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 문명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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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vilización maya, Maya Civi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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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u-wi-ki[1] → 나무위키를 고전기 마야문자로 표기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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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때 마야 영토
1. 개요
2. 역사
3. 문명의 특징
4. 쇠퇴와 멸망
4.1. 과거의 학설
4.2. 정론
5. 인신공양과 식인풍습
7. 주요 유적
8. 여담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지금의 메소아메리카(Mesoamerica; 멕시코 중부 ~ 중앙아메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 번성했던 문명이다. 마야문명이 번영했던 지역은 현재 멕시코 동남부의 5개 주(치아파스 주, 타바스코 주, 캄페체 주, 유카탄 주, 킨타나 로오 주)에서부터 과테말라, 벨리즈, 엘살바도르 북부, 온두라스 서부 일부 지역에 걸쳐 있었다.


2. 역사[편집]


마야 문명의 달력은 기원전 3114년에 시작한다. 이때가 마야 문명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체로 메소아메리카 문명 최초의 유적은 기원전 180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기원전 3114년은 마야 문명이 시작되기보다 천 년 이상 전의 일이다.

최근에 기원전 26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으므로 기원전 3114년에 실제로 마야 문명이 건설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2013년에는 올멕 문명보다 더 이전의 마야 문명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사진은 삭제됨). 그러나 더 최근의 연구 보고에 따르면 BC2600년경의 유적 연대는 BC1200년으로 재조정되었으며, 마야 토기 역시 BC 1200년에야 등장했을 뿐이다.

엘 미라도르(El Mirador)는 BC 600년 건설되어 BC 300~ AD 100년경에 가장 번성하고 AD 300년 이후로 크게 쇠락해 900년경에 완전히 몰락했다. 최대인구는 10만이었다.

거대 도시들이 건설된 것은 고전기라고 불리는 서기 250년 ~ 900년경의 시기로, 멕시코 남부와 유카탄반도 남쪽에 걸쳐 유명한 티칼, 팔렌케, 코팔 등의 도시들이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마야 문자가 만들어진 것도 이 시기로 보이며, 주변의 다른 문명들과 광범위한 무역 망을 구축하기도 했다. 얼핏 보면 고대 그리스와도 유사한, 도시 간의 교역을 통한 일종의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서 고전기 마야의 도시들은 연쇄적으로 무너졌는데, 명확한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나 마야 문자의 해독과 유적의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그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우선, 마야의 쇠퇴에는 8세기경부터 나타난 소빙하기가 일차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일부 도시가 쇠퇴 국면에 접어들어 난민이 발생하고, 도시 간의 교역도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붕괴의 시작은 교역의 중심지였던 칸쿠엔의 유적에서 나타난다. 8세기 중반 칸쿠엔은 주변 국가와 혼인 동맹과 같은 방식으로 우호를 끌어낸 타지 찬 아크(Taj Chan Ahk)의 치세 아래 마야의 중심 권력으로 떠오르는데, 770년경에 지어진 마야 최대의 궁전 유적지(2만 3,000m²의 넓이에 200여 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가 바로 그의 치세에 지어졌다. 그러나 마야는 여전히 연합 국가의 단계였으므로, 타지 찬 아크의 권력은 타 국가들의 합의에 따라 얻은 것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의 사후에 발생했다. 그의 후계를 이은 칸 마악스(Kan Maax)는 권력의 중심지가 된 칸쿠엔을 노리는 주변국들의 분란에 휘말려 죽었고, 칸쿠엔은 이후 후계자를 내지 못한 채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교역의 핵이었던 칸쿠엔이 붕괴하고 각국이 서로 전쟁 상태에 돌입하면서 무역 구조가 붕괴하였을 것이다. 이어 연쇄적으로 도시 국가들이 멸망했고 마야는 급속도로 쇠퇴한 듯하다.

고전기 마야가 몰락한 이후, 10세기에서 16세기 초까지 유카탄반도 저지대에서 치첸 이트사 등의 몇몇 새로운 도시들이 극소수 나타나 마야 문명을 부흥시켰는데, 이를 후기 마야라고 한다. 그러나 후기 마야의 도시들 역시 스페인인들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에 이미 고전기 마야의 도시들처럼 붕괴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이 침략했을 때까지도 마야 문명의 기록은 상당수가 남아있었고 마야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당시의 일부 스페인 학자들은 마야 문자와 그 발음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마야인들은 스페인인들에게 맞서 싸우다가 많은 숫자가 죽었고, 남은 인구의 상당수도 천연두 등의 전염병으로 희생되면서 마야 문자를 읽는 법 등은 완전히 잊히게 되었다. 또한 마야의 기록 대부분도 스페인 선교사들이 불태우고 말아, 지금 남아있는 마야의 책은 4권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후대의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사극작가들이나 소설작가들한테도 원망받는다 현대 마야어는 고대 마야어와는 달리 로마자를 이용해서 표기한다.

