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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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위상[편집]
할리우드의 황금기였던 클래식 시대의 1950년대-1960년대 초에[6] 배우, 가수, 모델로 활동하면서 문화, 패션, 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자[7]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아티스트 중 한 명이며[8] 섹스 심볼(Sex Symbol)으로 불리며 화려한 이미지의 페르소나를 지녔으나 동시에 불운한 자기파멸적 사생활로 동정을 함께 얻는 인물이다. 또한, 젊은 나이에 의문을 남기며 사망하면서 많은 뒷 이야기를 낳았다.
이름 자체가 브랜드인 인물이라서 상표로 많이 사용된다. 2020년, 기준 그녀의 이름과 이미지는 샤넬, 돌체 앤 가바나, 베어브릭, 레고 등 100개 이상의 글로벌 브랜드에서 사용되고 있다.[9] 무수한 배우, 뮤지션들에게 영감과 창의력을 주며[10] 사후, 60년간 매년 ‘포브스 대중문화인 사후 수입 순위’ 10위 권에 들어가고 이 순위에서 일정히 들어가는 유일한 배우이기도 하다.[11] 영국의 여론조사 기관, 유고브가 전 세대에게 조사한 미국, 영국 국가의 인지도 순위에서 고전 배우 중에 인지도 순위 1위에 선정되었다. 고전 배우 카테고리를 제외하고 현 시기의 배우들과 비교해도 최상위권의 순위이며, 배우로 한정하지 않은 문화계에서도 최상위권의 인지도를 기록하고 있다.
3. 아이콘[편집]
3.1. 핫핑크 드레스[편집]
※ 아래는 오마주와 패러디 된 목록[12]
- 마돈나 #
- 위니 할로우 #
- 아리아나 그란데 #
- 글리 시즌4 15화 #
- 메건 디 스탤리언과 노르마니 #
- 버즈 오브 프레이의 마고 로비 #
- 물랑 루즈의 니콜 키드먼 #
- 버레스크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
- 가십걸 시즌5 13화의 블레이크 라이블리 #
3.2. 화이트 드레스[편집]
3.3. 샤넬 No.5[편집]
3.4. 앤디 워홀[편집]
4. 생애[편집]
4.1. 유년기[편집]
부모의 사업 문제로 잠시 멕시코에서 살게 된 후 글래디스 가족은 곧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1917년, 15살 때 9살 연상의 첫 남편 재스퍼 베이커(Jasper Baker)와 결혼하여 성을 베이커로 변경하고 1918년, 마릴린의 이부 오빠인 로버트 커밋 베이커(Robert Kermit Baker)와 연이어 1919년, 이부 언니인 버니스 이네즈 베이커(Berniece Inez Baker)가 태어나게 된다. 남편인 재스퍼는 다혈질이며 폭력적이었는데 글래디스에게 자주 욕을 하며 폭력을 휘둘렀고 자녀들에게도 폭력을 사용해서 1921년, 글래디스는 이혼 소송을 진행해 단독 양육권을 성공적으로 얻었지만 재스퍼는 일방적으로 그의 고향인 켄터키에 아이들을 납치해가서 키운다.
1924년, 노르웨이 출신의 이민자 마틴 에드워드 모텐슨(Martin Edward Mortensen)[19] 과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이 둘은 1년 후 별거를 하게 되고, 곧바로 글래디스는 일하던 영화사인 RKO 픽처스의 상사, 찰스 기포드(Charles Gifford)와 연인 사이가 되었다. 글래디스는 RKO 픽쳐스에서 일하던 중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그 후 글래디스와 마틴은 공식적으로 이혼을 한다. 1926년, 셋째이자 마지막 아이인 마릴린이 태어나지만 애매한 시기에 태어나서 아버지가 밝혀지지 않았다.[20]
마틴과 찰스 이 둘이 마릴린의 아버지로 추정되는데 당시, 남편이었던 마틴은 역사학자들에게 가장 높은 확률의 아버지로 추정되었으나 이후 유전자 검사로 2022년 96년 만에 DNA 검사 결과로 찰스 기포드가 아버지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마릴린은 아버지에 대한 존재를 많이 그리워해 에이브러햄 링컨을 아버지 대신 여겼다고 한다. 어머니인 글래디스는 정신적, 재정적으로 아이를 키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유아기의 마릴린은 안정적이고 행복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없는 이유를 자주 물었으며, 부족한 애정에 외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어머니의 직업상 문제로 마릴린은 캘리포니아의 시골 마을, 호손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인 양부모 아이다, 앨버트와 6개월간 함께 살게 되었다. 주말엔 글래디스가 직접 방문해서 마릴린을 보살폈는데 1933년, 여름 글래디스는 대출을 받아 할리우드에 있는 작은 집을 구입해 7살이던 마릴린과 함께 살게 된다. 하숙인으로 무명 배우들을 받아서 그들과 함께 지냈다. 1934년, 1월 글래디스는 애초부터 앓고 있던 조현병과 편집증을 공식적으로 진단받은 후 결국 몇개월 같이 살지도 못하고 곧, 단계적으로 요양원과 메트로폴리탄의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8살의 마릴린은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여 국가에서 보호자의 권한을 대신 가졌고 곧, 어머니의 친구인 그레이스 고다드(Grace Goddard)가 보호자로 보살피게 된다. 마릴린은 안타깝게도 유아기를 지나 성장기가 될 쯤 큰 상처를 받았는데 이 시기의 4년간의 생활은 불안정하며 불우했었다. 처음 16개월간은, 또 다른 지인인 존 앳킨슨(Jon Atkinson)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존에게 첫 성적 학대를 당하게 된다. 당시, 겨우 8살이었다. 수줍음이 많았던 마릴린은 학대 후, 일시적으로 말더듬을 하며 발작을 일으켰고 태도 또한 더욱 소극적이고 움츠러 들었다. 그 후, 어머니의 친구인 그레이스와 남편 어윈, 및 다른 두 가족과 한달 간 함께 살았는데 이 시기에도 어윈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알려진다.
한달 후, 그레이스는 마릴린을 로스앤젤레스의 한 고아원에 맡기게 된다. 그 고아원은 모범적인 기관으로 평가 받은곳이지만 마릴린은 버려진 느낌을 받았고 잘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마릴린이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고아원 직원의 의견으로 그레이스는 1936년, 정식으로 법적 보호자가 됐지만 1937년, 여름까지 고아원에서 마릴린을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 그 후, 그레이스의 가정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이 곳에서 두 번째로 머문 기간은 몇 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레이스의 남편인 어윈이 마릴린을 성추행한 것을 들켰기 때문이다. 또, 거주지가 바뀌어야 하는 마릴린은 슬럼가인 콤프턴에서 사는 친척, 그레이스의 친구들 사이에서 짧은 기간 여러 가정의 계속된 변화에서 살아야 했다.
1938년, 또 다른 가정에서 그레이스의 이모이며 노인이던 아나와 함께 몇 년간 지속적으로 살게 된다. 아나는 마릴린을 중학교에 등록해 학교에 다니게 했고 함께 매주 기독교 예배에 나갔었다. 학창시절, 마릴린은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글쓰기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학교 신문에 직접 쓴 글을 여러번 기고했다고 한다. 노인이던 아나의 건강 문제로 1941년, 다시 그레이스와 함께 살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의 밴나이스로 돌아왔는데 같은 해, 밴나이스의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한다. 1942년, 직업상의 문제로 그레이스 가정은 웨스트버지니아주로 이주해야 했지만 캘리포니아주의 아동 보호법은 그레이스가 마릴린을 주 밖으로 데려가는 것을 막았기에 같이 이주하지 못한다.
마릴린은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 해결책으로 같은 해, 6월 19일 고등학교 연극부 선배이며 이웃이던 21살 항공사 정비공 제임스 도허티(James Dougherty)와 결혼을 한다. 결혼과 함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주부의 삶을 살았는데 1943년, 제임스가 군에 입대하자 군 부대 인근 지역인 샌타 카탈리나에서 그의 부모와 함께 집을 옮기며 살게 된다.
1944년, 제임스가 태평양으로 보내져 제임스의 부모는 이전 집으로 이주를 했고 마릴린 혼자 샌타 카탈리나 집에서 살았었는데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으로 미국은 총력전 양상인 국민개병제를 실시해 여성들은 대부분 군수물자를 만드는 업무를 해야 했기에 밴나이스에 있는 방위산업체에서 노동을 하게 된다.[21]
4.2. 연예계 데뷔[편집]
이때 많은 외형적 컨셉이 변경되는데 마릴린의 기존 헤어색은 태어날 땐 연한 금발이지만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진한 갈색으로 변한 갈색모였다. 에이전시의 의견과 마릴린의 결정으로 헤어색을 금발로 염색하게 된다. 금발의 마릴린은 갈색모인 전의 모습보다 훨씬 튀었기에 컬러 변경은 대성공이었고 본인도 매우 만족했다고 한다. 또한, 에이전시는 마릴린의 외형이 하이 패션 모델보다 핀업 모델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해 촬영한 광고는 주로 남성 잡지에 실렸다. 에이전시의 소유주인 에멀린 스니블리(Emmeline Snively)는 마릴린에게 자주 모델들 중 가장 야심차고, 열심히 일하는 모델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1946년 초까지 U.S. Camera, Pageant, Laff, Peek와 같은 유명 잡지의 표지 모델로 실리기도 했으며 이때, 총 33개 잡지에 실린다.
