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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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us Junius Brutus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출생
기원전 85년
로마
사망
기원전 42년 10월 23일(43세)
마케도니아 필리피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친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양부)

세르빌리아
파벌
옵티마테스
종교
로마 다신교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카이사르와의 관계
2.3. 3월의 이데스[1]
2.4. 해방자 내전, 그리고 몰락
3. 평가
4. 기타
5.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편집]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과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을 사실상 주동한 인물로, 서양권에서 유다와 함께 배신의 상징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그의 가문은 당대 로마 공화정 말기에 최고의 명문이라 인정받은 유니우스 가문으로, 로마 국왕중 마지막 왕이자 폭군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제거하고 로마를 공화정으로 건국한 국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후손[2]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후대의 이 인물을 젊은 브루투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의 딸 세르빌리아와 그녀의 첫번째 남편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르빌리아는 브루투스가 죽은 뒤 전남편과 같은 유니우스의 일족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재혼해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의 협력자), 유니아 프리마(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의 부인, 부부 사이의 딸 세르빌리아는 아우구스투스의 약혼상대였다가 정치적 역학관계에 의해 파혼후 레피두스의 아들과 혼인하였다), 유니아 세쿤다(삼두정치조역 주역 레피두스의 부인), 유니아 테르티아(카이사르를 암살한 카시우스의 부인)등 1남 3녀를 두었다. 브루투스는 외숙부인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에 의해 입양되었고, 한동안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브루투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가문 역시 공화정 말기에 와서 빛이 좀 바랜 감이 있기는 했어도, 대단한 유력가문이었기 때문에 그가 물려받은 가문의 이름값은 메텔루스 스키피오에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 명문귀족답게 그의 첫번째 결혼상대는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의 귀족 여성이었다.

브루투스는 본인 스스로 군사적 면에서 경력을 쌓으려는 노력을 하질 않아[3] 군사적인 능력은 동년배의 다른 귀족 청년들보다는 많이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지적 능력과 강직함으로 유명했기에 어디에서든 우습게 취급되는 위인은 아니었다.[4] 군사적 능력이 숭상되는 당대 분위기에서 그것만으로도 높이 대우 받았다면 그 분야에서의 인정은 남들보다 훨씬 웃돌았던 건 확실하다. 거기다 플루타루코스나 당대 역사가들의 평가도 높았다.

당연히 이건 본인의 인품과 기본적인 지적 능력 그리고 그 분야에서의 노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얘기며, 카이사르가 일부러 그를 수도 법무관까지 시켜주고 여러 차례 사면해주면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건, 그를 끌어들일 경우 로마 여론에서 자기 평가를 제고할 수 있다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브루투스가 평생 연인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이라는 점이 더욱 컸겠지만.


2.2. 카이사르와의 관계[편집]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의해서 카이사르와 매우 돈독한 관계였다거나, 심지어는 양아들로 묘사되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다만, 카이사르의 오랜 연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었고[5] 카이사르가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유별나게 브루투스한테만 너그럽고 잘해줬으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6]

하지만 정작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호의를 그저 고맙게만 생각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어머니의 이부동모제(異父同母弟), 즉 외삼촌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에게 깊은 영향을 받아 골수까지 공화정주의자였던 것도 이유였지만, 그가 카이사르의 사생아가 아니냐는 소문이 늘 돌았기에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카이사르에게 반감을 품는 원인이 되었다.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가 카이사르와 처음 애를 한 건 카이사르가 겨우 15살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세르빌리아는 직후에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문의 남성에게 시집가서 브루투스를 낳았는데, 물론 플루타르코스가 확언하는 마냥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의 사생아란 게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당대인들이 그렇게 오해할 여지는 있었다. 로마인 남성은 성생활을 상당히 일찍 시작했다.[7][8]

브루투스 자신의 이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다. "설령 아버지라 할지언정, 폭군 밑에서 참고 견디어서는 안 된다고 옛 사람들은 가르쳤다네."[9]

때문에 브루투스는 내전 때 아버지를 죽인 폼페이우스의 편에 섰고 그리스에서 카이사르에 대적하여 전투에 참전했다.[10] 하지만 폼페이우스가 패했고 세르빌리아가 한 간청도 있어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게 투항했다. 하지만 이후 카토의 자살 사건 이후로는 상당히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 같으며, 그 여파로 첫번째 부인 클라우디아 풀케르와 이혼하고, 카토의 이자 사촌간인 포르키아와 두번째 결혼을 한다. 이 때 본인의 원래 이름이었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이름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카이사르의 언행을 보고 흔들리던 차에 매제인 카시우스의 설득을 받고 카이사르 암살을 주도하는 인물이 된다.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에 오르고 파르티아 원정을 계획하자 14명과 함께 모의하여 암살을 이행했고 성공했다.[11]

