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루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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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투리아 왕국 루도비코 1세의 왕비
루카 여공작
마리아 루이사
Infanta María Luisa de España


파일:Maria_Luisa_of_Spain,_queen_of_Etruria_and_duchess_of_Lucca.jpg

이름
마리아 루이사 호세피나 안토니에타 비센타 데 보르본 이 보르본파르마
(María Luisa Josefina Antonieta Vicenta de Borbón y Borbón-Parma)
출생
1782년 7월 6일
스페인 세고비아 라 그랑하 데 산 일데폰소 궁
사망
1824년 3월 13일 (41세)
교황령 로마
배우자
루도비코 1세 (1795년 결혼 / 1803년 사망)
자녀
카를로 루도비코,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타
아버지
카를로스 4세
어머니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형제
카를로타 호아키나, 마리아 아말리아, 페르난도 7세, 카를로스, 마리아 이사벨,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2.1. 결혼
2.2. 에트루리아의 왕비와 섭정
2.3. 감금과 자유
3. 가족관계
3.1. 조상
3.2. 자녀



1. 개요[편집]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3녀. 페르난도 7세의 누나이자 이사벨 2세의 셋째 고모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 전역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창설된 괴뢰국 에트루리아 왕국의 첫번째이자 마지막 왕비가 되었다. 말년에는 루카 공국의 여공이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부르봉파르마의 공녀 지타의 고조할머니다.


2. 생애[편집]



2.1. 결혼[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ancisco_de_Goya_y_Lucientes_054.jpg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4세의 가족, 프란시스코 고야 작, 1800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
맨 오른쪽에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이 마리아 루이사이며, 그 옆에 서 있는 남성이 남편 루도비코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의 8남 6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마리아 루이사는 활발하고 영리했으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9살 연상이자 외사촌 오빠[1]파르마 공국의 공자 루도비코와 결혼했다. 원래 루도비코는 언니 마리아 아말리아의 정략 결혼 상대로 스페인에 오게 되었다. 그러나 루도비코가 소극적인 마리아 아말리아보다 마리아 루이사를 더 좋아했기에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 것이다.[2]13살이 마음에 든 22살이라...

결혼 후 마리아 루이사와 남편은 스페인에 머물렀다. 서로 사랑해 결혼하게 된 두 사람은 금슬이 매우 좋았다. 다만 어려서부터 간질을 앓아 몸이 약했던 루도비코는 마리아 루이사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해야 했다. 아들을 낳고 부부는 파르마로 떠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부부가 갈 곳은 사라지고 말았다.


2.2. 에트루리아의 왕비와 섭정[편집]


마리아 루이사의 인생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 인해 일그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02년에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면서 파르마 공국은 무너져 프랑스 제1제국의 직할령이 되었다. 아란후에스 조약을 통해 파르마의 루도비코는 파르마 공작위 계승을 포기하는 대가로 에트루리아 국왕 루도비코 1세로 옹립되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3]하던 토스카나 대공국은 나폴레옹으로 인해 에트루리아 왕국이라는 괴뢰국으로 전락할 상황이었는데, 여기에 필요한 형식적인 국왕으로 루도비코가 선택된 것이다. 마리아 루이사는 내키지 않았지만 가족들의 압박으로 파리로 떠났다.


파일:The_Family_of_the_King_of_Etruria.jpg

에트루리아 국왕 가족

파리에서 3주간 머무르고 마리아 루이사와 가족들은 에트루리아 왕국의 수도인 피렌체로 향했다. 토스카나 대공국을 그리워하던 사람들은 새로운 왕가를 미워했다. 왕족이라고 하나 가족의 생활은 열약했다. 에트루리아에는 프랑스 군대가 주둔해 있어 국왕 가족은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으며, 대공국이 무너지고 대부분의 귀중품이 사라졌기에 재정적으로 궁핍했다. 그런 와중에 루도비코 1세의 몸 상태는 점점 안 좋아졌다. 마리아 루이사의 여동생의 결혼에 참석하기 위해 스페인에 갔다 돌아온 뒤 루도비코 1세의 몸 상태는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기 위해 국왕의 몸 상태는 은폐되었다. 이때 마리아 루이사는 남편의 일을 대신 도맡아 하면서 남편을 밀어내고 정치에 개입하는 악처라고 욕을 먹기도 했다. 결국 1803년 5월에 루도비코 1세는 숨을 거두었다. 이때 마리아 루이사는 20살이었다.

