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칼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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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칼라스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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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칼라스
Maria Callas
Commendatore OMRI[1]


파일:maria_callas_film.jpg

본명
마리아 안나 소피아 카이킬리아 칼로예로풀루
Μαρία Άννα Σοφία Καικιλία Καλογεροπούλου
출생
1923년 12월 2일
미국 뉴욕주 뉴욕시
사망
1977년 9월 16일 (향년 53세)
프랑스 일드프랑스 파리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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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1923-1966)
[[그리스|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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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1966-1977)
직업
소프라노
신장
173cm
배우자
/파트너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1949년 결혼~1959년 이혼)
아리스토틀 오나시스(1959년~1968년)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그리스 시절
2.3. 미국 시절
2.4. 이탈리아 활동과 결혼
2.5. 1950년대 전반
2.6. 1950년대 후반
2.7. 1960년대
2.8. 1970년대
3. 음악 성향
4. 사후의 평가와 우여곡절
5. 기타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www.lyricsmusica.it/maria+callas-maria-callas-mariacallas1957.jpg


20세기를 대표하는 소프라노 중 한 명으로, 일반적으로 오페라 최고의 디바, 프리마 돈나를 논할 때 우선적으로 떠올릴만한 인물이다. 빼어난 미모와 개인으로서의 카리스마, 예술적 성취, 화려함과 비극이 뒤엉켜 풍부한 이야기 거리가 담긴 개인사를 만들어낸 인물이기도 하다. 라이벌로는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 ;1922 ~ 2004)가 있으며 팬덤의 충돌도 유명했다.

그리스계 미국인으로, 그리스어 풀네임은 '마리아 안나 소피아 케킬리아 칼로예로풀루(Μαρία Άννα Σοφία Καικιλία Καλογεροπούλου)'. 하지만 예명으로 축약한 이 문서의 이름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2. 생애[편집]


출생:1923년 12월 2일
출생지:미국 뉴욕주 뉴욕
국적:미국[ ] (1923-1966),그리스[ ] (1966-1977)
직업:소프라노,피아니스트, 교육자
배우자: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1959년 결혼)
본명:마리아 아나 소피아 케킬리아 칼로예로풀루
데뷔:《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산투차 역
사망:1977년 9월 16일(53세) · 프랑스 일드프랑스 파리

2.1. 유년기[편집]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 있는 한 병원에서 그리스 이민자 부부였던 요르고스 칼로게로풀로스(미국으로 귀화하면서 조지 칼라스로 개명)와 에반젤리아 디미트리아두의 1남 2녀 중 막내이자 둘째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는 그리스에서 약학을 공부했지만 미국으로 이민와서 노동자로 일했다. 하지만 노동을 하면서도 예전부터 하던 약학 공부를 주경야독으로 이어가 미국에서도 약사 자격증을 획득했고 자신의 약국을 개업했다. 조지가 가족에 별 관심이 없었고 매사에 의욕이 없었다고 하지만 칼라스 3모녀는 서로를 비방하는 자서전을 경쟁적으로 내던 관계였으므로 이런 주장을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경우가 많다. 칼라스 가족의 여러 일화를 볼 때 그래도 아버지 조지가 가장 사람 구실을 한 편이었다. 조지는 대공황 때 주식 투자에서 돈을 날린 것을 제외하면 흠잡을 데가 없는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어머니 에반젤리아는 배우와 가수가 꿈이었으나 이를 이루지 못했다. 에반젤리나는 아이들의 장래에 지나치게 간섭하고자 했는데, 칼라스의 경우 세 살때부터 노래에 재능이 있다고 여긴 에반젤리아의 강요 때문에 성악을 비롯한 음악 공부를 억지로 해야 했다. 에반젤리나가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을 딸에게 지나치게 강요했다는 시각이 많다.

칼라스의 노래 실력은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도 꽤 괜찮은 편이었고, 뉴욕에서 열린 어린이 노래 경연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칼라스는 훗날 이 시절을 보람없고 지긋지긋한 고생의 나날이라고 부정적으로 회고하며 "그런 짓을 못하게 금하는 무슨 법률이라도 있어야 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서 어린 시절을 빼앗아선 안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성악 공부를 강요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던 아버지 조지와 어머니 에반젤리아는 시도때도 없이 부부싸움을 일으켰다. 대공황 시절 아버지 조지는 주식에 투자한 돈을 날리면서 약국까지 팔아야 했다. 조지와 에반젤리아의 불화는 심했고, 1937년 에반젤리아는 남편을 떠나 두 딸을 데리고 그리스로 떠났다.


2.2. 그리스 시절[편집]


아버지 조지가 그리스로 양육비를 송금해주었지만 1940년부터 그리스가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면서 미국에 있는 아버지와 연락 및 송금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후 세 모녀는 그리스에서 극도로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마리아 칼라스의 언니인 재키가 어머니에게 떠밀려 선박업체를 운영하던 부호의 내연녀가 되면서 칼라스 모녀는 극단적인 곤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021년 6월 출간 예정으로 전세계적으로 홍보 중인 린지 스펜스의 '마리아 칼라스 전기'에 따르면 전쟁 당시 그녀의 어머니는 성매매를 했으며, 마리아 칼라스 역시 성매매로 팔려고 했다고 한다. 물론 전기 작가 스펜스는 이는 마리아 칼라스의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부연했다.

그리스에서는 그동안 휘둘리고 살았던 딸들이 어머니와 자주 다투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내켜하지 않는 칼라스를 데리고 아테네 음악원에 입학 원서를 내 오디션을 보게 했다. 하지만 기초 성악 기교가 전무하다는 이유로 퇴짜맞았고, 이어 그리스 국립음악원에서 두 번째로 오디션을 봤다. 오디션을 주관했던 성악 교수 마리아 트리벨라도 아직 다듬어지지 않아 거칠다고 인정하면서도, 가능성을 훨씬 높게 점쳐 입학 자격을 인정했다.

음악원에 입학한 칼라스는 트리벨라의 문하생이 되었는데, 트리벨라는 다소 어두운 목소리의 질감 때문에 종종 알토 음역이 적합하다는 주위의 평과 반대로, 소프라노 음역으로 테시투라[2]를 높이는 데 중점을 두고 훈련시켰다.이때의 경험을 칼라스는 트리벨라의 가르침은 프랑스적인 가르침이었으며,이탈리아 오페라를 부르기 위한 벨칸토 창법의 수련과 벨칸토 창법의 기본인 Chest notes등은 후에 엘비라 데 히달고에게서 배우게 되었다고 부정적으로 회고했다.

1938년에 공식 데뷔 무대에 출연한 직후 어머니는 칼라스를 거절했던 아테네 음악원으로 다시 데려가 오디션을 보게 했다. 이번에 오디션을 주관한 교수는 스페인 출신의 '엘비라 데 이달고'[3]였는데, 교육 활동에 전념하기 전까지는 매우 뛰어난 벨칸토 가수였다.

이달고는 칼라스의 목소리에 긍정적인 평을 내렸고,합격 판정을 내렸다. 다만 즉시 입학하지는 못했고, 일단 그리스 국립음악원을 졸업하면 입학시켜달라는 어머니의 요구 때문에 1년 유예되었다. 아테네 음악원 입학 직전이었던 1939년 4월 2일에는 국립음악원 학생들이 제작한 마스카니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공연에 산투차 역으로 출연해 오페라 무대에도 데뷔했다.