단, 그가 최후를 맞기 전에 외친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라는 말은 원래는 없었던 말이며 이것은 수에토니우스에 의한 후세의 창작이 셰익스피어의 문학작품에 수용되어 널리 알려진 케이스이다. 원전은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12]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음모자들이 그 주변에 인사를 하는 척 몰려들었고, 곧바로 먼저 다가간 틸리우스 킴브로가 질문이 있는 것처럼 가장했고 카이사르가 다음 기회에 하라고 거절하자 킴브로는 어깻죽지의 토가를 움켜쥐었다. 카이사르는 이에 당혹해 '이 무슨 난폭한 짓거리냐!'라고 소리쳤고...(중략)...어떤 사람들은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그에게 달려가자 카이사르가 "아이야,[13]

너마저?'(καὶ σὺ, τέκνον)라고 그리스어로 외쳤다고 한다.


2.3. 3월의 이데스[14][편집]


카이사르 암살은 너무나도 낙관적인 장래 예측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즉 애시당초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결행된 일이 아니었다. 브루투스가 딱히 뭔가 하려고 한 게 아니었고 매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주동이 된 일에 찬동했을 뿐이라고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주장하면서 그를 비난하는 근거로 사용하는데, 사실 카이사르만 죽이면 사람들이 독재자의 죽음에 환호하여 공화정이 자연스레 돌아올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건 모든 암살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그리고 카시우스도 이런 면에선 별반 브루투스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브루투스를 포함한 암살자 무리가 당시 정세를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제대로 된 후속조치를 준비하지 않았던 것, 카이사르의 심복 측근과 후계자들, 그리고 정치상황을 경시[15]했다는 점은 분명하며 이러한 사실들로 미뤄볼 때, 그들에게 정치적 능력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편 모친인 세르빌리아도 비록 아들과 연을 끊지는 않았지만 카이사르측 인사들에게 암살위협을 받는 아들을 자기 집에 들이지는 않았다고 한다.[16]

카이사르 암살 후, 브루투스는 그들의 정당성에 대해 연설했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매우 냉랭했고,[17] 더 나아가 분노한 사람들과 군인들을 피해다니게 되며 간신히 마케도니아 총독 자격으로 부임하는 식으로 로마에서 도망쳤다. 이후에는 안토니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를 지원하는 키케로에게 강력하게 반발했고, 그런 조치는 자승자박에 불과하며 결국 그건 안토니우스 대신 옥타비아누스를 군주로 섬기는 짓이라고 비판했다.[18] 그리고 이 예측은 맞아 떨어졌다.[19][20][21]

여기서 암살 직후의 상황에 대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기록된 내용을 조금 기술하면,

암살이 감행된 후,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은 "우리는 독재자를 처단했고, 자유를 수호했다"라고 외치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시민들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자 브루투스는 시민들을 모아 연설을 했다.

"카이사르가 살면 로마시민들은 노예가 될 것이고, 그가 죽으면 자유로워질 것이오! 카이사르의 용맹함과 위대함은 나도 물론 찬미하던 것이었지만, 그는 이 되려고 했소. 그래서 나는 눈물을 감수하고 날 아들처럼 보살펴 준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소!"

그의 연설에 대중이 조금 안정을 찾으려 하자 갑자기 상복을 입은 안토니우스가 나타나 외쳤다.

"나는 카이사르의 장례를 치르러 왔지 그를 찬양할 생각은 없지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는 로마의 노동력을 높이는데 큰 공헌을 했고, 수많은 돈을 국고에 기부했고, 사익을 위해 단돈 한푼조차 쓴 바 없으며, 가난한 이들의 편이 되어주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왕이 될 생각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안토니우스가 말을 마치자 시민들은 그 말이 옳다며 외쳤다. 그러자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유서를 들어보이며[22]

"저는 도저히 이 유서를 읽을 수가 없습니다. 이걸 읽으면 여러분은 모두 그의 시신에 달려들어 발에 입을 맞추려 할 테니까요." 라고 말하며 시민들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유언을 알려달라며 소리쳤다. 안토니우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시민들을 카이사르의 시신 주위로 둥글게 앉혔다.

"이곳은 카시우스에게 찔렸고, 카이사르가 사랑한 브루투스에게 찔렸습니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여기 없습니다. 그 카이사르를 브루투스가 찔렀습니다. 카이사르조차 브루투스를 보고는 얼굴을 가리고 쓰러졌으며, 그 순간, 저도 로마 시민 여러분도 모두 쓰러진 것입니다!"

