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

최근 편집일시 : 2023-07-03 21:24:10

마릴린 먼로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 펼치기 · 접기 ]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파일:goldenglobe.png
여우주연상 - 뮤지컬 및 코미디
제16회
(1958년)


제17회
(1959년)


제18회
(1960년)

로절린드 러셀
(앤티 맘)

마릴린 먼로
(뜨거운 것이 좋아)


셜리 맥클레인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


파일:lifeprofile.png

본명
Norma Jeane Mortenson[1]
노마 진 모텐슨
출생
1926년 6월 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사망
1962년 8월 4일 (향년 36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직업
배우, 가수, 모델
신체
168cm, 53kg[2]
활동
1944년 – 1962년
부모
어머니 글래디스 펄 먼로 (1902년 – 1984년)
아버지 찰스 기포드 (1898년 – 1965년)[3]
이부형제자매
오빠 로버트 커밋 베이커 (1918년 – 1933년)[4]
언니 버니스 베이커 미라클 (1919년 – 2014년)
이복형제자매
언니 도리스 기포드 (1920년 – 1933년)[5]
오빠 찰스 기포드 주니어 (1922년 – 2015년)
배우자
제임스 도허티 (1942년 – 1946년; 이혼)[6]
조 디마지오 (1954년 – 1955년; 이혼)
아서 밀러 (1956년 – 1961년; 이혼)
종교
무종교 (무신론)
서명
파일:마릴린먼로 서명.jpg
링크
파일:IMDb 로고.svg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트위터 아이콘.svg

1. 개요
2. 위상
3. 아이콘
3.1. 핫핑크 드레스
3.2. 화이트 드레스
3.3. 샤넬 No.5
3.4. 앤디 워홀
4. 생애
4.1. 유년기
4.2. 연예계 데뷔
4.3. 섹스 심볼
4.4. 의문의 사망
5. 연애사
6. 평가
7. 노래
8. 필모그래피
9. 미디어에서
10. 여담




1. 개요[편집]





“모든 사람은 별이고 반짝일 권리가 있다.”


“배우를 꿈꾸는 것은 배우가 되는 것보다 더 짜릿하다.”

미국의 배우이자 가수, 모델.


2. 위상[편집]



파일:marilynpic.jpg

타임지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스미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에 오른 역사적인 인물이면서 대중문화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할리우드의 황금기였던 클래식 시대의 1950년대-1960년대 초에 배우, 가수, 모델로 활동하면서 문화, 패션, 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자[7]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아티스트 중 한 명이며[8] 섹스 심볼(Sex Symbol)으로 불리며 화려한 이미지의 페르소나를 지녔으나 동시에 불운한 자기파멸적 사생활로 동정을 함께 얻는 인물이다. 또한, 젊은 나이에 의문을 남기며 사망하면서 많은 뒷 이야기를 낳았다. 금발 미녀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름 자체가 브랜드인 인물이라서 상표로 많이 사용된다. 2020년, 기준 그녀의 이름과 이미지는 샤넬, 돌체 앤 가바나, 베어브릭, 레고 등 100개 이상의 글로벌 브랜드에서 사용되고 있다.[9] 무수한 배우, 뮤지션들에게 영감과 창의력을 주며[10] 사후, 60년간 매년 ‘포브스 대중문화인 사후 수입 순위’ 10안에 들어가고 이 순위에서 거의 유일하게 들어가는 배우이기도 하다.[11] 영국의 여론조사 기관, 유고브가 전 세대에게 조사한 인지도 순위에서 미국, 영국 모든 국가에서 고전 배우 중 인지도 순위 1위에 선정되었다. 고전 배우 카테고리를 제외하고 현 시기의 배우들과 비교해도 최상위권의 순위이며, 배우로 한정하지 않은 문화계에서도 최상위권의 인지도를 기록하고 있다.


3. 아이콘[편집]



3.1. 핫핑크 드레스[편집]



▲ 끝없이 오마주 되는 핫핑크 룩
다이아몬드는 여자의 베스트 프렌드, 그리고 쨍한 핫핑크 드레스. 스크린 사상 가장 아이코닉한 페르소나 중 하나이다. 마릴린, 특유의 불멸성을 만드는 재능과 감각이 돋보인다.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의 뮤지컬 넘버 중 하나로 매우 화려한 미장센이 특징인 넘버이다. 마릴린의 신체를 잘 파악하며 능력이 뛰어난 의상 디자이너인 윌리엄 트라빌라(William Travilla)가 드레스를 디자인 했으며 드레스 룩이 쨍한 올 핫핑크인게 포인트인데 드레스 코드를 다이아몬드로 맞추었기에 다이아를 돋보이게 하는 단색의 강한 색감 패턴을 사용했다. 마릴린의 밝은 금발의 색과 대비를 이루면서 더 화려한 미장센들을 만들어낸다. 대사 속, “여자들이 나이가 들면 남자들은 차가워지지만 이 다이아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라는 대사가 있는데 현실을 물질만능주의와 비교해 풍자하고 있기도 하다. 70년이 지난, 현재도 여러 형태와 세대들에게 영감을 주며 수많은 오마주패러디를 낳았다. 또한, 여러 분야에서 2차 창작을 하며 가치관에 따라 변화시킨 경우도 많다.
※ 아래는 오마주와 패러디 된 목록[12]




파일:Mon_roe.jpg

▲ 첫 의상 디자인 스케치
▲ 현재 디자인 스케치
디자인에 대한 비하인드가 있는데, 상징적인 쨍한 핫핑크 드레스는 첫 디자인 룩이 아니었다. 영화의 컨셉과 분위기를 듣고 의상을 제작한 디자이너 윌리엄 트라빌라는 첫 번째 의상을 올 핑크의 단색보단 베이스는 핑크에 이브닝 장갑과 힐은 블랙으로 포인트를 주어서 여러 색감을 섞은 디자인을 스케치 했었다. 실제로 첫번째 디자인의 드레스로 피팅까지 해봤지만, 마릴린의 밝은 금발을 더욱 튀게끔 모든 룩을 올 핑크로 교체하고 핑크의 색감 또한, 더 진한 핫핑크로 변경했다. 핫핑크의 컬러 선택은 가장 진한편인 딥핑크보다 낮은 컬러를 선택했으며 주얼리의 매치 또한 기존보다 더 화려하게 변경되었다. 이렇듯, 마릴린은 패션계에서도 상징적인 아이콘으로 남아있다.


3.2. 화이트 드레스[편집]



파일:Marilyn-m.jpg

▲ 영화, 7년만의 외출 中
화이트 드레스 그리고 바람에 날린 스커트의 이미지는 마릴린의 대중적인 이미지이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상징이면서, 대중문화의 상징 그 자체인 아이코닉함은 세대가 바뀌어도 같은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이 흰색의 칵테일 드레스는 패션계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1950년대 당시 대부분의 여성은 드레스를 입긴 했지만 노출이 있을 수 없었고, 안전하게 코르셋으로 고정한 치마 덕에 바람에 날릴 수 없는 디자인이었다. 또한 단아함을 강조하는 드레스 였기에 마릴린의 화이트 드레스는 매우 파격적이고 과감한 디자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만큼 영향도 컸는데 이 영화가 개봉한 해인 1955년, 후에 기존 드레스 형식에서 벗어난 과감한 디자인 룩이 유행을 타게 되었다. 이 변화에 마릴린의 영향이 컸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68년이 지난, 지금 봐도 평상시 입기엔 과감한 룩이기도 하다. Vogue 매거진은 이 의상을 대중문화 사상 가장 유명한 의상 중 하나로 선정했으며 ‘Glamour’ 패션 잡지는 가장 상징적인 셀럽의 패션으로 선정했다.


파일:7yearscene.jpg

▲ 촬영 당시, 구경중인 관중들
영화 비하인드로 촬영지가 중간에 변경되었는데 첫 촬영지는 뉴욕의 한 극장 앞으로 당시, 관중들이 너무 몰려 들어서 촬영시간이 훨씬 늘어나게 되었다.[13] 바람에 스커트가 날리는 씬에선 사람들이 소리를 너무 질러대서 현장의 영상 사운드가 뭉개져, 이 부분은 도저히 쓰지 못하고 부분적인 재촬영을 할 수 밖에 없었다.[14] 두 번째 촬영지는 뉴욕 맨하튼의 지하철역으로, 극장앞보단 한산했고 새벽에 촬영을 했기에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그 유명한 아이코닉한 장면은 뉴욕의 맨해튼 거리에서 탄생된 비화가 있다. 당시, 남편인 조 디마지오는 촬영 현장에 구경을 하러 왔었는데 이 촬영씬을 정말 싫어했다고 한다. 이 씬은 몇달 후, 둘 사이의 이혼에 끼친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상징성들은 후대의 사람들 사이에서 더 많은 신화성을 만들었는데 수많은 미디어의 언급과 오마주, 패러디 그리고 상품으로 재판매되는 생산, 심지어 여러 나라에 동상까지 세워지는 등 역사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3.3. 샤넬 No.5[편집]



파일:MonRoe.png


파일:mon.Roe.png

▲ 침실에 있는 No.5
▲ 샤넬 No.5



You know, they ask me questions. Just an example: "What do you wear to bed? A pajama top? The bottoms of the pajamas? A nightgown?" So I said, 'CHANEL N°5,' because it's the truth.. and yet, I don't want to say nude. But it's the truth.

아시잖아요, 사람들이 종종 질문하는 것들.."잠 잘 때는 뭘 입으시나요? 파자마 윗옷? 파자마 바지? 아니면 나이트 가운?" 그래서 전 샤넬 No.5 라고 했죠. 사실이거든요. 누드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잖아요. 하지만, 사실인걸요.

1960년 4월, 프랑스 잡지 '마리끌레르' 와의 인터뷰.

취할 정도의 독한 향기를 좋아하며, 살결이 민감해 속옷도 걸치지 않고 나체 수면을 선호하는 마릴린은 샤넬 No.5를 예의라는 듯이 애용하고 수시로 뿌렸다. 그녀는 확실하게 No.5를 격식있는 태도로 대했다. 라이징 스타이던 1952년, 라이프 매거진(Life Magazine)과의 한 인터뷰에서 무엇을 입고 잠자냐는 기자의 질문에 마릴린은 당당히 샤넬 No.5만 입는다. 라고 답변 했었는데 당시 인기 있던 향수인 No.5를 그녀도 애용했던 것이다. 사실은, 누드 차림으로 잠을 자던 그녀는 단지 ‘누드’라는 말을 꺼내기 싫어서 간접적으로 ‘누드’를 표현하기 위한 말이었다. 마릴린의 이미지와 매우 매치됐던 No.5는 인터뷰 후 컨셉을 확고히 다질 수 있게 되었다. 인지도와 매출 또한 전보다 훨씬 높은 수치로 올랐으며 마릴린의 향수라는 이미지로, 숙녀로써의 상징이자 매혹의 향이 된 샤넬 No.5는 또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


3.4. 앤디 워홀[편집]



파일:Andymarilyn.jpg

▲ 작품, 마릴린

우리는 유명해지길 원한다

-

앤디 워홀, 인터뷰에서

마릴린의 대중문화적 아이코닉은 예술 분야로 더욱 확고해졌는데 대중문화를 이용해 더 큰 문화를 만들기를 원했던 화가, 앤디 워홀은 미술에 팝컬쳐를 결합시켜 팝아트를 만든 후, 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현대 미술은 예술로서 대우받지 못했을 때, 가장 상업적인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철학으로 예술을 깬 것이다. 대중들이 만드는 예술을 위해선 대중문화가 필요했는데 그런 마릴린은 상징성이 뛰어났고 앤디 워홀은 그녀를 선택했다. 1962년 8월, 마릴린이 사망한 후 단 3주만에 그녀와 관련된 첫 작품이 완성하게 된다. 사용된 이미지는 영화, ‘나이아가라’의 스틸컷으로 흑백 사진이었지만 컬러를 입혔다.

▲ 화가, 앤디 워홀
첫 작품명은 마릴린 딥티크(Marilyn Diptych)으로 50개의 같은 이미지를 각각 25개씩 컬러, 흑백으로 나눠 죽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또한 같은해에, 골드 마릴린(Gold marilyn) 이라는 또 다른 그녀 관련 작품을 발표했는데 마릴린의 얼굴 사진을 중앙에 넣은 뒤, 금색 캔버스에 복사했다. 그 중 1964년작 작품, 마릴린은 매우 인지도가 있고 대중화 됐는데 앤디 워홀의 작품 중 깡통 캔과 함께 가장 아이콘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실크스크린을 이용해 같은 이미지를 다른 색깔로 여러 번 입혀서 다품종 대량 생산을 한 걸로도 유명하다. 이 작품은 한국 미술 교과서에 지정 작품인 만큼 대중적 인지도가 매우 높다. 물론 미국의 미술 교과서에도 필수요소로 실리고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대부분의 선진국 국가에서 실리는 미술사의 입지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앤디 워홀이 바란대로 상품과 생산성을 대표하기도 하는데 끝없이 재창조되는 물질의 표본 중 하나이다. 인테리어 부분에서도 매우 인지도가 높고, 각종 회사들과의 콜라보레이션도 정말 활발하게 진행됐으며, 현재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다. 대중문화의 대량생산은 더 큰 문화를 만들어 그녀를 더욱 더 입지적인 아이콘으로 만들었다.[15]


파일:Marilyn-.jpg


파일:MARILYN.jpg

▲ 마릴린 딥티크
▲ 골드 마릴린
1962년, 발표된 첫 작품인 마릴린 딥티크(Marilyn Diptych)와 같은해, 발표된 골드 마릴린(Gold marilyn).