마야에서 썼던 문자는 건물과 조각을 비롯하여 곳곳에 남아 있어 해독되고 있다. 문자 자체는 기본적으로 완전히 규명되었지만, 본질적으로 수십 개의 도시 연합에 가까웠던 마야의 특성상 언어 또한 수십 개에 달해 의미를 해독하는 것은 쉬운 과정만은 아니다.

수십 개의 도시 연합 중에 통치자의 이름이 남아있는 국가는 코판(Copán), 칼라크물(Calakmul), 믹시코 비에호(Mixco Viejo), 모툴 데 산 호세(Motul de San José), 팔렌케(Palenque), 키리과(Quiriguá), 세이발(Seibal), 티칼(Tikal) 등이다.

2018년 2월, 과테말라 정글 속에서 LIDAR 기술을 이용해 6만 개 이상의 건축물이 있는 상주인구 20만 명 규모의 거대 유적 도시가 발견됨에 따라 그동안 학자들이 믿고 있던 마야 문명의 모든 기본적 규모나 역사에 변화를 줄 것으로 예고된다.


3. 문명의 특징[편집]


놀랍도록 진보한 역법(曆法), 천문학에 대한 발달한 지식에다가 문자 자체의 대가 끊기고 기록물의 대다수가 선교사들에게 소실되었던 이유도 있기에 사람들에게는 한 개의 문명 대국이 조용하고 평화적이며 철학적으로 발달했던 이미지로 자리잡혀 있지만, 마야 문자가 해독되어 그들이 남긴 기록을 읽을 수 있게 되자 반전이 일어났다.

문자가 해독되기 전까지 마야 학자들은 마야 문명이 고도의 철학적, 평화적 문명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특히 마야 연구의 일인자였던 에릭 톰슨의 경우, 평화적인 마야 문명이라는 환상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그가 살아있을 때 이미 진행되고 있던 마야 문자 해독을 통한 실체 접근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영향력이 워낙 컸기에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제대로 된 마야 연구가 진행될 수 없었으며 결국 그의 사후에야 소장 학자들이 본격적인 기록해독에 나서서 마야 문명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기록물들을 살펴보니 인신공양은 기본에 전쟁도 터졌고 마약류의 환각제도 예사로 흡입하던 난세가 예사로 벌어졌던 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난세였기에 눈부신 문명 발전도 가능했다. 기본적으로 고대 그리스 같은 소도시 국가의 연맹 형태를 보이고 있었으며 그중 가장 뛰어난 자가 '위대한 왕'이라는 이름으로 실질적 지배를 하는 체제였다. 게다가 한 종족만으로 이루어진 문명도 아니라서, 이 당시에 쓰였던 마야어는 총 33개의 매우 이질적인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령 마야 문자로 된 비석을 해독할 때에도 그것이 어떤 언어로 쓰였는지부터 알아야 했기 때문에 매우 난해했다고 한다. 라틴 문자라틴어를 안다고 해도 그것으로 쓴 한국어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야 문명의 뿌리는 일찍이 기원전 2000년 이전부터 저지대 메소아메리카에 살던 토착민들에게서 비롯했는데, '마야'라는 이름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실체가 생긴 건 서기 300여 년부터였다. 이때부터 끊임없는 전투와 개발의 역사가 메소아메리카 지대를 지배했다. 이 전모는 20세기 말에 와서야 해독이 된 마야 문자를 통해 알 수 있으며, 마야의 멸망 원인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전처럼 뜬구름 잡듯이 왔다 간 문명이 아닌 그 실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alacmul.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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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akmulis(칼라크믈)
Kopanas(코판)
Kirigua(키리과)
Piedras Negras
마야 문자

마야는 아주 철저한 기록 중심 사회로 한 해의 조세 기록과 호구 조사 등등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으며, 마야 문자는 기본적으로 표음문자이지만 표의문자를 섞어서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알파벳처럼 각각의 발음에 해당하는 문자를 풀어쓰는 것이 아니라 한글에서처럼 발음을 나타내는 여러 개의 기호를 조합하여 사각형의 공간에 맞춰서 표기했다.

