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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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왕국 후녀디 왕조 국왕
보헤미아 왕국 국왕
마차시 1세
I. Mátyás

파일:640px-Andrea_Mantegna_-_King_Matthias_Corvinus_of_Hungary.jpg

출생
1443년 2월 23일
헝가리 왕국 콜로즈바르
사망
1490년 4월 6일
오스트리아 대공국
재위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의 왕
1458년 1월 24일 ~ 1490년 4월 6일
보헤미아 왕국의 왕
1469년 ~ 1490년 4월 6일
오스트리아 대공
1487년 ~ 1490년 4월 6일
배우자
칠리의 엘리자베트
(1455년 결혼/1455년 말 사망)
포데브라트의 카테리나
(1461년 결혼/1464년 사망)
나폴리의 베아트리체
(1476년 결혼)
정부
바르바라 에델푀크
종교
가톨릭
아버지
후녀디 야노시
어머니
실라지 에르제베트
형제
후녀디 라슬로
아들
코르빈 야노시(사생아)
서명
파일:마차시 1세 서명.svg
1. 개요
2. 언어별 표기
3. 생애
3.1. 초기 생애
3.2. 헝가리 왕에 등극하다
3.3. 내치
3.4. 외치
3.4.1. 보헤미아 전쟁
3.4.2.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3.4.3.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3.5. 말년
4. 후계 문제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6. 기타



1. 개요[편집]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이자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오스트리아 대공국대공. 유능한 지휘관이자 정치가였던 후녀디 야노시의 둘째 아들로, 16살의 나이에 헝가리 왕위에 오른 뒤 탁월한 통치력과 군사적 역량을 발휘해 오랜 내전과 외세의 침략으로 피폐해졌던 헝가리를 중부 유럽 최강의 국가로 육성했다.

'검은 군대(Fekete sereg)'[1]라고 불리는 상비 용병대를 창설하여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연이어 격파하고 난도르페헤르바르[2]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접한 헝가리 남부의 요새들을 보강해 남부 국경의 방비를 강화했다. 또한 보스니아,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등 헝가리 주변의 국가들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공략해 영토를 크게 늘렸으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헝가리의 문화 부흥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체제를 이루는 과정에서 귀족들을 억압하고 각 주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해 귀족과 평민의 불만을 샀으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고 서방 정복에 매달리면서 훗날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공격할 때 서방의 원조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여기에 더해 끝내 정당한 후계자를 얻지 못하면서 32년의 치세 동안 일군 업적이 물거품이 되고 헝가리가 몰락하는 단초가 되고 말았다.

다만 마차시 1세가 귀족을 무력으로 누른 것도 당시 서유럽에 비해 헝가리나 폴란드는 너무 왕권이 미약한 상태였고, 당시 이들 국가의 최대 적인 오스만 제국이 전제군주국이란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전제군주국인 오스만 제국이 동원하는 병력과 봉건 영주들의 연합체인 헝가리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차이가 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단결이나 통치의 효율면에서도 큰 차이가 날수밖에 없다. 당장 헝가리가 멸망하는 모하치 전투에서도 헝가리 영주들은 국왕의 명령을 받고도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결국 헝가리군은 오스만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다. 즉 마차시 1세의 왕권 강화책은 당시 시대의 요구였던 것이고, 마차시 1세 사후 이런 왕권 강화정책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결국 헝가리는 멸망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태는 똑같은 봉건 영주 연합체국가였던 폴란드-리투아니아가 후에 그대로 되풀이했다.

2. 언어별 표기[편집]


헝가리어
Hunyadi Mátyás (후녀디 마차시)
크로아티아어
Matija Korvin (마티야 코르빈)
체코어
Matyáš Korvín (마티아시 코르빈)
슬로바키아어
Matej Korvin (마테이 코르빈)
루마니아어
Matei Corvin (마테이 코르빈)
라틴어/독일어
Matthias Corvinus (마티아스 코르비누스)


3. 생애[편집]



3.1. 초기 생애[편집]


1443년 2월 23일, 헝가리 왕국 콜로즈바르에서 에르데이의 대영주이자 헝가리의 명장 후녀디 야노시와 헝가리의 명문가인 실라지 가문의 가주 실라지 라슬로의 딸 에르제베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으로 후녀디 라슬로가 있었다. 아버지는 정치와 전쟁에 몰두했기 때문에, 두 아이의 양육은 주로 어머니 에르제베트가 맡았다. 강인한 성격이었던 그녀는 거대한 후녀디 영지의 관리를 철저히 수행했으며, 아이들이 우수한 교육을 받도록 힘썼다.

마차시는 아버지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았다. 후기 기록에 따르면, 그는 무예를 어린 나이에 터득했으며 지구력이 뛰어났고 큰 강을 헤엄칠 수 있었다고 한다. 첫 스승은 헝가리 왕 울라슬로 1세의 가정교사이자 폴란드 왕국의 인문주의자였던 사노크의 그제고시였다. 그제고시는 1444년 울라슬로 1세가 바르나 전투에서 전사한 뒤 후녀디 가문의 초빙을 받고 라슬로와 마차시를 가르치다가 1451년 르부프 대주교로 부임하면서 헝가리를 떠났다. 마차시는 이후에도 여러 교사로부터 신학, 예법, 교양 및 예술을 포함한 다방면의 지식을 습득했다. 그는 라틴어를 훌륭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독일어, 체코어, 루신어도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루마니아어도 쓸 수 있었다. 마차시는 어렸을 때부터 전쟁 영웅의 이야기에 푹 빠졌다고 전해지는데, 특히 알렉산드로스 3세의 용맹과 한니발 바르카의 교활함에 관한 이야기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탐독했다.