파일:kylieJ.jpg

▲ 카일리 제너 집 인테리어
평소, 마릴린을 존경하는 카일리 제너는 집 인테리어로 여러색과 다수의 작품, 마릴린을 선택해 매치했다.


4. 생애[편집]



4.1. 유년기[편집]



▲ 유아기
1926년 6월 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로스앤젤레스에서 이름, 노마 진(Norma Jeane) 으로 태어났다. 할리우드에서 편집기사로 일하던 정신장애가 있는 모친, 글래디스 펄 먼로(Gladys Pearl Monroe)와 부친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기에 사생아로 인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어머니인 글래디스는 1902년 5월 27일, 멕시코에서 출생했는데 멕시코인은 아니고 마릴린의 할머니인 델라 먼로(Della Monroe)아칸소주 출신이며 할아버지인 오티스 먼로(Otis Monroe)미니애폴리스 출신의 미국인이기에 마릴린의 어머니는 순수 유럽계 미국인이다. 부모의 사업 문제로 잠시 멕시코에서 살게 된 후 글래디스 가족은 곧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1917년, 15살 때 9살 연상의 첫 남편 재스퍼 베이커(Jasper Baker)와 결혼하여 성을 베이커로 변경하고 1918년, 마릴린의 이부 오빠인 로버트 커밋 베이커(Robert Kermit Baker)와 연이어 1919년, 이부 언니인 버니스 이네즈 베이커(Berniece Inez Baker)가 태어나게 된다. 남편인 재스퍼는 다혈질이며 폭력적이었는데 글래디스에게 자주 욕을 하며 폭력을 휘둘렀고 자녀들에게도 폭력을 사용해서 1921년, 글래디스는 이혼 소송을 진행해 단독 양육권을 성공적으로 얻었지만 재스퍼는 일방적으로 그의 고향인 켄터키주에 아이들을 납치해가서 키운다.

1924년, 노르웨이 출신의 이민자 마틴 에드워드 모텐슨(Martin Edward Mortensen)[16]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이 둘은 1년 후 별거를 하게 되고, 곧바로 글래디스는 일하던 영화사인 RKO 픽처스의 직속 상사, 찰스 기포드(Charles Gifford)와 연인 사이가 되었다. 글래디스는 RKO 픽쳐스에서 일하던 중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그 후 마틴과 글래디스는 공식적으로 이혼을 한다. 1926년, 셋째이자 마지막 아이인 마릴린이 태어나지만 애매한 시기에 태어나 아버지가 밝혀지지 않았다. 마틴과 찰스 이 둘이 마릴린의 아버지로 추정되는데 당시, 남편이었던 마틴은 역사학자들에게 가장 높은 확률의 아버지로 추정되었으나, 96년만에 DNA 검사결과로 찰스 기포드가 아버지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마릴린은 아버지에 대한 존재를 많이 그리워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아버지 대신 여겼다고 한다. 어머니인 글래디스는 정신적, 재정적으로 아이를 키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유아기의 마릴린은 안정적이고 행복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없는 이유를 자주 물었으며 부족한 애정에 외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어머니의 직업상 문제로 마릴린은 캘리포니아주의 시골 마을, 호손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인 양부모 아이다, 알베르트와 6개월간 함께 살게 되었다. 주말엔 글래디스가 직접 방문해서 마릴린을 보살폈는데 1933년, 여름 글래디스는 대출을 받아 할리우드에 있는 작은 집을 구입해 7살이던 마릴린과 함께 살게 된다. 하숙인으로 무명 배우들을 받아서 그들과 함께 지냈다. 1934년, 1월 글래디스는 애초부터 앓고 있던 정신분열증편집증을 공식적으로 진단받은 후 결국 몇개월 같이 살지도 못하고 곧, 단계적으로 요양원과 메트로폴리탄의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8살의 마릴린은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여 국가에서 보호자의 권한을 대신 가졌고 곧, 어머니의 친구인 그레이스 고다드(Grace Goddard)가 보호자로 보살피게 된다. 마릴린은 안타깝게도 유아기를 지나 성장기가 될 쯤 큰 상처들을 받았는데 이 시기의 4년간의 생활은 불안정하며 불우했었다. 처음 16개월간은, 또 다른 지인인 존 앳킨스(Jon Atkinson)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존에게 첫 성적 학대를 당하게 된다. 당시, 겨우 8살이었다. 수줍음이 많았던 마릴린은 학대 후, 일시적으로 말더듬을 하며 발작을 일으켰고 태도 또한 더욱 소극적이고 움츠러 들었다. 그 후, 어머니의 친구인 그레이스와 남편 어윈, 및 다른 두 가족과 한달 간 함께 살았는데 이 시기에도 어윈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알려진다.

한달 후, 그레이스는 마릴린을 로스앤젤레스의 한 고아원에 맡기게 된다. 그 고아원은 모범적인 기관으로 평가 받은곳이지만 마릴린은 버려진 느낌을 받았고 잘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마릴린이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고아원 직원의 의견으로 그레이스는 1936년, 정식으로 법적 보호자가 됐지만 1937년, 여름까지 고아원에서 마릴린을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 그 후, 그레이스의 가정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이 곳에서 두 번째로 머문 기간은 몇 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레이스의 남편인 어윈이 마릴린을 성추행 한 것을 들켰기 때문이다. 또, 거주지가 바뀌어야 하는 마릴린은 슬럼가인 콤프턴에서 사는 친척, 그레이스의 친구들 사이에서 짧은 기간 여러 가정의 계속된 변화에서 살아야 했다.

▲ 청소년기
마릴린이 처음으로 배우가 되고 싶어한 이유는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이었는데 한 위탁 가정에서 그녀를 집에서 나가게 하려고 영화관에 자주 보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영화관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었다. 스타가 되고 한 인터뷰에서 ''저의 주변 세상이 암울했기 때문에 뭐든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이것이 연기라는 말을 했을 때 기뻤기에 저는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되고 싶었습니다.” , “앞엔 너무 큰 스크린이 있지만 뒤엔 작은 아이 혼자 있는 것을 나는 사랑했다.”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1938년, 또 다른 가정에서 그레이스의 이모이며 노인인, 아나와 함께 몇 년간 지속적으로 살게 된다. 아나는 마릴린을 중학교에 등록해 학교에 다니게 했고 함께 매주 기독교 예배에 나갔었다. 학창시절, 마릴린은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글쓰기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학교 신문에 직접 쓴 글을 여러번 기고했다고 한다. 노인이던 아나의 건강 문제로 1941년, 다시 그레이스와 함께 살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의 반 누이스로 돌아왔는데 같은 해, 반 누이스의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한다. 1942년, 직업상의 문제로 그레이스 가정은 웨스트버지니아주로 이주해야 했지만 캘리포니아주의 아동 보호법은 그레이스가 마릴린을 주 밖으로 데려가는 것을 막았기에 같이 이주하지 못한다.

마릴린은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 해결책으로 같은해, 6월 19일 고등학교 연극부 선배이며 이웃이던 21살 항공사 정비공 제임스 도허티(James Dougherty)와 결혼을 한다. 결혼과 함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주부의 삶을 살았는데 1943년, 제임스가 군에 입대하자 군대 근처 지역인 산타 카탈리나에서 그의 부모와 함께 집을 옮기며 살게 된다. 1944년, 제임스가 태평양으로 보내져 제임스의 부모는 이전 집으로 이주를 했고 마릴린 혼자 2년간을 산타 카탈리나 집에서 살았었는데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으로, 미국은 총력전 양상인 국민개병제를 실시해 여성들은 대부분 군수물자를 만드는 업무를 해야 했기에 반 누이스에 있는 국가가 운영하던 방위산업체에서 노동을 하게 된다.


4.2. 연예계 데뷔[편집]



파일:mmblack.jpg

▲ 신인 시절, 포토북
1944년 말, 마릴린은 부대 사진작가인 데이비드 코노버(David Conover)을 만나게 된다. 그는 미군 부대 소속으로 주로 핀업 걸 사진이나 홍보용 사진을 찍었는데 그녀가 일하던 산업체에 파견을 와서 사진을 찍게 된다. 이때, 마릴린의 첫 커리어가 시작되는데 데이비드의 눈에 띄어 첫 모델링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 당시, 다양한 컨셉으로 사진 촬영을 하면서 특히, 좋은 반응을 얻은 건 달력의 누드 모델링이었다. 이것으로 좋은 반응을 얻자 1945년 1월, 산업체에서 일하는 것을 그만두고 데이비드와 그의 친구들이 소속된 곳에서 전문적인 모델링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 곳에서 주로 핀업 걸 모델로 활동한 후 독립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같은해, 모델 전문 에이전시와 계약을 체결한다.

이때 많은 외형적 컨셉들이 변경되는데 마릴린의 기존 헤어색은 태어날 땐 연한 금발이지만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진한 갈색으로 변한 갈색모였다. 에이전시와 그녀 스스로가 선택을 하여 헤어색을 금발로 염색하게 된다. 금발의 마릴린은 갈색모인 전의 모습보다 훨씬 튀었기에 컬러 체인지는 대성공이었고, 본인도 매우 만족했다고 한다. 또한, 에이전시는 마릴린의 외형이 하이 패션 모델보다 핀업 모델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해 촬영한 광고는 주로 남성 잡지에 실렸다. 에이전시의 소유주인 에밀란 스니블리(Emmeline Snively)는 마릴린에게 자주 모델들 중 가장 야심차고, 열심히 일하는 모델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1946년 초까지 U.S. Camera, Pageant, Laff, Peek와 같은 유명 잡지의 표지 모델로 실리기도 했으며 이때, 총 33개 잡지에 실린다.

에밀란의 적극 추천으로 같은해 6월, 정식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의 첫 스크린 테스트를 보게 되는 기회를 얻었다. 당시, 여러 스튜디오들과 테스트를 봤는데 첫 번째는 영화사, 파라마운트 픽쳐스였지만 처음에 많이 긴장한 마릴린은 인터뷰를 실패한다. 그 후, 20세기 폭스의 임원인 벤 라이언(Ben Ryan)에게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는데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 1946년 8월, 6개월간의 계약을 맺게 된다. 이전부터 꿈이었던 배우로 활동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20세기 폭스에서 6개월간의 수습기간을 거치며 연기노래, 을 배우고 영화 제작 과정을 공부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이 당시, 수습생 기간으로 스튜디오에서 거의 돈을 받지 못해 다른 사설 잡지의 모델로 활동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예명, ‘마릴린 먼로’. 첫 활동 시작으로 공식 예명을 짓는데 1920-1930년대에 유명했던 브로드웨이 스타인 마릴린 밀러의 이름과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인 먼로를 결합해 짓게 된다. 또한 1946년 9월, 연기 경력에 반대하는 남편인 제임스와 이혼을 한다.

1947년, 재계약을 갱신하게 된 후 영화, 위험한 해(Dangerous Years)와 스쿠다 후(Scudda Hoo) 등에 단역으로 출연하여 스크린에 첫 데뷔를 하게 된다. 또한, 스튜디오에선 전문적인 체계를 가르치는 연기 스쿨이었던 Actors' Laboratory Theatre을 다니게 해 연기의 기본을 배우게 된다.[17] 하지만 학교의 연기 선생님은 마릴린이 너무 수줍어 하며, 정서적으로 불안하다고 생각했고 폭스사는 계약 만료 후, 추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는다. 계약 해지 후, 주로 뮤지컬 무대 뒤에서 춤추는 아주 작은 역할이나 잡지사의 모델링 활동을 하며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 이 힘든 시기는 배우가 되고자 하는 큰 결심을 갖게 했다고 한다. 연기를 계속 배우고 싶어서 사비로 연기 스쿨인 Actors' Lab을 계속 다니게 된다. ‘Glamour Preferred’ 라는 연극을 했었지만 적은 횟수의 공연 후 연극은 끝이 났다.

그 후, 마릴린은 연기 만큼이나 파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인맥을 쌓기 위해 프로듀서 사무실을 자주 방문하거나, 가십 칼럼니스트들과 친구가 됐으며, 폭스사의 관행이기도 했던 스튜디오의 영향력 있는 남성 손님을 접대 했다고 한다. 또, 이 당시 유명 프로듀서였던 조셉 셴크(Joseph Schenck)와 친구이자 연인관계가 되었고 다른 할리우드 스튜디오인 컬럼비아 픽쳐스의 간부, 해리 콘(Harry Cohn)과 친분을 갖게 된다.[18] 또한, 1955년까지 멘토이자 전담 연기 지도자로 함께할 연기 코치인 나타샤 리테스(Natasha Lytess)와 함께 일하며 연기의 기본을 다진다. 1948년 컬럼비아 픽쳐스에서 영화를 촬영하게 되는데 저예산 뮤지컬, 숙녀들의 합창(Ladies of the Chorus)으로 인생 첫 주연을 맡게 된다. 다른 영화의 주연을 위해 스크린 테스트를 봤지만 컬럼비아와의 계약은 1948년 9월, 해지된다.