파일:attachment/마야 문명/mayan-block.gif
파일:마야문자 조합방식.png

그러나 그러한 하나의 조합은, 대체로 하나의 단어 전체를 나타내는지라 한글에서보다 조합이 더 복잡하다. 그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마야 문자는 표의문자에서 표음문자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하나의 발음을 나타내는 기호도 여러 개며, 여러 개의 기호가 조합될 때 몇몇 기호는 기호 전체를 표기하지 않고 기호의 일부분만을 앞의 기호 뒤에 붙여서 표기하는 등 표기법이 상당히 복잡하다.
다음 비석은 과테말라의 이스투츠 유적지에서 발굴된 비문으로 전쟁에서의 승리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파일:마야문자비석.jpg

lajunchan ajaw

waxakte’ paxiil

utz’apaw tuun

uchokow ch’aaj

aj yayaxjal

baak ucha’n bohb

k’uhul ho’kab ajaw

yila aj k’uhul mutul ajaw

yila waxak winak ajawtaak

-

12 아하우 8 파쉬(780년 12월 2일), 아흐 야야쉬할 바크, 코요테(보브)의 수호자, 호캅의 위대한 왕이 돌을 심고 물방울을 흩뿌렸다. 그것은 무툴의 신성한 왕과 28명의 왕들에 의해서 목격되었다.

파일:attachment/마야 문명/mayan-number.gif

마야 문명의 또 다른 특징은 0의 사용이다. 10, 100, 1000 등을 나타내는 별개의 기호가 있었던 중국이나 로마 등과는 달리 마야인들은 인도에서 만들어진 아라비아 숫자에서처럼 0과 자릿수를 이용했다. 유라시아의 대부분의 문명과는 달리 마야문명에서는 20진법을 사용했다는 차이는 있다. 다만 이와 같은 숫자체계는 마야문명에서 발명한 것이 아니라 더욱 이전의 문명인 올멕 문명[2]에서 이미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의 20진법은 조금 특이한데, 보통의 기수법에서는 예를 들어 10진법이라면 자릿수가 1, 10, 102, 103, 104 , … 이렇게 나가지만, 마야 문명에서의 20진법은 1, 20, 18×20, 18×202, 18×203, … 이렇게 나간다.

파일:산가지배열.jpg

해당 계산법의 모양은 조선 시대에 널리 쓰이던 계산법이었던 '산가지 셈'(막대 모양으로 숫자를 계산한 방법)과 어느 정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다만 산가지 셈은 십진법으로 계산하였다.

마야 문명의 달력은 1하압(Haab)이 365일로 이루어지고 1년 = 1508/1507 하압 = 365.242203일이라는 복잡한 것이었지만, 이는 실제 1태양년과 불과 1.1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대단히 정확한 것이기도 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그레고리력의 경우 약 27초 차이가 난다. 태양력 문서 참고.[3]

이와 같은 높은 수준의 달력 및 기수법과는 대조적으로 마야문명을 포함한 아메리카의 문명에서는 구대륙과는 달리 고급야금술이 없었으며[4] 그마저도 기원후 600-800 년경에 서부 멕시코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5] 남미의 잉카 문명과 달리[6] 메소아메리카의 야금술은 발달이 늦은 편이였다. 제련술이 없었을때는 금, 은 같은 귀금속의 자리를 비취(옥) 이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퀴 또한 발명되지 않았다. 이는 이나 같은 동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테말라 북부 정글에 버려진 티칼(Tikal)의 저수지에서 고대 마야인들이 물을 인공적으로 정수해서 마셨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4. 쇠퇴와 멸망[편집]



4.1. 과거의 학설[편집]


두 번째, 곧 후기 마야의 쇠퇴 원인은 위의 스페인 선교사의 반달리즘으로 인해서 상세하게 알기가 힘들다. 가장 유력한 설명은 과도한 개발로 인한 토양침식, 즉 환경파괴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출토된 동시대 유물에서 치명적인 영양실조의 흔적이 보였고, 주요 생산품인 옥수수가 자랄 수 없을 정도로 토양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애초에 옥수수 자체가 지력 소모가 심한 작물이었으므로[7] 이는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또한, 마야 문명 후반기에 북부지역이 과도하게 성장하면서 산림을 벌채하고 건축물에 사용할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 화전(火田)을 만든 것이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유카탄 반도의 생태계는 그만한 인구를 버텨낼 정도로 강인한 생태계가 되지 못했다. 숲이 벌목과 화전으로 사라지자, 주요 초식 동물들은 순식간에 멸종하여 사냥으로도 지탱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멕시코 쪽의 군사 개입이 마지막 숨통을 끊었으니, 이는 막무가내식 개발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스터 섬에서도 유사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위의 농법에 대한 설명은 유카탄 반도 북부의 도시들에는 비교적 잘 들어맞지만, 남쪽의 티칼이나 팔렌케 등의 도시에는 해당하지 않았다. 현재 마야인들의 농법은 화전을 기본으로 하고 북부 해안 가까이 있는 도시들에서는 당시에도 화전을 바탕으로 한 것 같지만, 남쪽의 티칼이나 팔렌케 등에서는 화전 대신, 세밀하게 짜인 수로를 이용해서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수로를 이용해서 물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수로 위에 자라는 수초들을 땅에 뿌려서 비료 겸 뿌리를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했으므로 화전 방식보다 훨씬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마야 문명에서는 물이 권력의 상징인데, 수로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것이 국가의 기본적인 역할이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멸망을 부추긴 것으로 간주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지배층이 지나치게 전쟁에만 골몰했다는 점이다. 마야의 전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규모가 커지고 파괴적으로 변해서 여러 번성하던 도시들이 전쟁으로 멸망했다. 말기로 가면 마야 문명의 기록에 다른 도시를 파괴했다는 표현이 종종 등장하며, 실제로 여러 도시의 역사가 끊어졌다. 여기에 과도한 개발 등으로 인한 문제가 계속 심각해지는데도 전쟁과 인신 공양에만 열을 올리는 지배층에 대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도시를 뒤집어엎었다는 것이다. 농민들의 대규모 반란, 민란에 대한 분명한 근거는 없지만, 도시들이 멸망한 후에도 농민들은 수백 년 이상 도시 주변에서 계속 살았다는 연구 결과가 정황 증거로 제시된다.