1455년 초, 당시 12살이었던 마차시는 첼레 백국의 백작이자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국정을 농단하던 칠리 백국의 백작 울리히 2세의 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당시 울리크 2세와 후녀디 야노시는 헝가리의 최고 권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로 인한 갈등을 누그러뜨리고 타협하고자 이 결혼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1455년 말 엘리자베트가 원인 불명의 질병으로 사망하면서, 신혼 생활은 1년도 채 가지 못하고 끝났다.

1456년, 후녀디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파디샤 메흐메트 2세의 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지만 전염병에 걸리면서 2주만에 사망했다. 이후 형 후녀디 라슬로가 후녀디 가문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라디슬라우스로부터 후녀디 야노시의 뒤를 이어 헝가리군 총사령관으로 선임된 첼레 백작 울리크 2세는 후녀디 야노시가 가지고 있던 모든 왕실의 성과 수입을 압수하려 했다. 후녀디 라슬로는 푸터크(Futak)[3]에서 열린 회의에서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자세를 취한 뒤, 라디슬라우스와 울리크 2세를 난도르페헤르바르로 초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후녀디 라슬로는 난도르페헤르바르에 온 왕실군을 해산시키고 울리크 2세를 참살한 뒤 라디슬라우스를 포로로 잡았다. 이후 후녀디 가문의 중심지였던 테메슈바르로 끌려간 왕은 라슬로에게 책임을 물지 않을 것이며 헝가리 왕실군 총사령관으로 선임하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풀려났다.

부더에 도착한 라디슬라우스는 헝가리 귀족 대다수가 후녀디 라슬로에게 적대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복수를 꾀했다. 왕은 후녀디 라슬로를 설득해 동생 마차시도 부더로 끌어들였다. 아버지 야노시는 생전에 두 아들이 궁정에 함께 있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고, 어머니 에르제베트 역시 뭔가 수상하다며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마차시는 왕명과 형의 지시에 순종하기로 했다. 1457년 3월 14일 마차시가 도착하자마자, 라디슬라우스는 두 후녀디를 긴급 체포한 뒤 사형 선고를 내렸다. 후녀디 라슬로는 3월 16일에 참수되었고, 마차시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라슬로의 처형과 마차시의 수감 소식을 접한 어머니 에르제베트와 그녀의 형제 실라지 미하이는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켜 에르데이 대부분을 접수하고 부더로 쳐들어갔다. 라디슬라우스는 얀 이스크라(Jan Jiskra z Brandýsa 1400~1469)를 왕실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후녀디 마차시와 함께 으로 향했다. 마차시는 처음에는 빈에서 인질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는 라디슬라우스와 함께 프라하로 이동했다. 그렇게 타지에서 10개월간 억류되었던 그는 1457년 11월 23일에 라디슬라우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운명이 극적으로 전환되었다.


3.2. 헝가리 왕에 등극하다[편집]


라디슬라우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튀링겐의 빌헬름 변경백[4]의 딸이며 라디슬라우스의 친척인 안나, 헝가리의 전임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의 동생이자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그리고 독일왕이자 라디슬라우스의 어머니 엘리자베트로부터 성 이슈트반 왕관을 비롯한 헝가리 서부의 여러 성과 도시의 권리를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던 프리드리히 3세가 헝가리의 왕좌를 노렸다. 헝가리 귀족들, 특히 실라지 미하이, 거러이 라슬로(Garai László 1410~1459), 우일러키 미클로시(Újlaki Miklós 1410~1477) 등은 16살의 마차시를 왕으로 세운다면 통제하기 쉬울 거라고 판단했다. 또한 교황 갈리스토 3세는 후녀디 야노시의 대튀르크 전쟁에서의 활약상에 찬사를 보낸 바 있었고, 그의 아들이 이 투쟁을 지속할 거라고 믿었기에 마차시가 헝가리 왕이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거러이 라슬로는 세게드에 머물던 실라지 미하이를 찾아가 협상한 끝에 1458년 1월 12일 실라지 형제가 후녀디 라슬로 처형에 일정 역할을 한 반팔비 공작 바리우스 2세 미클라시를 용서하고, 마차시를 석방시킨 뒤 왕으로 선출하며, 실라지 미하이는 거러이 라슬로의 딸과 결혼하고, 거러이 라슬로는 궁정백으로 선임되고 부더의 왕실 재산을 감독하기로 합의했다. 여기에 페치 주교 미클라시의 바리우스 2세를 당시 보헤미아의 후스파 권력자인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에게 보내 프라하에 구금되어 있는 마차시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하기로 했다.

이렇게 합의를 맺은 실라지 미하이는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 의회로 행진한 뒤, 귀족들에게 마차시가 형제의 처형에 복수하지 않을 거라며 그를 왕으로 선출하자고 주장했다. 1458년 1월 24일, 의회는 만장일치로 마차시의 왕위 계승을 결의했으며, 실라지 미하이를 5년간 왕의 섭정으로 삼기로 했다. 실라지 미하이는 마차시가 돌아오기 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법을 통과시켰다. 그 내용은 모든 왕실 소속 성채들을 자신에게 넘겨야 하며, 자신의 권위는 왕 다음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궁정백으로 선임되었던 거러이 라슬로와의 결혼 약속을 파기하고 부더의 왕실 재산을 넘기겠다는 것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한편, 이르지는 헝가리에서 온 사절단을 접견한 뒤 마차시가 자신의 딸 카테리나와 결혼한다는 조건하에 마차시의 석방을 동의했다. 마차시는 몸값을 지불한 후 풀려난 뒤 카테리나와의 결혼을 선포한 후 에스테르곰을 거쳐 1458년 2월 14일 부더에 도착했다. 관례에 따르면, 그는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에스테르곰 대주교로부터 성 이슈트반 왕관을 전달받으면서 헝가리 왕으로 등극해야 했다. 그러나 그 왕관은 프리드리히 3세에게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일단 프리드리히 3세에게 왕관을 돌려달라고 요청하기로 하고, 대관식을 미루는 대신 다른 의식이 거행되었다. 마차시가 부더에 처음 이르렀을 때 성직자와 시민, 유대인들이 몰려와서 환영했다. 마차시는 그곳에서 모든 성직자와 귀족, 시민, 그리고 유대인의 권리를 인정한다고 선언하고 죄수들을 사면했다. 이후 궁전의 왕좌에 앉아서 임시로 만들어진 왕관을 쓰고 국정을 관리했다.

