 불리한 최악의 장소인 사방이 뻥 뚫린 평지에서 적과 마주쳤고 전투 와중에도 차라리 아들이 어떻게든 뭔가 타개해 보려다가 전사했지, 정작 크라수스는 별다른 지휘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로마군은 병력상의 우위[38]에도 불구하고 전사자 2만, 포로 1만이라는 참혹한 패배를 당한다.

비록 파르티아가 후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침공도 막아냈고 그를 물리친 아우구스투스도 전쟁보단 화친을 선택했을 만큼 만만치 않은 국가였다곤 하지만[39] 그 점이 크라수스의 패배를 가려주진 못한다.[40] 간단한 반증 사례로 카르헤 전투 이후 패잔병 1만을 수습해 달아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그 병력만으로도 파르티아의 반격을 막아낸다. 이외에도 카르헤 전투 당시 파르티아군을 이끌었던 수레나스의 탁월한 능력이나 당시 파르티아군의 합성궁의 성능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 역시 크라수스의 무능을 가려주진 못한다.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였다면 애시당초부터 로마와 심각한 트러블 없이 그럭저럭 지내고 있는[* 카르헤 전투 이전까지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는 결코 나쁘지는 않았다. 파르티아도 크라수스가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도 "로마 원로원에서 보낸 군대라면 우리가 조져버리겠지만, 크라수스의 탐욕 때문에 온 군대라면 자비를 베풀 테니까 그냥 돌아가라"는 취지의 서한을 보내며 나름 외교적으로 풀어보려고 시도했을 정도.] 나라를 상대로 '군공을 세우겠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이고, 막상 전쟁을 결심했다면 일단 병사들 훈련과 준비부터 제대로 시켰을 것이고, 그 다음 침공에 나선 뒤에도 수레나스의 계략에 휘말려 평지로 진격할 일 따윈 없었을 것이며 이는 다른 능력은 몰라도 군사적 재능은 탁월했다는 안토니우스도 철저하게 병력을 준비한데다 11만 명이나 투입한 뒤에 파르티아 침공 때 산맥을 따라 진공했다는 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물론 파르티아의 저항이 격렬했던데다 배후를 맡고 있던 동맹국 아르메니아가 통수를 치고 보급로를 끊어버려서 2만 명 이상의 병력을 손실하고 패배하여 철군하긴 했으나, 그래도 크라수스와 달리 파르티아에 적잖은 피해를 주고 철군했다는 점에서 애초에 패배의 질이 다르다. 카르헤 전투 이전에도 로마군이 비슷한 수준의 기병을 가진 아르메니아와의 전투에서 기병이 움직이기 힘든 지형에 아르메니아 기병을 몰아넣어 승리한 적이 있다. 파르티아 기병이 로마 군단병보다 강해서 진 게 아니라 크라수스의 능력이 수레나스보다 못했기 때문에 진 것이다.

합성궁의 경우 역시 근접거리에서 직사로 쏜 게 아니라면 로마군의 견고한 방패를 뚫지는 못한다. 카르헤 전투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궁기병들은 로마군한테 근접거리까지 접근 자체를 하지 않았다. 경무장이거나 아예 비무장에 가까운 궁기병 특성상 접근했으면 바로 썰렸을 테니까. 뭣보다 파르티아군의 화살은 방패로 보호받지 못하는 팔다리에 부상을 입히고 계속 귀갑진을 편 상태를 강제해 피로감과 불안감을 쌓았을 뿐, 로마군의 방패를 뚫지는 못했다. 사실상 카르헤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결정타를 가한건 궁기병이 아니라 중무장 기병인 카타프락토이였다.

카르헤 전투에 대해 결론지어 말하자면 만약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같은 당대의 명장들이 나섰을 경우 카르헤 전투같은 대참사가 일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이는 후대에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를 침공했을 때 동맹국인 아르메니아가 배반해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후퇴시킨 점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41] 결국 카르헤 전투에서의 참담한 패배는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이 당대의 경쟁자인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에 비교 불가능한 수준이었음을 증명해준다 할 것이다.


4. 가족[편집]


크라수스에게 알려진 자식은 장남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2세와 차남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있다. 군재가 부족하다던 크라수스 본인과는 다르게 의외로 장남과 차남 모두 상당한 군재를 보여줬으며, 손자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3세는 일신의 무력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장남 마르쿠스는 내전기까지 살아남았고 카이사르 충성파로 남아 북이탈리아 일대를 다스렸다고 한다. 그는 카이사르 밑에서 재무관을 지냈고 카이사르군의 대대장을 거쳐 사제가 되었다. 차남 푸블리우스는 항목 참조.

