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든버러의 마리

최근 편집일시 :



[ 펼치기 · 접기 ]
※ 2006년 루마니아 공영방송 TVR이 루마니아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루마니아인 100명'을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슈테판 3세
카롤 1세
미하이 에미네스쿠
미하이 2세
리하르트 부름브란트
6위
7위
8위
9위
10위
이온 안토네스쿠
미르체아 엘리아데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콘스탄틴 브랑쿠시
나디아 코마네치
11위부터는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루마니아 왕국 페르디난드 1세의 왕비
에든버러의 마리
Princess Marie of Edinburgh

파일:Queen Marie of Romania.jpg}}}
이름
영어
마리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Marie Alexandra Victoria)
루마니아어
마리아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Maria Alexandra Victoria)
출생
1875년 10월 29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켄트
사망
1938년 7월 18일 (향년 62세)
루마니아 왕국 시나이아 펠레슈 성
배우자
페르디난드 1세 (1893년 결혼 / 1927년 사망)
자녀
카롤 2세, 엘리사베트, 마리야, 니콜라에, 일레아나, 미르차
아버지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 알프레트
어머니
러시아 제국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형제
알프레드, 빅토리아 멜리타, 알렉산드라, 베아트리스
종교
성공회루마니아 정교회
서명
파일:MarieOfRomaniaSignature.svg.png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어린 시절
3.2. 루마니아의 왕세자비
3.3. 루마니아의 왕비
3.4. 루마니아의 왕대비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5. 여담



1. 개요[편집]


루마니아 왕국페르디난드 1세의 왕비이자 영국의 공주.

카롤 2세그리스 왕국의 엘리사베트 왕비[1],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마리야 왕비의 어머니. 루마니아의 마지막 국왕인 미하이 1세의 할머니, 유고슬라비아 왕국페타르 2세의 외할머니다.[2]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3]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4]의 장녀이자 둘째로 태어났다.

애칭은 미시이며 에든버러의 마리나 루마니아의 마리라고 불린다.

2. 작위[편집]


파일:Coat of Arms of Marie of Edinburgh.svg
문장


3. 생애[편집]



3.1. 어린 시절[편집]


파일:1669683877088.jpg
어린 시절의 마리

1875년 잉글랜드 켄트에서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 왕자에든버러 공작부인 마리아의 장녀이자 둘째로 태어났다. 해군인 아버지를 따라 몰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세월이 흘러 에든버러 공작가에 자주 찾아오던 친사촌 웨일스의 조지 공자가 마리에게 반해서 그녀와 약혼하기로 마음 먹었다. 다소 반항적이고 독립적이던 마리는 부모나 보육 담당에게 크게 혼이 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우는 마리를 조지가 안아주면서 "불쌍한 내 미시"라고 부르며 달래주곤 했다고.

이 소식에 큰아버지 에드워드 7세와 아버지 알프레드 왕자,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매우 흡족해했다. 하지만 양가의 어머니들인 알렉산드라 왕세자비에든버러 공작부인 마리아는 사이가 나빠서 조지와 마리의 사이를 매우 반대했고, 바람으로 부인 속을 너무 뒤엎어서 집안에서는 공처가인 에드워드도 결국 아내의 의견에 따르면서[5] 조지와 마리의 결혼은 무산되었다. 참고로 20대의 조지가 처음 마리에게 반해서 장래 와이프로 찍었을 때 마리의 나이는 무려 13세(...)[6]

3.2. 루마니아의 왕세자비[편집]


1893년 아버지 알프레드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되기 몇 달 전 루마니아의 국왕 카롤 1세의 조카인 왕세자 페르디난드 1세와 결혼한 마리는 18살에 루마니아의 마리 왕세자비로 불리게 되었다.

