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이 히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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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히데키의 수상 이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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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1992~2005).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1994
2000
2002

파일:NYY_2009_WSChampion.png
MLB 월드시리즈
우승반지
2009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9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토마스 오말리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마쓰이 히데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후루타 아츠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0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노구치 시게키
(주니치 드래곤즈)

마쓰이 히데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로베르토 페타지니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2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로베르토 페타지니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마쓰이 히데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가와 게이
(한신 타이거스)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95~2002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나인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0~2002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든 글러브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1년 센트럴 리그 수위타자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98, 2000, 2002년 센트럴 리그 최다 홈런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98, 2000, 2002년 센트럴 리그 최다 타점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98, 2000, 2002년 센트럴 리그 최고 출루율




보유 기록(MLB)
데뷔 시즌 최다 출장
163경기[1]
데뷔 이후 최다 연속 출장
325경기[2]
포스트시즌 1경기 최다 안타
5안타[3]
포스트시즌 1경기 최다 득점
5득점[4]
월드시리즈 1경기 최다 타점
6타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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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히데키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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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55번
척 캐리
(1992)

마쓰이 히데키
(1993~2002)


오오타 타이시
(2009~2013)
뉴욕 양키스 등번호 55번
라미로 멘도사
(1996~2002)

마쓰이 히데키
(2003~2009)


러셀 마틴
(2011~2012)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등번호 55번
션 오설리반
(2009)

마쓰이 히데키
(2010)


제레미 무어
(2011)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등번호 55번
조시 아웃먼
(2008~2009)

마쓰이 히데키
(2011)


션 머나야
(2016~2021)
탬파베이 레이스 등번호 35번
댄 휠러
(2007~2010)

마쓰이 히데키
(2012)


제이미 라이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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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양키스 GM 특별 고문
마쓰이 히데키
松井秀喜 | Hideki Matsui

출생
1974년 6월 12일 (49세)
이시카와현 노미군 네아가리마치
(現 이시카와현 노미시)
국적

학력
세이료 고교[6] (이시카와)
신체
188cm, 95kg, O형[7]
포지션
외야수[8]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93년 드래프트 1라운드 (요미우리)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3~2002)
뉴욕 양키스 (2003~2009)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2010)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2011)
탬파베이 레이스 (2012)
프런트
뉴욕 양키스 GM 특별 고문 (2015~)
등장곡
고질라 OST
응원가
요미우리 시절[9]

1. 개요
2. 프로 입문 전
2.1. 유년기
2.2. 세이료 고등학교 시절
3. 선수 경력
3.1.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3.2. 뉴욕 양키스 시절
3.3. 양키스 시절 이후
3.4. 은퇴
4. 은퇴 후 행보
4.1. 자원 봉사
5. 플레이 스타일
5.1. 타격
5.2. 수비 / 주루
6. 이모저모
6.1.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7. 연도별 기록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Godzilla 松井秀喜.webp

일본의 전 야구 선수, 현 뉴욕 양키스 GM 고문. 별명은 '고질라(Godzilla)'.

현대 일본 야구계에서 가장 뛰어난 족적을 남긴 선수들 중 한 명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뉴욕 양키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써 활약하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2. 프로 입문 전[편집]



2.1. 유년기[편집]


아버지 마쓰이 마사오(松井昌雄)의 영향으로 한신 타이거스의 팬이 되었고, 6살 때 처음 한신 고시엔 구장에 가서 카케후 마사유키의 사인볼을 받은 후 카케후를 동경하는 베이스볼 키즈로 자랐다. 아버지의 권유로 소학교 1학년 때 3학년 이상 수준의 연식야구팀에 입단시켰지만 너무 어린 나머지 감독의 지시를 이해 못하는 등 야구랑은 좀체 친해질 수 없었다. 대신 또래보다 체격이 커서 유도스모 선수로 활약했다.[10]

중학교에 입학하고서 야구, 유도 중 뭘 할까 고민하다가 중학교에 유도부가 없어 결국 야구에 전념하게 됐다. 이때는 주로 포수투수로 활약했는데, 타자로서 중학 통산타율이 6할대를 넘기기도 했고, 3경기 연속 홈런도 기록하기도 했다. 중3 때 친 홈런의 비거리가 130m에 달하기도. 하지만 이미 중학교를 졸업할 당시에 몸무게가 90kg를 가볍게 뛰어 넘을 정도로 비만이었고, 세이료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 야구부 감독으로부터 80kg까지 다이어트 하고 오라고 듣기도 했다.

원래 동네야구 시절 우타자였으나 실력차를 극복하지 못한 친형과 친구들이 우타석에서 타격하면 같이 야구 안하겠다고 하여 할 수 없이 좌타석에 들어섰는데 잘 맞아서 좌타자의 길로 나섰다.


2.2. 세이료 고등학교 시절[편집]


사실 마쓰이는 세이료(星陵) 고등학교가 아닌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공립 고마쓰메이호 고등학교로 진학하길 원했지만, 세이료 고등학교에서 마쓰이의 실력을 높게 평가하여 진학하게 됐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초창기에는 투수로 활약했지만, 정작 마쓰이는 "투수는 별로"라는 얘기를 해 바로 1루수로 전향했다. 그리고 다시 3루수로 포지션을 옮기면서 벌써 1학년부터 3루수, 4번 타자 주전을 맡았다. 팀도 여름 고시엔에 나갔지만 첫 경기에서 광탈. 하지만 2학년 때 팀을 여름 고시엔 8강까지 이끌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여름 방학에 야구부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한 체력측정에서 "기요하라 가즈히로 이후로 처음 나오는 기록"이라고 들을 정도였다.

고3이 되자 이미 세이료 고등학교의 스타가 됐고, 고시엔 선발대회(봄 고시엔)에서 나가시마 시게오가 보는 앞에서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11] 아쉽게도 여름 고시엔 2회전에서 메이토쿠기주쿠고교[12]에게 패해 탈락했지만, 이 경기에서 무려 5연타석 고의사구를 얻어내 일본 고교 야구연맹에서 갑작스레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13] 어쨌든 마쓰이 히데키는 싹부터 남달랐다.