크라수스의 아내인 테르툴리아(Tertulla)는 기록이 미비해서 어떤 가문의 출신인지 알기 힘들다. 다만 명문가 출신인 크라수스와 결혼할 정도이면 그녀 역시 명문가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크라수스는 평소 행실이 검소한 것처럼 여자 관계도 깔끔해서 아내인 테르툴리아에게만 충실했다.

손자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3세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2세의 아들로,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안토니우스에게 대적했으며, 옥타비아누스로 불리던 시절의 아우구스투스가 껄끄러워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할 때 그를 도와서 승기를 가져왔다. 기원전 30년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집정관이 될 정도로 명망이 있었던 배경 역시 이런 경력이 큰 역할을 했다. 이후 다뉴브 강 전선에 참여하여 스키타이족과 전투를 벌였는데, 스키타이족의 데쿠도와 일기토(!)를 벌여 승리를 거둔 전적을 얻었다. 이 전공으로 로마 역사상 단 세 번 밖에 없었던 '스폴리아 오피마'라는 훈장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견제로 얻지 못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그에게 황제나 황족이 아닌 로마인의 마지막 개선식을 허락하고, '임페라토르,라고 병사들에게 선포받는 것을 허락했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누이가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문과 결혼해 얻은 외조카를 양자로 삼았다.

그 양자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1세는 집정관을 거쳐 히스파니아 총독을 역임했다. '크라수스 4세'로도 불린 그는, 소년 시절부터 외삼촌이자 양부인 크라수스 3세 덕에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을 받았다. 크라수스 4세는 티베리우스 시대에 집정관을 맡았고, 칼리굴라 시대엔 황제와 그 황숙인 클라우디우스 1세의 조언자로 존중받았다. 그래서 크라수스 4세는 칼리굴라 암살 이후 즉위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시대에 이르러, 마우레타니아 총독을 역임했고, 브리타니아 원정에 참가하여 개선식때 클라우디우스 1세와 함께 설 정도의 전공을 세웠다. 크라수스 4세의 딸은 리키니아로 그녀의 아들이 세네카와 함께 네로 암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였다.

크라수스 4세는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해, 자녀를 많이 얻었다. 이중 그의 장남은 아주 일찍이 아내의 외할머니인 폼페이아[42]의 혈연인 이유로, 대가 끊긴 폼페이우스 가문에 입양되었다. 그래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는 아버지 크라수스 4세를 크게 신임한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 후원을 받았고,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공주와 결혼해 클라우디우스 1세의 부마가 되었다. 그러나 부부 사이는 최악이었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이 로마에서 경멸받던 동성애자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공주와 소원했고,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남편은 곧 어린 브리타니쿠스의 보호자이자 후원자인 것과 연관되었기 때문에, 이는 발레리아 메살리나의 명령으로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해당하고 결혼이 무효가 된 일련의 사태로 끝이 났다.

크라수스 4세의 차남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5세'로도 불린,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2세였다. 그는 네로 시대에 집정관을 지냈으나 네로에게 처형당했다. 3남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스크리보니아누스도 정계에서 활동했다. 4남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리키아누스는 전술된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양자로 입적되었다가 네로 암살 미수 사건 이후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복귀 후 갈바의 양자로 입적되어 후계자로 공인되었으나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의 반란으로 함께 살해당했다.

크라수스 프루기 2세의 장남은 보결 집정관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였다. 그는 최소 두 번 결혼했는데, 이중 그가 트라야누스 황제의 누이의 외손녀와 결혼해 얻은 딸이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였다. 루필리아 파우스티나는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결혼해, 2남 2녀를 얻었는데 이중 3명은 성인까지 살아남았다. 이 세 아이 중 둘째 딸이자 실질적인 장녀가 대 파우스티나였고, 장남이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2세였으며, 차남이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였다.

