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

최근 편집일시 :



[ 음반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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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01.24. 정규앨범
1집 Got To Be There
1972.08.04. 정규앨범
2집 Ben
1973.04.15. 정규앨범
3집 Music & Me
1975.01.16. 정규앨범
4집 Forever, Michael
1979.08.10. 정규앨범
5집 Off the 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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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1.30. 정규앨범
6집 Thriller
1987.08.31. 정규앨범
7집 Bad
1991.11.26. 정규앨범
8집 Dangerous
1995.06.20. 정규앨범
9집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
1997.05.20. 리믹스 앨범
Blood on the Dance Floor: HIStory in the M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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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30. 정규앨범
10집 Invincible
2003.11.18. 컴필레이션 앨범
Number Ones
2004.11.16. 컴필레이션 앨범
The Ultimate Collection
2008.04.08. 정규앨범 25주년 기념판
6집 Thriller 25
2009.10.26. 컴필레이션 앨범
This Is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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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0. 사후앨범
11집 MICHAEL
2012.09.18. 정규앨범 25주년 기념판
7집 Bad 25
2014.05.09. 사후앨범
12집 Xscape
2017.09.29. 컴필레이션 앨범
Scream
2022.11.18. 정규앨범 40주년 기념판
6집 Thriller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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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글 목록 ]
파일:Michael_Jackson_-_Got_to_be_there_(single)_Netherlands_version.jpg
Got to be there
(1971)
파일:R-2557553-1297018155.jpeg.jpg
Rockin' Robin
(1972)
파일:mjsingle3.jpg
I Wanna Be Where You Are
(1972)
파일:michael_jackson-aint_no_sunshine_s_3.jpg
Ain't No Sunshine
(1972)
파일:3005998.jpg
Ben
(1972)
파일:Mjwithachildsheart.jpg
With a Child's Heart
(1973)
파일:3310324.jpg
Morning Glow
(1973)
파일:1973_music_and_mesingle.jpg
Music and Me
(1973)
파일:michael-jackson-happy-love-theme-from-lady-sings-the-blues-motown-3.jpg
Happy
(1973)
파일:041660.jpg
We're Almost There
(1975)
파일:220px-JustALittleBitOfYou.jpg
Just a Little Bit of You
(1975)
파일:220px-Easeondowntheroad.jpg
Ease on Down the Road
(1978)
파일:220px-MichaelJacksonYouCantWin.jpg
You Can't Win
(1979)
파일:220px-The_Wiz_Stars_-_A_Brand_New_Day_cover.jpg
A Brand New Day
(1979)
파일:R-198963-1387578450-9373.jpeg.jpg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1979)
파일:220px-Rock_With_You.jpg
Rock with You
(1979)
파일:800201_otw_single_cover.jpg
Off The Wall
(1980)

파일:michael_jackson-shes_out_of_my_life_s_1.jpg
She's Out of My Life
(1980)
파일:5680-300.jpg
Girlfriend
(1980)
파일:220px-OneDayInYourLife.jpg
One Day in Your Life
(1981)
파일:Mjtgim.jpg
The Girl Is Mine
(1982)
파일:external/static.nme.com/BillieJeanSingleMichaelJacksonPress050312.jpg
Billie Jean
(1983)

파일:ceb1ad5f941d020a5db86755610a6ec7.953x953x1.jpg
Beat It
(1983)

파일:WBSS Single.jpg
Wanna Be Startin' Somethin'
(1983)

파일:Mjhm.jpg
Human Nature
(1983)
파일:220px-P.Y.T._(Pretty_Young_Thing).jpg
P.Y.T. (Pretty Young Thing)
(1983)
파일:220px-Say_Say_Say_(album_cover_art).jpg
Say Say Say
(1983)

파일:220px-Michael_jackson_thriller_12_inch_single_USA.jpg
Thriller
(1983)

파일:220px-OneDayInYourLife11.jpg
Farewell My Summer Love
(1984)
파일:MICHAEL_JACKSON_GIRL+YOURE+SO+TOGETHER-459744.jpg
Girl You're So Together
(1984)
파일:220px-I_Just_Can't_Stop_Loving_You_(Michael_Jackson_single_-_cover_art).jpg
I Just Can't Stop Loving You
(1987)
파일:Michael_Jackson_-_Bad.jpg
Bad
(1987)

파일:Michael_Jackson_-_The_Way_You_Make_Me_Feel.png
The Way You Make Me Feel
(1987)
파일:Michael_Jackson_-_Man_in_the_Mirror.png
Man in the Mirror
(1988)

파일:220px-Michael_Jackson_-_Dirty_Diana.png
Dirty Diana
(1988)
파일:220px-Mj_anotherpartofme.jpg
Another Part of Me
(1988)
파일:smoothcriminal.jpg
Smooth Criminal
(1988)

파일:220px-Leave_Me_Alone_(Micheal_Jackson_single)_coverart.jpg
Leave Me Alone
(1989)
파일:220px-Liberian-Girl.jpg
Liberian Girl
(1989)
파일:0703713fdce5aeb3898be4ab1253606f.1000x1000x1.jpg
Black Or White
(1991)

파일:220px-Michael_Jackson_-_Remember_the_Time.png
Remember the Time
(1992)
파일:220px-Michael_Jackson_-_In_the_Closet.png
In the Closet
(1992)
파일:220px-Michael_Jackson_Jam.jpg
Jam
(1992)
파일:Who_Is_It.jpg
Who Is It
(1992)
파일:220px-Michael_Jackson_-_Heal_the_World.png
Heal the World
(1993)
파일:220px-Will_You_be_There.jpg
Will You Be There
(1993)
파일:220px-GoneTooSoon-ukcd.jpg
Gone Too Soon
(1993)
파일:220px-SCREAMjacket.jpg
Scream / CHILDHOOD
(1995)
파일:220px-Earth_Song_cover.jpg
Earth Song
(1995)
파일:220px-Mjtdcau.jpg
They Don't Care About Us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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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nger in Moscow
(1996)
파일:MJ-BOTDF_Single.jpg
Blood on the Dance Floor
(1997)

파일:220px-Ghostssinglecover.jpg
HIStory / Ghosts
(1997)
파일:220px-Yrmwsingle.jpg
You Rock My World
(2001)
파일:220px-Crysingle.jpg
Cry
(2001)
파일:220px-Butterflies02.jpg
Butterflies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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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More Chance
(2003)
파일:Cover_thegirlismine2008.jpg
The Girl Is Mine 2008
(2008)
파일:220px-WBSS2.jpg
Wanna Be Startin' Somethin' 200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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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d My Hand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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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lywood Tonight
(2011)
파일:220px-MichaelJackson'sBehindTheMask.jpg
Behind the Mask
(2011)
파일:Love_Never_Felt_So_Good_cover.png
Love Never Felt So Good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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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lace with No Name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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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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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의 주요 저널·여론조사 선정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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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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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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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잭슨 파이브의 맴버 자격으로 먼저 헌액됐다가 2001년에 솔로 자격으로 또 헌액되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2번 이름을 올린 몇 안 되는 뮤지션 중 한 명이 되었다. 출처1/출처2
이름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01년
후보자격 연도
1998년
후보선정 연도
2001년


파일:알앤비 명예의전당 로고.png 알앤비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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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14년 출처 참조




파일:songwriters-hall-of-fame-logo_770_441_90_s.jpg 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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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02년 출처 참조


파일:무용가 명예의 전당 로고.jpg 국립 무용 박물관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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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댄서/무용인이 아닌 을 겸비하는 뮤지션으로서는 최초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이름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10년 출처 참조




파일:6BCCF500-3B0B-4581-8BFC-39C573725134.png 미국 의회도서관 영구 등재 뮤직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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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iller 뮤직비디오는 미국 의회도서관 국립 영상 보관소에 등재된 최초이자 유일한 뮤직비디오다.
등재자
작품
등재연도
출처
마이클 잭슨
Thriller (1983)
2009년
#




마이클 잭슨의 주요 등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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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파일:백악관 로고.svg
Artist of The Decade.
데케이드 아티스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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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뮤지션으로서 지난 10년 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백악관에서 조지 H.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데케이드 아티스트상을 수상했다.
수상자
날짜
출처
마이클 잭슨
1990년 4월 5일
#















마이클 잭슨의 기네스북 등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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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파일:Michael Jackson photo.jpg

본명
마이클 조지프 잭슨
Michael Joseph Jackson
출생
1958년 8월 29일
미국 인디애나 주 게리
사망
2009년 6월 25일 (향년 50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홈비 힐스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가수, 작곡가, 음악 프로듀서, 사업가

파일:마이클 잭슨 서명.svg
[ 펼치기 · 접기 ]
부모님
아버지 조셉 잭슨, 어머니 캐서린 잭슨
형제
7남 3녀 중 여덟째(6남)
재키 잭슨, 티토 잭슨, 저메인 잭슨, 말론 잭슨, 브랜든 잭슨[1]
누나 레비 잭슨, 라토야 잭슨
남동생 랜디 잭슨
여동생 자넷 잭슨
배우자
리사 마리 프레슬리[2](1994년 결혼 ~ 1996년 이혼, 2023년 사망)
데비 로우(1996년 결혼 ~ 1999년 이혼)
자녀
"프린스"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D]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D]
비기 잭슨[E]
묘소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
성별
남성
인종
흑인
신체[기준]
175cm[3], 54kg[4]
MBTI
ISFP[5]
종교
여호와의 증인 → 불명 (무종교 추정)[6]
장르
, 소울, 펑크, R&B, , 디스코, 포스트 디스코, 댄스 팝, 뉴 잭 스윙
그룹
잭슨 파이브, 더 잭슨스
데뷔
그룹 1968년 1월 31일 잭슨 5 싱글 〈Big Boy〉
솔로 1971년 10월 7일 싱글 〈Got to Be There〉
별명
King of Pop[7], MJ, Smelly[8], 마잭, 마이크, The Gloved One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VEVO 로고.svg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음원사이트 링크
파일:스포티파이 아이콘.svg 파일:Apple Music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뮤직 아이콘.svg 파일:멜론 아이콘.svg 파일:네이버 VIBE 아이콘.svg 파일:지니뮤직 아이콘.svg


1. 개요
2. 위상
4. 영향력
4.1.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
5. 평가와 업적
7.1. 대표적인 공연 영상
7.1.1. 1984년 Victory 월드 투어[1]
7.1.2. 1987년-1989년 Bad 월드 투어
7.1.3. 1992년-1993년 Dangerous 월드 투어
7.1.4. 1996년-1997년 HIStory 월드 투어
7.1.5. 기타 공연
7.2. 공연장소와 관련된 여담
9. 프린스와의 라이벌리
10. 기타
10.1. 재산
10.1.1. 사후 수익
10.2. 어록
12. 수상 기록
12.1. 그래미 어워드
12.2. American Music Awards[2]
12.3. 헌액
12.4. 기타 수상
13. 필모그래피
14. 대중매체
15.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2001년 당시 솔로 데뷔 30주년 콘서트에서의 문워크

I don't care if the whole world is against you or tease you, says you're not gonna make it. Belive in yourself no matter what.

세상 전부가 당신에게 반대하고, 당신을 괴롭하고, 당신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지라도, 난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 자신만을 믿어라. 누가 뭐라고 하든.

친구 Brett Ratner와의 인터뷰에서

미국가수, 프로듀서, 사업가.

2. 위상[편집]



파일:마이클 잭슨 포스터.jpg



KING of POP

King of Pop

팝의 황제[3]

마이클 잭슨을 상징하는 표현 중 하나

팝 음악과 R&B 음악의 흐름이 마이클 잭슨 등장 전과 후로 나뉜다는 평을 받으며, 팝 시장을 넘어 전 세계 대중문화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어마 무시하다. 1964년, 6세의 나이로 Jackson 5의 리드보컬로 데뷔했는데 잭슨은 음악가 출신 아버지에게 강도 높은 음악 교육을 받았다. 그렇게 형제들과 함께 잭슨 파이브의 리드보컬로 데뷔하며 일찍이 가요계의 스타 자리에 올랐고, 솔로로 전향한 이후에는 팝 시장에서 전무후무한 최고의 엔터테이너로 입지와 영향력을 지금까지도 행사하고 있다.

마이클 잭슨의 등장은 20세기 대중문화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변화로 평가되며, 단순히 음악계를 넘어 20세기의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4] 미국 팝 시장에서 흑인 가수의 비율이 높지 않았던 시절, 전 세계적 문제였던 인종차별을 음악을 통해 완화시키며 문화 예술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 이전까지 미국 팝시장의 주도권은 늘 백인 싱어에게 쥐어져 있었으나, 잭슨이 등장한 이후 최초로 미국 흑인이 가요 시장의 주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마이클 잭슨 이후 팝 시장에 등장, 정상에 등극한 흑인 싱어들은 마이클 잭슨의 성공사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도 있다. 또한 마이클 잭슨의 등장 이후, 대중음악의 주류 장르는 록 음악에서 팝 / 알앤비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의 등장이 대중음악을 주름잡는 장르의 종류마저 변화시키게 된 것이다.

그의 압도적인 성적에 걸맞게, 마이클 잭슨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상업 수익을 남긴 아티스트이다. 전체 앨범 판매량은 비틀즈와 엘베스 플레슬리 뒤를 이은 3위이고, 단일 앨범 판매량[5]은 압도적인 1위이다. 또한 마이클 잭슨은 생전과 사후 합쳐 약 800여개의 상을 수상하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아티스트로 이름을 올렸고,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빌보드 핫 100 1위를 달성한 최초의 아티스트로 기록되어 있다.

마이클 잭슨은 위대한 음악가였지만 사회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는데, 금전적인 자선활동 외에 자신의 음악을 통해 세계의 평화를 바라는 메세지를 전달하였다. Heal the World, Black or White, Earth song, We Are the World, What more can I give 등의 곡들이 대표적. 이러한 곡들을 통해 잭슨은 세계 평화, 친환경 운동, 전쟁 반대, 테러 반대 등의 메시지를 던졌다.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이자 휴전국가인 대한민국에서도 공연을 가지며, 한국의 통일을 기원하고 실제 통일하면 공연하러 오겠다는 멘트를 남기기도 했다.[6] 이 날 공연에서 역시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가 담긴 퍼포먼스가 공연 중간에 등장하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연예인[7]으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재되었고, 20세기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아티스트로 평가받으며 이는 21세기까지 현재진행형이다. 또한 그는 팝 역사상 가장 많은 기부를 한 인물[8]이기도 했다.

1980년대 마이클 잭슨의 등장은 하나의 사회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의 앨범 Thriller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재되었고[9] We Are the World와 같은 음악 활동과 기부로 박애주의적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Bad, Dangerous 등을 성공시키며 대중에게 전례 없는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사회적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199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중문화의 세계화에 처음 등장한 서구 문화의 상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잭슨은 작사/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으며 대중가수로서는 최초로 미국 국립 무용수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중후반부터 성추문 루머로 인해 언론들에게 완전히 먹잇감이 되어 버렸고 그를 정신이상자[10][11]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으며,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언론의 매도는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005년 2차 아동 성추문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그는 대부분의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몇 년간 칩거 아닌 칩거를 하게 되었다.[12] 이 과정에서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었으며 사실상 정상적인 활동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던 2009년 3월, 마이클 잭슨은 4년만에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런던에서의 콘서트 투어 계획을 발표하며 활동 재개를 선언했다. 같은 해 7월부터 런던에서의 콘서트를 시작으로 활동 재개가 눈 앞에 왔지만, 6월 25일 주치의였던 콘레드 머레이의 프로포폴 과다 투여로 인한 심장마비로 향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지속되는 그에 대한 수많은 더러운 루머들은 그의 문화적 유산과는 별개로 그의 위상을 추락시켰으며, 전문가들은 그의 이름이 음악사에서 잊힐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후 그의 행적에서 발견되는 여러 선행에 따라 재평가를 받게 되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4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대중음악의 영원한 전설로 기억되고 있다.

3. 일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영향력[편집]



파일:마이클잭슨 .jpg

마이클 잭슨이 그의 뒤를 잇는 팝스타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마치 산소와 중력의 영향력을 말하는 것과 같다. 특히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이룬 Thriller 이후 잭슨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방대하고 광범위해져 이후 잭슨의 성공 공식들을 따라하지 않은 아티스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Rolling Stone/ Michael Jackson's Indelible Pop Legacy


엘비스 프레슬리비틀즈와 마찬가지로 잭슨이 음악 세계에 미친 영향력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The New York Times/ A Star Idolized and Haunted Michael Jackson Dies at 50

영국 대학 연구팀이 17,000개의 빌보드 핫 100에 오른 곡들을 분석한 결과 대중음악계는 1964년(비틀즈, 롤링 스톤스를 중심으로 한 브리티시 인베이전) 1983년(마이클 잭슨, 더 폴리스, 유리스믹스 등의 팝스타와 신기술의 유행) 1991년(힙합의 황금기) 3차례의 혁명기를 맞았다고 한다. 1983년은 마이클 잭슨이 Thriller 앨범으로 차트를 완전히 휩쓸던 시기로[13] 당시 타임지는 마이클을 비틀즈 이후 가장 거대하며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 가장 인기있는 단일현상이라고 보도했고 롤링 스톤은 1977년 디스코 열풍 이후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설명하고 마이클 잭슨을 흑백 인종의 벽을 부순흑인인가수라 평가했다. 2013년 네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오늘날의 뮤지션들에게 가장 많이 영향을 주는 1980년대 뮤지션으로 미국인들의 61%가 마이클을 1위로 뽑았다.[14]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기존의 미국 흑인 음악 스타일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흑인이라면 마땅히 소울이나 진한 펑크 음악을 해야 하며[15] 록은 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고정관념이었다.[16] 허나 뉴욕 타임스의 당시 칼럼 내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인지 펑크(Funk)인지 아니면 디스코인지 한 가지로 딱 명확하게 정의내리기 힘든 독특한 음악이었다. 즉, 흑인 음악적 뿌리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백인들도 납득할 수 있는 음악을 들려주며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크로스오버로 새로운 사운드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17] 이는 결국 대중음악사에서 전례없는 성공을 이끄는 계기가 된다. 고영탁 음악평론가는 '소울, 펑크, 재즈 등 대표적인 흑인음악과 록, 팝, 발라드 같은 백인음악이 그의 음악에 하나로 녹아있다. 말하자면 흑백 음악의 통합을 이뤄낸 것으로 전례없던 인종대화합의 음악'이라고 평했고 비평가 게리 멀홀랜드는 '그 이전 30년 동안 미국 대중음악의 근간을 이루었던 흑인=솔/백인=록의 등식을 영원히 바꿔 놓음으로써 대중음악사를 새로 썼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

이러한 마이클의 음악은 당시 공공연하게 남아 있었던 인종적 취향의 벽을 아울렀다는 의미에서 '뉴팝'이라고도 불렸고[18]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영국 음악의 영향력에 억눌려 있던 미국의 음악이 다시 주도권을 탈환하고 세계 대중음악을 선도하게 되는 분수령이 되었으며[19] 동시에 의 시대에서 의 시대로 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0] 다만 마이클 잭슨이 헤비메탈에서 팝메탈로 발전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는 임진모의 평가는 전후가 잘못되었다. 팝메탈은 따져보면 그 뿌리가 하드 록이었는데 하드 록의 전성기는 70년대였고 정작 헤비메탈은 마이클 잭슨이 활동하던 80년대가 전성기였다. 임진모의 평가는 아직 정립되지도 않은 장르가 시작도 전에 시들해졌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마이클 잭슨은 록의 사운드를 팝에 접목하는 시도를 했고, 이 시도를 통해서 파워 팝이 발전하게 되었다.

잭슨이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함께 만든 사운드는 펑크(funk), 올드스쿨 소울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재즈, 디스코 그리고 락의 요소도 매끄럽게 혼합되어 있어 크로스오버 팝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러한 사운드는 1979년작 Off The Wall 앨범에서도 관찰할 수 있지만 완전히 구현된 것은 흑인음악과 백인음악, 가볍게 즐기기 위한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 댄스무대용 음악과 헤드폰용 음악의 경계를 허물며 메인스트림 팝을 완전히 뒤바꾼 1982년 발매된 걸작 Thriller 앨범에서였다.

앤 파워스 음악평론가 / LA 타임스 A performer who kept transcending boundaries


인종 부분만 보더라도 정말 그 당시 백인들은 흑인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아무 저항감 없이 받아들였다. 심지어 흑백차별의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조차 Thriller는 광풍을 일으켜 "잭슨이 아파트헤이트의 갭에 다리를 놓아주었다(1984년 타임즈 기사)"는 말까지 나왔다. 실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크로스오버의 정체이다. 인종의 벽은 말할 것도 없고 세대의 벽, 성의 벽, 국가의 벽을 넘어선다. 이것이 바로 크로스오버의 정확한 의미이기도 하다. 크로스오버라는 어휘가 중요성을 갖는 것은 한편으로 그만큼 인종에 따라, 세대에 따라, 성에 따라, 국가에 따라 각각의 음악이 구별되어 있기 (또는 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흑인들의 음악이 있고, 백인들이 즐기는 음악이 있다. 백인, 흑인의 음악 영역은 사라지고.. 잭슨은 인종분리 구획을 훌쩍 뛰어넘으며 크로스오버 물결이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크로스오버의 경향은 90년대 들어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제 그것은 새로울 것도 없다. 한마디로 지금은 지겨울 정도로 크로스오버 음악이 판치는 세상이다. (웅진뮤직 기고문)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남아공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통했던 것입니다. 당시 마이클의 음악이 대단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의 음악은 1970년대에 등장했던 펑크 음악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흑인이라면 흑인음악인 솔이나 진한 펑크 음악을 해야 마땅한데 마이클은 백인들도 납득할 수 있는 팝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마이클 음악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이 크로스오버에 있었습니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음악 형태를 창조하였습니다. 마이클의 영향으로 당시 대중음악계에 크로스오버 음악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가장 먼저 프린스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마돈나도 빼놓을 수 없고 비록 계열은 다르지만 스탠다드 팝의 휘트니 휴스턴도 마이클의 크로스오버 유산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유리스믹스, 웸과 같은 뮤지션이 해당됩니다. 이들은 모두 백인이었음에도 흑인음악의 색깔을 들려주었습니다. 당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보이 조지의 컬쳐 클럽도 마이클의 크로스오버 열풍의 편린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서 '젊음의 코드, 록')

임진모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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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상, 올해의 레코드상 등 8개 부문을 휩쓸어 한 해 가장 많은 그래미 어워드를 수상한 뮤지션으로 기록됐다.[21]

시대가 이전보다는 좋아졌다고 하지만 1980년대는 인종차별이 여전히 극심한 시절로 많은 언론 권력들이 흑인 대중음악가들을 외면했다. 데이비드 보위는 1983년에 진행한 MTV와의 인터뷰에서 대놓고 MTV는 백인중심주의라고 비난할 정도이다. 1970년대 중반에 디스코 열풍으로 흑인 뮤지션들의 차트 진입이 활발한 적도 있었지만 1980년대에 열기가 식으면서 차트에서도 흑인 뮤지션들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마이클이 Thriller 앨범을 내기 전, 1981~1982년 2년간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한 흑인 뮤지션은 단 한 명도 없었고 hot 100 차트에서는 흑인 뮤지션의 곡은 단 4곡만이 1위를 차지했다. 빌보드는 아직 디스코 열풍이 한창이던 1979년과 비교했을 때 1982년까지 핫100 차트에서 흑인 뮤지션의 비중이 거의 80%나 감소했다며 당시 흑인음악의 존재감은 거의 바닥이었다고 분석했다. 디스코 열풍의 시기에도 물론 흑인 뮤지션들은 백인 뮤지션들에 밀려 주류로 대접받지는 못했다.

1970년대 이 디스코 음악에 수많은 흑인 뮤지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대표했던 밴드는 비지스라고 하는 백인 3인조 형제 밴드였죠. 그리고 앞서서 '토요일 밤의 열기'(디스코 영화) 영화의 한 장면을 보셨습니다만 흑인들은 등장하지 않아요. 백인들끼리 모여서 춤을 춥니다. 그 시대의 스타들은 이미 흑인들 쪽에도 준비가 돼 있고 백인들 쪽에서도 준비가 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흑인들의 스타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흑백의 인종차별이 여전히 존재했던 미국 사회에서 백인들이어야만 아주 폭넓은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80년대 이 스타의 등장은 한 시대를 가르는 혁명적인 등장이며 또한 완전히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계기점이 됩니다. 누굴까요? 마이클 잭슨입니다.

김태훈 음악평론가/ tvN 어쩌다 어른, '시대가 요구한 스타'


마이클 잭슨은 Off the WallThriller를 통하여 이 순환을 깨부쉈으며 근 20년간 대중음악계의 정상 자리에 올라 황제로 대접받았다. 롤링 스톤은 흑인 아티스트들의 출연을 거부했던 로큰롤 TV와 라디오 방송국의 굳게 닫혔던 문이 그에 의해 무너졌다며, 그 뒤로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고 평가했는데 특히 Billie Jean을 시작으로 수많은 흑인 아티스트들이 큰 히트를 쳤다고 분석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이 80년대를 설명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최대의 음악 매체 MTV의 장벽을 돌파한 일이다. 1981년 뮤직 비디오 전문 방송사를 표방하며 개국한 MTV의 사장 밥 비트먼은 백인 로큰롤 위주로 음악 방송을 편성했고 이렇게 되니 대다수의 방송 구성에서 흑인은 거의 제외됐다. 비트먼은 '로큰롤'을 핑계로 흑인의 음악방송 출연을 거의 불허했던 것이다. 흑인들은 이런 MTV를 인종을 차별하고 있다며 거센 비난을 쏟았다. 그로 인해 마이클이 Billie Jean 뮤직 비디오를 제작했을 때도 MTV는 방영을 거부했다. 그러자 MTV에서 방영되는 대다수 백인 아티스트들의 소속사였던 CBS는 MTV에 잭슨의 뮤직 비디오를 방영하지 않을 경우 모든 자사 소속 가수들을 MTV에서 빼버리겠으며 MTV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폭로하겠다고 통지했다. 결국 MTV는 이에 굴복하여 마이클의 노래와 뮤직 비디오를 방영했다. 거대 소속사가 흑인 가수를 위해 이렇게 움직였는데 흑인들이 자부심을 안 느낄 수가 있을까, 이후 MTV를 포함한 많은 언론 권력들이 마이클 잭슨의 거대한 영향력에 휩쓸려 흑인 대중음악가들을 더욱 더 많이 방송에 내보냈고 이로 인해 흑인 대중음악가들의 성공이 활발해졌다. 휘트니 휴스턴은 마이클이 흑인 아티스트들에게 길을 열어줬다며 감사를 표했다.

