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를레네 디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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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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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를레네 디트리히
Marlene Dietrich

파일:마를레네 디트리히.jpg
본명
Marie Magdalene Dietrich
마리 막달레네 디트리히
출생
1901년 12월 27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사망
1992년 5월 6일 (향년 90세)
프랑스 파리
국적
[[독일|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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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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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배우
활동
1919년 - 1984년
신체
168cm
가족
배우자 루돌프 지버 (1923–1976, 사별)
딸 마리아 리바 (1924년생)
종교
루터교무신론[1]
서명
파일:Marlene Dietrich Autograph 1933.png
링크
파일:IMDb 로고.svg

1. 개요
2. 인기 및 위상
3. 생애
3.1. 주요 출연 작품
3.2. 가수 활동
4. 스타일
5. 가족 관계
5.1. 자녀 학대 논란
6. 사생활
7. 여담



1. 개요[편집]



독일 출신의 미국 배우.


2. 인기 및 위상[편집]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며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9위를 차지했다. 독특한 얼굴 생김새와 분위기, 그리고 탁음을 내세운 노래로 굉장한 인기를 자랑했으며 남장여자 이미지로는 거의 첫 줄에 올라와 있을 정도로 패션 쪽으로도 대단했던 아이콘이다. 아카데미상골든 글로브에 후보로 오른 적이 있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


3. 생애[편집]


마리 막달레네 디트리히(Marie Magdalene Dietrich)는 1901년 12월 27일 독일 제국베를린에서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외갓집이 보석상 및 시계 제조상을 하는 부유한 집안이었다.

1907년 여성편력이 심했던 군인 아버지 루이(Louis)가 사망한 뒤 어머니 요제피네(Josephine)는 두 자매를 프로이센 귀족 방식으로 키우기 위해 엄격하게 훈육했다.

파일:dietrich-154-0630-1.jpg

1910
체조복을 입고 있다

여기에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발발하자 안 그래도 자유로운 성향의 마리 막달레네 디트리히의 반항심은 더 격하게 들끓기 시작했다. 학교 교사와 관계하는 바람에 해당 교사가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바이올린을 가르치던 선생과도 사귀었다. 집안의 전통을 따라 루터교회 신자로 자랐으나 이때 전쟁당사국 양측의 목사들이 각자의 승전을 위해 신에게 기도하는 걸 보고 믿음을 완전히 상실해 무신론자가 되기도 했다.

일찍부터 연극에 흥미를 보였고, 집에서 발레, 바이올린, 피아노를 배우며 바이올린 연주자를 꿈꿨으나 손목 부상으로 꿈을 접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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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dfddddd.jpg

1918
조엘-하인첼만 아틀리에 작품[2]
1918

1923년 가족들이 쓰던 "레네"라는 애칭에 자신의 본명을 조합해 마를레네 디트리히라는 이름으로 데뷔했다. 마침 전후 베를린은 퇴폐 문화가 절정에 달해있었고, 디트리히는 춤이 섞여있는 동성애적 색채의 풍자익살극 공연을 뛰었는데, 치마를 입은 채 다리를 드는 동작이 있는데도 속옷을 착용하지 않아 밤문화를 즐기는 고객들 사이에서 이름을 떨쳤다.

무성영화 몇 편에서 작은 역할로만 나오다가 1930년 영화 <푸른 천사>의 팜 파탈 주인공을 맡으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여배우의 맨다리가 최초로 영화 포스터에 나왔다. 이때부터 사생활은 매우 무절제했지만 작업에만큼은 강박에 가까운 자기 규율을 적용하며 늘 성실하게 임했다.

이전부터 할리우드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나치당의 협력 제안을 거절한 후엔 1937년 아예 미국에 망명하였고, 1939년 독일 국적 포기와 동시에 미국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다. 독일에 남은 유태인 스탭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연합군을 위한 전시공채 판매에 적극 협력해 무려 100만 달러 이상을 모금하기도 했다.