에멀린의 적극 추천으로 같은해 6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첫 스크린 테스트를 보게 되는 기회를 얻었다. 당시 여러 스튜디오들과 테스트를 봤는데 첫 영화사는, 파라마운트 픽쳐스였지만 처음에 많이 긴장한 마릴린은 인터뷰를 실패한다. 그 후, 20세기 폭스의 임원인 벤 라이언(Ben Lyan1901.2.6-1979.3.22)[22] 에게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는데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 1946년 8월, 6개월간의 계약을 맺게 된다.
이전부터 꿈이었던 배우로 활동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20세기 폭스에서 6개월간의 수습기간을 거치며 연기와 노래, 춤을 배우고 영화 제작 과정을 공부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이 당시, 수습생 기간으로 스튜디오에서 거의 돈을 받지 못해 다른 사설 잡지의 모델로 활동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예명, ‘마릴린 먼로’. 첫 활동 시작으로 공식 예명을 짓는데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인 먼로와 1920-1930년대에 유명했던 브로드웨이 스타인 마릴린 밀러(Marilyn Miller1898.9.1-1936.4.7)[23] 의 이름을 결합해 짓게 된다. 또한 1946년 9월, 연기 경력에 반대하는 남편이던 제임스와 이혼을 한다.
1947년, 재계약을 갱신하게 된 후 영화, '위험한 해'(Dangerous Years)와 '스쿠다 후'(Scudda Hoo) 등에 단역으로 출연하여 스크린에 데뷔를 하게 된다. 또한 스튜디오에선 전문적인 체계를 가르치는 연기 스쿨이었던 'Actors' Laboratory Theatre'을 다니게 해 연기의 기본[24] 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학교의 연기 선생님은 마릴린이 너무 수줍어 하며 정서적으로 불안하다고 생각했고 폭스사는 계약 만료 후, 추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는다.
계약 해지 후, 주로 뮤지컬 무대 뒤에서 춤추는 아주 작은 역할이나 잡지사의 모델링 활동을 하며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 이 힘든 시기는 배우가 되고자 하는 큰 결심을 갖게 했다고 한다. 연기를 계속 배우고 싶어서 사비로 연기 스쿨인 'Actors' Lab'을 계속 다니게 된다. ‘Glamour Preferred’ 라는 연극을 했었지만 적은 횟수의 공연 후 연극은 끝이 났다.
그 후, 마릴린은 연기 만큼이나 파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인맥을 쌓기 위해 프로듀서 사무실을 자주 방문하거나, 가십 칼럼니스트들과 친구가 됐으며, 관행이기도 했던 스튜디오의 영향력 있는 남성 손님을 접대했다고 한다. 또, 이 당시 유명 프로듀서였던 조지프 솅크(Joseph Schenck)[25] 와 친구이자 연인관계가 되었고 컬럼비아 픽쳐스의 간부, 해리 콘(Harry Cohn)과 친분을 갖게 된다.[26]
또한, 1955년까지 멘토이자 전담 연기 지도자로 함께할 나타샤 리테스(Natasha Lytess)와 일하며 연기의 기본을 다진다. 1948년, 컬럼비아 픽쳐스에서 영화를 촬영하게 되는데 저예산 뮤지컬, '숙녀들의 합창'(Ladies of the Chorus)으로 인생 첫 주연을 맡게 된다. 다른 영화의 주연을 위해 스크린 테스트를 봤지만 컬럼비아와의 계약은 1948년 9월, 해지된다.
그 후, 잠시 모델 일을 하게 되는데 맥주사의 광고 모델로 활동했었고, 존 바움가르트(John Baumgarth)의 달력 촬영에선 예술적인 누드 모델로 포즈를 취하기도 했었다. 이전에, 얼 모런(Earl Moran)과 같은 다른 예술가들을 위해 누드 또는 비키니를 입고 포즈를 취한 적이 있어서 나체에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모델 일을 하던 중 유명 에이전시이던 '윌리엄 모리스 에이전시'(William Morris Agency)와 계약을 맺게 되었고, 에이전시의 부사장인 조니 하이드(Johnny Hyde)와 깊은 파트너 관계가 된다.
1951년, 적당히 성공한 폭스사의 코미디 영화, ‘As Young as You Feel’, ‘Love Nest’, ‘Let's Make It Legal’ 에서 조연으로 출연하게 된다. 세 편의 영화, 모두 일정하게 백치미 배역으로 나왔지만 비평으로부터 뛰어난 코미디적 능력을 호평받는다. 관객들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매우 높아졌는데 일주일에 수천 통의 팬레터를 받았고 6.25 전쟁 당시 미군 장병들의 선호도 투표인 신문명, 성조기에서 1위인 ‘미스 치즈케이크’로 선정됐으며 1952년,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는 마릴린을 ‘최고의 신인 박스오피스 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같은해 3월, 전에 촬영한 달력 누드 화보가 공개적으로 알려졌을 때 스캔들의 중심에 있게 된다. 대처로 당시 재정 상태가 파산했음을 강조하며 대인배답게 당당히 인정했다. 이 스캔들은 마릴린에 대한 관심을 많이 증가시켰고, 인기배우들을 제치고 최고의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찍은 세 편의 영화인 ‘Clash by Night’, ‘Don't Bother to Knock’, ‘We're Not Married’은 대중의 관심에 맞게 곧바로 개봉하게 된다. 마릴린은 섹스 심볼적인 인기에도 더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싶어했는데 정극 연기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직접 선택을 하여 더 다양한 역할을 맡게 된다. 영화, ‘Clash by Night’ 에서는 생선 통조림 노동자 역을 연기했는데 배역 공부를 위해 생선 통조림 공장에 직접 가서 연기 공부를 했을 정도였다. 한편 다른 영화에서는 성적 매력을 강조하는 코미디 역할을 계속 했었다. 가십 칼럼은 마릴린을 1952년, 최고의 'It Girl' 으로 선정했다.
4.3. 섹스 심볼[편집]
또한, 그녀의 커리어에서 노골적인 성적 영화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 중 양 쪽 골반과 엉덩이를 흔들며 걸음을 걷는 30초 롱 샷은 영화 마케팅에 많이 사용되었고 ‘먼로 워크’ 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기도 했다. 비하인드론, 하이힐의 바닥 한 면을 다른 면보다 짧게 갈아서 다른 높낮이에 따라 골반, 엉덩이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개봉했을 때 소수의 영화계 관계자는 공개적으로 저속하다고 비난했지만 관객들에겐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영화 평론 잡지인 '버라이어티'는 “진부하고, 병적.” 이라며 혹평했지만 뉴욕 타임즈는 "폭포와 마릴린은 볼 만하다." 라고 호평했다.
두 번째로 개봉한 풍자 뮤지컬 코미디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는 마릴린의 스크린 페르소나를 금발 백치미로 확립하게 만들었다. 배우 제인 러셀(Jane Russell)과 공동 주연으로 두 명의 다른 욕구지향적 쇼걸에 초점을 맞추는데 마릴린 배역의 로렐라이는 물질, 제인 배역의 도로시는 외모를 중시. 서로 다른 욕구를 원하지만 결론은 하나의 우정이 중요하다는 의미있는 내용이다. 흥행 또한, 뛰어나서 몇 년 간 그녀의 경력 중 가장 크게 상업적으로 흥행한 영화가 된다. 또, 영화 속 뮤지컬 넘버인 ‘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의 큰 인기로 여성 패션계에도 큰 영향력을 끼쳤는데 주된 팬 대부분이 남성이던 마릴린은 이 영화로 남성과 여성 관객 모두에게 인기있는 스타가 될 수 있었다.
세 번째 개봉작인,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방법'(How to Marry a Millionaire)에선 제목 그대로 부자와 결혼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자들의 스토리로 마릴린의 배역은 전형적인 백치미 캐릭터인데 이 배역이 특별하거나, 영화의 수준이 높은 건 아니지만 영화 속, 마릴린의 귀여운 모습들과 세련된 여러벌의 드레스를 입는 런웨이씬, 그리고 뉴욕 특유의 인테리어가 볼만하다. 의외로 기술적으론 매우 중요한 영화이다. 당시, 50년대 초 TV가 대부분의 가정에 보급된 직후 영화의 위상은 크게 피해를 입게 된다.
어느 정도냐면, 영화계가 대부분 망하고 TV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말들이 있었을 정도. 뒤이어 나온 영화들 중 명작들이 많았고 TV의 심각한 수준저하로 곧 그런 말들은 알아서 사라졌지만 초반엔 심각한 문제였다. 그때, 이 영화는 스크린의 최첨단 기술인 시네마스코프로 개봉한 두 번째 영화였다.[28]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영화계 발전에 큰 도움을 주게 되어 훗날, 명감독 마틴 스코세이지가 이 영화에 감사함을 표했다.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해 개봉한 지 2주도 지나지 않아 올해의 가장 큰 흥행작 중 하나가 되었다. 놀라운 건 1953년, 개봉한 3편의 영화 모두 그 해의 박스오피스 차트 10위권 안에 들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얼마나 마릴린의 독보적인 시대였는지 알 수 있다. 1953년, 1954년에 남녀 포함 연간 박스오피스 매출이 높은 10대 배우에 이름을 올렸고 소속 스튜디오인 폭스사에 가장 큰 소득을 벌어 주는 대표 배우가 되었다. 같은해, 12월 휴 헤프너가 플레이보이 창간 호의 표지 모델에 마릴린을 선정했는데 잡지 안엔 전에 논란이 되었던 누드 화보 여러장이 들어있었다. 덕분에 플레이보이 창간호는 엄청난 대량의 수가 팔렸는데 그 해 잡지 중 가장 많이 팔린 출판부수라고 한다. 단, 마릴린은 출판에 동의하지 않았고 어떠한 금전적 이득을 받지 못했다.