1458년 3월 9일, 마차시는 삼촌 실라지 미하이에게 후녀디 가문의 유산 중 하나인 베스테르체바녀를 하사하고 세습 백작 칭호를 내렸다. 그러면서도 외교 정책 및 재산 증여 문서를 독자적으로 발행하는 등, 섭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통치자의 권한을 행사했다. 그는 몇 년 전인 1453년 아버지 후녀디 야노시가 섭정직을 사임했을 때 라슬로 5세의 나이가 13세였다는 점을 근거로 삼으며 이제 16살인 자신은 충분히 통치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모두가 그의 집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라디슬라우스 왕으로부터 왕실군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던 얀 이스크라는 1458년 3월 말에 마차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마차시는 로즈고니 셰베슈첸(Rozgonyi Sebestyén)을 헝가리 북부 최고 사령관으로 삼고 이스크라의 보헤미아 용병대를 토벌하게 했다. 로즈고니는 얀 이스크라를 상대로 성공적으로 몰아붙였지만, 그해 9월 오스만 제국군이 헝가리를 침공하자 이에 맞서고자 방향을 돌려야 했다. 그 후 이스크라는 프리드리히 3세를 섬기다가 마차시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하면서 위기에 봉착하자 1462년 리퍼(Lippa)[5] 지역에서 많은 영지와 돈을 받는 대가로 마차시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의 용병 중 일부는 마차시를 섬겼는데, 이들은 마차시가 결성한 '검은 군대(Fekete sereg)'의 일원이 되었다. 여전히 그를 따르지 않은 보헤미아 용병들은 1467년까지 마차시의 공세로 인해 헝가리 북부에서 쫓겨났다.

1458년 여름, 실라지 미하이는 마차시가 자신을 섭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에 분노해 우일러키 미클로시, 거러이 라슬로와 함께 왕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마차시는 이 음모를 적발해 거러이 라슬로를 궁정백에서 해임했다. 그렇지만 어머니 에르제베트의 오빠이기도 한 미하이를 차마 해치지는 못했고, 일시적으로 구금했다가 관직에 복위시키길 반복했다. 실라지 미하이는 그런 그를 상대로 여러 차례 음모를 꾸몄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460년 말 에르데이 총독을 지내던 중 오스만 제국군과의 교전에서 체포된 뒤 메흐메트 2세 앞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1459년 초, 거러이 라슬로와 우일라키 미클로시는 네메투이바르(Németújvár)[6]에서 마차시에 대항해 프리드리히 3세를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거러이 라슬로는 그 직후 사망헀고, 우일라키 미클라시는 마차시와의 항전을 이어갔으나 끝내 압도당하자 그해 7월 1일 자신의 재산을 유지하는 대가로 마차시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마차시는 프리드리히 3세와 협상한 끝에 1464년에 그가 명목상 헝가리 왕을 칭하는 것을 용인하는 대가로 자신이 헝가리에서 군림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성 이슈트반 왕관을 반환하게 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대로 헝가리 왕을 칭했고, 이는 훗날 그들이 헝가리를 병합하는 명분 중 하나가 되었다. 성 이슈트반 왕관을 접수한 마차시는 1464년 3월 29일 헝가리의 관례에 따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귀족들의 자유를 확인했다. 그는 이로써 명실상부한 헝가리의 국왕이 되었다.


3.3. 내치[편집]


마차시의 국내 정책의 주요 목표는 왕권을 강화하여 귀족들이 도전할 엄두를 못내게 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해 전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재무 수입을 늘려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다지고 후녀디 가문의 왕위 계승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수석 재상인 에스테르곰 대주교 세치 데네시를 해임하고 컬로처 대주교 바르다이 이슈트반과 비테즈 야클로시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여기에 상급 법원인 왕실 특별 법원과 개인 법원을 하나의 최고 법원으로 통합했다. 이 최고 법원은 귀족들이 주재하는 전통적인 법원의 권위를 떨어드리고 사법 행정을 보다 전문화하는 데 기여했다. 1465년에는 에르데이의 2개 주를 지그몬드 백작, 센트죄르지 야노시 백작, 엘러바흐 베르톨트의 관할로 삼게 했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마초 반(Ban)의 지위를 누리던 우일러키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서코이 페테르(Szakolyi Péter)를 파견해 우즐라기 가문과 함께 마초 지역을 관리하게 했다.