1943년에서 46년 사이에 미군 대상으로 500회 이상의 순회공연을 다니며 독일의 유명한 전시가요 릴리 마를렌영어로 번안하여 불렀다. 심지어 전선 바로 코앞에서 공연한 적도 있다. 공연계에서 군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공했던 무료 오락시설 스테이지 도어 캔틴[3]의 뉴욕 본점과 LA 지점에도 자주 출몰했다. 특히 <Kismet> 촬영 때문에 온몸이 금빛 페인트로 덮여있는 채로 나타났을 땐 군인들이 엄청나게 환호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전쟁 후에 독일에서 호불호가 갈리게 된다. 한편 당시 많은 미국 연예인들이 순회공연에 헌신했음에도 디트리히가 유독 회자되는 건 사기 증진을 위해 군인들과 입을 맞추거나 몸을 부비는 사진들을 대놓고 찍어댄 덕분이기도 하다. 1945년 미국 국방부로부터 자유 훈장[4]을 받기도 했다.

파일:Actress Marlene Dietrich kisses a soldier returning home from war, 1945.jpg

1945, 귀환한 미군과 뉴욕에서, 어빙 헤이버먼[5]
파일:dietricxxdh-9-0630-1.jpg

전후엔 가수 일에 더 집중했으며, 1960년도 순회공연 중에 고향 땅 베를린을 밟았을 때 엄청난 인기와 야유를 동시에 받았다.

1974년 호주 공연에서 무대 장치에서 떨어져 허벅지뼈가 골절되는 등 크게 다쳤고, 이후 파리 몽테뉴의 아파트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침대에 누워 보내야만 했으며, 약물과 알코올에 중독돼 매일 폭음 끝에 취한 채로 잠이 들기 시작했다. 아파트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가족들을 포함해 디트리히가 허락한 극소수의 지인뿐이었다. 그래도 은둔 직전까지 공연 활동을 벌이고 1978년 은퇴작도 찍은지라 노년 사진이 제법 남아있다.

1979년 엉덩이뼈가 골절된 뒤엔 침대맡에 핫플레이트를 놓고 끼니를 해결하고 소변은 리모주 항아리에, 대변은 캐서롤(casserole) 접시에 봐야했다.

1992년 심부전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90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가족과 가까이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대로 베를린에 묻혔다.


3.1. 주요 출연 작품[편집]


  • 푸른 천사(Der blaue Engel), 1930 - 롤라 롤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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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년에 가톨릭 신자가 됐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2] Joël-Heinzelmann Atelier.[3] Stage Door Canteen.[4]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과는 다른 것이며, 감사패 정도의 위치다.[5] Irving Haberman.[6] 첫 유성영화 출연작. 오스트리아/미국 감독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가 독일에서 찍었다. 자기 대신 디트리히가 뜨자 에밀 야닝스가 매우 짜증을 냈다고 한다. 슈테른베르크는 이후 공사 양쪽으로 얽히면서 디트리히 대표작을 찍었다. 아예 크라이테리온 콜렉션 블루레이 박스셋으로 나올 정도.
  • 모로코(Morocco), 1930[7]
그 유명한 디트리히의 양복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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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shonored, 1930
  • 상하이 익스프레스(Shanghai Express), 1932 - 섕하이 릴리/매들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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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스 밴튼[9]의 의상.
  • 금발의 비너스(Blonde Venus), 1932 - 헬런 패러데이/헬런 존즈/블란드 비너스[10]
"Hot Voodoo"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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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 Song of Songs, 1933 - 릴리 체파넥[11]
  • 진홍의 여왕(The Scarlet Empress), 1934
  • The Devil Is a Woman, 1935 - 콘챠 페레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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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막의 화원(The Garden of Allah), 1936 - 도미니 엔필든[13]
  • Knight Without Armour, 1937
  • Angel, 1937 - 머리어 바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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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스 밴튼의 디자인.
  • 사진(沙塵)(Destry Rides Again), 1939 - 프렌치[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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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ven Sinners, 1940 - 비주 블랜치[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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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 Flame of New Orleans, 1941 - 클레어 러두 백작부인/릴리[17]
  • 맨파워(Manpower), 1941 - 페이 드발[18]
  • The Lady is Willing, 1942 - 일리저버스 매든[19]
  • The Spoilers, 1942 - 체리 멀라트[20]
  • Pittsburgh, 1942 - 조우지 "헝키" 윈터스[21]
  • Kismet, 1944 - 자밀라 부인[22]
  • Golden Earrings, 1947 - 리디 "리디아"[23]
  • 외교 문제(A Foreign Affair), 1948[24]
  • 무대 공포증(Stage Fright), 195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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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루비-다이아몬드 팔찌는 디트리히 본인 소유의 반 클리프 앤 아펠인데 다름 아닌 가터벨트에서 영감을 얻은 제품이다.
  • 80일간의 세계일주, 1956
  • 검찰 측 증인(Witness for the Prosecution), 1957[26]
  • 악의 손길(Touch of Evil), 1958[27]
  • 뉘른베르크의 재판, 1961


3.2. 가수 활동[편집]



파일:MarleneDietrichonstageearly1950s_zps46710d73.jpg

깊은 저음역대와 그윽한 분위기 연출로 명성이 드높았다.