폭스사의 가장 큰 스타가 되었지만 웃기게도 그에 걸맞는 계약으로 변경되지 않았다. 신인시절 받던 조건들을 스타가 된 후에도 그대로 유지했다는 뜻. 다른 스타들보다 훨씬 적은 급여를 받았고 뜻대로 스케줄 또한 선택하지 못했다. 스튜디오는 마릴린에게 걸맞는 대우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 또한, 핀업이나 성적인 배역에 출연하지 않으려는 마릴린의 의지를 매우 싫어했으며 영화사의 간부인 데릴 F 자눅(Darryll F Zanuck)은 개인적으로 항상 마릴린을 무시했다고 한다. 결국, 폭스사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엔터 장르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해서 엔터 외의 영화들을 모두 취소시킨다.
1954년, 첫 작품으로 영화사가 선택한 뮤지컬 코미디 영화, ‘The Girl in Pink Tights’을 촬영하길 거부하자 폭스는 마릴린을 정직 처리했다. 이 소식은 1면 뉴스였고 폭스의 과격한 부정적인 홍보에 대응하기 위해 유명 변호사 수십명과 친한 칼럼니스트의 도움을 받아 조치를 취한다. 곧, 전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 1954년 1월 14일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결혼식은 샌프란시스코 시청에서 진행해 수천명의 관중들이 모여 들어 큰 화제가 되었다.
그 후, 신혼 여행으로 일본을 갔는데 당시 한국 전쟁 때문에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들을 위해 마릴린은 홀로 2월 16일 서울 여의도비행장을 통해 입국하여# 4일 동안 인제, 동두천, 대구 [29] 등 미군 기지가 있는 여러 도시 등을 순회하며 100,000명에 가까운 미군 앞에서 자신의 영화에 나왔던 노래들을 부르며 위문공연을 하게 된다.[30] 이 소식은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환호와 지지를 받으며 본국으로 돌아온 후, 마릴린의 이미지는 매우 호감이 된 계기가 되었다.
곧, 폭스사와의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단독 제작권 보유, 보너스 $100,000 그리고 브로드웨이 히트작을 영화화한 7년만의 외출의 주연 배역을 약속받으며 걸맞는 대우를 받게 된다. 다음 작품으로, 서부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이 개봉하게 되지만 마릴린은 ‘Z급 카우보이 영화’라고 부르며 개인적으로 싫어했다. 하지만, 관객들에겐 인기가 있었고 흥행엔 성공한다. 그 뒤, 뮤지컬 장르인 '쇼 비즈니스 같은 비즈니스는 없다'(No Business Like Show Business)을 찍게 된다. 마릴린은 매우 찍기 싫어했지만 전에 거절했던 영화, ‘The Girl in Pink Tights’ 대신 폭스사에서 영화 촬영을 요구했다. 개봉 후, 많은 비평가들의 혹평들과 흥행 또한 성공하지 못한다.
곧바로 촬영을 시작하게 된 명감독, 빌리 와일더의 코미디 영화, 7년만의 외출에선 마릴린을 대표하는 아이코닉한 장면이 만들어지게 된다. 배역은 이웃인 유부남의 성적 환상 대상이 되는 여성인데 배역의 이름도 없고 단지 ‘윗 층 여성’으로 표현된다. 영화사는 바람에 스커트가 날리는 아이코닉한 장면을 사전 홍보에 사용하기로 결정했고 50년대 심한 제재로 기존 촬영분을 전면 삭제해 영화상에선 노출이 심하지 않고 사진의 이미지가 유명하다. 영화는 1955년, 개봉 후 그녀의 가장 큰 상업적 성공작이 되었다. 곧, 할리우드를 떠나 캘리포니아주의 동쪽 해안으로 잠시 이주하게 된다. 그 곳에서 여성 배우 최초의 독립적인 프로덕션 'Marilyn Monroe Productions'(MMP)을 설립한다. 설립 이유에 대해 "동일한 배역에 지쳤다."와, “폭스사가 제대로 된 의무를 하지 않았기에 더 이상 계약을 하지 않는다.” 라고 밝혔다. 이 설립은 1955년, 시작된 마릴린과 폭스사의 1년 간의 법적 투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와중에 미디어는 마릴린을 크게 조롱했으며, 여러 브로드웨이, TV에선 주로 ‘자신의 제작 회사를 설립하는 멍청한 여배우’ 역할로 패러디를 해댔다.
새 계약에 따른 영화, '버스 정류장'(Bus Stop)의 촬영을 시작했는데 과하게 집착하는 순진한 카우보이에 의해 스타의 꿈이 복잡해지는 가수 셰리 배역을 연기했다. 역할을 위해 새로운 억양을 배웠고 이전 영화와는 다른 메이크업과 의상을 선택한다. MMP의 책임자인 마릴린이 직접 기술적인 문제들을 책임지고 촬영에 대한 많은 결정을 내렸는데 처음엔 의문을 가졌던 감독 조슈아 로건(Joshua Logan)은 이런 모습들을 보고 곧 견해를 바꾸었다고 한다. 심지어, 코미디와 비극을 자연스럽게 혼합하는 마릴린의 능력을 찰리 채플린과 비교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극작가 아서 밀러와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되는데 유대인인 그를 따라 함께 유대 의식을 가졌다. 또, 결혼과 동시에 무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했고 이에 이집트는 마릴린의 모든 영화 상영을 금지한다. 영화, 버스정류장은 개봉 후 흥행에 성공하는데 연기 또한, 비평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마릴린은 처음으로 연기 시상식인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후 폭스사의 어떤 제재 없이 MMP의 첫 독립 프로젝트, '왕자와 무희'(The Prince and the Showgirl)을 영국에서 촬영한다. 로렌스 올리비에가 감독, 공동 제작, 공동 주연을 맡았는데 둘은 촬영 내내 의견 차이로 갈등을 겪는다. 한 일화로, 로렌스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섹시하기만 하면 된다." 라고 마릴린 면전 앞에서 말했으며, 마릴린 배역에 대해 원래 배역을 맡기로 했지만 교체된 아내, 비비안 리의 무대 해석을 그대로 복제하길 원했다. 또 세트장에서 연기 코치인 폴라의 존재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릴린은 비협조적이었고 의도적으로 지각했으며 결국엔 로렌스에게 “당신이 당신의 아티스트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제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라는 명언을 하게 된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촬영은 예정 날짜대로 완성됐는데 개봉 후, 애매한 평가를 받았다. 미국 관객들에겐 인기가 없었지만 유럽에선 좋은 평가를 받아 이탈리아 영화제 다비드 디도나텔로상, 프랑스 영화제 크리스탈 스타상을 수상했고 영국의 BAFTA에 지명되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후, 가정 생활에 집중하기 위해 18개월의 휴식기를 가지는데 주로 뉴욕의 맨해튼, 코네티컷, 롱아일랜드에서 시간들을 보냈다. 휴식기가 끝나고 할리우드로 돌아와 감독, 빌리 와일더의 젠더 주제 코미디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를 촬영한다. 이 영화는 주제가 젠더이며 50년대 보수적인 사회에 여장남자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선택해 큰 화제를 받은 작품이다. 영화의 완성도 또한 매우 높아 1950년대를 대표하는 명작이다. 마릴린은 배역, 슈가의 역할이 또 다른 백치미 금발이라고 생각했지만 남편, 아서의 격려와 표준 급여 외에 영화 수익의 10%를 보너스로 제안했기에 수락한다. 이 영화의 제작은 이후 영화계의 매우 유명한 일화가 됐을 정도로 복잡해지는데 마릴린은 지인에게 이 작품을 침몰하는 배에 비유했고, 장면 중 바보같은 부분들을 제대로 변경해 달라고 자주 요청해서 감독, 제작자들과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마릴린의 무대 공포증과 불안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결론적으로, 감독인 빌리는 마릴린의 연기에 대해 만족하면서 "누구나 대사를 기억할 수 있지만, 아티스트가 실제 세트장에서 대사를 알지 못해도 중요한건 자신의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 , “마릴린은 코미디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그녀 아니면 누가 이 역할을 완벽히 소화하겠냐.” 라며 마릴린의 연기를 칭찬했다. 개봉 후, 엄청난 상업적인 성공을 했는데 그 해 박스오피스 3위를 기록했다. 마릴린의 전 필모그래피 중 흥행 1위작이기도 하다. 연기 커리어에서도 가장 높이 평가되어 첫 연기상인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미국 의회도서관 영구 보존 영화이며, 각종 영화 관련 순위에 항상 들어가는 명작 대우를 받고 있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7년만의 외출이 마릴린의 스타로서 대표되는 작품이라면 뜨거운 것이 좋아는 배우로서 대표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다음 작품으로, 1959년 말쯤 뮤지컬 코미디 장르의 '사랑을 합시다'(Let's Make Love)을 찍었는데 촬영 중, 공동주연인 이브 몽땅과 깊은 사이가 되었다. 이를 영화사가 홍보 목적으로 사용해 언론에 이 사실을 직접 풀었지만 흥행엔 성공하지 못하고 비평 또한, 진부하다며 온갖 혹평을 쏟아냈다. 마지막 완성작으론, 남편이던 극작가 아서 밀러가 극본을 직접 써서 마릴린에게 선물한 흑백영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로 세 명의 나이 든 카우보이와 친구가 된 최근 이혼한 여성 배역을 연기했다. 촬영 할 당시, 사생활에서 매우 힘든 시기였는데 둘의 결혼 생활은 최악으로, 사실상 끝이 난 상태였고 이 둘은 촬영이 끝날 때까지 내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특히 약물, 불면증 등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된 마릴린에겐 매우 힘든 시기였다.