1939년 가을에 아테네 음악원에서 두 번째 성악 전공을 시작했고, 물론 지도 교수는 오디션 때 만났던 이달고였다. 이달고는 칼라스의 기교가 매우 출중하고 표현력도 훌륭하지만, 목소리가 메조소프라노보다는 소프라노에 적합하다는 판단으로 자신의 벨칸토 창법을 집중적으로 전수해 주었ㄷ. 국립음악원 시절에도 그랬지만, 칼라스는 10시에 제일 먼저 등교해 제일 늦게 8시에 하교하는 일이 예사였고 다른 교수들의 수업도 빠짐없이 청강했다고 한다. 엘비라 데 히달고는 인터뷰에서 그녀가 5시간 내내 집중 할 수 있었으며, 테너와 콜로라투라의 레슨을 가리지 않고 보고 들은 것이 그녀가 고음역대를 잘하게 된 비결이라고 밝혔다.

아테네 음악원에서 졸업할 때가 되자 이달고는 칼라스에게 그리스 국립오페라단 비상근 단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줄을 대주었는데, 아직 10대의 나이에 오페라 무대에서 심각한 핸디캡이었던 고도근시까지 있었음에도 별 무리없이 무대 연기를 소화해냈다. 상근 단원 자격을 얻어 처음 맡은 주역은 1942년 8월에 공연된 푸치니토스카 타이틀 롤이었고, 이어 그리스에서는 초연이었던 오이겐 달베르의 '저지(낮은 땅)'에서도 여주인공 마르타로 출연해 호평을 받았다.

1944년 여름에는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에서도 타이틀 롤로 열연했는데, 독일 비평가였던 프리드리히 헤어초크가 극찬했을 정도로 명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44년 영국군이 독일군을 몰아내고 그리스를 점령한 후에는 추축국 측의 좋은 평가가 이후에는 오히려 악재로 작용했는데, 독일군이 물러간 직후 이어진 내전 상황 속에서 칼라스는 독일 협력자로 간주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칼라스는 그리스에 주둔한 영국군의 통역으로 활동하며 곤궁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연합국이 그리스를 점령한 후 미국에 있는 아버지와도 다시 연락이 되었다. 그리스 내전이 터지자 이달고는 이탈리아로 옮겨가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그리스에서 어머니와 심각한 불화에 빠져 있던 칼라스는 오랫동안 못보았던 아버지도 다시 만나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활동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여비를 모아 그리스를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2.3. 미국 시절[편집]


1945년 칼라스는 뉴욕에 도착했다. 미국에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칼라스는 뉴욕에서의 삶을 즐겼다. 하지만 가수로서의 경력에 있어서는 그리스 때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오디션에 번번히 떨어졌고 몇몇 단역으로 출연할 수 있었을 뿐이다. 95kg의 거구를 지적받아 다이어트에 들어갔고 81kg까지 감량했다.

1946년 감량한 몸매에 힘입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디션에 합격하여 피델리오와 나비부인 역을 제안 받지만, 칼라스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칼라스는 후에 인터뷰에서 자신은 가수의 데뷔는 자신의 가장 뛰어난 장기를 보여주어야한다고 생각했고 베리스모 오페라보다는 벨칸토 오페라를 선호했던 칼라스는 푸치니의 오페라로의 데뷔르 거부했다.하지만 이후 상황은 매우 나빠졌다. 전쟁이 끝나면서 수많은 뛰어난 이탈리아 가수들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으로 몰렸다. 이후 칼라스는 번번히 오디션에 떨어졌다. 1947년경 어머니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면서 가정불화도 심해졌다.

1946년말 천신만고 끝에 시카고에서 에디 바가로치가 기획한 투란토트 공연에 주역으로 캐스팅되었다. 하지만 공연이 열리기 전에 프로덕션이 도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투란도트' 준비 중에 베이스 바리톤 니콜라 로시-레메니를 만나고, 로시-레메니는 마침 뉴욕에서 그 시즌에 베로나의 로마 시대 원형 경기장인 아레나에서 개최되는 유명한 야외 오페라 페스티벌(베로나 아레나 페스티벌) 무대에 올릴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조콘다'의 주연을 맡을 소프라노를 찾고 있던 조반니 제나텔로(왕년의 유명한 테너 가수로, 당시 베로나 아레나 페스티벌의 감독)에게 그녀를 조콘다 역으로 추천하였다. 오디션 결과에 만족한 제나텔로는 칼라스를 조콘다 역으로 캐스팅했다. 심각한 가정 불화에서 해방되길 갈구하던 칼라스는 오디션용 옷 한벌과 신발이 든 가방 하나만 들고 단신으로 뉴욕에서 이탈리아행 화물선에 올랐다.

한편 이 때 시카고에서 계약의 전속 조항으로 인해 나중에 소송에 휘말린다.


2.4. 이탈리아 활동과 결혼[편집]


1947년 베로나에 도착한 칼라스는 '라 조콘다' 공연의 지휘를 맡은,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 지휘계의 본좌였던 툴리오 세라핀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후 세라핀은 그녀의 멘토로서 그녀의 음악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47년 8월 2일 베로나 아레나 무대에 올려진 '라 조콘다' 공연에서 조콘다 역을 맡은 칼라스는 리허설 중 다친 다리에 깁스를 감고도 펼친 열연으로 성공적인 이탈리아 데뷔를 마친다. 하지만 이전에 서술되어 있었던 것처럼 '라 조콘다' 이후 그녀가 곧바로 탄탄대로를 걸은 것도 아니었고, 곧바로 세라핀의 총애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라 조콘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지만 세라핀이나 베로나 극장은 그녀에게 딱히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고 이후 추가 출연 계약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라 조콘다 공연 후 그녀는 일자리가 없었고 오디션은 보는 족족 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때 그녀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준 이가 나타났으니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라는 사업가였다.

'라 조콘다' 공연에서 90kg의 거구의 젊은 소프라노에게 매료되어 가능성을 발견한 메네기니는 그녀의 후원자를 자처하게 된다. 메네기니는 칼라스보다 28세 연상[4]이었고 키도 작았지만 젠틀했고 칼라스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디션용 옷과 신발이 든 가방이 전부였던 칼라스에게 메네기니는 엄청난 의지가 되었다. 메네기니의 도움으로 당장 숙식이 해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메네기니는 그녀의 오디션을 위해 유명 오페라 하우스의 전문가를 코치로 붙여줬고 또 그녀가 연습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도 붙여줬다. 메네기니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여 그녀가 공연에 설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했다. 비록 밀라노 스칼라좌에서는 거절당했지만 메네기니의 노력으로 칼라스는 1947년 12월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오디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지휘자는 또다시 툴리오 세라핀이었다. 칼라스는 그리스에서 바그너를 전혀 공부한 적이 없었지만 메네기니가 고용한 피아니스트와 함께 약 열흘간 급히 이졸데를 연습했고, 오디션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체를 능숙하게 불러 세라핀을 만족시켰다. 칼라스는 라 페니체 극장과 계약을 맺고 트리스탄에 이어 몇 주 후에 공연된 투란도트에도 출연하였다.

세라핀이 칼라스를 크게 중용한 것처럼 서술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칼라스가 이탈리아에서 데뷔한 라 조콘다 공연 이후 세라핀은 칼라스를 찾지 않았다. 다시 세라핀과 칼라스가 조우하게 된 것은 위에 나와 있는 것처럼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으로, 당시 바그너가 공연되는 일이 거의 없었던 이탈리아에서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줄 아는 가수조차 없었다. 오디션에서 칼라스가 1막 전체를 막힘없이 부르자 세라핀은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 후 세라핀은 바그너의 대작 발퀴레를 공연할 때까지 또다시 일년간 칼라스를 찾지 않았다. 이처럼 세라핀이 칼라스를 기용한 것은 초기에는 바그너 오페라 때문이었다. 칼라스는 트리스탄으로 라 페니체에 데뷔한 이후 투란도트, 아이다, 운명의 힘 등에 출연했지만 대부분 세라핀이 아닌 다른 지휘자였다. 세라핀이 칼라스의 추천장을 써주기도 했지만 메네기니가 공연 성사를 위해 발벗고 나섰던 덕분이었다. 물론 나중에 세라핀은 발퀴레 공연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에도 칼라스를 중용했다.