4. 스타일[편집]


남성용 정장을 수시로 착용하면서도 화장이나 악세사리로 기존의 전통적 여성미를 살짝 가미함로서 특유의 중성적 착장을 완성했다.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해 입는다는 당당한 태도가 매력을 더했다. 달리 소속사나 스타일리스트의 도움을 받은 게 아니라 스스로 개발하고 정교화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남녀공용/양성 의복의 선구자로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디트리히는 특히 1900년대의 유행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오늘날 의상 업계는 여전히 디트리히가 창안한 스타일의 영향권 내에 있다.

파일:Marlene-Dietrich-in-Morocco.jpg


파일:MoroccoMD-MAIN1.jpg

<모로코>(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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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fhjke.jpg

1935
1941

또한 보석 수집가로도 유명했다.

파일:marlene-dietrich-the-stage-name-of-maria-magdalena-von-news-photo-1607999397.jpg


오늘날엔 잘 안 알려져 있으나 활동 당시엔 상시 착용하고 다니던 에메랄드-다이아몬드 보석 세트들이 특히 디트리히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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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Trabert & Hoeffer-Mauboussin[28]

그밖에 기울여 쓴 모자, 모피, 짙은 립스틱도 주요 특징이었다.


5. 가족 관계[편집]


  • 남편
1923년에 제작 현장에서 만난 루돌프 "루디" 지버[29]와 결혼했다. 일흔을 넘어서까지 이어진 디트리히의 왕성한 혼외 정사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디트리히를 죽을 때까지 숭배해 디트리히를 만족시키기 위해 빈틈 없이 시중을 들며 절친처럼 지냈고 모든 비밀을 지켜주었다. 디트리히가 이 혼인관계를 굳이 평생 유지한 이유는 사방에서 결혼하자고 달려드는 구혼자들을[30] 떼어내는 구실로 쓸만했기 때문이었다.

1924년 외동딸인 배우 마리아 리바[31]를 낳았다. 디트리히 부부는 리바를 "그 아이"(The Child)라고만 불렀다.

  • 디트리히의 남편도 정부를 뒀는데 타미[32]라고 불리던 이 순진한 젊은 여성은 디트리히와 남편에 의해 하녀처럼 굴려졌고,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15번 이상 낙태를 강요 받은 끝에 심한 우울증에 빠져 여러 정신병원을 전전하며 전기충격치료까지 받다가 사망했다. 이 여성이 자살 시도를 할 기미가 보이자 디트리히는 어린 딸 마리아 리바에게 이 사람을 감시하라고 시키기까지 했다. 리바는 디트리히가 유발하고 조장했던 자신의 성폭행보다 이 사람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을 더 괴로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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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폴로 경기를 보러갔던 디트리히 부부와 마리아 리바와 타미

  • 유일한 형제인 한 살 위 언니는 나치 동조자였다. 그런데 디트리히는 이 언니가 베르겐-벨젠(Bergen-Belsen)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나중엔 아예 언니가 없다고 해버렸다.


5.1. 자녀 학대 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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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마리아 리바는 어려서부터 어머니 디트리히의 일거수일투족을 하인처럼 시중 들어야했다. 이미 3살 때 디트리히는 "자신에겐 어머니가 없고 자신이 모셔야하는 여왕이 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특히 1930년대 초 할리우드로 간 뒤엔 아예 트래비스 밴튼이 디자인한 뒤 '디트리히 조수[33] 정복'이라 이름 붙인 흰색 코트까지 입고 다녀야했다. 학교도 가지 못했다.