흑인의 음악이 백인 로큰롤 청자들에게도 뜻깊게 전달돼 미디어는 마이클이 흑인을 다시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다고 평가했다. 겨우 1980년대 초반에 마이클 잭슨은 앨범을 단 두 장만 발매했음에도 백인들의 스타인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에 비견될 정도로 화제였다. 음악으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사실로 흑인들은 잭슨을 영웅으로 생각했으며 1984년 타임지는 잭슨의 이름이 아프리카에 끼쳐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했을 정도이다. 이런 엄청난 영향으로 유색인 협회에서 상을 받았고 잭슨 사후 마틴 루터 킹 3세와 매직 존슨 등에게 흑인을 위해 많은 일을 해줘 감사하다는 애도를 받았다. 특히 흑인 인권 운동가 알 샤프턴 목사는 타이거 우즈버락 오바마 이전에 흑인 뮤지션들이 세계 대중문화에 진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사람이 바로 마이클 잭슨이며 덕분에 어릴 때부터 흑인 뮤지션들을 흉내 내며 자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흑인 대통령 오바마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

마이클 잭슨 이전에도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 같은 엄청난 슈퍼스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스는 영미 사회에서 주로 백인들에게 인기를 누렸던 반면 마이클 잭슨은 흑백 사회 모두에서 폭발적 반응을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흑백 크로스오버 시대'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 거지요.

가수로 보면 빌리 할리데이, 레이 찰스, 샘 쿡, 아레사 프랭클린, 오티스 레딩,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등등 마이클 잭슨 이전에도 흑인 스타 가수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스타들이었지만 그들이 미국 사회에서 상기한 엘비스 프레슬리,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엘튼 존, 믹 재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 백인 가수들을 누르고 진정한 1등을 차지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때까지 명백히 백이 흑의 위에 있었지요.

흑인 가수로서 백인을 뛰어넘어 진정으로 1등에 오른 인물은 마이클 잭슨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마이클 잭슨이 등장하면서 대중음악의 헤게모니가 백인에서 흑인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거지요. 1982년이 대중음악에서 전환점이란 말이 그래서 나옵니다. 바로 이 해에 백인 음악의 대변자이자 상징인 이글스(Eagles)가 해산하고 아프로 아메리칸 스타 마이클 잭슨이 등장했으니까요. 한편으로 미국의 문화유산이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만들어낸 블루스와 재즈라고 한다면, 또 거기에서 로큰롤이 파생했음을 전제하면 흑인문화가 마이클 잭슨에 와서 비로소 본래의 주도적 위상을 탈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모 음악평론가/ 마이클 잭슨 9주기 : 영상시대 이끈, 대중음악 현대화의 단일 주체


확실히 흑백 사이에는 깨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장벽이 존재했는데 특히 아이들은 서로 무슨 음악을 듣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MTV와 라디오 채널은 철저히 백인 음악 위주로 편성됐다... 하지만 MTV가 마이클과 함께 성공하면서 다른 흑인 음악가들의 비디오들도 빠르게 방영되기 시작했고 팝 라디오에서 자취를 감췄던 흑인음악도 다시 들리기 시작해 대중들은 이제 흑인 음악가와 백인 음악가의 비디오를 같은 채널에서 보고, 그들의 음악을 같은 라디오에서 듣는 데에 익숙해지게 됐다... 스릴러 시대에 흑인음악은 차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프린스의 싱글 '1999'조차도 1982년 처음 발표됐을 땐 라디오에서 아웃됐다가 1983년 중반에 재발표된 후 MTV에 모습을 보여 팝 라디오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마이클과 MTV의 조합은 실로 거대한 파워 그 자체였으며 레이건 시대 초기 쪼개져 있던 대중문화를 재통합하는 데에 도움을 줬다. 흑인음악은 다시 주류로 부상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빌보드/ Michael Jackson's 'Thriller' at 30: How One Album Changed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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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뮤지션 사상 최초로 MTV에서 헤비 로테이션된[22] Billie Jean 뮤직 비디오의 촬영 중 잠깐 쉬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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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V 평생공로상인 마이클 잭슨 비디오 뱅가드 어워드. 1991년부터 마이클의 이름을 따서 시상하고 있다.
또한 마이클은 이전처럼 귀로만 음악을 듣고 만족하는 듣는 음악의 시대를 넘어 눈과 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이른바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연 주인공으로 현대 팝 음악산업의 길을 제시했다. 마이클과 함께 음악의 중심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이동했다.[23] 뮤직 비디오댄스의 대중화와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고 획기적인 무대 장비와 연출을 선보였다. 빌보드는 "화려한 이미지와 무대효과 연출을 통해 잭슨은 라이브 무대 퍼포먼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이는 아직까지도 힙합, 컨템포러리 R&B, 팝, 로큰롤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야의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라디오가 여전히 주요 음악 소비 매체 중 하나였고 지금에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당시만 해도 음악을 영상과 함께 본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고 익숙지 않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MTV는 초기엔 그저 그런 케이블 채널로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좀비 소재를 이용해 최초로 13분짜리 단편영화 콘셉트를 차용해 제작된 마이클의 <Thriller> 뮤직 비디오가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MTV는 종일 마이클의 뮤직 비디오를 방영했고 덕분에 비로소 대중적으로 막강한 파급력을 가진 채널이 될 수 있었다.[24]

영구보존작으로 선정[25]돼 현재까지도 미국 의회도서관에 보관 중인 유일한 뮤직 비디오이자 'MTV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직 비디오 1위, 또 제작 과정 등을 담은 필름 영상만 900만 부 이상 팔려 역사상 가장 성공한 뮤직 비디오로 기네스 북에 등재된 것이 바로 마이클의 <Thriller>이다.[26] 빌보드는 <Thriller> 뮤비에 대해 "획기적인 시각 효과와, 스토리라인, 그리고 복잡한 춤 동작들로 뮤직비디오를 예술 형식으로 바꿔 놓았으며 이러한 독창적인 쇼트 필름의 충격은 뮤직 비디오의 예술성을 대중문화 속에 집어넣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이는 뮤직 비디오를 음반 산업 깊이 효과적인 홍보 수단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평가했다. 마이클의 이와 같은 대성공을 보고 다른 뮤지션들도 뮤직 비디오와 보는 음악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고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것이다.

뉴욕 타임스의 존 파렐스 음악평론가가 마이클이 댄스 음악의 정의를 만들었다고 평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전엔 댄스 음악, 댄스 가수라는 수식어가 없다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주도권을 갖게 된 것이 바로 마이클과 함께였다.[27] 잭슨 파이브 시절에는 로봇춤을 유행시켰고 이후 <Beat It>, <Thriller> 등 뮤직 비디오에서 환상적인 집단 군무를 선보여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문워크와 린댄스라는 획기적인 춤도 선보여 사람들에게 큰 문화충격을 선사했다. 이외에도 수백 개의 영화 장면을 응용한 <Dangerous>의 안무 등 마이클은 참신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뉴욕 대학교 공연연구학 교수 타비야 녕오는 "프레드 아스테어 이후 그 어떤 댄서도 마이클 잭슨만큼 댄스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없었다"라고 평가했을 정도. 이러한 공로들을 인정받아 마이클은 앞서 말한 프레드 아스테어와 같은 전설적인 댄서들이 이름을 올렸던 미국 국립 무용 박물관 명예의 전당에 2010년 헌액 됐는데[28], 이는 전문 댄서가 아닌 팝과 록을 겸비하는 뮤지션으로서는 최초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기록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이클처럼 춤을 추고 싶어 했고 제2의 마이클이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댄서가 되기 위해 도전했다.[29] 마이클 사후 유명 댄서들은 춤의 아버지를 잃었다고 슬퍼했다.

단순히 멋진 춤을 췄다는 것만이 아닌 특수 연출을 통하여 시각적인 효과도 매우 많이 만들어냈다. 한상철 팝 칼럼니스트는 특히 Dangerous World Tour가 대중음악 공연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며 우리가 90년대 이후에 볼 수 있었던 대형 공연들의 특수효과 및 안무들은 바로 이 투어의 기술에서 비롯된 것들이라 해도 크게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평가했다. 대표적으로 공연의 시작과 함께 땅에서 튀어나오는 토스터 기법, Thriller를 부르고 끝부분에 관에 들어간 다음 관에 큰 송곳을 박아 넣고 불을 지른 다음에 전혀 다른 곳에서 다음 곡을 시작하는 것, Black or White의 끝부분에서 벽 밑에 깔리는 것, Earth Song 공연에서 뒤에 무대장치들과 탱크를 동원하여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점, Smooth Criminal 공연에서 등장하는 초대형 스크린 등 그냥 넘어가는 부분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많은 기법을 사용하여 다양한 효과를 냈다.

잭슨이 역사상 처음으로 춤을 추는 팝 스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팝 스타를 댄서로서 규정한 최초의 아티스트였다. 도나 섬머는 디스코의 여왕이지만 아무도 그녀의 무브를 신경 쓰지 않았고 베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Billie Jean 이후 댄싱은 팝 스타들의 일부가 되었다. 심히 춤에 재능이 없는 스타라도 모두 그들의 히트곡을 부를 때 대중들 앞에서 댄스를 선보여야만 했다. 휘트니 휴스턴도 라이오넬 리치도 심지어 브루스 스프링스틴도 말이다.

롭 셰필드 음악평론가 / 2009년 롤링 스톤 'A New Kind of Hollywood Musical'


MTV 와 뮤직 비디오 발전의 1등 공헌자. 마이클 잭슨이 이룩한 업적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MTV 와 뮤직 비디오를 통해 혁신적인 기술 발전을 가져온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마이클이 내놓은 싱글들은 대부분 뮤직 비디오를 동반했고, 그 하나하나의 작품들은 놀라운 영상 미학을 구현했다. 마이클은 뮤직 비디오를 통해 수많은 음악팬들을 MTV 앞으로 이끌었다. 그의 뮤직 비디오는 단순히 뮤직 비디오가 아니라 쇼트 필름이라 말할 정도로 방대한 스케일의 작은 영화다. 쟁쟁한 영화감독들을 초빙해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특수효과를 갖춰 웬만한 영화 못지않은 뮤직비디오를 탄생시켰다.

고영탁 음악평론가/ 오이뮤직 2003년 3월호


현대화된 댄스 팝을 거론할 때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걸쳐 마이클 잭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케이팝의 경우 무대 구성이 매우 중요한데, 노래와 안무 등을 통해 얼마나 화려한 무대를 연출하느냐에 있어서는 마이클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랩을 하면서도 동시에 비보잉을 해야 하는 게 케이팝의 특성.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때부터 그랬는데 이들이 아크로바틱한 댄스를 한 것도 마이클의 영향이 크다. 이후에 나온 유승준, 비 등 솔로 남자 가수들도 마찬가지다.

김성환 음악평론가/ 텐아시아 또 다시 마이클 잭슨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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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이 처음으로 문워크를 선보인 1983년 모타운 25주년 기념 빌리진 공연의 한 장면. 음악평론가 앤서니 디커티스는 '이 공연 이후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30] 이 공연은 2013년 미국 여론조사기관 해리스 폴이 자국 성인 2,00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지난 50년간 일어난 사건들 중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사건> 7위에 올랐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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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iller> 뮤직 비디오의 한 장면. 가사를 그대로 드라마처럼 옮기거나 콘서트를 스튜디오에서 재현하던 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한편의 단편영화처럼 제작해 뮤직 비디오의 개념을 바꿨다.[32] 참고로 <Thriller>는 오늘날 미국에서 매년 할로윈 시즌만 되면 울려퍼지는 대표적인 할로윈송이 되었다. 2021년에는 빌보드 핫 100 19위까지 올랐을 정도...
마이클의 앨범은 사운드 엔지니어링 측면에서도 유행을 선도했다. 마이클은 사운드에 유난히 민감하고 엄격한 귀를 가졌던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마이클의 영원한 음악적 동지였던 사운드 엔지니어 브루스 스웨디언이 밝힌 일화에 의하면 마이클이 <Billie Jean> 사운드를 계속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무려 91번이나 믹싱을 반복해야 했다고 한다.[33] 이러한 노력들 때문인지 마이클의 앨범이 스피커플레이어 개발시에 단골 레퍼런스 디스크로 이름을 떨쳤다는 것은 레코딩 업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며 마이클의 음반을 믹싱, 마스터링했던 전문 스튜디오 엔지니어들이 이후 수많은 팝 아티스트들의 집중적인 주문 공세에 시달렸던 것은 물론이다.[34]

임진모 음악평론가도 "마이클의 앨범 사운드 자체가 굉장히 섬세하고 시대를 앞서가 옛 스튜디오 엔지니어들 책상에는 항상 마이클의 앨범이 꽂혀 있었을 정도"라고 말하며 "마이클의 음악을 들으면 녹음과 음향 수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마이클은 앉아서 만족할 수 있는 사운드가 나올 때까지 계속 '다시'를 외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사운드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기가 막히다. 특히 엔지니어들이라면 마이클의 음악은 반드시 들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35] 실제로 마이클의 80년대 음악들은 약간 복고적인 느낌을 풍기는 곡들도 있긴 하지만 전형적인 80년대의 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어 현대인들도 적응하기 좋고 특히 이준오 영화음악 감독이 아날로그 믹스의 바이블 같은 앨범이라고 칭하기도 한 1991년작 <Dangerous>부터는 사운드에 더더욱 공을 들인 티가 팍팍 나서 요즘 나온 음악처럼 세련되게 느껴질 수 있다.

사실 마이클 잭슨의 앨범들은 엄청난 자본이 투여된 레코딩 기술의 결정체다. 스테레오 효과를 극한까지 끌어올려서 녹음/믹스다운/마스터링한 것이라 보면 된다. 팝 레코딩의 교과서라고도 할 수 있다.

ice J 음향엔지니어/ 개인 블로그


저는 음악 듣는 걸 좋아하고 지금도 음악과 오디오에 관련된 글을 쓰면서 먹고사는 사람이지만 마이클 잭슨의 앨범을 들을 때면 아직도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마이클 잭슨의 감성과 메시지가 완성도 높은 사운드 품질 덕에 느껴지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마이클 잭슨의 앨범은 다른 가수들의 그것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한지훈 음향엔지니어/ 멜론 뮤직스토리 그가 팝의 황제인 이유: Michael Jackson [Thriller]


ai 보컬이 등장한 후 많은 팬들이 여려 유명곡들을 마이클 잭슨 보컬로 편곡하면서 2020년대에서도 여전히 엄청난 영향력과 인기를 누리고 있다.

4.1.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편집]


마이클 잭슨의 등장은 대중문화 다방면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로 인해 후대에 등장하는 모든 아티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연예인답게 연예인들의 연예인으로도 뽑힌다. 팝스타들 사이에서도 그래미 수상 보다 마이클 잭슨과 작업을 했다라는게 더 대단하게 느낄 정도이다.

저스틴 비버는 자신의 롤 모델이자 우상은 마이클 잭슨이라고 직접 밝혔다. 2010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남자 가수상 수상 소감으로 마이클 잭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그 누구도 마이클 잭슨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라고 소감을 마무리했다. 마이클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를 끈 것은 음악이 다양하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기 때문이니 내 목표도 마이클 잭슨처럼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고 활력을 주어 모두와 인연을 맺고 싶다고 말했다. 또 잭슨이 존경을 받는 이유는 깨끗한 삶 때문이기에 자신도 마이클 잭슨을 본받아 깨끗한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다고 했다. 한편 최근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잭슨의 노래는 'Dirty Diana'라고 밝혔다.

레이디 가가는 마이클 잭슨이 입었던 옷, 장신구들을 대량으로 구매하여 마이클 잭슨 박물관을 건립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극성적인 팬이다. 한 번도 마이클을 안 좋아했던 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그녀의 곡 'Love Game'에 등장하는 지하철역이 바로 마이클의 노래 'Bad'의 촬영 장소이고, 마이클이 죽었을 때[36] 백댄서들과 함께 울었다고 한다. 2016 미 대선 당시, 힐러리 지지 연설에 마이클 잭슨이 Bad 시절에 입던 나폴레옹 자켓을 입고 나와 화제가 되었다.

셀린 디온은 마이클 잭슨이 자신의 아이돌이었다고 말했다.[37]15살 때 tv에서 마이클을 보고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으며 마이클 때문에 영어를 배우고 영어로 노래 부르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이 시절 그녀의 방 천장에는 마이클 잭슨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20살 무렵에는 마이클의 복장까지 챙겨 입고 'Bad'의 무대를 커버한 적도 있다. 또한 자신의 전성기 때에 마이클의 가족들과 공연을 펼친적도 있다.[38]또한 1995년 셀린이 월드 뮤직 어워드에서 공연을 할 때 마이클 잭슨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마이클이 사망한지 2년 뒤엔 자신의 라스 베가스 콘서트에서 마이클의 곡인 Man In the Mirror을 열창하면서 그를 추모하기도 했다. 덧붙여 셀린 디온은 자기가 음악계에서 본 최고의 작곡가 3명으로 데이비드 포스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함께 마이클을 꼽기도 했다.[39]

비욘세는 마이클 잭슨은 그 어떤 뮤지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남겼고 마법이었고 우리 모두가 꿈꾼 존재라며 추모했다. 비욘세는 마이클 잭슨의 'I Wanna Be Where You Are'을 커버한 적도 있고 2016년 슈퍼볼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복장을 오마쥬하고 나왔다.

어셔는 마이클 잭슨을 무척이나 존경했고 같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30주년 공연)에 대해 감사하며 그는 음악으로 경계를 무너뜨렸고 그가 남긴 음악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으며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저스틴 팀버레이크는 마이클 잭슨이 'Invincible' 앨범을 발매하기 전 현재 대중음악계의 흐름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이 둘의 팝 뮤지션과 미팅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브리트니와 저스틴이 마이클에게 'Thriller' 뮤직 비디오의 대성공 등에 관해 이것저것 묻고 칭찬하자 마이클이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브리트니는 마이클 잭슨 사망 이후 그는 내 평생에 영감을 줬다고 말했으며 저스틴은 천재를 잃었다고 말했다.

마돈나는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을 직접 공연 중 선사한 바도 있고 그녀의 히트곡 'Like a Virgin'도 빌리 진과 흡사하다.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 뒤 '그에게서 영감을 받지 않은 아티스트를 모른다, 모두가 마이클 잭슨을 경외하며 자랐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그린 데이, 브루노 마스[40], 크리스 브라운, 카녜 웨스트, JAY-Z,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마룬 5, The Weeknd[41], 테일러 스위프트, 아리아나 그란데, 퍼렐 윌리엄스, 등 주요 뮤지션들이 영향을 받았다. 한국에서 나얼스티비 원더와 함께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뮤지션이 마이클 잭슨이라고 이야기 했다. 또한 박진영은 어렸을 때 TV에서 마이클 잭슨을보고 음반을 구입했으며 자신의 곡들의 영향은 해당 음반에서 나왔다고 한다.

마이클 잭슨이 대중음악과 대중문화에 미친 파급력은 산술적으로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하다. 또한 단순한 음악가 이상으로 다방면의, 수많은 이들에게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 결정적 이유가 바로 대중문화를 중점으로 하여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마이클 잭슨은 사회적 사건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5. 평가와 업적[편집]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예인

BET #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연예인

베리 골디 (모타운 설립자) #

마이클 잭슨에 대한 주요 매체들의 평가
[ 펼치기 · 접기 ]
  • 2004 롤링 스톤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35위[1]
  • 2015 롤링 스톤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34위[2]
  • 2023 롤링 스톤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 86위
  • 2020 어클레임드 뮤직 산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 29위[3]
  • 2017 올뮤직 선정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뮤지션 52위[4]
  • 2018 Vulture 선정 로큰롤 명예의 전당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 60위[5]
  • 2010 VH1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 2위[6]
  • 2015 빌보드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R&B 뮤지션 1위[7]
  • 2011 Essence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R&B 스타 2위
  • 2007 Q매거진 선정 음악사를 바꾼 21인(무순위) 포함
  • 1999 배철수의 음악캠프 선정 20세기 대표 아티스트 3위[8]

2018년 영국의 가디언지는 <Best 보이밴드 맴버 Top 30>에서 마이클 잭슨을 1위로 선정했다. 마이클은 11살 때인 1969년, 형제들로 구성된 그룹 잭슨 파이브로 본격 데뷔해서 모타운에서의 첫 싱글 <I Want You Back>을 시작으로 10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4곡의 빌보드 1위 곡을 연속으로 배출했다. 이는 그룹 역사상 최초로 4개의 싱글이 연속으로 빌보드 1위를 석권한 것이었다. 또 13살 때 발표한 솔로 싱글 <Ben>도 1위를 기록하면서 사실상 잭슨에게 무명기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기는 영원할 수 없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마이클은 차트에서 이전만큼의 성적을 거두지는 못하며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다 1978년에 발매된 앨범 잭슨스의 <Destiny>가 성공하고 본인이 작곡에 참여한 Shake Your Body(Down To The Ground)가 빌보드 7위를 차지하면서 다시금 인기가 오르기 시작했고 1979년 성인이 되고 제작한 첫 솔로작인 <Off the Wall> 앨범이 2,000만 장 이상 팔리고 비평적으로도 극찬을 받으면서 마이클은 다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기조는 1990년대 초중반까지 쭉 이어졌다. 1982년 발매된 <Thriller> 앨범은 현재까지 6,600만 장을 팔아치우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42] 1985년 마이클과 라이오넬 리치가 공동 작사/작곡하고 20명 이상의 미국 레전드 뮤지션들이 함께 부른 <We Are the World> 역시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싱글만 2000만 장 이상이 팔려 나갔는데 이는 80년대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자 현재까지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싱글 8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1987년 발매된 <Bad> 앨범도 3,500만 장의 판매고[43]를 올리고 한 앨범에서 역대 최다 기록인 5곡의 빌보드 1위 곡을 배출하는 등 신기록을 세우면서[44] 80년대 마이클 잭슨은 정규앨범을 단 2장만 발표하고도 인기의 최고조를 유지했다. 마이클은 1990년 백악관에서 당시 조지 H.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데케이드(decade) 아티스트 상을 수상했고 빌보드는 앨범 판매량, 라디오 에어플레이 횟수 등 상업성 측정 지표들을 종합하여 마이클 잭슨을 80년대 대표 뮤지션으로 산정했다.[45]

1991년 발매된 <Dangerous> 앨범도 3,200만 장 이상 팔리며[46] 마이클 잭슨은 전성기를 이어갔는데 당시 앨범 수록곡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는 27개국에 동시 방송되어 5억 명 이상의 시청자를 끌어모아 기네스 북에 TV 역사상 가장 많이 본 뮤직 비디오 Premiere로 등재됐다. 1992년 미국의 유료 케이블 채널 HBO는 마이클의 <Dangerous Tour: Live in Bucharest> 공연을 방송하여 시청률 21.4%를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HBO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이었다. 1993년 마이클이 게스트로 출연한 <오프라 윈프리 쇼>는 현재까지도 TV 인터뷰 방송 역사상 가장 많은 시청자가 본 방송으로 남아있는데 약 9,000만 명이 본 것으로 집계됐다.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 슈퍼볼 하프타임 쇼도 마이클 잭슨이 출연한 1993년부터 개념이 정립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이클 이전에는 주로 대학 밴드들의 공연이나 디즈니 헌정 공연 등이 하프타임쇼를 메꿨지만 마이클 잭슨의 하프타임쇼가 본경기보다 더 높은 시청률을 보인 최초의 사례가 되면서 이후 U2, 프린스 등 슈퍼스타들이 대거 출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62%가 마이클 잭슨을 인간적으로 존경한다고 답할 만큼 마이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많이 긍정적이었지만, 1993년 첫 번째 아동성추행 의혹이 터진 이후로는 부정적인 반응들이 대부분이었다. 1980년대 후반 Wacko Jacko 논란으로 이미지에 피해를 입은 적은 있지만 그건 당시까지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성추행 의혹 사건이 마무리된 이후에도 결혼과 이혼의 반복, 백인동경설과 성형중독 의혹 등으로 인해 명예는 계속해서 실추됐다. 1995년 발매된 <HIStory> 앨범은 2,3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마이클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상업적으로 전작들과 비교하면 떨어지는 수준이었고, 2001년 발매된 마지막 정규앨범 <Invincible>은 800만 장의 판매고에서 그치며 비평적으로도 실패작으로 취급받는 등 이때가 마이클 잭슨의 음악 커리어 사상 가장 침체된 시기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3년에는 두 번째 아동성추행 혐의로 기소돼 재판까지 갔는데 2005년 미국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75%가 마이클을 유죄라고 생각한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있었을 정도로 여론은 극도로 악화됐다. 같은 해 재판 결과가 무죄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반응은 여전했다. 판결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재판결과를 믿는다는 응답은 34%에 그쳤고 믿지 않는다는 응답은 48%나 됐다. 아울러 미국인들의 40%는 마이클이 더 이상 음악 활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응답했고 70%나 마이클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응답했다. 이 시절 마이클은 4년 연속 가장 어리석은 미국인 1위 자리에 오르는 불명예도 겪었다.

이후 마이클 잭슨은 별다른 외부활동을 하지 않다가 2009년 3월 영국 런던의 기자회견장에서 컴백 콘서트를 열겠다고 발표하는데, 당시 이 장면을 CNN, ABC, BBC 등 영미권 주요 언론사들이 정규방송까지 중단하며 긴급속보 체제로 들어서며 생중계했다. 영국 O2 아레나에서 열릴 50회 분량 75만 장의 티켓이 단 4시간 만에 모두 매진되었으며, 이는 신기록이었다. 마이클이 공연을 한다면 런던에 10억파운드의 경제적 효과가 창출될 것으로도 예측되었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이 6월 25일 갑자기 사망하면서 컴백 콘서트는 결국 이뤄지지 못했고 대신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은 21세기 인터넷 산업 역사상 가장 큰 반응을 이끌어온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CNN, BBC 등 세계 각국의 언론들은 긴급속보 체제로 마이클 잭슨의 사망소식을 연일 특집으로 보도했고 수억 명의 사람들이 검색 사이트에 'Michael Jackson'을 두드리면서 구글이 트래픽 과부하로 다운됐다. 당시 구글은 자신들이 디도스 공격을 받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도 마찬가지였다. 2009년 세계 3대 검색 사이트 구글, 야후, 빙의 연간 인기검색어 1위가 'Michael Jackson'이었다. 아마존 닷컴의 데이비드 셀링거는 "그때 사상 최초로 사람들이 다 같이 인터넷을 무너뜨렸다. 거대한 규모로 전 세계를 하나로 모은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타임지는 9.11 테러 이후 처음으로 특별판을 발행했고 미국 의회에서는 재시 잭슨 목사의 주도하에 마이클 잭슨을 기리는 단체 묵념이 있었다. 이후 잭슨의 추모식은 FOX, CNN, BBC 등에서 생중계되어 세계적으로 약 10억 명이 시청한 것으로 알려졌고 TV 역사상 가장 많은 시청자들을 끌어모은 방송 중 하나가 됐다.[47] 마이클은 2009년 그해 가장 많은 앨범을 판 뮤지션으로 집계됐고[48] 사망 이후 1년간 세계적으로 약 3,500만장의 앨범판매고를 올렸다. 당시 마이클의 폭발적인 앨범판매량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빌보드는 메인차트 중 하나인 <Billboard 200> 차트의 기존 규정을 변경하기도 했다.[49] 2010년 VH1은 마이클 잭슨의 사망을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순간 1위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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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9일 마이클의 생일에 걸린 구글 로고.