40년대말 칼라스는 메네기니의 노력으로 이탈리아의 각 지방 극장에 데뷔하며 점차 경력과 인지도를 쌓아갔다. 칼라스는 메네기니와 결혼하기를 원했으나 메네기니가 계속 청혼하지 않자 결국 그녀의 언니 재키가 이탈리아로 직접 건너와 메네기니와 담판을 지었고 1949년 4월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 이후 빠른 시간만에 칼라스는 너무나 유명해져서 세계적인 소프라노가 되었다.

1949년 1월에는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 팬들이 전설적이라 칭하는 진기한 공연을 했다. 원래 극장과 맺은 계약은 1월 8/12/14/16일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제2부 '발퀴레' 공연에서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배역인 브륀힐데 역을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비로 뒤이어 라 페니체에서 상연될 예정이었던 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에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배역인 엘비라 역으로 캐스팅된 소프라노 마르게리타 카로지오가 인플루엔자로 앓아누워 하차하자, 두 공연에서 모두 지휘를 맡은 세라핀의 요청을 받아들여 1월 16일 '발퀴레' 공연을 마치고 19/22/23일 엘비라 역까지 노래했다. 완전히 다른 성격의 음악과 창법, 연기를 막힘없이 소화해내는 이 가수에게 청중들은 그야말로 뿅가죽네 상태가 되었다. 유명한 오페라 연출가 프랑코 제피렐리도 이 때의 공연을 보고 경악했는데, 훗날 '그것은 마치 비르기트 닐손이 바그너 공연을 마치고 사흘 만에 베벌리 실즈의 대역을 노래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 일이 더욱 대단한 것은, 칼라스가 엘비라 역을 단 1주일 만에, 그것도 '발퀴레'를 계속 공연해가며 짬짬이 익혀 공연했다는 점이다. 다만 악보는 다 외웠어도 가사는 다 외우지 못해서, 무대 앞에서 가사를 읽어주는 프롬프터가 'Son vergin vezzosa'(나는 매혹적인 처녀)라고 읽어준 것을 잘못 알아듣고 그만 'Son vergin viziosa'(나는 사악한 처녀)라고 노래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러나 브륀힐데 역을 노래하고 사흘 만에 엘비라 역을 노래하는 '기적'을 마주한 관객들은 그런 실수쯤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이 때의 경험은 이후 경력을 봐도 상당히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 발퀴레 공연은 칼라스의 경력에 전환점이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실 이 공연도 역시 원래 주연 가수가 있었지만 대역으로 출연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 발퀴레 공연 이후 세라핀은 본격적으로 칼라스를 기용하게 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칼라스 초기의 커리어에서 이탈리아 오페라 못지 않게 바그너 오페라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바그너 자체가 이탈리아에서 거의 공연되지도 않았는데 정서적으로 이탈리아인들에게 전혀 맞지 않았고, 바그너 오페라를 부르면 목이 망가진다는 괴담이 이탈리아에 널리 퍼져 있었다. 단순히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일이 아닌게 루치아노 파바로티조차도 바그너, 특히 트리스탄은 목소리가 망가지기 때문에 안부르겠다고 몇 차례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어쨌거나 당시 이탈리아에서 바그너 공연은 무척 드물어서 바그너의 발퀴레 등을 무척 좋아했던 마리오 델 모나코는 인터뷰에서 바그너를 자주 부르고 싶었지만 너무나 기회가 없었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바그너를 공연하려 해도 목소리가 망가진다는 핑계로 부르기를 꺼리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칼라스는 한동안 이탈리아에서 공연되는 바그너 공연들에서 기회를 잡았다. 바그너로 해당 극장에 데뷔하고 이후에 이탈리아 오페라 주연 제의가 오는 그런 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물론 유명해진 이후 칼라스의 주요 레퍼토리는 이탈리아 오페라, 특히 도니제티와 벨리니의 낭만주의 벨 칸토 위주로 확립되었다.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공연 출연을 위해 동분서주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녹음을 취입하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덕분에 칼라스는 데뷔 초 시절부터 의외로 많은 녹음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2.5. 1950년대 전반[편집]


1950년 4월 12일 오페라 가수들의 이상향이자 가장 가혹한 비평 무대로 손꼽히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가극장에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아이다 역으로 데뷔하였는데, 이 공연은 당시 라 스칼라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그러나 곧 칼라스에 의해 밀려나게 되는) 레나타 테발디의 대역으로 출연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주역으로 정식 계약한 라 스칼라 데뷔는 1951년 12월 7일 역시 베르디의 오페라인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의 엘레나 공주 역으로 이루어졌고, 곧 이 극장의 레귤러 가수가 되었다.

칼라스가 이탈리아에서 연이어 거둔 성공은 다른 나라들의 오페라극장과 오페라단에도 신속하게 전해졌는데, 1952년 여름 멕시코 시티 극장에서 몇몇 공연을 하였고 이때 녹음된 음원들이 열악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당시 목소리의 최고 전성기였던 그녀의 목소리를 남겨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52년 말 그녀는 HMV(이후 EMI)의 명 프로듀서였던 월터 레그에게도 발탁되었고, 본격적인 오페라 전곡 녹음도 시작했다.

또 1952년 11월 8일 런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극장에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타이틀 롤로 데뷔하여 절찬을 받았다. 이후 코벤트 가든에서 '아이다'의 타이틀 롤, '일 트로바토레'의 레오노라 역,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역, '메데아'의 타이틀 롤, '토스카'의 타이틀 롤로 출연하였으며, 그녀의 마지막 오페라 무대도 1965년 7월 5일 코벤트 가든에서의 '토스카' 공연이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칼라스는 자신의 뚱뚱한 몸 때문에 고민했다. 20대 초반에 95kg에 달하던 몸무게를 80kg대로 다이어트해서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활동해 왔다. 남편인 메네기니나 그의 팬들은 칼라스의 몸집에 훨씬 관대했지만, 칼라스는 노래 뿐 아니라 연기하는 배역과 일체화되기 위해서는 더 날씬한 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1953년 영화 로마의 휴일을 보고 감명받은 칼라스는 당시 사실상 연인으로 지냈던 연출가이자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에게 자기가 오드리 헵번처럼 다이어트를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고 비스콘티가 그러면 진정한 트라비아타가 될 것이라고 말하자 곧바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1953년 봄부터 1954년 초까지 약 11개월간 칼라스는 30kg 이상을 감량했고, 하루아침에 '북경오리에서 백조로 환골탈태한' 몸매를 얻게 되었다. 다만 그녀는 10대 시절부터 육중한 체구를 지탱하느라 발목이 좋지 않았는데, 다이어트를 하고 나서도 발목이 여전히 굵었다. 그래서 발목이 드러나는 치마를 기피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실제로 그녀의 무대의상은 거의 대부분 발목이 드러나지 않는 드레스였으며, 오나시스와 쇼핑 등 일상 생활 중에 파파라치들에게 찍힌 사진을 보면 발목이 상당히 굵은 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54년에는 시카고의 리릭 오페라단에서 첫 미국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는데, 이 오페라 공연 뒤 갑자기 사복경찰들이 대기실로 찾아와, 미국 공연기획자인 에디 바가로지가 칼라스를 계약 위반으로 고소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고소 소식을 듣고 칼라스가 고성과 욕설을 퍼붓는 모습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찍혔는데, 이 사진은 이후에도 칼라스 스캔들 관련 기사에 종종 등장하며 '성질 더러운 프리마돈나'라는 이미지 형성에 한몫했다.