어쨌든 고교 시절 통산 타율 .450, 60홈런을 기록해 1992년 드래프트 전부터 주목을 받았다.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주니치 드래곤즈,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4개의 구단으로부터 1위 지명을 받아 이 중에서 교섭권을 얻은 요미우리에 입단했다.(계약금 1억 2,000만엔, 연봉 720만엔)


3. 선수 경력[편집]



3.1.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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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시즌인 1993년 스프링 캠프 때부터 요미우리 OB나 스태프로부터 "오 사다하루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입단 시절부터 달기 시작한 등번호 55번이 오 사다하루의 단일 시즌 최다홈런 수에서 유래했을 정도. 데뷔 시즌 성적은 57경기 .223/.296/.451로 딱히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11개의 홈런을 치면서 장타력은 이 때부터 싹이 보였다.

이후 2년차부터 2년 동안 전 경기 출장을 하면서 2할 후반대의 타율과 20홈런을 치며 완전히 주전으로 자리 잡은 마쓰이는 96시즌에 .314/.401/.622 38홈런 99타점으로 폭발하면서 센트럴 리그 MVP를 수상, 요미우리의 대표 선수로 거듭났다. 이후 꾸준히 3할 타율과 30+홈런을 찍어주면서 요미우리의 순혈 4번 타자 계보를 이어나갔고, 98시즌에는 첫 번째 홈런왕와 타점왕 타이틀 득템, 2000시즌에는 MVP와 홈런왕, 타점왕을 거머쥐었고[14] 2001시즌에는 수위타자 타이틀 획득, 일본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2002 시즌에는 .334/.461/.692 50홈런 107타점이라는 성적을 찍으면서 다시 MVP, 홈런왕, 타점왕 타이틀을 싹쓸이했다. 이 해 포스트시즌에서도 맹활약하며 일본시리즈 우승 및 일본시리즈 MVP까지 차지했다.

이미 요미우리로부터 2000 시즌이 끝나고 8년간 56억 엔, 2001 시즌이 끝나고는 5년간 50억 엔이라는 초대형 계약을 두 번이나 제시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단년 계약을 체결, 향후 얻게 될 FA 자격을 통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갈 것이라는 암시를 하고 있었다.

선수 시절의 화려한 성적으로 인해 동시대에 퍼시픽리그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스즈키 이치로와 많이 비교가 됐는데, 가지고 있는 타이틀은 이치로가 더 많았지만 홈런 타자가 주는 매력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4번 타자라는 상징성이 더해져서 NPB 시절 인기는 마쓰이가 더 높았다.[15] 지금은 이치로의 메이저리그와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 때문에 인기도 역전된 느낌이지만 사실상 둘은 거의 대등한 실력의 선수로 취급받았다.[16]

이 당시 마쓰이가 이적하자마자 일본에서 프로야구의 인기가 잠시 주춤했다는 점을 봐도 마쓰이가 일본 야구계에서 가지는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3.2. 뉴욕 양키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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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프로야구를 평정하고 FA가 되기 직전 초거대 계약을 거절한 그는 2002 시즌 종료 후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 메이저리그 최고의 명문 구단인 뉴욕 양키스와 3년 $21M 계약을 체결하고, 3년간 .297 .370 .484이라는 좋은 활약을 펼쳤다.
참고로 그의 베이스볼 아메리카 유망주 순위 7~8위였다. 비슷한 수준의 (역대) 톱급 유망주들의 성적은 메이저 리그 유망주 순위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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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해인 2003 시즌은 홈 개막전에서 만루홈런을 치면서 인상적으로 시작했으며 신인왕급 성적인 106타점을 쌓은데다 이달의 신인상 수상은 물론이고 올스타에도 뽑혔다. 거기다 163경기 연속 출장으로 신인 기준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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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해외리그에서 정점을 찍고 온 중고 신인이라는 이유로 기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컸으며 아예 표를 주지 않는 기자들까지 있어[17] 신인왕 투표에서 캔자스시티의 앙헬 베로아에 4포인트차로 신인왕을 내줘야 했다.[18] 당시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 역시 2001 스즈키 이치로와 2000 사사키 카즈히로의 예를 들어 일본에서 뛰다 온 선수도 신인왕 자격이 있다 주장했지만, 기자들의 반발심리 자체가 그 일본인 선수들이 신인왕을 연속으로 가져간 것에서 유래했기에 마음을 돌리는데 실패했다. 거기다 당시 마쓰이가 겨우 4포인트 차로 패했기 때문에 [19] 아예 표를 주지 않은 기자들이 최소 3위 표만이라도 줬어도 신인왕은 마쓰이가 받았을 것이다.[20] 사족으로, 3위가 현 미네소타 트윈스의 감독인 로코 발델리고 5위는 양키스에서 은퇴한 마크 테세이라다.

당시 뉴욕 타임스 등 뉴욕의 언론들은 물론이고 여러 언론들 역시 부당한 처사라며 기사를 써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018년 신인왕 투표 때 양키스 팬들은 오히려 이 논리를 똑같이 들어 오타니 쇼헤이 대신 미겔 안두하의 수상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오타니의 1위 표 몇 장을 뺏어 올 수는 있었지만 이쪽은 애초에 성적과 이도류 임팩트 차이가 너무 나서 오타니가 받았다.[2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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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는 시즌이 개막하기 전 3월에 일본에서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친선경기를 가졌으며 이때 활약해 MVP에 선정됐다.

수준이 보다 높은 메이저리그 투수들에게 적응하기 위해 스윙을 변화시키면서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동할 때보다 홈런은 상당히 줄었으나 2004 시즌에도 전경기를 출장하며 31홈런을 때려내면서 아시아인 메이저리그 단일시즌 최다 홈런을 기록했고[23] 올스타에도 2년 연속으로 뽑히게 되었다. 또한 강타자의 정석인 3할 30홈런 100타점은 거의 기록할 뻔 했으나 막판에 약간 부진하여 타율 .298를 마무리하게 되어 아깝게 실패했다. 그리고 타출장도 탑급 타자의 증표인 3-4-5를 기록할 수 있나 했지만 이 역시 막판 부진으로 실패하고 만다. 그래도 시즌 OPS 9할대를 기록하며 스테로이드 시대임에도 불과하고 MVP표도 받았다. 2005 시즌에도 좋은 활약을 이어가 MVP 14위에 올랐다.

또한 찬스마다 적절한 클러치 히팅 능력을 발휘하여 매년 꾸준히 100타점 이상을 쓸어 담으며 고질라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양키스의 4번 타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포스트시즌에서의 활약이 빛났는데 1.100이 넘는 OPS로 디비전 시리즈를 마무리했을 뿐만 아니라 커트 실링을 상대한 2004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에서는 5타수 3안타 5타점을 기록하면서 실링을 완벽히 KO시켰고 3차전에서도 무려 6타수 5안타 5타점을 기록하며 맹활약하여 '빅게임 히터'라는 것을 증명했다.