그는 초기에는 오스만 제국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1464년 7월 메흐메트 2세가 야이체를 포위하자 사바 강을 따라 군대를 집결시켜서 메흐메트 2세가 8월 24일 포위를 풀고 물러나도록 강요했다. 이후 사바 강을 건너 스레브니차를 공략한 뒤 즈보르니크를 포위했지만 오스만 제국군이 인근에 이르자 헝가리로 철수했다. 1466년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하고 교황 바오로 2세로부터 보조금을 받았다. 그러나 서방 열강들이 원조를 제대로 하지 않자, 암묵적으로 반 오스만 정책을 포기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침략하지 않았고, 메흐메트 2세 역시 헝가리에 대규모 침공을 가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포기한 뒤, 마차시는 1466년 슬라보니아를 방문해 우일라키 미클라시와 서포여이 임레를 반에서 해임하고 비토베크 야노시와 투즈 야노시로 교체했다. 1467년 3월. 그는 의회를 소집한 뒤 2개의 전통적인 세금체계를 개편했다. '의회세'는 '왕실의 국고세'로 바뀌었고, '10 중 3세'는 '왕관의 관세'로 징수되었다. 여기에 더해, 귀족들에게 용인했던 모든 면세를 무효화했으며, 모든 세금을 왕가에 집중시켰다. 그는 왕실 수입의 관리를 개종한 유대인 상인인 에르누슈트 야노시(Ernuszt János)에게 맡겼다. 에르누슈트는 2년 안에 모든 일반 및 특별 세금 징수와 소금 광산 관리를 담당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들인 세입은 50만 플로린에 달했는데, 그 중 절반은 왕실의 국고세와 특별 세금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세제 개혁은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1467년 8월 18일, 헝가리 귀족, 작센인, 세케이족 등 에르데이의 세 대표자들은 콜로즈모노스토르[7]에서 왕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했다. 마차시는 즉시 군대를 소집하여 이들을 토벌하러 출진했다. 반란군은 왕실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큰 저항 없이 항복했지만, 마차시는 반란군 지도자들을 가차없이 처벌했다. 많은 이가 그의 명령에 따라 무자비하게 고문당한 뒤 참수되거나 꼬챙이에 꽂혔다. 여기에 몰다비아 공국슈테판 3세가 반란을 지원했다고 의심해 몰다비아를 침공했지만, 1467년 12월 15일 바이아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심한 부상을 입은 채 헝가리로 퇴각했다. 1481년, 마차시는 반역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프랑코판, 즈린스키 등 크로아티아 및 슬라보니아계 대귀족들을 잡아들였다. 그들은 새로운 토지세 도입에 동의하자마자 사면받았다.

1485년, 헝가리 의회는 이전의 많은 모순된 법령들을 대체하는 체계적인 법전인 데크레툼 마이우스(Decretum maius)를 반포했다. 궁정백의 순회 재판과 임시 주 의회가 폐지되어 주 법원의 입지가 강화되었으며, 군주가 부재하거나 소수인 경우에는 궁정백이 섭정으로서 섭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마이우스는 이외에도 사법 행정 전반에 걸친 실질적인 개혁을 단행해, 헝가리의 정부 체계 및 법 질서를 확립했다.

이렇듯 왕권 강화와 세제 개혁을 단행하면서 내실을 다지는 한편, 그는 나폴리 왕국 출신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한 뒤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는 르네상스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부더의 왕성에 르네상스 풍의 정원이 지어졌고, 비셰그라드 궁전 역시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인 치멘티 카미키아(Chimenti Camicia)와 달마티아인 조반니 달마타(Giovanni Dalmata)를 이 프로젝트의 지휘자로 임명했다. 또한 조각가 베네데토 다 마자노(Benedetto da Majano), 화가 필리피노 리피(Filippino Lippi)와 안드레아 만테냐( Andrea Mantegna) 등 유수의 이탈리아 예술가들을 궁정에 초빙하여 궁전을 장식하게 했으며, 군사 기술자 아리스토텔레 피오라반티(Aristotele Fioravanti)를 고용하여 남쪽 국경을 따라 요새를 재건하게 했다.

마차시는 콜로즈바르, 세게드, 버이더후녀드에 있는 프란치스코회와 페예레지하저(Fejéregyháza)에 있는 폴린회를 위해 후기 고딕 양식의 수도원을 짓게 했다. 그런 마차시의 궁정에는 고품질의 음악 시설이 있었다. 바르톨로메오 마라스키 교황청 예배당장은 마차시의 예배당 성가대를 그가 들어본 것 중 최고라고 묘사했다. 조스킨 도르와 요하네스 데 스토켐과 같은 작곡가들은 마차시의 궁정에서 시간을 보냈고, 수많은 이탈리아 음악가가 그 곳을 방문했다.

하지만 마차시가 르네상스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헝가리의 가톨릭 신앙과 전통 예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헝가리의 서사시와 서정시가 종종 그의 궁정에서 지어졌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오스만 제국과 후스파에 대항하여 가톨릭을 수호한 헝가리 국왕들과 전사들을 찬미하는 것이었다. 성모 신심이 강했던 그는 성모무염시태에 대한 신학 논문을 썼으며, 1460년대에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새긴 동전을 발행했다.

어린 시절 독서를 즐겼던 마차시는 서적 수집에도 관심이 많았다. 1465년 페라라 출신의 갈레오토 마르치오(Galeotto Marzio)를 왕실 도서관의 첫 번째 도서관장으로 임명한 뒤 유럽 각지에 흩어진 서적을 수집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여기에 더해 필사가, 삽화가, 제본가를 대거 고용해 왕실 도서관에서 일하게 했다. 그가 일생 동안 얼마나 많은 책을 모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존하는 저서만 216권에 달한다. 그의 도서관에는 크세노폰키루스 2세에 관한 저서,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알렉산드로스 3세 전기, 동시대에 활약한 로베르토 발투리오의 군사 논문, 제2차 포에니 전쟁에 대한 실리우스 이탈리쿠스의 저서 등이 보관되었다.

마차시는 시간이 남을 때마다 인본주의자들과 함께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했다. 안토니오 본피니(Antonio Bonfini), 피에트로 란차노(Pietro Ranzano), 바르톨로메오 폰치오(Bartolomeo Fonzio), 그리고 프란체스코 반디니(Francesco Bandini) 같은 철학자들이 이 시기 마차시의 궁정에서 여러 해를 보내면서 신플라톤주의를 헝가리에 소개했다. 한편, 그는 별과 행성의 움직임과 조합이 개인의 삶과 국가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확신하고 점성술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대의 유명한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레기오몬타누스(Johannes Regiomontanus), 마르친 빌리카(Marcin Bylica)는 부더에 천문대를 세우고 천체를 관측했다. 레지오몬타누스는 항해에 관한 저서를 마차시에게 바치고 그 대가로 1468년 고문에 선임되었다. 이 저서는 훗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를 향한 여정에 착수했을 때 참고 저서로 활용되었다.