1961년, 이 영화는 개봉 후 흥행에 실패한다. 극작가인 아서가 직접 배역을 썼지만 비평가들은 캐릭터 개발이 매력적이지 못하며, 공허하면서 이해할 수 없다고 주로 캐릭터의 문제를 제기하며 혹평했다. 하지만, 21세기에 와서 더 호의적인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곧 둘은 이혼을 했고 그 후, 건강 문제로 마릴린은 6개월의 휴식기를 가지는데 로스앤젤레스 브렌트우드 부촌 지역의 새로운 집을 구입해 그 곳에서 건강을 회복하며 지냈다. 1962년 봄, 6개월간의 휴식 후 마릴린 스스로 촬영에 의욕적이어서 활발히 다음 영화 제작이 진행됐지만 촬영 시작 며칠 전에 축농증에 걸렸다. 촬영을 연기하라는 의학적 조언에도 불구하고 폭스사는 계획대로 강행했는데 마릴린은 너무 아파서 6주간 대부분 일할 수 없었고 여러 의사의 확인에도 폭스사는 스튜디오를 속이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언론에 주장하며 촬영을 진행시킨다.
스튜디오에서 일방적으로 촬영을 진행시킨, 마릴린의 유작이자 미완성작인 ‘Something's Got to Give’ 에서 누드로 수영하는 장면을 촬영했는데 스크린 사상 메이저 스타의 올 누드 촬영신은 처음이라고 한다. 마릴린이 다시 며칠 간 병가를 원하며, 촬영 중 뉴욕으로 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생일파티에 참석해 스캔들을 일으켜서 폭스사는 마릴린을 해고하고 75만 달러의 손해 배상을 청구한다. 그 배역은 다른 배우로 교체됐지만 상대 배우인 딘 마틴이 마릴린 이외의 배우는 거부하자 폭스는 그 또한 고소한 후, 촬영을 자체 중단한다. 폭스사는 보복으로 마릴린이 영화계의 종말을 고한다며 공개적인 비난을 했으며, 온갖 부정적인 악담으로 평판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변덕스럽게도 폭스사는 그 결정을 후회하고 다시 마릴린과 협상을 재개했는데 위 영화의 촬영 진행과 새 영화의 주연 배역을 약속받는다. 마릴린은 여러 스캔들이 많았던 대중적 이미지를 복구하기 위해 타임지, 코스모폴리탄, 라이프와의 인터뷰, 보그의 화보 촬영을 포함한 여러 홍보 마케팅에 참여하면서 연예계의 평판을 올리기 위해 노력했었다.
또한 백치미 컨셉에서 벗어난 연기[33] 를 하고 싶어 했는데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상품이 아닌 배우가 되길 원했다. 형식화된 기존 연기의 한계에서 발전하기 위해 당시, 획기적인 메소드 연기를 연구하는 액터스쿨인 뉴욕의 ‘Actors Studio’을 다닌다.[34]
생전에 배우로서의 꿈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간절히 받고 싶어 했지만 아카데미는 마릴린을 진지하게 봐주지 않았다. 또, 그녀가 똑똑하면 안 된다고 믿고 싶었던 기자들은 마릴린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역할을 맡아보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자, 한다는 질문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스펠링은 아냐?" 였다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고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있는데 진짜로 읽었는지 궁금했던 한 영문과 교수가 기자에게 문의한 결과 진짜였다고 한다. [35]
마릴린은 내면적으로 강하면서 동시에 연약한 자아를 가졌는데, 고아와 다름없이 자라며 성장기에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자아의 상처를 입었고, 유전적으로도 가지고 있던 정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약물 중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를 촬영할 때 서랍을 열며 "버번 위스키 어디 있어요?"하는 단순한 대사를 무려 59번이나 NG를 내서, 결국 서랍 안에 대사를 적어 놓았지만 어느 서랍에 대사를 넣었는지 몰라 모든 서랍에 넣은 후에 대사[36] 를 말했었다. 자신의 재능, 열정을 무시하고 외형에만 관심을 주는 영화계의 시선 때문에 자신을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사람들에게 매우 친절했다.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그 당시, 유색인 팬들이나 유색인 국가 방문 시에도 매너있고 예의 바른 태도로 좋은 말들을 들었다.
단순히 섹스 심벌이자 백치미로 알려진 것과 달리 불과 29세 때 할리우드 여성 최초로 자신의 영화제작사를 설립 및 운영할 정도로 진취적이고 자기 주관 뚜렷한 인물이었으며 50년대~60년대 민감했던 흑인 인권운동, 핵 반대 운동 등등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마릴린은 세 번째 남편 아서 밀러가 메카시즘의 광풍에 휘말려 고생할 때, 부부가 함께 FBI, CIA의 감시 대상들이었다.
4.4. 의문의 사망[편집]
이렇듯 미래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기에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충격을 준다. 1962년 8월 5일, 주치의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마릴린은 방 침대에서 나체로 사망한 채 발견됐는데[37] 공식적으론 수면제로도 쓰이는 급성 바르비투르산 과다 복용에 의한 사망으로 되어 있다. 혈액 검사를 해본 결과, 혈액에 클로랄 하이드레이트 8mg, 펜토바르비탈 4.5mg, 간에 펜토바르비탈 13mg 가량의 약물이 발견됐다.
이 두 가지의 약물은 주로 진통제와 수면제로 악명이 높은데, 현재는 의학용으론 기피되며 주로 안락사 용도로 쓰이는 위험한 약물이다. 사망 시각은 4일 오후 8시 30분~10시 30분경. 사건 현장에는 수면제 통이 널브러져 있었고 전화 수화기를 꼭 붙잡은 채 엎드려 있었다. 실제로 사망 직전에 지인과 전화를 했지만 지인은 그때까지 그녀가 사망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망 당일 일지로 8월 4일 아침, LA 브렌트우드의 마릴린 소유 자택에 그녀, 가사도우미 유니스 머레이(Eunice Murray), 홍보담당자 패트리샤 뉴컴(Patricia Newcomb) 총 3명이 함께 있었다. 마릴린은 자택에서 사진작가 로렌스 쉴러(Lawrence Schiller)를 만나 전에 자신의 누드 화보를 실은 적 있던 플레이보이가 영화, ‘Something's Got to Give’ 촬영 중에 찍은 일부 누드신을 잡지에 게시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또한, 개인 마사지 치료사에게 마사지를 받은 후 지인들과 전화로 대화를 나눴고 팩스를 보내기 위해 서명한다. 꽤 많은 휴식시간을 보내고 오후 4시 30분, 전담 정신과 의사 랄프 그린슨(Ralph Greenson)은 주기적인 검진을 위해 자택에 도착했는데 랄프는 오후 7시, 떠나기 전 가사도우미 유니스에게 밤새 마릴린 곁에 머물며 보살피길 요청한다.
오후 7시 15분, 전 남편 조 디마지오의 아들이자 평소 친근하게 지낸 사이인 조 디마지오 주니어(Joe Dimaggio Jr.) 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주니어는 마릴린이 좋아하지 않았던 자신의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말했고 후에, 주니어는 마릴린의 목소리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오후 7시 40분-7시 45분, 사이에 정신과 의사 랄프에게 전화를 걸어 주니어와 여자친구가 헤어진 소식을 말한다.
오후 8시, 침실로 돌아간 후 생애 마지막 전화를 하는데 배우 피터 로퍼드[38] 로부터 당일 밤 자신의 파티에 참석하도록 마릴린을 설득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그때 피터는 마릴린의 목소리가 마약에 취한 것처럼 들렸기에 당황한다. 전화 내용으론 "팻에게(피터의 아내) 인사와 잭에게(존 F 케네디) 인사, 그리고 피터에게 인사를 해라. 당신은 좋은 사람이니깐.” 라고 마릴린은 피터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후, 피터는 다시 파티에 초대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지만 마릴린이 여러 번 전화를 받지 않아 담당 에이전트인 밀턴 에빈스(Milton Ebbins)에게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한 후, 마릴린의 변호사 밀턴 루딘(Milton Rudin)에게도 전화로 상황을 전한다.