만약 양키스가 이 시리즈를 이겼다면 챔피언십 시리즈 MVP는 당연히 마쓰이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4년 $52M 연장에 합의하고 조니 데이먼이 양키스에 입단한 2006년부터 그는 부상에 시달리게 되는데, 2006년에는 수비 중 슬라이딩으로 뜬공을 처리하다 손목이 골절되어 거의 시즌 반을 날려먹었다가 9월에 겨우 복귀했으며, 미일통산 2천 안타를 기록하게 된 2007년에 이달의 신인상도 수상하면서 다시 풀시즌을 소화하는가 했더니 2008년 외야수에겐 치명적인 무릎 부상으로 수술을 겪으며 지명타자로 전환하게 된다.[24] 이 부상들 때문에 마쓰이 수비수치가 수직 하락하게 되는데 커리어 WAR이 상당히 낮은 것도 이 때문... 처음에는 중견수를 봐도 될 정도였지만 후에는 오히려 수비를 나오는 게 매우 큰 마이너스가 됐을 정도였다.

그래도 타격만큼은 죽지 않아 꾸준히 OPS 8할과 100타점 내외를 기록할 수 있는 고질라로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여러모로 뛰어난 활약을 할 시기에 부상이 설상가상으로 겹치며 잘 활약할 기회가 줄어 아쉬웠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부상만 당하지 않았어도 좀 더 좋은 커리어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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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003 시즌에 163경기, 다음해까지 325경기 연속 출장으로 데뷔시즌 최다 출장 기록과 신인 최다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은 물론이고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출장 공동 3위를 기록[25]을 보유하고 있을 만큼 철강왕이었지만 그 후 수비 상황에서 겹겹이 겹친 부상으로 커리어에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많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2009년, 팀의 주전 지명타자로 활약하며 팀의 리그 우승과 월드시리즈 진출에 공헌한 그는 페드로 마르티네스클리프 리가 버틴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무려 .615의 타율과 20할이 넘는 OPS로 팀의 27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월드시리즈 6경기 중 5경기 출장 13타수 8안타 타율 0.615, 3홈런 8타점 OPS 2.027.

풀 타임 지명타자였기 때문에 절반만 선발출장할 수 있었고, 나머지 경기는 강제 벤치행이었음에도 벤치에 앉아있던 와중에도 대타로 나와 홈런을 때렸을 정도로 활약이 대단했다. 2차전에선 1대1 동점 상황에서 결승 솔로포를 터트렸고, 3차전엔 대타로 나와 쐐기포로 2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 특히 6차전에서 양키스와 십수년간 라이벌리를 형성했던 페드로를 상대로 기록한 6타점[26]은 그 백미.

이 무시무시한 활약으로 인해 월드시리즈 MVP까지 수상하게 된다. 93년 폴 몰리터 이래 두 번째이자 16년만의 지명타자 MVP.

하지만 마쓰이의 적지 않은 나이와 그동안 입었던 부상, 결정적으로 지명타자밖에 할 수 없는 한계로 인해 양키스는 그와의 재계약을 포기하였다. 지명타자 자리가 비어있는 팀이라면 잡겠으나 팀은 스타군단 뉴욕 양키스였고, 마크 테세이라호르헤 포사다, 닉 스위셔 등등 지명타자로 기용해야 할 선수들이 번호표를 뽑고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명타자로밖에 쓸 수 없는 마쓰이를 잡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재계약이 결렬되긴 했지만 마쓰이의 실력이 떨어진 것도 아니라 러브콜을 하는 팀은 많았고 월드시리즈 우승도 거둔 직후인지라 서로서로 웃는 얼굴로 기분좋게 헤어질 수 있었고 실제로 곧바로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와 600만 달러 이상의 섭섭치 않은 금액에 메이저 계약을 맺었다.


3.3. 양키스 시절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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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키스를 떠난 마쓰이는 우연히도 양키스의 홈 개막전 상대인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에 입단하여 동료들과 양키스 팬들로부터 환대를 받으며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수령했고, 월드시리즈 MVP이자 양키스의 2000년대를 풍미한 선수로서 기립박수를 받았다. 타석에 들어설 때와 필 휴즈에게 홈런을 때려냈을 때에도 박수갈채를 받기도.

하지만 나이에 따른 노쇠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1년 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로 옮기면서도 계속해서 성적이 하락했다. 타격 친화 구장인 양키 스타디움을 벗어나 리그의 대표적인 투수 친화 구장들만 돌아다녀서 그런 원인도 있겠지만, 그래도 미일 통산 500홈런이라는 금자탑을 세우기도 했다.

2012년 뉴욕 양키스헤수스 몬테로시애틀 매리너스로 트레이드한 뒤 양키스 복귀설이 있었지만 양키스가 라울 이바녜즈를 영입하며 무산됐다. 일본프로야구 복귀 대신 연봉에 구애 없이 빅리그에 남겠다는 본인의 의지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링크가 났지만 이 역시 무산.

그러다 결국 2012년 5월 1일(현지시각) 탬파베이 레이스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당시 이미 레이스에서는 맷 무어가 55번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마쓰이는 프로생활 최초로 55번 이외의 번호를 달게 됐다. 결국 35번을 달며 2012년 5월 29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홈경기에 나와 2012 시즌 첫 홈런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100여 타석에서 부진을 거듭하고 결국 7월 말 지명할당되었다.


3.4. 은퇴[편집]


결국 2012년 오프시즌 중에 은퇴를 선언하였다. 일본프로야구 복귀를 바라는 사람도 많았지만 마쓰이는 "이미 일본프로야구를 떠난 지 10년이 넘었고 본인도 10년 전만큼 할 자신이 없다."라고 하면서 복귀하지 않았다. 이후 뉴욕 양키스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을 예정이라고 한다.

2013년 4월 7일, 스승인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국민영예상 수상이 결정되었고(나가시마가 22호, 마쓰이가 23호) 5월 5일 도쿄돔에서 은퇴식과 국민영예상 시상식을 가졌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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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현지시각 7월 28일에 뉴욕 양키스와 1일 마이너 계약을 했고 이날을 마쓰이 데이로 정하고 양키 스타디움에서 마쓰이 버블헤드 행사와 은퇴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이 정도로 대우를 받는다는 것에서 보듯이 양키스에 있어서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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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은퇴 후 행보[편집]


2014년 하라 다쓰노리가 이끄는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한신에게 패배해 광탈당하면서, 하라 감독 경질설이 대두. 마쓰이가 교진군의 춘기 캠프에 후배들 조언차 방문하면서 마쓰이 히데키 감독설이 부상했다. 그런데 본인이 "(올해는) 오고 싶지 않다"라고 발언해서 시간이 좀 지나면 감독을 하는게 거의 확실시되고 있었다. 원래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다른 팀에서 한 번이라도 뛴 적이 있는 선수나 코치를 감독으로 앉히지 않는 관례가 있다. 물론 후지타 모토시 같은 예외도 있으니, 프런트가 일본 구단이 아닌 MLB에서 뛴 이력을 문제로 삼지 않을 개연성은 존재한다.