슬픔을 뒤로 하고 마리아 루이사는 4살도 안된 아들 카를로의 섭정이 되었다. 마리아 루이사는 세금 제도를 개편하고 문화와 교육 발달에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무색하게 1807년에 나폴레옹은 토스카나 대공국을 다시 부활시킨 다음에 자기 여동생인 엘리자에게 줘버렸다. 나폴레옹은 자리가 없어진 마리아 루이사에게 자기 동생인 뤼시앵 보나파르트와 재혼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마리아 루이사와 뤼시앵 둘 다 이 결혼을 거부했다. 마리아 루이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인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2.3. 감금과 자유[편집]


그러나 돌아온 고향은 남동생인 아스투리아스 공 페르난도가 아버지 카를로스 4세에게 반란을 일으켜 내전이 한창인 막장 상황이었다. 나폴레옹이 내전에 개입하면서 마리아 루이사는 나폴레옹의 장군 조아킴 뮈라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화해를 주선하는 척 스페인 왕가를 프랑스로 불러들여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각각 다른 성에 유폐해버리고 자기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왕으로 즉위시켰다. 이때 마리아 루이사는 스페인에서 친프랑스라고 욕을 잔뜩 먹고 정작 본인은 다른 스페인 왕족들처럼 연금을 당하게 되었다.

영국으로 도망칠 계획을 짰지만 이는 금방 들통나 공범자들은 처형당하고 마리아 루이사는 아들과 떨어져 딸과 함께 수녀원에 갇히게 되었다. 2년이 넘는 감금 생활 끝에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마리아 루이사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그녀는 아들에게 파르마 공작령을 주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빈 회의 아후 파르마 공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공주이자 나폴레옹의 황후였던 마리 루이즈의 것이 되었다. 마리아 루이사에게는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떨어진 루카를 중심으로 하는 작은 공작령인 루카 공국이 제안되었다. 마리아 루이사는 반발했으나 2년 후 마리 루이즈 사후 아들이 파르마 공작이 되는 조건으로 제안을 수락했다.

1817년, 35살의 나이에 마리아 루이사는 루카 여공작이 되었다. 마리아 루이사는 에트루리아 왕국에서 그랬듯이 영지의 문화 활동을 장려하고 17개의 수도원과 수녀원을 설립했다. 1824년 3월 13일에 로마에서 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엘 에스코리알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루카 여공 마리아 루이사
(Maria Luisa, Duchess of Lucca)
카를로스 4세
(Carlos IV)
카를로스 3세
(Carlos III)
펠리페 5세
(Felipe V)
이사벨 파르네제
(Isabel Farnese)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of Saxony)
아우구스트 3세
(August III)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of Austria)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Maria Luisa of Parma)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
(Felipe, Duke of Parma)
펠리페 5세
(Felipe V)
이사벨 파르네제
(Isabel Farnese)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사베트
(Louise Elisabeth of France)
루이 15세
(Louis XV)
마리 레슈친스카
(Maria Leszczyńska)


3.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파르마 공작 카를로 2세
(Carlo II, Duke of Parma)
1799년 12월 22일
1883년 4월 16일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4]
슬하 1남 1녀[5]
1녀
작센의 왕자비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타
(Maria Luisa Carlota, Hereditary Princess of Saxony)
1802년 10월 2일
1857년 3월 18일
작센의 막시밀리안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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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도비코의 아버지인 파르마 공작 페르디난도 1세는 마리아 루이사의 외삼촌이었다.[2] 마리아 아말리아는 이렇게 결혼 상대를 빼앗기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계속 결혼을 못하다가 노총각 삼촌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3년만에 아이를 낳다 사망한다.[3]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프란츠 2세의 동생 페르디난도 3세가 토스카나 대공이었다.[4] 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4녀다.[5] 파르마 공작 카를로 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