사망 이후 마이클 잭슨에 대한 여론은 기존의 부정적 기류에서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가령 2009년 CNN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51%가 마이클의 팬이라고 응답한 것이나 CBS가 2013년 실시한 '미국인이 가장 다시 살리고 싶은 유명인' 설문조사에서 다이애나비, 스티브 잡스에 이어 마이클이 3위에 오른 것, 또 2014년 <Yougov>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도 미국인들의 61%가 마이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69%가 각종 루머와 가십이 아닌 음악으로 마이클이 기억될 것이라고 응답, 또 가장 위대한 로큰롤 뮤지션 2위로 뽑는 등 실추됐던 명예가 서서히 회복돼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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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마이클 잭슨에 대해 긍정적/부정적이십니까?
2003년 갤럽 조사 - 긍정 18% 부정 65%
2014년 Yougov 조사 - 긍정 61% 부정 32%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로큰롤 뮤지션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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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엘비스 프레슬리 36%
2위 마이클 잭슨 21%
3위 존 레논 9%

참고로 2002년 ABC에서도 같은 여론조사를 했었는데 결과는 엘비스가 40%였고 마이클이 2%였다.

사후에도 인기는 꾸준하다. 유튜브, 스포티파이 등 대표적인 스트리밍 사이트들에서 마이클은 사후 10년이 지났음에도 인기 아티스트 탑 100 차트에 거의 항상 이름을 올리며 누적 스트리밍 횟수 그리고 구독자수에서 역대 70위 안에 들고 있다.[51] 틱톡에서의 인기도 웬만한 현역 인기 뮤지션들에 밀리지 않는다.[52] 2014년 세계 최대 음악 데이터 분석 업체 <EchoNest>가 무작위로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 회원 20만명의 가입정보에서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항목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2000년대 이후 인기가수들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와중에도 마이클이 여성에서 31위/남성에서 13위/종합 21위를 기록했다. 2017년 뉴욕타임즈의 조사결과 마이클은 당시 미국에서 현재 가장 인기있는 뮤지션 20위로 집계되었다. 또 2019년 미국 여론조사 기관 <YPulse>에서 13~37세의 사람들 1,0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을 설문조사한 결과 마이클이 7위에 올랐다. 2021년에도 <YPulse>에서 13~39세 북미인/서유럽인 각각 1,300명을 대상으로 같은 조사를 실시했는데 마이클이 북미에서 18위, 서유럽에서 5위를 차지했다.

디지털 음원 세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이클은 RIAA 공식 인증 미국내 디지털 싱글 다운로드에서 4,100만회로 역대 29위이기도 하다. 2010년에 소니와 맺은 레코드 계약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역대 최대 레코드 계약금액 기록을 세우기도 했는데 계약금은 2억 5천만 달러였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의하면 2021년 기준 마이클의 음악 저작권 가치는 3억 7500만 달러로, 1위인 존 레논-폴 매카트니 듀오(5억 달러)에 이어 2위로 조사되었다. 포브스는 순수 잭슨 본인의 음악만으로 1년에 약 2000만 달러의 수익이 창출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위키피디아에서 가장 많이 본 문서 7위는 'Michael Jackson'이며 페이지뷰가 1억 2,500만이 넘는다. 페이스북에서도 마이클은 2018년 기준 약 7,400만 명의 팬을 보유하여 20번째로 팬이 많은 계정이기도 하다. 마이클의 음악은 현재까지도 다른 뮤지션들에 의해 많이 차용되고 있는데, 실제로 음악 분석 전문 사이트 <Whosampled>에 의하면 가장 많이 샘플링/커버/리믹스된 아티스트 순위에서 마이클은 각각 8위/5위/4위에 랭크됐다.

빌보드 200 연말결산에서 마이클은 사후 2013년을 제외하고는 2020년까지 매해 70위 안에 들 정도로 앨범 역시 지금도 꾸준히 잘 팔리고 있다. 앨범판매량 집계 사이트 <Mediatraffic>에 의하면 마이클은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약 3억 ~ 3억 5,000만장의 판매고로 역대 누적 앨범판매량 3위인데 이는 목록에 가장 많은 이름을 올린 아티스트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성인 이후 사망할 때까지 마이클 잭슨이 30년 동안 발매한 정규앨범은 6장 밖에 되지 않지만 그중 5장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100위> 안에 들었다는 것이다.[53] 피지컬 판매량만 고려한 <Mediatraffic>과는 다르게 스트리밍, 음원 다운로드 등도 판매량 집계에 반영한 <Chartmasters>에서는 마이클의 전체 판매량을 3억 2,800만장으로 보고 비틀즈 다음으로 2위에 랭크했다. 위키피디아에서 공식 인증 판매량을 통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의 앨범 판매량은 2억 7,700만 장이고 엘비스 프레슬리는 2억 3,100만 장이다. 또한 요즘 팝스타들은 디지털 음원 판매량을 기본적인 앨범 판매 수치에 합산하고 실물 음반 판매량보다 디지털 싱글과 디지털 음원 판매 수치가 더 높은 경우도 많다. 뿐만 아니라 실물 음반의 생산없이 디지털 싱글만 발매하여 온라인으로 유통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 또한 앨범 판매량으로 집계된다. 그래서 디지털 음원 판매량까지 합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방식이다.

참고로 마이클의 미국내 판매량은 RIAA 공식 인증 8,900만장으로 6위이다. 2014년에는 사후앨범 <Xscape> 수록곡 <Love Never Felt So Good>이 빌보드 HOT 100 차트 9위까지 오르면서 마이클은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50년대 연속 HOT 100 차트 Top10 안에 각기 다른 곡들을 진입시킨 유일한 뮤지션이 됐다. HOT 100 차트 1위곡이 13곡인 마이클은 가장 많은 빌보드 1위곡을 보유한 뮤지션 5위인데, 사실 잭슨 파이브 경력과 <We Are the World>까지 간접 포함하면 1위곡은 18곡에 달하나 솔로 기록과는 분리해서 보기 때문에 개인 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한편 영국에서도 마이클은 인기가 많았는데 <Thriller> 앨범과 <Bad> 앨범은 각각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6위와 9위에 해당하며 또 싱글과 앨범을 합쳐 UK 차트에서 최장기간 머문 뮤지션 순위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에 이어 마이클이 2020년 3월까지 누적 2141주간 머물러 3위를 유지 중이다. 2011년 NME에서 주관해 1,000만표 이상이 모여 순위를 정한 '가장 위대한 가수 Top 20' 투표에서 마이클이 1위에 올랐으며 2016년에는 영국인 2,000명을 대상으로 한 '가장 좋아하는 남성 뮤지션' 설문조사에서 4위에 뽑혔다. 2017년엔 영국인 2,000명을 대상으로 최고의 음악 레전드는 누구인가를 설문조사했는데 마이클이 5위에 올랐다.[54] 또 2018년에는 영국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자기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앨범 Top 40'을 조사한 결과 <Thriller> 앨범이 1위에 올랐다. 2020년에는 영국의 대표적인 음악 라디오 채널인 <SmoothRadio>가 자국민 청취자 7만명 이상을 대상으로 'Best 500 Songs'를 조사했는데 마이클은 총 20곡을 리스트에 올려 가장 많은 곡을 올린 뮤지션 순위에서 21곡으로 1위인 조지 마이클 다음으로 2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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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경향신문에서 11~14세 학생 2,39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마이클이 인기가수 4위에 이름을 올렸다.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2010년 프랑스 TF1 채널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아마조니아 원주민들에게 그의 공연 영상을 보여주고 누군지 아냐고 물었더니 아이부터 노인까지 전원 이름까지 대며 안다고 대답했다.

마이클 잭슨은 대중문화의 중심지인 미국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하나의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냉전 시대의 막이 내리고, 이후 각 나라에 국한되어 있었던 대중문화는 초강대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로 뻗어 나가는데, 1980년대를 시작으로 당시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이었던 마이클 잭슨은 코카콜라, 맥도날드와 마찬가지로 다른 국가 사람들이 처음으로 보게 되는 미국의 상징이 된 것이다. 미국을 포함한 다른 국가의 사람들에게 마이클 잭슨은 미국의 기업가 정신과 인도주의 전형을 대표한다. 그는 당시 미국의 여러 기업이 자회사의 상품을 폭발적으로 수출한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 자체로 1980년대, 1990년대를 소비한 모든 사람들에게 문화의 상징이자 자본주의의 대명사였다. 이것이 그가 20세기, 21세기에 걸쳐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된 결정적인 이유이다.

한국에서의 인기는 어땠을까? 우리나라에서도 당시 시대를 산 사람들이 증언하길 산골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알 정도였다고 말했다. 1984년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멀리 떨어진 전라남도 다도해 섬에서도 주민들이 마이클의 노래를 콧노래로 흥얼거린다고 나와있다. 동아일보는 '한창 인기가 절정인 조용필의 이름은 몰라도 마이클 잭슨의 이름을 모르는 젊은이는 없다던가. 국민학교 어린이까지도 그의 음악에는 열광한다'고 보도했는데 실제로 국민학교 학생 2,0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조사한 결과 마이클이 에이브러햄 링컨, 레이건, 에디슨에 이어 4위로 나온 적도 있다. 1989년에도 마이클은 국민학생 1,500명이 뽑은 가장 좋아하는 외국가수 1위에 올랐다. 시간이 흘러 마이클은 KBS2 연예가중계가 2015년 전국 성인남녀 무작위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남성 팝 아티스트> 설문조사에서 1위로 선정됐고 2018년에도 같은 조사방식으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댄스가수> 부문에서 국내가수들을 모두 제치고 1위로 뽑혔다. 2019년에는 <한국인이 가장 다시 보고싶은 별이 된 해외스타> 1위에 뽑혔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2006년 이후 지난 12년간 가장 많이 선곡된 뮤지션 순위에서도 마이클은 비틀즈, 에 이어 3위에 올랐다.

그럼 북한은 어떨까? 김정은이 유학시절 유독 좋아했던 가수가 마이클과 휘트니 휴스턴이었다고 김정은의 동창이 밝힌 적이 있는데 2013년에 방북하여 김정은과 시간을 보낸 미국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먼이 밝힌 일화를 봐도 만찬이 끝난 후 김정은 부부와 함께 마이클의 음악을 틀어 놓고 춤을 췄다고 하니 어느정도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북한은 2013년 미국을 미사일로 타격하는 선전영상에서 <We Are the World>를 무단 도용해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전력이 있다. 아울러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는 마이클 잭슨이라는 이름도 한번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가보다. 가디언지보도를 보면 찰스 젠킨스라는 한국전쟁 포로는 2004년에 탈출해서 2008년 기자와 인터뷰할 때 90년대 이전에 그가 접한 한국음악 이외의 유일한 음악은 러시아로부터 수입된 민족주의 노래뿐이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 밀수입된 마이클의 카세트 테이프가 그의 손에 들어오게 된 90년대 중반까지 그는 마이클이 누구인지도 몰랐다고 한 것을 보면 북한은 역시 어쩔 수가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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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의 1993년 러시아 모스크바 방문

공산국가들에게 마이클 잭슨은 큰 문제였다. 소련은 국영매체까지 동원해 '흑인의 영혼을 팔아 백인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으며 미국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들로부터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레이건 행정부를 돕는다'던가 '레이건의 파시스트 졸개이며 동족 흑인 전통의 반역자이며 이익을 위해 영혼을 파는 사기꾼'이라고 하기도 하고 '잭슨 열병이라는 바이러스균이 이제는 남미로 남하해 남미의 금을 모두 짜내려 한다'는 등 마이클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마이클의 음악은 사람의 혼을 빼놓는 것이라며 레코드점에서도 마이클의 앨범을 구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당시 타임즈보도에 의하면 소련에서도 불법 복제된 마이클의 카세트가 암암리에 널리 교환되고 소중히 여겨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마이클은 문호를 개방한 소련의 TV 광고에 등장한 첫 서방 연예인이 됐고 1993년엔 러시아에서 월드스타로서는 최초로 콘서트를 열기도 했는데 러시아 출신 대중음악 연구가 드미트리 바비치에 의하면 당시 마이클 잭슨의 콘서트는 단순히 대중문화뿐 아니라 러시아 역사 전반에서 큰 사건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마이클 사후 러시아 방송국 프로듀서 블라디미르 이바넨코는 러시아인들에게 미국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고 마이클이 바로 그 미국의 왕 같은 존재였다고 회상했다.

1988년 마이클의 서독 베를린 공연을 앞두고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비상상태였다는 비밀문서도 공개됐다. 슈타지는 베를린에 온 마이클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일일이 행적을 문서로 남겼다. 장벽 인근에서 열릴 마이클의 공연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마이클의 공연을 보기 위해 동독 청년들이 경찰과의 충돌도 불사하며 장벽으로 몰려가 수습하기 힘든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슈타지는 고민 끝에 대형 스크린으로 마이클의 공연을 중계하여 이를 막는 계획을 세웠으나 정작 공연이 열리는 날 이 계획은 시행되지 않았고 결국 장벽으로 몰려든 청년들을 경찰들이 진압하다가 유혈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마이클 열풍은 대단했는데 언론들은 마치 태풍이 휩쓴 것 같다 하여 'Typhoon Michael'이라고 불렀다. 한때 '감기에 걸려도 뉴스에 나올 사람이 일본에 세 명 있는데 마이클 잭슨, 욘사마, 고이즈미 수상'이라는 농담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켄 오타케 소니 뮤직 일본 사장은 "마이클 잭슨은 비틀즈 이후 일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엔터테이너이며 일본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남아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마이클의 사망 소식에 일본 언론들은 며칠간 많은 시간을 마이클에게 할애했고 특히 후지TV는 고정시청률 20% 이상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던 <퀴즈 헥사곤II>의 방송도 취소하고 2시간짜리 마이클 특집 방송을 편성하기도 했다. 정부 수석대변인과 장관들도 애도의 뜻을 전했다. 2019년 후지TV는 개국 60주년을 기념하여 헤이세이 시대 메자마시 테레비의 지난 25년간 6,000회 이상의 방송을 분석하여 출연횟수를 기준으로 가장 인기가 많았던 해외 연예인을 발표했는데 마이클이 1위였다.

폐쇄적인 기조를 유지한 중국에서도 마이클은 유독 인기가 있다. 중국 최대 포털 사이트 바이두가 매주 집계하는 서양 인기스타 목록에서 마이클은 2019년에도 거의 매주 1위에 오르고 있다.[55] 한 중국인 사업가는 '80년대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개방 시대를 처음 맞은 중국인들에겐 서양 문화를 상징하는 주제곡이었다'고 회상했다. 마이클의 사망 소식에 국영방송 CCTV는 바로 특집으로 소식을 전했고 바이두는 특별 추모 사이트까지 개설했으며 거의 대부분의 신문사들이 1면을 마이클의 일생과 업적을 다루는 데에 할애했다. 좀처럼 서양 연예인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중국임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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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7일 중국 주요 신문들의 1면. 마이클이 중국에서 공연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아프리카에도 마이클의 이름이 알려져 인종차별을 해소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보도됐다. 소니 뮤직 남아공 마케팅 디렉터인 던컨 깁본은 마이클 잭슨의 음악이 그동안 깊이 분열됐던 남아공 사회가 통합되는 분기점이 됐다고 말했다. 남아공 라디오는 인종적으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으나 마이클의 음악이 처음으로 백인 팝 방송국과 흑인 R&B 방송국에서 동시에 울려퍼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조는 마이클의 남아공 콘서트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흑인과 백인, 젊은이와 노인 관객이 모두 한데 어우러지는, 이전에 본 적 없는 광경이 연출됐다. 남아공 방송국 DJ 루피 응카이사는 "마이클은 흑인 가족들이 개인주의와 인종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토론하도록 하게 했다. 그래서 그의 문화적 영향력은 단순히 음악 이상의 것이다"라며 마이클을 추모했다. 아프리카의 흑인 빈민촌 소년인 제이콥은 제2의 마이클 잭슨이 되기 위해 춤을 따라 하고 있다니 아프리카의 빈민촌에도 그의 이름은 유명했다.

유럽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방문하거나 콘서트를 하면 뉴스 메인 1면을 도배를 했고 그나라 대통령이나 최고인사들이 마이클 잭슨을 만나곤 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칠레 등 남미와 멕시코, 캐나다 등 북미 및 호주에서도 마이클의 앨범들이 역대 베스트 셀링 순위에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56] 특히 남미 최대의 음악시장인 브라질에서 마이클은 외국 뮤지션 중에는 두번째[57]로 높은 판매고를 올렸는데, 마이클의 사망소식에 리우데자네이루 시장은 바로 도시에 동상을 세우며 마이클을 기리기도 했다.[58] 멕시코에서는 2009년 8월 마이클을 추모하기 위해 멕시코시티 광장으로 약 14,000명이 집결하여 마이클의 노래에 맞춰 춤을 선보였는데(영상)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플래시몹으로 기네스 북에도 등재됐다. 이시기 멕시코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규모의 마이클 헌정 플래시몹 열풍이 불었다.

또 <Thriller> 앨범이 나왔을 당시 이스라엘에 있었다는 S-Curve 레코드사의 창립자 스티브 그린버그에 의하면 마이클은 중동동남아에서도 미국과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거대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중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사 중 하나인 <Arab News>는 2019년 마이클 사망 10주기를 기념한 기사에서 "잭슨은 중동에도 거대한 팬덤을 가지고 있다. 80년대 걸프 지역에서 처음 라디오가 잡혔을 때 헤비 로테이션으로 들을 수 있었던 최초의 슈퍼스타였다... 아마 잭슨은 본인의 음악이 중동에서 남녀노소 모든 세대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끼쳤는지, 얼마나 많은 팬들이 지금 여기에 있는지, 또 그가 시련을 겪을 때 팬들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그를 믿고 견뎌왔는지 몰랐을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마이클 사후 필리핀에서는 1,500명의 죄수들이 마이클을 기리고자 감옥에서 마이클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춰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영상) 월드 투어가 열린 나라마다 지도자를 만났던 유일한 가수다. 25개국 국가 수장들과 만났으며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에서는 5개의 부족장들과도 만났다. 특수부대까지 출동한 대통령급 경호 대접을 받았다. 이렇게나 많은 국가 지도자를 만난 아티스트는 마이클 잭슨이 유일하다.

한상철 팝 칼럼니스트는 “가장 거대한 임팩트(impact)를 가진 지구상 가장 완벽한 팝 뮤지션”이라고 평가하였으며 팝 DJ 김광한 씨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의 제왕이라면 마이클 잭슨은 장르를 초월한 황제이다"라고 평가하였다. 뉴욕 록 라디오 방송국 WNEW-FM의 피디인 찰리 캔달씨는 “그가 굉장한 목소리와 다양한 스타일을 가졌으며, 귀신같이 춤을 잘 춘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는 모든 연령대와 모든 종류의 팝 청취자들에게 어필하죠.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 명 나올까 하는 가수죠”라고 평가하였으며 <빌리지 보이스>는“지금까지 스스로 작사, 작곡, 프로듀싱, 어레인지먼트, 의상, 스타일, 안무, 퍼포먼스, 영상, 자신의 이미지 로고 등을 직접 소화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고독하겠지만 팝은 천재를 만난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각종 매체에서 선정하는 최고의 아티스트 순위에서 최상위권에 위치해 있다. 2007년 Q 매거진 편집자 선정 '음악사를 바꾼 21인'(무순위)에 마이클이 포함됐고 2010년에는 VH1에서 200명의 음악전문가와 현역 가수들을 상대로 한 투표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Top 100' 2위를 차지했다. 롤링 스톤은 2004년 로큰롤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특집 기사를 내보내는 가운데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아티스트에서 마이클을 35위로[59], 2008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에서는 25위[60]로 선정했다. 2005년 미국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선정한 '가장 위대한 미국인 100인'에 포함되었다. 또한 2015년 빌보드는 마이클을 편집자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알앤비 아티스트 Top 35'에서 1위 그리고 2016년에는 12명의 브라질 음악평론가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완벽한 아티스트 Top 50'에서 2위에 랭크했다. 2014년에는 영국문화원이 설립 80주년을 기념하여 각계각층의 저명한 전문가 25명이 선정하고 전 세계 10,000명의 성인에게 투표를 실시하여 순위를 정한 '지난 80년간 세상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사건 Top 80'에 컴퓨터 발명, 핵 개발 등의 사건들과 함께 마이클 잭슨 음악의 영향력이 49위에 뽑혔다. 또 같은해 미국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는 스미소니언 교육재단에서 전문가들이 분석하여 발표한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100인'에도 이름을 올렸고 우리나라에서는 1999년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음악전문가 81명과 청취자 1,556명을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한 '20세기 최고의 팝 아티스트'에서 전문가와 청취자 모두 마이클이 3위에 선정됐다. 또한 2019년 빌보드에서 선정한 '차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에서 7위, 이후 '빌보드 선정 탑20중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에서 450만 표 이상을 받아 1위에 자리했다.

인터넷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마이클 잭슨'이란 말의 의미를 다소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이 3명은 대중음악 역사상 각자의 시대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단순히 음악적 경계를 떠나 하나의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된 전설 3인방(추가적으로는 스탠다드 팝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프랭크 시나트라도 여기에 드나 한국에서는 시나트라의 존재감이 거의 없기에 언급이 잘 안 된다.)을 뜻할 때 자주 쓰이는 것이다. 즉, 이 아티스트들이 다른 아티스트보다 더 위대하다거나 우열을 나누는 그런 걸 뜻하는 건 아니다. 엄밀히 정의하자면 로큰롤의 태동 시기인 50년대, 60년대와 팝의 시대인 80년대를 비교하기에는 대중음악은 사회-정치적 문화와도 긴밀히 연관되기 때문에 비교할 수도 없다.

마이클 잭슨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개선될 여지가 많다. 90년대 중후반부터는 논란이 되는 사생활 문제와 Wacko Jacko 이미지 때문에 평단이나 미디어들, 대중들에게 하도 까여서, 지난날의 명성들이 먹칠을 당했지만 잭슨의 사망 이후에는 그의 음악적 커리어를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5.1. 관련 언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관련 언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재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재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콘서트[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콘서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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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이 월드투어를 진행한 곳을 표시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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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Dangerous 투어의 시작을 알리는 부분. 일명 토스터 기법으로 많은 가수들이 공연에서 채용하고 있다.

잭슨은 자신의 생애에서 총 15번의 투어[61]에 900회에 가까운 공연을 했지만 이에 비해 정작 제대로 된 화질과 음질로 남아있는 동영상은 거의 없다. 투어는 아니지만 탤런트 쇼나 스크립트 공연에서 노래를 부른 것만 합치면 횟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1984년 잭슨스 (잭슨 파이브는 잭슨스로 이름을 바꿈.)의 일원으로 빅토리 투어를 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이 엄청나게 몰렸다고 한다. 당시가 Thriller 열풍으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마이클 잭슨이 투어를 한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미국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별로 공연하지도 않았는데 80년대 가장 좋은 수익을 거둔 투어 7위를 기록한다.

1987부터 1989년까지 1년4개월간 그의 첫 솔로 투어인 Bad 월드 투어가 열렸다. 123회 공연으로 440만 명의 관중들을 불러왔고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7회 연속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50만 4천 명의 관중들과 만났다. 배드 투어는 일본을 시작으로 열렸는데 일본에서 당시 잭슨의 공연 표가 매진되는 건 당연하고 암표가 횡행하여 암표상들이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한다. 배드 투어의 라이브 영상으로는 2012년 발매된 영국 웸블리 공연 DVD가 있다. 1억 2천 5백만 달러[62]를 벌어들여 80년대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투어 2위 솔로 가수로는 1위를 기록했다. 또, 당시 관객들이 잭슨의 공연을 보고 기절하고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사태는 데인저러스 투어도 마찬가지. 뉴스 보도에 의하면 공연을 열 때마다 3천 명씩 실신해서 실려 갔다고 한다.

1992-1993년에는 Dangerous 월드 투어가 열렸다 마이클 잭슨의 진통제 중독으로 후반부 스케줄이 취소되어 총 69회의 공연으로 350만 명의 관중들과 만났다. 이전 투어와는 달리 퍼포먼스가 더 과감해졌다.[63] 데인저러스 투어의 라이브 영상으로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공연이 2005년 DVD로 발매됐다.

1996년 7월 16일 히스토리 투어 시작전에 브루나이에서 브루나이 국왕의 5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Royal Brunei 공연을 개최하여 6만 명의 관중을 무료로 받았다. 내용적으로 보면 시작은 데인저러스 투어로 하는데 끝은 히스토리 투어로 끝나는 공연이다.

1996-1997년에는 HIStory 월드 투어가 열린다. 35개국 82회 공연 450만 명의 관중들과 만났다. 이때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공연을 했다. 마이클 잭슨은 1993년 Dangerous 투어 당시에도 우리나라에 오려고 한 적이 있는데 김영삼 정부는 근검절약 분위기에 맞지 않다고 거절한 바 있었고 이번에도 좌절되는가 싶더니 겨우 겨우 공연이 성사됐다. 하지만 반미 반외세를 외치는 종북세력들과 개독교 먹사들 및 외세문화를 거부하는 당시의 수구보수세력이 주축이 되어 마이클 잭슨 공연 반대 대책위가 꾸려지고 잭슨 내한 공연 반대 운동이 매우 격렬하게 펼쳐졌다.[64] 심지어는 공연 반대 대책 위원회에서 마이클 잭슨측과 계약을 하고 표를 판매하기로 한 태원예능에게 서점들과 은행 등에서 표를 판매할 경우 해당 서점과 은행의 불매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협박했고 태원예능은 협박에 굴복, 표 판매를 철회하고 전 직원들이 동원되어 밤낮으로 돌아다니며 수작업으로 표를 판매했다고 한다. 더욱이 공연 퍼포먼스가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심의위원회에서 19금 이상의 성인용으로 처리되었고 덕분에 표 판매는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기사를 보면 매진에는 실패했고 관객의 70% 가까이를 채우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2회 동안의 총 관중 수는 9만 명이었으며 이는 2017년 콜드플레이 내한공연때까지 최고기록이었다. 총 2회 공연 중 두 번째 공연은 매진을 기록했다. 근데 7만 8천명도 당시 잠실 주 경기장의 다른 행사의 입장 인원을 생각해 보면 꽤 많이 들어온 거다. 공연이 끝나고 태원예능의 사장님인 정광택씨가 당시 겪은 일을 바탕으로 '마이클 잭슨이 어쨌다구요?' 라는 책을 쓴 바 있다. 현재는 절판되어 사지는 못 하고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 있다. 정광택씨는 책 뒷면에서 이렇게 꼬집었다. "정부가 허가한 공연의 표도 못 팔게 한 나라가 이 지구상 어디에 있습니까?"