파일:attachment/mariacallasinrage.jpg


2.6. 1950년대 후반[편집]


그녀는 완벽주의적인 성격으로 유명했고, 이탈리아 음악인들 사이에 그녀는 호랑이라고 불렸다. 극장 경영진, 상대 배역의 테너, 지휘자들과의 불화도 늘어갔다. 1955년 라 스칼라 극장에서 안드레아 셰니어 공연을 할 때 타이틀 롤을 맡았던 마리오 델 모나코와 무대 뒤에서 다투기도 했다.

1956년과 1957년은 그녀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짧은 전성기 이후 칼라스는 생각보다 일찍 꺾이기 시작했다.

1956년 6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빈 국립 가극장에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타이틀 롤로 데뷔했다. 하지만 빈 국립 가극장과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이 되었으며 이후로는 더 이상 빈에 초청받지 못했다.

1956년 10월에는 대서양 건너 미국 최고의 오페라 하우스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노르마 역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이때도 스캔들이 일어났는데, 타임지에서 칼라스와 라이벌이었던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 사이의 관계나 어머니와의 불화 등에 대해 소상히 게재한 기사를 실은 것이었다. 이후 칼라스는 1958년 11월 해고될 때까지 2년간 메트 무대에 섰는데, 메트 총감독 루돌프 빙과 많은 갈등을 빚게 되었다.

1958년 1월 2일 로마 오페라극장의 노르마 공연은 그녀의 몰락을 상징하는 흑역사로 널리 언급되고 있다. 공연 직전에 목이 부어오를 정도로 상태가 안좋아 의사나 매니저가 출연 취소를 간청했음에도 감독이 '누구도 칼라스를 대신할 수 없다'면서 억지로 칼라스를 무대에 올렸고 칼라스는 제1막이 끝나고 공연 취소를 선언하고 극장을 나가버렸다. 극장측은 관객들이 칼라스의 노르마를 잔뜩 기대하고 있다며 대역을 준비해 두지 않았고, 칼라스는 이에 자신이 아프게 되어 공연을 못하게 될 경우에 대해 항의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극장의 책임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설령 대역을 쓰려 해도 감히 칼라스의 대역으로 노르마 역을 노래하려고 선뜻 나서는 이가 없어 그대로 공연을 강행했다가 사달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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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하필이면 그 날 공연이 이탈리아 대통령 등 정계 고위층들이 임석한 중요한 이벤트였던 터라, 공연을 망친 칼라스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이탈리아에서 대단히 빠르게 확산되었다. 당시 제작된 뉴스 필름의 아나운서 멘트도 비꼬는 투가 다분했을 정도.[5] 물론 여기에 가만히 있을 칼라스도 아니었고, 곧 극장과 언론사를 향해 고소장들을 날렸다. 후에 마리아 칼라스는 이 고소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대역을 준비해놓지 않아 이탈리아의 고위층들이 공연장을 나가게 된건 전적으로 극장의 책임이었고, 일부 언론사들이 거짓된 내용의 기사를 만들어서 내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밀라노 팬들이 마리아 칼라스의 보이콧을 요구하는 등 이탈리아에서 여론이 매우 험악해졌다.

1958년 5월 칼라스는 오랜 갈등을 빚고 있던 밀라노 라 스칼라 가극장의 총감독 안토니오 기링겔리와 다툼 후에 앞으로 더이상 스칼라좌 무대에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잔여 계약을 파기했다.카랴얀은 기링겔리에 대해 무척 다정한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특히 카라얀과 기링겔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1955년 발퀴레 공연 취소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기링겔리는 바그너의 대작 발퀴레를 스칼라좌 무대에 올리는 회심의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지휘자는 카라얀이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베를린 필의 수장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면서 카라얀이 그의 대타로 베를린 필의 미국 공연을 지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기간이 밀라노에서 예정되어 있던 발퀴레 공연 기간과 겹쳤다. 하지만 베를린 필 최초의 미국 순회 공연 기회는 카라얀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공연이었고, 이를 잘 알고 있었던 기링겔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카라얀의 발퀴레 공연 스케줄을 취소해 주었다. 이후 카라얀은 순식간에 세계를 대표하는 지휘자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스칼라좌는 카라얀과 원만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카라얀은 1956년 이후 베를린 필, 빈 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이외에 다른 오케스트라는 거의 지휘하지 않았지만, 그 외에 유일하게 지휘했던 곳이 스칼라좌였다.

1958년 11월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총감독 루돌프 빙이 칼라스에게 계약 해지를 알리며 그녀에게 해고를 통보해 왔다. 루돌프 빙은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칼라스와 나 둘 중 누가 극장을 운영하는 사람인지 결정해야 할 순간이 왔습니다. 물론 그때 극장을 운영하는 사람은 나였습니다. 그래서 칼라스에게 계약을 끝내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나운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칼라스를 해고하신 건가요?) 해고라는 표현을 쓰고 싶으시면 그래도 됩니다. 하지만 저는 단순한 해고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칼라스와의 모든 관계를 완전히 단절한 것입니다."

메트에서 해고된 후 미국 댈러스 오페라와 계약을 맺고 50년대말 한때 이 곳에서 한동안 많은 무대에 올랐다.

사생활 쪽에서는 1957년에 그리스의 선박왕이었던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 만나 눈이 맞으면서부터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었다. 1959년 8월 오나시스는 자신의 호화 유람선 크리스티나호에 칼라스 부부를 초청했다. 그가 리 라지윌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를, 그밖에 다른 수많은 여자들을 꼬실 때도 항상 크리스티나호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오나시스에게 반한 칼라스는 메네기니와 이혼하려 했다. 칼라스는 메네기니가 자신의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수입의 일부를 시동생들의 사업자금 등 시가(媤家) 식구들을 위해 무단으로 써버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메네기니는 이혼을 원치 않았다. 칼라스와 메네기니는 이혼 소송에 들어갔지만 당연히 이탈리아 법원은 귀책 사유가 없는 메네기니의 손을 들어줬다.


2.7. 1960년대[편집]


칼라스는 오나시스의 크리스티나호에 처음 초대받았을 때, 얼마나 돈이 많은 사람이길래 이렇게 흥청망청 돈을 쓰면서 살 수 있나 하고 놀라워 했지만 정작 오나시스와 동거하게 되자 오나시스는 칼라스에게 강아지 두 마리를 선물한 것 말고는 돈을 쓰는 일이 없었다. 1960년부터 칼라스는 EMI에서 음반 녹음 활동을 재개했고 계약이 파기됐던 이탈리아의 라스칼라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계약을 다시 맺고 메데아와 토스카등을 공연했다. 덕분에 EMI에서 스테레오의 음질로 칼라스의 여러 녹음이 남기게 되었다. 다만 목소리가 예전 같지는 않았기에 평론가들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칼라스의 이름값만으로 판매량은 보장되었다.

1963년경 오나시스는 미국 대통령의 영부인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와 리 라지윌 자매에게 동시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후 오나시스의 관심은 리 라지윌, 재클린 케네디 자매에게로 옮겨갔다. 하지만 오나시스의 복잡다단한 여자 관계에도 불구하고 칼라스와 오나시스 사이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1964년경 칼라스는 오나시스의 집에서 나와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죽을 때까지 파리에서 살았다. 하지만 파리로 이사한 것이 오나시스와의 결별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나시스가 보유하고 있던 6채의 자택 중 하나가 파리에 있었다. 파리는 이탈리아나 미국과 달리 대중들이 유명인들의 사생활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오나시스와 칼라스가 만남을 갖기에는 가장 좋은 도시였다.