16세기 스페인인들이 도착했을 때, 아즈텍 제국에 괴멸적인 피해를 준 천연두는 마야에도 마지막 숨통을 틀어막는 수준의 피해를 줬다. 열대우림 지역에 잔존한 마야의 세력은 계속해서 저항했지만, 스페인군의 진격에 큰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1531년 후기 마야의 중심지였던 치첸 이트사가 함락당했을 때 금방 되찾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스페인의 침략은 이미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스페인의 주된 침략으로 인해서 모두 절멸해버리고 원주민의 혈통이 끊겨버린 멕시코 지역의 원주민들과는 달리, 마야 지역에 해당하는 과테말라의 원주민은 그나마 혈통을 많이 계승한 편이다.

여담으로 당시 스페인인들이 더 거대했던 아즈텍이나 잉카 제국을 정복하는 것보다 이 마야를 정벌하는 쪽이 더 오래 걸렸는데[8], 역설적으로 이는 마야인들의 문명은 이미 붕괴한 상태라 중앙 정부가 부재하여 쪼개진 세력을 하나하나 점령해야 했고, 경제 구조 자체가 박살나서 마야인들은 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지라 대체로 콩키스타도르들의 관심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론이 각자 하나씩 있는데 먼저 농경의 경우에는 현대의 화전처럼 대규모 화전으로 생태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면 모를까, 마야 전성기의 인구를 생각하더라도 넓은 열대우림에 비하면 농경지는 아주 적은 비율이었다. 막무가내식 개발로 자멸할 정도는 아니었던 셈.

전쟁에만 골몰한 지배층에 민중이 등을 돌렸다는 학설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마야에서도 오랫동안 전쟁을 해왔는데, 마야 문명이 무너진 시기에 갑작스럽게 문제가 되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렵다. 마야인들도 시나리오에 따라서 행동하는 책 속의 등장인물들이 아니라 실제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다른 문명의 사람들보다 특별히 멍청하거나 호전적이어서 자기들이 굶어 죽을 판인데도 전쟁에만 골몰하다 파멸을 면치 못했을까? 그럴 사람들이었다면 애초에 문명을 세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전쟁으로 많은 도시가 멸망했다고 하지만 이는 반대로 문명이 붕괴하는 시점이라서 도시들이 전쟁의 피해에서 회복되지 못했다고 설명할 수 있기에 전쟁이 특별히 더 파괴적이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고, 이 시기에 전쟁이 더 파괴적으로 변할 이유도 설명하기 어렵다. 전쟁의 결과가 파괴적으로 변했다고 해도 이는 붕괴의 원인이라기보다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4.2. 정론[편집]


21세기 이후, 각종 고고학자의 조사 끝에 불리한 자연환경+고립된 지형+이에 맞지 않던 사회 및 경제구조였던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수많은 문명이 부적절한 자연환경과 재해 끝에 몰락하긴 했지만, 마야 문명의 경우에는 그게 인류 역사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심했다.

통념과는 달리, 열대우림은 거의 녹색 사막에 가까울 정도로 굉장히 식량 생산력이 낮은 지역이다. 열대우림은 굉장히 뛰어난 생명력과 재생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곧 '식량 생산량'이 뛰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식물도 독이 있는 것들이 많고, 먹이도 제한되어 있어서 대형동물들은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다.[9] 때문에 아프리카와 같은 다른 열대우림에서는 꽤 오랜 기간 부족 형태로만 인구가 지탱되었다.