그 후, 잠시 모델 일을 하게 되는데 맥주사의 광고 모델로 활동했었고, 존 바움가르트(John Baumgarth)의 달력 촬영에선 예술적인 누드 모델로 포즈를 취하기도 했었다. 이전에, 얼 모란(Earl Moran)과 같은 다른 예술가들을 위해 누드 또는 비키니를 입고 포즈를 취한 적이 있어서 나체에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모델 일을 하던 중 유명 에이전시이던 윌리엄 모리스 에이전시(William Morris Agency)와 계약을 맺게 되었고, 에이전시의 부사장인 조니 하이드(Johnny Hyde)와 깊은 관계인 파트너가 된다.

파일:3cdc2223.gif

▲ 1951년, 라이징 스타 시절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이브의 모든 것(All About Eve), 느와르 장르의 아스팔트 정글(The Asphalt Jungle)을 포함한 여러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해 배우로서의 자질을 인정받는다. 마릴린의 스크린 시간은 단, 몇 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여러 비평가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이 후, 모델겸 배우에서 전문 배우로 효과적인 변화를 얻게 된다. 곧바로 20세기 폭스와 7년 장기계약을 맽었는데 여담으로 많은 도움을 준 부사장, 조니는 계약 성공 불과 며칠 후에 심장마비로 사망해 마릴린은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1951년, 적당히 성공한 폭스사의 코미디 영화, ‘As Young as You Feel’, ‘Love Nest’, ‘Let's Make It Legal’ 에서 조연으로 출연하게 된다. 세 편의 영화, 모두 일정하게 백치미 배역으로 나왔지만 비평으로부터 뛰어난 코미디적 능력을 호평받는다. 관객들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매우 높아졌는데 일주일에 수천 통의 팬레터를 받았고 한국전쟁 당시 미군들의 선호도 투표인 신문명, 성조기에서 1위인 ‘미스 치즈케이크’로 선정됐으며 1952년,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는 마릴린을 ‘최고의 신인 박스오피스 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같은해 3월, 전에 촬영한 달력 누드 화보가 공개적으로 알려졌을 때 스캔들의 중심에 있게 된다. 대처로 당시 재정 상태가 파산했음을 강조하며 대인배답게 당당히 인정했다. 이 스캔들은 마릴린에 대한 관심을 많이 증가시켰고, 인기배우들을 제치고 최고의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찍은 세 편의 영화인 ‘Clash by Night’, ‘Don't Poor to Knock’, ‘We're Not Married’은 대중의 관심에 맞게 곧바로 개봉하게 된다. 마릴린은 섹스심볼적인 인기에도 더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싶어했는데 정극 연기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직접 선택을 하여 더 다양한 역할을 맡게 된다. 영화, ‘Clash by Night’ 에서는 생선 통조림 노동자 역을 연기했는데 배역 공부를 위해 생선 통조림 공장에 직접 가서 연기 공부를 했을 정도였다. 한편 다른 영화에서는 성적 매력을 강조하는 코미디 역할을 계속 했었다. 가십 칼럼은 마릴린을 1952년, 최고의 It Girl 으로 선정했다.


4.3. 섹스 심볼[편집]



파일:2d533985.jpg

▲ 1953년, 매체와의 인터뷰 후
1953년은, 마릴린의 배우로서의 커리어에 가장 중요한 해 임이 분명하다. 작년엔 큰 주목을 받은 라이징 스타라면 올해는 세계적인 톱 스타가 된 해이기 때문. 1953년, 출연 영화는 총 세 편으로 첫 개봉작은 느와르 장르의 나이아가라(Niagara)로 남편을 죽이려는 팜므파탈 배역을 연기했다. 이 영화는 그녀에게 여러면에서 상징적인데 첫 대형 영화의 주연을 맡았고, 이로 인해 큰 인기를 얻어 세계적인 섹스 심볼이 되었으며 외모 또한 컨셉을 더욱 화려하게 변화해 흑색의 아치형 눈썹, 창백한 피부, 짙고 긴 , 각진 입술 표현, 더 진한 레드 컬러의 립스틱 사용 등 현대의 사람들이 알고있는 메이크업을 이때 하게 된다. 또한, 그녀의 커리어에서 가장 노골적인 성적 영화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 중 양 쪽 골반과 엉덩이를 흔들며 걸음을 걷는 30초 롱 샷은 영화 마케팅에 많이 사용되었고 ‘먼로 워크’ 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기도 했다. 비하인드론, 하이힐의 바닥 한 면을 다른 면보다 짧게 갈아서 다른 높낮이에 따라 골반, 엉덩이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개봉했을 때 소수의 영화계 관계자는 공개적으로 저속하다고 비난했지만 관객들에겐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영화 평론 잡지인 버라이어티는 “진부하고, 병적.” 이라며 혹평했지만 뉴욕 타임즈는 "폭포와 마릴린은 볼 만하다." 라고 호평했다.

두 번째로 개봉한 풍자 뮤지컬 코미디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는 마릴린의 스크린 페르소나를 금발 백치미로 확립하게 만들었다. 배우, 제인 러셀(Jane Russell)과 공동 주연으로 두 명의 다른 욕구지향적 쇼걸에 초점을 맞추는데 마릴린 배역의 로렐라이는 물질, 제인 배역의 도로시는 외모를 중시. 서로 다른 욕구를 원하지만 결론은 하나의 우정이 중요하다는 의미있는 내용이다. 흥행 또한, 뛰어나서 몇 년 간 그녀의 경력 중 가장 크게 상업적으로 흥행한 영화가 된다. 또, 영화 속 뮤지컬 넘버인 ‘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의 큰 인기로 여성 패션계에도 큰 영향력을 끼쳤는데 주된 팬들 대부분이 남성이던 마릴린은 이 영화로 남성과 여성 관객 모두에게 인기있는 스타가 될 수 있었다.

세 번째 개봉작인,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방법(How to Marry a Millionaire) 에선 제목 그대로 부자와 결혼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자들의 스토리로 마릴린의 배역은 전형적인 백치미 캐릭터인데 이 배역이 특별하거나, 영화의 수준이 높은건 아니지만 영화 속, 마릴린의 귀여운 모습들과 세련된 수십벌의 드레스를 입는 런웨이씬, 그리고 뉴욕 특유의 인테리어가 볼만하다. 의외로 기술적으론 매우 중요한 영화이다. 당시, 50년대 TV가 전 가정에 보급된 직후 영화의 위상은 크게 피해를 입게 된다. 어느 정도냐면, 영화계가 대부분 망하고 TV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말들이 많았을 정도. 뒤이어 나온 영화들 중 명작들이 많았고 TV의 심각한 수준저하로 곧 그런 말들은 알아서 사라졌지만 초반엔 심각한 문제였다. 그때, 이 영화는 스크린의 최첨단 기술인 ‘Cinema Scope’ 으로 개봉한 단, 두 번째 영화였다. 중요한 시기에 영화계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후에 명감독, 마틴 스코세이지가 감사를 표했을 정도다.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해 개봉한지 2주도 지나지 않아 올해의 가장 큰 흥행작 중 하나가 되었다. 놀라운 건 1953년, 개봉한 3편의 영화 모두 그 해의 박스오피스 차트 10위권 안에 들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얼마나 마릴린의 독보적인 시대였는지 알 수 있다. 1953, 1954년에 남녀 포함 연간 박스오피스 매출이 높은 10대 배우에 이름을 올렸고 소속 스튜디오인 폭스사에 가장 큰 소득을 벌어 주는 대표 배우가 되었다. 같은해, 12월 휴 헤프너플레이보이 창간 호의 표지 모델과 잡지 안에 마릴린을 선정했는데 잡지 안엔 전에 논란이 되었던 누드 화보 여러장이 들어있었다. 덕분에 플레이보이 창간호는 엄청난 대량의 수가 팔렸는데 그 해 잡지 중 가장 많이 팔린 출판부수라고 한다. 단, 마릴린은 출판에 동의하지 않았고 어떠한 금전적 이득을 받지 못했다.

폭스사의 가장 큰 스타가 되었지만 웃기게도 그에 걸맞는 계약으로 변경되지 않았다. 신인시절 받던 조건들을 스타가 된 후에도 그대로 유지했다는 뜻. 다른 스타들보다 훨씬 적은 급여를 받았고 뜻대로 스케줄 또한 선택하지 못했다. 스튜디오는 마릴린에게 걸맞는 대우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 또한, 핀업이나 성적인 배역에 출연하지 않으려는 마릴린의 의지를 매우 싫어했으며 영화사의 간부인 데릴 자눅(Darryll Zanuck)은 개인적으로 항상 마릴린을 무시했다고 한다. 결국, 폭스사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엔터 장르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해서 엔터 외의 영화들을 모두 취소시킨다.

1954년, 첫 작품으로 영화사가 선택한 뮤지컬 코미디 영화, ‘The Girl in Pink Tights’을 촬영하길 거부하자 폭스는 마릴린을 정직 처리했다. 이 소식은 1면 뉴스였고 폭스의 과격한 부정적인 홍보에 대응하기 위해 유명 변호사 수십명과 친한 칼럼니스트의 도움을 받아 조치를 취한다. 곧, 전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결혼식은 샌프란시스코 시청에서 진행해 수만명의 관중들이 모여 들어 큰 화제가 되었다. 그 후, 신혼 여행으로 일본을 갔는데 당시, 한국전쟁 중으로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들을 위해 마릴린, 홀로 한국에 입국해 4일 동안 60,000명 이상의 미군 앞에서 자신의 영화에 나왔던 노래들을 부르며 위문공연을 하게 된다. 이 소식은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환호와 지지를 받으며 본국으로 돌아온 후, 마릴린의 이미지는 매우 호감이 된 계기가 되었다.

곧, 폭스사와의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단독 제작권 보유, 보너스 $100,000 그리고 브로드웨이 히트작을 영화화한 7년만의 외출의 주연 배역을 약속받으며 걸맞는 대우를 받게 된다. 다음 작품으로, 서부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이 개봉하게 되지만 마릴린은 ‘Z급 카우보이 영화’ 라고 부르며 개인적으로 싫어했다. 하지만, 관객들에겐 인기가 있었고 흥행엔 성공한다. 그 뒤, 뮤지컬 장르인 쇼 비즈니스 같은 비즈니스는 없다(No Business Like Show Business)을 찍게 된다. 마릴린은 매우 찍기 싫어했지만 전에 거절했던 뮤지컬 코미디 영화, ‘The Girl in Pink Tights’ 대신 폭스사에서 영화 촬영을 요구했다. 개봉 후, 많은 비평가들의 혹평들과 흥행 또한 성공하지 못한다.

곧바로 촬영을 시작하게 된 명감독, 빌리 와일더의 코미디 영화 7년만의 외출에선 마릴린을 대표하는 아이코닉한 장면이 만들어지게 된다. 배역은 이웃인 유부남의 성적 환상 대상이 되는 여성인데 배역의 이름도 없고 단지, ‘윗층 여성’으로 표현된다. 영화사는 바람에 스커트가 날리는 상징적인 장면을 사전 홍보에 사용하기로 결정했고 50년대 심한 제재로 기존 촬영분을 전면 삭제해 영화상에선 노출이 심하지 않고 사진의 이미지가 유명하다. 영화는 1955년, 개봉 후 그녀의 가장 큰 상업적 성공작이 되었다. 곧, 할리우드를 떠나 캘리포니아주의 동쪽 해안으로 잠시 이주하게 된다. 그 곳에서 여성 배우 최초의 독립적인 프로덕션 Marilyn Monroe Productions(MMP)을 설립한다. 설립 이유에 대해 "동일한 배역에 지쳤다."와, “폭스사가 제대로 된 의무를 하지 않았기에 더 이상 계약을 하지 않는다.” 라고 밝혔다. 이 설립은 1955년, 시작된 마릴린과 폭스사의 1년 간의 법적 투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와중에 미디어들은 마릴린을 크게 조롱했으며, 여러 브로드웨이, TV에선 주로 ‘자신의 제작 회사를 설립하는 멍청한 여배우’ 역할로 패러디를 해댔다.


파일:cca50.jpg

▲ 1956년, 뉴욕의 액터스쿨에서
MMP를 설립한 후, 뉴욕맨해튼으로 이사해 깊게 연기에 대해 공부하게 된다. 유명 연기 지도자인 리 스트라스버그가 운영한 액터스쿨을 다니며 일반 학생들과 함께 연기 수업을 들었는데 오래된 연기 코치이던 나타샤를 리의 부인인 파울라 스트라스버그(Paula Strasbergs) 으로 교체하고 파울라는 남은 연기 경력 동안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또, 배우가 스스로 자신의 감정적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연기에 사용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이때부터 정신 분석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MMP는 홀로 영화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고 폭스사 또한 마릴린과 함께 일하기를 원했기에 새로운 7년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4편의 영화 제작비로 4000만 달러 지불과 자신의 프로젝트, 감독, 촬영 감독을 선택 가능 그리고 폭스사에서 완성된 영화당 MMP에서도 영화를 각각 만들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된다. 결론적으로 폭스사와의 소송은 마릴린의 승리가 되면서 미디어들은 스튜디오와 싸우기로 한 결정에 대해 호의적인 기사들을 썼는데 타임지는 ‘슬기로운 사업가’ 이라고, 룩(Look)은 "이 승리는 앞으로 무리에 맞서는 개인의 본보기가 될 것” 이라며 타이핑 했다.