1964년 칼라스는 연출가 제피렐리와 함께 런던 코벤트 가든 오페라에서 '토스카'로 근 5년만에 다시 오페라 무대에 복귀했다. 팬들은 여전히 환호했고 흥행도 성공했지만 평론가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이미 목 상태도 예전같지 않아 거의 재활 훈련 급으로 강한 발성 연습을 거듭하며 컨디션을 유지해야 했다. 가사의 발음도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 출연하는 작품은 토스카, 노르마 단 두 개로 제한되었다. 칼라스는 1년여 동안 런던 코벤트 가든, 파리 국립 오페라, 그리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토스카와 노르마를 돌려가며 공연했다. 하지만 결국 1965년 7월 5일에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한 토스카가 그녀의 마지막 오페라 출연이 되었다. 원래는 5회 반복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7월 5일 1회만 공연하고 나머지 4회는 다 취소되었다.

하지만 칼라스 본인이 은퇴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오페라에 출연하기 위해 여기저기 타진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1966년 칼라스는 오나시스와의 결혼을 희망하며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취득함으로써 메네기니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려고 시도했다. 당시 그리스는 법으로 그리스정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혼인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 국적을 취득하는 순간 메네기니와의 결혼은 취소됐다. 하지만 오나시스는 끝까지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다.

1967년 런던 코벤트 가든 측과 라 트라비아타 공연에 대한 교섭이 오갔고, 8월부터 한달간 그녀의 파리 자택에서 코벤트 가든 측이 보낸 피아니스트와 연습했지만 공연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68년 5월, 이번에는 코벤트 가든 측과 무대 공연은 못하더라도 스튜디오에서 라 트라비아타 음반 녹음이라도 해보자하는 이야기가 오갔고 역시 코벤트 가든 측이 보낸 피아니스트와 함께 파리 자택에서 일주일 넘게 연습했다. 하지만 오나시스와의 관계 때문에 도중에 중단되었다. 아마도 이때 칼라스가 오나시스와 재클린과의 깊은 관계를 알아챈게 아닌가 하는 추정이 있다.

1968년 9월 칼라스는 갑자기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찾아가 공연을 마친 레나타 테발디를 만나 눈물을 흘리며 포옹하고 역사적인 화해를 했다. 칼라스가 갑자기 테발디를 찾아간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칼라스가 대중들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관계자들 앞에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일깨움으로써 오페라 무대에 복귀하려 했던 시도였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왕성하게 활발하고 있던 테발디보다도 한 살 어린 자신이 결코 은퇴할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려 했다는 것.

사실 칼라스가 테발디를 찾은 것은 오나시스와 재클린 케네디의 결혼 계획을 눈치챈 직후로 보여진다. 오나시스는 재클린과의 결혼 계획을 심지어 재클린의 친동생인 리 라지윌에게조차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다가 결혼하기 한 달 전부터 지인들에게 재클린과의 결혼 계획을 알리기 시작했다. 칼라스가 테발디를 찾아간 날로부터 딱 한 달 후에 오나시스는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식을 올렸다. 참고로 오나시스와 재클린이 함께 살던 집도 뉴욕에 있었다. 오나시스가 가진 저택 6곳 중 세 곳이 뉴욕에 있었다. 나머지는 칼라스가 살던 파리, 그리고 섬, 요트였다.

오나시스와의 관계는 1968년 10월 오나시스가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와 결혼식을 올리면서 끝나...지 않고 나중에 다시 이어진다.

어쨌거나 오나시스와 재클린이 결혼을 올리며 오나시스와의 관계는 한동안 잠정 중단되었고 칼라스는 홀로서기에 나서야 했다. 오나시스와 재클린이 결혼한 지 석달 만인 1969년 초 칼라스는 파리 스튜디오에서 EMI와 함께 음반 녹음 세션을 가졌다. 이것은 1965년 7월 토스카 공연에서 1회 출연 후 잔여 공연을 캔슬한 후 4년만의 첫 음악 활동이었다. 그러나 음반 1~2개 분량의 녹음 세션이 진행된 것으로 끝났고, 다시 칼라스의 음악 활동은 다시 잠정 중단되었다. 이것은 1973-74년 투어를 제외하고 공개된 그녀의 마지막 음원이며, 오리지널 오케스트라 반주를 동반한 연주로는 마지막이었다.

이후 영화 출연으로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다. 1969년 여름에 영화감독인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와 '공주 메데아'라는 영화를 찍었다. 하지만 평은 좋지 않았고 여배우로서의 커리어도 이것이 시작이자 끝이 되었다.


2.8. 1970년대[편집]


1971년경 오나시스와 재클린 간에 부부 불화가 심해졌고, 오나시스와 칼라스는 다시 만남을 가지기 시작했다.

1971년부터 72년까지 뉴욕의 줄리어드 음대에서 성악 마스터 클래스를 개최했고, 이 수업은 녹음되어 칼라스 사후에 음반과 녹취록으로 발매되었다. 참고로 오나시스와 재클린이 지냈던 자택도 뉴욕에 있었다.[6] 줄리어드의 마스터클래스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줄리어드 뿐만 아니라 뉴욕 인근의 몇몇 음악원에서도 마스터클래스를 가졌다. 그러나 역시 대부분의 마스터클래스는 줄리어드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72년 돌연히 줄리어드에서의 마스터클래스를 중단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이 시기는 오나시스와 재클린의 관계가 파탄나고 오나시스가 뉴욕을 떠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1972년부터 73년에 걸쳐 칼라스는 파리 자택에서 직접 런던까지 건너가서 여러 차례 음반 녹음 세션을 가졌다. 기존에 녹음해오던 EMI가 아니라 필립스였다. 주로 디 스테파노와 듀엣 곡을 녹음했다. 하지만 필립스에서 녹음한 음원들은 결국 음반으로 발매되지 못했다.

1973년에는 이탈리아 토리노 레지오 극장에서 베르디의 시칠리아의 저녁기도로 오페라 연출가로 데뷔했다. 하지만 평은 좋지 않았고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출작이 되었다.

1973년 하반기부터 예전에 자주 콤비를 이루어 공연했던 테너 가수인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세계 순회 투어를 개최했는데, 물론 둘 다 성악가로서의 생명은 사실상 끝난 상황이었고 평단의 여론도 매우 좋지 않았지만 원체 유명했던 이름값으로 매진 사례를 이어갔다.[7] 당시 스테파노와 칼라스가 내연 관계였다고 서술한 책도 있다. 투어의 마지막은 1974년 말에 한국일본에서 열린 공연으로 끝났다. 사실 이것은 한번에 기획된 투어라기보다 처음에는 독일 6개 도시를 시작으로 마드리드,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으로 이어지는 유럽 투어였는데, 반응이 좋자 이듬해 슈투트가르트, 밀라노 등에서 추가 공연을 열었고 이후 미국과 캐나다 순회 공연으로 계속 확장되었다. 그리고 끝나는 줄 알았다가 반년 후에 한국과 일본에서 9회 콘서트를 가지게 되었다. 이 투어는 어쩌면 이후에도 계속되었을 수도 있었다. 투어가 갑자기 중단된 것은 오나시스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무렵 오나시스의 건강이 갑자기 크게 악화되면서 프랑스 파리의 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결국 1975년 3월 15일 오나시스가 사망했다. 오나시스가 재클린과 이혼하고 나면 그와 결혼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도 산산조각 났다. 칼라스는 오나시스로부터 한푼도 물려받지 못했다. 다만 오나시스의 유품을 정리하던 그의 여동생이 칼라스가 오나시스에게 쓴 편지들을 그녀에게 돌려주었을 뿐이다.