게다가 유카탄 반도의 열대우림은 풍부한 강수량과 일조량이 있는 지역이지만, 토양은 석회질이 많아 내린 비는 쉽게 빠져나가 지표에 남지 않고 강수량이 너무 많아서 매우 척박한 라테라이트 토양만 남는다. 이러한 환경은 풍부한 일조량과 강수량 덕분에 삼림의 생산력은 뛰어나지만, 토양 침식으로 영양분이 되는 가용성 염기는 부족해서 식량이 될 수 있는 씨앗이나 과일 종류의 생산력은 부족하다. 이러한 이유로 농사를 지어도 일반적인 농법으로는 생산량이 적다. 거기에 당시 중앙아메리카의 주요 수확 작물은 옥수수인데 지력이 빨리 쇠하지만, 이나 알팔파같은 지력 회복작물이 없던 아메리카에서는 그냥 땅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는 이 경우에는 윤작을 해서 지력을 회복시키지만, 열대우림의 압도적인 재생력은 지력 회복은커녕 그냥 그 일대를 문명 이전의 정글로 되돌려 버리기 일쑤였다. 다른 열대우림들과 마찬가지로 문명 생기지 말라고 고사를 지내는 수준의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런 자연환경에서 과도한 토양침식에 대항할 가장 적합한 농법은 화전이었다. 불로 필요없는 임야를 태워주면, 가 마치 비료처럼 가용성 염기를 제공해서 땅이 비옥해져서 지력을 회복한다. 이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열대우림의 재생력[10]은 아주 뛰어나서 비워진 자리엔 금방 이차림이 들어서고 그럼 다시 태워서 화전을 경작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마야 문명은 열대우림이라는 문명 형성에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화전과 정글의 빠른 회복력을 기반으로 고도의 문명을 발전시킬 수준의 안정적인 농경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만약 가뭄 등의 문제로 정글이 회복되지 못할 경우 마야 문명 전반이 올스톱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특히나 마야 문명이 있던 유카탄 반도를 구글지도, 구글 어스 등 위성 촬영 서비스로 보면 알겠지만 신기할 정도로 강이 안 보인다. 즉, 있는 강들은 유량이 매우 적은 시냇물 수준의 좁디좁은 넓이들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 조금만 비가 안 내리기 시작하면 금방 건천이 되는 수준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마야 문명은 가뭄이 들어도 커다란 강을 중심으로 마를 때까지 꽤 오래 버틸 수 있는 타 문명권과 달리 수분을 즉각적인 우량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11] 여기에 더하여, 마야 문명의 주식이었던 옥수수는 높은 생산력 뒤에 숨겨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바로 보관 기간이 짧다는 것이었다. 인류 3대 주식 중 밀이나 쌀은 전통 사회에서도 서늘한 곳에서 수년 이상 보관이 가능하지만 옥수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1년 반이 한계였다. 다행스럽게도 마야 문명은 잔혹한 맬서스 트랩 속에서도 어떻게든 통치력을 발휘하며 문명을 번창 시켜 왔으며, 어차피 유카탄 반도 자체가 울창한 열대우림 지대라서 이런 균형은 어느 정도 일정히 유지되어 왔지만…

하필 고전기 마야 시기 말기에 신이 그냥 마야에게 망하라고 말할 수준의 대재앙- 소빙하기가 닥친다. 북대서양 고기압이 남쪽으로 이동했고 그로 인해 원래 우기에 유카탄반도에 내려야 하는 비구름이 남쪽으로 가버려, 그 지역에 그야말로 7000년 중의 최악의 가뭄이 찾아오고 만 것이다. 송수로나 저수시설을 만들 수도, 만들 필요성도 체감할 수가 없던 마야 문명은 외부와 제대로 된 교류가 불가능한 말라붙은 정글 한복판에 방치되었고, 강도 없는 이런 상황에선 가뭄으로 농사를 망쳐서 굶어 죽는 것보다 수분을 섭취 못 해서 죽는 게 더 위험했다. 아사는 3주 정도 버틸 수 있지만 물이 없다면 인간은 3일도 버티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마야 문명의 구성원들은 탈출 및 생존 수단이 완전히 봉쇄된 상태에서 여러 번의 대기근을 겪었으며, 이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된 극단적인 잔혹한 전쟁을 통한 반란과 봉기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운 지배계층들에게도 이런 가뭄과 대기근은 당대 기술 및 문화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정글 한복판에 고립된 문명이라는 문제로 인해 이런 자연환경을 피해 도망칠 대탈주나 개척도 할 수 없었다. 결국 거의 모든 수준의 문명적인 생존법이 봉쇄된 마야 북부의 인구는 이전의 10% 혹은 그 이하로밖에 남지 않았다. 당연히 기존의 마야문명의 모든 행정력은 이런 가혹한 정글 환경에 적응 가능한 부족 단위로 뿔뿔이 분산되었고, 마야인으로서의 정체성도 반복되는 재앙 끝에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Ancient Apocalypse 시리즈 3편 The Maya Collapse에서는 소빙하기로 인해서 물이 말라버려 농사도 완전히 망치게 되었고, 위에 쓴 것처럼 이전의 10% 혹은 그 이하 수준의 인원만 어떻게 살아남으면서 몰락했다는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한 유적지에선 도시가 쇠락한 시대로 추정되는 시대의, 가족 단위의 살해된 성인과 아이들의 유골이 발굴되었는데, 치아에 보석 장식을 하는 등 지배 계층으로 추정되었다. 추측하자면 기근이 닥치고 제사장 계층이 그걸 해결하지 못하는 것에 분노한 농민들이 제사장과 그 일가를 살해한(추정으로는 인신 공양을 해버린 것 같다고) 것으로 여겨진다. 더는 지배계급의 신성한 능력을 믿지 않게 된 것이다.