안토니우스가 피투성이가 된 카이사르의 옷을 들어보이자 분노한 시민들은 살인자들을 잡으라며 소리를 질렀고 안토니우스는 그 때를 놓치지 않았다.

"유서에는 이렇게 써 있습니다. 로마 시민 전체에게 74드라크마 씩의 돈을 나누어 주라고 했으며, 자신의 별장, 과수원, 사유지를 전부 시민들의 처소로 바쳤습니다. 이런 로마의 영웅이 죽음을 맞았단 말입니다!"



2.4. 해방자 내전, 그리고 몰락[편집]


안토니우스의 선동으로 로마 시내에서 있을 자리가 없어진 카이사르 암살자들은 결국 안토니우스가 제의한 화친안을 받아들여 외부 총독 임명 형식으로 사실상 추방당하게 되었고 브루투스는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파견되어 다시는 로마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이후 로마 내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안정을 되찾으면서[23] 자신들을 향해 공격해온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 연합군을 상대하기 위하여 가이우스 카시우스와 함께 그리스에서 병력을 모았고 필리피 전투를 치렀다. 브루투스 쪽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으나, 카시우스가 안토니우스에게 패배하고 사실상 자살해버림으로써 공화정 군은 구심점을 잃어버리고 만다.

카시우스와 달리 브루투스는 군사적 경험이 일천했고 동맹이나 병사들로부터 그다지 신뢰를 얻지 못했고 카리스마로 병사들을 휘어잡은 상태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재물로 병사들을 붙잡는 수완을 발휘하지도 못했다.(공화정 군이 5천 데나리를 병사들에게 약속했던 반면, 브루투스는 그보다 훨씬 적은 1천 데나리를 약속했을 뿐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동방에서 고용했던 용병들 중 일부가 탈영하기 시작했고, 20일 넘게 지연전술을 벌여댄 탓에 휘하 병사들의 불만도 높아져가는 위험한 상태였다. 이에 먼저 회전을 걸었지만 결국 패배하였다. 이 때 패주한 브루투스가 어느 동굴 속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남긴 말이 유명한데,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에서 메데이아가 자신을 배신한 이아손을 저주한 시를 인용한 것이다.

위대하신 유피테르여! 이 죄악의 장본인을 벌하여 주옵소서![24]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수록된 브루투스의 친구이자 카이사르 암살에도 가담했던 푸블리우스 볼룸니우스의 회고[25]


필리피 전투에서 패한 후 호위병 중 하나가 도망칠 것을 건의했지만, 브루투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를 거절했다.

(도망치자는 말에) 그래야지요. 하지만 발이 아니라 손으로 떠나야겠습니다. 나는 더없이 만족스럽습니다. 다만 조국을 구제하지 않은 운명이 원망스러울 뿐이오. 나는 비록 패배했으나 나를 이긴 자들보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제 그 어떤 정복자도, 수많은 무기와 재물로도 얻지 못할 아름다운 명성을 남기고 갈 테니까요. 정복자란 후대 사람들에게 불의하고 사악한 자, 공의와 선을 짓밟는 자, 부정하게 권력을 찬탈한 자라는 말이나 듣는 존재 아니겠소. 내 친구여, 부디 떠나는 그 길이 안전하길![26]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서술된 브루투스의 유언


그렇게 말한 후 브루투스는 지면에 칼을 세운 뒤 그 칼 위로 넘어지는 식으로 자살하는 실로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27] 친구 중 한 명이 손수 죽여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안토니우스는 겉옷을 벗어 시신을 덮어주었다고 한다.


3. 평가[편집]


나름대로 세운 원칙에 충실하여 로마 공화국을 수호하고자 했지만 주변 정세를 파악하는 능력이 모자랐던 건 그의 패망을 초래한 단점이며, 또한 속주에서 속주민들 상대로 비상식적인 고리대금[28]을 해서 등쳐먹은(...) 예로 볼 때 속주민들 따위는 동급으로 보질 않은 전형적인 보수 로마 청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고관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공화정을 위한 충성 만큼은 나름 진심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브루투스의 정치적 반대파들조차 인정하고 있었던 점이다. 이는 카시우스에 대한 비난과 비교해볼 때 더욱 두드러지는 점이다. 안토니우스가 브루투스를 정식으로 로마식 장례를 치러주어 그 유해를 세르빌리아에게 보내줬는데, 안토니우스의 군대에는 카이사르의 충신이 많았고 그 곁에는 다름아닌 옥타비아누스가 있었는 데도 이 조치에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물론 안토니우스의 위상이 당시에 워낙 강하긴 했으나, 카이사르의 파벌들도 브루투스의 고결함과 애국심은 존중했다는 나름의 증거로 볼 수 있다. 단 장례는 장례고, 옥타비아누스는 냉정하게 브루투스의 수급을 참수한 뒤 로마로 보내서 카이사르의 조상 아래 바쳤다.(Richardson, 2012)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브루투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결한 애국자"로 평했다.

