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아말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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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 공작부인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von Österreich


이름
독일어
마리아 아말리아 요제파 요한나 안토니아
(Maria Amalia Josefa Johanna Antonia)
이탈리아어
마리아 아말리아 주세파 지오반나 안토니아
(Maria Amalia Giuseppa Giovanna Antonia)
출생
1746년 2월 26일
합스부르크 제국 호프부르크
사망
1804년 6월 18일 (58세)
합스부르크 제국 프라하 프라하 성
배우자
파르마 공작 페르디난도 1세[1]
(1769년 결혼 / 1802년 사망)
자녀
카롤리나, 루도비코 1세, 마리아 안토니아, 카를로타, 필리포, 안토니아 루이사, 마리아 루이사
아버지
프란츠 1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형제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나, 요제프 2세,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요제프, 레오폴트 2세, 마리아 카롤리나, 요한나 가브리엘라,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카롤리나, 페르디난트, 마리아 안토니아, 막시밀리안 프란츠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2.1. 차별받은 어린 시절
2.2. 원하지 않은 정략결혼
2.3. 실질적인 파르마의 통치자
2.4. 결혼 생활과 자녀
3. 가족관계
3.1. 조상



1. 개요[편집]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마리아 테레지아의 6녀. 이탈리아 반도 파르마 공국의 공작부인으로 현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조상이기도 하다. 어렸을 적엔 지나친 편애의 희생양으로 비뚤어져 반항적인 성격이었으나,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난 이후에는 화목한 가정을 꾸렸다.

2. 생애[편집]



2.1. 차별받은 어린 시절[편집]


예쁘고 재능도 있고 그림도 잘 그렸지만 어머니의 기준에는 못 미쳤는지 큰언니 마리아 안나와 함께 찬밥 취급 받았다. 아래 여동생들인 마리아 카롤리나마리아 안토니아와 친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에 비해 아말리아는 애교도 없고 무뚝뚝한 성격으로 단정짓고 비교했다.

아말리아의 다른 자매들 역시 크리스티나에 비해 어머니에게 차별받았다. 자매들 중 안나는 병약하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냉대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크리스티나의 비교 대상이 되지 못했다. 셋째 마리아 엘리자베트는 미녀여서 어머니의 편애를 받았고, 똑같이 편애받은 크리스티나와 세트로 어울렸었다. 동생들 중 요안나 가브리엘라는 요제파와 어울렸지만 아말리아는 혼자 지내는 편이었다고.

2.2. 원하지 않은 정략결혼[편집]


아말리아는 원래 팔츠 비텔스바흐 가문의 분가인 팔츠-츠바이브뤼켄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과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연애결혼 후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알베르트 카지미어와 연애결혼을 허락할뿐만 아니라 엄청난 지참금까지 주면서 아말리아는 모후인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서 연인과 강제로 헤어지게 되고, 자매들처럼 에스파냐계 부르봉에서 갈라져 나온 부르봉파르마 공작가의 페르디난도와 결혼했다. 심지어 정략결혼 상대도 자신처럼 황족이 아닌 파르마 공작[2]이었기에 더 분노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분이 낮다며 이별당한 아말리아의 연인 팔츠-츠바이브뤼켄의 카를 아우구스트는 바이에른팔츠 친척들의 연이은 남계 후손 단절로 인해 팔츠-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의 계승자가 되었고, 자식 없이 일찍 죽은 카를 아우구스트의 뒤를 이어 동생 막시밀리안바이에른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


2.3. 실질적인 파르마의 통치자[편집]


파르마에 도착한 마리아 아말리아가 처음 한 일은 모후 마리아 테레지아와의 연을 끊는 것이었다. 그녀는 평생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고, 어머니의 편지에 답장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말리아는 유일하게 마리아 테레지아와 절연한 자식이 되었다. 여제는 자식들에게 첫딸을 낳으면 자신의 이름을 붙이라고 명했지만[3] 아말리아는 장녀의 이름을 카롤리나로 짓고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잔소리도 전부 무시하며 관종 기질을 마음껏 발휘해 사치스런 생활을 하며 정부를 들이고 사생아를 낳는 등 친정의 위신을 추락시키고 더 나아가 정치적으로 오스트리아에 이익이 되는 길과는 반대로 갔다. 이렇게 파르마에서 맘에 들지 않는 행동만 골라서 한 탓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심기를 거슬러 결국 친정 오스트리아로 입국을 영구 금지 당했다.

또한 여동생 마리아 카롤리나처럼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파르마 공국을 통치했다. 야심이 컸던 그녀는 단순한 군주의 아내로서 비선실세 격 통치로 만족하지 않았고, 남편에게 압력을 넣어 자신을 파르마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게 했다. 반항기와 사생활과는 별개로 형제들 중 가장 뛰어난 통치자로 평가되었고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공작부인이었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타국, 특히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소국인 파르마의 독립과 번영, 그리고 국민들의 복지를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나중에는 남편의 정계 복귀를 격려하여 부부가 함께 공동 통치를 하게 된다.