마야인들의 실책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존재했던 많은 문명은 많은 실책과 문제점 투성이였지만 주도권을 잡고 번성하기도 했으며, 또한 그들의 장점과 세련된 문화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찌할 방도가 없었던 기후의 변화, 화산활동 등의 자연재해로 멸망하거나 쇠퇴하기도 했다. 다만, 마야의 경우에는 너무나도 운이 없었고, 이 상처를 수 세기에 걸쳐 회복하기도 전에 식민시대가 시작되고 천연두 등의 구대륙 질병이 들어오자, 다시금 이런 끔찍한 인구감소가 재현되며 뿌리까지 뽑히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마야 문명이 자체 붕괴한 결과, 제국주의 시대를 거처 20세기 들어서 해당 지역에 마야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부활했다. 이는 식민지 시절과 구별되는 민족적 정체성이 필요했던 메소아메리카인들이 자신들의 사라졌던 조상 - 마야 문명을 그 기원으로 잡은 결과물이었다. 아즈텍 제국과는 달리, 마야 문명은 재평가에 큰 무리가 없었으며 이로 인해서 해당 지역에서는 로마 문자를 사용하는 마야어와 몇 가지 구전된 문화를 복원한 상태이다. 물론, 마야 문명의 종주국이 어디냐에 따라서 멕시코 남부 지방 자치단체와 과테말라가 실력 싸움을 벌이고 있기는 하다.


5. 인신공양과 식인풍습[편집]


메소아메리카 지방 특유의 인신공양과 식인 풍습 역시 빈번했다. 흔히 인신공양과 식인 하면 아즈텍 제국을 떠올리곤 하지만, 사실 아즈텍은 멕시코 최대의 판도를 장악한 거대 제국이었기에 인신공양의 규모가 늘어난 것 뿐이다. 마야는 그리스의 폴리스와 비슷한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아즈텍처럼 대규모의 인신공양을 하는 것은 아예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야의 인신공양 횟수는 발굴된 유골의 개수만 새어봐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한마디로 잔혹한 식인종 집단 아즈텍과 달리 평화롭고 철학적인 마야문명이라는 기존의 인식은 명백한 기록, 유적, 유물 앞에서 박살이 난지 오래다. 오히려 아즈텍이 얘네들한테서 배워간거다. 그야말로 원조악질.

벨리즈의 어느 인신공양 동굴에선 9,566개에 달하는 어린이의 뼈가 발굴되었는데, 분석 결과 최소 114명의 어린이 노예들이 83조각으로 토막난 채 인신공양을 당했다고 한다. 치첸 이트사에선 127명의 어린이 뼈가 나왔다. 세노테 사그라다에서는 200명의 어린이와 처녀의 뼈가 나왔다. 아즈텍에선 6~7세에 해당하는 어린이들의 손톱을 뽑아 틀랄록에게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BBC의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마야에선 한 살도 안 먹은 어린이를 참수해 인신공양하거나 6살 꼬마의 얼굴가죽을 도려내는 등 온갖 잔혹한 아동학대가 펼쳐졌다고 한다. 특히 새 국왕이 즉위할때마다 소년의 심장을 꺼내거나 아기들을 신전 바닥에 죽여서 묻는 습관이 존재하였다. 심지어 죽은 어린이의 대퇴골을 공예하여 피리를 만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마야 문명에서는 아즈텍과 마찬가지로 포로를 잡기 위해 꽃 전쟁을 수행하여 타 부족의 전쟁포로들의 심장을 꺼내는 인신공양을 하였다. 때론 죄수들에게 공놀이를 시키고 이긴 팀을 인신공양했다. 처녀의 가죽을 벗겨서 입고 춤을 추거나 화살로 쏘아 피를 땅바닥에 적시는 등의 인신공양 풍습도 가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신공양 풍습을 가장 오랫동안 유지한 문명권이기도 하다. 아즈텍 제국이 1520년대에 멸망했는데, 마야 문명은 1700년까지 근 이백년간 인신공양 풍습을 현역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일례로 멕시코 중부 고원지대에 위치해 접근이 쉬웠던 아즈텍 제국과 달리, 마야 문명의 영향권에 있었던 멕시코 남부와 과테말라, 벨리즈 지역의 경우 빽빽한 정글과 산림지대로 이루어져 스페인군의 식민지 정복이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기록도 많이 남아 있는데, 희생자는 대부분 현지의 마야인들에게 붙잡힌 스페인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6. 마야 종말론[편집]