새 계약에 따른 영화, 버스 정류장(Bus Stop)의 촬영을 시작했는데 과하게 집착하는 순진한 카우보이에 의해 스타의 꿈이 복잡해지는 가수 셰리 배역을 연기했다. 역할을 위해 새로운 억양을 배웠고 이전 영화와는 다른 메이크업과 의상을 선택한다. MMP의 책임자인 마릴린이 직접 기술적인 문제들을 책임지고 촬영에 대한 많은 결정을 내렸는데 처음엔 의문을 가졌던 감독, 조슈아 로건(Joshua Logan)은 이런 모습들을 보고 곧 견해를 바꾸었다고 한다. 심지어, 코미디비극을 자연스럽게 혼합하는 마릴린의 능력을 찰리 채플린과 비교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극작가, 아서 밀러와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되는데 유대인인 그를 따라 함께 유대 의식을 가졌다. 또, 결혼과 동시에 무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했고 이에 이집트는 마릴린의 모든 영화 상영을 금지한다. 영화, 버스정류장은 개봉 후 흥행에 성공하는데 연기 또한, 비평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마릴린은 처음으로 연기 시상식인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 후 폭스사의 어떤 제재없이 MMP의 첫 독립 프로젝트, 왕자와 무희(The Prince and the Showgirl)을 영국에서 촬영한다. 로렌스 올리비에가 감독, 공동 제작, 공동 주연을 맡았는데 둘은 촬영 내내 의견 차이로 갈등을 겪는다. 한 일화로, 로렌스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섹시하기만 하면 된다." 라고 마릴린 면전 앞에서 말했으며, 마릴린 배역에 대해 원래 배역을 맡기로 했지만 교체된 아내, 비비안 리의 무대 해석을 그대로 복제하길 원했다. 또 세트장에서 연기 코치인 파울라의 존재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릴린은 비협조적이었고 의도적으로 지각했으며 결국엔 로렌스에게 “당신이 당신의 아티스트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라는 명언을 하게 된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촬영은 예정 날짜대로 완성됐는데 개봉 후, 애매한 평가를 받았다. 미국 관객들에겐 인기가 없었지만 유럽에선 좋은 평가를 받아 이탈리아 영화제 David di Donatello 상, 프랑스 영화제 Crystal Star 상을 수상했고 영국BAFTA에 지명되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후, 가정 생활에 집중하기 위해 18개월의 휴식기를 가지는데 주로 뉴욕맨하탄, 코네티컷, 롱 아일랜드에서 시간들을 보냈다. 휴식기가 끝나고 할리우드로 돌아와 감독, 빌리 와일더젠더 주제 코미디 영화인 뜨거운 것이 좋아을 촬영한다. 이 영화는 주제가 젠더이며 50년대 보수적인 사회에 여장남자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선택해 큰 화제를 받은 작품이다. 여장남자 영화의 시초가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의 완성도 또한 매우 높아 1950년대를 대표하는 명작이다. 마릴린은 배역, 슈가의 역할이 또 다른 백치미 금발이라고 생각했지만 남편, 아서의 격려와 표준 급여 외에 영화 수익의 10%를 보너스로 제안했기에 수락한다. 이 영화의 제작은 이후 영화계의 매우 유명한 일화가 됐을 정도로 복잡해지는데 마릴린은 지인에게 이 작품을 침몰하는 배에 비유했고, 장면 중 바보같은 부분들을 제대로 변경해 달라고 자주 요청해 감독, 제작자들과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마릴린의 무대 공포증과 불안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결론적으로, 감독인 빌리는 마릴린의 연기에 대해 만족하면서 "누구나 대사를 기억할 수 있지만, 아티스트가 실제 세트장에서 대사를 알지 못해도 중요한건 자신의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 , “마릴린은 코미디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그녀 아니면 누가 이 역할을 완벽히 소화하겠냐.” 라며 마릴린의 연기를 칭찬했다. 개봉 후, 엄청난 상업적인 성공을 했는데 그 해 박스오피스 3위를 기록했다. 마릴린의 전 필모그래피 중 흥행 1위작이기도 하다. 연기 커리어에서도 가장 높이 평가되어 첫 연기상인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미국 의회도서관 영구 보존 영화이며, 각종 영화 관련 순위에 항상 들어가는 명작 대우를 받고 있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7년만의 외출이 마릴린의 스타로서 대표되는 작품이라면 뜨거운 것이 좋아배우로서 대표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다음 작품으로, 1959년 말쯤 뮤지컬 코미디 장르의 사랑을 합시다(Let's Make Love)을 찍었는데 촬영 중, 공동주연인 이브 몽땅과 깊은 사이가 되었다. 이를 영화사가 홍보 목적으로 사용해 언론에 이 사실을 직접 풀었지만 흥행엔 성공하지 못하고 비평 또한, 진부하다며 온갖 혹평을 쏟아냈다. 마지막 완성작으론, 남편인 극작가 아서가 극본을 직접 써서 마릴린에게 선물한 흑백영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으로 세 명의 나이 든 카우보이와 친구가 된 최근 이혼한 여성 배역을 연기했다. 촬영 할 당시, 사생활에서 매우 힘든 시기였는데 둘의 결혼 생활은 최악으로, 사실상 끝이 난 상태였고 이 둘은 촬영이 끝날 때까지 내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특히 약물, 불면증 등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된 마릴린에겐 매우 힘든 시기였다.

1961년, 이 영화는 개봉 후 흥행에 실패한다. 극작가인 남편 아서가 직접 배역을 썼지만 비평가들은 캐릭터 개발이 매력적이지 못하며, 공허하면서 이해할 수 없다고 주로 캐릭터의 문제를 제기하며 혹평했다. 하지만, 21세기에 와서 더 호의적인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곧, 둘은 이혼을 했고 그 후, 건강 문제로 마릴린은 6개월의 휴식기를 가지는데 로스앤젤레스 브렌트우드 부촌 지역의 새로운 집을 구입해 그 곳에서 건강을 회복하며 지냈다. 1962년 봄, 6개월간의 휴식 후 마릴린 스스로 촬영에 의욕적이어서 활발히 다음 영화 제작이 진행됐지만 촬영 시작 며칠 전에 축농증에 걸렸다. 촬영을 연기하라는 의학적 조언에도 불구하고 폭스사는 계획대로 강행했는데 마릴린은 너무 아파서 6주간 대부분 일할 수 없었고 여러 의사의 확인에도 폭스사는 스튜디오를 속이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언론에 주장하며 촬영을 진행시킨다.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작이 된 ‘Something's Got to Give’ 에서 누드로 수영하는 장면을 촬영했는데 스크린 사상 메이저 스타의 올 누드 촬영신은 처음이라고 한다. 마릴린이 다시 며칠 간 병가를 원하며, 촬영 중 뉴욕으로 가서 대통령의 생일파티에 참석해 스캔들을 일으킨 대가로 폭스사는 마릴린을 해고하고 75만 달러의 손해 배상을 청구한다. 그 배역은 다른 배우로 교체됐지만 상대 배우인 딘 마틴이 마릴린 이외의 배우는 거부하자 폭스는 그 또한 고소한 후, 촬영을 자체 중단한다. 폭스사는 보복으로 마릴린이 영화계의 종말을 고한다며 공개적인 비난을 했으며, 온갖 부정적인 악담으로 평판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변덕스럽게도 폭스사는 그 결정을 후회하고 다시 마릴린과 협상을 재개했는데 위 영화의 촬영 진행과 새로운 영화의 주연 배역을 약속받는다. 마릴린은 여러 스캔들이 많았던 대중적 이미지를 복구하기 위해 타임지, 코스모폴리탄, 라이프와의 인터뷰, 보그의 화보 촬영을 포함한 여러 홍보 마케팅에 참여하면서 연예계의 평판을 올리기 위해 노력했었다.

▲ 인종차별에 저항적이었던 마릴린
금발 백치미 컨셉으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똑똑했다. 대중들이 원하는 모습을 정확히 알고, 자리에 맞게 행동하는 법들을 계산했으며 일부러 모든 공적인 자리에서는 백치미 연기를 했을 정도로 영리하고 똑똑했다고 한다. 게다가 마릴린의 위탁 부모들 중 한 가정이 흑인 지역을 출입하는 집배원이었기에 자연스럽게 흑인들과 어울렸던 마릴린은[19] 영화계 데뷔 후에도 흑인 아이들과 한 컵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모습을 보이며[20] 양부모에게 성추행 당한 과거를 공식적으로 고백하고 할리우드의 남성 제작자들과 감독들의 괴롭힘에 대해 큰 비판을 하고 여성 배우 최초로 독립적인 프로덕션을 설립했을 정도로 진보적이며, “모든 인간은 타고난 인종과 성별에 관계없이 평등하다.”는 의식을 갖은 당대 사회에 저항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백치미 컨셉에서 벗어난 연기를 하고 싶어했는데[21]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상품이 아닌 배우가 되길 원했다. 형식화된 기존 연기의 한계에서 발전하기 위해 당시, 획기적인 메소드 연기를 연구하는 액터스쿨인 뉴욕의 ‘Actors Studio’을 다닌다.[22] 생전에 배우로서의 꿈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간절히 받고 싶어 했지만 아카데미는 마릴린을 진지하게 봐주지 않았다. 또, 그녀가 똑똑하면 안 된다고 믿고 싶었던 기자들은 마릴린이 "도스토예프스키죄와 벌의 역할을 맡아보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자, 한다는 질문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스펠링은 아냐?" 였다고.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인 율리시스를 읽고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있는데 진짜로 읽었는지 궁금했던 한 영문과 교수가 기자에게 문의한 결과 진짜였다고 한다. 영미문학계에서 이 책이 지니고 있는 권위와 책이 가진 괴랄한 난이도[23]을 생각하면 이 책을 완독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녀의 집념과 교양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마릴린은 내면적으로 강하면서 동시에 연약한 자아를 가졌는데, 고아와 다름없이 자라며 성장기에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자아의 상처를 입었고, 유전적으로도 가지고 있던 정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약물 중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를 촬영할 때 서랍을 열며 "버번 위스키 어디 있어요?"하는 단순한 대사를 무려 59번이나 NG를 내서, 결국 서랍 안에 대사를 적어 놓았지만 어느 서랍에 대사를 넣었는지 몰라 모든 서랍에 넣은 후에 대사를 말했고[24] 애정결핍과 자신의 재능, 열정을 무시하고 외형에만 관심을 주는 영화계의 시선 때문에 자신을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사람들에게 매우 친절했다.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그 당시, 유색인 팬들이나 유색인 국가 방문 시에도 매너있고 예의 바른 태도로 좋은 말들을 들었다.

4.4. 의문의 사망[편집]



파일:06671ab3.jpg

▲ 마릴린의 사망소식을 알리는 Daily Mirror
1962년 8월 4일 사망. 향년 36세. 공식 사망명, 약물 과다 복용. 아이들과 동물들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약물알코올도 사랑했던 인물. 생활습관과 의학계의 소견으론 약물이 원인이지만 마릴린의 죽음엔 각종 의문과 음모론이 난무한다. 사망 당일부터 60년 후인 현재까지 수많은 의문들이 생겼는데 그렇기에 약물사이면서 의문사로 보기도 한다. 1961년, 정서불안과 불면증 등 다양한 건강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1962년, 커리어를 위해 영화 촬영 현장에 의욕적으로 복귀했다. 또한, 이미지 관리를 위해 많은 매체들과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렇듯 미래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기에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충격을 준다. 1962년 8월 5일, 주치의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마릴린은 방 침대에서 나체로 사망한 채 발견됐는데 공식적으론 수면제로도 쓰이는 급성 바르비투르산 과다 복용에 의한 사망으로 되어 있다. 혈액 검사를 해본 결과, 혈액에 클로랄 하이드레이트 8mg, 펜토바르비탈 4.5mg, 간에 펜토바르비탈 13mg 가량의 약물이 발견됐다. 이 두가지의 약물은 주로 진통제수면제로 악명이 높은데, 현재는 의학용으론 기피되며 주로 안락사 용도로 쓰이는 위험한 약물이다. 사망 시각은 4일 오후 8시 30분~10시 30분경. 사건 현장에는 수면제 통이 널브러져 있었고 전화 수화기를 꼭 붙잡은 채 엎드려 있었다. 실제로 사망 직전에 지인과 전화를 했지만 지인은 그때까지 그녀가 사망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망 당일 일지로 8월 4일 아침, LA 브렌트우드의 마릴린 소유 자택에 그녀, 가사도우미 유니스 머레이(Eunice Murray), 홍보담당자 패트리샤 뉴컴(Patricia Newcomb) 총 3명이 함께 있었다. 마릴린은 자택에서 사진작가, 로렌스 쉴러(Lawrence Schiller)을 만나 전에 자신의 누드 화보를 실은적있던 플레이보이가 영화, ‘Something's Got to Give’촬영 중에 찍은 일부 누드씬을 잡지에 게시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또한, 개인 마사지 치료사에게 마사지를 받은 후 지인들과 전화로 대화를 나눴고 팩스를 보내기 위해 서명한다. 꽤 많은 휴식시간을 보내고 오후 4시 30분, 전담 정신과 의사 랄프 그린슨(Ralph Greenson)은 주기적인 검진을 위해 자택에 도착했는데 랄프는 오후 7시, 떠나기 전 가사도우미 유니스에게 밤새 마릴린 곁에 머물며 보살피길 요청한다. 오후 7시 15분, 전 남편 조 디마지오의 아들이자 평소 친근하게 지낸 사이인 조 디마지오 주니어(Joe DiMaggio Jr.) 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주니어는 마릴린이 좋아하지 않았던 자신의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말했고 후에, 주니어는 마릴린의 목소리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오후 7시 40분-7시 45분, 사이에 정신과 의사 랄프에게 전화를 걸어 주니어와 여자친구가 헤어진 소식을 말한다.