브루투스에게 내려지는 비난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카이사르가 자기의 목숨을 구해 주고 자기의 청을 들어 친구와 동료들까지 살려 주고, 게다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지위까지 내려 주었는데도 은혜를 저버리고 그를 암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었지만 오직 민중들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기로 결심했으므로 동기 자체는 매우 순수한 것이었다. ······ 브루투스는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사사로운 분노를 버렸던 사람이다. 즉, 그는 자기 아버지를 죽인 폼페이우스에 대한 원한을 억누르고 그와 함께 일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사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서로 맞서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브루투스는 어느 쪽이 더 정의로운가를 생각해 본 다음 그에게 가담했던 것이다.


사실 그는 패륜아라 불러도 할 말 없는데 카이사르는 그렇다치고 그는 성장하자마자 자신의 친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폼페이우스의 편에 붙는가 하면 카이사르의 경우에도 카이사르는 브루투스가 정적인 폼페이우스의 라인임을 알고서도 그를 친 자식이상으로 매우 아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은혜를 배신으로 화답했다. 그가 어머니 세르빌리아에게 외면당한 것도 어찌 보면 이런 패륜적 행각 때문일 수도 있다. 거기다 아무리 공화정을 지지한다고 해도 그가 저지른 부정부패 행위는 도저히 용납되지 못한다. 부패와 패륜이 공화정이 추구하는 이념인가? 어떻게 보면 언변과 행적이 앞뒤가 잘 안 맞는 말기 로마 공화국과 원로원의 정치투쟁과 모순을 대표하는 인물.


4. 기타[편집]


같은 카이사르 살해의 공범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와 헛갈리는 경향이 있다.

5.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본의를 막론하고 역사적 거물이자 생명의 은인인 카이사르를 배신했기에, 이후로 두고두고 후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선 공범인 카시우스, 예수를 배신한 유다 이스카리옷와 같이 루키페르에게 지옥 밑바닥에서 물어뜯기고 있다. 심지어 단테의 지옥편에서 루키페르가 등장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다보니 예술작품의 소재로 자주 쓰여서 루키페르에게 물어뜯기는(...) 모습을 자주 묘사당하기까지 한다.[29][30]

반면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서는 영매국 왕이 불러온 브루투스와 카이사르는 서로 사이도 좋고, 심지어 카이사르는 암살용서해버렸다. 게다가 브루투스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는 투로 묘사했다. 그것도 카이사르 본인의 입을 빌려서 카이사르가 살아 생전 행한 모든 위업이 브루투스가 저지른 한번의 암살만도 못하다는 소리를 대놓고 써놨다. 작가의 브루투스빠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31]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는 그 유명한 "브루투스, 너마저"가 등장하며 플루타르코스의 사료를 기반으로 해서 카이사르 살해 사건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기본적으로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지만 군사적 재능은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시저가 신 대접을 받으며 로마에 군림하려 한다는 카시우스의 충동질에 동의하여 시저 암살을 결행하며, 시저의 장례식에서 시저를 추종하던 안토니의 추모연설을 암살을 결의한 쪽을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조건을 달고 허락한다. 시저의 장례식에서 "내가 시저를 사랑하지 않아서 시저를 죽인 것이 아니다. 시저를 사랑하는 것보다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시저를 죽인 것이다"라는 연설로 자신에게 덧씌워진 배신자의 낙인을 거의 완벽하게 벗을 뻔 한다. 그러나 그 직후 안토니의 추모연설에서 안토니는 암살자들은 한마디도 공격하지 않는 대신 암살의 순간과 칼날에 찔린 시저의 시신의 참혹한 상태를 극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에 시저가 전재산을 로마 시민 앞으로 남긴다는 내용이 담긴 유언장[32]을 공개해버려 상황을 완벽하게 뒤집고 브루투스에게 암살자, 배신자의 낙인을 찍는다.[33] 결국 브루투스는 카시우스와 함께 거병하는데 카시우스와 군자금 문제로 투닥거리며, 결국 필리피 평원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 패해 최후를 맞는다. 사실상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맞으며 끝까지 자존을 지킨 것으로 묘사된다. 2014년 명동예술극장 공연에서는 동아연극상 등을 수상한 명배우 윤상화가 연기했다.