1976년 3월에는 재차 컴백할 계획으로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지휘자 제프리 테이트의 피아노 반주로 비밀리에 베토벤의 '아 페르피도'를 리허설했다. 하반기에 런던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콘서트를 추진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장면이 파파라치들에게 잡혔고 곧장 칼라스의 목소리 상태에 대한 폄하의 기사가 (한마디로 발성이 엉망진창이었다는 조롱의 내용) 프랑스 언론들에 떴다. 물론 이 역시 고소크리. 공연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말년의 칼라스는 파리의 아파트에 틀어박혀 거의 고립된 생활을 했다. 젊은 시절 가족들과 트러블이 무척 심했던 칼라스는 메네기니와 결혼한 직후에 어머니, 친언니, 아버지 등 모든 가족들과 완전히 의절했기 때문에[8] 이후 남편과 오나시스가 유일한 벗이었고 그들과 차례로 헤어지게 되자 완전히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칼라스는 우울증불면증을 이겨내기 위해 처방전도 없이 온갖 약품들을 다량 복용하면서 건강도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이때 집에 틀어박혀서 젊은 시절 전성기 때의 음반을 듣고 홀로 흐뭇해하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고 한다. "그래...그땐 넌 참 잘했어."

그렇게 쓸쓸히 1977년 9월 16일 아침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고, 시신은 그리스 정교 의식에 따라 진행된 장례 후 화장되어 페르 라셰즈 묘지의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유골함은 극성팬들에 의한 도난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후견인이라고 자칭한 바소 데비치라는 여인이 칼라스 생전의 유언이라며 유골을 에게해에 뿌렸다. 하지만 여기에도 또 다른 뒷이야기가 있었으니...


3. 음악 성향[편집]


그리스 시절에는 상술한 대로 달베르의 '저지'(Tiefland)와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공연한 기록도 있고, 이탈리아 경력 초반에는 하이든의 오페라[9]나 오라토리오, 모차르트의 후궁 탈출, 바그너의 파르지팔을 공연한 기록도 있지만, 일단 본격적인 커리어가 시작된 이후에는 이탈리아 낭만파 오페라만을 중심 레퍼토리로 삼았다. 다만 리사이틀이나 녹음에서는 베토벤, 모차르트, 베버, 바그너 등 독일어권 작곡가와[10] 불어권 아리아들도 종종 불렀다.

음악사적으로 칼라스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로시니, 빈첸초 벨리니, 도니체티로 대표되는 이른바 벨칸토(bel canto. 탐미주의) 오페라 레퍼토리를 20세기에 부활시킨 일이 될 것이다. 칼라스의 데뷔 당시 오페라의 대세는 푸치니를 위시한 베리스모(verismo. 사실주의) 오페라였다. 벨칸토 오페라 중 노르마나 루치아 같은 대작들은 여전히 공연이 되었지만, 루치아는 가수들의 기교 과시용 오페라로 인식되었고,노르마는 전설적인 오페라 가수들인 Rosa Ponselle (파바로티는 생전에 로사 폰셀에 대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고, 은퇴한 그녀의 자택을 여러 번 찾아가 음악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마리아 칼라스도 그 모든 것들 중 가장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우리들 중 가장 위대한 가수인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Gina cigna.Zinka Milanov등의 가수들에 의해 짧게짧게 공연되었지만, 칼라스는 안정된 고전적 벨칸토 창법과 타고난 음악성을 발휘, 구닥다리로 전락한 벨칸토 오페라의 음악적/극적 가치를 재인식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자신의 주요 레퍼토리중 하나였던 푸치니의 베리스모 오페라 토스카는 인터뷰에서 주인공 토스카의 캐릭터성과 2막에서의 2중창이 다소 인형극같다며 마음에 들지 않아 역할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같은 인터뷰에서 가수가 공연하는 오페라를 싫어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며, 자신은 항상 토스카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일단 무대에 서면 자신은 모든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밝혔다.

레퍼토리는 이탈리아 오페라로 한정되어 있지만, 역할의 성격과 목소리 특성면에서는 칼라스만큼 폭넓은 영역을 선보인 가수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스타일적으론 케루비니나 스폰티니의 고전주의 오페라부터 푸치니의 베리스모까지, 성악적으로는 콜로라투라 기교가 넘치는 루치아부터 소프라노가 부를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역할인 바그너의 브륀힐데와 쿤드리까지, 극적인 면에서는 연약한 소녀 나비부인부터 사자처럼 포효하는 메데아까지 넘나든 것이다.[11]

이런 넓은 영역을 소화할 수 있었던 건 타고난 음악적 자질과 집착에 가까운 완벽주의, 그리고 엄청난 노력의 결과였다. 그리스 시절 문단에 쓴 바와 같이, 칼라스는 그리스에서 본격적으로 성악을 배우던 시기부터 자신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진 수업 뿐 아니라 음악원 커리큘럼의 가능한 모든 과목을 청강해 가며 성악 뿐 아니라 음악 전반에 걸친 지식을 모두 습득하려고 했다. 흔히 칼라스를 연기력이 빼어난 가수라 칭하지만, 그녀는 철저히 음악을 바탕으로 드라마를 이해했지 음악적 이해의 부족을 연기로 메꾸는 가수가 아니었다.

칼라스는 각각 다른 음악적 성격과 작곡가별 스타일을 정확히 이해하는 지적인 가수였다. 1959년에 런던에서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녹음할 때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미숙한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관악 단원들에게 벨리니와 도니체티의 스타일적 차이점, 각종 장식음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가르쳐 가며 녹음을 했을 정도였다.

또 오페라에서 비음악적 표현을 동원하는 것을 싫어하던 그녀의 성향은 생애 후반이었던 1970년대에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개최한 마스터클래스에서 잘 드러난다. 젊은 성악가들에게 칼라스는 끊임없이 텍스트의 이해, 정확한 기교, 몸에 앞서 목소리로 연기할 것을 강조하고, 악보에서 벗어난 장식음이나 한숨, 웃음 같은 비음악적 표현을 집어넣으면 가차없이 제지하고 있다.

칼라스는 이런 엄격한 잣대를 자신 뿐 아니라 다른 동료 가수나 극장 매니저 측에도 똑같이 요구했고, 이는 종종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칼라스를 '해고'한 것으로 유명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극장장 루돌프 빙은 훗날 인터뷰에서 "칼라스는 내가 만난 가수 중 가장 지적이었다. 그녀는 완벽한 공연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다른 가수들처럼 적당히 설득하고 회유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극장장으로서 그런 그녀와 일하기란 무척 어려웠다."라고 회고했다. 1950년대 초반에 칼라스와 함께 녹음과 공연을 했던 카라얀도 "리허설 첫 날부터 칼라스가 악보를 들여다본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기 역할 뿐 아니라 오페라 전체를 이미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건 지휘자에게는 큰 위협이었다."라고 언급했다.