1999년에 방영된 'Michael Jackson & Friends'라는 이 자선공연이 우리나라 서울독일 뮌헨에서 열렸다. SBS에서 서울 공연을 생중계 해줬는데 이 콘서트의 순간시청률이 최고 42.3%였다.

2001년에는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마이클 잭슨 30주년 기념공연을 했다. 이때 You Rock My World를 공연할 때 어셔크리스 터커가 출연하여 함께 공연했다. 또한 휘트니 휴스턴 역시 참가하여 공연했다.

말년에 있던 솔로 투어에서 립싱크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는데, 히스토리 투어 당시 1-2곡을 제외한 모든 노래를 립싱크 처리했기 때문이다. 마이클 잭슨의 댄스는 상당한 테크닉이 필요로 하여 체력 소모가 심하다. 거기다 마이클은 통증까지 앓고 있어 데인저러스 투어부터는 진통제를 맞아가며 버텨왔지만 1993년 재판 이후 급속도로 몸 상태가 안 좋아지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 거기다 목 상태도 나빠져 히스토리 투어부터는 립싱크 없이는 공연을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서는 가장 최근 시기에 있던 히스토리 투어의 동영상만 많이 풀렸지 그 이전인 데인저러스나 배드 투어는 거의 없어 일부 유출된 소수의 영상과 잭슨 5 시절 공연 영상 밖에 없어 배드 투어를 라이브 앨범으로 발매하라는 요구가 많았는데 마이클 의 사망 3년 이후인 2012년 웸블리 투어 영상이 공개되면서 팬들의 숙원이 어느 정도 풀렸으나 아직도 풀어야 할 라이브 동영상은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일부 극성팬들은 해킹을 해가며 투어 동영상을 야금야금 빼오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야 몇 개의 불법적인 공연 동영상이 유출돼 볼 거리가 더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음질 리마스터나 화질의 개선없이 단지 빼오기만 했을 뿐이라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마이클은 빡빡한 월드 투어 일정에 대해서 힘겨워했으며 "투어는 나에게서 많은 것을 가져간다. 한 번 공연을 하고 나면 무대가 땀으로 가득 차고 몸무게가 500g이 빠져 나간다."라고 말했다.[65] Invincible 앨범 발매 당시 월드 투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것도 더 이상 과중한 일정을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넘나들며 시차 적응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다가 공연이 끝나면 흥분 상태에서 잠을 이루지 못 하고, 잠을 못 잔 상태에서 다시 무대에 서야 하니 늘 피로한 상태였다고 한다. 거기에다 2시간 동안 움직이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아무리 뛰어난 테크닉의 마이클 잭슨도 어지간한 일이 아니었을 거다. 이렇게 젊은 시절 수없이 춤을 추며 연습하고 몸을 혹사시키다보니 목, 허리, 특히 발목이 남아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This is it 콘서트를 준비하던 당시 지인에게 몸이 마음같지 않다며 예전만큼 춤출 수 없을 것 같다는 부담감을 드러내기도 했다고 한다.

마이클 잭슨이 성인이 되어 참가한 Victory World Tour, Bad World Tour, Dangerous World Tour, HIStory World Tour의 총 관중수를 합치면 1,440만 명에 달한다. 거기에다가 로얄 브루나이 공연[66]의 60,000명을 더하면 1,446만 명이 된다.[67] 말이 1,446만 명이지 이는 엄청나게 많은 수인데 피파 월드컵 중 최다 관중인 3,587,538명을 동원한 1994년 미국 월드컵의 관중 수에 4배를 곱해도 마이클 잭슨의 월드 투어 관객수보다 작다. 즉 평균 관중이 68,991명이었던 미국 월드컵 경기를 108번 해도 1,446만 명이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그 어떤 아티스트의 관중 동원 기록보다도 압도적인 수치이다.[68] 또한 마이클은 투어 때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돈을 끌어모았는데[69] 아무런 계산없이 합쳐도 3번의 투어 평균수익이 1억 3천만 달러이고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고려하여 계산하면 3번의 투어 동안 평균수익이 2억 1,500만 달러에 달한다. 투어횟수 자체가 적다는것과 21세기 들어서 투어를 한 적이 없다는 점 때문인지[70] 총관중 총합과 수익총합 순위에서 밀려났다.[71] 또 가장 많은 관중을 동원할 수 있는 미국 본토[72]를 데인저러스 투어 때부터 제외하기 시작했는데 투어의 흥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이는 마이클 잭슨의 관중 동원 능력이 매우 강력하고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졌기 때문에 유럽이나 아시아, 남미를 대상으로 투어를 해도 항상 전석 매진이었기 때문이다. 마이클이 매진을 기록하지 못한 대표적인 공연은 1996년 서울에서 열린 히스토리 투어인데 이때 18만 명 중에 90,000명만 입장했는데도 한국에서는 2017년 콜드플레이 내한공연 당시 99,837명으로 기록이 깨지기 전까지 1위였다.


7.1. 대표적인 공연 영상[편집]



7.1.1. 1984년 Victory 월드 투어[73][편집]


파일:victory-tour.jpg

Victory 월드 투어는 1984년 7월 6일부터 12월 9일까지 미국캐나다에서 진행된 마이클 잭슨의 투어이다.[74] 1979년 Destiny 월드 투어와 1981년 Triumph 월드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친 1983년 11월, 마이클 잭슨은 1984년 투어 계획을 발표했으며 Victory 앨범이 1984년 7월 2일 발매되면서 투어의 시작을 알렸다. 이 투어에는 마이클 잭슨과 그의 형제들이 참여했고, 약 2백만 명의 청중들을 동원하고 55회 공연되었다. 이 투어는 약 7,500만 달러(2020년 달러로 1억 8,7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Victory 투어는 1984년 7월 1일 미국 버밍햄에서의 최종 리허설을 거쳐 7월 6일, 미국 캔자스 시티에서 투어를 시작하여 동년 12월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투어를 마쳤다. 이 투어는 공연 마다 평균 4만 명의 관중을 동원했고 136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등 1984년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투어로 기록되었다.

Thriller 시기에는 의외로 마이클은 솔로 투어를 하지 못했다. 대신 형제들과 함께 잭슨 5의 새로운 앨범 Victory을 홍보하기 위해서 Victory 투어를 진행했다. 투어 이름은 Victory 투어이지만 정작 Victory 앨범의 노래는 세트 리스트에 없었고, 이전 잭슨 5 히트 노래들과 Off the Wall, Thriller의 노래 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이클은 가족들의 압박으로 투어에 참여한 것이었으며, 중간에 그의 형제들과 다투었기 때문에 투어는 조기 종료되었다. 마이클 잭슨은 투어 이후 본인의 몫을 자선 단체에 전액 기부하였다.

여담으로 1970년대 중반과 마이클 잭슨 데뷔 30주년 기념콘서트를 제외하고 빅토리 투어는 잭슨 형제 6명 모두가 작업에 참여한 몇 안되는 투어이고 ,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에디 밴 헤일런이 스페셜 게스트로 7월 13일 미국 댈러스 리유니온 스타디움에서 Beat It 솔로 연주를 펼쳤다.

투어가 진행된 년도가 1984년이다보니 약 40년이 다 되어가고 마이클 잭슨의 규모있는 첫 투어다 보니 다른 투어들에 비해 영상이 많이 남아있지 않으며 그나마 남아있는 캐나다 토론토 공연 영상이나 미국 댈러스 공연 영상도 화질과 음질이 좋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Billie Jean - 미국 캔자스 시티 1984년
Billie Jean - 미국 댈러스 1984년
Billie Jean - 캐나다 토론토 1984년
Billie Jean - 미국 로스앤젤레스 1984년
Beat It - 캐나다 토론토 1984년
Human Nature - 캐나다 토론토 1984년
Wanna Be Startin' Somethin' - 캐나다 토론토 1984년
Human Nature - 미국 댈러스 1984년
Beat It - 미국 댈러스 1984년
Off the Wall - 미국 뉴욕 1984년
This Place Hotel - 미국 캔자스 시티 1984년
Rock With You - 캐나다 토론토 1984년
She’s out of my life - 캐나다 토론토 1984년
Workin’ Day and Night - 캐나다 토론토 1984년


7.1.2. 1987년-1989년 Bad 월드 투어[편집]


파일:Michael-jackson-bad-tour.jpg

16개월간 진행된 이 투어는 총 15개국 4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며 123번의 콘서트를 개최했다. 이는 1980년대 진행된 투어 중 두 번째로 높은 수익을 거두었으며 단독 아티스트로서는 최고 기록이었다.

1987년 6월 29일, 잭슨의 매니저 프랭크 디리오가 그의 첫 번째 단독 월드 콘서트 투어를 시작하려는 계획을 발표했다. 펩시의 후원하에 일본에서 시작되었으며 600명이 넘는 기자, 카메라맨, 팬들은 잭슨의 일본 도착을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기다렸다. 잭슨의 투어 수행원 132명과 함께 22대의 트럭을 실어 나르는 전세 점보 제트기가 사용되었다. 무대 세트는 700개의 조명, 100개의 스피커, 40개의 레이저, 3개의 거울, 2개의 24x18피트 스크린을 사용했다. 공연자들은 70벌의 의상을 입었는데, 그 중 4벌은 광섬유 조명이 붙어 있었다. 일본에서의 첫 14일간의 관객수는 45만 명으로 최고기록을 갱신했다.

잭슨은 1988년 5월 23일 플라미니오 경기장에서 그의 유럽 투어를 시작했다. 경찰과 보안 요원들은 35000명의 군중 속에 깔려 있는 수백 명의 팬들을 구조했다. 경찰은 6월 2일 비엔나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130명의 여성이 실신했다고 보고했다. 6월 17일 잭슨은 코믹 배우 찰리 채플린의 미망인 우나 오닐을 만나기 위해 베베이로 여행을 떠났다. 잭슨은 "나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었다"고 방문 후 말했다.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인 콘서트 중 하나는 1988년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진행되었다. 이때 티켓 수요가 150만 회를 넘어섰는데, 이는 72000명의 만석을 20번 채울 수 있는 규모였다. 결국 7번의 콘서트로 504000명의 관객을 수용하였으며 이는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 이후 관계자들로부터 특별상을 수상했다. 잭슨은 총 3번의 월드 투어를 진행했는데 그중 15번[75]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공연했으며 110만 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했다. 이는 그 어떤 아티스트보다도 압도적인 수치로 웸블리 스타디움 역사상 가장 많은 티켓을 판매한 아티스트이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았다.

당시 유럽을 포함한 투어 일정에 포함된 여러 나라의 관객과 팬들은 단지 마이클 잭슨을 만난다는 사실에 흥분하였으며 수많은 인파와 기자, 파파라치들로 인해 마이클 잭슨은 정상적인 이동이 불가능했다. 9월 11일 리버풀에서 열린 마지막 유럽 콘서트는 아인트리 레이스 코스에서 열렸다. 약 1550명의 팬들이 125000명 이상의 관중들 사이에서 부상을 입었다고 보도되었다. 이는 역사상 가장 규모있는 콘서트이기도 하다.

1988년 런던 웸블리 공연이 DVD로 발매되었고 유튜브 공식 채널이 풀영상이 올라가있다. 그러나 런던 공연 말고는 1987년 일본 요코하마 공연이 그나마 제일 고화질이고, 1988년 로마 공연도 반쯤만 풀린 상태이다. 심지어 The Way You Make Me Feel과 Man in the Mirror 이 2곡은 런던 공연을 제외하면 고화질 버전이 전무하다.

1989년 로스 엔젤레스 마지막 날 공연 오디오 풀버전이 공개되었지만 영상은 여전히 볼 수 없어 아쉬움이 크다.

Billie Jean - 일본 도쿄 1987년
Billie Jean - 일본 오사카 1987년
Billie Jean - 일본 요코하마 1987년
Billie Jean - 영국 런던 1988년
Billie Jean - 미국 로스앤젤레스 1989년
Wanna Be Startin' Somethin' - 영국 런던 웸블리 1988년
Off the Wall - 일본 요코하마 1987년
Another Part of Me - 영국 런던 웸블리 1988년
Human Nature - 영국 런던 웸블리 1988년
잭슨 5 메들리 - 일본 요코하마 1987년
Rock With You - 일본 요코하마 1987년
Smooth Criminal - 이탈리아 로마 1988년
Dirty Diana - 이탈리아 로마 1988년
Thriller - 일본 요코하마 1987년
Beat It - 일본 요코하마 1987년
Bad - 일본 요코하마 1987년


7.1.3. 1992년-1993년 Dangerous 월드 투어[편집]


파일:Dangeoustourmichaeljacksonsuit.jpg

1989년 1월, 성공적으로 Bad 월드 투어를 마친 잭슨은 더이상의 투어를 하지 않고 음악 작업을 하는 데 전념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후 1991년 11월 그의 8번째 스튜디오 앨범 Dangerous가 발매된 후, 1992년 2월 3일 뉴욕시 라디오 시티 뮤직 홀에서 Dangerous World Tour를 발표하기 위한 기자 회견이 열렸다. 200명이 참석한 이 행사는 잭슨의 스폰서 펩시가 기획했다. 마이클 잭슨의 역대급 공연 중 하나라 불리는 부쿠레슈티공연도 이 투어에서 진행된 것이다. 잭슨은 또 한 번 투어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어린이들과 환경을 돕기 위해 새롭게 설립된 <Heal the World Foundation>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마이클 잭슨은 1993년 크리스마스까지 1억 달러 모금을 목표로 삼았다. 69번의 콘서트에서 4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으며 잭슨의 첫 번째 아동성추행 사건과 진통제 중독으로 인해 투어를 중단하게 된다. Dangerous World Tour부터 잭슨은 이전에 서구 문화의 영향권에 포함되지 않았던 국가나 지역들도 투어에 포함시키는데, 앞서 기술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마이클 잭슨은 그들에게 있어 최초의 서방국가 연예인이었다. 그에 따른 충격과 인기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992년 6월 당시 세계 최대 운영기였던 러시아 안토노프 An-124 화물기가 개막 유럽식 다리를 위해 로스앤젤레스에서 런던으로 설정된 장비와 무대를 운송하기 위해 예약되었다. 그러나 민간 항공기 인증과 관련된 문제로 인해 잭슨은 대신 페덱스 익스프레스[76]보잉 747을 사용하게 되었다. 도착 즉시, 그 장비는 65대의 화물차로 유럽을 가로질러 운반되었다. 화물은 조명 1,000개, 전기 케이블 10마일, 비디오 화면 9개, 스피커 168개를 포함하고 있었다. 약 2톤의 의류가 운반되었다. 이 의상은 마이클 부시와 안젤레노스 데니스 톰킨스에 의해 디자인되었는데, 그는 잭슨과 함께 그가 원하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고, "그의 아이디어를 살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두 벌의 의상은 높이가 9피트, 너비가 7피트, 무게가 각각 40파운드였고, 전산화레이저가 제어하는 광섬유등이 달려 있었다. 한 재킷에는 36개의 스트로보 조명을 켜기 위해 3,000볼트를 발생시키는 배터리 벨트가 장착되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폭발적인 효과를 감추기 위해 플랩을 숨겼다. 유럽에서 온 천 야드의 옷감은 18캐럿 금을 포함한 잭슨을 위한 검은색과 금색 옷을 포함하여 의상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의상에만 200만 달러가 들었다. 이 투어는 57000명의 평균 관객을 동원하여 역사상 세 번째로 많은 평균 관객을 동원한 투어[77]이고 이는 솔로 아티스트로서는 최고기록이며 90년대 가장 많은 평균 관객을 동원한 투어이다.

1988년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처럼 1992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공연이 DVD 고화질로 발매되었고, 현재 유튜브 공식 채널에서 풀영상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공연이 수 천 명의 사람들을 기절시킨 그 전설의 공연이다. 공연 중간에 앞줄에서 기절한 팬들이 응급 구조대원들의 들것으로 실려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78] 사실 마이클 잭슨의 콘서트에서 항상 수많은 사람들이 실신하고 기절하였지만 좋은 화질로 현재까지 볼 수 있는 공연이 극소수이기에 이 공연이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풀린 풀영상목록: 오슬로, 코펜하겐, 브레멘, 부에노스아이레스편)

Billie Jean - 독일 뮌헨 1992년
Billie Jean - 독일 쾰른 1992년
Billie Jean - 노르웨이 오슬로 1992년
Billie Jean - 덴마크 쾨벤하운 1992년
Billie Jean - 독일 브레멘 1992년
Billie Jean -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1992년
Billie Jean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93년
Jam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93년
Wanna Be Startin' Somethin'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93년독일 뮌헨 1992년[79]
Human Nature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93년
Smooth Criminal - 멕시코 멕시코시티 1993년
잭슨 5 메들리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93년
Thriller - 노르웨이 오슬로 1992년
Beat It - 노르웨이 오슬로 1992년독일 뮌헨 1992년[80]
Will You Be There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93년
The Way You Make Me Feel - 일본 도쿄 1992년
Bad - 노르웨이 오슬로 1992년
Dangerous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93년
Black or White - 영국 런던 웸블리 1992년
Heal the World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93년
Man in the Mirror - 노르웨이 오슬로 1992년


7.1.4. 1996년-1997년 HIStory 월드 투어[편집]


파일:history-tour.jpg

이 투어는 1996년 5월 29일에 발표되었고 잭슨의 Dangerous 월드 투어 이후 진행된, 마이클 잭슨의 마지막 월드 투어이다. 총 5개 대륙, 82번의 공연에서 4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첫 콘서트는 프라하의 레트나 파크에서 공연되었으며, 12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한 역사상 가장 규모있는 콘서트 중 하나였다. 1996년 10월 7일, 그는 아랍에서 처음으로 공연을 했다. 그는 튀니지에서 90000명의 팬들 앞에서 콘서트를 진행했으며 호주 시드니에서 투어를 하는 동안 데비 로우와 비공개적으로 결혼했다. 1997년 1월 3일부터 4일까지, 잭슨은 하와이 호놀룰루의 알로하 경기장에서 35000명의 관중을 동원하여 유일한 두 번의 미국 콘서트를 진행하였으며 경기장을 매진시킨 역사상 최초의 예술가가 되었다. 한편, 이 콘서트를 브루노 마스가 보기도 했다. 약 55000명의 평균 관객을 동원하였으며 이는 역사상 네 번째로 많은 평균 관객을 동원한 투어이자 Dangerous 월드 투어에 이어 90년대 두 번째로 많은 평균 관객을 동원한 투어이다. 립싱크 논란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Wanna Be Startin' Somethin"과 "Jackson 5 Medely"를 제외한 곡들은 부분 라이브 혹은 올 립싱크로 진행되었다.[81]히스토리 투어 시기에 마이클 잭슨의 목 상태는 굉장히 좋지 않았다.[82][83] 그러나 그 상태로 투어를 진행해야 했던 잭슨은 퍼포먼스의 비중을 과감히 늘리고 세트리스트의 거의 모든 곡들을 립싱크 처리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무리 퍼포먼스를 증가시킨다 하더라도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2차전은 1997년 5월 31일 독일 브레멘의 베서스타디온에서 시작되었다. 세트 리스트 변경사항에는 Blood On The Dance Floor가 추가되었고, 이후 Off the Wall 메들리와 The Way You Make Me Feel의 제거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Blood On The Dance Floor는 1997년 8월 19일 오슬로 콘서트가 끝난 후 세트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

잭슨은 39번째 생일을 맞아 덴마크 코펜하겐의 파켄 스타디움에서 60000명의 팬들과 함께 공연을 했다. 그는 You Are Not Alone 공연 후 무대에서 깜짝 생일 케이크, 행진 밴드, 불꽃놀이를 선보였다. 벨기에 오스텐드의 히포드롬 웰링턴에서의 콘서트는 원래 1997년 8월 31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웨일스 공주의 죽음으로 인해 9월 3일로 연기되었다. 마이클은 1997년 8월 24일과 26일 핀란드 헬싱키의 올림픽 경기장에서 공연을 했다.

이전 투어들과는 달리 정발된 DVD는 없고, 저화질 VHS 서울 내한 콘서트가 있기는 한다. 하지만 다른 투어들과는 달리 꽤 많은 고화질 영상들이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상태라서 여러 공연들을 유튜브에서 감상 가능하다. 특히 독일 뮌헨HD로 촬영되어 풀린 콘서트가 있으나, 잭슨의 목소리 상태가 좋지 않다는게 유일한 흠이다. [84] 2020년 유튜브에서 음질이 매우 깨끗한 내한 공연 전체가 올라왔다.

1996년 브루나이와 1997년 코펜하겐 공연때는 괜찮은 목소리를 들려줬다.

Billie Jean -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1996년
Billie Jean - 튀니지 튀니스 1996년
Billie Jean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1996년
Billie Jean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1996년
Billie Jean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1996년
Billie Jean - 뉴질랜드 오클랜드 1996년
Billie Jean - 뉴질랜드 오클랜드 1996년
Billie Jean -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1996년
Billie Jean - 필리핀 마닐라 1996년
Billie Jean - 브루나이 반다르세리베가완 1996년
Billie Jean - 독일 뮌헨 1997년
Billie Jean - 스위스 바젤 1997년
Billie Jean - 덴마크 쾨벤하운 1997년
Billie Jean - 스웨덴 예테보리 1997년
Billie Jean - 핀란드 헬싱키 1997년
Billie Jean -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 1997년
Scream/They Don't Care About Us/In the Closet[85] - 브루나이 1996년
Wanna Be Startin' Somethin' - 덴마크 코펜하겐 1997년
Stranger in Moscow - 덴마크 코펜하겐 1997년
Smooth Criminal - 스웨덴 예테보리 1997년
You Are Not Alone - 스웨덴 예테보리 1997년
The Way You Make Me Feel - 말레이시아 쿠알라 룸푸르 1996년
잭슨 5 메들리 - 브루나이 1996년
Rock with You/Off the Wall/Don't Stop 'Til You Get Enough - 뉴질랜드 오클랜드 1996년
Thriller - 스웨덴 예테보리 1997년
Beat It - 스웨덴 예테보리 1997년
Come Together/D.S. - 뉴질랜드 오클랜드 1996년
Blood on the Dance Floor - 스웨덴 예테보리 1997년
Dangerous - 핀란드 헬싱키 1997년
Black or White - 브루나이 1996년
Earth Song - 스웨덴 예테보리 1997년
Heal the World - 뉴질랜드 오클랜드 1996년
History - 스웨덴 예테보리 1997년


7.1.5. 기타 공연[편집]


1996년 7월 16일 History 투어을 실행하기 전, 브루나이에서 브루나이 국왕의 5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공연을 개최하여 6만 명의 관중을 무료로 받았다. 의상과 세트 리스트는 Dangerous 투어와 거의 동일한데, 끝 부분에 You Are Not Alone과 Earth Song 당시 최신곡들이 추가되었다. 마이클이 Billie JeanBeat It을 생전 마지막으로 풀 라이브로 부른 공연이다. 특이하게도 Billie Jean을 이전과 달리 빠른 템포가 아닌 원곡과 동일한 템포로 불러서, 마이클이 유일하게 100% 라이브로 부른 원곡 템포의 Billie Jean이다. ##

1999년 6월 25일 대한민국 서울, 6월 27일 독일 뮌헨에서 마이클과 여러 가수들이 참여한 MJ & Friends 콘서트 2개가 진행되었다. 서울 내한 뮌헨 참고로 뮌헨 공연 때 마이클이 Earth Song를 부르던 중 올라타 있던 플랫폼이 꺼져서 사고를 당했는데, 당시 사고가 영상에 나온다. 근데 마이클은 척추를 부상 당했는데도 끝까지 다음 노래 You Are Not Alone을 불렀다. (이 사실을 모르고 본다면 부상당한지 모를 정도로 태연하게 진행한다)

2001년 9월 7일, 10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마이클의 솔로 데뷔 30주년, 그리고 Invincible 앨범 홍보를 위해서 공연했다. 여러 가수들이 초청해서 마이클의 여러 노래들을 커버했다. 이때 잭슨 5 멤버들로 오랜만에 형제들과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함께 듀엣으로 부른 The Way You Make Me Feel 마이클이 혼자서 부른 노래는 Billie Jean, Black or White, Beat It, 그리고 당시 신곡이였던 You Rock My World. 아쉽게도 그의 생전 마지막 대형 콘서트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9.11 테러 하루 전에 진행했다. 공연 전체

마이클의 생전 마지막 라이브 퍼포먼스는 2002년 4월 24일 이였다. 뉴욕시 아폴로 극장에서 진행되었으면서,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이 개최한 모금 행사였다. Dangerous, Black or White, Heal the World 3곡을 불렀다. Dangerous 일부 영상, 나머지는 오디오

2009년, This Is It 투어 당시 리허설 영상이 담긴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이 개봉했다.


7.2. 공연장소와 관련된 여담[편집]


마이클 잭슨은 투어 중에 전세계의 유명한 스포츠 구단들의 홈구장을 섭렵했다. 일본의 도쿄돔이 생기기 전에 고라쿠엔 스타디움에서 3연속 매진을 기록하며 배드 투어를 시작했고 1988년을 시작으로 1996년까지 도쿄돔에서 21번이나 공연했다. 배드 투어 당시에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도 3회 공연했고 90년대에 들어서 후쿠오카 돔이 완공되자 후쿠오카 돔에서도 공연을 4회나 소화했다. 그 외에도 일본의 니시노미야 스타디움과 오사카 스타디움에서도 공연을 했다.

영국에서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15회 공연했으며 Cardiff Arms Park와 라운드리 파크에서도 공연을 했다.

에스파냐에서는 배드 투어 때 FC 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인 캄 노우에서 95,000명의 팬과 함께했으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비센테 칼데론에서도 6만명의 관중과 함께했다. 데인저러스 투어 때는 레알 오비에도의 홈구장인 Estadio Carlos Tartiere에서 공연했고 비센테 칼데론을 다시 방문했다. 히스토리 투어 때는 레알 사라고사의 홈 구장인 라 로마레다와 레알 바야돌리드 CF의 홈구장인 에스타디오 누에보 호세 소리야에서 공연했다.

프랑스에서는 배드 투어 때 파리 생제르망의 홈구장인 파르크 데 프랭스와 몽펠리에 HSC의 홈구장이었던 Stade Richter, OGC 니스의 홈구장이었던 Stade Charles-Ehrmann에서 공연했다. 데인저러스 투어 때는 툴루즈 FC의 홈구장인 스타디움 뮈니시팔에서 공연했다. 히스토리 투어 때는 올랭피크 리옹의 홈구장인 스타드 드 제를랑과 파르크 데 프랭스에서 공연했다.