마리는 페르디난드 1세와의 결혼 생활에서 장남 카롤 2세를 포함한 3남 3녀를 낳았지만 결혼 생활은 매우 불행했다. 마리의 오랜 친구이자 미국인 무용가였던 로이에 풀러는 나중에 마리가 남편에 대해 "싫어하는 남자. 혐오감이 더해"라고 언급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루마니아 국왕 카롤 1세는 조카며느리 마리를 궁정에서 고립시켰는데, 이건 마리가 정치에 관여해 루마니아의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것을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이유가 뭐든 간에 17살에 시집 간 마리에게 이런 생활은 매우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마리는 18세의 어린 나이로 장남 카롤을 출산할 때 영국의 기준으로 의학적인 혜택을 덜 받았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어머니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도 마리의 무통 분만을 지지했다. 그러나 루마니아에서는 무통 분만이 성경에 나오는 여성의 고통에 위반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친정 어머니 마리아가 루마니아까지 쫓아와 한바탕 했음에도 카롤 1세는 끄떡도 안 해서, 결국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까지 나서서 마리는 출산 때 영국인 의사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마리의 남편 페르디난드 1세는 숙부 카롤 1세에게 한 마디 하거나 아내를 위해 비호하거나 해줄 수 있는 용기도 없는 한심한 위인이었다. 고집불통 꼰대 시숙부와 약간 미친(?) 듯한 시숙모 엘리사베타 왕비와의 갈등까지 겹쳐 마리는 루마니아의 궁정 생활을 힘들어하기 시작했고, 이게 그녀가 위안받을 사람들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이후 마리는 스캔들과 남편 때문에 루마니아를 떠나 잠시 아버지의 영지인 코부르크로 가서 지내기도 했다.

3.3. 루마니아의 왕비[편집]


1914년 카롤 1세가 사망하자 남편 페르디난드 1세가 즉위하면서, 마리 왕세자비도 자동적으로 왕비가 되었지만 대관식은 8년 뒤인 1922년에 치렀다. 왕비가 된 마리아는 결혼 초기에는 루마니아에서 적응하기 힘들어했지만 이후 열렬한 애국주의자가 되었다. 늘 남편 페르디난드 1세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고, 전쟁 시기에는 적십자 자원 봉사자로 가입하고 부상자들을 간호하기도 했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루마니아는 협상국으로 참전한다.[7] 1917년 루마니아 국토 절반이 독일군에게 짓밟히자 마리와 군의 조언자들은 러시아에게 의지하지 말고 루마니아가 독립적으로 독일과 러시아 모두와 싸워야 한다고 선택했다. 여기서 미국의 자금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마리의 행동은 매우 올바른 처사였다. 1차 세계 대전은 영국과 루마니아가 가담한 협상국의 승전으로 끝났기 때문. 하지만 영국을 싫어했던 어머니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가 매우 화를 냈다고.[8] 그럼에도 마리는 루마니아 왕비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으며,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는 루마니아어를 구사하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통합하는 "대 루마니아" 실현을 위해, 왕비인 마리를 루마니아의 국제적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며 프랑스로 보내기도 했다. "전사 왕비''의 등장을 국제 미디어에서는 열성적으로 맞이하고, 그 결과 루마니아는 자국의 국토를 40%나 늘리는데 성공했다.

3.4. 루마니아의 왕대비[편집]


1927년 남편 페르디난드 1세가 사망하고 장남 카롤 2세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된 마리는 루마니아에 남아서 직접 회고록과 저작을 집필하다가 1938년 62세로 사망했다. 시신은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 수도원에 안치된 남편 페르디난드 1세의 옆에 안장했다. 생전 마리 왕대비의 유언으로 심장은 바르치크의 마리아가 건설한 바르치크 궁전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0년 발틱 궁전 남도브루자의 나머지가 크라이오바 조약에 의해 불가리아에 반환되면서 마리 왕비의 심장은 브란 성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장남 카롤 2세는 어머니의 기질을 물려받은 건지 심각한 바람둥이에다 루마니아에서 인기 높은 마리 왕대비를 질투하기까지 했다. 카롤은 결혼 전부터 지지 람브리노라는 여자와 사귀면서 사생아 카롤 람브리노를 얻었고,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와 결혼해 유일한 적자 미하이 1세를 얻었지만 처자식을 팽개치고 또다른 정부 마그다 루페스쿠와 동거했다.