오후 8시, 침실로 돌아간 후 생애 마지막 전화를 하는데 배우, 피터 로포드(Peter Lawford)[25] 로부터 당일 밤 자신의 파티에 참석하도록 마릴린을 설득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그때 피터는 마릴린의 목소리가 마약에 취한 것처럼 들렸기에 당황한다. 전화 내용으론 "팻에게(피터의 아내) 작별 인사와 잭에게(존 F 케네디) 작별 인사, 그리고 자신에게(피터) 작별 인사를 해라. 당신은 좋은 사람이니깐.” 라고 마릴린은 피터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후, 피터는 다시 파티에 초대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지만 마릴린이 여러번 전화를 받지 않아 담당 에이전트인 밀턴 에빈스(Milton Ebbins)에게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한 후, 마릴린의 변호사 밀턴 루딘(Milton Rudin)에게도 전화로 상황을 전한다. 곧바로 변호사, 밀턴은 확인차에 마릴린의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가정부 유니스에게 괜찮다는 말을 듣게 된다. 다음날, 8월 5일 오전 3시 30분 유니스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마릴린의 침실 앞으로 온 후 침실 문 아래에서 나오는 불빛을 보고 노크를 했지만 응답은 없었고 문은 잠겨 있었다. 유니스는 정신과 의사, 랄프에게 전화를 해 조언을 들은 뒤 열리지 않는 문 대신 정원으로 나가 침실의 창문을 통해 상황을 확인한다. 마릴린은 침대 위에 엎드려 시트로 몸을 덮고 전화 수화기를 손에 움켜쥐고 있었는데 곧바로 랄프가 도착해 창문을 깨고 침실에 들어가서 마릴린의 의식이 없는것을 확인한다. 랄프는 마릴린의 주치의인 하이먼 엥겔버그(Hyman Engelberg)에게 전화를 걸었고 오전 3시 50분, 하이먼도 자택에 도착해 공식적으로 사망을 확인한다. 오전 4시 25분, 하이먼은 로스앤젤레스 경찰청에 소식을 전한다.

존 F 케네디로버트 케네디 형제와 친밀한 관계였던 사실들로 이들과 관련된 확인되지 않은 의혹과 루머들이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몇가지는, 이별통보를 한 존에게 둘의 관계를 언론에 알린다며 협박을 했던 마릴린을 평소 케네디와 유착관계인 마피아 조직항문에 약물을 투입해 살해했다는 의혹인데 그 의혹을 뒷받침한 부분은 사망 당시, 마릴린의 엉덩이 부분에 큰 멍자국이 있었다. 실제로 전 마피아 관계자가 자신의 보스가 지시를 내려 부하 3명이 암살했다고 주장했는데 이웃들의 증언에선 오후 8시경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3명을 마릴린 자택 근처에서 봤다는 증언들이 한 명도 아니고 여러명에게 나왔었다. 몰래 침입한 흔적은 없기에 가정부인 유니스를 포섭한 후, 정문으로 들어갔다는 의견들이 많다. 실제로 유니스는 오후 8시 이후 변호사와의 전화에서 마릴린의 건강상태가 괜찮다고 말한적이 있기에 더 의심을 받는다.

범인은 마피아가 아니라 FBI 라는 의혹도 있는데 평소 대통령들의 사생활을 전부 파악하고 있던 국장 존 에드거 후버존 F 케네디에게 마릴린과의 사이에 대해 경고를 했고, FBI가 두려워 존이 이별통보를 하자 관계를 언론에 알린다며 협박을 한 마릴린을 FBI가 암살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FBI는, 예전부터 마릴린 관련 파일을 만들어 조사한 적이 있는 만큼 이 의혹 또한 믿는 사람들이 꽤 많다. 또 다른건 협박한 마릴린을 형인 존과, 자신의 미래 경력을 위해 로버트 케네디가 처남인 피터 로퍼트와 함께 암살했다는 주장인데 마릴린과 로버트 케네디는 정말로 친했기도 했고 피터 또한, 마릴린과 사망 마지막으로 통화한 인물이 피터이기에 주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것 아니냐고 의혹을 받은적이 있다. 또한,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남편과 마릴린의 사이를 알고 암살했다는 루머도 있는데 위의 의혹들이 전부 확인되지 않았기에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공통점으론 모든 의혹들이 케네디가와 관련된 의혹이다.

마릴린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미국유럽의 모든 뉴스의 1면 뉴스였는데, 신문 발행부수가 전보다 훨씬 증가했으며 신문사로 셀 수 없이 많은 확인 전화가 걸려 왔었다. 그녀가 사망한 후 그 달의, 로스앤젤레스 자살률은 2배가 넘었다고 한다. 장례식은 8월 8일,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공동묘지인 웨스트우드 빌리지 공원에서 전 남편인 조 디마지오가 보호자의 자격으로 주관했다. 영화계 관계자들의 방문을 전부 거절하고 비공개로 친인척만 참석한 소규모의 장례로 진행했는데 소규모지만 수많은 관중들이 몰려들어서 떠들썩한 분위기 였다고 한다.


5. 연애사[편집]



파일:ad090566.jpg

▲ 남편, 조 디마지오와의 데이트
청소년기 때부터 사귀던 남자친구들이 있었지만, 첫 번째 결혼은 1942년, 16살 때에 같은 학교 연극반 선배이자 21살 항공사 정비공 제임스 도허티(James Dougherty)와 하게 된다. 마릴린의 위탁 가정의 양부모가 먼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자 법적인 문제로 마릴린을 데려갈 수 없어[26] 고아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해결책으로 평소 친했었던 제임스와 결혼했었다. 이 둘의 사이는 결혼 전엔 가까웠지만 결혼 후, 의견 차이가 많았다. 결혼 생활 중 마릴린의 누드 모델 활동, 연예계 스튜디오와의 계약으로 제임스와 다툼을 하자 더 많은 자유를 원하고, 부부 관계간에 큰 사랑의 감정이 없어서 1946년, 4년만에 이혼하게 된다.[27]

1948년, 잠시 컬럼비아 픽쳐스와 계약했을 때 6개월간의 목소리 교정을 목적으로 음악가이자 노래 코치인 프레드 카거(Fred Karger)에게 레슨을 받게 된다. 프레드는 최근 이혼했고 딸이 있었지만, 매우 잘생긴 훈남이며 매너있는 신사였다.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관심이 있었고 곧, 이 둘은 짧지만 깊은 연애를 하게 된다. 프레드는 마릴린을 좋아하면서 동정했었는데 자신의 어머니에게 소개할 때 매우 외롭고 고독한 어린 소녀라고 소개했으며, 동정하는 글들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마릴린은 이런 프레드를 정말 좋아해 지인에게 언제나 결혼하고 싶은 남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프레드는 노래 코치 뿐만 아니라 스타일링과 에티켓을 알려주고, 주로 음악미술, 서적들을 소개해주었다. 하지만, 이 둘은 그 이상의 관계를 갖지 못하고 헤어졌는데, 딸에게 모범을 보이는 진지한 여성을 원했지만 마릴린은 너무 쉽게 울고 감정적이라며 프레드는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28]

1949년, 단역과 모델링을 전전하던 중 한 유명 에이전시의 오디션을 보게 됐는데 그 후, 친분을 얻게 된 에이전시 부사장 조니 하이드(Johnny Hyde)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조니는 연예계에 경력과 인맥이 상당해서 마릴린에게 많은 도움들을 주었다. 조니는 유부남이었지만 정장 주머니에 다이아 반지를 넣어 놓고 마릴린에게 자주 청혼했지만 그 이상의 관계를 원하지 않은 그녀는 매번 거절했다고 한다. 1년 후,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 유언으로 본인 소유의 LA 대저택을 마릴린에게 남겼으나 그녀는 거절하고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1952년, 뉴욕 양키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전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TV에 나오는 마릴린을 본 후 반해 연예계 관계자인 지인에게 여러 번이나 간절히 소개를 부탁해서 아직 유명 스타가 아니던 마릴린과 첫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에게 정말 반했는지 첫 데이트 때부터 사랑한다든지, 결혼하자든지 심한 애정표현을 했고, 항상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큰 애정을 원했던 그녀는 그런 그를 좋아해 이 둘은 곧 연애를 하게 되었다. 1953년, 세계적인 스타가 된 마릴린은 감독 엘리아 카잔, 니콜라스 레이와 배우 말론 브란도, 율 브리너, 피터 로포드를 포함한 많은 남자들과 데이트를 했지만 조와의 연애를 유지했고 결국 1년 5개월간의 연애 끝에 1954년,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둘은 결혼 274일 만에 이혼을 한다. 조는 이미 은퇴한 상태였고 마릴린은 최고의 인기를 얻을 때라 이것이 한 때 야구선수로서 큰 인기를 얻던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이다. 유명한 일화로, 마릴린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환호를 받으면서 조에게 "이 기분을 당신은 모를 거에요" 라고 말하자 조가 "아니, 잘 알아" 라고 대답한 일이 있었다. 이것은 결혼 후, 이 둘의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는 일화이다.

이 둘의 사이는 1954년, 6.25 전쟁 막바지 시기의 미군 위문공연 때부터 본격적으로 틀어지게 된다. 조와 함께 신혼여행 겸 팬 사인회로 일본에 갔는데 계획에 없이 한국 주둔 미군 위문공연 제의가 들어왔고 마릴린은 거기에 응해 조를 일본에 놔두고 혼자, 한국에 위문공연을 하러 왔었다.[29] 이 위문공연을 한 뒤 부터 조는 마릴린에게 심하게 집착하기 시작했었다. 결정적으로, 영화 7년만의 외출 촬영 현장에 따라간 조는 마릴린이 몇천명의 사람들이 모인곳에서 속옷 노출을 하며 환풍기 씬을 찍는 것을 보고 마릴린과 큰 싸움을 하게 되는데 둘이 욕하며 큰 소리로 다투는 모습이 신문기사에 나기도 했었다.

또한, 조 디마지오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가정의 가부장적 성향이며 내향적이지만 그에 반대로 마릴린은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그래서, 조는 가정폭력을 자주 저질렀는데 특히, 마릴린이 보이스 코치와 바람을 피우고 말론 브란도 등 애인들을 만나고 다니자 야구배트까지 이용해 그녀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기에 이르렀다. 얼마나 폭행했는지 이때의 마릴린은 얼굴의 멍을 감추기 위해서 짙은 화장을 해야 했다. 결국, 법원에 이혼장을 내면서 "그가 날 때릴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1961년, 아서 밀러와의 세 번째 결혼도 이혼으로 끝난 후 날이 갈수록 불안증세와 약물중독이 심해졌는데 주변의 권유로 뉴욕정신병원에 몇 주간 입원하게 되었다. 곧, 마릴린은 퇴원을 하고 싶어 했지만 병원측에서 거절을 했었다. 그녀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유일하게 조 디마지오만이 부탁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조는 연락한 그 날, 바로 병원에 달려와 퇴원을 요구했지만 병원측이 거절하자 병원장에게 “당장 마릴린을 내보내지 않으면 이 병원의 벽돌 하나 하나를 다 부숴 버릴 거야” 라며 협박했다고 한다. 덕분에 퇴원을 할 수 있게 된 마릴린은 그 당시, 조에게 많이 의지 했었다. 같이 해외 여행도 다녀오고 그 해의 여름겨울의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고 한다. 심지어 1962년, 조와 다시 재혼을 하기로 약속까지 했었다. 사망한 날의 불과 단 며칠 후에 이 둘은 재혼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동시에 프랭크 시나트라와 사귀면서 프랭크 시나트라와도 결혼을 약속했지만 사망하게 되면서 4번째 결혼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조는, 마릴린 사후에 한번도 잊지 않고 20년간, 매주 3번씩 묘비에 꽃을 바치며 그리워 했었다고 한다. 마릴린과 이혼 후, 평생 재혼을 하지 않기도 했는데 40여년을 혼자 살다 84세에 사망했다. 유언으로 "이제 마릴린을 다시 만날 수 있겠군." 이란 말을 남긴 걸로도 유명하다. 또한, 케네디 가문의 , 동생과 마릴린의 스캔들로 정치인들의 성추문을 증오해서 말년에, 성추문을 터트린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악수도 거절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켜주어야 하는 건데 그러질 못했다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어쨌든, 아무리 시대를 감안해도 그가 저지른 가정폭력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 실제로 그의 하나뿐인 친아들 마저도 훗날, 이에 대해 증언할 때 아버지를 심하게 비난했을 정도였다. 본국인 미국에서는 이 커플에 대해 의견이 나눠지는데 가정폭력을 저질렀어도 후에 마릴린과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건 조 디마지오이다. 라는 의견과, 조는 가정폭력범일 뿐이다. 라는 의견으로 나뉜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30]


▲ 아서 밀러와의 결혼식
작가, 아서 밀러와의 만남은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 전 부터 인연이 있었는데 알려진 바로는 1953년, 한 파티에서 두 사람과 모두 친분이 있는 영화 감독, 엘리아 카잔의 소개로 만나게 된다. 첫 만남부터 깊은 사이가 된 건 아니지만 마릴린의 팬이라고 자청했던 아서 밀러와 그 자리에서 지인이자 친구가 됐다고 한다. 이 둘의 성적인 관계는 1954년부터 였다고 하는데 조와의 결혼 중에 이 둘은 깊은 관계가 되었다. 조와 이혼 후, 마릴린은 작가나 지식인들과 가깝게 지냈는데 그 중 아서가 곁에서 그녀를 많이 위로 해주었다. 결국, 연인 관계가 되면서 1956년, 극작가 아서 밀러와 3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아서 밀러는 그 유명한 ‘세일즈맨의 죽음’을 쓴 희곡 작가 였으니 언론에선 결혼식의 기사 타이틀로 “최고의 지성과 최고의 육체의 만남” 이라며 떠들어댔다.