독일에서는 배드 투어 당시 서독이었던 함부르크 SV의 홈구장인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 당시 이름이 Mungersdorfer Stadium였던 FC 쾰른의 홈구장인 라인에네르기 슈타디온,FC 바이에른 뮌헨TSV 1860 뮌헨의 공동홈구장이었던 올림피아 슈타디온에서 공연했다. 데인저러스 투어 때는 투어의 시작을 올림피아 슈타디온에서 했으며 Mungersdorfer Stadium과 Mungersdorfer Stadium에서 재공연했고 SV 베르더 브레멘의 홈구장인 베저슈타디온,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홈구장인 코메르츠방크 아레나, 1.FC 카이저슬라우테른의 홈구장이었던 Südweststadion, 헤르타 BSC의 홈이었던 Friedrich-Ludwig-Jahn-Sportpark에서 새로 공연했다. 히스토리 투어 때는 헤르타 BSC의 새로운 홈구장이 된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 Mungersdorfer Stadium, FC 샬케 04가 홈으로 쓰던 Parkstadion에서 공연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배드 투어 때 이탈리아 럭비 대표팀의 홈구장인 Stadio Flaminio와 유벤투스 FC, 토리노 FC의 홈구장이었던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공연했다. 데인저러스 투어 때는 Stadio Flaminio와 A.S. Giana Erminio의 홈구장인 Stadio Brianteo에서 공연했고 히스토리 투어 때는 AC 밀란인터 밀란의 홈구장인 산 시로에서 공연했다.

네덜란드에서는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의 홈구장인 당시 명칭이 페예노르트 스타디움이었던 더 카위프에서 배드 투어때 3회, 데인저러스 투어 때 2회 공연했고 히스토리 투어 때는 AFC 아약스의 홈구장인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5번 공연하여 모두 매진시켰다. 그 밖에도 스위스 FC 바젤의 홈구장이었던 St. Jakob Stadium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8. 사생활 및 일화[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사생활 및 일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프린스와의 라이벌리[편집]



파일:마잭 프린스.jpg

마이클 잭슨과 프린스[86]

마이클 잭슨의 라이벌을 꼽으라면 팬들이나 평론가들이나 이구동성으로 동시대에 활약했던 프린스를 꼽는다. 이러한 라이벌리는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으며 보통 1960년대의 비틀즈 VS 롤링 스톤스, 1970년대의 레드 제플린 VS 핑크 플로이드[87], 1990년대의 투팍 VS 비기, 혹은 영국에서 브릿팝 전쟁을 했던 오아시스 VS 블러와 함께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라이벌리로 꼽힌다.

이 두 아티스트가 라이벌로 꼽히는 이유는 비슷한 시기에 큰 성공을 거두고 같은 흑인 가수라는 점 때문이다. 또한 이 둘의 비슷하면서도 다른듯한 외모와 이미지도 한 몫 했다. 초창기에는 둘의 라이벌리가 워낙 유명했고, 이들의 라이벌리를 강조하여 돈을 버는 가십지와 같은 타블로이드들의 언론 선동 등으로 둘 사이가 나빴을 것이다 등과 함께 각종 루머들이 많이 돌았는데 앞선 문단에서도 나왔듯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초반에 마이클과 프린스는 싱글 'Bad'의 듀엣과 관해 모여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프린스가 그때 부두술사 인형을 가지고 와서 마이클은 자신을 저주하려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증언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은 프린스의 팬이었다고 하며, 프린스의 키보디스트였던 O'Neal이 밝힌 바에 따르면 프린스 역시 마이클 잭슨에게 영향을 받았고, 이 둘은 악감정 없이 서로를 존경했으며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또 앨범 Bad의 콜라보 무산이 프린스가 마이클을 질투했기 때문이다라는 루머는 굉장히 유명한데, 실상은 그냥 프린스가 스케쥴[88]이 맞지 않았고 컨셉 역시 프린스와 어울리는 컨셉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뤄지지 못했던 것 뿐이었다.

또한 레니 크레비츠는 프린스와 함께 마이클 잭슨의 스튜디오에 찾아가 오후 내내 셋이서 재밌게 논 적이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으며, 둘이서 탁구를 친 적도 있다고 한다.[89]

한편 두 아티스트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화들도 있다. 먼저 프린스는 2004년 라디오쇼 'Doug Banks Morning Show'에 출연해 진행자가 말하는 단어를 듣고 한 단어로만 본인의 생각을 말하는 코너에서 마이클 잭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받았는데 '천재(Genius)'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어 마이클의 여동생 자넷 잭슨에 대해서도 질문을 받고는 '천재의 여동생(Genius' sister)'이라고 답했다고.[90]

마이클 잭슨은 'This is it' 공연을 앞두고 이번에 내가 쉬면 신은 그 재능을 프린스에게 줄 것이라 말했다고 하는 주위 증언이 있는데 사실 여부는 모른다. 어느 무대에선 마이클과 같이 있던 제임스 브라운이 관객석 쪽에 있던 프린스를 무대로 불러들여 둘이 즉흥적인 퍼포먼스 경쟁을 하기도 했다. Bad 월드 투어 때 마이클 잭슨의 밴드는 언제나 프린스의 It's Gonna Be A Beautiful Night를 연주했다. 마이클 잭슨이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지만 콘서트를 마이클 잭슨이 지휘했고 매 공연마다 연주했으니 마이클 잭슨의 의사인 것은 확실한데 무슨 이유인지는 불명이다. 단순히 프린스의 이 노래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흑인음악계 최고의 거장 중 한 사람인 스티비 원더는 마이클 잭슨이 왕(King of Pop)이라면 프린스는 황제(Emperor)라고 말했다.기사

안타깝게도 마이클 잭슨은 향년 50세, 프린스는 향년 57세로 두 명 모두 약물 관련 사고로 50대에 세상을 일찍 떠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10.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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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그림 실력 역시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앨범 내 소책자를 보면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도 수록하기도 했다. 내한 당시에 머물렀던 숙소 선반에도 본인이 직접 그린 그림과 사인을 새겨두고 갔다. 호텔에서는 기념으로 그대로 둔 모양이다. 여러모로 예술적인 면에서는 천재.

  •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의하면 2021년 기준 마이클 잭슨의 음악 저작권 가치는 3억 7500만 달러로, 1위인 존 레논-폴 매카트니 듀오(5억 달러)에 이어 2위로 조사되었다. 포브스는 순수 잭슨 본인의 음악만으로 1년에 약 2000만 달러의 수익이 창출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화 <스윙키즈>의 강형철 감독에 의하면 한국영화에서 사용할 엄두도 못 내는 3대 가수가 마이클 잭슨, , 비틀즈라고 한다. 곡 사용료도 워낙 비싼데다 원곡 삽입을 허락받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일례로 중국영화 감독은 영화에 'Heal The World'를 삽입하기 위해 사용료로 100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한다.

  • 마이클의 대표적인 수식어인 'King of Pop'은 사실 미국 특허청상표권으로 공식 등록된 별명이기도 하다. 2009년 마이클이 사망한 직후에 바로 상표권 출원이 있었는데 'King of Pop'이 소비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누가봐도 마이클을 떠올려 혼동이 없을 것, 본인도 'King of Pop'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며 반대하는 다른 뮤지션들이 없을 것 등의 심사요건들을 모두 충족시켜 2014년 공식 등록됐다.

  • 음악적 재능은 마이클 본인의 열정으로부터 발휘던 것뿐만이 아니라 가족으로부터 이어진 핏줄과도 다름없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의 아버지인 조셉 잭슨은 어머니 캐서린과 결혼하기 전에 팔콘(Falcon)이라는 음악 밴드에서 피아노와 기타를 연주하는 공연을 한 경력이 있었다. 9명의 아이들이 있었던 잭슨 가에서, 마이클은 다르게 생각하고 그 당시 아프로 미국인(Afro-American)이 이끌었던 것에 반항하는 삶을 원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관련 출처

  • 2009년 Lunar Republic Society는 13.5 마일 크기의 한 달 분화구에 마이클의 이름을 따 '마이클 조셉 잭슨'으로 명명했다.

  • 1972년에 첫 번째이자 유일한 골든 글로브를 수상하였다. 1972년 발매된 2번째 솔로앨범 《Ben》과 이름이 동일한 제목의 공포영화에 솔로곡 'Ben'이 배경음악으로 삽입되었기 때문이다. 관련 글

  • 2009년 미국 의회에서 마이클을 '아메리칸 레전드'로 추대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여기에 추대되면 마이클은 미국의 역사, 세계사 및 사회 교과서에서 비중있게 다뤄지며 이는 대중문화인으로서는 미국 역사상 최초 그리고 흑인으로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에 이어 두 번째의 사례가 될 수도 있었다. 공화당의 실라 의원이 실제 법안까지 발의했고 이에 클린턴 부부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며 환영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전반적인 환영 분위기와는 달리 공화당에서 반대가 심해 결국 통과되지는 못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나 각종 루머로 인해 추락했던 이미지였다. 공화당의 피터 킹 의원은 "마이클 잭슨은 살아있는 동안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고 아동성추행을 일삼은 페도필리아"라며 유튜브에 영상까지 올려 반대의 뜻을 밝힐 정도였다.[91]



  • 사후에도 팬덤이 늘어나는 가수 중 하나. 페이스 북 팬 페이지 좋아요 수는 7500만개가 넘었고 유튜브 통계에서도 현재까지도 인기가 아주 많다. 보통 유튜브 조회수는 마이클 잭슨과 같이 전성기가 오래전에 끝난 가수들은 매우 적은 편인데 마이클 잭슨은 2022년 현재에도 꾸준히 활약하고 있는 웬만한 급의 팝가수들과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유튜브에서 가장 조회수가 많은 가수들 중에 40위권 이상에는 항상 들고 있다. 물론 워낙에 옛날 가수다 보니 공식채널에 나와있는 MV들은 조회수가 최신 팝가수들에 비해 매우 적었지만 유튜브의 규모가 커지며 옛날 가수들의 조회수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마이클 잭슨도 그 수혜를 톡톡히 입었다.[92]

  • 클럽에 자주 큰 관심을 가졌다. 잭슨은 전설적인 뉴욕시 클럽 스튜디오 54에 자주 들렀는데, 그곳에서 그는 곧 있을 힙합 운동의 초기 전조였던 비트 복싱에 노출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그의 미래의 많은 노래에 보컬 기술을 접목시켰다. 관련 글

  • 생전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그에게 기사 작위를 주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고 주변 지인들에게 서운함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마이클의 전 경호원 매트 피데스(Matt Fiddes)는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에서 "마이클은 야심만만했고 절대 그 야심을 잃지 않았다. 그에게 매우 중요한 한 가지이자 갖지 못했던 것은 여왕으로부터의 인정이었다. 그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좋은 친구였고 그것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스타인데, 왜 나만 마이클 잭슨 경이라는 기사 작위를 못 받은 거야?'라고 말했다. 영국인이 아닌 스티븐 스필버그조차 기사 작위를 받은 사례가 있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고 싶어서 편지를 쓰는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했는데 그냥 무시당했다"고 말했다[93]. 관련 기사

  • 동물도 매우 좋아했는데 어머니 캐서린 잭슨의 자서전에는 저녁 식사 중 마이클이 부스러기를 집어 셔츠 주머니에 넣었는데 뭐하냐고 묻자 가 마이클의 셔츠에서 얼굴을 내밀었다고. 그런데 그는 살인 쥐가 마을을 조지는 'BEN' 의 주제가를 불렀다 그래도 본인은 쥐가 관련됐다고 좋아했던 듯. 그리고 침팬지 버블스를 상당히 좋아했는데 1983년부터 그를 키운 뒤로 뮤직비디오, 쇼 프로그램 등에도 출연했다. 그런데 찌라시 언론들은 마이클이 버블스에게 집안 청소를 시킨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등의 루머를 뱉어냈고 아이들에게 위험할 정도로 덩치가 커져 결국 헤어졌다.
버블스 외의 반려동물로 는 Mr. Tibbs라고 불리는 램과 크루셔라는 이름의 반려 비단뱀을 키웠다.
  • 다만 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개 물림 사고를 당했던 아이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자녀들이 개를 너무 좋아해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리트리버 강아지를 데려와 키웠다. 이름은 케냐이며 형제들이 각자 독립한 후에는 장남인 프린스가 키워 오다가 현지 시각으로 2020년 10월 26일 사망했다.

  • 생소할 수도 있지만, 수잔 드 파스(Suzanne de Passe)라는 미국의 여성 사업가는 마이클의 예술적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그녀는 잭슨 파이브가 모타운에 합류한 후 그들의 멘토 겸 스타일리스트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훗날 마이클의 솔로 활동으로 확대되었다. 수잔은 또한 마이클이 1983년의 상징적인 춤인 문워크를 연습하는 것을 본 첫 번째 사람이었다고 한다. 관련 글

  • 무대 위에서의 돌발 상황 대처와 순발력이 무척 좋았다. 1996년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마이클 잭슨의 내한 콘서트 2차 공연 도중 잭슨이 무대 중앙 9m 높이의 리프트에 올려진 순간 국내관객 김 모 군(당시 19)이 갑자기 관람석에서 리프트 계단을 타고 올라가 잭슨을 껴안는 해프닝이 일어났었다. 잭슨은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침착하게 공연을 계속했고 관객들은 그게 무대 연출의 일부인 줄 알고 열광했다. 이 일로 경호상의 책임을 놓고 대한경호협회와 콘서트를 진행한 백호 기획은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실랑이를 벌였으나 정작 잭슨은 '우리도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었던 기막힌 쇼였다' 며 김 모 군에게 감사를 표했다. 당시 상황이 담긴 영상을 보면 갑자기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잭슨이 상당히 유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김 모 군이 리프트에서 떨어지지 않게 꼭 붙잡은 채로 노래를 한다.[94]해프닝 영상. 4분 5초 부터.
이 김모 군은 현재까지도 Korean brave guy, crazy guy 등의 별명으로 해외에서까지 회자되고 있다.

  • 1996년 내한 콘서트로 마이클 잭슨은 18억 원을 벌어갔는데, 여기에 과세 추징을 하느냐 마느냐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국내뉴스 링크 다만 이 18억 원도 꽤 깎은 개런티다.

  • 그가 을 했다는 몇몇 가지 증거들 중 하나로 최근 공개된 마이클 잭슨의 절친 중 하나인 마술사 유리 겔라에 대한 다큐에서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약을 하는 장면을 보았다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유리 겔라 문서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사람은 이미 흑역사가 되어버린 사기꾼이다. 전 세계를 순회하면서 자기 쇼의 성공을 위해 잭슨과 친구인 척 이름을 팔고 다녔다가 사기인 게 들통이 나고 잭슨의 뒤통수를 골라 치는 거짓말만 치고 다녀서 크게 비난받은 적이 있었다. 잭슨에게 약을 하지 말라고 본인이 얘기했다던데 이 사람은 관심이 떨어질 법하면 매번 잭슨이 약물을 했다고 사방팔방 떠들고 다녀서 욕을 먹었다.

  • Dangerous 월드 투어 때 남미에서 갑작스레 투어를 중단할 수 없었던 이유로 진통제 과다 복용이라고 하고 있으며 HIStory 월드 투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25곡 정도의 트랙의 1회 공연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진통제 등의 약물을 복용하면서 탈진해서 취소됐다는 문헌이 있는데 겉보기와는 달리 잭슨의 건강이 썩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후반에는 루푸스 합병증으로 구강 내부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고 80년대 중반에 화상 사고를 당한 후 치료 과정에서 기존에 있던 두피를 팽창시키는 방식으로 상처를 막았다고 한다. 마이클 잭슨이 오랫동안 장발을 고수했던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이 수술의 후유증이 꽤 심각했는지 90년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진통제를 복용했다고 하며 93년 성추행 사건 이후로 불면증이 극심해져 약물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한때 해외 커뮤니티에서는 잭슨의 건강 문제를 거론하는 팬들은 사이트에서 무조건 강퇴를 당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잭슨의 건강 문제는 언급이 금기시되어 있었다.

  • 라스베이거스의 부흥을 계획했던 적이 있었다. 2000년대 중반, 성폭행 혐의를 벗은 마이클은 라스베이거스 부활을 위한 두 가지 계획을 놓고 고심했다. 첫 번째는 화려한 의상과 무대 조명이 돋보이는 콘서트 시리즈였다. 두 번째는 그의 사망으로 인해 그 어느 누구도 알 방법이 없다. 관련 출처

  • 한때 여호와의 증인 신도이기도 했다. 70년대까지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로서 양복을 입고 집집마다 가스펠을 전파하러 다니기도 했다고 하는데 1982년 'Thriller' 뮤직비디오 촬영 과정에서 여호와의 증인 내부에서 마찰이 심해서 탈퇴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95] 내한 공연 당시에 개신교 단체에서 깽판을 저질렀던 가장 큰 명분. 다만 잭슨 가 사람들 전부가 여호와의 증인은 아니다.[96] 잭슨의 9남매들은 전부 다양한 종교를 믿고 있다. 어떤 개신교 교회에서는 팝을 악마의 음악으로 싸잡아 말하면서 마이클 잭슨을 '마이클이라는 이름은 천사장 미카엘을 사칭한 것이다' 고 말하는 짓도 저질렀다. 마이클 잭슨 본인은 집안 영향 때문에 신도였지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후에 종교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각종 인터뷰에서 '당신에게 신의 축복을' 이라는 말과 기도하는 손 모양을 자주 하고 'Dangerous' 앨범의 'Dangerous' 와 'Heal the world'[97] 에서 성경의 말을 인용한 것을 보면 여호와의 증인 탈퇴 이후에도 자신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가 스스로 밝혔다(2005년(?)의 인터뷰에서).

  • 엑서터 시티 FC팬이며 명예 감독이었다. 한때 엑서터 시티 FC의 공동회장 우리 겔러(Uri Geller)와 함께 절친이었던 마이클은 축구 클럽의 후원자였다. 겔러가 잭슨을 데본으로 초청해 경기 전 연설을 하면서 클럽의 인지도를 높이고 자선기금도 모금하면서 시작됐다. 모금된 돈의 절반은 에이즈 자선단체에 기부되었는데, 이것은 마이클이 종종 캠페인을 벌였던 계기가 되었다. 몇 달 후, 마이클은 엑서터 시티의 명예 감독이 되었고, 엑서터 시티는 엑서터 시티에 무료 입장권과 클럽 내 주요 결정에 대한 투표권을 부여했다. 관련 글

  • 생전에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특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T.》를 좋아했었고 감독과도 친분이 있었다. 1978년에는 시드니 루멧이 연출하고, 퀸시 존스가 음악 감독을 맡은 '오즈의 마법사 뉴욕, 흑인 버전'인 뮤지컬 영화 《위즈 The Wiz》에서 다이애나 로스와 출연해서 허수아비 역할로 주연을 맡기도 했지만 흥행과 비평 면에서 동시에 실패하면서 흑역사로 남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연기에 대한 열정이 있었는지 비록 'Bad' 앨범 홍보 차원에서 쓰이긴 했지만 1988년에 본인이 제작에 참여한 문워커에서도 주연을 맡아서 연기하기도 했다. 훗날 이 영화는 게임으로도 만들어졌다. 에드거 앨런 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에 캐스팅되었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지만 실제로 영화가 제작 단계에 있었는지는 확인 불가. 그 이후로 맨 인 블랙 2에 요원 M으로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98]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는 《바보 삼총사》였다. 관련 출처

  • 아이보리 코스트가봉 주민들은 마이클 잭슨에게 왕명을 주었는데, 이것은 마이클이 가봉이란 마을 한정하에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관련 글

  • 찰리 채플린의 팬이었다.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도 채플린이 작곡한 'Smile'이었으며 일상을 찍은 다큐멘터리에서도 가족과 걸어가며 Smile을 흥얼거리는 모습이 찍힌 적이 있다. 그 유명한 Dangerous 퍼포먼스에서 후반부 골프를 치는 춤동작도 찰리 채플린에 대한 오마쥬.

  • 가장 사랑스러워한 애니메이션 캐릭터 중 하나는 피노키오다. 출처

  • 2001년 리마스터링 버전이 나오기 전에 발매되었던 국내판 오리지널 'Bad' 앨범에서 강제 개명당했다. Michael Jackson을 Michael Jacksoon이라고 적어두었던 것. 다만 이것은 잭슨 본인도 신기하게 생각했는지 내한 당시 레코드점에서 이것을 구입했다고 한다.


  • KFC 치킨을 굉장히 좋아했다. 농구선수 매직 존슨이 마이클의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마이클의 요리사가 매직 존슨의 앞에는 직접 요리한 구운 닭 요리를 내주더니 마이클의 앞에는 KFC 버켓을 주고 가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마이클이 정크 푸드의 대표급인 KFC 치킨을 즐겨먹는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 평소에는 유기농 음식을 고집했지만 KFC 치킨을 먹을 때는 "껍질을 벗겨내고 먹으면 유기농이야"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원래는 소식주의자면서 채식주의자였으나 건강이 염려된다는 주치의에게서 닭가슴살 요리를 먹을 것을 처방받았고, 이후 KFC를 먹어보고 아침 점심 저녁 매 식단에 KFC를 넣어서 먹을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다. 투어를 다닐 때 KFC 치킨을 구하기 힘들 것을 대비해서 요리사가 레시피를 준비해서 다닐 정도였으며 마이클을 보기 위해 숙소 근처 KFC에 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후술하는 승객 프로필에는 매 끼마다 KFC 오리지널 치킨을 먹었고 '여러 날 동안 여행한다면 다른 치킨을 시도해 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KFC일 것이다'라고 서술될 정도였다.
  • 이 소식주의자적인 면 때문에 명성에 비해 먹는 사진이나 영상 기록이 굉장히 희귀하다. 그나마 많은 기록은 콘서트 전에 뜨거운 물에 녹인 리콜라 사탕을 마셨다는 증언이나 관련 출처 유심히 사탕을 골라 먹는 모습 등 대부분이 군것질이다. 승객 프로필에 따르면 초콜릿, 땅콩버터, 브로콜리와 같은 향이 강한 음식은 선호하지 않았고 젤리와 껌, 민트나 과일을 즐겨 먹었으며 알려진 것과 달리 종종 음주를 하기도 했던 듯하다. 영상 기록은 초밥을 먹는 영상 정도가 남아 있다.
  • 테이크아웃 음식들 중 제일 좋아한 것이 멕시코 음식들이었다고 한다. 특히 부리토와 타코를 좋아했다고. 관련 출처

  • 노래에 유독 여자 이름이 많이 나온다. 'Billie Jean' 의 빌리 진, 'Dirty Diana' 의 다이애나, 'Smooth Criminal' 의 애니[99], 'Little Susie' 와 'Blood on the dance floor' 에 나오는 수지, 거의 애드리브처럼 쓰는 데비 등등. 일각에서는 사귀던 여자들이 아니냐는 말이 있었는데 본인은 별 뜻 없다고 해명했다. 그저 이 노래에 이름이 거론된 여자들은 좋아했다.

  • 일본과도 인연이 깊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초밥이었다고 말한적도 있으며 가장 큰 대중음악 시장 중 하나인 만큼 현지에서 공연도 매우 많이 했다. 2006년에는 오랜만에 일본을 찾아 빅 카메라를 전세 내서 쇼핑을 하고 코무로 테츠야 같은 음악인들과 만나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대표적인 예능 프로그램인 후지테레비 「SMAPXSMAP」에 게스트로 깜짝 출연했었다. # 'Beat It' 을 BGM으로 깔고 등장하는 폭풍 간지를 보여줬는데 SMAP 멤버들에게 전부 비밀로 하고 왔던 거라서 멤버 전원이 보고도 믿기지 않은 듯 다들 얼떨떨한 얼굴로 게스트 근처에 가까이 가서 앉지도 못하고 근처에서 계속 진짜 마이클 잭슨이 맞냐고 물어봤다. 롯폰기에서 흉내 내는 짝퉁[100]이 온 거 아니냐며 믿지 않는 분위기였으나 곧 그런 분위기는 사그라들고 어안이 벙벙한 채 마이클을 영접하였다. 자신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이나가키 고로에게도 즐거운 듯이 박수를 쳐주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잭슨은 여기서 30분 출연하고 20만 달러를 받아갔다고 한다. 역대 게스트 중 가장 최단 시간 출연에 가장 많은 돈을 받아갔다고. 그리고 이것이 잭슨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연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다.

  • 존 레논과의 인연은 없었지만, 아내 오노 요코와 그녀의 아들 션 레논과 친구 사이로 지낸 적이 있었다. 션은 영화 《문워커》에 같이 출연해 Smooth Criminal'의 뮤직비디오와 자선 노래 'We are the World'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또한 존 레논의 첫 부인 신시아가 낳은 존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과 좋은 친구였다. 출처


  • 1992년 루마니아 공연 당시 부쿠레슈티의 인민궁전 발코니에서 자신을 보기 위해 모여든 관객들에게 'hello, budapest!' 라고 인사하는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다. 부다페스트헝가리의 수도다. 헝가리하고 루마니아는 이웃나라고 도시 이름도 비슷하다 보니 저지른 실수인 듯[101]. 사실 두 나라의 국민감정으로 보건데 상당한 실례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실수였지만 크게 문제시되지 않고 넘어갔다.

  • 잭슨 파이브 초기 앨범들에 실린 자신의 목소리를 "미니 마우스 같다”고 표현했다. 출처

  • 세상을 떠난 영국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와 생전에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그리고 직접 방송에서 나와 예전에 전화 통화도 많이 주고받았었다고 한다. 마이클은 바바라 월터스 쇼 인터뷰에서 다이애나와의 관계를 언급했는데 "그분은 너무나 아름다우시고 상냥하신 분이었어요. 우리 둘다 공통점이 많고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것도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할 만한 요소들이 수두룩하다. 둘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이들을 사랑했으며 또 아이들을 통해서 자신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보상받으려 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여담으로 마이클은 영국에서 BAD 투어를 하러 왔을 때 자신의 Bad 앨범 수록곡 중 하나인 'Dirty Diana'가 다이애나 왕세자비에 대한 모욕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어서 리스트에서 빼려고 했지만 정작 놀랍게도 다이애나는 오히려 'Dirty Diana'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고 직접 마이클에게 말해서 다시 리스트에 넣었다.[102]

  • Thriller》 앨범 활동 당시(1983년) 인터뷰했던 기자 실비 시먼스(Sylvie Simmons)의 말에 따르면; "마이클은 아주 작고 세상 물정에 밝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여러분은 그가 어린아이 같고 천사 같다고 묘사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몹시 수줍어하고, 손과 신발, 여동생을 쳐다보며, 주변에 면접관이 있다는 것을 잊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닌다." 관련 인터뷰


  • 사람들로 가득 찬 슈퍼마켓에 가서 평범하게 쇼핑해보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분이 어디 나타나면 그 일대가 어떻게 되는지 말 안 해도 뻔한 노릇.[103] 그래서 마트를 운영하는 친구가 폐점 후 마이클 만을 위해서 비공개로 마트를 열고, 다른 지인들도 와서 마이클을 전혀 모르는 척하는 직원과 손님을 연기하였다. 유튜브에서 그가 평범한 손님이 되어 장보기 체험하는 영상을 찾을 수 있다. 무려 30년 만에 슈퍼마켓에 와본 것이라고 하며, 어린아이처럼 신나하는 마이클을 볼 수 있다.