HBOROME에서는 나름대로 개인적인 갈등도 하고 인간성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것으로 묘사되었다. 성격이 다소 순진하고 속을 잘 내보여서 정치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고 이 때문에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에게 노골적으로 이용당하지만 본인은 모른다. 명문 집안이라는 자부심도 있어서 낮은 출신에 경박하고 절제력이 낮은 안토니우스를 은근히 혐오하는 모습을 보인다. 카이사르와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이상을 지향하는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자 고민 끝에 이길 것 같기도 하고 자기 신념에도 맞는 폼페이우스를 따라 로마를 떠난다. 그러나 파르살루스 패전 이후 대세가 넘어갔음을 깨닫고 키케로와 함께 항복하는데,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환대하는 카이사르에게 감복해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순응한다.[34]

항복 후 카이사르에게 버림받고 복수귀가 된 어머니[35] 및 공화주의자 지인들이 집요하게 꼬드기지만 한사코 거부하는데, 지인들이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죽일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카이사르까지 그를 의심하자 이에 서운함을 느낀 나머지 결국 카이사르 암살에 참여한다. 카이사르 암살 직후 안토니우스의 말빨에 속아[36] 토사구팽 당하고 카이사르를 죽인 데 대한 회한과 자신의 오갈 데 없는 처지에 절망해 소아시아 총독 자리나 얻어 술이나 퍼마시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어찌어찌 옥타비아누스를 압도하는 병력을 모아 다시금 정권을 잡으려 로마로 진군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재빨리 삼두정치 연합군을 결성해 오히려 자신을 웃도는 병력을 모으자 이에 패퇴한 직후 부하들에게 지휘를 더 잘하지 못해서 미안하니 목숨을 내다버리지 말고 잘 살라고 당부한 후, 자신은 갑옷을 벗은 채 연합군 진형에 일부러 들어가 칼에 찔려 죽는다. 죽는 장면은 카이사르의 암살 장면과 대비를 이루기 위해서 각색한 창작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카이사르가 암살에 가담한 브루투스를 보고 손을 붙잡아 잠깐 노려보기만 할 뿐 유명한 대사 "브루투스, 너마저"를 읊지 않는다.[37] 뻔한 연출과 대사 없이 표정으로만 진행돼서 몰입감이 상당한 장면이다. 가만히 보면 이 드라마에서 가장 불쌍한 캐릭터 중 하나다. 자기 엄마한테는 카이사르의 복수에 도구로만 쓰이고, 친구라고 부르는 자들에게는 브루투스 가문의 명성을 얻기 위해서만 사용된다. 이자들 때문에 항복 후 그다지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카이사르와 사이가 벌어지고 부추김을 당해 결국 카이사르를 죽인다. 성격이 워낙 무르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후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결국 죽는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는 나약한 성품으로 여장부인데다 사악하기까지 한 어머니 세르빌리아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인물로 상당히 찌질하게 묘사되었다.

5.1. 게임[편집]



5.1.1.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편집]


  • 어쌔신 크리드 2: 카이사르를 암살한 암살단 멤버로 전해지고 있으며,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에서는 로물루스의 추종자 소굴의 클리어 보상인 6개의 로물루스의 열쇠에 달린 편지를 통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38] 편지에 자신의 갑옷과 카이사르 암살에 사용한 단검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로물루스의 열쇠를 모아서 로물루스 보물의 방에서 얻을 수 있다. 2에서 알테어의 갑옷과 같은 최고성능 갑옷이며 내구도도 줄어들지 않지만, 유저들의 반응은 갑옷에 달린 털장식이 별로라며 로물루스 추종자 두목옷, 거지옷, 이순신 장군복같다고 하며 심지어는 플레이[39] 할 때 브루투스 갑옷을 입고 나오는 게 짜증난다고 스킨을 바꿔서 다니거나 아예 안 입는다. 사실 대장간 퀘스트로 얻을 수 있는 마지막 세트 방어구와 성능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40] 내구도가 없다는 것 외엔 딱히 장점이 없다. 어차피 후반부엔 돈이 넘쳐나니 수리비 걱정 안해도 되고... 단 브루투스의 단검은 성능이 좋아서 호평. 이렇게 생겼다.
  •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아야가 카이사르와 셉티미우스를 조사할때 카시우스와 더불어 알게 됐다. 서로 같은 적을 상대한다는 것을 알게 된 브루투스는 아야와 손을 잡으며 감추어진 존재들에 가담한다. 폼페이우스 극장에서 연설을 하던 카이사르를 아야가 암살검으로 찌르는 것을 신호로 카시우스와 의원들이 다굴을 끝낸 마지막에 본인이 마무리를 지으며 카이사르를 끝장낸다. 카이사르는 황제열전에서 나온 "아이야, 너마저(Yoo too, my child)?"[41]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사망한다.