헌데 2015년 뉴욕 양키스의 GM 특별고문에 취임했다는 게 전격 발표 되면서 설레발치던 일본 매스컴과 요미우리의 프런트는 충공깽. 그 후 하라 감독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요미우리 프런트와 하라 감독이 실제로 수차례에 걸쳐 마쓰이를 감독으로 취임시키려고 했는데 거절했다는게 밝혀져서 감독이 될 가능성은 상당히 낮아진 상태.#

결국 요미우리가 더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다카하시 요시노부에게 감독직을 맡기면서 훗날을 기약하게 되었다. 다만 다카하시가 3년 만에 성적 부진으로 퇴진하고 하라 감독이 다시 요미우리 지휘봉을 잡으면서 2019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하는 아베 신노스케 등과 함께 하라의 후임 감독으로 부임할 가능성이 되살아났다.



2015년에는 앤디 페티트의 영구결번식에도 참여하는 등 팀 동료들의 행사에도 많이 초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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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2015 시즌 후 뉴욕 양키스의 최고 스타 데릭 지터가 직접 일본을 방문하여 선수 시절에도 친했던 마쓰이와 만나 행사를 벌였다. 이때 데릭 지터는 마쓰이는 정말 뛰어난 선수며 2009년 월드시리즈에서의 활약은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016년에는 양키스 구단에서 마쓰이를 위한 만찬을 열었고 마쓰이는 이날 pride of the yankees 상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다음날 양키 스타디움에서 시구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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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2016 양키스 올드 타이머스 데이에 출전하였으며 마쓰이는 홈런을 치는 등 맹활약했다.

2018년에는 노모 히데오에 이어 아시아 2번째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후보로 이름을 올렸으나 저조한 득표율(0.9%)로 결국 첫 턴에 광탈하였다. 사실 누적 부족으로 누구나가 예측한 결과지만, 명전 후보 최소조건인 딱 10년만 뛰고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다. 말 그대로 기록보다는 기억으로 남은 선수라 할 수 있겠다.

대신 같은 해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최연소로 입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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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기념하기 위해 마쓰이를 다시 양키 스타디움으로 불러 축하 행사를 벌였다.

이후로는 친정 교진의 초청으로 스프링캠프 임시 코치를 하거나, 미일 올스타전 때 미국 올스타(...) 코치로 나서거나 하는 등 코치로서는 본격적인 행보를 밟고 있지는 않고 이벤트성으로 잠깐씩 하는 정도이고, 그냥 재단을 세워 자원봉사를 하는 데 주력하고 있고 유유자적하게 인생을 즐기며 사는 중이다.

미국이나 일본 야구는 웬만큼 성공한 스타 선수는 은퇴할 때까지 벌어놓는 연봉 총액이 수백 내지 수천억 원을 넘어서 평생 일을 안 해도 호화롭게 먹고 살 수 있다. 특히 메이저리거의 경우는 로스터에 등록해서 43일 이상만 뛰면 죽을 때까지 연금이 나오며, 이 액수는 누적된 경기타임에 따라 비례해서 올라가서(최소 $30,000 이상, 최대 10년 누적 $300,000 수준) 돈 걱정이 없다. 오히려 먹고살려면 계속 돈 벌어야 하는 그저 그런 선수들이 계속 야구로 밥벌이를 하기 위해 코치를 하고 하다 보니 감독까지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대스타들은 정말 야구 중독자라 야구가 좋아서 야구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은 이렇게 은퇴 후엔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경우가 많다.

선수가 아니라도 코치나 감독도 꽤 고생스러운 일이다. 시즌 중에는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해야 하는 데다 미국은 원정 거리도 길어서 비행기 이동이 거의 필수인지라 운동을 안 해도 일 년의 절반을 비행기 타며 날짜변경선 넘나드는 것만으로 신체적으로 충분히 힘든 일이다. 일본은 일본대로 어느 정도 거리까지는 버스 이동이라 버스 타고 털털거리며 돌아다니는 것도 힘든 일이고. 한국의 경우 선수로 대성해도 선수로 벌어들이는 연봉 총액이 얼마 안 되어서[28] 세금 떼고 뭐 하고 하다 보면 은퇴 후 그 돈으로 평생 잘 먹고 잘 사는 건 무리가 있어서 일을 계속해야 하니 스타들도 지도자를 많이들 원해서 스타들이 감독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 일본은 굳이 그렇지 않다. 한국도 현역 세대는 국내리그만으로 누적 연봉 150억 원을 넘기는 선수가 나오고 있고 2020년대엔 누적연봉 200억 원을 넘기는 선수도 등장했으니, 지금 현역인 세대가 은퇴할 때 쯤이면 양상이 바뀔 것이다.


4.1. 자원 봉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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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는 원래부터 사회에 봉사하고 기부하기로 잘 알려진 선수인데 2004년 남아시아 대지진때 직접 자기 연봉의 상당부분을 기부했고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때도 7억 원을 기부했다.

또한 은퇴 후 직접 마쓰이 55 베이스볼이라는 비영리 자선단체를 사비로 설립하여 미국 및 일본 등의 나라의 어린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쳐주고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5. 플레이 스타일[편집]



5.1. 타격[편집]




정면에서 본 타격폼[29]


측면에서 본 타격폼
NPB에서는 전형적인 홈런 타자로 1996 시즌부터 7년 연속 30+홈런을 기록한 요미우리 거포 계보를 잇는 선수다. 홈런 타자답게 삼진도 좀 먹는 편이지만 선풍기 수준은 아니고, 선구안도 괜찮아서 볼넷도 많이 얻어 나가는 게 특징. 통산 타율(.304)에서 볼 수 있듯이 무조건 홈런만 노리는 타입의 타자도 아니었고 필요할 때는 꼭 한 방씩 쳐주는 클러치 능력도 겸비하고 있었다. 특히 비거리가 굉장히 긴 편으로 일본 리그 기록으로 평균 홈런 비거리가 120미터를 넘을 정도로 일본인 타자 중에서는 단연 톱이었다.