곧바로 루딘은 확인차에 마릴린의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가정부 유니스에게 괜찮다는 말을 듣게 된다. 다음날, 8월 5일 오전 3시 유니스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마릴린의 침실 앞으로 온 후 침실 문 아래에서 나오는 불빛을 보고 노크를 했지만 응답은 없었고 문은 잠겨 있었다. 유니스는 정신과 의사, 랄프에게 전화를 해 조언을 들은 뒤 열리지 않는 문 대신 정원으로 나가 침실의 창문을 통해 상황을 확인한다. 마릴린은 침대 위에 엎드려 시트로 몸을 덮고 전화 수화기를 손에 움켜쥐고 있었는데 곧바로 랄프가 도착해 창문을 깨고 침실에 들어가서 마릴린의 의식이 없는것을 확인한다. 랄프는 마릴린의 주치의인 하이먼 엥글버그(Hyman Engelberg)에게 전화를 걸었고 오전 3시 50분, 하이먼도 자택에 도착해 공식적으로 사망을 확인한다. 오전 4시 25분, 하이먼은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에 소식을 전한다.
존 F 케네디 및 로버트 케네디 형제와 친밀한 관계였던 사실들로 이들과 관련된 확인되지 않은 의혹과 루머들이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몇가지는, 이별통보를 한 존에게 둘의 관계를 언론에 알린다며 협박을 했던 마릴린을 평소 케네디와 유착관계인 마피아 조직이 항문에 약물을 투입해 살해했다는 의혹인데 그 의혹을 뒷받침한 부분은 사망 당시, 마릴린의 엉덩이 부분에 큰 멍자국이 있었다.[39]
실제로 전 마피아 관계자가 자신의 보스가 지시를 내려 부하 3명이 암살했다고 주장했는데 이웃들의 증언에선 오후 8시경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3명을 마릴린 자택 근처에서 봤다는 증언들이 한 명도 아니고 여러명에게 나왔었다. 몰래 침입한 흔적은 없기에 가정부인 유니스를 포섭한 후, 정문으로 들어갔다는 의견들이 많다. 실제로 유니스는 오후 8시 이후 변호사와의 전화에서 마릴린의 건강상태가 괜찮다고 말한적이 있기에 더 의심을 받는다.
범인은 마피아가 아니라 FBI라는 의혹도 있는데 평소 대통령들의 사생활을 전부 파악하고 있던 국장 존 에드거 후버가 존 F 케네디에게 마릴린과의 사이에 대해 경고를 했고, FBI가 두려워 존이 이별통보를 하자 관계를 언론에 알린다며 협박을 한 마릴린을 FBI가 암살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FBI는, 예전부터 마릴린 먼로 관련 파일을 만들어 조사한 적이 있는 만큼 이 의혹 또한 믿는 사람들이 꽤 많다.
또 다른건 협박한 마릴린을 형인 존과, 자신의 미래 경력을 위해 로버트 케네디가 처남인 피터 로퍼드와 함께 암살했다는 주장인데 마릴린과 로버트는 정말로 친했기도 했고 피터 또한, 마릴린과 사망 마지막으로 통화한 인물이 피터이기에 주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것 아니냐고 의혹을 받은적이 있다. 또한,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남편과 마릴린의 사이를 알고 암살했다는 루머도 있는데 위의 의혹들이 전부 확인되지 않았기에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공통점으론 모든 의혹들이 케네디가와 관련된 의혹이다.
마릴린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미국과 유럽의 모든 뉴스의 1면 뉴스였는데, 신문 발행부수가 전보다 훨씬 증가했으며 신문사로 셀 수 없이 많은 확인 전화가 걸려 왔었다. 그녀가 사망한 후 그 달의, 로스앤젤레스 자살률은 2배가 넘었다고 한다. 장례식은 8월 8일,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공동묘지인 웨스트우드 빌리지 공원에서 전 남편인 조 디마지오가 보호자의 자격으로 주관했다. 영화계 관계자들의 방문을 전부 거절하고 비공개로 친인척만 참석한 소규모의 장례로 진행했는데 소규모지만 수많은 관중들이 몰려들어서 떠들썩한 분위기 였다고 한다.
5. 연애사[편집]
1948년, 잠시 컬럼비아 픽쳐스와 계약했을 때 6개월간의 목소리 교정을 목적으로 음악가이자 노래 코치인 프레드 카거(Fred Karger)에게 레슨을 받게 된다. 프레드는 최근 이혼했고 딸이 있었지만, 매우 잘생긴 훈남이며 매너있는 신사였다.곧, 이 둘은 짧은 연애를 하게 된다. 프레드는 마릴린을 좋아하면서 동정했었는데 자신의 어머니에게 소개할 때 매우 외롭고 고독한 어린 소녀라고 소개했으며, 동정하는 글들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마릴린은 이런 프레드를 정말 좋아해 지인에게 언제나 결혼하고 싶은 남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프레드는 노래 코치뿐만 아니라 스타일링과 에티켓을 알려주고, 주로 음악과 미술, 서적들을 소개해주었다. 하지만, 이 둘은 그 이상의 관계를 갖지 못하고 헤어졌는데, 딸에게 모범을 보이는 여성을 원했지만 마릴린은 너무 쉽게 울고 감정적이라며 프레드는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42]
1949년, 단역과 모델링을 전전하던 중 한 유명 에이전시의 오디션을 보게 되었는데 그 후, 친분을 얻게 된 에이전시 부사장 조니 하이드(Johnny Hyde)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조니는 연예계에 경력과 인맥이 상당해서 마릴린에게 많은 도움들을 주었다. 조니는 유부남이었지만 정장 주머니에 다이아 반지를 넣어 놓고 마릴린에게 자주 청혼했지만 그 이상의 관계를 원하지 않은 그녀는 매번 거절했다고 한다. 1년 후,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 유언으로 본인 소유의 LA 대저택을 마릴린에게 남겼으나 그녀는 거절하고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1952년, 뉴욕 양키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전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가 TV에 나오는 마릴린을 본 후 반해 연예계 관계자인 지인에게 여러 번이나 소개를 부탁해서 마릴린과 데이트를 했다. 조는 마릴린에게 정말 반했는지 첫 데이트부터 결혼을 하자며 심한 애정표현을 했고, 큰 애정을 원하던 그녀는 그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 1953년, 세계적인 스타가 된 마릴린은 감독 엘리아 카잔, 니콜라스 레이와 배우 말론 브란도, 율 브리너, 피터 로퍼드를 포함한 많은 남자들과 데이트를 했지만 조와의 연애를 유지했고 결국 1년 수개월간의 연애 끝에 1954년, 2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둘은 결혼 274일 만에 이혼을 한다. 조는 이미 은퇴한 상태였고 마릴린은 최고의 인기를 얻을 때라 이것이 한 때 야구선수로서 큰 인기를 얻던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이다. 유명한 일화 중 마릴린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환호를 받으면서 조에게 "당신은 이 기분을 모를 거야." 라고 말하자 조가 "아니, 잘 알아." 라고 대답한 일이 있다. 결혼 후 둘의 관계를 잘 나타내는 일화이다.
이 둘의 사이는 1954년, 6.25 전쟁 막바지 시기의 미군 위문공연 때부터 본격적으로 틀어졌다. 조 디마지오와 함께 신혼여행 겸 팬 사인회로 일본에 갔는데 계획에 없이 한국 주둔 미군 위문공연[43] 제의가 들어왔고 마릴린은 거기에 응해 조를 일본에 놔두고 혼자 한국에 위문공연을 하러 방문했었다.[44]
이 위문공연을 한 뒤 부터 조는 마릴린에게 심하게 집착하기 시작했었다. 결정적으로, 영화 7년만의 외출 촬영 현장에 따라간 조는 마릴린이 몇천 명의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속옷 노출을 하며 환풍기 씬을 찍는 것을 보고 마릴린과 큰 싸움을 하게 되는데 둘이 욕하며 큰 소리로 다투는 모습이 신문기사에 나기도 했었다.
또한, 조 디마지오는 전형적인 이탈리아계 가정의 가부장적 성향이며 내향적이지만 그에 반대로 마릴린은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조는 결혼생활 내내 가정폭력을 자주 저질렀는데 특히, 마릴린이 보이스 코치와 바람을 피우고 말론 브란도 등 애인들을 만나고 다니자 야구배트까지 이용하여 그녀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기에 이르렀다. 얼마나 폭행했는지 이때의 마릴린은 얼굴의 멍을 감추기 위해서 특히 짙은 화장을 해야 했다. 결국, 법원에 이혼장을 내면서 "그가 날 때릴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라고 말했었다.