5.1.2. 폴아웃 시리즈[편집]


  • 폴아웃 뉴베가스: 카이사르의 군단 미션으로 위의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가 미션 이름으로 나온다. 내용은 막사 안의 수술 장치를 조작하여 뇌종양이 있는 시저를 살릴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조작해 죽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 결과에 따라 이후 진행 과정이 달라진다. 그리고 싱크탱크의 닥터 클라인은 닥터 8에게 Et tu, 8? 개드립을 친다.


5.1.3. 도미네이션즈[편집]


브루투스의 단검이 유물로 등장한다.


5.2. 만화 및 애니메이션[편집]



5.2.1. 먼나라 이웃나라[편집]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이탈리아 편>에서 등장. 다만 이 책에서는 카이사르가 죽기 직전 대사가 조금 다르다. 바로 "브루투스, 너도냐..."


5.2.2. 알라딘(애니메이션)[편집]


월트 디즈니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알라딘에선 단도를 든 손(...)만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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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dus Martiae. 3월 15일로 카이사르가 암살된 날.[2] 다만 어찌된 일인지 공화정 초기의 유력 가문이었음에도 브루투스 가문은 파트리키가 아니었다. 처벌을 받아 귀족 신분을 박탈당했을 수도 있고, 평민 분가가 갈라져 나왔을 수도 있고, 클로디우스처럼 스스로 평민 신분을 선택했을 수도 있을텐데, 무엇이 됐든 모종의 이유로 중간에 평민으로 신분이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로마 공화정의 국부인 루키우스부터 파트리키가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다만 당대에 이를 이유로 브루투스 가문이 명문가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기록은 특별히 보이지 않는다. 브루투스 가문은 파트리키가 아니었기에 문제 없이 여러 호민관을 배출할 수 있었다.[3] 이후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하는 행적을 고려하면 겁쟁이라서 군 복무를 기피했다기보다는 그냥 군 생활 자체가 자신과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용기와 사명감만큼은 누구에게도 모자라지 않았던 키케로가 군과는 평생 거리를 뒀던 것처럼 그냥 개인의 성향 문제로 봐도 될 것이다. 물론 비판자들은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그가 카이사르에게 투항하고 용서받은 것을 보고 기회주의자라고 가루가 되도록 까기도 하지만, 다툼을 일삼으면서도 제대로 된 전투 준비는커녕 승전 축하 파티나 준비했던 당시 원로원 수뇌부가 붕괴했던 과정을 보면 공화파의 대의는 끝장났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른 옵티마테스 거물들처럼 지낼만한 관직을 다 지내본 것도 아니었고, 사실 남아봐야 군사적으로 크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 후일을 도모하는 게 이상한 선택도 아니었다. 어찌보면 키케로나 브루투스처럼 세련된 문필가들이 현대 대도시만큼이나 세련된 면이 있던 세계의 중심 로마를 벗어나 잘 씻지도 못하고 길도 없는 곳을 행군해야 하는 군생활을 친숙하게 여기는 것이 더 이상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어디서도 꿀리지 않는 문필가였으면서 군사 임무도 문제없이 척척 수행해낸 카이사르의 다재다능이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만 브루투스의 군 경력 부족은 이후 내전의 과정에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게 된다.[4] 키케로도 자신의 철학책들을 브루투스에게 헌정했다.[5] 과거 카이사르와 세르빌리아와는 정말 가까운 사이였는데 세르빌리아는 소 카토배다른 누나였다.[6] 셰익스피어의 묘사는 주로 이 부분에 기반을 둬서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7] 현대 역사가나 역사 소설가 중에도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의 사생아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하지 않는 이들이 몇 있을 정도다. 적어도 카이사르가 이런 풍문을 정면으로 부정한 적 없었다는 건 사실이다. 상대할 가치가 없어서 아예 말을 하지 않았거나 어쩌면 본인도 자기 아들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영문위키같은 곳에서는 카이사르가 아예 브루투스를 자기의 사생아로 믿었다는 걸 정설로 여긴다.[8] 설령 자신의 친아들이든 아니든 간에 카이사르가 아직 세르빌리아나 브루투스에 대한 감정이 있다면 브루투스에 대한 호의에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자신의 옛 연인이자 세르빌리아가 폼페이우스 패전 당시에 카이사르에게 붙으라고 아들에게 애원한 것을 보면 적어도 카이사르 입장에서는 세르빌리아의 요청을 들어줄 정도로 애정이 남아있다거나 생각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9] 이탈리아 전직 기자 겸 역사가인 몬타넬리의 로마사에서 발췌. 친구한테 보내는 편지에서 한 말이었다.