결국 보다 못한 페르디난드 1세가 아들을 제끼고 손자 미하이 1세에게 왕위를 물려줬지만 카롤은 아들의 왕위를 빼앗아 기어코 루마니아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카롤 2세는 실정만 거듭하다가 퇴위당해 루마니아에서 쫓겨나 망명 생활 끝에 사망했다. 카롤 2세의 뒤를 이어 미하이 1세가 즉위하면서 괜찮아지려나 싶었지만 루마니아 왕국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무너지면서 왕정제가 아예 폐지되었다. 이런 아들의 추태에 마리 왕대비는 굉장히 속을 썩히며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마리 왕대비의 막내 여동생인 갈리에라 공작부인 베아트리스는 퇴위당하고 망명한 카롤 2세가 스페인에 찾아왔을 때 "내 언니를 죽인 망나니놈"이라며 조카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Edinburgh)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
(Alfred,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9]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 and Saalfeld)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Maria Alexandrovna of Russia)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니콜라이 1세
(Nicolas I)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Prussia)[10]
헤센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
(Grand Duke Ludwig II of Hesse )
바덴의 빌헬미네 공녀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

4.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카롤 2세
(Carol II)
1893년 10월 3일
1953년 4월 4일
지지 람브리노
슬하 1남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
슬하 1남[11]
마그다 루페스쿠
1녀
그리스 왕국의 왕비 엘리사베트
(Elisabeth, Queen of The Hellenes)
1894년 10월 12일
1956년 11월 14일
요르요스 2세
2녀
유고슬라비아 왕비 마리야
(Maria, Queen of Yugoslavia)
1900년 1월 6일
1961년 6월 22일
알렉산다르 1세
슬하 3남[12]
2남
루마니아의 섭정 니콜라에
(Nicholas, Prince Regent of Romania)
1903년 8월 5일
1978년 6월 9일
이오아나 두미트레스쿠-돌레티
테레자 리스보아 피게이라 데 멜로
3녀
오스트리아의 일레아나 대공비
(Archduchess Ileana of Austria)
1909년 1월 9일
1991년 1월 21일
오스트리아의 대공 안톤[13]
슬하 2남 4녀
스테판 니콜라에 이사레스쿠
3남
미르차 왕자
(Prince Mircea)
1913년 1월 3일
1916년 11월 2일


5. 여담[편집]


  • 사적으로는 바람기가 심하고 문란했다고 한다. 자녀들 중 끝에서 두 명은 불륜 상대 바르부 슈티르베이(Barbu Știrbey) 공의 아이들이라는 설이 무성했다. 다만 막내 아들은 확실히 불륜남의 자식이고 슈티르베이도 이를 인정했지만 일레아나 공주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이 남자가 꽤 능력이 좋았는지 무능한 남편 대신 활약하던 마리가 정치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이들의 관계는 남편부터 모두가 알 정도였지만 그냥 참았고, 그래서 마리는 당당하게 불륜남의 자식까지 낳아서 남편에게 들이밀거나 부부 동반(!)으로 넷이서 같이 놀기도 했다는 여담. 이런 면모는 그냥 타고난 성격이었는지 아버지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는 마리가 루마니아로 시집가는 것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안 그래도 자유분방한 성격의 마리가 외국으로 가면 바람기가 더 심해져 가정을 내팽개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게다가 이 바람기는 장남 카롤 2세도 제대로 물려받아서 여자를 엄청 밝혀 결혼 전부터 애인과 동거하며 사생아까지 낳았고, 그리스 왕국의 공주 엘레니와 결혼한 후에도 처자식은 팽개치고 줄창 불륜을 벌이다 이혼당했다. 보다못한 아버지 페르디난드 1세가 아들인 카롤 2세를 건너뛰고 손자 미하이 1세에게 왕위를 물려줄 정도. 때문에 미하이 1세는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고, 1953년 카롤 2세가 사망했을 때에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 다른 자녀들의 문제도 심각했다. 일찍 요절한 막내아들 미르차를 제외한 장남 카롤 2세할 말 없는 막장 플레이보이 가장, 장녀 엘리사베트는 그리스 왕국의 국왕 요르요스 2세와 결혼했으나 1935년 자녀 없이 이혼했다. 이혼 원인은 엘리사베트의 성격 탓. 워낙 안하무인이라 시어머니 소피아 왕대비가 굉장히 안 좋게 봤다고. 사실 엘리사베트를 만나거나 알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분 나쁜 여자/ 상종하기 싫음/뭐 저런 인간이..." 등 진저리치는 뉘앙스나 악담스러운 평가를 남겼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성격 나쁘기로 유명하거나 가족이든 뭐든 무섭도록 냉담한 면 등 성격적인 문제가 심했고 스스로도 안 해본 짓이 없다고(.....)[정확히는] 했다니, 지금으로 치면 사이코패스 끼가 있었던 듯.

