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암살 음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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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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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개
3. 실상
4. 참고문헌


1. 개요[편집]


1950년, 일본인 야마구치 류이치와 이탈리아인 안토니오 리바가 마오쩌둥을 암살하려고 시도했다고 중화인민공화국주장한 사건. 하지만 현대 정치학/사학계에서는 외국인 추방과 혁명외교의 명분을 찾기 위한 중국공산당의 조작으로 보고 있다.


2. 전개[편집]


안토니오 리바는 원래 이탈리아의 비행기 조종사로 1920년대국민정부에서 공군을 육성하기 위해 초빙한 교관 중 한 명이었는데 한때 일본 육군 특무부대의 포섭으로 스파이 활동을 하다가 전쟁 이후에는 무역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야마구치 류이치의 경우, 1938년 중화민국 국제문제연구소에서 일하다가 사임한 이후 서적판매상을 하고 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중국에 살던 수만명의 외국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대대적인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아직 중국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이들이 10월 1일 국경절 행사에서 톈안먼광장에 도열한 마오쩌둥 이하 중국 지도자들을 박격포로 쏘아 살해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하며 체포했다. 중국 정부는 또한 하북성 이셴 교구장 타르치시오 마르티나 주교, 루쉰 연구가 해리엇 밀스, 풀브라이트 재단 회원 앨런 리킷, 아델 리킷 부부 등 총 7명의 외국인을 체포하였다. 중국 정부는 리바가 박격포를 가지고 있었고 야마구치가 천안문광장을 그린 도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암살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을 최종적으로 사주한 것은 다름아닌 미국 군인인 데이비드 베럿 대령이라는 것이었다. 체포된 두 사람은 1951년 8월 17일 차량에 태워져 조리돌림을 당한 후에 총살되어 반혁명분자들의 시신을 묻는 베이징 외각의 농장에 매장되었다.[1] 마르티나 주교 등 나머지 사람들은 1955년 중국에서 추방되었다.[2]

야마구치의 부인은 일본으로 귀국한 후 이 사건이 중국 공산당 정부의 조작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일본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외교관계가 없던 상황이라 어찌해볼 방법이 없었다. 야마구치와 리바의 처형에 즈음하여 베이징 공안당국은 수천명의 외국인 사제, 의사, 기술자, 사업가, 유학생들을 체포하여 베이징에서 추방하고 수감했다. 1951년 8월 2일 외국인을 모조리 추방하라는 결의안이 통과되어 베이징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은 톈진을 통해 국외로 추방되었다. 필립 쇼트는 이 사건에 대해 6.25 전쟁으로 외국에 대한 불안감이 강해진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우려가 낳은 결과로 분석하고 있다.


3. 실상[편집]


중국 내라면 모를까 해외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자국 내의 기독교 세력과 서양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공안사건이라는 의견이 대세이다. 사실 중국 정부의 주장은 조악하기 그지 없었으며 증거도 빈약했고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용의자들을 허겁지겁 처형하고 나머지는 추방하는 것으로 끝났다.

  • 박격포같은 부정확한 무기로 누군가를 저격하기는 극히 어렵다. 첫발에 맞추지 못하면 마오쩌둥이 도망칠 게 분명하다. 저격소총을 쓰는게 몇백배는 성공 가능성이 높다.한국에서는 야포이승만을 노린다는 헛소릴 하더니 중국에선...

  • 중국 정부가 마오쩌둥을 암살하려고 시도한 무기라고 주장한 것은 다름아닌 1930년대에 생산된 스토크스 박격포였는데 이 박격포는 작동되지 않는 골동품이었다. 그나마도 리바가 교황청 공사관 바깥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주워와 개인적으로 수집한 물품에 불과했다.

  • 중국 정부가 야마구치의 집에서 압수한 자료 중에는 톈안먼을 향하여 포물선이 그려진 스케치가 있었다고 한다. 중국 정부는 이것을 박격포의 궤도를 그린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야마구치 부인에 의하면 그 포물선은 베이징소방서가 야마구치를 통해 구입한 일본제 소방차방수 펌프를 가동할 때 나오는 물줄기의 흐름을 그린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것은 나중에 사실로 밝혀졌다.

  • 중국 정부는 야마구치와 리바를 사주한 미국 군인이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바로 딕시 사절단장을 지낸 데이비드 베럿 대령으로 이미 1950년 2월에 베이징을 떠난 상태였다. 또한 야마구치와 리바는 서로 옆집에 살던 사이라 친분은 있었지만 1950년 5월 이후로는 서로 왕래가 없었다고 한다. 야마구치 부인은 이들이 암살 음모를 꾸몄다면 5월 이후로 왜 왕래가 없었겠냐고 주장했다. 게다가 데이비드 배럿 대령은 미군에서 대표적인 친중파로 1930년대에 옌안에서 마오쩌둥과 회담까지 한 사이였다.

  • 데이비드 베럿 대령은 당시 타이완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중국 정부의 주장에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며 펄펄 뛰었다.

  • 국경절 행사에 톈안먼광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릴 것이 분명한데 그런 상황에서 눈에 띄는 박격포로 톈안먼 누각 위에 오른 마오쩌둥을 노려서 암살하는 것은 어렵다.

  • 중국 공산당 정부는 자신들이 배후로 지목한 데이비드 베럿을 20년 후에 저우언라이 총리 명의로 자신들이 오해했다며 축전까지 보내며 초청했다.(...)

4. 참고문헌[편집]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 마오쩌둥 평전 2권, 필립 쇼트, 교양인.
  • 해방의 비극,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리처드 번스타인,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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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토니오 리바의 부인은 중국 공안국에 남편이 가톨릭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시신을 되찾아 베이징의 교회 묘지에 매장했으나 몇 년 뒤 중국 정부가 이곳을 쓰레기장으로 바꾸면서 유해 행방도 사라졌다.[2] 앨런 리킷과 아델 리킷 부부는 중국 공안의 지속적인 고문과 세뇌로 자신들이 정말로 스파이라고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