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유미 아키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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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유미 아키노부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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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신 타이거스 엠블럼.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1985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78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유격수 부문 베스트나인
이시와타 시게루
(킨테츠 버팔로즈)

마유미 아키노부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

이시와타 시게루
(킨테츠 버팔로즈)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2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시노즈카 토시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마유미 아키노부
(한신 타이거스)

시노즈카 토시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나인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3년 센트럴 리그 수위타자

보유 기록(NPB)
한 시즌 최다 대타 타점
30타점
1이닝 최다 피삼진
2개
연속 타석 대타 홈런
3타석 연속


마유미 아키노부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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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등번호 2번}}}
쿠라타 아키라
(1970~1972)

마유미 아키노부
(1973)


매티 알루
(1974~1975)
{{{#fff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다이헤이요 클럽-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 등번호 42번}}}
로저 레포즈
(1973)

마유미 아키노부
(1974~1978)


니시다 타카히로
(1979)
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7번
이케다 준이치
(1971~1978)

마유미 아키노부
(1979~1995)


이마오카 마코토
(1997~2009)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등번호 75번
사토 미시오
(1993~1996)

마유미 아키노부
(2000~2004)


해체[1]
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72번
히라츠카 카츠히로
(2002~2007)

마유미 아키노부
(2009~2011)


히라타 카츠오
(2013~2015)



파일:마유미 아키노부 감독 이후.jpg

마유미 아키노부
真弓明信 | Akinobu Mayumi

출생
1953년 7월 12일 (70세)
구마모토현 타마나군 난칸마치[1]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학력
야나가와 고교 (후쿠오카)
신체
174cm, 75kg
투타
우투우타
포지션
외야수, 유격수, 2루수
프로입단
1972년 드래프트 3라운드 (전체 30번, 다이헤이요)
소속팀
다이헤이요 클럽-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 (1973~1978)
한신 타이거스 (1979~1995)
지도자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군 타격코치 (2000~2001)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군 수석코치 (2002~2004)
한신 타이거스 감독 (2009~2011)
응원가
한신 시절 - 미키 마우스 마치 [2]

1. 개요
2. 선수 시절
2.1. 한신 입단 이전
2.2. 한신 이적 이후
3. 코치 시절
4. 한신 감독 시절
5. 감독 사퇴 이후
6. 평가
7. 기타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일본의 前 야구선수.


2. 선수 시절[편집]



2.1. 한신 입단 이전[편집]


고교 졸업 후 일본의 사회인야구팀 덴덴 규슈[3]에서 2년을 보내다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전신인 다이헤이요클럽 라이온즈에 3차지명으로 입단하게 되었다. 입단 당시만 해도 평범한 수준의 선수였지만 타격 재질과 빠른 발이 좋은 평가를 받아서 지명되었는데 4년간은 그저 철저한 무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입단 3년차에 주로 대타나 대주자로 뛰면서 3할대를 치면서 가능성을 보이나 했지만 4년차 때 다시 폭망하면서 이대로 사라지는가 싶었지만, 5년차때부터 드디어 선발 라인업을 꿰차면서 좋은 활약을 보이기 시작했다. 6년차 때는 34도루를 기록하면서 좋은 주루를 과시했지만 이때만 해도 뒷날 만개해서 홈런을 마구 때려내는 타자는 아니었고 그저 중간쯤 하는 평범한 중거리 타자였다.

6년차를 마친 1978년 오프 시즌에, 마유미는 한신 타이거스로 트레이드됐다. 한신의 주전 포수이자 간판 타자로 부동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여겨졌던 타부치 코이치와 후루사와 켄지를 마유미와 다케노우치 마사시, 와카나 요시하루, 다케다 마사후미 4명과 맞바꾸는 파격적인 2대 4 대형 트레이드가 단행된 것이다. 당시 세이부의 감독 겸 관리부장인 네모토 리쿠오의 주도로 이루어진 이 트레이드에 대해 당시 한신 팬들은 폭동을 일으킬 기세로 크게 반발했고, 언론에서도 그 해 스토브리그 내내 머릿기사로 다룰 정도로 말이 많았던 초 대박 사건이었다. 극성팬으로 유명한 한신의 멤버가 된 마유미로서는 부담이 더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럴만도 한 게 왕정치의 13년 연속 홈런왕의 기록을 저지하고 40홈런 이상을 두 번이나 기록했으며 트레이드 전 해에도 38홈런을 기록하는 등 한신의 최고 스타였던 타부치에 비해 아직 커리어가 부족하고 타격도 그저그런 마유미를 타부치와 맞바꾸었으니, 한신 팬들의 분노는 클 수 밖에 없었다.