하지만 이 결혼도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 이혼의 원인 중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그 중 첫 이유론 마릴린의 연속적인 유산이었다. 마릴린은 아이들을 정말 좋아해서 간절히 아이를 낳고 싶어 했지만 청소년기 때에 첫 아이를 유산하고, 그 뒤의 임신한 모든 태아를 지속적으로 유산했었다. 이 유산의 이유에 대해선 “어릴때 유산을 한 경험이 자궁을 악화시켰다.”와 “애초부터 자궁에 문제가 있는 자궁내막증을 앓고 있다.”로 말이 갈린다. 아서와의 결혼 생활 내내 첫 출산을 위해 수없이 노력했지만 결과는 여러번의 유산 뿐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그녀는 심한 맘적인 고통들을 견디기 위해 약물에 더욱 더 의존하게 된다. 진통제 없이는 영화 촬영에 지장이 생기는 정도이고, 잠을 잘 땐 항상 수면제를 복용했었다. 1956년, 유산을 한 후 마릴린이 아서와 함께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오는 순간을 수많은 파파라치들이 몰려 들어서 찍은 사진이 있는데, 그 순간에도 그녀는 활짝 웃고 있다. 정말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장면이다.

두 번째 이혼의 이유론 마릴린의 초창기 연기의 페르소나는 멍청하고 유아적인 백치미 역할이 대부분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진지한 연기에 대한 욕구가 깊어진 그녀는 한참 배우로서의 고민을 하고 있을 당시에, 아서와 결혼을 하게 된다. 아서는 작가이자 지식인인 만큼 마릴린을 이해해주고 지적인 도움을 주었다. 특히, 극작가인 직업을 살려서 배우로 성장할만한 글들과 배역을 직접 써주었는데 어느날, 마릴린은 아서의 노트에 써있는 한 글들을 봤는데 글의 내용이 전부 둘의 결혼 생활과 비슷한 내용이었으며 그 글에 나오는 여자는 “똑똑하지 못하며, 어리석다”의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와 있었다. 이 아서의 글을 본 후, 마릴린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았고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녀의 마지막 완성작인 영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은 아서가 마릴린에게 선물한 작품인데 이 영화의 배역은 그동안 맡았던 배역들과 별 다를게 없었다. 배신감을 느꼈던 마릴린은 작품 촬영 내내 아서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아서 밀러매카시즘에 휘말려서 고생을 한 것도 이혼 사유 중 하나이다. 약자들과 소시민들에 대한 글 들을 주로 썼던 아서는 매카시즘의 주요 희생양 중 한명이었는데 자신이 살기 위해 친구와 동료를 팔던 지인에게 배신을 당한것이다. 그 배신자 중에는 엘리아 카잔이 있었다. 이 엘리아 카잔은 둘을 처음 소개시켜준 주선자였다. 또한, 마릴린과 엘리아는 과거에 사귄 사이이기도 했기에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것이다. 매카시즘 관련 일화로, 아서가 매카시즘에 휘말렸을 때 공화당 의원 한 명이 “당신의 아내와 사진을 찍게 해주면 당신을 사면해주겠다.”는 제안을 한 적이 있지만 아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마릴린이 사망한 뒤에 아서는 전락 이후(After the Fall) 라는 작품을 발표했고 여기서 마릴린을 끝까지 도와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을 드러냈다.

▲ 존 F 케네디와 함께 찍힌 유일한 사진
아서와 이혼 후, 촬영 중 대본을 못 읽을 정도로 약물음주를 하여 정신 건강이 악화된 마릴린은 많은 스캔들을 일으켰었다. 결국, 영화 촬영을 고의로 펑크내고 존 F 케네디 대통령 생일 파티에 참가해서 스캔들을 일으킨 대가로 영화 촬영장에서 해고되었고 내연 관계였던 존 F 케네디에게 관계를 끊자는 작별인사를 듣게 되어 케네디에게 심한 집착을 했었다고 한다. 백악관에 다이렉트로 전화를 걸어 존 F 케네디를 당황스럽게 해 마릴린과 친했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는 말이 있다. 또, 영부인재클린 케네디에게 전화로 “존과 나는 연인 사이다”, “백악관의 영부인은 내가 될꺼다” 라는 말들을 했다고 하는데 출처가 확실 하진 않다.[31]

Happy Birthday to you

생일 축하합니다.

Happy Birthday to you

생일 축하합니다.

Happy Birthday Mr. President

대통령님 생일 축하합니다.

Happy Birthday to you

생일 축하합니다.

Thank's Mr. President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For all the things you've done

당신이 한 모든 일에 대해.

The battles you've won

당신이 승리한 전투들.

The way you deal with US Steel

미국의 철강을 다루는 방식.

And our problems by the ton

그리고 우리의 문제들을 1톤 단위로.

We thank you, so much

우리는 당신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Everybody, Happy Birthday

모두들, 생일 축하합니다.

Happy Birthday Mr. President, 마릴린 먼로 자작곡.

생일 파티의 비하인드론, 마릴린은 속옷도 입지 않으며 누드처럼 보이는 꽉 낀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었고 일부러 재클린 케네디의 헤어를 따라한 스타일링을 하면서 Happy Birthday Mr. President 라는 자작곡을 불렀는데 현장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 의미로 환호와 경악을 했었다고 한다. 그때, 기자 한 명이 달려 들어 사진을 찍었는데 미국 정부에 의해 압수되고 그 중, 극소수의 일부만 허락 받아 언론에 공개됐다. 당시, 미디어가 조용할리 없었고 스캔들을 크게 부추겼었다. 존 F 케네디는 스캔들을 의식해 그 날 마지막으로 마릴린과 만남을 가지고 관계를 끊었다고 한다.[32] 여담으로, 이 드레스는 1999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14억에 낙찰되었고 2016년 11월, 줄리어스 옥션 경매에 다시 올라와 리플리 박물관 명의로 56억원에 낙찰되었다.


6. 평가[편집]


마릴린 먼로의 23편의 영화는 총 2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고, 그녀의 명성은 그녀가 살던 시대의 어떤 다른 연예인의 명성보다도 뛰어났다. 어리석고 유혹적인 금발머리라는 그녀의 초기 이미지는 할리우드의 압박을 피할 수 없는 예민하고 불안한 여성의 비극적인 모습에 나중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녀의 연약함과 감각은 그녀의 불필요한 죽음과 결합되어 결국 그녀를 미국 문화 아이콘의 지위로 끌어올렸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그녀는 세기의 가장 매력적인 섹스 심벌로서 인생을 보냈으며 가장 오래 지속되는 대중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타임지#


당대의 유혹, 우아함, 신비로움의 상징으로 남은 마릴린 먼로는 여전히 영화계의 상징이며 불멸의 아이콘이다.

칸 영화제[33]

#


그녀는 현대의 아프로디테다. (중략) 그녀는 대중문화에 스며들어 욕망을 계속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그녀의 이미지는 우리가 그녀를 단순한 인간이 아닌 진정한 아이콘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수없이 반복되고 있다.

영국 영화 협회(BFI)#


그녀의 이미지는 영원한 표준 아이콘으로 문화적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


자신의 시대를 정의한 여배우.

BBC, 2019년 20세기의 위대한 아이콘 중 한 명으로 선정한 이유[34]


고인이 된 금발의 여신은 영원히 숭배될 것이다.

포브스#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끝없이 화제가 되고 신화적인 인물인 마릴린 먼로는 꿈과 악몽이 함께 만들어진 최고의 슈퍼스타로 남았다. 순진하고, 연약하며, 불가능할 정도로 매혹적인 그녀는 스크린 섹슈얼리티 바로 그 본질을 규정했다. 핀업걸에서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부상한 그녀는 카메라가 사랑한 재능 있는 코미디언으로 발전했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면 장악 능력이 존재했다. 요컨대, 호박 속에 갇힌 연약한 아름다움으로 시대의 파괴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릴린은, 영화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사랑 받는 아이콘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을 능가하는 전설로 남았다.

AllMovie#


미국 대중 문화의 아이콘으로서, 마릴린의 인기있는 몇몇 라이벌들로는 엘비스 프레슬리미키 마우스가 있다. 그 어떤 스타도 정욕에서 연민에 이르기까지, 질투에서 회한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광범위한 감정에 영감을 준 적은 없었다.

The Guide to United States Popular Culture#


신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주었어요. 사진작가가 그녀를 카메라 앞에 앉힌 첫날 그녀는 천재였어요.

빌리 와일더#


나는 마릴린이 그녀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거의 압도적인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물론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한없는 생명력과 일종의 믿을 수 없는 순수함을 발산한다.

카렌 블릭센 (덴마크의 대문호)#


각 세대, 심지어 각 개인에 의해 다시 창조되고 있는 영원한 형태변환자.

로이스 배너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역사학 교수)#


20세기에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힌 사람.

게일 레빈 (미술 사학자)#


만약 마릴린이 내 남편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녀가 좋은 취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마릴린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시몬 시뇨레#


만약 내가 타임머신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녀의 전성기에 있는 마릴린 먼로를 방문하거나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하늘로 돌렸을 때 잠깐 들를 것이다.

스티븐 호킹#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MMP)은 할리우드에서 최초의 여성 소유의 제작사였다. 그녀는 할리우드의 여성들을 위한 길을 닦았고, 모든 여성들은 그녀의 이미지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것에 대해 그녀에게 빚진 것이 있다.

머라이어 캐리[35]

#


마릴린 먼로는 최초의 미국 여신 – 우리의 사랑의 여신입니다. 그녀는 떠났지만 어디에나 있어요. 스타는 죽지만 빛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버트 스턴[36]

(사진 작가)#



7. 노래[편집]


영화
곡명
비고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Diamonds Are Girls Best Friends[37][38]
#
Bye Bye Baby
#
When Love Goes Wrong, Nothing Goes Right
#
뜨거운 것이 좋아
I Wanna Be Loved by You
#
Through With Love

Running Wild

나이아가라
Kiss
#
돌아오지 않는 강
River Of No Return
#
Down In The Meadow
#



8. 필모그래피[편집]


연도
제목
배역
감독
1947년
위험한 해
(Dangerous Years)
이비
(Evie)
아서 피어슨
1948년
스쿠다 후! 스쿠다 헤이!
(Scudda Hoo! Scudda Hay!)
베티
(Betty)
F. 휴 허버트
숙녀들의 합창
(Ladies of the Chorus)
페기 마틴
(Peggy Martin)
필 칼슨
1949년
러브 해피
(Love Happy)
그라니온의 의뢰인
(Grunion's client)
데이비드 밀러
1950년
토마호크행 티켓
(A Ticket to Tomahawk)
클라라
(Clara)
리차드 세일
아스팔트 정글[39]
(The Asphalt Jungle)
안젤라 핀리
(Angela Phinlay)
존 휴스턴
이브의 모든 것[40]
(All About Eve)
미스 클로디아 캐즈웰
(Miss Claudia Caswell)
조셉 L. 맨키위즈
파이어볼
(The Fireball)
폴리
(Polly)
테이 가넷
라이트 크로스
(Right Cross)
더스키 러두
(Dusky Le Doux)
존 스터지스
1951년
홈 타운 스토리
(Home Town Story)
아이리스 마틴
(Iris Martin)
아서 피어슨
애즈 영 애즈 유 필
(As Young as You Feel)
해리엇
(Harriet)
하먼 존스
러브 네스트
(Love Nest)
로버타 스티븐스
(Roberta Stevens)
조지프 뉴먼
렛스 메이크 잇 리걸
(Let's Make It Legal)
조이스 매너링
(Joyce Mannering)
리처드 세일
1952년
밤의 충돌
(Clash by Night)
페기
(Peggy)
프리츠 랑
위어 낫 매리드!
(We're Not Married!)
애너벨 존스 노리스
(Annabel Jones Norris)
에드먼드 굴딩
돈 보더 투 노크
(Don't Bother to Knock)
넬 포브스
(Nell Forbes)
로이 워드 베이커
몽키 비지니스
(Monkey Business)
로이스 로럴
(Lois Laurel)
하워드 혹스
오 헨리 단편집
(O. Henry's Full House)
스트리트워커
(Streetwalker)
헨리 코스커
1953년
나이아가라
(Niagara)
로즈 루미스
(Rose Loomis)
헨리 헤서웨이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Gentlemen Prefer Blondes)
로렐라이 리
(Lorelei Lee)
하워드 혹스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How to Marry a Millionaire)
폴라 데베보이즈
(Pola Debevoise)
장 네굴레스코
1954년
돌아오지 않는 강
(River of No Return)
케이 웨스턴
(Kay Weston)
오토 프레민저
쇼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
(There's No Business Like Show Business)
빅토리아 호프먼
(Victoria Hoffman)
월터 랭
1955년
7년만의 외출
(The Seven Year Itch)
여인
(The Girl)
빌리 와일더
1956년
버스 정류장
(The Seven Year Itch)
셰리
(Cherie)
조슈아 로건
1957년
왕자와 무희
(The Prince and the Showgirl)
엘시 마리나
(Elsie Marina)
로런스 올리비에
1959년
뜨거운 것이 좋아[41]
(Some Like It Hot)
슈거 케인 코왈치크
(Sugar Cane Kowalczyk)
빌리 와일더
1960년
사랑을 합시다
(Let's Make Love)
어맨다 델
(Amanda Dell)
조지 큐커
1961년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 기인들
(The Misfits)
로즐린 테이버
(Roslyn Taber)
존 휴스턴

1962년, 그녀가 사망하기 전까지 모든 출연작이 2억 달러의 박스오피스 수익을 올렸으며 2019년, 기준 인플레이션을 적용하면 20억 달러 이상의 수익이다. 1950~60년대 가장 흥행이 좋은 배우들 중 한명이었다.