3.4. 외치[편집]



3.4.1. 보헤미아 전쟁[편집]


마차시는 재위 초기에 오스만 제국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서방의 도움이 제대로 오지 않는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과 단독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어리석인 짓이라고 판단하고 전쟁을 중단했다. 그 대신, 그는 교황 바오로 2세로부터 파문을 선고받은 후스파 지도자이자 보헤미아 국왕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를 노렸다. 1468년 초 이르지의 아들 빅토르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프리드리히 3세는 마차시에게 독일왕으로 추대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주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마차시는 3월 31일 보헤미아에 선전포고하고 오스트리아로 진군해 보헤미아군을 몰아낸 뒤 모라바와 슬레스코를 침공했다. 1468년 5월 테베비차 포위전을 치르다가 부상을 입었고, 1469년 2월 크루딤에서 변장한 채 적진을 정찰하던 중 체포되었지만, 자신이 보헤미아에 사는 평범한 말 사육자라고 속이고 겨우 빠져나갔다.

이후 전세가 악화되면서 헝가리군과 보헤미아 내 가톨릭 부대가 빌레모프에서 이르지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그는 이르지와 어느 오두막에서 만나 협상을 벌인 끝에, 온건한 후스파와 교황청의 화해를 중재하겠다고 약속하면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1469년 4월에 올로모우츠에서 다시 회의를 열어 프라하 교구장에 가톨릭 대주교를 임명하는 것을 포함한 교황 특사단의 요구를 전달했다. 5월 3일, 보헤미아 가톨릭 교회는 올로모우츠에서 마차시를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했다. 모라바, 슬레스코, 루지체는 마차시를 받아들였지만, 보헤미아 본토는 이르지를 계속 지지했다. 일부 귀족들은 폴란드 왕국의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인 브와디스와프 야기엘론치크가 이르지의 뒤를 이을 권리를 인정했다.

1469년 중순, 마차시는 이르지가 이끄는 군대를 슬레스코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11월 2일 우에르슈브로드에서 급습을 받아 패주했다. 이후 헝가리로 철수한 그는 의회를 열지 않은 채 특별세 부과를 선포했고, 이로 인해 헝가리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1470년 2월 11일, 마차시는 빈으로 가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이르지와의 전쟁 비용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를 공격하려는 오스만 제국군이 슬라보니아를 통과하는 것을 허용한 것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한 달 이상의 협상에도 별다른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헝가리로 돌아갔다.

이후 귀족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져서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1470년 11월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는 그에게 특별세를 부과할 권한을 인정하는 대신, 한 개의 포르타(porta) 당 납부해야 할 모든 세금의 합계가 1 플로린을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정했으며, 보헤미아 전쟁을 지속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리하여 전쟁을 지속하기가 곤란해진 마차시는 보헤미아로의 공세를 중단했다. 1471년 3월 22일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가 사망하자, 보헤미아 의회는 5월 27일 브와디스와프 야기엘론치크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블라디슬라프로 추대했다. 교황 특사 로렌초 로베렐라는 이를 무효로 선언하고 마차시가 보헤미아 왕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 의회는 이를 묵살하고 블라디슬라프의 집권을 받아들였다.

1471년 마차시가 모라바로 가서 보헤미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헝가리의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차남 카지미에시를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급보를 접했다. 이 음모는 비테즈 야노시 대주교와 그의 조카 파노니우스 야노시가 가톨릭 신자인 블라디슬라프와의 전쟁을 막고자 벌인 것이었다. 마차시는 즉시 헝가리로 돌아온 뒤 의회를 소집하고 "앞으로는 귀족들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하지 않겠으며 매년 의회를 소집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이에 귀족들은 만족했고, 9월 21일 50명 가량의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471년 10월 2일, 카지미에시 왕자가 헝가리를 침공했다. 그는 판노니우스 야노시의 지원에 힘입어 니트러를 공략했지만, 오직 로스고니 야노시와 페레니 미클라시만 가담했을 뿐, 다른 귀족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차시가 즉각 반격을 가해오자, 카지미에시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판노니우스 야노시는 헝가리에서 도주하던 중 사망헀고, 비테츠 야노시 대주교는 교구 밖으로 나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얼마 후 비테츠 야노시가 사망하자, 마차시는 베켄슬로르 야노시를 에스테르곰의 새 대주교로 선임했다.