이중 장녀 대 파우스티나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아내로 훗날 '아우구스타'가 되었고, 자신의 조카를 양자로 입양한 후 사위로 삼았다. 그 조카가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인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아들로 법무관이던 중 요절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2세의 아들이었다. 즉,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딸은 대 파우스티나, 사위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손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녀의 외손녀이자 손녀 며느리는 소 파우스티나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를 구성한 안토니누스 가문은 서기 3세기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와 그의 두 아들의 비문에서 확인되듯이, 그들의 선조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대 파우스티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생전부터 스스로를 옛 에트루리아에서 기원한 명망가인 크라수스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했다.

리보 프루기의 삼촌은 아버지와 동생 피소 리키니아누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대에 들어 밀고자를 찾아내 원수를 갚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리보 프루기의 동생들은 공화정 시절부터 내려온 명망가 출신인 이유로, 큰 고초를 겪어 리보 프루기의 누이인 리키니아를 제외한 이들은 추방되거나 추방 이후 황제의 명령으로 자연사인양 암살되었다. 이때 이를 사주한 황제가 네르바와 하드리아누스인데, 트라야누스의 즉위 전후로 이들이 보호받았고, 트라야누스의 죽음 이후 이들이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으로 암살된 것은 훗날 원로원에서 하드리아누스의 신격화 반대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5. 매체에서[편집]