  • 유명한 만큼 오고 간 매물도 많고 경력에 비해 발매된 앨범도 적은 편인데다 재판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수집하기 쉬운 유명인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의 가장 상징적인 의상 조각과 Thriller 뮤직 비디오 재킷이 2011년 경매에서 180만 달러에 팔렸고 그의 상징적인 검은색 'Bad' 재킷은 그의 첫 솔로 투어에서 29만 8천 달러에 팔렸다. 출처

  • 2010년 1월 30일 KBS에서 방송된 연예가중계의 한 코너에서 할리우드 추남 추녀 TOP 7을 소개하면서 마이클 잭슨을 성형중독자, 아동성폭행인 것처럼 설명해 시청자들한테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후 며칠 뒤 남성 진행자의 멘션으로 짤막하게 사과했는데 이것이 과연 진정한 사과였는지 의문스럽단 의견이 많다.

  • 2002년 11월, 수백 명의 팬들 앞에서 베를린의 4층 발코니 앞에서 막내아들 프린스 마이클 2세를 안아주는 모습을 보여 언론의 비난들을 받았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순간의 흥분 속에 사로잡혔다. 나는 결코 의도적으로 내 아이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공식 사과했다. 출처


  •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국가(国歌)인 'South Carolina on My Mind'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 관련 글

  • 1984년 한 프랑스 팬이 잭슨과 닮은 외모 수술을 받지 못해 자살한 전례가 있었다. 출처


  • 리처드 아텐버러 경과 여배우 레베카 드모네이와 생일을 함께 보낸 적이 있다. 관련 출처

  •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자서전 《문워크》는 완성하는 데 4년이 걸렸다. 출처 문워크는 뉴욕 타임즈 베스트 셀러 목록의 맨 위에 올랐다. 관련 출처

  • 대중문화 예술가 제프 쿤스는 잭슨과 애완동물 버블즈의 조각품 시리즈를 만들었다. 관련 글

  • 스탠 리에 의하면 90년대 후반에 한때 마블 코믹스를 인수하려고 했다고 한다. 당시 스탠 리는 마이클이 스파이더맨의 역할을 맡고 싶어서 그랬다고 추측했다고 한다. 주변인물인 프랭크 카시오의 자서전에 의하면 마이클은 마블을 그저 좋은 돈벌이용 사업으로 생각했다고. 가장 좋아하는 슈퍼히어로는 엑스맨의 모프였다. 출처

  • HIStory 활동 중에 펄프(밴드)의 보컬 자비스 코커가 1996년 BRIT Awards에서 마이클이 'Earth Song'을 공연하는 도중 갑자기 무대에 난입해 관객석을 향해 무대를 조롱하는 제스처를 취했던 전례가 있었다. 당연히 마이클 측은 코커에게 엄청 화난 상태였다. 출처 이후 10여년간 별 언급이 없다가, 2009년 6월 25일 마이클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침묵을 깨고 '비극적이다'라는 입장을 전했다. 관련 기사

파일:팝의황제랑미국황제.jpg


  • 2019년 11월 프레디 머큐리 일대기를 그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만든 할리우드 제작자 그레이엄 킹이 마이클 잭슨의 음악 세계를 그린 전기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킹은 오스카 후보 지명 시나리오 작가인 존 로건에게 의뢰해 마이클 잭슨 일대기를 그리는 시나리오 집필을 맡겼다. 제작 스튜디오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킹은 잭슨의 초상권을 보유한 마이클 잭슨 재단과의 영화 제작에 관련된 권리를 따내는 계약을 최근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 대체적으로 진보적인 소신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레이건보수 정치인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104] '연예인 중의 연예인' 위치에 서 있는 인물인지라 어마어마한 인맥을 가졌는데, 그것을 컨트롤하는 능력도 아주 좋았던 듯하다.

  •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과 사적으로 친했다고.

  • 영화 올리버!를 무척 좋아해서, 주연이었던 마크 레스터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으며(두 사람은 동갑이다), 심지어 마이클 잭슨의 자녀들을 대리모로 얻을때 마크 레스터가 정자 제공을 해줬다고 한다.

  • 마이클 잭슨의 공연에서 23명이 사망하고 5000명이 쓰러졌다는 루머가 돌아다니는데 전부 사실이 아니다. 일단 그렇게 주장하는 매체는 대부분 2017년등으로 최신이고 92년도 당시 기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92년도 뉴 키즈 온 더 블록 내한 당시에 사망한 사람이 1명이었고 그걸로도 나라가 난리가 났었는데 23명이면 오죽할까. 아마도 훨씬 더 크게 난리나서 당장 투어를 중단하라는 요청을 받거나 안전상의 문제로 비판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정도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면 마이클 잭슨 측에서도 책임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국내 유튜브 상에서 "마이클 잭슨의 공연에서 수많은 사람이 사망했다"라는 잘못된 정보가 많이 퍼져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위 루머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105]

  • 프랑스인 Jonathan Akamba(@akamztwenty20)는 마이클 잭슨의 춤을 추며 마이크 타이슨의 복싱을 구사한다. 공교롭게도 이름에 교집합이 있다: 마이크 타이잭슨 등등

10.1. 재산[편집]


각종 기관과 매체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인생에서 벌어들인 돈이 최소 20억 달러(약 2조 원) 이상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잭슨이 빚 때문에 파산한 것이 아니냐는 헛소리가 나왔지만[106] 2007년 기준으로 마이클 잭슨의 재산의 순가치가 2억 3,600만 달러(약 2,400억 원)에 달한다고 보고되었다.#

2014년 2월 12일 미국 국세청은 마이클 잭슨의 초상권을 4억 3,426만 달러(약 4,342억 6,000만 원)로 판단하여 마이클 잭슨의 유산을 11억 2500만 달러(2015년 환율 기준 1조 3,690억 원)의 가치로 책정한 뒤 유족들[107]에게 7억 200만 달러(2015년 환율 기준 8,760억 원)의 세금을 납부하라고 명령했다.

그렇지만 후술할 사후 수익 때문에 그의 유산은 천정부지로 늘어나고 있다.

포브스의 2018년 기사에 의하면 그가 2018년까지 벌어들인 금액이 42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한화로 5조원을 상회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그가 사망한 2009년 이후의 금액을 물가변동을 조정한 수치가 21억 달러이며 이 돈만 해도 2조가 넘는다. 후술됐듯이 그가 2016년에 얻은 8.25억 달러는 그 어떤 아티스트도 기록해보지 못한 수치이며 근접한 자조차 없는 기록이다.


10.1.1. 사후 수익[편집]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벌어들이는 금액은 천문학적 수치이다. 즉, 죽은 사람 중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인물이다. 살아있는 사람들과 비교해도 가장 많이 번 사람일 때도 있었다. 미국의 경제지 포브스[108]에서 발표한 그의 사후 수익은 다음과 같다.[109]
발표 시기
달러 = 한화[110]
순위
2위
2010년 10월
2억 7,500만 달러=3,000억
1위[111]
엘비스 프레슬리 6,000만$=660억
2011년 10월
1억 7,000만 달러 = 1,870억
1위
엘비스 프레슬리 5,500만$=550억
2012년 10월
1억 4,500만 달러 = 1,600억
2위
1위 엘리자베스 테일러 2억 1,000만$=2,310억
2013년 10월
1억 6,000만 달러 = 1,760억
1위
엘비스 프레슬리 5,500만$=550억
2014년 10월
1억 4,000만 달러 = 1,540억
1위
엘비스 프레슬리 5,500만$=550억
2015년 10월
1억 1,500만 달러 = 1,265억
1위
엘비스 프레슬리 5,500만$=550억
2016년 10월
8억 2500만 달러 = 9,075억
1위
찰스 슐츠 4,800만$=520억
2017년 10월
7,500만 달러 = 843억
1위
아놀드 팔머 4,000만$=449억
2018년 10월
4억 달러 = 4,516억
1위
엘비스 프레슬리 4,000만$=449억
2019년 10월
6,000만 달러 = 660억
1위
엘비스 프레슬리 3,900만$=390억
2020년 11월
4,800만 달러 = 533억
1위
닥터 수스 3,300만$=367억
2021년 11월
7,500만 달러 = 885억
3위
1위 로알드 달 5억 1,300만$=6,055억
2022년 11월
7,500만달러 = 981억
6위
1위 J.R.R. 톨킨 5억$=6,545억
2023년 11월
1억 1500만 달러 = 1,508억
1위
엘비스 프레슬리 1억 달러 = 1309억
사후 수익 총합 26억 7,800만 달러 = 약 3조 5135억 원
사후에 벌어들인 수익이 2012년을 제외하면 모두 1위이며 2010년에는 2~12위의 수익을 합친 것보다 많은 금액을 벌어들였다. 2위와의 차이도 5,000만 달러 가까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현역 뮤지션들보다도 많은 금액을 벌어들이고 있는데 2010년에는 1억 3,000만 달러를 벌어들인 현역 뮤지션 수익 1위였던 U2보다 두 배에 달하는 금액을 벌어들였고[112], 2011년에는 U2에게는 밀렸지만 2위였던 본 조비의 1억 2,500만 달러를 큰 차이로 따돌렸다. 2012년에는 1억 1,000만 달러였던 닥터 드레를 크게 제쳤으며 2013년에는 1억 2,500만 달러를 벌어들인 팝의 여왕 마돈나를 3,500만 달러 차이로 밀어내기까지 했다. 2014년에는 Apple에게 본인 소유의 회사인 Beats를 매각하고 3억 달러를 벌어들여 총 6억 달러를 기록한 닥터 드레에게 크게 밀렸다. 2015년에는 월드 투어를 진행한 케이티 페리에게 3,500만 달러 차이로 밀렸지만 2위였던 테일러 스위프트를 2,000만 달러 차이로 밀어냈다.

2016년에는 생전과 사후를 불문하고 역대 최고액인 8억 2,500만 달러를 벌어들여 남은 순위들의 금액을 다 합친 것보다 많은 금액을 벌어들여 사후 수입 총합이 2조 원을 넘어서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는 마이클 잭슨이 20대 중반에 약 4750만 달러를 지불하고 인수했던 레이블 회사 ATV 뮤직[113]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분을[114] 소니에 약 7억 5,000만 달러에 팔면서 벌어들인 수입이다. 사실상 사업가로서 벌어들인 수입이다.

2021년에는 2012년 이후 두 번째로 사후 수익 1위 자리를 놓치고 처음으로 3위까지 내려왔다. 공교롭게도 마이클 잭슨을 제치고 2위를 차지한 사람은 생전 라이벌이었던 프린스.

2022년에도 마이클은 1위를 탈환하지 못했고 오히려 6위 까지 밀려났다.

2023년에 1위 자리를 다시 탈환하며 되찾았다.

이러한 엄청난 사후 수익은 생전에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던 걸어다니는 기업과도 같았던 마이클 잭슨의 영향력이 아직까지도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10.2. 어록[편집]


인터뷰를 자주 사양했으나 몇몇 인터뷰와 자서전에서 꽤 진지하고 심오한 철학적 어록을 많이 남겼다. 어록을 살펴보면 열정적이다 못해 순수하며 꽤 감상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춤을 출 때 생각하는 것은 댄서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다. 춤을 출 땐, 춤을 느껴야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아이들을 위한 평화와 사랑이다.

난 무적이다. 날 다치게 할 수도 없고 날 끌어내려도 다시 일어난다[115]

나는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나의 팬들뿐이다.

나는 일생 동안 다른 아티스트를 공격한 적이 없다. 위대한 아티스트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에미넴이 자신을 조롱한 사건에 대해)

남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너무 의심이 많다. 스스로 자기를 의심하면 최선을 다할 수 없다. 스스로 믿지 못한다면 누가 믿어 주겠는가? 작업에 들어가면 나는 내 자신을 100% 믿는다. 나의 혼을 그 작업에 불어넣는다. 그러다가 죽어도 상관없다. 그것이 나다.

나에게 있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어깨에 드리워진 짐을 가벼워지게 돕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와코 재코(Wacko Jacko)란 말이 대체 뭔가. 타블로이드가 만든 말 아닌가? 나도 가슴과 감정이 있는 사람이다. 당신들이 이런 말을 쓸 때 나는 그걸 듣고 느낀다. 좋지 않다. 쓰지 말아 달라. 난 괴짜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세계를 좀 더 멋진 터전으로 꾸미고 싶은 생각이라면 먼저 당신 스스로를 잘 보고 자신부터 개선시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친 당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당신부터 먼저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116]

인간은 접하고 싶어 한다. 또 그 진실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싶어 한다. 설령 절망이든 기쁨이든 자기가 느끼거나 경험한 것을 살리는 일이 그 인생에 의미를 가져다주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계몽의 순간을 위해 나는 계속 생존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무대 위에 오르면 육안으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굉장한 기분이 들지만 그만큼 엄청난 고통도 함께 따라온다. 정말 엄청난 고통이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진실을 알 것이다. 내 인생의 첫째는 아이들이고 내가 결코 아이들을 해치지 않았다는 것을.

사람들은 내가 어딜 가든 나를 45살의 꼬마라고 불렀다.

왜 당신의 침대를 함께 쓰지 못하는가? 누군가와 침대를 나누는 것은 사랑의 표현 중 하나다. 사랑하는 이에게 '원하면 내 침대를 같이 쓰자. 여기서 자. 난 바닥에서 잘 테니까' 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항상 내 친구들에게 내 침대를 내주었다.

난 매주 리사[117]와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같은 행성에서 왔으니까. 우주바다 속 변덕스러운 예외라고 부르는 곳. 이름을 뭐라고 못 짓겠네. 태양계를 넘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불법으로 유통시키고 다운로드를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아티스트의 책임이 크다. 나는 지금껏 한평생 음악을 하면서 성인 솔로로서 낸 앨범이 고작 6개밖에 안 된다. 왜 그런 것 같은가? 완벽한 앨범을 만들기 위해 한 앨범을 만들 때마다 5~6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한두 곡의 히트곡을 빼고는 나머지 공간을 시시껄렁한 곡들로 채워 넣는다. 하지만 나는 항상 한 앨범의 모든 곡들이 최고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앨범을 만들란 말이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적어도 사람들이 차를 몰고 레코드점에 가서 앨범을 골라들고 지갑을 열어 계산을 하는 수고를 생각하라. 그리고 그 수고를 감수할 가치가 있는 앨범을 만들어라.
(그럼 당신의 음악이 불법으로 유포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라도 나의 음악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이다.

- 2003년 저널리스트와의 인터뷰 中[118]

나의 집에서는 상이나 트로피를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집에 그런 것들을 두지 않는다.[119] 그런 것들은 나로 하여금 무언가 대단한 걸 했다고 느끼게 만든다. '이것들 좀 봐. 내가 이 정도야.'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난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난 단 한 번도 '이 정도쯤'에서 만족해 본 적이 없다.

- Interview with Geraldo Rivera, 2005

세상 전부가 당신에게 반대하고, 당신을 비웃고, 당신이 하지 못할 것이라고 무시할지라도, 난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 자신만을 믿어라. 누가 뭐라고 하든.
I don't care a whole world is against you, tease you and tell you're not gonna do it, just believe in yourself, no matter what.

곡을 쓰는 방법을 찾지 마라. 당신이 곡을 쓰지 마라. 곡이 자기 스스로를 쓰게 하라.
Just let a song write itself.

이 지구 위 어딘가 모든 구석, 모든 골목에 있는 모든 나의 팬들, 모든 인종, 모든 국가, 모든 언어의 나의 팬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 마음 속 깊이 정말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위대한 사람들을 연구하라. 그리고 그들보다 더 위대해져라.
Study the greats, and become greater.

위대한 반열에 오르고 싶으면, 위대했던 사람들을 공부해라.
If you want to be all-time great, you should study all-time greats.

- 코비 브라이언트에게 했던 조언

"이것만은 여러분께 약속해요. 나의 진짜 '최고'는 아직 보여주지 않았다고."
I promise you, the best is yet to come.

- 2002년 팬들 앞에서 연설을 마치면서

나는 그 순간 알았어요. 저게 바로 내 남은 평생 하고 싶은 거란 걸.

- 6살때 제임스 브라운을 처음 보고 한 말

"Practice more."

- 지금 아는 모든 걸 가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뭘 하고 싶냐는 친구의 질문에 답한 말

나는 내 자신을 단지 '자연의 악기(instrument of nature)' 라고 생각해요.

만약 한국에 통일이 찾아오면, 다시 이곳에 와서 여러분과 함께 그날을 축하하고 싶다.

- 1999, Michael & Friends 내한공연 中[120]

(오프라 윈프리와 인터뷰 중, 자기를 둘러싼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에) 왜 그런 걸 궁금해하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난 예술을 사랑하고 특히 미켈란젤로를 존경하죠. 만약 내가 그와 잠시라도 대화할 수 있다면, 난 그에게 무엇이 당신을 자극하고, 영감을 주고, 무엇이 당신을 그런 위대한 예술가가 되도록 이끌어줬느냐고, 너무나 물어보고 싶어요. 그가 어젯밤 누구와 놀러 나갔는지, 왜 햇빛을 피해 머물러 있는지 그런 것들이 아니라요.

내가 당장 내일 죽더라도, 내가 너에게 이야기 해 준 것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If I die tomorrow, never forget what I told you.

- 딸 패리스 잭슨에게 했던 말.

전 언제나 이렇게 믿어왔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그가 얼마나 큰 인기와 명예를 가지게 되었는지가 아니라, 그의 명예와 돈으로 무엇을 했느냐 에 결정된다는 것을요.

- 1999, Speech at Indian Awards

여러분을 사랑해요. 정말요. 제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입니다. 이것만은 알아주세요.
I love you. I really do. From the bottom of my heart. You have to know that.

- 2009년 This is it 공연 발표 당시 팬들에게. 마이클 잭슨의 마지막 공식석상에서 팬들에게 남긴 마지막 메세지다.

어린 아이는 막지 말 것.

- 경호원들에게 당부한 경호 기준

(너무 큰 인기 때문에 겪게 된 불편과 불행에 대해 유명해진 게 후회될 때도 있는지 질문받자) 아주 가끔은 그럴 때도 있지만, 정말 감사한 일이죠. 그런 걸 불평하면 안 돼요. 그것도 다 일의 일부인 걸요. 팬들이 주는 사랑은 결코 당연한 게 아니에요.

- 1987, interview with Ebony/Jet

모든 예술가는 불멸을 원하잖아요. 전 위대한 예술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믿어요.

그게 진짜 내 가슴이 의미하는 게 아니라면, 전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아요.

- 10살 때 인터뷰, 곡 HIStory 도입부에 나온다.

전 그냥 사람들이 웃는 걸 보면 행복해요.

내가 떠나고 나면, 이 문제 덩어리 세상도 날 더는 괴롭히지 못하겠지. 나는 날아가겠어.
When I go, this problem world won't bother me. I'll fly away.

- 사후 발표곡 'Xscape' 가사 中

실수가 있었어요. 2절은 생략이에요. 여러분들에게 이건 미안합니다. 1절은... 음, 브릿지에 이어서 갈게요. 아시겠죠? 다시 한 번 해볼게요. 이래서 저희가 리허설을 해야 해요.
There was a mistake. There is no second verse. Sorry about that, you guys. First verse, wuh, then right to the bridge, okay? Let's do it one more time. That's why we have rehearsal.

-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 'Black or White' 리허설 중 대사

상대방의 모카신을 신고 두달동안 걸어보기 전에는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해선 안된다는 인디언의 옛속담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잘 모르는데도 여러가지 기사를 함부로 씁니다 그것은 내게 상처가 되었고 너무도 억울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런 일은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적 없으며 그들이 하는말은 완전히 거짓말이에요 마음이 너무 아파요

나는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 이 세상의 모든 사랑스런 아이들에 대해서도 걱정이 됩니다 나는 그들을 위해 살아가고 있으니까..

동물이 상대를 해치는 것은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서이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와 마찬가지 일것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우리의 피일 뿐이지, 고통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며 모든 일에 진실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게 부여된 힘을 위해, 세상을 위해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참고 살아가야겠지요

하지만 부디 자비를 베푸시기를...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피를 흘려왔습니다 당신이 날 판단하기 전에 나를 사랑하려노력해주세요

- 언론에게 보낸 공개서한


11. 디스코그래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음반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디스코그래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 수상 기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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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등재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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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등재
루이 암스트롱 <The Complete Hot Five and Hot Seven Recordings> (1920~1928)
프랭크 시나트라, <Songs for Young Lovers> (1954)
엘비스 프레슬리, Sun Records sessions (1954-1955)
마일스 데이비스, <Kind of Blue> (1959)
밥 딜런, <The Freewheelin' Bob Dylan> (1963)
2003년 등재
로버트 존슨, <The Complete Recordings> (1936-1937)
베니 굿맨, <The Famous 1938 Carnegie Hall Jazz Concert> (1938년 1월 16일)
글렌 굴드, <Goldberg Variations> (1955)
엘라 피츠제럴드,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
델로니어스 몽크, <Brilliant Corners> (1956)
찰스 밍거스, <Mingus Ah Um> (1959)
주디 갈란드, <Judy at Carnegie Hall> (1961)
비틀즈,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
조니 캐시, <At Folsom Prison> (1968)
캐롤 킹, <Tapestry> (1971)
마빈 게이, <What's Going On> (1971)
브루스 스프링스틴, <Born to Run> (1975)
2004년 등재
존 콜트레인, <Giant Steps> (1959)
제임스 브라운, <Live At The Apollo> (1963)
비치 보이스, <Pet Sounds> (1966)
올맨 브라더스 밴드, <At Fillmore East> (1971)
존 윌리엄스, <Star Wars> (1977)
퍼블릭 에너미, <Fear of a Black Planet> (1990)
너바나, <Nevermind> (1991)
2005년 등재
데이브 브루벡, <Time Out> (1959)
비비 킹, <Live at the Regal> (1965)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Are You Experienced> (1967)
프랭크 자파 앤 더 마더스 오브 인벤션, <We’re Only In It For the Money> (1968)
웬디 카를로스 <Switched On Bach> (1968)
스티비 원더, <Songs in the Key of Life> (1976)
소닉 유스, <Daydream Nation> (1988)
2006년 등재
피트 시거, <We Shall Overcome> (1963)
벨벳 언더그라운드니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1967)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 <Burnin'> (1973)
사라 본, <Live in Japan> (1973)
폴 사이먼, <Graceland> (1986)
2007년 등재
조니 미첼, <For The Roses> (1972)
허비 행콕, <Head Hunters> (1973)
마이클 잭슨, <Thriller> (1982)
2008년 등재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트 앨범 (1957)
더 후, <The Who Sings My Generation> (1966)
2009년 등재
뮤지컬 <집시>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트 앨범 (1959)
빌 에반스 트리오, <The Complete Village Vanguard Recordings> (1961년 6월 25일)
더 밴드, <The Band> (1969)
패티 스미스, <Horses> (1975)
윌리 넬슨, <Red Headed Stranger> (1975)

2010년대 등재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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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등재
캡틴 비프하트 앤 히스 매직 밴드, <Trout Mask Replica> (1969)
스틸리 댄, <Aja> (1977)
데 라 소울, <3 Feet High and Rising> (1989)
2011년 등재
빈스 과랄디 트리오, 애니메이션 <A Charlie Brown Christmas> 사운드트랙 (1965)
러브, <Forever Changes> (1969)
프린스, <Purple Rain> (1984)
2012년 등재
사이먼 앤 가펑클, <Sounds of Silence> (1966)
오넷 콜먼, <The Shape of Jazz to Come> (1959)
핑크 플로이드, <The Dark Side of the Moon> (1973)
라몬즈, <Ramones> (1976)
비 지스 외, <Saturday Night Fever Soundtrack> (1977)
2013년 등재
아트 블래키, <A Night at Birdland> (1954)
린다 론스태드, <Heart Like a Wheel> (1974)
뮤지컬 <스위니 토드>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트 앨범 (1979)
U2, <The Joshua Tree> (1987)
2014년 등재
조안 바에즈, <Joan Baez> (1960)
도어즈, <The Doors> (1967)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Stand!> (1969)
라디오헤드, <OK Computer> (1997)
로린 힐,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1998)
2015년 등재
조지 칼린, <Class Clown> (1972)
존 콜트레인, <A Love Supreme> (1964)
산타나, <Abraxas> (1970)
메탈리카, <Master of Puppets> (1986)
2016년 등재
소니 롤린스, <Saxophone Colossus> (1956)
마티 로빈스, <Gunfighter Ballads and Trail Songs> (1959)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People> (1964)
데이비드 보위,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1972)
이글스, <Their Greatest Hits (1971–1975)> (1976)
토킹 헤즈, <Remain in Light> (1980)
N.W.A, <Straight Outta Compton> (1988)
2017년 등재
해리 벨라폰테, <Calypso> (1956)
웨스 몽고메리, <The Incredible Jazz Guitar of Wes Montgomery> (1960)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사운드트랙 (1965)
스티브 라이히, 리처드 맥스필드, 폴린 올리베로스, <New Sounds in Electronic Music> (1967)
플리트우드 맥, <Rumours> (1977)
Run-D.M.C., <Raising Hell> (1986)
2018년 등재
덱스터 고든, <GO> (1962)
뮤지컬 <헤어>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트 앨범 (1968)
커티스 메이필드, <Superfly> (1972)
신디 로퍼, <She's So Unusual> (1983)
<Schoolhouse Rock!: The Box Set> (1996)
JAY-Z, <The Blueprint> (2001)
2019년 등재
더스티 스프링필드, <Dusty in Memphis> (1969)
칩 트릭, <Cheap Trick at Budokan> (1978)
티나 터너, <Private Dancer> (1984)
셀레나, <Ven Conmigo> (1962)
닥터 드레, <The Chronic> (1992)

2020년대 등재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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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잭슨은 1980년대, 1990년대를 중심으로 대중음악 대부분의 시상식을 독점했는데, 그는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여러 앨범상을 비롯하여 10년의 아티스트상, 세기의 아티스트상들도 이에 포함된다. 대표적인 수상 기록으로 그래미 살아있는 전설상과 평생공로상(1993년/2010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특별공로상과 세기의 아티스트상(1989년/2002년), MTV 뱅가드상(평생공로상)과 천년의 아티스트상 그리고 레전드상(1990년/2002년/2006년) 등이 있다. 참고로 MTV는 1991년부터 평생공로상의 이름을 "마이클 잭슨 뱅가드 어워드"로 하여 현재까지도 시상하고 있다.