디트리히가 굳이 딸에게 의지한 이유는 자기 관리 과정을 다른 사람에겐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디트리히가 체중관리를 위해 엡섬 소금[34]을 삼키고 음식물을 토해낼 땐 그 누구도 화장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리바가 문 앞을 지키고 서있어야 했다. 테이핑으로 가슴 모양을 잡는 일도 리바가 도왔다. 촬영장에서 디트리히의 외양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역시 타인의 눈에 띄기 전에 딸인 리바가 알려줘야했다.

심지어는 성관계 과정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곁들인 연애 상담도 들어줘야 했다.

그래도 어린 시절엔 어머니가 자신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게 즐거웠고, 어른이 되어서야 이게 정상적인 모녀 관계가 아니었단 걸 확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리바는 "마를레네 디트리히라는 사람을 일반인의 상식선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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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는 1993년 "Marlene Dietrich: The Life"란 회고록을 출판했는데, 14살 때 자신이 주변의 남자애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디트리히가 연인들 중 하나였던 레즈비언 시인 메르세데스 드 아코스타[35]의 비서였으며 성적으로 가학적인 성향이 있는 걸로 이미 유명했던 한 레즈비언을 미성년자인 자신을 돌봐줄 사람으로 붙이고 둘만 따로 살게 해 이 레즈비언이 자신을 성폭행하도록 유도하고 방치했다는 매우 충격적인 폭로를 했다.

성폭행은 일 년 반이나 이어졌고, 이 당시 자살충동에 시달리던 리바는 이 고통을 술에 기대 달래는 바람에 10대에 알코올 의존증 환자가 되었다.

디트리히는 딸이 결혼을 하고 손주를 낳아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면 말년에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딸이 레즈비언이 되길 원했다고 한다. 리바가 낳은 아들, 즉 손자가 결혼하게 됐을 때 디트리히는 참석을 거부했다.

성폭행 사건은 물론 어린 시절 반강제로 목격해야만 했던 디트리히의 수많은 연인들과 이들의 행각도 리바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리바는 어머니 디트리히를 평생에 걸쳐 극심히 경멸했다. 그럼에도 어머니였기 때문에 디트리히의 공연들을 계속 보조했고, 말년의 디트리히 상태를 동정해 자주 찾아와 돌봤다. 디트리히도 손자들이 어렸을 때만큼은 할머니 노릇을 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리바는 디트리히가 자기 아들들과 가까이 지내는 걸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디트리히가 워낙 팬층이 두터워 폭로 당시 뉴욕타임즈 등 유력 언론으로부터 이제 와 이런 걸 들추는 저의가 뭐냐며 공격 당했다. 그래서 리바는 "인기가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저지르든 봐주는 사회의 경향성은 크게 잘못됐다"고 성토했다. 책 속엔 디트리히의 생전에 이미 실체를 수없이 주변에 알려봤으나 철저히 묵살 당했던 것으로 여러 번 암시가 돼있다.


6. 사생활[편집]



  • 딸 마리아 리바는 어머니인 디트리히가 "성적 욕망 때문에 (그토록 많은 연인들을 거느렸지만)" "(그 성적 욕망을 해결하는 수단인) 성관계 과정 자체는 좋아하지 않아 어떻게든 빨리 끝내려고 애썼다"고 밝혔다.

  • 평생 여러 명을 동시다발적으로 사귀었는데 적어도 애인들 사이에서만큼은[36] 잡음 한 번 없었고 "모두 행복하게" 잘 지냈다고 한다. 이 사실이 처음 알려졌던 90년대엔 폴리아모리에 대해 세간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반신반의하는 반응들이 있었다.

  • 활동 당시 대중으로부터 사생활을 철저하게 잘 숨겼다는 평가를 받지만, 한편으로는 일기, 편지, 사진, 홈무비 등 증거가 될만한 자료들을 상당히 많이 생성해둔 편에 속한다.