마야의 역법은 서기 2012년에 끝난다는 설로 지구가 2012년에 멸망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진실은 그냥 한바퀴 다 돈 것뿐이다. 십간십이지가 한바퀴 돌아서 다시 갑자가 오는 것과 같은 것. 마야에서의 십간십이지에 해당하는 년도는 144,000일, 394.3년이다. 그리고 마야의 역법에 따르면 이 단위조차 한바퀴 순환하려면 서력 4772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20진수인 마야력에서 2012년은 고작 13에 해당하는 절기일 뿐. 참고로 1에 해당하는 절기는 BC 3114년이었다. 마야인들이 가장 큰 단위인 B'ak'tun 이 끝나는 시기마다 큰 행사를 치른 건 사실이지만 지구 멸망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서기 2012년 12월 21일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2012년 5월 10일 이후 달력이 발견되었다고. 애초에 몇날까지 만들었든 그날 이후에 종말한다고 하면 그만이니 쉽게 말해서 5세기의 끝까지만 남은 달력을 보고 지구가 그때 멸망한 거라고 해석한 꼴이었다.


7. 주요 유적[편집]


현재 마야 문명의 유적지는 멕시코 동남부의 5개 주(치아파스 주, 타바스코 주, 캄페체 주, 유카탄 주, 킨타나 로오 주)에서부터 과테말라, 벨리즈, 엘살바도르 북부, 온두라스 서부 일부 지역에 남아있는데 조사가 어느정도 된 것만 해도 400개 이상의 유적이 확인되고 있으며 소규모이거나 아직도 조사가 안된 것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주요 마야 유적은 다음과 같다.
퀴리과 고고 공원과 유적 구글맵
티칼 국립공원 구글맵
욱스말 선(先) 스페인 도시 구글맵
치첸 이트사 선(先)스페인 도시
캄페체의 고대 마야도시 칼라크물과 열대림 보호구역 구글맵
팔렌케 선(先) 스페인 도시와 국립공원 구글맵
코판 마야 유적 구글맵


8. 여담[편집]


  • 캐나다에 사는 소년이 한 가지 독자적인 가설과 구글의 힘을 이용해 마야 유적을 하나 발견했다고 해 논란이 일었다. 기사
대충 '마야의 도시들은 왜 살기 편한 강가가 아니라 산기슭같은데서 살지?'라는 의문에서 시작해. '어쩌면 별자리를 따라 지었을지도'라는 가설을 세우고 구글 맵을 통해 각 마야 유적지를 확인했더니 117개의 유적지가 별자리와 비슷한 위치였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이후 NASA정밀사진과 비교하던 중 발견되지 않았던 유적을 발견했다고.
그러나 학계에서는 부정적인 반응이 우세하다.# 위성사진으로 발견했다는 '유적'은 사실 버려진 화전일 가능성이 높으며, 마야인들이 별자리를 따라 도시를 건설했다는 근거도 없다고 한다. 과거 마야의 별자리 중 극히 적은 수만이 현재 알려져있으며, 그나마도 각 별자리를 구성하는 별의 종류나 갯수는 알려져있지 않다. 학생이 확인했다는 별자리와 유적지 위치의 유사성은 단지 우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취미 중 하나가 마야 문자 번역이었는데, 다른 취미들과 마찬가지로 보통 이상은 한 모양. 실제로 마야 문자의 해독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 동양의 오방색처럼 방향을 나타내는 5개의 색이 있는데 방향과 색이 약간 다르다.