마지막 출연작이자, 미완성작인 영화, ‘Something’s Got to Give’도 있었으나 스캔들 문제로 정직 당한 후, 다시 재출연을 확정한 상태에서 그녀가 사망해 영화 자체가 폐기되었지만 영화사에서 부분적으로 공개를 해 클립 형식으로 볼 수 있다.


9. 미디어에서[편집]


  • 영국에서 <왕자와 무희>를 찍는 과정에서, 감독인 로렌스 올리비에 밑에 조수로 일했던 콜린 클락(Colin Clark)은 자신과 마릴린이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콜린은 이 경험을 책으로 2편을 써 냈는데, 이다. 전자는 드라마화 되기도 했고, 후자는 2011년,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 이라는 개봉명으로 영화화 되었다. 내용으론, 아서 밀러와의 결혼 생활 중 여러번의 유산과 부부간의 여러 다툼으로 맘적 고통을 받으며, 무수한 불안과 고뇌를 느끼는 마릴린의 본모습들과 고통속인 현실에서 벗어나 콜린과의 치유적인 일주일간의 휴가를 보낸다는 내용이다. 마릴린 배역을 연기한 미셸 윌리엄스에게 골든 글러브 여우주연상 수상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 라는 영광을 안겨주었고 그 밖에 에디 레드메인이 콜린 클락으로, 케네스 브래너가 로렌스 올리비에, 엠마 왓슨이 스크린 타임 몇분밖에 안되는 조연, 콜린을 짝사랑하는 분장실 스텝 역으로 출연한 초호화 캐스팅인 영화이다. 세간에는 이 영화가 실화에 기반하여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영화 속 배경은 사실이나 둘 사이의 관계는 전적으로 콜린 클락의 주장이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믿는 건 옳지 않다.

  • 넷플릭스에서 마릴린에 대한 소설 원작 영화[42] 블론드가 나왔는데, 아나 데 아르마스가 마릴린 배역을 맡았다.[43] 루머로 수위가 높아서 넷플릭스측에서 편집을 요구했으나 감독이 거부, 결국 장기간의 논의 끝에 그대로 개봉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트레일러 공개를 하면서 제한상영가 등급인 NC-17등급이 확정되었다.

  • 영화 금발이 너무해에서 대사 속, “재키(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해야지, 마릴린(마릴린 먼로)말고.” 라는 언급이 있는데 해당 영화 맥락상, 금발은 멍청하다는 편견으로 남성 배역이 정치적 입지를 위해 금발인 주인공 대신 갈색모인 배역을 원한다는 의미를 존 F 케네디와의 관계이던 마릴린과 재클린을 인용했다.


  • 드라마 닥터후에서 언급되기를, 195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11대 닥터와 결혼했다고 한다.

  • 드라마 Quantum Leap 5기 18화 "Goodbye Norma Jean"에서, 사실 이라면 사망해야 하지만 샘의 개입으로 마지막 작품이 되는 영화를 찍고 영화계에서 은퇴한다.



  • 게게게의 키타로에도 등장하는데 2기작부터 5기작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릴린이 요괴로 나온다. 더 이상한 건 피이라는 물고기와 파충류를 닮은 요괴를 남편으로 두고 있다는 점. 이 작품에선, 빌런으로 등장한다.[44]

  • 영화, 레옹에서 마틸다 배역의 나탈리 포트만이 레옹 앞에서 여러 퀴즈를 내는 장면이 있는데 그 중, 마릴린의 모습을 패러디 했다. 해당 장면은 존 F 케네디 생일 파티에서 Happy Birthday Mr. President 자작곡을 부른 마릴린 패러디.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에서 신 후보생 중 하나로 등장한다. 말벌을 상징으로 하는 민족을 이끌며 상위권에 달하는 성적을 받을 정도로 선전했으나 살신자의 표적이 되어 사망하고 만다. 이후 뮤즈로 다시 태어나는데 관장하는 영역은 바로 영화.

10. 여담[편집]



  • 산소를 마시듯이 샴페인을 즐겼다고 한다. 샴페인 중 그녀가 선택한 최고의 샴페인은 바로 파이퍼 하이직. 욕조에 샴페인을 부어 호사스러운 목욕을 즐겼을 정도로 파이퍼 하이직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고 한다.


  • 입가에 있는 점이 매우 유명하다. 흔히 애교점이라 불리는데 먼로점이라고 따로 불릴 정도다.

  • 금발은 염색한 것이다. 본명인 노마 진의 이름으로 활동한 시기에는 머리색이 갈색이었다. 태어날 때는 밝은 금발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에도 금발이었지만, 많은 백인들이 그렇듯 청소년기부터 헤어색이 갈색모로 변했다고 한다.[45] 사망 이후, 부검에선 체모가 갈색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 아담할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키가 168cm이다. 당시, 미군 남성의 평균 신장이 170대 중후반이었으니 마릴린의 키는 평균보다 확실히 큰 편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 영화계는 남녀 가리지 않고 워낙 키가 큰 배우들이 많았기에 동세대의 여배우 중에선 작은 편도 아니지만, 큰 편도 아니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에 함께 출연한 제인 러셀만 해도 170cm이고 같은 세대의 그레이스 켈리가 169cm, 오드리 햅번은 170cm이며, 살짝 윗세대인 잉그리드 버그만은 175cm, 더 윗세대인 캐서린 헵번은 172cm이다.

  • 플레이보이 잡지의 1953년, 1호 표지 모델이었으며, 잡지 안에 신인시절에 찍은 누드 화보가 실려있다. 그 화보는 플레이보이가 직접 촬영한게 아니라 몇년 전에 달력 화보로 촬영한 것을 플레이보이가 돈을 주고 구입을 했다. 그녀의 인기 만큼 엄청난 수의 잡지가 팔렸고, 구입한 가격보다 훨씬 많은 이득을 봤다고 한다. 초기 자금이 넉넉하지 않았던 플레이보이는 그 이득으로 큰 투자를 해 잡지사를 크게 키울 수 있었다고 한다.

  • 플레이보이 소유주인 휴 헤프너가 2017년 사망한 후 마릴린의 묘지 바로 옆자리에 묻혔는데, 20년 전에 이미 묘지 자리를 사놨다고 한다. 해외 기사 댓글들은 “징그럽다”, “온갖 타락한 짓은 다 한 늙은 노인네 옆에 묻히게 되는 마릴린이 불쌍하다” 가 대다수다. -그런데 휴 헤프너와 먼로는 동갑이니 문제는 나이가 아니다. 진정 비난받을 점은 먼로의 동의없이 사진을 팔아먹어 생전에 먼로와 악연으로 얽혔다는 것이다.--

  • 마릴린의 묘지 윗자리가 무려 57억원에 낙찰되었다. 2009년에 온라인 경매에서 신원 미상의 자산가가 구입했다고 한다. 광고 문구로는 "마릴린 먼로 바로 위에서 영원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여기 있다." 였다고 한다.

  •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만난 모습이 영상에 찍혀있다.# 1956년 영국에서 할리우드와 유럽 영화계 인사들을 초청한 자리였는데 그때 마릴린은 영국에서 영화를 촬영하고 있어서 참석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로 마주보며 악수를 하고 간단한 얘기들을 나누는데 둘은 1926년생 동갑으로 굉장히 묘하고 아이코닉한 느낌이 든다.

  • 킴 카다시안이 2022, 멧 갈라에서 1962년, 존 F 케네디 생일 파티 때 입었던 마릴린의 누드색 드레스를 착용했는데 오마주, 모조품도 아니고 실제 입었던 드레스라고 한다. 보관되고 있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특별 대여를 해주었는데 1962년, 마릴린 이후로 첫 착용. 즉, 두 번째 착용한 인물이 킴 카다시안. 이번 년, 멧 갈라 주제는 패션의 앤솔러지로 이 드레스의 여러 역사적 상징성에 영감을 받은 듯 하다.# [46]

  • 빈센트 반 고흐의 유작을 1954년, 주한미군 위문 방문차 한국에 왔을때 담당 경호원인 한 한국인 경호원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선물 해주었다는 소문이 있다. 그녀의 주변 지인들에게 돈을 아끼지 않는 인격을 생각한다면 있을법한 이야기지만 당시 담당 경호원이든, 관계자든 전부 미국인이었으며 어떤 한국인도 관련이 없었기에 말이 되지 않는 거짓말 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사실무근으로 결론났다. 빈센트 반 고흐 진품 한국인 소유 사건 항목 참조.

  • 카일리 제너가 마릴린의 엄청난 팬인데, 어느 정도냐면 집의 인테리어도 한 군데 뿐만 아니라, 여러 룸에 마릴린 관련 그림, 사진으로 장식해놨고 카일리의 지인인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카일리는 항상 마릴린에게 영감을 받고, 마릴린의 삶에 자신을 동일시 한다.” 라고 말한 적이 있는 수준이다.

  • 가수 머라이어 캐리가 마릴린의 광팬이다. 특히, 상술한 마릴린의 불우한 처지와 심경에 깊이 공감하면서 자신과 어느 정도 동일시하는 경향 마저 보이는 정도. 머라이어의 뮤직 비디오는 마릴린의 한국 위문 공연에 대한 오마주이고, 쌍둥이 딸의 이름을 먼로라고 짓기도 했다. 마릴린 관련 물품이 경매에 나올 때마다 비용에 제한선을 두지 말고 구입하라며 평소, 에이전트에게 언질 한다고 하는데 경매에서 낙찰받은 물품 중 하나가 생전, 마릴린이 소유했던 흰색 그랜드 피아노. 정말 소중히 아끼는지 남편이 피아노 위에 옷을 올려 놓았을 때 크게 화냈다고 한다.

  • 논란 많았던 플레이보이 모델, 안나 니콜 스미스가 컨셉과 롤모델이 마릴린인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가 마릴린이라는 주장까지 했다. 연예인으로서 급은 다르지만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마릴린과 겹친다는 평이 있다.

  • 2011년 7월, 시카고의 번화가에 있는 파이오니어 광장에 마릴린 먼로의 환풍기 씬을 재현한 대형 동상이 설치됐었다.# 크기가 8m나 되는 동상이며 마릴린의 얼굴 표정이나 옷, 발 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굉장히 정교하게 표현 되어있다. 특히, 뒷태의 재현이 리얼한데 흰색 속옷이 다 보이게 제작을 해놨다. 또, 주변을 울타리로 막은 것도 아니고 누구든지 자유롭게 만져볼 수 있도록 완전 개방해 놓았기 때문에 마릴린의 다리에 키스 하며 사진을 찍는다든지, 두 다리 사이에 서서 고개를 위로 들고 사진을 찍는 등 민망한 장면을 연출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너도 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설치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뿌렸는지, 그 높은 허벅지 부분에 빨간 페인트들을 뿌려 놓는 등 마찬가지로 민망한 방식으로 동상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선정성 논란이 있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미국 날짜로 2012년 5월 7일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논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철거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2012년 까지만 설치해 둘 예정이었다고 한다. 이제 시카고에 가도 더 이상 볼 수는 없게 되었지만, 사진은 검색해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고 캘리포니아주로 옮겨졌다. 2014년 6월, 현재는 뉴저지주에 정착해있다.

  • 영국의 록 음악가 엘튼 존과 그의 작사 파트너 버니 토핀은 1973년에, 마릴린을 추모하는 노래 Candle in the Wind을 발표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릴린에게 바치는 내용이면서 동시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모든 재능을 펼치지 못한 아티스트에게 바치는 명성의 대가에 관한 노래다.

  • 마릴린 맨슨은 예명을 마릴린 먼로의 이름과 살인자, 찰스 맨슨의 성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가장 아름다운 인물과, 가장 추악한 인물을 합쳐 인간의 양면성을 뜻한다고 한다.

  • 메간 폭스가 18살 때 마릴린의 큰 초상화를 자신의 오른쪽 팔에 타투로 새긴 걸로 유명하다. 어릴 때부터 마릴린이 우상이었으며, 강한 유대감을 느꼈었다고 한다. 청소년기엔 마릴린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울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었는데 2011년, 갑자기 해당 타투의 제거술을 받았다. 이유로는 그녀처럼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될까 두려워 타투를 제거했다고 한다.


  • 유튜브에 마릴린의 팬이 주기적으로 올리는 영상 아카이브가 있는데 다양하고 희귀한 영상들이 많이 있다.