  • 연인들과 데이트를 할 때 남편과 외동딸 마리아 리바를 대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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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트 피아프, 스미소니언 국립 초상화 박물관 소장

  •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두 번째 남편이었던 마이클 와일딩과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무대 공포증>(1950)을 같이 찍을 때부터 최소 10여 년, 길게 잡아 20여 년 가까이 불륜 관계였다. 와일딩은 이를 테일러에게 숨긴 채 결혼했고, 혼인 중에도 관계를 지속했다. 이혼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디트리히 사망 직후 폭로가 이어지면서 역추적으로 밝혀졌다.
와일딩은 11살 연상의 유부녀인 디트리히와의 관계를 외부에 철저히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첫 아내와 헤어지고 테일러와 두 번째로 결혼하기 전까지 주변에 여자가 전혀 안 보인다는 이유로 게이라는 의심을 크게 사기도 했다. 심지어 테일러에게 직접 이 게이 소문을 전해주며 결혼을 만류했던 연예계 관계자들도 있었다.[38]
디트리히의 모든 연인들이 그러했듯이 연속적으로 서로를 독점하는 일대일 관계는 아니어서 와일딩은 테일러와 이혼 후에도 새 아내들을 계속 맞이하고 몇 여성들과 교제했으며 디트리히 역시 위에 언급된 다른 남성과 여성들을 동시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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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트리히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와일딩과 이혼한 뒤 만난 세 번째 남편 마이크 타드와도 한때 관계한 적이 있다. 타드가 1957년 테일러와 결혼하기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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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타드, 1955

  • 또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네 번째 남편이며 데비 레널즈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가수 에디 피셔와도 한동안 만났다. 피셔에 대한 디트리히의 소감은 "왜 테일러가 (피셔랑 이혼하고) 버튼한테 갔는지 이제 알겠어"였다.

  • 존 F. 케네디와 관계할 때 입었던 분홍색 팬티를 핸드백에 넣고 다니다가 사위, 즉 딸 마리아 리바의 남편을 만났을 때 이를 꺼내 코 밑에서 흔들며 "맡아봐. 이게 바로 대통령의 냄새야"라고 했다. 케네디 역시 홈무비에 등장한다.

  • <푸른 천사>의 감독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와 몇 년 동안 불륜했다. 슈테른베르크는 디트리히의 어린 딸 마리아 리바에게 이 관계를 숨기기 위해 밤에 성관계를 가진 뒤 새벽에 몰래 밖으로 빠져나가 이제 막 방문한 것처럼 초인종을 누르고 디트리히, 리바와 아침식사를 했는데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어린 리바는 이 수법을 간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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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레타 가르보의 남자친구였던 존 길버트는 사망 직전에 디트리히와 1-2년 정도 만난 적이 있다. 디트리히의 영화 에 나오기로 계약하자마자 죽어서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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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시 가르보와 관계가 있었다는 말이 있는 돌로레스 델 리오와도 엮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여성 시인 메르세데스 드 아코스타는 가르보에게 차이자 "홧김에" 디트리히와 관계를 시작했다.

  • 마흔이 된 1941년에 당시 21살이었던 율 브리너와 만나 10년 넘게 관계했다. 디트리히는 쉰이 됐을 때도 브리너에게 깊이 빠져있어서 브리너의 전화가 뜸해지자 전전긍긍해하며 그 심경을 일기에 적었다. 불륜관계가 끝난 뒤에도 평생 친구로 지냈다.

  • 위문공연을 다닐 때 많은 군인들, 특히 고위직들과 관계했다. 그리고 이를 주변인들과의 대화에서 농담 소재로 삼았다.

  • 디트리히를 거절한 사람은 극히 적었는데, 그중 하나가 존 웨인이었다. 디트리히의 그 고만고만한 연인들 무리 중 하나가 되고 싶진 않다는 이유였다.


7. 여담[편집]


  • 전설적인 배우 베티 캄슨[39]의 닮은꼴로 거론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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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년 를 찍으면서 감독 헨리 해서웨이와 다퉈 촬영이 중단되었다. 디트리히는 마거릿 설러번으로 교체 당했다. 그러나 영화는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다.

  • 10년 동안 변변찮은 무성영화를 찍으며 무명으로 지낸 것을 숨기기 위해 무성영화를 찍은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미국에서 첫 무성영화를 내자마자 대성공을 거뒀던 그레타 가르보와의 비교를 두려워했다.

  • 이외에도 가르보에 대해 일방적으로 대항 의식을 불태워서, 가르보가 임질에 걸렸다고 소문을 내고 다니기도 했다.