수준이 한 단계 올라갔고 일본보다 넓은 스트라이크 존에 대응하기위해 메이저리그에서는 타격폼을 수정해야했고[30] 3할 타율 언저리에 OPS 0.8~0.9 정도 찍어주는 중장거리형 타자로 바뀌었다. 메이저리그 첫해에는 적응이 완벽하지 않아 7할대 후반 OPS에 홈런도 16개만을 기록해 메이저리그 진출 직전 시즌의 1/3로 줄어서,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가 "스테이크를 시켰더니 햄버거가 나왔다"라는 발언을 하는 등 구단을 실망시키기도 했다.[31] 하지만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친 마쓰이는 2004년 아시아인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최다 홈런인 31홈런을 기록하며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부상으로 고생한 2006년과 2008년을 제외하면 매해 준수한 타격 능력으로 팀 타선에 보탬이 되었다.

또한 마쓰이는 클러치 히터로도 유명하다. 2003년부터 3년 연속 100타점을 기록하고, 포스트시즌에서도 커트 실링, 페드로 마르티네즈같은 메이저 올타임 레전드급 투수들을 떡실신시키고 신기록을 여럿 작성할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이는 등 클러치 히터의 이미지가 강하다. 이는 이미지 뿐만 아니라 기록상으로도 드러나는데, 마쓰이의 득점권 통산 OPS는. 851로 비득점권일 때보다 5푼 가까이 높고, 팀이 접전 상황을 치르는 Late & Close 상황에서는. 889까지 올라간다. 레버리지로 봐도 로우 레버리지일 때 비해 그렇지 않을때의 OPS가 더 높다. 포스트시즌에서 보여준 대활약도 마찬가지로, 정규 시즌 통산 OPS가. 822인 선수가 포스트시즌 OPS는. 933이다. 포스트시즌 기록이 모두 양키스 시절 기록된 점을 감안해 양키스 시절 OPS 하고 비교해본다 해도, 양키스 시절 통산 OPS가. 852니 이보다도 8푼이나 높은 것. 커트 실링을 두들긴 2004 ALCS나, MVP에 선정된 2009년 월드 시리즈는 그중에서도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재밌는건 정작 ALDS에서는 OPS가 8할대 초반으로 두드러지지 않는데, 2005~2007년 3시즌 동안 ALDS에서 꾸준히 6할대 초반의 OPS를 찍으며 마쓰이답지 않게 부진했던 점이 원인이다. 그런 선수가 포스트시즌 통산 OPS가 9할이 넘으니, ALCS와 월드 시리즈에서 보여준 임팩트가 어느 정도인지는 길게 말 할 필요가 없을 듯. 여러모로 양키스에 딱 어울리는 빅게임 히터라고 할만한 선수.[32] 어떻게 보면 기록보다 기억으로 더 남았다고 할법한 선수.

물론 이것도 메이저리그의 마쓰이에게 해당되는 말이지 NPB의 마쓰이는 기록으로나 기억으로나 그냥 레전드다. 마쓰이가 때려낸 미일 통산 507홈런(NPB 통산 332홈런+MLB 통산 175홈런)은 이는 일본인 타자들 중에서 역대 7위에 해당되는 기록이고,[33] 미일 통산 2,643안타로 일본프로야구 명구회의 입회 기준인 통산 2,000안타도 넘겼다. 단순 NPB 통산 성적이라고 해도 역사에 남을 정상급의 기록인데, 이게 NPB 성적도 아니고 만 29세부터 10년간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남긴 성적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만 28세까지 332홈런을 몰아친 마쓰이가 메이저 진출 없이 NPB에만 있었다면 어떤 기록을 남겼을지도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5.2. 수비 / 주루[편집]


본래 수비툴과 주루툴도 좋았던 선수였다. 일본에서는 요미우리 시절에 주로 중견수를 봤고,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이후에는 버니 윌리엄스의 존재로 인해 좌익수로 주로 나서긴 했으나 가끔 중견수 땜빵을 들어갈 정도로 수비력이 괜찮다는 평을 들었다. 그렇게 강견은 아니지만 민첩한 송구 동작으로 보살을 잡아내는 능력도 있었던 선수. 여기에 후술하겠지만 스피드도 준수해서 외야 수비 범위에도 도움이 되었다.

다만 이는 클래식한 현장 관점에서의 평가고, 세이버메트릭스 지표로 보면 거의 리그 최하위 수준의 좌익수였다. 마쓰이에게 치명적이었던 무릎 부상을 당하기 전인 2007년까지의 지표를 보면, 수비 종합 지표가 5시즌 동안 총 1000이닝을 넘긴 모든 좌익수 58명 가운데 57위였다. UZR도 5시즌간 -60.3을 기록해 57위. 그나마 UZR/150으로 계산하면 -16.4가 되어 56위로 올라가긴 하지만 57위로 밀린 라이언 클레스코(-18.7)보다 마쓰이가 3,000이닝 가량 더 출전한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이게 어느 정도 수준이냐면, UZR은 당대 메이저 최악의 수비수로 이름높던 애덤 던(-48.5)보다 낮고 UZR/150은 1루수 메인에 알바로 좌익수를 보는 케빈 유킬리스(134이닝 -16.6)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리고 마쓰이보다 이게 안좋았던 선수는 매니 라미레즈 단 한 명. 세부 지표를 좀 더 보면 이유가 어느 정도 드러나는데, 보살 능력은 준수해서 1000이닝 이상 소화한 58명 가운데 16위일 정도로 괜찮지만, 그거 제외하고 수비 범위도 캐칭도 다 낙제점이었다. RngR과 ErrR 둘 다 밑에서 2등. 사실 클래식 지표로 봐도 2003년과 2004년 좌익수가 한 시즌 7실책을 기록할 정도였는데, 아무리 실책이라는 기록이 현대에 들어 의미가 크게 죽었다 해도 외야수가 이 정도 실책을 기록하는 건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이후 2006년의 손목 부상으로 부침을 겪더니, 2008년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당해 수비 툴이 아예 사라지다시피 해버렸다. 간간이 수비에 들어는 갔으나 무릎 부상 여파로 수비 범위가 심하게 줄어든 것. 원래 그렇게 강견인 편도 아니었기에 이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이 때문에 사실상 고정 지명타자로 전업하게 되었고. 양키스와의 재계약에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선수 본인은 자기가 수비가 가능하다는 것을 계속 어필했지만 진짜 볼 수만 있지 믿을만한 수준은 아니었기에 모든 구단은 마쓰이를 지명타자로 바라봤다. 이는 선수 개인에게나 기록으로나 큰 악재였는데, 선수 개인 사정으로 보면 준수한 수비가 가능한 좌익수에 비해 수비툴이 봉인당한 지명타자는 팀에서의 활용도가 제한되다 보니 타격툴이 잘 받쳐주지 않으면 팀에서 기용하기 꺼리는 부분이 있어서, 좌익수에 비해 안정적으로 커리어를 이어나가는데 어려움이 있다. 실제로 양키스를 나온 마쓰이는 3시즌 내내 다른 팀에서 뛰다가 은퇴했다. 기록으로 보면 부상으로 인해 수비력이 크게 감소하며 수비 지표가 깎여나가고, 지명타자로 전업하면서는 그로 인해 WAR 계산에서 손해 보는 상황이 생겼다.