  • 고대 문명이라고도 하지만, 16세기까지도 유카탄 반도 지역에서는 전성기만은 못 해도 세를 갖추고 있었고, 잔존한 마야족은 지금도 중앙아메리카에서 마야어를 사용하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고대' 라는 것 자체가 지역마다 학자마다 다 다른 것이기에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한 상태. 더불어 도시 문명이나 문자 등은 잊혔다가 20세기에 비로소 학자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 남아메리카 3대 문명 중 21세기인 현대까지 살아있는 유일한 문명이다. 기록물들이 죄다 소실되는 바람에 고유의 마야문자가 사용되지 않을 뿐 멕시코의 경우 치아파스주와 유카탄주 일부지역에서는 초등학교 때 마야어를 의무적으로 배우도록 되어 있으며, 전통 의식과 공놀이[12] 등은 현대화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다. 몇몇 라디오 방송에서도 사용하고, 마야인들의 소셜 네트워크에 들어가 보면 기계 언어는 스페인어로 하면서 현대 마야어로 글을 올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유카탄주립자치대학교(UADY)에서는 마야어를 가르치며, 외부인들도 마야어 코스를 수강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은 마야 문명 지역 출신이 아닌데도 외국어 개념으로 마야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과테말라는 아예 마야어를 공용어로 쓰기도 한다.
  • 현대 마야어의 외래어는 보통 스페인어에서 차용해서 사용한다. 들어보기[13]
  • 로마 제국의 고속도로처럼 도로를 사용하였다.#
  • 시드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는 3편 이후로 개근하고 있다. 3편에서는 찬 이믹스 카윌, 4, 5편에서는 파칼, 6편에서는 왁 차닐 아후가 지도자로 등장했다.

9. 관련 문서[편집]



[1] 왼쪽 위부터 해석한 결과다.[2] 기원전 1400년경에서 기원전 400년경까지 번성했다. 아메리카에서는 0과 자릿수를 이용한 기수법의 역사가 상당히 길다.[3] 좀 복잡하긴 하지만 대략 4년마다 한 번씩 윤년을 넣는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큰 차이가 없다. 1508년마다 한 번씩 윤년이 없는 셈이니 십진법에서는 조금 편의성이 떨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최소한 오차는 적다.[4] 금과 은 구리 같은 금속을 주조하여 제련하는 수준의 야금술은 있었다. 무기를 아예 만들지 않은것은 아니나 대부분 의례용이고 그마저도 흔하지는 않았으며 철기기술은 없었다.[5] 메소아메리카의 야금술은 에콰도르 지방을 통한 해양 교역으로 처음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6] 신대륙의 야금술은 기원전 2000년경에 남미 안데스 지역에서 처음 나타난다.[7] 반면, 북아메리카 지역의 원주민들은 이러한 옥수수의 단점을 인식하여 토질의 영양분을 보충하는 호박, 땅콩과 함께 심어서 옥수수를 재배하는 등, 지력 소모를 방지했다.[8] 물론, 현지 원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스페인의 정벌이 실패하여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받고 불완전한 상태에서 지금의 칠레와 아르헨티나 등 남미 중남부 지역을 식민지화했던 마푸체보다는 성공한 편이지만(…) 사실, 중남미에는 마푸체 외에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족이나 온두라스의 렌카족, 페루의 잉카 잔존 세력들 같이 스페인의 식민 침략에 대항하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이 없진 않았는데 결국 이들은 모두 오랫동안 저항을 지속하지 못하고 스페인군에 의해서 진압, 정복되었다. 하지만 잉카 잔존 세력들의 경우, 40년 넘게 스페인군에게 항거하는 저항이 이어졌었다.[9] 중남미 정글에서 초식동물은 이 가장 크고, 맹수는 해봐야 재규어가 가장 크다. 그래서 사람도 목숨걸고 힘들게 사냥해봐야 얻는 고기가 적고, 채집 활동을 한다고 해도 사람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몇 과일 정도밖에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군이 왜 임팔 작전에서 싸우다 굶어 죽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10] 풀과 나무들이 다시 자라는 기간과 밀도.[11] 실제로 스페인의 식민 이후의 중미에서도 여러 번 심한 기근의 기록이 발견된다. 또한 현대까지도 원주민들 사이에선 기우제 의식이 남아있다.[12] '피찰' 이라는 스포츠로 중요한 종교 의식 중 하나였다고 한다. 현재에도 전용 경기장 유적이 남아있는데, 양키 스타디움과 비슷한 관중을 수용할 수 있으나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시청 앞이나 동네 축구장, 실내 경기장 등지에서 이루어진다. 지금은 배구공을 쓰지만 예전에는 고무공을 사용했으며, 손과 발을 둘 다 쓰면 안 되고 머리, 상하박과 종아리를 주로 사용한다. 또한 예전에는 마야어를 썼지만 지금은 그냥 스페인어로 경기를 진행한다. 옛 마야 문명에 속했던 국가끼리 모여 국제대회를 치르기도 한다.(벨리즈는 영어를 쓰긴 하지만 스페인어도 널리 사용되기 때문에 공놀이에 참가하려고 하면 스페인어를 배우는 것이 낫다. 옛 마야 제국의 단결을 위해 대회를 실시하니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편이다.)[13] 유카탄 방송인 만큼 유카탄 마야어를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