  • 파란 카툰에서 연재된《카이사르》에서도 큰 비중은 없지만 나온다. 여기서는 파르티아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히기 직전, 크라수스의 부하가 크라수스를 포로로 잡히게 놔둘 수 없다고 해서 죽이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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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인물은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아겔라토스(ἀγέλαστος: 우울한, 음산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2]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 플로루스에 따르면 그들이 서로가 보는 앞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그가 아들을 죽인 뒤 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밝혔다. 키케로는 그의 저서에서 크라수스가 포로 신세를 피하기 위해 자살한 일에 관해 논했다.[3] 어린이용 학습만화인 중 하나인 계몽사의 '학습만화 세계사'에서는 한술 더 떠서 상대가 거래를 거절하자 불을 안 끄고 가려고 하고, 집주인이 뒤늦게 거래에 응하자 '흥정하는 동안 집이 더 탔다'라며 처음 제시한 돈의 반만 주는 내용도 나온다.[4] 즉, 크라수스가 인기가 없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군공이 없고 고리대금업자에 신참이라는 것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귀족과 평민 중 어느 쪽이라도 인기가 힘든 포지션이다.[5] 이는 고리대금업을 한다는 악평을 얻지 않으면서도, 동료 원로원 의원들에게 금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6] 참고로 2016년도 대한민국 1년 예산이 대략 387조 정도. 아이언맨의 경우 123조 원, 배트맨은 91조 원.[7]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의 동생[8] 소 카토의 먼 친척으로, 소 카토와는 달리 삼두정치파였다.[9] 파스케스 등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도 잃어버릴 경우 당사자는 물론 해당 부대까지 커다란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다.[10] 군단기 자체는 아우구스투스가 파르티아 왕 프라아테스 4세에게 무사를 애첩으로 선사하는 것으로 돌려받았다.[11] 물론 카이사르의 정치적 능력을 생각해보면 무작정 크라수스의 꼭두각시 노릇만 했을 리는 없었을 테니 두 사람의 진짜 관계는 서로 돕는 공생관계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크라수스가 뒤를 봐주고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에게 유리한 법안을 상정하는 관계. 물론 이후 카이사르가 군공을 세우면서 크라수스를 능가할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크라수스도 군공을 세우러 갔다가...[12] 로마는 세금 징수권을 경매에 붙였다. 높은 징세액을 적은 사람이 징세권을 얻는 방식. 징세청부업자 문서 참조. 당시의 동방 속주는 혼란이 계속되면서 처음 약속한 세금을 납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13] 특히 정치적 능력. 폼페이우스의 상승세를 이용하여 그와 정치적 동맹을 결성하거나 카이사르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에게 투자를 하는 등 정치적 감각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다.[14] 키케로가 괜히 유명한 장군 출신이 아님에도 집정관이 됐음을 자랑한 게 아니다. 그런 키케로도 본인이 짬밥이 안 맞는다고 금방 때려치웠지만 참전 경력도 있고, 군사 호민관을 지냈던 군필자였다. 거기에 당시 로마 공화정이 겪던 극심한 대내외적 혼란 덕에 유력 정치인의 군사적 공적이나 능력이 더더욱 중시되고 또 필요해진 상태이기도 했다.[15] 이걸 못 해서 망한 대표적 케이스가 마리우스 사후 로마를 통치했던 킨나다. 술라 사후 술라 체제에 반기를 들었던 여러 마리우스파들도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술라파 장군들을 이기지 못해 끝장이 났다. 카이사르 - 폼페이우스의 분쟁만으로 이 시기의 로마를 내전기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16] 이런 로마인들의 인물 평가의 가장 확실한 사례가 바로 소 카토이다. 생전에는 일반 로마 시민과 반대 노선인 옵티무스파의 거물로 존재감을 발휘하였고, 이로 인해 로마 민중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다. 하지만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들고 싸우다 패배한 후, 의관을 정제한 뒤 플라톤의 저서를 읽다 배를 가르는 극도로 강렬한 방식의 자살을 선택하면서 당대 로마 시민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많은 로마 시민들은 소 카토의 자살을 장렬한 죽음으로 여기고 생전과 달리 동정과 지지를 보냈는데, 그 수준은 카이사르가 직접 소 카토의 주장과 자살 선택을 반박하는 글을 대중에게 발표했어야 할 정도로 강렬했다.[17] 후일의 데키우스 황제와 그의 아들 에트루스쿠스도 로마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고트족과의 전쟁에서 그들이 오판으로 패배하고 부대가 전멸하긴 했지만 패전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다는 점을 로마인들은 더 높게 평가했다. 오죽하면 그란데 루도비시라 하여 부조를 만들어서 기념했을 정도.[18] 비슷한 예로 다테 마사무네가 있다. 그는 천하를 노릴 정도로 거물급 다이묘였지만 도쿠가와 가가 천하를 먼저 잡게 되자 자신이 이를 뒤집을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고 도쿠가와 가의 지배에 협력해서 크게 대접받았다.[19] 자금과 세력이 필요했던 옥타비아누스 역시 마찬가지다. 옥타비아누스는 한때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때문에 군대에게 줄 돈이 모자라서 동맹시의 토지 일부를 몰수할 정도로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는데 만약 크라수스가 살아서 옥타비아누스를 도와줬다면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20] 크라수스는 원로원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이유는 물론 스파르타쿠스 토벌전의 공을 원로원이 씹어버렸기 때문. 더구나 원로원파는 크라수스 본인의 라이벌인 폼페이우스 편을 들었으므로 더더욱 원로원파보다는 카이사르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다 카이사르와는 사이도 좋은 편이었고.