  •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매릴린 먼로'이나, '마릴린 먼로'로 표기하던 관행이 워낙 철저히 굳어진 탓에 이걸 철저히 지키는 언론사가 드물다. 실제 발음을 들어 보면 '매릴린'으로 들리므로, '매릴린'으로 적도록 한 현행 국립국어원 규정이 비교적 현지 발음에 가까운 표기이긴 하다. 링크 다만, 한글로 외국어 발음을 완벽히 재현할 수 없기에, 관행적 표기법인 ‘마릴린 먼로’ 또한 상관 없다.

  •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며 '얼굴과 몸매가 좋은 사람은 쓰레기 봉투 같은 걸 입어도 어울린다' 라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있다. 감자 포대를 잘라서 만든 원피스를 입은 화보가 있다. 참고로 대공황시기에 실제로 있던 스타일이다. 옷을 사거나 옷감을 사서 옷을 만들 수 없어서 포대를 잘라서 옷을 만들고는 했다고 한다.[47]

  • 스티븐 호킹이 마릴린의 팬인 것으로 유명하다. 스티븐의 연구실 중앙에 그녀의 매우 큰 사진이 붙여져 있으며, 만일 과거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전성기 시절의 마릴린 먼로와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 취미 중 하나로 자신이 출연한 영화극장에 가서 관객들과 보곤 했는데 스크린에 비치는 저렇게 빛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게 너무 좋다고 말했다고. 그러나 한편으론 외적으로 주목을 받으면 연기력을 우선시하는 배역을 따내기 어렵고, 동료들에게도 배우로서 높은 대우를 받을 수 없다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 과거 신인시절, 교제했던 배우 중엔 명감독이자 배우인 오슨 웰스도 있었다. 오손은 마릴린을 제작사 거물들에게 소개를 시켜주고, 인맥을 쌓을 수 있게 도움을 주었지만 커리어에 큰 이득은 없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01-05 00:26:03에 나무위키 마릴린 먼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6 21:00:25에 나무위키 마릴린 먼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가장 오래 사용한 성은 모친의 첫 번째 남편의 성인 베이커(Baker) 이지만 모친의 두 번째 남편의 성이 모텐슨(Mortenson) 이므로 아버지가 불명확한 마릴린은 이중으로 사용 가능하다.[2] 사망 당시 몸무게[3] 아버지가 불분명해 사생아로 인적관계가 형성되었지만 96년만에 DNA 검사결과로 그가 아버지라는 사실이 드러났다.#[4] 14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는데 매우 안타깝고 불행한 삶을 살았었다. 출생 직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던진 유리컵이 깨져 컵의 조각이 옆에 있던 그의 눈을 스쳐 실명이 될 뻔 했고, 3살때는 부모의 다툼으로 자동차에서 떨어져 다리를 심하게 다쳐서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부모의 이혼 후, 아버지가 강제적으로 자식들을 납치를 해 키워서 다신 영원히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고 이부 동생인 마릴린과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다친 다리는 깁스로 한쪽이 더 짧아 몸의 균형이 맞지 않았고, 몇년 후 결핵 진단 또한 받게 된다. 로버트는 이로 인해 평생 병원을 집처럼 다녀야 했고, 후에 학교 소풍에서 폭죽을 가지고 놀다가 폭발로 오른쪽 눈이 실명 된다. 다시, 병원에 장기 입원했고 계속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강제적으로 퇴원시켰고 로버트는 곧 다리의 감염으로 쇠약해졌다. 그 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전으로 14살의 청소년기에 사망하게 된다.[5] 12살에 요절했다.[6] 고등학교 연극반 선배로 평생 LAPD로 일했다.[7] 버라이어티지 선정 20세기 최고의 아이콘 10인#, VH1 선정 가장 위대한 팝 컬쳐 아이콘 6위#에 선정되기도 했다.[8] 20세기에 가장 많이 사진 찍힌 아티스트다.[9] # [10] 서구권의 유명 여성 아티스트들은 마릴린 먼로의 스타일링을 한번 쯤 오마주나 패러디로 시도했을 정도이다. 비욘세, 레이디 가가, 안젤리나 졸리, 스칼렛 요한슨, 메간 폭스, 브리트니 스피어스, 케이티 페리, 마돈나, 리한나, 테일러 스위프트,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머라이어 캐리, 니키 미나즈, 카디 비, 아리아나 그란데, 빌리 아일리쉬, 마고 로비, 니콜 키드먼, 샤론 테이트, 샤론 스톤, 블레이크 라이블리, 밀라 쿠니스, 드루 배리모어, 킴 카다시안, 클로이 카다시안, 카일리 제너, 켄달 제너, 코트니 러브, 케이트 업튼, 안나 니콜 스미스, 패리스 힐튼, 린제이 로한, 그웬 스테파니, 엠버 허드, 페넬로페 크루스, 블론디데비 해리 등이 있다.[11] # [12] 목록보다 훨씬 많으나 대표적인 것만 표기함.[13] 최소 1천5백~2천명의 인파였다고 추정됨.[14] 영화를 보면 이 부분에서 교차 편집해 촬영지가 바뀐게 보인다.[15] 2022년 5월 10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작품명, 블루 마릴린이 한 미국인 사업가에게 1억 9500만 달러(2500억)에 낙찰 되었는데 이 경매가는 20세기 미술 작품 중 가장 높은 가격으로 낙찰된 기록이다.[16] 노르웨이에서 제빵사일을 했었다.[17] 마릴린은 나중에 "이때 실제 연기가 무엇인지 처음 맛보고 매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한적이 있다.[18] 하지만, 마릴린은 할리우드의 만연해 있던 접대인 캐스팅 카우치에 대해 공식적으로 큰 비판을 했고 신인시절, 해리 콘의 비밀 요트 파티에 참석하면 큰 배역을 준다는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19] 미국 백인 사회 전반에서 인종차별 철폐가 떠오른 것은 60년대 말부터다. 그 전까지 흑인들의 인권운동은 백인들의 지나친 억압에 대한 저항에 가까웠다.[20] 이게 뭐 이 정도로가 아니다. 당시 남부에서는 버스 좌석, 화장실 심지어 식수대도 백인용, 비백인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21] 마릴린의 인터뷰와 수기, 일기 등으로 남긴 연기론과 배우 일지를 모아놓은 레딧 게시물[22] 이 액터스쿨은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로버트 드 니로, 알파치노 등 연기계의 레전드들이 다닌 위엄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곳의 교장인 리 스트라스버그는 ‘‘마릴린은 누구보다 (연기에 대한) 자세가 진지하고, 의지가 강하며, 연기를 사랑한다.’’ 라는 말을 남겼다.[23] 조이스 특유의 '자동기술법' 등의 요소로 인해 가히 영문학계의 최종보스라 할 수 있는 책이며, 영미권에서 나고 자라면서 제대로 영문학 수업을 받은 학생들도 처음 읽으면 "이게 대체 뭔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악명 높다. 제임스 조이스 본인도 이 책이 향후 수많은 교수들을 엿먹일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실제로 수많은 교수들이 제임스 조이스를 연구하는데 일생을 바치기도 한 책이기도 하다.[24] 이때 함께 출연한 토니 커티스는 마릴린과의 키스는 히틀러와 키스하는 느낌이라고 불평했다고 한다. 사실 마릴린과의 키스가 좋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촬영 당시 자주 지각하고 NG를 많이 내는 모습이 독재자 같다고 한 말이다. 토니 커티스가 말년에 낸 자서전에서 사실 마릴린과 키스신을 찍을 때 오르가즘을 느낄 만큼 좋았다고 쓰여 있다. 실제로 토니는 후에 이 발언은 정말 장난으로 말한 것이라고 여러 번 해명했다.[25] 존 F 케네디의 6째 여동생과 결혼해 케네디가의 처남으로 유명하다.[26] 당시, 캘리포니아주 법원에선 캘리포니아주 출신의 미성년자가 단순 여행이 아닌 다른주에 거주 목적으로 이주하는 게 까다로웠다.[27] 마릴린은 한 인터뷰에서 제임스에 대해 편하고 친구 같은 사이였다고 말했고, 제임스도 인터뷰에서 마릴린을 좋아했지만 사랑은 하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28] 프레드는 마릴린과 결별 후 3년 뒤인 1952년, 제인 와이먼(Jane Wyman) 이라는 배우와 결혼했는데 이 배우의 전 남편은 후에 미국의 40대 대통령이 되는 로널드 레이건이다. 제인은 무명 배우이던 남편, 로널드에게 자주 모욕적인 발언을 했었는데 이혼 또한 제인의 요구이기에 로널드가 대통령이 된 후 제인은 영부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매우 후회했다고 한다. 마릴린과 로널드 레이건 또한, 인연이 있었는데 1948년, 이 둘은 할리우드 내에서 몇번의 데이트를 했었던 관계이다.[29] 일본 방문 당시 주일미군 사령관이 직접 방문해 주한미군 위문 공연을 부탁했다. 이때 조가 "그러고 싶지만 스케줄에, 부상으로 못하겠다"고 하자 사령관 말, 저는 미스터 디마지오가 아니라 미세스 디마지오에게 말한 겁니다.[30] 가정폭력범으로 보는 의견에 보충을 하자면, 가정폭력범이 죄책감을 드러내거나,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실제로 꽤 발생하는 일이며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정도의 타자가 야구 배트를 들고 아내를 때린것을 생각하면 그의 '사랑'이 과연 옳은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심지어 조 디마지오는 이혼한 뒤에도 마릴린의 주거지에 침입하거나 스토킹을 일삼았다.[31] 이미, 그 전부터 꽤 많은 관계자들이 이 둘의 사이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32]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는 마릴린과 존 F 케네디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생일 파티에 마릴린이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듣고 화를 내면서 당신 혼자 가세요.라며 말하고 정치인 부인들과 을 타러 갔었다고 한다. 그리고 2달 후, 마릴린이 사망한 뒤 남편과의 사이도 다시 진전 되었다.[33] 2012년 먼로의 사후 50주년을 맞아 2012년 칸 영화제 공식 포스터로 선정되기도 했다.[34] 배우 중에서는 찰리 채플린과 함께 엔터테이너 부문에 선정됐다.[35] 마릴린은 머라이어가 가장 존경하는 뮤즈이다. 그녀의 딸 이름도 먼로라고 지었을 정도.[36]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전설적인 사진 작가. 50년 넘게 일하며 마릴린 먼로, 오드리 헵번, 엘리자베스 테일러, 소피아 로렌, 브리짓 바르도 등을 촬영했다. 먼로의 사망 6주 전의 모습을 담은 '더 라스트 시팅'(The Last Sitting)으로 널리 알려진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이기도 하다.[37] 이후 수많은 할리우드 연예인들이 오마주했다. 자세한 것은 항목참조.[38] 한국전쟁 당시 위문공연을 와서 이 노래를 불렀다. 영상[39] 첫 주연작.[40]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41]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 수상작이자 2017년 BBC가 52개국에서 253명의 영화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역대 최고의 코미디 영화로 뽑힌 영화이다.출처[42] 원작부터 전기소설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역시 전기영화가 아니다.[43] 아나 데 아르마스 스스로가 마릴린의 엄청난 팬이며 마릴린과 닮은 꼴로도 언급 되는 편 이기도 하다.[44] 2기작 (에피소드 23화 '환상의 기차') 에선 자세히 묘사가 안 나오지만 키타로를 납치해 피이에게 넘겼다. 2기작의 마릴린 모습은 마릴린과 똑같지 않아 다행이지만 3기작( 에피소드 61화 '환상의 기차')에선 아예 판박이었다. 마릴린의 하얀 드레스와 환풍구 씬이 묘사되었다. 심지어 키타로의 리모콘 게다에 얼굴을 맞기까지 했으며 기차 안의 용암에 빠지며 피이랑 같이 버려지기까지 했다. 4기작(에피소드 9화 '폭렬 기차 키타로 기관사!')의 마릴린은 평소 모습의 헤어 스타일이 아닌 긴 생머리의 모습으로 등장, 인간들을 흡혈귀로 만들고 키타로마저 흡혈귀로 만들었으며 후반에는 피이와 같이 흙 속에 묻혔고, 5기작(43화 ' 요괴 미스테리 환상 열차' )에선 인간의 생기를 빨아들여 빨아들인 인간을 밀랍 인형으로 만들고 피이와 같이 젊음을 유지한다는 설정이 붙어 있다.[45] 어린 시절, 금발의 마릴린 사진#[46] 다만, 이 과정에서 그녀보다 바디 사이즈가 더 큰 킴의 몸에 맞추기 위해 드레스를 일부 훼손 했다는 의문이 나오기도 했다. 해당 드레스의 원단은 불에 타기 쉬운 재질이라 현재는 생산 되지 않아서 수선도 어려우며, 드레스의 장식 역시 구하기 어려워 훼손 되었다면 완벽하게 원상복구 하긴 힘든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여론은 드레스를 대여해준 박물관 측과 킴을 비난했다. 화제성을 위해서라면 똑같이 만든 모조품을 입어도 되었을 텐데 굳이 원본을 선택해 훼손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47] 이게 가능했던 그때 포대는 옷감에도 사용하는 천과 같은 종류의 천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포대 제작사에서는 사람들이 이걸 옷감으로 쓴다는 걸 눈치채고 시판용 옷감 마냥 무늬까지 넣어서 팔기도 했다. 훗날 현대와 같은 포대로 바뀌면서 사라진 문화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