  • 빌리 와일더,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절친했다. 헤밍웨이와는 1949년 친구가 된 후 헤밍웨이가 사망할 때까지 교류했는데 휴가도 같이 보낼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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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디 러마와도 친분이 있어 이런 장난을 치는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러마가 이성애자라 둘은 연애 관계를 맺은 적은 없다. 중간에 서서 둘의 입술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남자는 빌리 와일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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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이 웨스트와 친했다. 웨스트는 디트리히 저택의 꽃을 몰래 훔쳐가는 장난을 벌이곤 했는데 이는 두 배우 간의 즐거운 놀이가 되었다.

  • 작가 거트루드 슈타인, 콜레트와 교류가 있었다.


  • 막시밀리안 셸이 감독한 1984년작 다큐멘터리 가 있다. 영상 완성도가 높아 아카데미상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디트리히가 이 제작 과정에서 털어놓은 내용은 상당수가 거짓말이거나 과장이다. 자신에겐 자매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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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 미완성 유작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더 라스트 타이쿤"의 4편 "Burying the Boy Genius"에서 스테파니 본 페튼[40]이 디트리히를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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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너 메이 웡, 클로뎃 콜베어와 관계가 있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확실치 않다.

  • 애인과의 밀회 직후엔 얼음물과 식초로 청결을 유지했다고 한다.

  • 파티 아킨(Fatih Akin)이 다이앤 크루거 주연으로[41] 디트리히를 다룬 5편 짜리 미니시리즈 드라마 "Marlene"를 만드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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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리프 전쟁 소재. 게리 쿠퍼 출연.[8] 폰 슈테른베르크 연출. 애너 메이 웡 출연.[9] Travis Banton. 1894 - 1958. 의상 디자이너. 디트리히와는 <모로코>(1930) 등 다수작을 협업했고, 메이 웨스트, 리타 헤이워스 등 무수한 할리우드 황금기 스타들의 의상들을 작업했다.[10] 폰 슈테른베르크 연출.[11] 루벤 마물리안 연출.[12] 파라마운트 & 폰 슈테른베르크 6/6.[13] 데이비드 O. 셀즈닉 제작. 샤를 부아예, 배절 래스본 출연.[14] 에른스트 루비치 연출. 멜빈 더글러스 출연.[15] 제임스 스튜어트 출연.[16] (존 웨인 1/3).[17] 르네 클레어 연출. 조 패스터낵이 제작한 마지막 디트리히 영화다. 앤 리베어 출연.[18] 라울 월시 연출. 에드워드 G. 로빈슨 출연.[19] 프레드 맥머리 출연.[20] (존 웨인 2/3).[21] (존 웨인 3/3).[22] 디트리히의 영화배우 데뷔작인 독일 무성영화 (1923)으로 감독 데뷔한 바 있는 윌리엄 디털리 연출.[23] 빅터 영이 영화를 위해 작곡한 "Golden Earrings"는 페기 리(Peggy Lee)가 불러 1947-8년에 인기를 끌었다. 레이 멀랜드 출연.[24] 빌리 와일더 연출. 진 아서 출연.[25]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이 영화 속 디트리히의 자기 연출을 히치콕이 대단히 맘에 들어했다고 한다. 마이클 와일딩 출연.[26] 애거서 크리스티 원작. 빌리 와일더 연출. 찰스 로튼, 타이론 파워 출연.[27] 오슨 웰스 연출. 찰턴 헤스턴, 재넛 리, 자자 가보 출연.[28] 에메랄드는 카보숑(cabochon. 보석 컷팅을 하지 않고 매끈하게 연마만 하는 것.) 처리되었다.[29] Rudolf "Rudi" Sieber.[30] 예를 들어 (1933)를 같이 찍었던 브라이언 어헌 같은 경우.[31] Maria Riva.[32] Tamara "Tami" Matul.[33] "attendant to Miss Marlene Dietrich"[34] Epsom salts. 엡섬 더비로 유명한 엡섬 시에서 1618년 처음 발견된 무기염이다. 건강 목적에서 다각도로 활용되는 가정용 황산 마그네슘. 주로 목욕용 소금으로 쓰거나 물에 타서 완하제로 마신다.[35] Mercedes de Acosta.[36] 비록 이들의 배우자들은 고통 받았을지언정.[37] 디트리히는 시나트러에 대해 단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부드러웠어."[38] 이때 상대로 지목됐던 사람은 스튜어트 그레인저다.[39] Betty Compson. 1897 - 1974.[40] Stefanie von Pfetten.[41] 이 둘은 <심판>(2017)에서 같이 작업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