[10] 이때는 키케로도 참전했다.[11]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따르면 처음에는 암살 가담을 거부했으나 매일같이 그의 서재에 '브루투스여, 잠에서 깨어나라', '그대는 정녕 브루투스인가?'라는 스팸메일 쪽지가 날아들었고, 결국 가담을 결정했다고 한다. 암살 당일, 집에서 하인이 달려와 아내가 쓰러져 중태에 빠졌다고 급히 알리는데도 불구하고 표정하나 바뀌지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12] 실제로는 암살자들이 실수로 서로를 찌를만큼 상황이 혼란스러웠고, 칼에 폐나 심장 같은 몸통의 급소를 찔리면 가래 끓는 소리나 폐에서 바람이 빠지면서 '흐어어어...' 하는 소리 정도나 나게 된다. 실제 카이사르의 유언은 '윽윽윽윽...' 이나 끄르륵 하는 단말마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높다.[13] 라틴어로는 흔히 Tu quoque, fili mi. 즉, You too, my child?로 해석되었다.[14] Idus Martiae. 3월 15일로 카이사르가 암살된 날.[15] 역사적으로 카이사르는 로마 제정의 원조이자 황제의 어원으로써 로마 공화국을 실질적으로 끝장낸 독재자의 인식이 있지만 당시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거두로 민중의 뜻을 대변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로마 평민들은 대부분 카이사르를 크게 지지했고 원로원파는 오히려 불법적인 부정축재와 민중의 뜻에 어긋나는 국정전횡을 자행하여 공화국 말기의 난맥상을 만든 끝에 카이사르에게 개발살난 것이라 공화정을 지킨다는 말의 정당성은 매우 떨어져 있었다.[16] 세르빌리아가 살던 집은 카이사르가 선물한 집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 암살 전부터 모자 관계는 상당히 서먹했다. 본래 브루투스는 클라우디아 풀크라와 결혼했었는데 기원전 45년에 정확한 이유를 들지 않고 이혼한 후 카토의 딸인 포르키아와 재혼했는데, 이 결혼에 대해 세르빌리아가 분노하여 사이가 틀어졌다. 키케로에 따르면, 이 이혼은 포르키아와 결혼하고 싶다는 것 외엔 타당한 사유를 들지 못해 반 추문이 되기도 했다.[17] 공화정을 지키기 위했다는 명분이었지만 다수 시민들에게는 기득권을 지킨답시고 이전의 사례와 동일하게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민중파를 죽인것으로밖에 안보였다.[18] 실질적으로 암살자들에게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보다 훨씬 위험한 존재였다. 당장 그 카이사르의 후계자였던 데다가(그런 그가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신들을 용서할 리가 없을 거라는 걸 잘 알았을 것이다.)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능력은 안토니우스보다 훨씬 뛰어난 수준으로 적에게 정치적 프레임을 뒤집어 씌우는데 매우 능숙한 인물이었다. 키케로 역시 그에게 속아 목숨을 잃는다.[19] 다만 당시에는 키케로가 생각했던 것처럼 원로원파 중에는 안토니우스를 더 위험시하는 여론이 더 컸다. 일단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를 따라다니면서 군공을 세운 입지가 있는 카이사르의 측근이자 카이사르파의 유력한 인물이라 카이사르 파의 구심점이 될 가능성도 높았고 자체적으로 군대도 갖고 있었다. 반면 옥타비아누스는 실제로는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정치 경험도 없었던 10대 후반의 청소년에 불과했기 때문. 문제는 키케로가 안토니우스를 잡는답시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멋대로 권력을 쥐어주고 있었으며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역량이 키케로의 상상을 초월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당시 로마군은 카이사르의 사병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이들을 움직이려면 옥타비아누스를 내세워야 했던 건 맞지만 키케로는 자신의 능력을 믿고 옥타비아누스를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 당연히 안토니우스든 옥타비아누스든 위험인물이라고 생각했을 브루투스 입장에서는 키케로가 한 짓은 기도 안 찼을 것이다.[20] 다만 어차피 그 상황에서 선택지 자체가 별로 없었다. 키케로 입장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군대를 움직이려면 카이사르의 아들 옥타비아누스에게 기대거나 아니면 로마를 빤스런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사실 실제로 키케로는 한동안 안토니우스를 피해 그리스로 도망을 친 적이 있다.) 키케로의 진짜 문제는 상황을 너무 낙관해서 옥타비아누스를 제어할 장치를 전혀 마련해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애시당초 키케로가 할 수 있는 일 자체가 별로 없었긴 하지만 적어도 키케로는 당시 로마에서 공화정을 수호한다는 점을 들어 옥타비아누스를 좀 더 옥죄는 것도 가능했는데 자신의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영향력을 너무 과도하게 평가해 버렸다.[21] 예를 들면 옥타비아누스 근처에 자기 사람들을 심어두고 감시하거나 여차하면 암살을 기도한다거나 혹은 옥타비아누스가 거느리고 있던 로마 군대에게 원로원의 이름으로 높은 봉급을 약속하고 옥타비아누스와 이간질을 하는 등.[22] 암살이 감행되고 집을 수색하던 안토니우스가 거실에서 찾아냈다고 한다.