1961년, 아서 밀러와의 3번째 결혼도 이혼으로 끝난 후 날이 갈수록 불안증세와 약물중독이 심해졌는데 주변의 권유로 뉴욕의 정신병원에 몇 주간 입원하게 되었다. 곧 마릴린은 퇴원을 하고 싶어 했지만 병원측에서 거절을 했었다. 그녀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유일하게 조 디마지오만이 부탁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조는 연락한 그 날, 바로 병원에 달려와 퇴원을 요구했지만 병원측이 거절하자 병원장에게 “당장 마릴린을 내보내지 않으면 이 병원의 벽돌 하나 하나를 다 부숴 버릴 거야” 라며 협박했다고 한다. 덕분에 퇴원을 할 수 있게 된 마릴린은 그 당시, 조에게 많이 의지했었다. 같이 해외 여행도 다녀오고 그 해의 여름과 겨울의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고 한다. 심지어 1962년, 조와 다시 재혼을 하기로 약속까지 했었다. 사망한 날의 불과 단 며칠 후에 이 둘은 재혼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동시에 프랭크 시나트라와 사귀면서 시나트라와도 결혼을 약속했지만 사망하게 되면서 4번째 결혼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조는 마릴린 사후에 한번도 잊지 않고 20년간, 매주 3번씩 묘비에 꽃을 바치며 그리워 했었다고 한다. 마릴린과 이혼 후, 평생 재혼을 하지 않기도 했는데 40여년을 혼자 살다 84세에 사망했다. 유언으로 "이제 마릴린을 다시 만날 수 있겠군." 이란 말을 남긴 걸로도 유명하다. 또한, 케네디 가문의 형, 동생과 마릴린의 스캔들로 정치인들의 성추문을 증오해서 말년에, 성추문을 터트린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악수도 거절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켜주어야 하는 건데 그러질 못했다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어쨌든, 아무리 시대를 감안해도 그가 저지른 가정폭력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 실제로 그의 하나뿐인 친아들마저도 훗날, 이에 대해 증언할 때 아버지를 심하게 비난했을 정도였다. 본국인 미국에서는 이 커플에 대해 의견이 나눠지는데 "가정폭력을 저질렀어도 후에 마릴린과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건 조 디마지오이다" 라는 의견과, "조는 가정폭력범일 뿐이다" 라는 의견으로 나뉜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45]
하지만 이 결혼도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 이혼의 원인 중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그 중 첫 이유론 마릴린의 연속적인 유산이었다. 마릴린은 아이들을 정말 좋아해서 간절히 아이를 낳고 싶어했지만 청소년기 때에 첫 아이를 유산하고, 그 뒤의 임신한 모든 태아를 지속적으로 유산했었다. 이 유산의 이유에 대해선 “어릴때 유산을 한 경험이 자궁을 악화시켰다.”와 “애초부터 자궁에 문제가 있는 자궁내막증을 앓고 있다.”로 말이 갈린다. 아서와의 결혼 생활 내내 첫 출산을 위해 수없이 노력했지만 결과는 여러 번의 유산뿐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그녀는 심한 맘적인 고통들을 견디기 위해 약물에 더욱 더 의존하게 된다. 진통제 없이는 영화 촬영에 지장이 생기는 정도이고, 잠을 잘 땐 항상 수면제를 복용했었다. 1956년, 유산을 한 후 마릴린이 아서와 함께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오는 순간을 수많은 파파라치들이 몰려 들어서 찍은 사진이 있는데, 그 순간에도 그녀는 활짝 웃고 있다. 정말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장면이다.
두 번째 이혼의 이유론 마릴린의 초창기 페르소나는 멍청하고 유아적인 백치미 역할이 대부분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에 대한 욕구가 깊어진 그녀는 한참 배우로서의 고민을 하고 있을 당시에 아서 밀러와 결혼을 하게 된다. 아서는 작가이자 지식인인 만큼 마릴린을 이해해주고 지적인 도움을 주었다. 특히 극작가인 직업을 살려서 배우로 성장할 만한 글들과 배역을 직접 써주었는데 어느날, 마릴린은 아서의 노트에 써있는 한 글들을 봤는데 글의 내용이 전부 둘의 결혼 생활과 비슷한 내용이었으며 그 글에 나오는 여자는 “똑똑하지 못하며, 어리석다”의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와 있었다. 이 아서의 글을 본 후, 마릴린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았고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배신감을 느꼈던 마릴린은 작품 촬영 내내 아서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아서 밀러가 매카시즘에 휘말려서 고생을 한 것도 이혼 사유 중 하나이다. 약자들과 소시민들에 대한 글 들을 주로 썼던 아서는 매카시즘의 주요 희생양 중 한 명이었는데 자신이 살기 위해 친구와 동료를 팔던 지인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다. 그 배신자 중에는 엘리아 카잔이 있었다. 카잔은 둘을 처음 소개시켜준 주선자였다. 또한, 마릴린과 카잔은 과거에 사귄 사이이기도 했기에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것이다. 매카시즘 관련 일화로, 아서가 매카시즘에 휘말렸을 때 공화당 의원 한 명이 “당신의 아내와 사진을 찍게 해주면 당신을 사면해주겠다.”는 제안을 한 적이 있지만 아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마릴린이 사망한 뒤에 아서는 '전락 이후'(After the Fall)라는 작품을 발표했고 여기서 마릴린을 끝까지 도와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을 드러냈다.
생일 파티의 비하인드론, 마릴린은 속옷도 입지 않으며 누드처럼 보이는 꽉 낀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었고 일부러 재클린 케네디의 헤어를 따라한 스타일링을 하면서 'Happy Birthday Mr. President' 라는 자작곡을 불렀는데 현장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환호와 경악을 했었다고 한다. 그때, 기자 한 명이 달려 들어 사진을 찍었는데 미국 정부에 의해 압수되고 그 중 극소수만 허락 받아 언론에 공개되었다. 당시, 언론은 이 스캔들을 크게 부추겼는데 존 F 케네디는 스캔들을 의식해 그 날 마지막으로 마릴린과 만남을 가지고 관계를 끊었다고 한다.[47] 여담으로 이 드레스는 1999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14억에 낙찰되었고 2016년 11월, 줄리어스 옥션 경매에 다시 올라와서 리플리 박물관 명의로 55억원에 낙찰되었다.Happy Birthday to you
생일 축하합니다.
Happy Birthday to you
생일 축하합니다.
Happy Birthday Mr. President
대통령님 생일 축하합니다.
Happy Birthday to you
생일 축하합니다.
Thank's Mr. President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For all the things you've done
당신이 한 모든 일에 대해.
The battles you've won
당신이 승리한 전투들.
The way you deal with US Steel
미국의 철강을 다루는 방식.
And our problems by the ton
그리고 우리의 문제들을 1톤 단위로.
We thank you, so much
우리는 당신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Everybody, Happy Birthday
모두들, 생일 축하합니다.
Happy Birthday Mr. President, 마릴린 먼로 자작곡.
6. 평가[편집]
마릴린 먼로의 23편의 영화는 총 2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고, 그녀의 명성은 그녀가 살던 시대의 어떤 다른 연예인의 명성보다도 뛰어났다. 어리석고 유혹적인 금발머리라는 그녀의 초기 이미지는 할리우드의 압박을 피할 수 없는 예민하고 불안한 여성의 비극적인 모습에 나중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녀의 연약함과 감각은 그녀의 불필요한 죽음과 결합되어 결국 그녀를 미국 문화 아이콘의 지위로 끌어올렸다.
그녀는 세기의 가장 매력적인 섹스 심벌로서 인생을 보냈으며 가장 오래 지속되는 대중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당대의 유혹, 우아함, 신비로움의 상징으로 남은 마릴린 먼로는 여전히 영화계의 상징이며 불멸의 아이콘이다.
#
그녀는 현대의 아프로디테다. (중략) 그녀는 대중문화에 스며들어 욕망을 계속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그녀의 이미지는 우리가 그녀를 단순한 인간이 아닌 진정한 아이콘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수없이 반복되고 있다.
영국 영화 협회(BFI)#
그녀의 이미지는 영원한 표준 아이콘으로 문화적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자신의 시대를 정의한 여배우.
고인이 된 금발의 여신은 영원히 숭배될 것이다.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끝없이 화제가 되고 신화적인 인물인 마릴린 먼로는 꿈과 악몽이 함께 만들어진 최고의 슈퍼스타로 남았다. 순진하고, 연약하며, 불가능할 정도로 매혹적인 그녀는 스크린 섹슈얼리티 바로 그 본질을 규정했다. 핀업걸에서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부상한 그녀는 카메라가 사랑한 재능 있는 코미디언으로 발전했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면 장악 능력이 존재했다. 요컨대, 보석 속에 갇힌 연약한 아름다움으로 시대의 파괴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릴린은, 영화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사랑 받는 아이콘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을 능가하는 전설로 남았다.
AllMovie#
미국 대중 문화의 아이콘으로서, 마릴린의 인기있는 몇몇 라이벌들로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미키 마우스가 있다. 그 어떤 스타도 정욕에서 연민에 이르기까지, 질투에서 회한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광범위한 감정에 영감을 준 적은 없었다.
The Guide to United States Popular Culture#
신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주었어요. 사진작가가 그녀를 카메라 앞에 앉힌 첫날 그녀는 천재였어요.
나는 마릴린이 그녀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거의 압도적인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물론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한없는 생명력과 일종의 믿을 수 없는 순수함을 발산한다.
각 세대, 심지어 각 개인에 의해 다시 창조되고 있는 영원한 형태변환자.
로이스 배너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역사학 교수)#
20세기에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힌 사람.
게일 레빈 (미술 사학자)#
만약 마릴린이 내 남편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녀가 좋은 취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마릴린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타임머신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전성기에 있는 마릴린 먼로를 방문하거나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하늘로 돌렸을 때 잠깐 들를 것이다.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MMP)은 할리우드에서 최초의 여성 소유의 제작사였다. 그녀는 할리우드의 여성들을 위한 길을 닦았고, 모든 여성들은 그녀의 이미지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것에 대해 그녀에게 빚진 것이 있다.
#
마릴린 먼로는 최초의 미국의 여신 – 우리의 여신입니다. 그녀는 떠났지만 어디든지 있어요. 스타는 죽지만 빛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버트 스턴[51]
(사진 작가)#
7. 노래[편집]
- 이외에도 콜 포터의 ‘My Heart Belongs to Daddy’를 불렀다.