주루의 경우 100미터 달리기를 11초로 끊을 정도로 괜찮은 편이었지만, 구단이 부상 방지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도루를 자제시키면서 도루 관련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무릎 부상 이후에는 그나마 그 주력도 많이 감소했다. 여담이지만 추신수이치로에게 홈에서 보살 당한 적이 있다.

참고로 요미우리 시절에는 금강불괴로 유명했다. 일본프로야구에서 '전 이닝 출장 수위타자'라는 진기록을 달성한 세 명 중 한 명이며[34] 메이저리그 시절에도 손목 부상 전 세 시즌 연속으로 전 경기 출장을 기록했다. 햇수로 따지면 12시즌 전 경기 출장을 한 셈. 하지만 손목 부상 이후에는 한 시즌 145경기 출전이 최대이다.


6. 이모저모[편집]



  • 하지만 저런 취향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인을 언론에 공개하기를 꺼려 해서 손수 그림을 그려서 공개했다(...)

  • 공식 석상은 아니지만, 방송에서 마쓰이 히데키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찍힌 적은 있다.

  •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당시 일본 야구계 원로들, 특히 요미우리 자이언츠 OB들에게 크게 까였다. 마쓰이 히데키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계기로 일본의 스타급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이 많아질 것을 걱정했고, 심지어 장훈은 "미국에 진출해 추후 복귀하는 선수들에게는 1년 출장금지 등의 페널티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마쓰이 히데키에 대해서 한 때 '메이저리그 제1의 명문팀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위대한 일본 선수'로 봐야 할 것이냐는 의견과 '교진군을 버리고 자신의 영예를 위해 미국을 선택한 배신자'로 봐야 할 것이냐 하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선 적이 있다. 다만 마쓰이가 현역에서 은퇴한 뒤에는 와타나베 츠네오 회장이 직접 차기 요미우리 감독 후보로 언급하기도 했고# 하라 타츠노리 감독과 함께 면담을 하는 등, 구단 쪽에서 차기 지도자로 밀어주려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듯. 그리고 사실상 차기 감독으로 확정 난 듯 보였지만, 마쓰이가 뉴욕 양키스의 GM 특별고문이 되면서 근미래에 요미우리 감독으로 활동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 사진을 보면 얼추 느끼겠지만 대두(2번 항목)다. 한국 한정으로 별명 중에 마대갈, 마장군도 있을 정도. 현재 공인된 마쓰이의 머리 사이즈는 모자 사이즈로 추정컨대 8사이즈, 약 64cm로 추정된다. 2012년 MLB 현역 중엔 독보적이고, 그보다 더 큰 선수는 한때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뛰었던 외야수 케빈 멘치 뿐이다.[35]




  • 일본과 미국, 그것도 각 국가내에서 최고 명문팀이자 팬덤이 가장 많은 인기팀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선수임에도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차출된 경력이 전무하다. 1991년과 1992년 청소년 국가대표팀 경력을 제외하면 성인 대표팀에서는 단 한차례도 뛰지 않았다. 그나마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에 사실상 국가대표팀간의 맞대결 성격을 띠었던 99년 한일 슈퍼게임과 02년 미일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일본리그 대표로 합류한 것이 전부. 일본에서 뛸 적에 최초로 프로 선수의 출장이 해금된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출장할 수도 있었으나 당시 아마추어, 프로 간 알력다툼과 센트럴리그 구단들의 소속 선수 차출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36]가 겹치며 대표팀에 선출되지 못했다.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도 당시 감독이던 오 사다하루가 마쓰이의 합류를 원한다고 했으나 마쓰이 히데키 본인이 차출을 거부하면서 아쉬움을 드러낸 바가 있다.[37] 이때,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당대 슈퍼스타이자, 메이저리그를 폭격하던 스즈키 이치로로 대표팀 합류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안그래도 인기가 많았던 이치로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2009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하라 다쓰노리 당시 일본 대표팀의 차출 요청에 뉴욕 양키스가 차출을 거부하면서 무산되었고, 2013년에는 템파베이에서 방출 당해 소속팀을 찾기 위해 차출을 거부하며 무산되었다.

  • 한일 슈퍼게임에서 한국인 투수들에게 굉장히 강했던 타자 중 한 명이다. 그리고 당시 한국 최고의 투수였던 주니치 드래곤즈선동열에게도 15타수 5안타 타율 0.333[38]으로 강한 면모를 보였다.[39] 다만 마쓰이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이후에 맞붙게 된 또 다른 한국 최고의 투수 박찬호에게는 약했는데[40] vs 박찬호 통산전적이 10타석 9타수 1안타[41] 1볼넷 3삼진이다. 마쓰이도 박찬호의 공은 도저히 칠 수가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고...

  • 선동렬의 은퇴 기념식에서 상대 타자로 나왔다. 당시 주니치의 선동렬이 이미 등록선수에서 말소된 터라 공식 경기에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시범 경기 시작이전에 이벤트 식으로 상대를 했는데 은퇴 투구에서도 여지없이 안타를 때렸다. 후에 인터뷰에서 '은퇴식인데 그냥 삼진 당해주지 안타를 때리다니 너무 매정한 거 아니냐는'질문에 대해 '어설프게 삼진을 당해주는 거야말로 대선수인 선동렬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전력으로 상대했다'는 그야말로 그다운 프로정신을 보였다.

  • 2002년 미일 프로야구 올스타전이 일본에서 열렸을 때, 도쿄 돔에서 배리 본즈와 홈런 더비를 한 적이 있다.