차녀 마리야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알렉산다르 1세와 결혼해서 3형제를 두었지만 남편 알렉산다르 1세가 1934년 프랑스에서 암살되면서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조용히 살았고,[14] 차남 니콜라에는 큰형 카롤 2세와 서로 싫어하고, 막내딸 일레아나는 카롤 2세가 동생들 중 그나마 가장 예뻐했지만 역시나 그녀의 인기를 투기한 오빠가 외국에 쫓아낼 목적으로 정해준 남편과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다.

자신도 신혼 때부터 넘치는 바람기의 싹을 보여주다가 유부남과 불륜하며 살았으나 우습게도 자신과 똑같은 자녀의 바람기 때문에 속이 썩어나야 했다. 이 때 루마니아 사교계는 상상초월하게 문란해서 마리의 적성(...)에 맞기도 했고 그녀의 행각도 크게 비난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남친까지 거느린 매력적이고 잘 나가는(?) 왕비님 이미지에 대외적으로도 왕비다운 모습으로 존경받았지만 가정적으로는 자녀 문제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사회적명예적으로 빅엿을 날린 장남에 대한 심적 고통도 상당했다.

  • 드라큘라 성으로 유명한 브란 성을 1차 대전 이후로 소유하고 있다가, 3녀 일레아나 공주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일레아나가 소유하고 있던 브란 성은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면서 몰수되었는데, 2006년에 일레아나 공주의 차남이자 상속자인 도미니크 대공이 반환받아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9 02:52:26에 나무위키 에든버러의 마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요르요스 2세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2] 미하이 1세는 장남 카롤 2세의 아들이고, 페타르 2세는 차녀 마리야 왕비의 장남이다. 페타르 2세의 부인(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은 마리의 큰 며느리인 그리스의 엘레니 공주의 친정 조카이다.(엘레니의 작은 오빠 알렉산드로스 1세의 외동딸이자 유복녀.)[3] 빅토리아 여왕앨버트 공의 차남(넷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되기 전에 보유한 대표 작위는 영국의 에든버러 공작이다.[4]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헤센의 마리의 차녀.[5] 에든버러 공작부인 마리아는 알렉산드라 왕세자비와 사이가 나빴는데, 정작 그런 알렉산드라의 여동생인 자기 올케 덴마크의 다우마와는 사이가 매우 좋았다. 참고로 다우마는 언니 알렉산드라와도 평생 절친한 자매 관계를 유지했다.[6] 조지 5세1865년생, 마리는 1875년생으로 두 사람의 나이는 무려 10살 차이가 난다.[7] 당시 적국 독일 제국의 수장 빌헬름 2세는 마리아 왕비의 사촌(고모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장남)이었다.[8] 당시 마리는 3남 미르차 왕자를 잃고 상심이 컸는데 친정 어머니가 딸에게 편지로 엄청 디스했다고 한다. 마리는 독일의 군소공국 중 하나인 작센코부르고타의 공작부인이었기에 마리가 당연히 독일을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독일의 적국이고 자신이 싫어하는 영국과 연합한 딸의 행동에 대해서 "이번 전쟁은 너의 책임이다"라는 소리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딸이 걱정됐는지 마리에게 무사하길 바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9] 조지 3세의 4남이다.[10]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장녀이다.[11] 미하이 1세 [12] 페타르 2세[13] 합스부르크 가문의 분가인 토스카나 대공가 출신으로, 레오폴도 2세의 차남인 카를 잘바토어 대공의 손자이다.[정확히는] 살인 이외에 나쁜 짓은 모두 해 봤고, 죽기 전에는 그것마저 이루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14] 1930년대 후반부터 류머티즘이 악화되어 국왕이었던 장남 페타르 2세를 제외한 두 아들과 함께 1939년부터 영국에서 거주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추축국의 침공으로 붕괴하고 전후에 왕정이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그대로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61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