1472년, 마차시는 프리드리히 3세에게 반기를 든 오스트리아 귀족들을 지원했다. 1473년 마차시, 카지미에시 4세, 블라디슬라프는 평화 협상에 들어갔지만 합의를 보지 못했다. 그는 수 십개의 작은 공국들로 구성된 슬레스코 정부를 통합하고 총사령관을 세우려 했지만, 슬레스코 귀족들은 그가 내세운 리그니츠 공작 프리드리히 1세를 총사령관으로 받들기를 거부했다. 1474년 2월, 마차시와 블라디슬라프 사이에 3년간의 휴전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1474년 3월 블라디슬라프는 프리드리히 3세, 카지미에시 4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를 재차 적대했다. 카지미에시 4세와 블라디슬라프는 그해 10월에 슬레스코를 침공하여 브라티슬라프에 있던 마차시를 포위했으나, 마차시가 청야 전술을 구사하는 바람에 식량 공급에 차질을 겪은 끝에 퇴각했다. 그 후 슬레스코 귀족들은 마차시가 새로운 총사령관 후보로 내세운 서포여이 이슈트반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모라바 귀족들도 치보르 토바초프스키를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 토바초프스키는 블라디슬라프 국왕의 친척이었지만, 마차시는 이들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1476년, 글로가우 공국의 공작 하인리히 11세가 사망했고 아내인 브란덴부르크의 바르바라가 공국을 상속받았다. 블라디슬라프는 그 해에 바르바라와 결혼함으로써 글로가우를 자신의 영지로 삼았다. 그러나 마차시 1세의 지원을 받은 하인리히 11세의 조카 요한 2세가 글로가우로 쳐들어와서 바르바라를 몰아냈다. 블라디슬라프는 글로가우를 탈환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3세와 손잡기로 했다. 교황 특사 발다사레 데 피사로부터 마차시의 영토를 침범한다면 파문하겠다는 위협을 받았지만, 그는 이를 무릅쓰고 1476년 12월 5일 또다시 프리드리히 3세와 손잡고 마차시와 전쟁을 단행했다. 그 후 슬레스코와 모라바 연합과의 전쟁에서 고전하던 블라디슬라프는 헝가리에 평화 협정을 맺차고 요청했다. 양자간의 협상은 수 년간 진행되었으나 별 진전이 없다가 1478년 1월 15일, 발다사레 데 피사는 마차시와 전쟁을 벌였다는 이유로 블라디슬라프와 추종자들을 파문하자 재협상이 진전되어 1478년 3월 28일에 최종적으로 합의되었다. 이 협약에 따르면, 마차시와 블라디슬라프 모두 보헤미아 왕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보헤미아 본토는 블라디슬라프의 권위를 인정하고 모라바와 슬레스코, 루지체는 마차시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들은 7월 21일 올로모우츠에서 열린 회의에서 평화 협약을 비준했다.

1477년 6월 10일, 프리드리히 3세는 블라디슬라프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공인했다. 이틀 후, 마차시가 프리드리히 3세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니더외스터라이히를 침공했다. 블라디슬라프는 프리드리히 3세에게 지원군을 보냈지만, 적의 기세가 워낙 강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자 7월 말 이전에 오스트리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프리드리히 3세는 빈에서 헝가리군에게 포위되자 12월 1일 마차시 역시 보헤미아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했다.


3.4.2.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편집]


1471년 오스만 제국이 네르트바 강을 따라 있는 헝가리 요새를 점령하자, 마차시는 우일러키 미클로시를 보스니아 왕으로 지명하여 해당 지역의 방위를 맡겼다. 백양 왕조샤한샤 우준 하산이 반 오스만 동맹을 제안했지만, 그는 보헤미아 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을 함부로 적대하지 않기로 하고 거절했다. 1474년 1월, 스메데레보의 베이인 알리 베이 미할로를루가 헝가리 동부 지역을 약탈하고 너지바러드를 파괴한 뒤 16,000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환했다.

1474년 말, 오스만 제국군이 본격적으로 왈라키아와 몰라비아를 침공했다. 마차시는 즉시 증원군을 몰다비아 공국슈테판 3세에게 파견했고, 헝가리-몰다비아 연합군은 1475년 1월 10일 바슬루이 전투에서 약탈을 자행한 뒤 막대한 전리품을 끌고 귀환하던 오스만 제국군을 섬멸했다. 이후 몰다비아 공국은 마차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봉신이 되었다. 마차시는 메호메트 2세의 화평 제안을 묵살하고 오스만 제국으로 쳐들어가 1476년 2월 15일 사바 강의 중요한 요새인 샤바츠를 점령했다.

1476년 여름, 메흐메트 2세가 몰다비아를 상대로 원정을 개시했다. 그는 그해 7월 26일 발레아 알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식량 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퇴각했다. 이때 마차시가 파견한 블라드 3세가 이끄는 왈라키아 보조군이 몰다비아에서 슈테판 3세와 합세했고, 왈라키아-몰다비아 연합군은 1476년 8월 시레트 강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당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헝가리로 망명했던 블라드 3세는 시레트 강 전투에서 승리한 뒤 헝가리와 몰다비아의 지원에 힘입어 당시 왈라키아 공작 바사라브 3세를 물리치고, 다시 왈라키아 공작으로 복위했다.

1479년 말, 오스만 제국군이 바사라브 3세를 앞세워 사시즈바로스(현재 루마니아의 오레슈티)를 공략하고 파괴했다. 이에 몰다비아 공작 슈테판 3세와 헝가리 장군 팔(Pál Kinizsi)이 반격에 나서 10월 13일 브레드필드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궤멸시켰다. 마차시는 남부 국경의 방위를 개선하기 위해 도나우 강을 따라 난도르페헤르바르 서쪽에 있는 모든 요새의 지휘권을 팔 키니시에게 맡겼다. 1480년 초, 마차시는 블라드 3세를 처단하고 왈라키아를 장악한 뒤 오스만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바사라브 3세를 응징하기 위해 왈라키아를 침공한 슈테판 3세에게 지원군을 보냈다. 또한 쇠레니바르[8], 난도르페헤르바르, 샤바츠, 스레브레니크, 야이체 요새를 중심으로 5개의 바나트 또는 '방어 주'를 세웠다.

1481년 5월 3일, 오스만 파디샤 메흐메트 2세가 사망했다. 그 후 바예지트 2세와 젬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젬은 내전에서 패한 뒤 로도스로 피신해 그곳을 관리하고 있던 구호 기사단의 보호를 받았다. 마차시는 바예지트 2세와의 협상에 써먹기 위해 자신이 젬을 보호하겠다고 주장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과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1481년 말, 헝가리 보조군은 마차시의 장인인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를 지원해 나폴리 왕국이 오스만 제국군에게 빼앗겼던 오트란토를 탈환하는데 기여했다. 그 후 마차시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전념하기 위해 1482년 바예지트 2세와 5년 휴전 협약을 체결했다.