6.1.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 성우 겸 그림책 작가 아사노 마스미가 마쓰이 히데키를 주제로 "우리 집에 마쓰이 히데키?"라는 그림책을 썼는데, 마쓰이 본인이 직접 그 책에 축사를 써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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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덤 샌들러 주연의 미국 영화 클릭에서 마쓰이 히데키가 언급된 바 있다. 건축가인 주인공이 자기회사사장과 그 회사에 건축설계를 의뢰한 일본 업체 간부들을 뉴욕의 고급 일본 음식 식당에서 접대하는데,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일본 바이어가 "미국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스즈키 이치로가 미국에서도 최고라는 건 틀림없습니다"고 하자 양키스 팬인 주인공 마이클 뉴먼이 "'마쓰이도 늘 믿음이 가는 존재입니다"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말을 들은 일본 바이어들이 모두 '오! 마쓰이!'하면서 공감을 하는데, 이때 주인공과 함께 온 사장이 일본 음식 이름인 줄 알고 갑자기 웃으며 "이치로랑 마쓰이가 그렇게 좋은 거라면 둘다 시키지요. 저는 어떤 음식이든 다 잘 먹습니다."라고 말해서 모두를 멘붕에 빠뜨린다. 빡친 일본 바이어들이 갑자기 단체로 잠깐만 자기들끼리 이야기 좀 하고 오겠다고 나가버린다.[42]


  • 만화 메이저에서는 마츠오(애니에선 이타오)라는 이름으로 바뀌어서 일본 국가 대표팀 및 뉴욕 타이탄즈 소속의 타자로 등장한다. 그런데 작중 초반에는 본래 이름인 마쓰이로 나오고 주인공 시게노 고로의 아버지인 시게노 히데키와 상대해 만루홈런을 치기도 한다. 다른 실존 인물들이 야구 월드컵 이후에만 나오는 것과 달리 작중 초반부터 꾸준히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는 작가가 마쓰이 팬인 것으로 추정된다.


7. 연도별 기록[편집]


파일:NPB 로고.svg 마쓰이 히데키의 역대 NPB 기록
연도
소속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1993
요미
우리

57
203
41
9
0
11
27
27
1
17
50
.223
.296
.451
.747
0.6
1994
130
569
148
23
4
20
70
66
6
57
101
.294
.368
.475
.843
3.4
1995
131
569
142
31
1
22
76
80
9
62
93
.283
.363
.481
.844
3.3
1996
130
569
153
34
1
38
97
99
7
71
98
.314
.401
.622
1.023
6.4
1997
135
596
144
18
0
37
93
103
9
100
84
.298
.419
.564
.984
6.2
1998
135
603
142
24
3
34
103
100
0
104
101
.292
.421
.563
.984
6.9
1999
135
572
143
24
2
42
100
95
5
93
99
.304
.416
.631
1.047
6.3
2000
135
589
150
32
1
42
116
108
5
106
108
.316
.438
.654
1.092
8.3
2001
140
611
160
23
3
36
107
104
3
120
96
.333
.463
.617
1.081
8.6
2002
140
623
167
27
1
50
112
107
3
114
104
.334
.461
.692
1.153
10.1
NPB 통산
(10시즌)

1268
5504
1390
245
16
332
901
889
46
844
934
.304
.413
.582
.996
60.2

파일:MLB 로고.svg 마쓰이 히데키의 역대 MLB 기록
연도
소속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bWAR
2003
NYY
163
695
179
42
1
16
82
106
2
63
86
.287
.353
.435
.788
0.2
2.3
2004
162
680
174
34
2
31
109
108
3
88
103
.298
.390
.522
.912
3.0
5.0
2005
162
704
192
45
3
23
108
116
2
63
78
.305
.367
.496
.863
2.5
4.5
2006
51
201
52
9
0
8
32
29
1
27
23
.302
.393
.494
.887
0.7
0.8
2007
143
634
156
28
4
25
100
103
4
73
73
.285
.367
.488
.855
2.9
4.1
2008
93
378
99
17
0
9
43
45
0
38
47
.294
.370
.424
.795
0.8
1.1
2009
142
528
125
21
1
28
62
90
0
64
75
.274
.367
.509
.876
2.4
2.7
연도
소속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bWAR
2010
LAA
145
558
132
24
1
21
55
84
0
67
98
.274
.361
.459
.820
1.5
1.7
연도
소속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bWAR
2011
OAK
141
585
130
28
0
12
58
72
1
56
84
.251
.321
.375
.696
0.2
0.5
연도
소속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bWAR
2012
TB
34
103
14
1
0
2
7
7
0
8
22
.147
.214
.221
.435
-1.0
-1.3
MLB 통산
(10시즌)

1236
5066
1253
249
12
175
656
760
13
547
689
.282
.360
.462
.822
13.3
21.2


8. 관련 문서[편집]



