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레타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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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역대 군주


1. 개요[편집]


오늘날의 알제리 중부와 모로코 북부, 아틀라스산맥 북쪽에 위치한 영역을 다스린 고대 왕국. 베르베르인 계열인 마우리인들의 부족 연합 국가로 알려졌다. 오늘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 모리타니의 국명의 기원이기도 하다.

2. 역사[편집]


파일:로마 아프리카 알제리 1.jpg

전설에 따르면, 천구를 떠받치는 거신으로 유명한 아틀라스가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시조라고 한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첫번째 마우레타니아 왕 바가제2차 포에니 전쟁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에게 4,000명의 마우리 기병대를 제공해 그가 누미디아로 들어갈 때까지 호위했으며, 자마 전투 때 로마군을 위해 군사적 지원을 했다.

마우레타니아 3대 왕으로 알려진 보쿠스 1세유구르타의 장인으로, 유구르타 전쟁 당시 사위 유구르타를 도왔다가 막판에 그를 배신하여 로마에 넘기고 그 대가로 누미디아 서부를 획득했다. 그 후 기원전 49년경 보쿠스 2세보구드가 동시에 즉위하여 마우레타니아를 공동 통치했다.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원해 카이사르가 누미디아의 유바 1세메텔루스 스키피오 연합군을 격멸하는 데 크게 일조하고, 그 대가로 누미디아 영토 일부를 또다시 획득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제2차 삼두정치가 출범한 뒤 그들끼리 대립하기 시작했을 때, 보구드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지했고 보쿠스 2세는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했다. 기원전 38년 보구드가 히스파니아에서 원정을 떠나 있을 때 보쿠스 2세가 보구드의 영토를 공략하여 마우레타니아 전역을 통일했다. 보구드는 지중해 동방으로 달아나 안토니우스에게 의탁했다가,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내전 때 치러진 메토네 전투에서 전사했다. 한편 보쿠스 2세는 기원전 33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마우레타니아를 옥타비아누스에게 기증했다.

그 후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으나 총독들의 무능한 통치와 마우리인들의 잦은 반란, 아틀라스 산맥과 사하라 사막의 북쪽 가장자리 주변에 살던 유목민족 가에툴리아인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기원전 25년 아우구스투스유바 2세를 마우레타니아 왕위에 앉히면서 부활했다. 유바 2세클레오파트라 7세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와 결혼한 뒤 마우레타니아에 도착한 후 보쿠스 2세와 보구드의 지지자들간의 내전으로 황폐해진 수도 이올을 재건하고 아우구스투스를 기려 카이사레아로 개명했다. 이후 로마의 문화를 본따서 체육관, 목욕탕, 극장 등 값비싼 공공 시설들이 건설되었고, 그리스-이집트 풍의 문화도 함께 들어왔다.또한 농업 진흥 정책을 실시했으며, 무역을 장려했다. 마우레타니아 주민들은 곧 농사에 익숙해졌고, 목재, 곡물, 티리안 보라색 염료 같은 고급 상품들을 수출하면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었다. 이 시기 카이사레아 항구에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알렉산드리아 등대를 모방한 등대가 건설되었다.

파일:누미디아 왕국 고분.jpg
티파자유바 2세 영묘.

유바 2세는 마우레타니아가 로마의 다른 속국에 비해 상당히 크지만 수도 바깥의 인구가 희소해 개발이 제대로 되지 않고 외세의 침략을 막기 힘든 점을 고려해, 인구를 주변 일대로 분산시켜서 정착시키고자 노력했다. 또한 지속적으로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는 가에톨리아인들을 상대로 로마군의 지원을 받으며 원정을 잇따라 벌인 끝에 제압했다. 그가 변경 이주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결과, 인구가 희소했던 변경 지역의 개발이 잘 이루어졌다. 한편 그는 지중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일부 지역을 탐험했으며,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 무역 식민지를 설립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지리와 그곳 사람데 대한 여러 작품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가 파견한 원정대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지브롤터)을 통과해 대서양 연안을 따라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항해했다. 이 원정은 그 당시 관체족이 거주하던 카나리아 제도까지 도달했다. 그는 이 항해 동안 에사우이라 섬에 보라색 염료 생산 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

서기 23년 유바 2세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프톨레마이오스는 문화 진흥 정책, 경제 부흥 정책, 군사력 증강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마우레타니아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그의 통치기에 마우레타니아 왕국은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동맹국으로 손꼽혔다. 그러나 서기 40년 칼리굴라의 초대를 받고 로마에 방문했다가 암살당했다. 이후 로마는 마우레타니아를 둘로 쪼개서 속주화 작업을 진행했다. 선정을 펼치던 왕을 살해하고 왕국을 무너뜨린 로마에 대한 마우레타니아인들의 분노가 갈수록 확산되던 서기 41년, 칼리굴라가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와 율리우스 루푸스, 사비누스 등 20명이 채 안 되는 프라이토리아니 장병들에게 암살당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전 노예였던 아이데몬이 주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칼리굴라의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 1세티베리우스-칼리굴라 시대때 야전사령관으로 명성이 자자한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를 파견해 반란을 제압했고, 마우레타니아는 2년 후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와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속주로 개편되었다.


3. 역대 군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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