8. 필모그래피[편집]
1962년, 그녀가 사망하기 전까지 모든 출연작이 2억 달러의 박스오피스 수익을 올렸으며 2019년, 기준 인플레이션을 적용하면 20억 달러 이상의 수익이다. 1950년대-1960년대 가장 흥행이 좋은 배우들 중 한명이었다.
마지막 출연작이자, 미완성작인 영화, Something’s Got to Give도 있었으나 스캔들 문제로 정직 당한 후, 다시 재출연을 확정한 상태에서 그녀가 사망해 영화 자체가 폐기되었지만 영화사에서 부분적으로 공개를 해 클립 형식으로 볼 수 있다.
9. 미디어에서[편집]
- 영국에서 영화, '왕자와 무희'를 찍는 과정에서 감독인 로렌스 올리비에 밑에 조수로 일했던 콜린 클라크(Colin Clark)는 자신과 마릴린이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클라크는 이 경험을 책으로 2편을 써 냈는데, <The Prince, the Showgirl and Me>와 <My Week With Marilyn>이다. 전자는 드라마화되기도 했고, 후자는 2011년,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이라는 개봉명으로 영화화되었다. 아서 밀러와의 결혼 생활 중 여러 번의 유산과 부부 간의 여러 다툼으로 심적 고통을 받으며, 무수한 불안과 고뇌를 느끼는 마릴린의 본모습들과 고통 속인 현실에서 벗어나 콜린과의 치유적인 일주일 간의 휴가를 보낸다는 내용이다. 마릴린 배역을 연기한 미셸 윌리엄스에게 골든 글러브 여우주연상 수상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라는 영광을 안겨주었고 그 밖에 에디 레드메인이 콜린 클라크로, 케네스 브래너가 로렌스 올리비에, 엠마 왓슨이 스크린 타임 몇 분밖에 안되는 조연, 콜린을 짝사랑하는 분장실 스텝 역으로 출연한 초호화 캐스팅인 영화이다. 세간에는 이 영화가 실화에 기반하여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영화 속 배경은 사실이나 둘 사이의 관계는 전적으로 콜린 클라크의 주장이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믿는 건 옳지 않다.
- 넷플릭스에서 마릴린에 대한 소설 원작 영화[57] '블론드'가 나왔는데, 아나 데 아르마스가 마릴린 배역을 맡았다.[58] 루머로 수위가 높아서 넷플릭스 측에서 편집을 요구했으나 감독이 거부, 결국 장기간의 논의 끝에 그대로 개봉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트레일러 공개를 하면서 제한상영가 등급인 NC-17등급이 확정되었다.
- 영화 금발이 너무해의 대사 속 "재키(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해야지, 마릴린(마릴린 먼로) 말고."라는 언급이 있는데, 영화의 맥락상 금발은 멍청하다는 편견으로 남성 배역이 정치적 입지를 위해 금발인 주인공 대신 갈색모인 배역을 원한다는 의미로 존 F 케네디와의 관계가 유명한 마릴린과 재클린을 인용했다.
- 드라마 Quantum Leap 5기 18화 "Goodbye Norma Jean"에서는 실제 역사였다면 사망해야 하지만 샘의 개입으로 마지막 작품이 되는 영화를 찍고 영화계에서 은퇴한다.
- 마이클 셰이본의 대체역사소설 유대인 경찰연합에서는 리 하비 오즈월드에게 암살당하지 않고 영부인인 재클린 케네디와 이혼하는 데 성공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마릴린 먼로와 재혼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 게게게의 키타로에도 등장하는데 먼로라는 이름으로 원작에서 첫등장하여 애니판 2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릴린이 요괴로 나온다. 더 이상한 건 피이라는 물고기와 파충류를 닮은 요괴를 남편으로 두고 있다는 점. 이 작품에선, 빌런으로 등장한다.[59]
- 영화 레옹에서 마틸다 배역의 나탈리 포트만이 레옹 앞에서 여러 퀴즈를 내는 장면이 있는데 그 중, 마릴린의 모습을 패러디했다. 해당 장면은 존 F 케네디 생일 파티에서 'Happy Birthday Mr. President' 자작곡을 부른 마릴린 패러디.
- 소설 신에서 신 후보생 중 하나로 등장한다. 말벌을 상징으로 하는 민족을 이끌며 상위권에 달하는 성적을 받을 정도로 선전했으나 살신자의 표적이 되어 사망하고 만다. 이후 뮤즈로 다시 태어나는데 관장하는 영역은 바로 영화.
-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에서는 마이콜의 노래 가사 중간에 마릴린 먼로가 들어갔는데, 직접 출연은 아니지만 또치가 마릴린 먼로, 도우너가 말론 브란도 코스프레를 한 모습이 잠깐 나왔다.#[60]
- 2024.05.21자 벌거벗은 세계사 시즌 3 152화엔 마릴린 먼로를 다뤘다. 여담으로 해당 방송 중 1시간 20분~21분 사이에 나오는 내용은 1960년 12월, 2주 동안 마릴린 먼로는 주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홀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적이 있는데, 냉전시절 마릴린이 소련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비밀리에 모스크바를 '마샤(Masha)'라는 가명으로 방문, 소련 영화 관계자들과 미팅을 가졌다는 내용이다.[61] 일단 오늘날 러시아 측은 사실이라 주장한다.# 다만 마릴린의 지인들은 1960년 12월, 2주 동안 당시에 마릴린이 자주 그랬듯 산타 모니카 해변과 해변 옆 '퍼시픽 파크'를 들렀다가 돌아온 것일 뿐이라 주장한다.
10. 여담[편집]
- 동물 애호가로, 일생 동안 9마리의 애완동물을 키웠다. 첫 애완동물은 5살 때 키운 검정색 소형견이며 그 후, 코커 스패니얼, 보더콜리, 치와와, 페르시안 고양이, 바셋 하운드, 앵무새, 말, 푸들을 순서대로 키웠다. 일적으론 배우, 모델로 활동할 때 침팬지, 코끼리, 곰, 말, 양 등 동물들과 함께 촬영을 한 적이 있었고, 동물들과 함께한 촬영들이 커리어 중 가장 행복했던 촬영이었다고 한다. 또한 동물학대 문제에 깊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항상 동물보호에 노력했었다.
- 산소를 마시듯이 샴페인을 즐겼다고 한다. 샴페인 중 마릴린이 선택한 최고의 샴페인은 바로 파이퍼 하이직. 욕조에 샴페인을 부어서 호사스러운 목욕을 즐겼을 정도로 파이퍼 하이직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고 한다.
- 칸 영화제의 뮤즈라고 할 정도로 영화제 포스터에 많이 선정되었다. 제57회 칸 영화제, 제61회 칸 영화제, 제65회 칸 영화제에 선정됐다. 특히 칸은 마릴린을 자주 언급하며 많은 존경심을 보였다.
- 입가에 있는 점이 매우 유명하다. 흔히 애교점이라 불리는데 먼로점이라고 따로 불릴 정도다.
- 금발은 염색한 것이다. 본명인 노마 진의 이름으로 활동한 시기에는 머리색이 갈색이었다. 태어날 때는 밝은 금발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에도 금발이었지만, 많은 백인들이 그렇듯 청소년기부터 헤어색이 갈색모로 변했다고 한다. 사망 이후, 부검에선 체모가 갈색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확하겐 진저에 가까운 갈발이다.
- 아담할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키가 168cm이다. 당시, 미군 남성의 평균 신장이 170대 중후반이었으니 마릴린의 키는 평균보다 확실히 큰 편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 영화계는 남녀 가리지 않고 워낙 키가 큰 배우들이 많았기에 동세대의 여배우 중에선 압도적으로 큰 편은 아니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에 함께 출연한 제인 러셀은 170cm이고, 윗세대인 잉그리드 버그만은 175cm, 더 윗세대인 캐서린 헵번은 172cm이다.
- 플레이보이 잡지의 1953년 12월, 1호 표지 모델이었으며, 잡지 안에 신인시절에 찍은 누드 화보가 실려있다. 그 화보는 플레이보이가 직접 촬영한 게 아니라 몇년 전에 달력 화보로 촬영한 것을 플레이보이가 돈을 주고 구입을 했다. 그녀의 인기만큼 엄청난 수의 잡지가 팔렸고, 구입한 가격보다 훨씬 많은 이득을 봤다고 한다. 초기 자금이 넉넉하지 않았던 플레이보이는 그 이득으로 큰 투자를 해 잡지사를 크게 키울 수 있었다.
- 플레이보이 소유주인 휴 헤프너가 2017년 사망한 후 마릴린의 묘지 바로 옆자리에 묻혔는데 1992년에 이미 묘지 자리를 사놨다고 한다.# 해외 기사 댓글들은 “징그럽다”, “온갖 타락한 짓은 다 한 늙은 노인네 옆에 묻히게 되는 마릴린이 불쌍하다”가 대다수다.[62] 50여 년 전 요절한 마릴린이 휴 헤프너보다 연장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둘은 동갑이다. 심지어 생일도 휴 헤프너가 더 빠르다.
- 마릴린의 묘지 윗자리가 무려 57억원에 낙찰되었다. 2009년에 온라인 경매에서 신원 미상의 자산가가 구입했다고 한다. 광고 문구로는 "마릴린 먼로 바로 위에서 영원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여기 있다." 였다고 한다.