[21] 특히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설령 초반에는 안토니우스를 지지했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더라도 나중에는 옥타비아누스로 갈아탔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돈과 세력이 모자란 쪽은 옥타비아누스고 그에 비해 로마를 지배하던 쪽도 옥타비아누스였기 때문. 그에 비해 안토니우스는 부유한 동방을 차지하고 이집트 왕가의 후원까지 받고 있었으니 크라수스의 도움따윈 그리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22] 다만 그가 이끌던 갈리아 기병 1000명으로는 파르티아군의 대규모 기병을 이길 수 없었고, 그나마 규모가 비슷한 카타프락토이도 마갑을 충실하게 갖췄을 정도로 무장 및 전투력에서 갈리아 기병들에 비해 우세한 상황이었다.[23] 더군다나 역사에 보기 드문 소수 병력으로 다수가 농성한 성을 포위 공격하는 공성전을 벌이기도 했다.[24] 마지막 전투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이끈 군대의 규모에 대해선 정확한 숫자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크라수스의 진압군보단 훨씬 적은 규모였음은 분명하다.[25] 10분의 1형. 부대 단위로 10명 중 1명을 묻지마로 때려죽이는 무시무시한 형벌이어서 적전도주 같은 죄를 지어도 가능하면 집행하지 않는 형벌이었고, 법전에도 사령관에 대한 집단항명 같은 적극적인 중대한 군율위반에만 적용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크라수스는 이걸 도망친 병사들에게 적용한 것이다. 차라리 적극적으로 도망간 병사 몇명을 처형한다면 모르겠는데 도망가지 않았어도 10분의 1형에 걸려 죽는 자들도 나왔으니 억울할 만도 하다.[26] 폰토스 왕국의 왕으로 로마의 영향력으로 약해진 폰토스 왕국을 부흥시키기 위해 평생에 걸쳐 로마와 싸웠다. 한때는 폰토스 왕국의 영역을 크게 넓히기도 했지만 술라루쿨루스, 그리고 폼페이우스에게 탈탈 털려버리면서 결국 아들의 반란에 직면해 자살했다. 잦은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로마군과 맞섰지만 술라-루쿨루스-폼페이우스로 이어지는 로마 명장 라인에 무참히 털리면서 후대엔 로마군용 전투력 측정기 취급을 당하는 인물. 그래도 아퀼리우스, 카시우스, 오피우스, 무레나, 코타 같은 평범한 수준의 장군들은 간간이 무찔렀다.[27] 심지어 해적들도 당시 로마와 대립하던 미트리다테스 6세의 지원을 받아 사실상 정규군에 가까울 정도였다.[28] 마리우스파의 장군으로 술라가 로마를 장악하자 스페인으로 가서 반기를 들었다. 스페인 전 지역을 장악하곤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로마의 술라 정부에 대항했고 폼페이우스를 상대로도 5년이나 버텼던데다 2번씩이나 패배를 안겼을 정도로 유능했던 장군. 폼페이우스도 궁지에 몰아넣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세르토리우스를 직접 해치우진 못했다. 나중에 세르토리우스는 결국 부하에게 암살된다.[29] 세르토리우스가 이끄는 스페인 반란의 진압. 당시 원로원이 꺼낼 수 있는 카드는 모두 실패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게 투입된 폼페이우스도 전쟁을 쉽게 끝내진 못했다.[30] 술라가 원로원 강화를 위해 세밀하게 정해놓은 연공서열에 따른 진급 규정. 이 규정에 따르면 폼페이우스는 나이가 너무 어려 스페인 원정군 같은 대규모 군대를 이끌 직위에 오를 수가 없었다.[31] 영어로는 'The Great'로 '위대한 자' 라는 뜻으로 당시로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미 사망한 지 오래인 알렉산더 대왕이야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의미에서 그런 어마어마한 칭호를 붙여 부를수 있을지언정 여전히 살아있는 인물에게 붙기는 사실상 요원한 칭호다. 그럼에도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사적 능력이 알렉산더 대왕에 비견된다는 자부심으로 애용했다. 시작은 술라가 반 장난으로 붙였지만 본인이 능력으로 이를 인증한 셈.[32] 당시에는 헬베티족이 갈리아를 침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게 점쳐지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헬베티족에게 쫒긴 갈리아인들이 이탈리아 반도로 처들어와서 노략질을 할 것이 뻔했다. 애시당초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고.[33] 당시 파르티아는 로마와 적대하지도 않았고 외려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34] 기병을 위주로 한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이면서 평탄한 사막지대를 가로질러 수도를 직접 공격하려 했다.[35] 아르메니아의 왕이 파르티아의 기병을 피하기 위한 산악지대 우회 진격을 조언했다. 다만, 후대에 크라수스와는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정도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크라수스의 전철을 피하려 산악지대로 진격했다가 동맹국 통수+보급로 털림으로 실패한 걸 보면 크라수스가 조언을 따랐더라도 성공하긴 힘들었을 것이다.[36] 폼페이우스의 동방 원정 때 협력을 했던 사람을 매우 신뢰하여 현지 안내인으로 썼는데 이 사람은 이미 파르티아의 사주를 받은 상태였다.[37] 사막지대 횡단 대신 강을 따라 진격할 것을 조언했다. 그리고 수레나스가 이끄는 파르티아 군과 마주쳤을 때 충분한 휴식 후 전투를 하자고 조언했지만 이 역시 무시당했다.[38] 로마군은 총 병력 4만에 육박했고 파르티아군은 1만에 미치지 못했다.[39] 이 점은 좀 보충설명이 필요한 게, 이 당시의 파르티아는 과장을 보태면 거의 당대 로마와 비스무리한 강대국이었다. 제정 시대로 가면 로마가 국력에서 압도하긴 하지만.[40] 카이사르 사후 파르티아가 로마를 침공한 적이 있는데 안토니우스 휘하의 노장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에게 역으로 탈탈 털리고 패주했다. 또한, 제정 시대라 직접적 비교는 어렵지만 파르티아는 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게 연속으로 수도 크테시폰까지 털리며 참혹하게 패배했다.[41]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플루타르코스의 전투 피해 기록이 종종 정확하지 않은 걸 감안해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하긴 어렵다. 2만여 명이면 무려 4개 군단과 맞먹는 머릿수이다! 물론 사상자에 동맹국 군사들과 기병들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42] 명장 폼페이우스의 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