2.2. 한신 이적 이후[편집]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35a15908.jpg
영광의 한신 시절.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한 이후, 마유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적하고 나서 타격포텐이 폭발한 것이다. 이적하고 나서 1979년부터 1991년까지 12년 연속 두자리수 홈런을 기록했으며 30홈런 이상 1번 , 20홈런 이상 5번 , 10홈런 이상 7번을 기록했고 83년도엔 야마우치 카즈히로 임시코치의 지도에 힘입어 0.353의 타율로 타격왕을 차지했으며 85년도에 0.322의 타율에 34홈런을 기록하면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게 된다.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에 OB선수로 기록된 마유미의 능력치는 85년도의 것이다. 또한 데이터 이스트스타디움 히어로에 나오는 T팀의 1번타자의 기록도 이 기록을 베이스로 한다.

놀라운 건 한신 이적 후 1번타자로 저런 기록을 쌓은 것인데 그 이전까지 1번타자는 단타만 잘 치고 볼 잘 고르는 게 미덕이라는 고정 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마유미 아키노부는 4번같은 1번타자로 상대 투수진을 공포에 떨게 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이어지는 바스 & 카케후 & 오카다 중심타선까지 상대하면 그야말로 상대하는 투수들 입장에선 카오스를 경험할 수 밖에 없었으며, 저들을 쉽게 넘어가더라도 사노 노리요시, 히라타 카츠오, 키도 카츠히코 등이 버티는 하위타선에 얻어맞는 경우도 많았다.[4] 더군다나 더욱 무서웠던 건 마유미가 2루타 & 3루타를 아주 많이 쳤다는 것인데 단타치고 도루하는 것 보다 이것이 더 확률 높은 득점법이 되면서 그후 두자릿수 홈런을 때릴 수 있는 1번타자들이 많이 늘어났다.

스트라이드 했던 왼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절대로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단단히 버티는 타격 폼이 인상적. 팔로 스루가 끝날 때까지 왼다리가 바깥으로 벌어지지 않고 안으로 단단히 조여져 있어 확실한 벽을 만든다.

수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더더욱 그의 가치를 빛나게 한건 유격수 & 2루수 & 외야수 다 볼수 있었다는 것이다. 스타팅 라인업에서 누군가가 부상이나 부진으로 잠시 빠질경우 마유미가 가장 좋은 대안이었고 유격수로 뛰다 2루수로도 뛰고 외야수로도 뛸수 있었다는것. 그리고 어느 포지션에서도 평균 이상의 수비력을 보였다는 것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벤 조브리스트크리스 테일러, 토노사키 슈타같은 공수 겸비의 주전 유틸리티 플레이어였던 셈.

선수생활 말년엔 3루나 1루로도 출장했다.


3. 코치 시절[편집]


은퇴 뒤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1군 타격-수석코치를 맡았으며, 2001년 211홈런을 쳐낸 강타선을 구축해 12년만의 퍼시픽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2004년을 끝으로 팀이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흡수합병하는 형태로 해산되면서 코치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4. 한신 감독 시절[편집]


파일:external/mutuko.blog.so-net.ne.jp/20081027-00000033-jijp-spo-view-000.jpg
한신 감독 취임식 당시.

파일:external/blog-imgs-24.fc2.com/bbl11101618400008-p1.jpg
한신 감독 시절.

선수 시절과는 정반대로 감독으로서는 최악의 결과만 남겼다. 2009년 감독 취임 후, 오카다 아키노부 체제에서 그나마 가을야구라도 꾸준히 해 왔던 팀[5]이 2009, 2011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2010년에는 센트럴리그 2위를 하여 가을야구를 경험했으나 3위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털려 탈락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한신 프런트는 2011 시즌 시작 전에 2년 연장계약을 마유미와 맺었는데, 이것은 매우 좋지 못한 선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대타, 대주자 등 선수교체가 너무 잦은 경향이 있어서, 교체할 선수가 없는 경우에는 투수를 야수로 올려야 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하지만 정작 어깨부상으로 인해 다른 선수로 교체해야 했던 카네모토 토모아키는 바꾸지 않고 연속출장 기록을 갱신하기 위해 계속 출장시켜 팬들의 욕을 얻어먹어야 했다. 결국 가네모토 본인이 2010년 4월 18일 요코하마 전에서 선발 미출장을 자처하면서 연속이닝 무교체 출장 기록이 끊어졌고, 2011년 4월 15일 주니치 전에서는 2사 1루에 대타로 나갔다가 1루 주자의 도루실패 이후 공수교대 과정에서 수비로 들어가지 않으면서 연속 출장 기록도 끊어지게 되었다.[6] 심지어 기네스북에서도 가네모토의 연속경기 출장에 대해 이 기록을 위해 다른 선수가 영향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라는 각주로 돌려서 깠다. 설상가상으로 마유미 감독이 2008년 시즌 후 방출시킨 라이언 보겔송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배리 지토를 대신해 5선발을 하게 되어 일본판 탈쥐효과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한신은 응답하라 1985를 외치면서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서 연봉총액이 그동안 매년 악의 제국이라고 까던 라이벌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능가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2011년 시즌 시작 전에 전문가들의 우승팀 예상은 거의 만장일치로 "한신 타이거스"였다. 그런데 부진한 성적으로 인해 우승은 커녕 플옵 커트라인인 3~4위를 왔다갔다 했고, 기어이 2011년 6월 한신 타이거스 덕에 먹고 사는 한신 전기철도 주주총회에서 마유미 감독을 성토하는 말까지 나왔다. 게다가 이 때 한신은 리그 꼴지까지도 추락하는 등 성적이 막장일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래도 여름에 분전하여 어찌어찌 다시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권을 놓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단두대 매치를 벌일 수 있을 지경까지 올라는 왔지만 팬심은 여전히 식어 있었고, 급기야 시즌 막판에는 관중석에서 응원 메가폰이 날아온다거나 심지어 고시엔 구장의 유료 입장관중이 2만명 대로 추락하여 자리가 남는 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고시엔 관중 수용능력이 4만명 중반인데 이 정도면 50%도 채우지 못한 것이고, 그만큼 관중이 줄었다는 것은 구장 바로 앞 한신 본선 코시엔역의 이용객 숫자까지 영향을 주는 수준이다.[7]