이외에도 1990년에는 백악관에 초청되어 대통령 표창 데케이드 아티스트상을 받았고 1997년에는 잭슨 파이브의 맴버 자격, 2001년에는 솔로 자격으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두 번 헌액됐으며 200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 2004년 영국음악 명예의 전당, 2010년 무용가 명예의 전당(전문댄서가 아닌 팝 뮤지션으로서는 최초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기록), 2014년 알앤비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2006년에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엔터테이너로 기네스 북에 등재됐으며 스릴러 앨범과 뮤직 비디오는 2008년 역사적/문화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국 의회 도서관에 영구 보존작으로 선정됐는데 특히 스릴러 뮤직 비디오는 뮤직 비디오 역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기록이다.

자세한 수상 기록은 여기를 클릭하면 볼 수 있으며 대표적인 메이저 시상식인 그래미와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수상 기록은 다음과 같다.


12.1. 그래미 어워드[편집]




파일:Grammy.svg
'''[[그래미 어워드#s-5.3.2|{{{#b69858 그래미 어워드 평생 공로상 수상자
Grammy Lifetime Achievement A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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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빙 크로스비
1965년
프랭크 시나트라
1966년
듀크 엘링턴
1967년
엘라 피츠제럴드
1968년
어빙 벌린
1971년
엘비스 프레슬리
1972년
루이 암스트롱, 마할리아 잭슨
1984년
척 베리, 찰리 파커
1985년
레너드 번스타인
1986년
베니 굿맨, 롤링 스톤스, 안드레스 세고비아
1987년
로이 에이커프, 베니 카터, 엔리코 카루소, 레이 찰스, 패츠 도미노, 우디 허먼, 빌리 홀리데이, 비비 킹, 아이작 스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행크 윌리엄스
1989년
프레드 아스테어, 파블로 카잘스, 디지 길레스피, 야샤 하이페츠, 리나 혼, 레온타인 프라이스, 베시 스미스, 아트 테이텀, 사라 본
1990년
냇 킹 콜, 마일스 데이비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폴 매카트니
1991년
매리언 앤더슨, 밥 딜런, 존 레논, 줄리 스턴, 키티 웰스
1992년
제임스 브라운, 존 콜트레인, 지미 헨드릭스, 머디 워터스
1993년
쳇 앳킨스, 리틀 리처드, 델로니어스 몽크, 빌 먼로, 피트 시거, 패츠 월러
1994년
빌 에반스, 아레사 프랭클린,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1995년
팻시 클라인, 페기 리, 헨리 맨시니, 커티스 메이필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1996년
데이브 브루벡, 마빈 게이, 게오르그 솔티, 스티비 원더
1997년
바비 블랜드, 에벌리 브라더스, 주디 갈란드, 스테판 그라펠리, 버디 홀리, 찰스 밍거스, 오스카 피터슨, 프랭크 자파
1998년
보 디들리, 밀스 브라더스, 로이 오비슨, 폴 로브슨
1999년
조니 캐쉬, 샘 쿡, 오티스 레딩, 스모키 로빈슨, 멜빈 토메
2000년
해리 벨라폰테, 우디 거스리, 존 리 후커, 미치 밀러, 윌리 넬슨
2001년
비치 보이스, 토니 베넷,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밥 말리, 더 후
2002년
카운트 베이시, 로즈메리 클루니, 페리 코모, 알 그린, 조니 미첼
2003년
에타 제임스, 조니 마티스, 글렌 밀러, 티토 푸엔테, 사이먼 앤 가펑클
2004년
밴 클라이번, 펑크 브라더스, 엘라 젠킨스, 소니 롤린스, 아티 쇼, 독 왓슨
2005년
에디 아놀드, 아트 블래키, 카터 패밀리, 모턴 굴드, 재니스 조플린, 레드 제플린, 제리 리 루이스, 젤리 롤 모턴, 파인톱 퍼킨스, 스태플 싱어즈
2006년
데이비드 보위, 크림, 멀 해거드, 로버트 존슨, 제시 노먼, 리처드 프라이어, 더 위버스
2007년
조안 바에즈, 부커 티 앤 엠지 에스, 마리아 칼라스, 오넷 콜맨, 도어즈, 그레이트풀 데드, 밥 윌스
2008년
버트 배커랙, 더 밴드, 캡 캘러웨이, 도리스 데이, 이작 펄만, 맥스 로치, 얼 스크럭스
2009년
진 오트리, 더 블라인드 보이즈 오브 알라바마, 포 탑스, 행크 존스, 브렌다 리, 딘 마틴, 톰 팩스톤
2010년
레너드 코헨, 바비 다린, 데이비드 "허니보이" 에드워즈, 마이클 잭슨, 로레타 린, 앙드레 프레빈, 클락 테리
2011년
줄리 앤드류스, 로이 헤인즈, 줄리아드 현악 콰르텟, 킹스턴 트리오, 돌리 파튼, 라몬즈, 조지 비벌리 시어
2012년
올맨 브라더스 밴드, 글렌 캠벨,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조지 존스, 더 멤피스 혼즈, 다이애나 로스, 길 스콧 헤론
2013년
글렌 굴드, 찰리 헤이든, 라이트닝 홉킨스, 캐롤 킹, 패티 페이지, 템테이션스
2014년
비틀즈, 클리프턴 체니어, 아이즐리 브라더스, 크라프트베르크,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아르만도 만사네로, 마우드 파웰
2015년
비 지스, 피에르 불레즈, 버디 가이, 조지 해리슨, 플라코 지메네즈, 루빈 브라더스, 웨인 쇼터
2016년
루스 브라운, 셀리아 크루즈, 어스 윈드 앤 파이어, 허비 행콕, 제퍼슨 에어플레인, 린다 론스태드, Run-D.M.C.
2017년
셜리 시저, 아마드 자말, 찰리 프라이드, 지미 로저스, 니나 시몬, 슬라이 스톤, 벨벳 언더그라운드
2018년
할 블레인, 닐 다이아몬드, 에밀루 해리스, 루이스 조던, 더 미터스, , 티나 터너
2019년
블랙 사바스, 조지 클린턴 / 팔리아멘트-펑카델릭, 빌리 엑스타인, 도니 해서웨이,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샘 & 데이브, 디안 워윅
2020년
시카고, 로버타 플랙, 아이작 헤이즈, 이기 팝, 존 프라인, 퍼블릭 에너미, 시스터 로제타 사프
2021년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 라이오넬 햄프턴, 마릴린 혼, 솔트 앤 페파, 셀레나, 토킹 헤즈
2022년
보니 레잇
2023년
바비 맥퍼린, 너바나, 마 레이니, 슬릭 릭, 나일 로저스, 슈프림즈, 하트
같이 보기: 공로상 수상자 · 레전드상 수상자





역대 그래미 시상식
파일:external/www.brooklynvegan.com/grammy.jpg
올해의 레코드상
제25회
(1983년)


제26회
(1984년)


제27회
(1985년)

"Rosanna" - 토토

"Beat It" - 마이클 잭슨

"What's Love Got to Do with It" - 티나 터너
올해의 노래상
제27회
(1985년)


제28회
(1986년)


제29회
(1987년)

"What's Love Got to Do with It" - 티나 터너

"We Are the World" - 마이클 잭슨 (with Lionel Richie)

"That's What Friends Are For" - 디온 워윅


그래미 어워드
연도
수상부문
선정대상
1980
최우수 남성 R&B 보컬 퍼포먼스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1984
올해의 앨범
Thriller
1984
최우수 남성 팝 보컬 퍼포먼스
Thriller
1984
올해의 레코드
Beat It
1984
최우수 남성 락 보컬 퍼포먼스
Beat It
1984
최우수 남성 R&B 보컬 퍼포먼스
Billie Jean
1984
최우수 R&B 음악
Billie Jean
1984
최우수 어린이 앨범
E.T. the Extra Terrestrial (with Quincy Jones)
1984
올해의 프로듀서 비 클래식
Thriller
1985
최우수 비디오 앨범
Thriller
1986
올해의 노래
We Are the World
1990
최우수 단편 뮤직비디오
Leave Me Alone
1993
그래미 레전드 상
1996
최우수 단편 뮤직 비디오
Scream
2010
그래미 평생 공로상
그래미 명예의 전당
1999
I'll Be There
1999
I Want You Back
2008
Off the Wall
2008
Thriller
2016
ABC


12.2. American Music Awards[121][편집]


American Music Awards
연도
수상부문
선정대상
1980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앨범
Off the Wall
1980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싱글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1981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남성 아티스트
1981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앨범
Off the Wall
1984
메리트상
1984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남성 아티스트
1984
가장 인기있는 락/팝 남성 아티스트
1984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앨범
Thriller
1984
가장 인기있는 락/팝 앨범
Thriller
1984
가장 인기있는 락/팝 싱글
Billie Jean
1984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비디오
Beat It
1984
가장 인기있는 락/팝 비디오
Beat It
1986
공로상
1986
올해의 노래
We Are the World
1988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싱글
Bad
1989
특별공로상
1993
국제아티스트상
1993
가장 인기있는 락/팝 앨범
Dangerous
1993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싱글
Remember The Time
1996
가장 인기있는 락/팝 싱글
This Time Around
2002
세기의 아티스트상
2009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남성 아티스트
2009
가장 인기있는 락/팝 남성 아티스트
2009
가장 인기있는 락/팝 앨범
Number Ones
2009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앨범
Number Ones


12.3. 헌액[편집]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로큰롤 명예의 전당 로고.png
이름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01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Hollywood Walk of Fame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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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분야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음악 심볼.jpg 음악
입성날짜
1984년 11월 20일
위치
6927 Hollywood Blvd.





12.4. 기타 수상[편집]


빌보드 뮤직 어워드(Bilboard Music Awards)

  • 10주년 기념상, 앨범상, 싱글상(1992년)
  • 빌보드 HOT 100상(1995년)
  • Thriller 20주년 기념 공로상(2002년)

브릿 어워드(Brit Awards)
'''[[틀:브릿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 수상작(1977년~1999년)|{{{#000 Brit Award for Album of the Year
(1977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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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파일:SgtPepper.jpg
-
-
파일:05103710_zi (2).jpg
파일:R-1548070-1420250039-3024.jpeg.jpg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Kings of the Wild Frontier
Memories
Thriller
Diamond Life
비틀즈
애덤 앤 디 앤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마이클 잭슨
샤데이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파일:no jacket required.jpg
파일:brothersinarms.jpg
파일:external/35e8332d17096e158408c1b9d4e6d938abc67cee6307b76376ebd2d6d2cc73a3.jpg
-
-
No Jacket Required
Brothers in Arms
...Nothing Like the Sun
The First of a Million Kisses
The Raw and the Cooked
필 콜린스
다이어 스트레이츠
스팅
페어그라운드 어트랙션
파인 영 카니발스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파일:ㄴㄴㄴ조지_마이클_-_Listen_Without_Prejudice_Vol._1.jpg
-
-
-
파일:Parklife.jpg
Listen Without Prejudice Vol. 1
Seal
Diva
Connected
Parklife
조지 마이클

애니 레녹스
스테레오 엠씨스
블러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파일:(What's The Story) Morning Glory?.webp
파일:everything must go-1996.jpg
파일:urban hymns-1997.jpg
파일:external/image.allmusic.com/d50751p08hv.jpg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Everything Must Go
Urban Hymns
This Is My Truth Tell Me Yours
오아시스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
버브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
''''

''''

''''
같이보기 : 영국 - 앨범, 싱글, 남성, 여성, 그룹




  • 아티스트상, 올해의 앨범(Thriller)(1984년)
  • 솔로 아티스트상(1988년)
  • 남자 솔로 아티스트상, 올해의 뮤직비디오상(1989년)
  • 시대의 아티스트상(1996년)

독일 밤비 어워드(Bambi Awards)

  • 밀레니엄 아티스트상(2002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MTV Video Music Awards, VMA)

  • 뮤직비디오 퍼포먼스상, 뮤직비디오 안무상, 시청자 선정상(1984년)
  • 평생공로상(1988년)
  • 뮤직비디오 베스트 댄스상(1995년)

MTV비디오 뮤직 어워드 재팬(MTV Video Music Awards Japan)

  • 공로상(2006년)

NAACP 이미지 어워드(NAACP Image Awards)

  • 최고의 배우상(1980년)
  • 시대의 엔터테인먼트 상(1983년)
  • 최고의 남자가수상, 베스트 앨범상, 레오나드 카터상(1988년)
  • 올해의 엔터테이너상, 최고의 뮤직비디오상(1993년)
  • 최고의 뮤직비디오상, 최고의 시리즈상, 최고의 퍼포먼스상(2002년)

이 외의 상은 위키백과 항목 참조.

13. 필모그래피[편집]


  • 더 위즈(1978) - 허수아비역

  •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비하인드(1983) - 본인 역

  • 캡틴 EO(1986) - 캡틴 EO 역

  • 문워커(1988) - 본인 역

  • 마이클 잭슨의 고스트(1996) - 지휘자 / 시장 / 해골 역


  • 미스 캐스트 어웨이와 섬에 사는 소녀(2004) - 에이전트 MJ 역

  •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2009) - 본인 역[122]

  • 마이클 잭슨: 아이콘의 삶(2011) - 본인 역[123]

  • Bad 25(2012) - 본인 역[124]

  • 마이클 잭슨: 마지막 촬영(2014) - 본인 역[125]

  • 마이클 잭슨의 모타운부터 Off the wall까지(2016) - 본인 역[126]
  • Thriller 40(2023) - 본인 역[127]


14. 대중매체[편집]



  • 미국의 패러디 제왕인 위어드 알 얀코빅은 80년대에 'Beat it'을 패러디한 'Eat it', 'Bad'를 패러디한 'Fat'을 음반으로 내놓기도 했다. 뮤직비디오도 상당히 재미있는데 잭슨도 기발하다며 좋아했다고 한다.[128]

  • 영화 문워커, 캡틴 E.O에 주연을 맡았다.


  •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의 시즌3 1화인 <Stark Raving Dad>에서 목소리 출연을 했다.[129] 다만 어른의 사정으로 크레딧에 본인 이름은 올리지 못했고 John Jay Smith라는 가명으로 나왔다. 또한 리사를 위해 만든 노래 및 흥얼거리는 파트는 본인이 아닌 킵 레넌이라는 대역을 썼다. 다른 에피소드에서 좋아하는 캐릭터인 바트를 위해 노래 'Do the bartman'도 만들어서 불러줬는데 이 역시 소니와의 계약 문제로 대역을 써서 불렀다. 본인이 직접 부른 Happy birthday Lisa. EBS에서 심슨을 더빙해서 방영했을 때 시즌 3부터 시작했으므로 EBS 더빙 판 중에선 최초의 에피소드인 셈인데 더빙 판에서 마이클 잭슨 역할을 담당한 성우는 이인성(MBC), 엄상현(EBS). 일단 해당 에피소드의 EBS판 제목은 '쓸쓸한 리사의 생일'이다.[130]

  • 사우스 파크에서도 등장한다. 등장할 때마다 하는 말버릇은 "That's ignorant!"(그건 무지한 거예요!)[131]"Allegedly!"(의혹일 뿐이에요!).

  • "The Jeffersons" 에피소드에서 첫 등장. 정확히 이름은 안 나오지만 바꾼 이름이 마이클 재퍼슨이고 흑인인데 백인으로 보이며 하는 기행들을 보면 사실상 확정이다. 사우스 파크 위키에서도 마이클 잭슨이라고 나온다. 나와서 피부가 녹고 코가 떨어지는 등 마이클 잭슨을 까는 거라는 평이 있지만.따지고 보면 까인 것은 어린 시절에 너무 집착해서 아들인 블랭킷[132]에게 아버지가 아닌 친구가 되었다는 정도이고, 마이클 잭슨의 성추행 의혹을 경찰들이 그저 부자 흑인이라는 이유로 조작한 것으로 나온다. 이 에피소드가 방영된 날짜가 2004년이란 걸 생각하면 까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133] 그리고 그가 입는 복장들과 부르는 노래들을 신경 쓴 디테일을 보면 제작진이 어느 정도 마이클의 팬이었던 것 같다.[134]

  • 그가 죽은 후 2009년에 방영된 "Dead Celebrities"에서도 등장한다. 아이크 브로플로브스키를 빙의하고, 자신은 죽지 않았다면서 부정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를 어린 소녀 가창 대회에 참여시키고 나서야 한이 풀려서 영혼이 아이크로부터 빠져나온다... 이때 그가 부르는 노래는 HIStory 앨범에 등장한 <You Are Not Alone>의 가사를 바꾼 것. 여담으로 이 에피소드에서 마이크에게 자신은 죽었다면서 잭슨의 무덤을 파서 증명하려고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삭제되었다. #[135]

  • 2014년 에피소드 "#Rehash"와 "HappyHolograms"에서 등장한다. 정확히는 Xscape에 나온 의 퍼포먼스에서 등장한 마이클의 홀로그램이 탈출하는 모습으로 등장. 투팍 샤커의 홀로그램이 등장해 그를 잡아 온다.[136] 생전 마이클과는 성격차이가 없는 것 같다.

  • 시즌1 7화 "Pinkeye"에선 마을 전체가 좀비로 가득차 개판으로 변하자 셰프스탠, 카일, 카트먼이 해결책을 찾으러 처음 증상이 나타난 장소로 향해 혹시 있을 지 모를 증거물들을 뒤지다 좀비들이 난입했고, 난데없이 감염당한 셰프가 Thriller 안무를 추는 장면이 나온다.

  • 사우스 파크: 프랙처드 벗 홀의 2번째 DLC팩 From Dusk till Casa Bonita에서도 보스로 등장한다. 여기서 모습은 2014년 에피소드랑 같은 복장이지만 홀로그램이 아니다. 단 이름은 코리 헤임으로 나오는데 코리가 아동 성폭행을 당한 사례를 생각하면 사실상 잭슨을 성폭행범으로 희회화 거에 가깝다. 결국 제작진이 어느 정도 마이클의 팬인것 같을 확률은 없는 듯 싶다.

  • 세가 메가 드라이브용 게임인 마이클 잭슨의 문워커를 프로듀싱했고, 게임 내에 주인공 캐릭터로 출연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 또한 세가의 게임 스페이스 채널5와 그 후속작 스페이스 채널5 파트2에는 잭슨을 모델로 한 캐릭터 '스페이스 마이클' 이 나온다. 이 캐릭터의 성우는 마이클 잭슨 본인. 프로듀서가 개발 중인 게임을 보여주자 본인이 먼저 참여할 의욕을 보였다고 한다.[137]

  • 대전게임 엔진인 M.U.G.E.N에도 동인 캐릭터가 존재한다. 베이스는 상술한 마이클 잭슨의 문워커의 도트로, 원작의 기술들을 격투 게임 방식으로 잘 이식한 편이다.

  • 게임 소닉 더 헤지혹 3의 OST에 마이클 잭슨이 참여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사후에 프로듀서 브래드 벅서가 사실을 확정지었다. 엔딩 크레딧과 그 안에 있는 일부 효과음 등이 잭슨이 참여한 부분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할 것.

  • 격투게임 투신전 3의 중간보스 중 하나인 텐 카운트는 기술들은 라이벌 캐릭터인 카인 아모우와 공유하지만, 생김새나 뉴트럴 포즈등 외관은 Smooth Criminal 버전 마이클 잭슨의 판박이다.

  • 게임 겟앰프드의 액세서리중 댄싱 햇이 출시됐다. 관계자에 말에 따르면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실제로 별세 1주기 되기 직전인 5월 3일에 출시했다.




  • 게임 던전 앤 파이터의 던전 플레이 컨텐츠 중 하나인 지옥파티 모드 중에서 천계지역에서 지옥파티 입장시 등장하는 APC 중에 MJ라는 이름의 APC가 등장했었다. 남거너 모션을 이용한 춤사위를 통해 부하(백댄서?)APC들을 지휘하고 원령귀들을 소환하는데다 직접공격으로는 데미지를 줄 수 없는등 매우 강력한 APC였지만 현재는 지옥파티 개편으로 인해 더 이상 볼 수 없다.


  • 게임 식물 vs 좀비에도 마이클 잭슨을 패러디한 댄서 좀비가 있다. 그러나, GOTY 버전에는 고인 드립 관련 문제로 댄서좀비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 달숙이에서도 유명 인사 카메오 중 한명으로 나왔다. 어째서인지 마돈나와 부부 관계라 작중에서는 통칭 마(馬)씨 부부라 불린다. 이 만화가 그렇듯 멀쩡한 캐릭터라고 보기는 다소 힘들다. 그래도 유명인사 계열 출연진 중에 어느 정도의 비중은 있었다.

  • 만화 노노보이에서 마이클 잭슨은 실명으로 등장하는 유명 팝스타 중 가장 비중이 높은 인물로,[138]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주인공 나동태와 HERO가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은인인 동시에 이들이 꼭 넘어야 할 크나큰 벽으로 묘사된다. 자신의 콘서트장 옆에서 무단으로 공연을 벌인 나동태 일행을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의 재능에 흥미를 갖고 이들이 정식으로 데뷔를 하는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면서, 한편으론 절대음감을 가진 팝의 제왕답게 나동태에게 세계의 벽의 높이를 실감하게 해주는 한편, HERO가 자신을 뛰어넘어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자 박수와 함께 앵콜을 외치는가 하면, 나동태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연 콘서트에도 열 일을 제쳐두고 한국에 내한해서 나동태를 격려하는 등, 여러모로 대인배스러운 인물로 그려졌다.

  • 영화 《무서운 영화》에 패러디한 인물이 등장했다. 다만 한창 성추행 소송 문제로 이미지가 안 좋았던 때라 풍자의 대상으로 나왔다. 그것도 3편, 4편 두 번. 4편에서는 외계인의 레이저 빔에 한 번 맞더니 Bad 시절 모습으로 돌아가고 또 맞더니 Thriller 시절 모습으로 돌아가더니 다시 한 번 맞으니까 성형/백반증 없는 모습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 영화 《러시 아워》의 주연 배우인 크리스 터커는 실제로 마이클 잭슨의 열렬한 팬인데 2편에서는 클럽에서 엉성하게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를 부르는 사람을 보고 분노하여 무대에 난입해서 마이크를 뺏고 노래를 부른다. 그때 대사가 '저 명곡을 망친단 말이야!' 이 사람은 영화에서 흑인을 논할 때 잭슨 드립을 자주 친다.

  • 2001년 삼성전자 노트북 센스의 광고에 마이클 잭슨을 패러디한 배우가 김정화와 출연했다. 배우의 이름은 애드워드 모스로 무서운 영화 3 등 마이클 잭슨의 패러디로 여러 매체에 출연했다.[139]#

  • 2009년경에 만들어진 스타크래프트 1 유즈맵 중에 '개인 파이널 디펜스'(일명 개파디)라는 플레이어 6명이 각자 자기의 진영에서 기존의 디펜스 형식으로 게임을 하는 유즈맵이 있는데 이 유즈맵의 많은 요소들이 마이클 잭슨의 작품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배경음악과 효과음도 마이클 잭슨의 주요 히트곡들이 대부분이고 게임 도중에 나오는 적 유닛들의 이름이 'Smooth Criminal', 'Billie Jean' 등 마이클 잭슨의 대표곡들로 명명된 경우가 많다.

  • 2010년 11월 23일에 저스트 댄스의 시스템을 활용하여 마이클 잭슨의 춤을 즐길 수 있는 Michael Jackson: The Experence 가 출시되었다. 국가별로 내용의 차이가 있는 다른 저스트 댄스와 달리 전세계 버전이 동일한 내용으로 수록되었다. 기종별로는 PS3, Wii가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며, XBOX360은 키넥트의 특성상 게임성이 약간 다르다. NDS, PSP, 3DS, PS Vita, iOS 등으로도 발매되었는데, 이쪽은 동작을 감지하는 센서가 없는만큼 단순한 리듬액션게임이며 내용도 전혀 다르다.


  •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의 남주인공 타치바나 타키가 그의 춤을 춘다는 묘사가 있다. 심지어 여주인공 미야미즈 미츠하와 몸이 바뀔 때에도 끼를 주체하지 못해 춤을 추기도... 오죽하면 미츠하가 "마이클 금지!"라며 만류하기도.[140]

  • 카카오톡의 유료 이모티콘 중에 '댄스 스페셜'에서 Billie Jean을 오마주하는 이모티콘이 들어 있다.


  • 게임 용과 같이 제로에서는 키류 카즈마 파트 서브 스토리 '카무로쵸 좀비워커'를 통해 등장한다. 마이클이나 잭슨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미라클 존슨'이라는 이름의 세계적인 가수로 나오는데, 미라클과 마이클의 영어 철자가 비슷하며, 미라클의 외모나 복장은 어디를 봐도 마이클 잭슨 패러디다. 게다가 서브 스토리 내용 역시 좀비가 나오는 뮤직비디오라는 점에서 'Thriller'의 패러디다. 그리고 이 뮤직비디오 촬영 감독은 스티븐 스필버그를 패러디한 '스피닝'이라는 인물이다. 이 서브 스토리 등장 조건은 스토리 파트를 2장까지 진행하고, 서브 스토리 '키류는 프로듀서?'를 완료해야만 나온다. 이 서브 스토리 두 개까지 완료하고 메인 스토리를 5장까지 진행해 부동산 아일랜드를 활성화한 상태에서 '카무로쵸 좀비워커' 때 보상으로 검은 상자를 골랐다면 '미라클 in 마하라자' 서브 스토리에서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는 디스코 배틀을 하며, 완료하면[141] 미라클을 부동산 아일랜드 고용인으로 영입할 수 있다. 마이클 잭슨이 세가와 인연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여러모로 노린 서브 스토리.

  • 데빌 메이 크라이 5에 등장하는 단테의 새로운 데빌암인 '닥터 파우스트'는 마이클 잭슨의 상징인 흰색 중절모 그 자체. 이걸 얻으면 단테가 아주 멋드러지게 마잭신의 춤을 추는 장면을 볼 수 있다.

  • 전기영화로 제작 예정이다.# 감독은 트레이닝 데이로 유명한 앤트완 퓨콰가, 마이클 잭슨 역에는 마이클 잭슨의 조카이자 저메인 잭슨의 아들인 자파르 잭슨이 캐스팅되었다.

  • 게임 Infectonator 스페셜 좀비로 등장하며 등장시 배경음을 자신이 소멸할때까지 스릴러로 교체해버린다음 백댄서 좀비를 끌고 나오는데 업그레이드 할때마다 좀비수가 늘어나고 문워크로 이동하는데다 죽을때도 멋지게 한번 턴을 해준다음 터진다.