[1] 2003년, 메이저리그 역대 단일 시즌 출장수 공동 3위[2] 2003~2004년 전경기 출장[3] 2004 ALCS 3차전[4] 2004 ALCS 3차전[5] 2009년 월드 시리즈 6차전[6] 세이료고교에서도 대단한 선수여서 교내 야구장에선 우측 펜스의 그물망만 높은데, 그게 '마츠이 네트'로 불렸다고 한다.[7] #[8] 요미우리 입단 초창기부터 96년까지는 우익수로, 97년부터 2002년까지는 중견수로 활약하였고,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로는 주로 좌익수로 출전했다.[9] 燃えろ松井 キラリ光る 星だ 行けよ花道 火を噴けバット 勝利の ミサイルホームラン(타올라라 마츠이 반짝이며 빛나는 별이다 가거라 꽃길을 불을 품은 배트 승리의 미사일 홈런)[10] 유도에서는 노미 군 대회에서 우승, 이시카와현 대회에서 3위를 한 적이 있고# 스모에서도 노미 군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다.#[11] 1993 시즌에 다시 교진으로 복귀하기로 한 나가시마 시게오는 1992 드래프트 회의를 앞두고 한 이야기가 걸작이었다. 골수 한신팬이었던 마쓰이 히데키와 아버지 마사오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나가시마는 마쓰이를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기자가 "세이료 고교의 마쓰이 히데키가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나가시마는 "마쓰이 히데키요. 갖고 싶습니다. 제 손으로 키우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얘기를 들은 마쓰이 부자는 무척 흥분했다고. 그리고 나가시마의 바람대로 당시 요미우리 프런트가 1지명 하려던 이토 토모히토 지명을 철회를 이끌어냈다. 마쓰이 히데키가 얼마나 골수 한신빠돌이냐면 요미우리 지명 직후에 한신 구단에게 지명해 준 것에 감사를 대놓고 표했을 정도다. 대신 한신 타이거스는 훗날 토리타니 다카시 쟁탈전에서 요미우리를 이겨먹으면서 어느 정도 설욕했다. 근데 나가시마도 어릴때 후지무라 후미오를 동경하는 한신빠돌이로 자랐다는거(...)[12] 이쪽도 고시엔에 단골로 출전하는 고치현의 야구명문 고교다.[13] 경기 전 연습장면을 본 상대팀 감독은 마쓰이를 보고 "저 팀에 프로선수가 하나 있다!"라고 얘기하기도 했다.[14] 또한 일본 시리즈에서 MVP까지 수상했다. 이 해에 마쓰이는 정규 시즌, 올스타전, 일본 시리즈에서 모두 MVP를 석권한 사상 네 번째 선수가 되었으며, 일본 야구계 최고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까지 수상했다.[15] 여기에는 이치로가 일본 시절 뛰었던 오릭스 블루웨이브, 마쓰이의 소속팀인 요미우리 양측의 인기 차가 큰 영향을 주었다.[16] 세이버메트릭스의 득점 생산력을 비교하면 마쓰이가 좀 더 좋지만, 리드오프와 홈런타자의 득점 생산력을 단순히 비교하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이치로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역대급 소리를 들은 수비력과 30대 중반까지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던 주루 능력을 자랑한 선수다.[17] 파일:72EEDDA3-F6ED-45F1-9125-23CCBFB8784F.jpg
원문
[18] 앙헬 베로아는 이후 통산 bWAR이 겨우 1에 불과할 정도로 철저히 망했다.(마쓰이는 21이 넘는다)[19] 1위표 한장이 5포인트로 계산된다.[20] 아니면 마쓰이에게 2위 표, 아니 3위 표를 줬던 기자들이 2위표만 줬어도 신인왕 수상에 성공했을 것이다.[21] 다만 양키스 측이 그냥 똑같이 우긴것은 아니고 "왜 그때는 안 줬으면서 지금은 주냐, 억울하다"라는 입장이었다.[22] 그리고 마쓰이와 베로아처럼 이 때도 오타니는 신인왕 수상 후 MLB를 대표하는 스타선수로 거듭난 반면 안두하는 루키시즌 이후로 인상적인 모습을 다시는 보여주지 못하는 AAAA리거로 전락하며 마찬가지로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렸다.[23] 이 기록은 2021 시즌에 오타니 쇼헤이가 갱신했다.[24] 이 과정에서 조니 데이먼 역시 노쇠화로 좌익수로 옮겼고 중견수는 멜키 카브레라가 차지한다.[25] 이 기록은 그 역사가 길다는 뉴욕 양키스의 프랜차이즈 기록이기도 하다.[26] 월드시리즈 1경기 최다 타점 기록[27] 여담으로 시상식에는 아베 신조 총리가 참여했는데, 등번호 96이 마킹된 교진 유니폼을 입고 참여해 그가 추진하는 헌법 96조 헌법개정 조항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물론 신빙성 100%는 아니다. 당시 아베는 제96대 총리였기 때문. 오히려 여기서 96이 유래됐다고 보는 게 맞다.[28] 현재 지도자로 활동하는 세대들은 해외진출이라도 하지 않는 한 아주 많이 벌어야 40~50억이라, 송진우가 총액 50억 전후로 세금 떼고 나면 강남 아파트 한 채 사면 끝이다. 검소하게 산다면 가능은 하지만 평생 호화롭게 먹고 살기에는 이 돈을 시드머니로 투자대박을 내지 않는 한은 무리가 있는 금액.[29] 2001년 4월 13일 요코하마전 끝내기 홈런 장면.[30] "메이저리그 공인구인 롤링스 공은 일본의 공인구보다 비거리가 나오지 않는다. 바깥쪽 스트라이크존도 일본보다 넓은 편이고. 나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에 삼진을 당하지 않기 위해 그에 맞는 스윙을 해야 했다." (2011년 11월 스포츠잡지 '넘버'와의 인터뷰)[31] 다만 메이저리그 진출 직전인 2002 시즌은 1년만에 홈런이 14개나 늘어나며 플루크의 요소도 있었고, 당시 일본 리그 공인구는 래빗볼(탱탱볼) 논란이 있을 정도로 반발력이 심했다.[32] 공교롭게도 이후 양키스에 입단한 일본인 투수 다나카 마사히로도 포스트시즌에서의 맹활약으로 빅게임 피쳐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33] 일본프로야구 통산 홈런 6위는 오치아이 히로미츠의 510홈런, 7위는 장훈, 키누가사 사치오의 504홈런이다.[34] 나머지 두 명은 오 사다하루스즈키 이치로[35] 케빈 멘치가 레인저스 소속일 때 이벤트로 두 선수가 모자를 맞바꿔 썼었는데 멘치가 더 컸다고. 멘치는 8 1/4(65cm)를 썼다고 한다. 참고로 멘치(183cm)는 마쓰이(188cm)보다 키도 작다(...)[36] 당시 퍼시픽리그 구단들은 구단별로 1명씩 선수들을 차출하는 데 동의했으나 센트럴리그 구단들은 상술한 이유로 선수 차출에 거부감을 나타내면서 주니치 드래곤즈의 백업포수 스즈키 후미히로히로시마 도요 카프중간계투 카와노 마사토만 차출되었다.[37] 마쓰이 히데키는 이에 자필 사과문 10장을 오 사다하루 감독에게 보냈다.[38]볼넷도 없었고 5안타 역시 모두 단타였다.[39] 선동열의 은퇴경기에서 안타를 치기도 했다.[40] 그것도 전성기가 지나 허리 부상으로 신음할 때인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41] 그 안타가 바로 홈런으로, 박찬호가 양키스에서 뛰던 시절에 내준 홈런이었다.[42] 나가서 그 일본인들은 이치로와 마쓰이를 모르는 것 때문에 화났으면서도 설계 구리다는 등 다른 핑계를 서로 대면서 그 회사에 했던 건축설계 의뢰를 철회시키자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한다. 거기다가 갑자기 이런 데서 식사를 하느니 미국 문화의 업적(?)인 TGIF에서 식사를 하자고 한다. 사실 일본인들을 바보처럼 희화하하여 일본 특유의 네마와시 문화도 디스 하고, 일본인들의 자국 문화에 대한 자만심에 가까운 자긍심도 까면서 웃기려는 의도가 보이는 블랙코미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