결국 그는 2011년 10월 16일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실패에 따른 책임을 지고 전격 사퇴했다. [8] 후임은 와다 유타카 타격코치가 내부승진을 통해 임명되었다.

그의 유이한 성과는 가네모토의 연속출장 세계기록을 돕고, 노우미 아츠시를 한신의 에이스 선발 투수로 올려놓은 것밖에 없게 되었다.

5. 감독 사퇴 이후[편집]


2012년부터 다시 아사히 방송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6. 평가[편집]


한신 타이거즈의 레전드 중 한 명으로서 또다른 별칭은 공포의 1번타자. 한마디로 말해서 고정관념이던 1번타자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버린 사나이였다. 포지션은 외야수 & 유격수 & 2루수. 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 멤버. 사실 그해 한신의 활약이라든가 신드롬이 워낙 커서 그 때의 주전 선수들은 다 레전드 취급받는 경향이 있다.

마유미는 카케후 마사유키오카다 아키노부와 달리 한신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게 아니라서[9] 원클럽맨이 아님에도 이적 후의 맹활약으로 팀 레전드로 성장했다.


7. 기타[편집]


  •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현역 시절엔 꽤나 꽃미남으로 유명한 선수였고, 감독을 역임했던 50대 후반 당시에도 미중년 외모를 보유하고 있었다. 70대에 이른 현재도 흰머리와 나잇살이 늘어나고 수염도 붙었지만 나름 잘생긴 얼굴을 유지하는 중이다.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팬들에게는 사이타마로 연고를 이전하기 직전에 한신으로 이적한 선수다 보니, 세이부 선수라는 인식이 옅은 편이다.


8. 관련 문서[편집]


[1] 구마모토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입학 당시까지 살았으나, 초등학교 3학년 때에 후쿠오카현 오무타시로 이주해 학창시절을 보냈다.[2] 真弓 真弓 ホームラン 真弓真弓 ホームラン
마유미 마유미 홈런 마유미 마유미 홈런
개인 응원가 도입 후 은퇴 때까지 계속 사용한 마유미를 대표하는 응원가로, 현역 말년에 발매된 선수 응원가 CD엔 저작권 문제로 추정되는 이유 탓에 반주곡만 수록되었다.
[3] NTT 서일본 규슈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2001년 폐부했다.[4] 저들 세 명 중 히라타 카츠오를 제외하고는 둘 다 13홈런씩을 기록했으며, 히라타는 53타점이나 뽑으면서 클러치 능력을 입증해 보였다. 저들 셋 중 타점이 제일 적었던 선수는 키도 카츠히코로 13홈런에 32타점을 기록했다.[5] 사실 오카다도 만족스럽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팀은 호시노가 2003년에 아쉽게 일본시리즈에서 패한 이후로 목표는 언제나 "일본시리즈 우승"이었고, 오카다에게도 과거의 감독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풍족하게 지원을 해 줬다. 일부 올드팬들에게서는 '한신답지 않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하지만 결과는 2005년 리그 우승(일본시리즈 우승은 실패) 이후 2위-3위-2위로 한끗 모자란 성적만을 거두었다.[6] 대타는 타격을 완료하든가(아웃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아니면 수비로 한 타자 이상 들어가 있어야 경기 출장이 인정된다.[7] 제아무리 한신 본선이 연선이 잘 개발되어 야구 말고도 기본적인 일상 수요를 잘 창출한다지만 노선상에서 코시엔역이 갖는 위상을 생각해 보면 이건 심각한 문제다.[8] 2008년 말 감독 취임 기자회견에서 수비의 중요성을 강조한 발언을 했으나, 2011년 센트럴리그 팀타율 1위(2할5푼5리, 2009년과 같다), 평균자책점은 2.83으로 3위였는데도 불구하고 4위에 머무르고 말았다.[9] 은퇴 시점에는 후쿠오카 시절 라이온즈 출신의 마지막 선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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