15.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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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과 캐나다 토론토에서만 진행됨[2] 그래미와 달리 AMA는 팬들이 직접 수상자 선출에 관여하기 때문에 마이클 잭슨의 화력은 압도적이었다.[3] 번역을 올바르게 하면 '팝의 왕' 혹은 '팝의 제왕'이 알맞으나 '팝의 황제'로 굳어졌다.[4] 대중 가요에서는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와 마이클 잭슨이 필수적으로 언급된다.[5] <Thriller>[6]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생전에 이 공연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7] Most Successful Entertainer of All Time[8] 공식적으로 39개의 자선단체를 지원하며 생전 5,000억 원 가량을 기부하였다. 이는 팝스타가 지원하는 최대의 자선단체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으며 노벨평화상의 후보에 두 번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인도주의적 행적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근 20년간 지속된 언론의 루머가 이를 가려버렸기 때문이다.[9] 공식 기록 6,600만 장, 비공식 기록 1억 장 이상[10] 일명 Wacko Jacko. 2000년대에도 이 루머는 지속되어서 당대 디스로 제일 유명했던 에미넴에게도 디스당한 바 있다.[11] 사실 그는 2002년 독일을 방문했을 때 독일의 한 호텔에 머물면서 아이를 보여달라는 팬들의 성원에 생후 8개월 된 어린 자녀를 호텔 창문 밖으로 내미는 시늉을 해서 비판받았다. 이는 언론이 의도적으로 영상을 느리게 보이게 해서 아이를 오랫동안 발코니 밖에 내미는 것처럼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이후 인터뷰에서 그것은 자신의 큰 실수였다고 사과하였다. 위의 사실을 바탕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언론이 너무 무책임하다며 비판했다.Michael Jackson dangles his baby over a hotel balcony[12] 사실 그의 재판이 시작된 2004년부터 그의 활동은 거의 정지상태였다.[13] 1982년 말 발매된 스릴러 앨범은 빌보드 앨범차트에서 37주간 1위를 기록하며 1983~84년 두 해 연속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발매 1년 3개월 만에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 앨범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 북에 등재됐고 현재까지도 누적 6,6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스릴러 앨범 발매 전 세계 음반시장은 전례없던 역대 최악의 불황기였다. 미국의 CBS 직원들은 1982년 8월 13일을 검은 금요일이라 불렀는데 이날 대규모 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릴러가 대박나면서 음반시장은 다시 초호황기를 맞았다. 마이클도 앨범 발매 전에는 200만 장만 팔아도 성공한 것으로 알고 만족하자는 소리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고 한다.[14] 2위 마돈나 17%, 3위 U2 12%. 미국 성인남녀 1,000명 대상, 오차범위 ± 3.1%.[15] 임진모 음악평론가, 저서 '젊음의 코드, 록' 171 페이지[16] 박광순 문화평론가, 벅스뮤직 추천앨범 리뷰, 물론 그럼에도 지미 헨드릭스, 척 베리 등 록음악을 하는 흑인 뮤지션들은 이전에도 드물지만 있었다.[17] 박은석 음악평론가, 전설이 된 잭슨, 그의 음악과 인생[18] 박은석 음악평론가, 2010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 '누가 마이클 잭슨을 죽였나' 편[19] 정일서 KBS 라디오 PD('365일 팝 음악사' 저자), ‘X&Y’ 빌보드 3주 연속 1위 … 미국 시장서 선전[20] 김작가 음악평론가, 모든 것을 초월한 음악을 남기고[21] 후에 2000년 산타나도 8개 부문을 수상해 동일 기록이 됐다. 참고로 1984년은 그래미 역사상 가장 압도적으로 시청자수가 많았던 해이기도 하다. 시청률 30.8%에 미국내 시청자수만 5,167만명으로 집계됐다.[22] 마이클이 MTV에 나온 최초의 흑인 뮤지션이라는 뜻이 아니다. 1983년 데이빗 보위가 MTV와의 인터뷰에서 지적했듯이 흑인 뮤지션 중 극소수만, 그것도 주로 새벽시간대에만 방영이 허가되는 등 시간적 제약이 있었던 것을 24시간 언제든 방영될 수 있는 헤비 로테이션으로 마이클이 흑인 뮤지션으로서는 처음으로 길을 냈다는 의미이다.[23] 임진모 음악평론가, 위클리 공감 기고문 '팝의 제왕, 전설이 되다'[24] 차우진 음악평론가, 뮤직 비디오, 보는 음악으로의 시대를 열다[25] #[26] MTV 선정과 기네스 등재 자료 출처[27] 임진모 음악평론가, SBS 김성준의 시사전망대 흑인음악-아프로 아메리칸 뮤직 & 위클리 공감 기고문 '팝의 제왕, 전설이 되다'[28] #[29] 미국의 인기 댄스오디션 TV프로그램《So You Think You Can Dance》의 총괄 PD이자 심사위원이었던 나이젤 리스고에 의하면 수많은 지원자들이 춤을 추게 된 계기로 마이클 잭슨을 꼽았다고 한다.[30] 저서 'Present Tense'[31] 1위는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 2위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 3위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32] 김작가 음악평론가, 모든 것을 초월한 음악을 남기고[33] 근데 결국 2번째로 믹싱한 사운드가 최종 결과물로 채택된 건 함정..[34] 김영대 음악평론가, 음악취향Y '마이클 잭슨' 특집[35] 문워크에서 털기춤까지…보는 음악 새 지평 열어 & 저서 '젊음의 코드, 록' 172 페이지[36] 레이디 가가는 원래 'This Is It' 투어의 오프닝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잭슨이 신인이던 레이디 가가를 보고 자신이 직접 투어의 오프닝을 맡을 가수로 추천했다고 한다.[37] 두 사람 다 그 할리우드 연예계에서 유일한 성자로 불린다.[38] 이때 마이클을 비롯한 마이클의 식구들이 셀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기웃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39] 출처: 2019년 개봉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David Foster: Off the Record'[40] 위켄드가 마이클의 보컬과 비슷하다면 브루노는 마이클의 춤 실력과 라이브 퍼포먼스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을정도로 마이클 잭슨과 매우 유사한 퍼포먼스로 매우 유명하다.[41] 위켄드의 딸꾹질하는 듯한 창법과 맑은 미성을 듣고 마이클을 떠올린 사람들이 많았으며, 실제로 마이클의 곡 Dirty Diana를 커버한 버전을 믹스테이프 Echoes of Silence에 싣기도 했다. 현재 활동하는 가수 중 가장 마이클 잭슨의 보컬과 유사하다. 위켄드가 수 차례 인터뷰에서 마이클 잭슨의 Off the Wall 등 잭슨의 주요 앨범들과 곡들을 어릴 때부터 따라부르며 노래를 연습했다고 밝힌 바 있다.[42] 미국 내에선 RIAA 공식인증 3,300만 장의 판매고로 이글스 베스트앨범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다. 참고로 2006년 기네스 북Thriller 앨범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라는 타이틀을 공식 인증해 주면서 판매량을 1억 400만 장으로 발표한 것을 이유로 아직까지도 판매량을 1억 장 이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나 1억 장 얘기는 신빙성이 없다. 기네스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후 자신들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판매량을 6,600만 장으로 수정했기 때문이다.[43]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10위권[44] 후에 케이티 페리가 2010년에 발표한 <Teenage Dream> 앨범에서도 5개의 빌보드 1위 곡이 나오면서 동일 기록.[45] 잭슨 파이브도 1970년대 순위에서 6위에 올랐다.[46]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10위권[47] 정확한 수치는 사실 모른다. 5억으로 보는 곳도 있고, 10억, 20억, 25억으로 보는 곳도 있다. 닐슨 집계에 의하면 마이클 잭슨의 추모식은 미국내에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다이애나비에 이어 세 번째로 TV로 가장 많이 본 추모식이었다.[48] <Mediatraffic>에 의하면 2009년 가장 많이 팔린 앨범 Top 40 순위에서 마이클이 앨범들이 5/6/11/13/19/20/24/25위를 차지했다.[49] 원래 빌보드는 발매되고 18개월 이상된 앨범은 아무리 많이 팔려도 <Billboard 200> 차트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규정이 있었다. 즉 최신 앨범들만 해당차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의 앨범들, 그중에서도 특히 베스트 앨범인 <Number Ones>가 당시 <Billboard 200> 차트 1위에 올랐던 다른 가수의 앨범보다도 더 많이 팔렸음에도 해당차트에 오르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하자 형평성 논란이 일었고 결국 빌보드는 2009년 12월부터 발매시기 제한을 없애게 됐다. 18개월 이상된 앨범은 <카탈로그 차트>라고 해서 별도로 순위를 집계했었는데, 카탈로그 앨범이 <Billboard 200> 차트 1위에 오른 앨범보다 더 많이 팔린 경우는 앞서 말한 마이클 잭슨의 <Number Ones>가 최초였다.[50] 또 2018년 미국인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분전환하고 싶을 때 가장 듣고 싶은 뮤지션' 설문조사에서 마이클은 비틀즈, 이글스에 이어 3위에 올랐다.[51] 유튜브가 매주 집계하는 인기 아티스트 차트 그리고 스포티파이 Monthly Listners 항목 참고. 2022년 8월 기준 누적 스트리밍 횟수는 유튜브에서 마이클이 111억 이상으로 전체 뮤지션들 중에서 44위에 해당하고, 스포티파이에서는 96억 이상으로 69위에 해당한다. 구독자수는 유튜브에서 2400만대로 전체 음악 채널 중 37위이고, 스포티파이는 2,380만대로 44위이다.[52] 2021년 8월 기준 틱톡에서 #Michael Jackson 해시태그가 달린 영상들의 총 조회수가 90억회가 넘는데 이는 테일러 스위프트와 비슷한 수준이다.[53] <Mediatraffic>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림 앨범 순위에서 Thriller 앨범이 6,600만 장으로 1위, Bad 앨범이 3,500만 장으로 10위, Dangerous 앨범이 3,200만 장으로 16위, Off the Wall 앨범과 HIStory 앨범이 2,000만 장으로 나란히 70위, 71위에 랭크됐다.[54] 1위 데이비드 보위(65%), 2위 비틀즈(61%), 3위 (59%), 4위 엘비스 프레슬리(58%), 5위 마이클 잭슨(58%)[55] 중국 자국 연예인들까지 포함한 종합 순위에서도 마이클이 100위 안에는 거의 매주 들어가 있다.[56] 출처 참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칠레, 멕시코, 캐나다, 호주[57] 1위는 스페인 가수 Julio Iglesias[58] 1996년 마이클이 They Don't Care About Us 뮤직비디오를 리우데자네이루 Dona Marta 지역에서 찍었는데 당시엔 마약범죄로 심각한 골머리를 앓고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뮤직비디오 촬영 과정에서 마이클이 보여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선행, 그리고 뮤직비디오가 방송에 나간 후 높아진 도시에 대한 관심으로 오늘날 마약범죄에서 자유로운 안전한 도시로 변했고 여기에 마이클의 공로가 컸다고 판단하여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59]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 순위는 아티스트들간의 우열을 내림차순으로 정리한 순위가 아니다. 순위를 보면 80년대와 90년대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들의 순위는 최고가 20위권~30위권대이다. 이 말은 즉슨 80년대와 90년대가 긴 록앤롤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음악적 영향력이 50~70년대 록앤롤 시대를 만든 선구자 아티스트들보다 낮다는 것으로 롤링 스톤 평론가(엄밀히 말해 다 평론가는 아니다, 롤링 스톤은 업계 관계자들에게 투표하라고 했다고 소개했었다.)들은 평가했다는 것이다. 즉 마이클 잭슨이 80년대 팝의 역사에서 음악 산업을 뒤흔든 위대한 전설 중 한 명이 됐지만 그 영향력이 선대 로큰롤 선구자들과 비교하면 로큰롤 음악사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낮다고 본 것이다.[60] 이 외에도 위대한 ~ 시리즈를 몇 차례 더 뽑았는데 롤링 스톤의 이런 순위들은 당연하게도 위의 설명한 것처럼 로큰롤 역사 관점에서 본 것이기 때문에 50~70년대 로큰롤을 확립한 선구자들이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 여기서 SInger는 좀 더 목소리, 보컬로서의 의미를 둔 것인데 가창력 순위는 절대 아니니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61] 그런데 솔로투어를 보통 10회 전후, 많으면 20회 가까이 가는 다른 아티스들과는 다르게 3번밖에 안했다.[62] 현재기준으로 1달러를 1100원으로 환산할시 1375억.[63] 비록 그 때문에 마이클의 진통제 중독으로 후반기에 공연이 중단되었지만.[64] 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습니다라는 저서에서 보듯 개신교 단체 중에는 대중문화에 적대적인 이들이 꽤 있다.[65] 대충 따져도 1시간 30분~2시간 내내 쉴새없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격한 운동을 하는것이나 다름이 없다. 더군다나 공연과 음악만큼은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였던 마이클 잭슨은 라이브 공연에 앞서 반드시 미리 리허설 작업까지 몇차례 거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리허설 작업까지 포함하면 더 지칠 수밖에 없다.[66] 1996년 브루나이 국왕의 5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기념공연. 6만 명의 관중을 무료로 받았다.[67] 이것도 잭슨스 시절에 진행된 트리이엄프 투어 등이 제외 된 것이다.[68] 솔로 아티스트로서는 최고 기록이며 그룹인 U2, 롤링 스톤즈 다음으로 많은 관중을 동원했다..[69] Bad World Tour, Dangerous World Tour, HIStory World Tour의 합산 수익금 총합은 3억 9,000만 달러로 1달러를 1,100원으로 칠 경우 4,290억 원이다. 그런데 저 수익금들을 2015년 기준으로 환산하여 계산할 경우 6억 4,600만 달러로 7,106억 원이 된다. 위키피디아의 투어 항목을 참조.[70] Invincible 투어는 마이클이 극구 거부해서 취소되었다. 또한 This Is It 투어도 6월 25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취소되었다.[71] 그런데 투어를 4번밖에 안 했음에도 10회 전후를 진행한 다른 아티스트들과 비슷하다.[72] 보통 다른 아티스트들이 투어를 진행할 때는 미국에서만 공연의 40%를 진행한다.[73] 미국과 캐나다 토론토에서만 진행됨[74] 정확히는 잭슨 파이브의 투어이다.[75] Bad 7번, Dangerous 5번, HIStory 3번[76] 당시 사명은 페더럴 익스프레스(Federal Express)[77] 1, 2위는 각각 U2와 롤링 스톤스.[78] 다만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종종 인터넷에 돌아다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79] 독일 뮌헨 콘서트 당시에는 Dangerous 투어 기간 중에 유일하게 원키로 불렀다. 뮌헨 콘서트 이후에는 Dangerous 투어 마지막 콘서트까지 1키를 낮춰 불렀다.[80] 독일 뮌헨 콘서트 당시에는 Dangerous 투어 기간 중에 유일하게 원키로 불렀다. 다만, 마이클의 컨디션이 안좋았던건지 1절을 부를 때에는 음정이 불안했다. 원래 초기 리허설에서는 원키에서 1키를 낮춰서 불렀다. 뮌헨 콘서트 이후에 진행된 Dangerous 투어 리허설과 콘서트(로테르담~스톡홀름 첫번째밤)까지는 원키에서 2키, 이후에는 1키를 더 낮춰서 불렀다.[81] 하지만 History 25주년 기념으로 뮌헨 공연 라이브 버전이 공개되었다. 이를 통해 립싱크가 아니라 노래를 부르고있는데 묵음처리하고 AR를 같이 틀어놓으면서 라이브를 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1997 뮌헨 라이브 진행버전[82] 아동 성추행 거짓 음해로 인해 생긴 스트레스와 우울증 때문에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던 탓에 수면부족으로 목 건강 상태가 많이 나빠졌었다.[83] 96년 내한공연에서도 목 상태가 좋지 않다는게 나타났는데, 몇 안되는 라이브 진행이었던 잭슨 파이브 메들리 파트를 부를때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확연하게 탁해지고 쉰 목소리로 불렀다.[84] 원래 이 콘서트도 DVD로 발매할 겸 HD로 촬영되었지만 잭슨이 자신의 퍼포먼스에 만족하지 못해서 취소되었다는게 정설이다.[85] They Don't Care About Us와 In the Closet 사이에 짤막하게 Dangerous 앨범의 She Drives Me Wild의 비트가 나오기는 한다.[86] 이 사진은 둘의 라이벌리를 조명하며 최근에 와서야 만들어진 "합성 사진"이다. 마이클 잭슨과 퀸시 존스가 그래미에서 상을 탄 이후의 순간을 담은 사진이고, 프린스는 자신의 공연에서 찍힌 사진이다.[87] 다만 이 둘은 현대에 와서 라이벌로 평가받는 것이지 당대엔 라이벌이란 인식이 없었다.[88] 마이클은 꽤 긴 시간 공을 들여 앨범을 만드는 타입이었고, 프린스는 가히 엄청난 수의 작업량을 보여주는 가수였다. Bad가 만들어지던 같은 시기에 프린스는 Parade, Sign 'O' the Times와 같은 앨범을 연달아 만들고 있었고, 시기상 프린스가 정말 바빴을 수 밖에 없는 시기이기도 했다.[89] 운동신경이 좋은 프린스가 마이클 잭슨을 늘 탁구로 농락했는데, 한번은 계속 농락당하는 것에 짜증이 난 마이클 잭슨이 탁구공을 세게 쳤는데 그게 프린스의 사타구니에 맞았다고 하는 루머도 있으나 이 역시도 라이벌리를 가장한 루머일 뿐이다. 이런 루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둘이 탁구도 재밌게 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는 점 뿐이다.[90] 자넷 잭슨이 오빠 마이클 잭슨과 집안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걸 생각하면 자넷의 입장에서는 좋은 뉘앙스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프린스의 밴드 The Time의 멤버 Jimmy Jam and Terry Lewis가 자넷의 전담 프로듀서가 되면서 프린스와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프린스는 자넷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게 되었다는 소문도 있다.[91] 마이클 잭슨이 무죄를 받았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러한 주장을 펼친 것은 당시 미국의 사회가 마이클 잭슨에 대해서 얼마나 편협한 방식으로 바라봤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다.[92] 2022년 1월 13일 기준 Billie Jean 의 공식 MV 조회수가 11억을 넘겼고,그 뒤로 8억 조회수 뮤비가 2개, 7억, 6억이 1개, 그 외에 1억뷰 이상의 뮤비를 다수 보유하며 웬만한 현역 가수 못지않은 조회수를 갖고 있다.[93] 이에 대해 첨언하자면, 영국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영연방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지 않은 외국의 시민들에게 기사 작위같은 귀족 작위를 수여하지 않는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받은 대영제국 훈장 2등급은 영연방 입헌군주국 시민이었으면 기사 작위급 훈장으로 간주되었을 테지만, 스필버그는 미국인이니 작위가 딸려나오지 않는 명예 훈장으로만 간주된다. 마이클 잭슨은 이런 사정을 몰랐던 모양이다.[94] 리프트로 공중 높이 떠서 관객석 위를 지나가며 노래를 하는 퍼포먼스인데, 잭슨은 안전바 안에 들어가 있어서 안전했으나 관객은 그 밖에 있어서 굉장히 위험할 수 있었다. 초반에 보면 팔을 잡아서 안전바를 잡게 해주려고 하지만 관객이 흥분해서 날뛰자 잭슨이 직접 꽉 잡아주는 것을 볼 수 있다.[95] 'Thriller' 뮤직비디오 시작 전에 '이 영상은 오컬트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것은 자신(아마도 마이클)의 종교적 신념과 무관하다' 는 자막이 나온다.[96] 그의 어머니가 여호와의 증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97] Dangerous 가사 및 해석, Heal the world 가사 및 해석.[98] 작중 주인공의 상관에게 자신을 승진시키겠다는 약속을 안 지키냐고 묻는 순간 상관에게 그대로 무시당하는 역할로 나온다.[99] 가사에 나오는 'Annie, are you okay?'는 심폐소생술(CPR) 교육 때 교육용 인형 '애니'에게 하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마이클은 CPR 라이선스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00] 짝퉁(?)은 아니지만 실제로 마이코 료(マイコーりょう)라는 예명으로 마이클 잭슨 성대모사 및 퍼포먼스를 네타삼아 활동하는 예능인이 존재하기는 한다.[101] '부쿠레슈티의' 영어 이름은 Bucharest, 발음하면 '부카레스트'이다. 부다페스트의 발음이랑 비슷해서 햇갈릴 수 있다. [102] 정확히는 당시에는 시간이 공연 직전이었어서 촉박해서 넣지는 못하고 다음 공연 때 추가했다[103] 직접 쇼핑을 하기 위해서는 특정 백화점을 하루 통째로 빌려서 혼자 쇼핑을 했다고 한다.[104] 상술한 도널드 트럼프는 마이클 잭슨이 죽기 전까지 민주당 소속이었고,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성향도 진보적이었다. 그가 공화당 사람이 된 것은 마이클 잭슨이 죽은 이후의 일이다.[105] 대부분 마이클 잭슨을 비난하는 목적보다는 그정도로 인기가 많았다는 걸 강조하는 용도로 쓰기는 하지만 의도가 어떻든 이는 분명한 허위사실이다.[106] 한국에서 90년대 후반쯤에 생성되고 2000년대 초중반에 걸쳐서 돌았던 헛소문인데, 당시는 인터넷 시대 초반이라 팩트체크란 것 자체가 생소했기에 기존에 돌던 소문이 날개돋힌 듯 퍼져나가곤 했다. 90년대 언론의 무분별한 보도로 마이클 잭슨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박히기 시작했고, 그가 집에 놀이동산을 만들어놓았다는 등 씀씀이에 대한 일화가 알려지자 (메이저 팝스타가 얼마나 버는지 감이 없는) 일반인들에게 "돈을 펑펑 써서 파산했다던데"란 뜬소문이 돌기 시작하고, 때마침 한때 잭슨만큼 잘 나갔던 마이크 타이슨의 파산 소식까지 더하며 "그만큼 벌어도 파산하는게 가능하구나"란 인식 속에 더 퍼져나간 것. 물론 잭슨의 전성기는 타이슨보다 훨씬 길었으며, 무엇보다 전성기 때 번 수익 외에도 로열티 수익 등 가만 앉아있어도 들어오는 수익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벌어들이는 돈의 스케일이 다르다. 당장 마이클 잭슨과 가장 근접했다고 자주 평가받는 팝스타 더 위켄드의 추정 행사 초청료가 약 80억원이며, 마이클 잭슨 사후 환불처리된 약 75만장의 공연 티켓 수익은 한화로 1000억원이 넘었다.[107] 유족들은 마이클의 초상권을 2,105달러로 신고했다.[108] 이 잡지에서는 매년 사후 수익 랭킹을 10월에 발표한다. 그 외에도 아티스트의 수익 순위 등등 다양한 순위를 발표한다. 또한 축구팬들이라면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스포츠 구단의 브랜드 가치 중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1위를 했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몇 년 연속 1위를 했니 바르셀로나의 1년 수익이 얼마니 하는 것들도 발표한다.[109] 출처: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2015년2016년[110] 1,100원으로 단순 환산[111] 2위~12위까지의 수익을 합친 것보다 많다고 발표했다.[112] U2는 2011년에 1억 9,500만 달러를 벌어들여서 마이클을 넘는데 성공했다.[113] 비틀즈, 롤링스톤즈, 엘비스 프레슬리 등 총 4,000여 곡의 음악 판권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노래를 사용하려면 마이클 잭슨에게 사용료를 지불해야 했다.[114] 나머지 절반의 지분은 1995년에 소니에 약 1억 1,000만 달러 정도를 받고 팔아넘긴 상태였다.[115] 'Invincible' 앨범 수록곡 'Unbreakable' 의 가사.[116] 그의 곡 'Man In The Mirror' 의 가사가 이러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Bad 또한 비슷한 내용으로 이 두 곡이 수록된 Bad는 세상을 바꾸려면 너 먼저 바꿔라라는 메시지가 주 테마인 앨범이다.[117] 전 부인이자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118] 당연하게도 이 발언 이후 'Invincible'은 어찌된 거냐, 당신이 돈 쓸어 담을 땐 냅스터가 없었다는 둥의 각종 비아냥에 시달리게 되었다. 위의 악성 비난 외에도 이미 4억장을 넘게 팔아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언급하기에는 부적절한 말이었다는 비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같은년도 다른 인터뷰에서는 It is wrong to download but the answer cannot be jail (다운로드는 잘못되었지만 그것의 결과가 감옥이면 안된다) 라는 식으로 말을 좀 유하게 하게 되었다.[119] 마이클 잭슨은 공식적으로만 약 197개의 상을 받았다.[120] 마이클과 친구들 공연은 분단국가인(였던) 두 나라, 독일/한국에서만 열렸던 특별공연이다.[121] 그래미와 달리 AMA는 팬들이 직접 수상자 선출에 관여하기 때문에 마이클 잭슨의 화력은 압도적이었다.[122] 사후 출연.[123] 사후 출연.[124] 사후 출연.[125] 사후 출연.[126] 사후 출연.[127] 사후 출연[128] 위어드 알 얀코빅은 1987년 마이클 잭슨의 Liberian Girl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했다.[129] 자기가 마이클 잭슨인 줄 아는 레온 콤포스키라는 뚱보 정신병자라는 설정이었다.[130] 사실 EBS 홈페이지에서도 심슨 더빙에 관한 연혁을 찾을 수 없고 웹상에서도 '일본탐험'편을 빼면 EBS 더빙 판 심슨 영상에 대한 정보가 거의 나타나질 않는다.[131] 실제로 마이클이 인터뷰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언론사 등을 향하여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깔 때 많이 사용하던 말버릇이었다. 실제 영상[132] 마이클의 막내 아들인 비기 잭슨 맞다.[133] 두 번째 성추행 혐의는 03년도에 불거졌고 첫 공판이 05년도이었다.[134] 오죽 그랬으면 팬들은 마이클 잭슨 성대모사를 완벽히 잘했다고 해놨으니.[135] 그것도 스탠 마시가 마이클 잭슨의 시체를 꺼내는 걸 말리고는 "야, 그렇게 하다간 사람들이 속상하게 느낄걸?"라고 하면서 카일이 저 너머에 잠시 응시했으니.[136] 투팍도 사망 후 홀로그램 퍼포먼스가 있었다.[137] 다만 1편의 경우 너무 참여가 늦어서 딱 한 부분만 출연하고 따로 녹음도 안 해서 상술한 메가드라이브용 게임 문워커의 음성을 재활용했다. 2편에선 비중이 대폭 늘었고 녹음도 제대로 했다.[138] 마이클 잭슨 이외에 비중이 있는 또 다른 팝스타는 바로 '기타의 신'인 에릭 크랩튼.[139] 광고에 사용된 음악도 당시 발매된 Invincible 앨범이 아닌 전용 광고 음악을 제작해 사용했다.[140] 다만 애니메이션판에서는 직접 나오지는 않고 외편 소설판인 Another Side: Earthbound에서 언급되는 사실이다.[141] 승패는 전혀 상관없다. 일단 춤만 같이 추면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