3.4.3. 오스트리아와의 전쟁[편집]


1476년 초, 에스테르곰 대주교 베켄슬로르 야노시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헝가리에서 빈으로 도망쳤다. 그는 에스테르곰 교구의 금고를 가지고 가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제공했다. 이에 마차시는 황제가 대주교를 선동해 이런 비열한 짓을 벌였다고 비난했다. 1477년 3월 튜튼 기사단, 바르미아 대주교단과 동맹을 맺은 마차시는 프리드리히 3세를 상대로 선전포고했다. 헝가리군이 니더외스터라이히를 침공하여 빈을 봉쇄하자, 프리드리히 3세는 블라디슬라프에게 지원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후 교황 식스토 4세, 베네치아 공화국,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중재로, 마차시는 12월 1일 프리드리히 3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황제는 마차시를 보헤미아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하고, 그에게 100,000 플로린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가 배상금의 절반만 지불하고 나머지를 내지 않으려들자, 마차시는 1479년 3월 26일 스위스 연방과 일련의 협약을 체결해 신성 로마 황제의 스위스 용병 모집을 방해했다. 여기에 잘츠부르크 대주교 베른하르트 2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가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에 있는 대주교령의 요새를 소유하는 것을 승인받았다. 1482년 1월, 검은 군대가 하인부르크 안 데어 도나우를 포위 공격했다. 그해 4월 프리드리히 3세에게 선전포고한 마차시는 6월 말부터 하인부르크 공방전을 지휘해 10월에 함락시켰다. 그 후 그가 통솔하는 검은 군대는 3개월 동안 장크트 바이트 안 데어 글란(Sankt Veit an der Glan), 엔체르스도르프 데어 피샤(Enzersdorf an der Fischa), 쾨세그를 공략했다. 교황 특시 바르톨로메오 마라스키는 마차시와 프리드리히 3세간의 평화 협약을 중재하려 했지만, 마차시는 이를 거부했다.

1485년 1월, 검은 군대가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빈을 포위했다. 5개월간 이어진 공방전 끝에, 6월 1일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빈이 넘어갔다. 마차시는 빈에 입성한 뒤 왕실을 이곳으로 옮기고, 니더외스터라이히의 귀족들을 빈으로 불러들인 뒤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강요했다. 1486년 2월 16일, 헝가리를 피해 빈에서 탈출하여 린츠로 피신했던 프리드리히 3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7명 중 6명을 설득해 자신의 아들 막시밀리안독일왕으로 선포하게 했다. 그러나 보헤미아 왕으로서 선거 권한이 있던 블라디슬라프나 마차시는 동의하지 않았다. 마차시는 블라디슬라프를 초대해 그해 9월 이흘라바에서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보헤미아 귀족들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블라디슬라프는 곧 마음을 바꿔 막시밀리안의 독일왕 선출을 인정했다.[9]

마차시는 이후에도 프리드리히 3세를 상대로 공세를 이어갔다. 검은 군대는 라안데어타야와 슈타인을 포함한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여러 도시를 점령했고, 마차시는 니더외스터라이히를 다스리기 위한 재판소를 세웠다. 1487년 에벤푸르트(Ebenfurth)에서 열린 니더외스터라이히 의회에서 오스트리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빈 대교구의 관리자인 서포여이 이슈트반을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점령한 도시와 요새의 수비를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장군들에게 맡겼다. 그 외의 행정은 프리드리히 3세 밑에서 일하다가 자신에게 복종한 오스트리아 관리들에게 맡겼다. 비너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는 니더외스터라이히의 도시들 중 유일하게 마차시에게 끝까지 항전했으나, 1487년 8월 17일에 끝내 함락되었다.

작센 공작 알브레히트 3세[10]가 헝가리군을 격퇴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이르자, 마차시는 그와 협상을 벌인 끝에 1487년 12월 16일 쾰른에서 6개월간의 휴전 협정을 맺었다. 마차시는 뒤이어 프리드리히 3세와 아들 막시밀리안에게 헝가리 왕을 자처하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후계자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답변을 수 년간 미루었고, 마차시는 이들을 압박하고자 린츠로의 공세를 준비했으나 도중에 통풍에 걸려 쓰러지자 계획을 취소했다.


3.5. 말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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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인 1489년 판도. 오스트리아 대공 영지가 포함되어있다.
마차시는 말년에 신하들이 반역을 꾸몄다고 의심해 숙청을 여러 차례 단행했다. 1484년 대주교 바라디 페테르를 투옥했고, 1485년 보헤미아 재상으로서 모라바와 슬레스코를 관할하던 야로슬라프 보스코비치를 처형했다. 1487년, 마차시는 사생아인 코르빈 야노시에게 영지를 마련하기 위해 글로가우 공국을 공략하려 했다. 이때 그는 글로가우 공작 요한 1세의 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반피 미클로시를 투옥했다. 요한네스 1세는 이에 맞서 뮌스터베르크 공작 인드르지흐 포데브라트와 동맹을 맺었으나, 1487년 12월 검은 군대에게 패배하고 글로가우를 내줬다.

한편, 교황령에 속한 안코나 시민들은 마차시가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기를 바라며 헝가리 국기를 게양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항의했지만, 마차시는 자신이 안코나를 지켜주면서 교황령을 도와주겠다며 안코나를 돌려주지 않았다. 여기에 교황령과 베네치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장인이자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에게 지원군을 보냈다. 또한 1482년에 맺었던 오스만 제국과의 휴전을 1488년에 2년 연장했으며, 에르데이의 2개 영지를 몰다비아의 슈테판 3세에게 수여했다.