이런 위대한 성악가의 목소리가 일반적인 미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건 기묘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칼라스는 자신의 녹음을 처음 들었던 때를 회고하며 "내 못난 목소리에 너무 충격을 받아 눈이 빠지게 울었다"고 말했을 정도. 일반적으로 소프라노라면 연상되는 맑고 청량한 느낌대신, 칼라스의 음색은 기본적으로 무겁고 회색 베일에 싸인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칼라스는 적어도 전성기 때는 그런 타고난 음색을 빼어난 호흡 조절과 성악 기교로 필요에 따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래서 노르마에서 포효하던 그 목소리로 몽유병의 여인에서 고음의 기교를 무리 없이 오르내리고 나비부인에서는 놀랄 만큼 순박한 소녀의 음성을 보여줄 수 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름다웠다면 그런 폭넓은 표현력을 위해 도전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다만 목소리의 전성기가 너무 일찍 지난 것이 흠으로 지적된다. 50년대 후반에 이르면 고음이 거칠어지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60년대에 드러서면서는 총체적인 변질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목소리 변화의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은 결론이 없지만, 급격한 다이어트, 무리한 일정, 다난한 개인사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이 함께 작용했으리란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그 전설적인 연기력을 눈으로 확인할 영상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이 큰 아쉬움이지만, 이미 목소리의 전성기가 지난 시기에 촬영된 열악한 화질의 영상만으로도 칼라스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오페라 연기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하다. 62년 함부르크 리사이틀에서 카르멘을 부르는 영상, 65년 파리에서 노르마를 리허설하는 짧은 영상을 보면 호들갑스런 동작 없이 목소리와 혼연일체된 절도 있는 손 제스처와 시선 처리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그래서 칼라스와 여러 번 함께 작업한 지휘자 안토니노 보토(1896~1985)는 "칼라스를 단순히 가수로 부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무대 위 그녀는 음악가이며 배우이며 무용수이며 음유시인이다. 한 마디로 칼라스는 완벽한 공연 예술가다"라고 말했다.


4. 사후의 평가와 우여곡절[편집]


생전에 실황으로 공연을 본 사람들의 인상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EMI의 전속 아티스트로 활동하며 꽤 많은 양의 오페라 전곡 음반과 아리아집을 남긴 탓에 녹음으로나마 그 전설을 확인하려는 이들이 많다. EMI가 저작권이나 저작인접권 만료 직전까지도 리마스터링을 몇 차례고 거쳐 각종 전집 시리즈를 내놓았을 정도.

게다가 다른 가수들이라면 상상도 못할 리허설 음반이나 마스터 클래스 음반, 심지어 인터뷰 음반까지도 유통되고 있어서 그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그 외에 방송국에서 중계한 실황녹음 같은 비공식 음원이나 객석에서 몰래 녹음한 부틀렉도 이런저런 복각 전문 음반사에서 계속 출시되고 있다.(물론 개중에는 해적반도 많다.)

사후에도 이런저런 전기 영화나 연극이 나오고 있는데, 평전전기물 종류도 꽤 많은 편이다. 다만 칼라스가 원체 굴곡많은 삶을 살았던 인물인 만큼, 이들 저작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꽤 다양하게 갈라진다.

한편 씁쓸함을 남기는 반전도 있었는데, 칼라스 사후 그녀의 유언 집행인을 자처한 바소 데비치라는 여자가 사실은 막대한 유산을 노린 고도의 사기꾼에 칼라스를 죽음으로 몬 각종 비처방 약들의 제공자라는 내막이 폭로되었다. 여러 전기 작가들과 생전 지인들은 데비치가 칼라스와 친분 관계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깊지는 않았고, 매니지먼트나 유언 집행인 자격도 인정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프랑코 제피렐리는 2004년 말에 기자회견까지 열어 데비치의 행적을 맹렬히 비난했고, 억대의 소송에 봉착한 데비치가 죽기 직전 자기 몫의 유산을 마리아 칼라스 기념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하며 일단락되었다.


5. 기타[편집]