-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만난 모습이 영상에 찍혀있다.# 1956년 영국에서 할리우드와 유럽 영화계 인사들을 초청한 자리였는데 그때 마릴린은 영국에서 영화를 촬영하고 있어서 참석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로 마주보며 악수를 하고 간단한 얘기들을 나누는데 둘은 1926년생 동갑으로 굉장히 묘하고 아이코닉한 느낌이 든다.
- 빈센트 반 고흐의 유작을 1954년, 주한미군 위문 방문차 한국에 왔을 때 담당 경호원인 한 한국인 경호원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선물 해주었다는 소문이 있다. 그녀의 주변 지인들에게 돈을 아끼지 않는 인격을 생각한다면 있을법한 이야기지만 당시 담당 경호원이든, 관계자든 전부 미국인이었으며 어떤 한국인도 관련이 없었기에 말이 되지 않는 거짓말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사실무근으로 결론났다. 빈센트 반 고흐 진품 한국인 소유 사건 항목 참조.
- 카일리 제너가 마릴린의 엄청난 팬인데, 어느 정도냐면 집의 인테리어도 한 군데 뿐만 아니라, 여러 룸에 마릴린의 사진, 그림으로 장식해놨고 카일리의 지인인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카일리는 항상 마릴린에게 영감을 받고, 마릴린의 삶에 자신을 동일시 한다.” 라고 말한 적이 있는 수준이다.
- 가수 머라이어 캐리도 대표적인 마릴린의 팬이다. 특히, 상술한 마릴린의 불우한 처지와 심경에 깊이 공감하면서 자신과 어느 정도 동일시하는 경향 마저 보이는 정도. 머라이어의 <I Still Believe> 뮤직 비디오는 마릴린의 한국 위문 공연에 대한 오마주이고, 쌍둥이 딸의 이름을 먼로라고 짓기도 했다. 마릴린 관련 물품이 경매에 나올 때마다 비용에 제한선을 두지 말고 구입하라며 평소, 에이전트에게 언질 한다고 하는데 경매에서 낙찰받은 물품 중 하나가 생전, 마릴린이 소유했던 흰색 그랜드 피아노. 정말 소중히 아끼는지 남편이 피아노 위에 옷을 올려 놓았을 때 크게 화냈다고 한다.
- 논란 많았던 플레이보이 모델 안나 니콜 스미스가 컨셉과 롤모델이 마릴린 먼로인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가 마릴린이라는 주장까지 했다. 연예인으로서 급과 삶의 질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마릴린과 겹친다는 평이 있다.
- 2011년 7월, 시카고의 번화가에 있는 파이오니어 광장에 마릴린 먼로의 환풍기 씬을 재현한 대형 동상이 설치됐었다.# 크기가 8m나 되는 동상이며 마릴린의 얼굴 표정이나 옷, 발 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굉장히 정교하게 표현 되어있다. 특히, 뒷태의 재현이 리얼한데 흰색 속옷이 다 보이게 제작을 해놨다. 또, 주변을 울타리로 막은 것도 아니고 누구든지 자유롭게 만져볼 수 있도록 완전 개방해 놓았기 때문에 마릴린의 다리에 키스 하며 사진을 찍는다든지, 두 다리 사이에 서서 고개를 위로 들고 사진을 찍는 등 민망한 장면을 연출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너도 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설치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뿌렸는지, 그 높은 속옷 부분에 빨간 페인트들을 뿌려 놓는 등 마찬가지로 민망한 방식으로 동상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선정성 논란이 있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미국 날짜로 2012년 5월 7일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다만 논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철거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2012년까지만 설치해 둘 예정이었다고 한다. 이제 시카고에 가도 더 이상 볼 수는 없게 되었지만, 사진은 검색해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고 캘리포니아주로 옮겨졌다. 2014년 6월, 현재는 뉴저지주에 정착해 있다.
- 킴 카다시안이 2022, 멧 갈라에서 1962년, 존 F 케네디 생일 파티 때 입었던 마릴린의 누드색 드레스를 착용했는데 오마주, 모조품도 아니고 실제 입었던 드레스라고 한다. 1962년, 마릴린 이후로 첫 착용. 즉 두 번째 착용한 인물이 킴 카다시안이다. #[63]
- 영국의 록 음악가 엘튼 존과 그의 작사 파트너 버니 토핀은 1973년에, 마릴린을 추모하는 노래 Candle in the Wind을 발표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릴린에게 바치는 내용이면서 동시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모든 재능을 펼치지 못한 아티스트에게 바치는 명성의 대가에 관한 노래다.[64]
- 메건 폭스가 18살 때 마릴린의 큰 초상화를 자신의 오른쪽 팔에 타투로 새긴 걸로 유명하다. 어릴 때부터 마릴린이 우상이었으며, 강한 유대감을 느꼈었다고 한다. 청소년기엔 마릴린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울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었는데 갑자기 해당 타투의 제거술을 받았다. 이유로는 그녀처럼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될까 두려워 타투를 제거했다고 한다.
-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매릴린 먼로'이나, '마릴린 먼로'로 표기하던 관행이 워낙 철저히 굳어진 탓에 이걸 철저히 지키는 언론사가 드물다. 실제 발음을 들어 보면 '매릴린'으로 들리므로, '매릴린'으로 적도록 한 현행 국립국어원 규정이 비교적 현지 발음에 가까운 표기이긴 하다. 다만, 한글로 외국어 발음을 완벽히 재현할 수 없기에, 관행적 표기법인 ‘마릴린 먼로’ 또한 상관 없다.#
-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며 "얼굴과 몸매가 좋은 사람은 쓰레기 봉투 같은 걸 입어도 어울린다" 라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있다. 감자 포대를 잘라서 만든 원피스를 입은 화보가 있다.# 참고로 대공황 시기에 실제로 있던 스타일이다. 옷을 사거나 옷감을 사서 옷을 만들 수 없어서 포대를 잘라서 옷을 만들고는 했다고 한다.[66]
- 스티븐 호킹이 마릴린의 팬인 것으로 유명하다. 호킹의 연구실 중앙에 그녀의 매우 큰 사진이 붙여져 있으며, 만일 과거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전성기 시절의 마릴린 먼로와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 취미 중 하나로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극장에 가서 관객들과 보곤 했는데 스크린에 비치는 저렇게 빛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게 너무 좋다고 말했다고. 그러나 한편으론 외적으로 주목을 받으면 연기력을 우선시하는 배역을 따내기 어렵고, 동료들에게도 배우로서 높은 대우를 받을 수 없다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 과거 신인시절, 잠시 교제했던 인물 중엔 명감독이자 배우인 오슨 웰스도 있었다. 오슨은 마릴린을 제작사 거물들에게 소개를 시켜주고, 인맥을 쌓을 수 있게 도움을 주었지만 커리어에 큰 이득은 없었다.
- 마릴린하면 다들 레드 립스틱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오렌지색 립스틱을 주로 썼다고 한다. 이는 당시 테크니컬러의 기술적 한계로 빨간 립스틱은 적갈색으로 보이고 오히려 오렌지색 립스틱이 화면에서 빨갛게 보였기 때문이라고. 이 오렌지색 립스틱은 실제 판매되던 색이 아니라 시제품으로, 컬러를 마음에 들어 한 마릴린이 특별주문을 해서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 조 디마지오와 신혼여행으로 일본을 갔을 때 국빈급 대우를 받으면서 일본의 문화부 장관과 여러 정치인들을 만나기도 했었는데 히로히토 천황 부부에게 다이아몬드가 박힌 진주 목걸이를 선물 받기도 했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엮이기도 했었는데 지인과의 대화 중에 성관계를 같이 하고 싶은 남성들을 얘기했는데 마릴린은 아인슈타인을 원했다고 한다. 실제로 마릴린은 지적이고 아버지같이 성숙한 남성을 매우 좋아했다. 아인슈타인과 마릴린 서로의 관계에 대해선 여러 말들이 있긴 하지만 정확히 사실로 밝혀지지는 않았다.[69]
- 유색인종에게 친절했던 마릴린은 특히, 미국에서 많은 차별과 억압을 받던 흑인들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스타가 된 후에도 여러 흑인 지인들과 공개적으로 어울렸고 재주 가수인 엘라 피츠제럴드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여러 클럽의 공연을 거부당하자 마릴린은 유명 클럽 Mocambo의 사장에게 엘라를 소개해주었는데 끝까지 핑계들을 대며 거부하자 마릴린은 "엘라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다면 나는 밤마다 그 클럽에 갈 것이다." 라고 말하며 엘라에게 공정한 기회를 찾아 주었다고 한다.# 엘라는 “I owe Marilyn Monroe a real debt.”(난 마릴린 먼로에게 큰 빚이 있다.)는 말을 남기며 그녀에게 평생 감사해했다.
- 숨소리에 잠긴듯한 저음의 목소리가 굉장히 유명한데 마릴린의 섹스 심볼 위치에 목소리의 영향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자의 목소리는 마릴린 먼로처럼 숨소리가 포함된 목소리라고 한다. 반대로 싫어하는 소리는 고음으로 갈라지는 목소리.
- 평소 스테이크를 식생활에서 자주 즐기며 육류를 선호했는데 건강과, 다이어트 목적으로 채식과 과일 위주의 식습관으로 바뀠다고 한다. 1962년에는 당근과 우유만 먹고 다이어트를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