[23] 원래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선포받고 로마에서 도망쳤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를 쳐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손을 잡고 반대로 키케로를 공격해 처단하고 제2차 삼두정치를 성립해 버렸다.[24] Punish, great Jove, the author of these ills! (Dryden, 1906)[25] 사실 이 때 브루투스는 시 한 구절을 더 말했으나 블룸니우스가 이를 기억하지 못해(...) 결국 기록에 남지 않았다.[26] "By all means must we fly; not with our feet, however, but with our hands." … he said, that he found an infinite satisfaction in this, that none of his friends had been false to him; that as for fortune, he was angry with that only for his country’s sake; as for himself, he thought himself much more happy than they who had overcome, not only as he had been a little time ago, but even now in his present condition; since he was leaving behind him such a reputation of his virtue as none of the conquerors with all their arms and riches should ever be able to acquire, no more than they could hinder posterity from believing and saying, that, being unjust and wicked men, they had destroyed the just and the good, and usurped a power to which they had no right. After this, having exhorted and entreated all about him to provide for their own safety, he withdrew from them with two or three only of his peculiar friends… (Dryden, 1906)[27] 로마를 비롯한 고대 서양권에서 무장이 자결하는 예법이다. 병사에게 칼을 들린 뒤에 결행했다고도 한다.[28] 연이율이 무려 48%. 브루투스를 높게 평가했던 키케로마저도 이걸 알고는 어이없어 했다.[29] 카이사르는 지옥 최상급 지구인 림보에서 고통 없이 잘 살고 있다.(...).[30] 유다는 돈을 받고 예수를 팔아넘어 죽인 신성모독범이고, 카시우스는 그냥 기득권 지키려고 일을 저지른 것에 불과하지만 브루투스는 오히려 그 기득권을 공화정을 위해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단테의 서술은 시대적 배경을 이해를 해야지 막연히 편견이라고 욕해서는 곤란하다. 단테가 살았던 시기는 엄연히 봉건적 질서가 지배하던 중세 중반기다. 중세 시기 서양 사람들의 문화적 관점에서 최고의 가치는 주군과 봉신 사이의 신의였고, 가장 용서받지 못할 범죄는 배신이었다. 문학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그것이 태어난 토양이 된 당대 사람들의 가치관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단테가 로마 공화파를 나쁘게 본것도 아닌게 공화파의 거두인 카토는 연옥의 앞을 수호하는 특별한 역할로 등장시켰다. 이를보면 카이사르파인지 공화파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일관성있게 유지했는지 아니면 상대의 은혜를 입어놓고 통수를 쳤는지를 중요하게 보았다고 할 수 있다.[31] 사실 걸리버 여행기는 스위프트 시절의 영국을 까는 이야기이긴 하다. 항목 참고.[32] 이는 사실 극중에서 한 번 바꿔치기 당해 가짜인 유언장이었다. 안토니는 로마 시민들을 광분의 상태로 몰아가 유언장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점이 제시되지 않게 했다.[33] 이 두 차례의 연설은 오늘날까지도 정치연설의 교범으로 꼽힌다.[34] 다만 이 장면에서 마침 승전 후 축배를 들고 있는 카이사르 측 장수들이 벌이는 잔치판에 끼게 되는데, 당연히 분위기가 급 싸늘해지는 것이 백미다.[35] 참고로 브루투스가 폼페이우스 편에 설 당시 세르빌리아는 카이사르를 맞으려 로마에 남았다. 그러다 정작 카이사르가 집권한 이후에는 둘의 입장이 정반대가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36] 사실 옥타비아누스가 한 조언에 따른 거지만[37] 이 대사는 셰익스피어에 의해 창작된 부분이다. 당시의 문학적 배경에선 훌륭한 명대사지만, 현대의 드라마에 넣기엔 너무 고전적인 식상한 연출이 되버린다. 게다가 실제로는 죽을 때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항목 참조.[38] 그런데 편지상에 카이사르가 체자레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체자레 보르지아와 헷갈린다. 라틴어 '카이사르'를 이탈리아어로 '체사레'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체자레와 카이사르의 이름이 같고 둘 다 암살단의 타깃이란 점은 애초에 노린 것 같지만.[39] 일부 리플레이 포함[40] 방어력은 브루투스의 것이 더 낮지만 체력은 하나 더 높다. 매우 미묘한 차이.[41] 번역은 "브루투스 너마저"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