어머니에게 절연당했지만 비슷하게 정략 결혼한 자매들인 마리아 카롤리나마리 앙투아네트와는 일생 사이가 좋았고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프랑스 혁명 때 위기에 처한 마리 앙투아네트와 비밀리에 편지로 연락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파르마 공국이 프랑스 제1공화국에 점령당하자 파르마의 합병을 막기 위해 남편과 함께 고군분투하나 강대한 프랑스를 막을 수는 없었다. 1802년에 페르디난도가 의심스럽게 병사(프랑스에 의한 독살로 추정된다.)한 이후 섭정으로 임명되었으나 나폴레옹에 의해 폐위당하고 합스부르크 가문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오스트리아 제국 산하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인 프라하로 피신했다. 조카 프란츠 2세는 그녀의 오스트리아 입국을 불허했지만 배려로 작은 영지를 던져주었고, 그곳에 틀어박힌 그녀는 1804년에 5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사후 아말리아의 유해는 프라하 성 비타 대성당[4]에 안장되었고 심장은 합스부르크 가문 황실 묘당에 안장되었다.

2.4. 결혼 생활과 자녀[편집]


결혼 초 정략 결혼한 남편 페르디난도와는 서로 정부를 거느리면서 악마와 창부로 부르며 늘상 싸울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 그러나 결혼 9년 차인 1778년 5세의 장남 루도비코가 테이블 모서리에 머리를 찧는 사고로 사경에 이르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자식 바보라는 점에서 똑같았던 이 부부는 아들의 부상 때 극적으로 화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이후로는 금슬 좋은 부부이자 모범적인 부모가 되었다.

아말리아는 페르디난도 1세와의 사이에서 3남 6녀로 총 9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4명 만이 성년까지 성장한다. 그리고 그중 첫째인 장녀 카롤리나 공녀와 둘째인 장남 루도비코 1세만이 결혼했다. 한편 딸들에게 사이가 좋았던 여동생인 마리아 카롤리나마리아 안토니아의 이름을 붙였다. 아말리아의 자손들은 매우 번성하여 현재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모든 구성원은 아말리아의 후손들이다.[5]

아말리아 자신부터가 부모의 편애로 소외당했고 이로 인해 연인과 헤어졌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녀들의 정략 결혼에 적극적이지 않아서 최대한 자녀들의 의사를 고려한 혼처를 마련했다. 장남 루도비코는 비록 어느 정도는 정략 결혼에 가까웠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던 스페인마리아 루이사와 결혼했으며 장녀인 카롤리나 마리아도 작센 선제후의 막내아들과 연애 결혼을 했다.

차녀와 삼녀인 마리아 안토니아와 카를로타 마리아는 혼기가 찼을 때 프랑스 혁명전쟁의 혼란 와중이었던 것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과 서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어서[6]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남았다. 나중에 마리아 안토니아는 우르술라 수녀회, 카를로타 마리아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녀가 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여대공
(Archduchess Maria Amalia of Austria)
프란츠 1세
(Francis I)
로렌 공작 레오폴드
(Leopold, Duke of Lorraine)
로렌 공작 샤를 5세
(Charles V, Duke of Lorraine)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
(Eleonore of Austria)
오를레앙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Élisabeth Charlotte of Orléans)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Philippe I, Duke of Orléans)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Elisabeth Charlotte of the Palatinate)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a)
카를 6세
(Charles VI)
레오폴트 1세
(Leopold I)
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Eleonore Magdalene of Neuburg)
브라운슈바이크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sabeth Christine of Brunswick)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루트비히 루돌프
(Ludwig Rudolf, Duke of Brunswick-Wolfenbüttel)
외팅겐외팅겐의 크리스티네 루이제
(Christine Louise of Oettingen-Oetti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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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르디난도의 누나 이사벨라는 아말리아의 오빠인 요제프 2세와 결혼하였으므로 겹사돈이다[2] 물론 파르마 공작도 부르봉 왕조의 방계로서 스페인프랑스 양쪽에서 왕족이긴 했으나, 각각 나폴리-시칠리아와 프랑스의 왕비가 된 마리아 카롤리나마리 앙투아네트와 비교하면 자매들 중 가장 서열 낮은 남성과 결혼했다. 세 자매는 비슷한 불행을 겪었다. 마리아 카롤리나는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잠깐 동안 휘두르고 나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쫓겨나 망명, 결국 친정에 돌아와 나름 잘 살다 생을 마감했고 자기가 다스렸던 나폴리 왕국은 유럽판 항우가 다스리게 되었다. 게다가 마리 앙투아네트는 숫제 시집간 지 23년 만에 시민혁명이 발발해서 채 불혹이 되기 전에 참수형을 당했다. 그 바람에 언니들이 다들 50~60대까지 산 것에 비해 혼자만 30대에 사망했다. 이렇게 왕비라는 지위에 오른 두 여동생들이 하나는 작위를 잃고 친정으로 도망치듯 망명했으며 다른 하나는 아예 왕정을 부정하는 백성들의 손에 처형당했다. 아말리아 역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남편도 잃고 쫒겨나, 조카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고 대신 프라하에 있는 영지를 던져줬다. 셋 중 유일하게 영지 보유는 했지만 못 볼 꼴을 다 겪고 크게 고생한 셈.[3] 때문에 아말리아의 남매들인 요제프 2세, 마리아 카롤리나, 레오폴트 2세,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녀들도 언어상 발음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이름이 마리아 테레지아.[4] 합스부르크 가문의 조상인 보헤미아 국왕 겸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3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가 이 성당에 안장되었다.[5] 카를 1세의 황후 부르봉파르마의 지타 공녀는 그녀의 내손(5대)이다.[6] 당시 마리아 아말리아와 딸들은 프라하에 머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