  • 칼라스는 지독한 근시였지만, 평소에 집에서 생활할 때를 빼고는 절대 안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여성성에 대해 보수적인 관점을 고수했던 그녀로서는 안경 쓴 여자는 매력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그래서 오페라 무대에서는 사실상 장님과 다를바 없었고 지휘자도 거의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매니저를 비롯한 공연 관계자들은 그녀가 행여 무대 밑의 오케스트라 피트[12]에 빠질까 노심초사했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었고, 박자를 놓치는 경우도 없었다.
  • 타고난 음악성과 엄청난 훈련량을 증명하듯이 음악 습득력이 남달랐다. 케루비니의 메데아나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 같은 작품은 일주일 만에 배워 무대에 올랐다. 가장 재밌는 일화로는 이탈리아 데뷔 공연 후 툴리오 세라핀의 초대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오디션을 보게 되었을 때. 학창시절 바그너는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지만, 오디션 기회를 놓칠 수 없던 칼라스는 그 자리에서 악보를 보며 1막 전체를 노래했다고. 세라핀이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인 뒤에야 바그너는 한 번도 부른 적이 없다는 걸 고백했고, 깊은 인상을 받은 세라핀은 그녀를 기용했다. 후에 그가 벨리니 청교도의 주역을 칼라스에게 선뜻 맡긴 것도 다 이런 경험 끝에 얻은 신뢰 덕이다.
  • 레나타 테발디와의 경쟁이 워낙 유명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소프라노들은 칼라스의 위대함을 인정했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증언에 따르면 53년 스칼라좌에서 공연한 일트로바토레를 관람 중에, 같은 박스석에 있던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가 눈물을 흘리며 '저 여자는 기적이에요'라고 말했다고. 드라마틱 소프라노로 유명한 브리지트 닐슨은 칼라스에 대한 비평을 이끌어 내려는 기자에게 '컨디션 좋은 날의 칼라스는 우리를 다 모아도 당해낼 수 없는 경지다'라고 말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7/80년대 프리마돈나로 활약한 카티아 리가렐리는 '어느 소프라노가 자기는 칼라스에 신경 안쓴다고 한다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우리 모두 아침에 일어나 오렌지주스 한 잔을 따른 뒤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칼라스 음반을 걸어놓고 '대체 어떡해야 저렇게 부를 수 있나' 궁리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 칼라스가 케루비니의 메데아 역을 처음 불렀을 때 지휘자로 등장한 인물은 미국의 기대주였지만 오페라 지휘 경력이 일천했던 레너드 번스타인이었다. 칼라스는 번스타인의 양성애 성향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서 꽤 까탈스럽게 대했다고 하는데, 자신이 내심 마음에 들어한 연출가인 루키노 비스콘티와 무대 뒤에서 썸씽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13] 하지만 공연 뒤 번스타인은 '오페라의 성서'라고 칼라스를 추켜세웠고, 이후에도 그 때의 공연이 자신의 오페라 지휘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긍정적으로 회고했다.
  • 생전에 이미 전설급 스타가 되어 거대한 팬덤 만큼이나 안티도 많았고, 덕분에 그에 얽힌 에피소드들도 많다. 그 중 유명한 몇 가지만 소개하면...
    • 55년 스칼라에서 대성공을 거둔 라 트라비아타의 커튼 콜 중 팬들이 칼라스에게 던진 꽃 사이에는 안티 팬들이 조롱의 뜻으로 던진 채소들도 섞여 있었다. 칼라스는 꽃 대신 채소를 집어들고 보란듯이 관객에게 인사를 해 멋지게 맞받아 쳤다.
    • 58년 로마에서의 노르마 공연 중단 스캔들 후 바로 다음 공연은 스칼라에서의 안나 볼레나 재공연이었다. 여론이 엄청나게 안 좋은 상태에서 관중석은 언제든 야유를 퍼부을 준비가 된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1막의 마지막 씬에서 칼라스는 안나를 체포하는 병사들을 뿌리치고 무대 앞으로 달려나가 관객들에게 직접 대사를 외친다. "안나를 체포하라! 심판하라, 당신들의 여왕을!"사람들은 칼라스의 극적 표현력에 열광했고, 극장을 떠나는 칼라스의 차를 둘러싸고 진짜 여왕처럼 환대를 했다고 한ㄷ.
    • 61년 스칼라에서의 메데아 공연 중 컨디션 난조로 제 기량을 못 보이는 칼라스에게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1막의 마지막에 자신을 배신한 이아손을 비난하는 장면에 이르러 관객을 향해 육성으로 대사를 외쳤다. "Crudel! Ho dato tutto a te! 잔인한 사람, 난 당신께 모든 걸 바쳤는데!" 관중들은 공연에 감동하여 기립박수로 답했다.
    • 6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으로 컴백하여 마지막으로 공연했던 토스카는 시작부터 몇년간 그녀를 오매불망한 팬들의 열기로 팽팽했다. 좌석은 오래 전에 매진이었고 입석표를 구하느라 사람들은 이틀 밤낮을 노숙까지 했다. 공연 날 무대 뒤에서 '마리오!'를 외치는 칼라스의 목소리가 들리고 드디어 그녀가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관중석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무려 5분여 간 지속되는 사람들의 박수와 '브라바', '비바 디비나'를 외치는 함성 소리로 공연은 잠시 중지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 중심에 선 칼라스는 내내 토스카의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미동도 없이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 74년 뉴욕,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의 듀오 리사이틀 직전 50년대부터 칼라스의 미국 공연을 매니징하던 솔 후록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렇잖아도 컴백 리사이틀 투어에 쏟아지는 대중의 관심과 언론의 악평, 무책임한 디 스테파노와의 다난한 관계 등으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있던 칼라스에겐 마지막 쥐약 같은 소식이었다. 처참한 상태로 겨우 공연을 마치고 극장을 나서는 그녀의 앞에는 언제나처럼 수많은 팬과 취재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솔 후록이 보낸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눈물을 흘리던 칼라스는 화환의 꽃을 하나 하나 사람들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곧 칼라스의 꽃을 차지하려 흐트러진 무리의 가운데에 길이 났고, 칼라스는 그 틈에 대기하던 차에 올라타 사라져 버렸다.
  • 어느 이탈리아 파스타 제조업체가 '칼라스는 우리 회사의 파스타로 다이어트에 성공했다'라고 이빨을 깠는데, 칼라스의 다이어트 식단에 파스타 따위는 없었고 소스 치지 않은 샐러드와 퍽퍽한 닭가슴살이 있었을 뿐이었다. 결국 소송드립으로 버로우.
  • 모리 카오루엠마에 나오는 묄더스가의 안주인 도로테아 묄더스의 모델도 마리아 칼라스다(이미지만). 작가 자신이 후기에서 공언.
  • 칼라스가 1971~72년에 뉴욕의 줄리어드 음대에서 성악 마스터클래스를 개최했을 때 한국의 소프라노 이규도, 박정하, 테너 박인수와 바리톤 김성길이 그녀의 수업을 들었다. 특히 김성길에게 리골레토의 아리아를 가르치는 세션은 마스터클라스 중 가장 유명한 장면으로 손끕힌다. 다소 밋밋하게 곡을 부르는 김성길에게 칼라스는 절규하는 짐승과 같은 리골레토의 심정을 직접 표현해 보이는데, 그걸 직접 지켜본 이들은 '역사상 최고의 리골레토는 여자였다'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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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녀가 한복을 한벌 가지고 있었던게 최근에야 알려졌고 의외의 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의 산탄젤로성에서 열리던 불가리 해리티지 전시회에 칼라스가 소유했던 이 한복이 전시되었는데 우연히 여름휴가차 로마로 갔던 SBS 스포츠의 정우영 아나운서가 이 전시회를 갔다가 이 칼라스의 한복이 기모노로 설명이 적힌걸 보고 현장에서 관계자에게 수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정우영 아나운서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이 일을 올려서 화제가 되고 기사화가 되면서 불가리 코리아측이 재빨리 본사에 연락해 기모노라 적힌 설명을 한복으로 수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 그녀가 언제 한복을 갖게 된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녀가 1974년에 내한해서 공연을 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이때 내한 당시에 특별히 주문했거나 선물받은 게 아닌가 추정된다.
  • 2017년에 그녀의 편지 내용, 인터뷰 장면, 공연 장면 등을 통해 그녀의 불운했던 결혼생활과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의 애정 등 이탈리아 생활 이후의 일생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아 칼라스: 세기의 디바가 프랑스에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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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탈리아 훈장. Order of Merit of the Italian Republic[2] tessitura. 해당 성역의 가수에게 자주 요구되는 음역대를 일컫는 단어.[3] 2017년 톰 볼프 감독의 다큐멘터리 <마리아 칼라스: 세기의 디바>를 보면 마리아 칼라스가 엘비라 데 이달고 선생님께 음악적으로 인간적으로 매우 고마워하는 언급이 나오고, 이달고 선생님이 칼라스에 대해서 회고하면서 학생으로서 완벽했다고 높이 평가하는 장면도 있다.[4] 칼라스의 아버지와 동갑이었다.[5] '칼라스의 노랫소리를 듣고 싶다면 공연보다는 리허설 때 오시는게 나을 겁니다'라는 투였다.[6] 오나시스가 가진 5개의 자택 가운데 3개가 뉴욕과 뉴욕의 교외에 있었다.[7] 비판 뒤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데 당시 디 스테파노의 딸이 백혈병으로 투병 중이었다. 일각에서는 그가 딸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칼라스에게 공연을 제의했다는 설이 있으나 한 시대를 풍미한 테너가 돈이 없었다는 건 루머에 가까운 것 같고 아무래도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다.[8] 결혼하기 전에는 경제적으로 의존할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극심한 불화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언니, 아버지를 차례로 돌아다니며 함께 지냈다.[9] 하이든 말년의 작품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였는데, 이 51년 피렌체 공연은 무려 세계 초연 되시겠다. 몇몇 잊혀졌던 작품들을 성공적으로 리바이벌시킨 칼라스지만, 초연 공연자로 기록을 남긴 건 이 작품이 유일하다.[10] 다만 모두 이탈리아어를 원어로 한 곡이었고, 독일어 원어 곡도 이탈리아어나 영어 개사판으로 불렀다.[11] 좀 극단적인 예로, 드라마틱에서 정통 벨칸토 레퍼토리로 넘어가던 52년 한 해에 부른 작품들만 따져도 전형적인 드라마틱/스핀토 역할인 푸치니 '토스카', 베르디 '아이다'와 폰키엘리 '조콘다', '리골레토', '멕베스',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라 트라비아타' 같이 리릭(혹은 드라마틱)에서 콜로라투라까지 두루 필요한 초기 베르디 작품들, 벨칸토 오페라들인 벨리니 '노르마', '청교도', 도니제티 '루치아', 로시니 '아르미다(기교적으로 심각학 난해한 로시니 오페라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고 평가되는)', 거기에 모짜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를 망라한다. 기술적으로나 극적으로 이렇게 다양한 역할을 한 해 동안, 그것도 상당수는 새로 배워가며 ('리골레토', '멕베스', 아르미다', '후궁에서의 도주'는 모두 이 해 한 시즌만 공연했다) 소화한 가수는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하다 할 수 있다. 이 무렵의 칼라스를 놓고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은 '역사상 여성 목소리를 위해 쓰여진 어떤 작품이라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12] 객석과 무대 사이에 관현악단이 들어가는 자리. 오케스트라 박스라고도 한다.[13] 둘 다 남성이고, 둘 다 양성애자이며 사생활도 나름 화려한 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