1489년 3월 이후, 마차시는 통풍을 앓으면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3세에게 자신의 아들 코르빈 야노시를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왕으로 인정해준다면 오스트리아에서 철수하고 막시밀리안이 새 황제로 등극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으나,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1490년 4월 6일, 32년간 왕국을 이끈 군주는 빈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장례식은 슈테판 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유해는 1490년 4월 24일 또는 25일에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4. 후계 문제[편집]


마차시는 1455년 12살의 나이로 첼레 백작 울리크 2세의 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1455년 말에 원인 불명의 질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보헤미아의 후스파 권력자이자 나중에 국왕으로까지 선출되는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의 딸 카테리나와 1461년에 결혼했으나, 카테리나마저 1464년 1월 또는 2월에 태아를 낳던 중 아기와 함께 사망했다. 그 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와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등 여러 군주들과 결혼 동맹을 제안했지만 좀처럼 성사되지 못했다.

1474년 10월 30일, 마차시는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딸 베아트리체와 약혼하고 1476년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녀는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로, 남편을 구슬려서 신하들이 왕의 처소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고 오직 시종을 통해서만 국왕에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했다. 마차시는 그녀를 맞이한 이래로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는 르네상스에 많은 관심을 가져 헝가리에 르네상스가 퍼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다.

마차시는 1473년 니더외스터라이히 슈타인 시의 유지의 딸인 바르바라 에델푀크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코르빈 야노시를 낳았다. 그는 본래 이 아이를 교회에 보낼 생각이었지만, 정실 왕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좀처럼 보지 못하자 마음을 바꿔 왕위 계승자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1470년대 중순에 코르빈 야노시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로스 성을 영지로 주는 것을 시작으로 글로가우 공작을 검은 군대로 몰아내고 그 땅을 영지로 줬으며, 슬레스코 일대의 여러 영지를 추가로 주고 헝가리 왕국의 모든 요새 사령관들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여기에 더해 밀라노 공작의 딸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와의 결혼을 주선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심지어 코르빈 야노시의 어머니 바르바라 에델푀크를 궁정에 초대해 왕실의 일원으로 삼았다.

베아트리체 왕비는 남편의 이같은 조치에 분노해 바르바라와 코르빈 야노시 모자를 상대로 첨예한 갈등을 벌였다. 말년에 죽음을 눈앞에 둔 마차시는 베아트리체의 형제이자 칼라브리아 공작인 알폰소에게 "헝가리 사람들은 여자가 이끄는 정부에 복종하는 것보다 끝까지 싸우다 죽기를 택할 것이다"라며 베아트리체를 설득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끝내 코르빈 야노시를 양자로서 받아들이라는 남편의 권고를 듣지 않았고, 마차시는 후계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 후 헝가리 의회는 코르빈 야노시를 왕으로 받들어달라는 마차시의 유언을 묵살하고,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전 국왕 울라슬로 1세의 친조카이자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아들인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를 새 국왕 울라슬로 2세로 옹립했다. 그리하여 후녀디 왕조는 1대만에 단절되었고, 헝가리는 마차시 사후 36년만에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했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문명 6에서는 두 번째 확장팩 몰려드는 폭풍에서 헝가리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마차시 1세라는 헝가리어 이름이 아닌 라틴어 이름 마티아스 코르비누스로 등장한다.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도 등장. 능력치는 행정-외교-군사순으로 456을 찍는 개사기 군주. 1445년 의회 이벤트에서 후녀디 야노시를 섭정으로 삼고 그가 죽은 뒤에 이벤트가 발생해 군주로 삼을 기회가 생기는데 능력치가 하도 좋다보니 오스트리아 공작 브와디스와프 선택지는 대부분 버려지고 역사대로 마차시가 군주로 선택되는 편이다.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에서도 등장. 한창 신성 로마 제국과 전쟁하던 중에 밀라노에서 휴전 협정을 제안하자 불쾌해하지만 곧 이것이 베네치아 멸망전을 벌이기 위한 것임을 알고 휴전에 동의한다. 이후 검은 군대를 이끌고 이스트리아 반도를 공격해 베네치아의 전력을 분산시켜 주며 전쟁의 결과로 이스트리아와 달마티아를 얻어낸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재건되고 종교 개혁이 이루어져 개혁교회가 설립되자 귀족들을 견제하고 사생아인 아들의 계승을 위해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 되기를 자처하고 신성 로마 제국과의 대타협으로 보헤미아의 왕이 되며 모라비아를 제외한 보헤미아 지역을 신성 로마 제국에게 돌려주고 크라인 공국을 얻으며 자신의 아들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녀의 약혼까지 이뤄낸다.[11] 이후 개혁교회를 받아들여 왕국내 귀족 세력 일소에도 성공해 완전한 중앙집권을 이룩해낸다. 이후 동로마가 제국 수복 전쟁을 선언하자 거기에 참전하는데 참전 목적은 원역사에서 죽은 때와 가까워져서 자신의 몸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자신의 유일한 자식인 야노시 코르빈에게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를 정복해서 넓어진 헝가리 왕국이라는 마지막 선물을 주기 위한 것. 이후 제국 수복 전쟁에서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를 정복했으며 원역사보다 4년을 더 살고 있다. 이후 프랑스가 이탈리아에 진입하자 주인공을 지원을 청하는데 10년전의 약속을 지킬 기회라며 즉각 기병 2만을 동원해 사보이아 공국으로 향해 밀라노군을 도와 프랑스군을 박살내버린다.

6. 기타[편집]


헝가리 1000포린트 지폐의 인물이다.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Hősök tere) 14인의 동상 위인 중 1명이다.

루마니아의 국가 루마니아인이여, 깨어나라!에서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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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이나 활동했던 시기가 비슷한 메디치 가문의 검은 군단과는 별개의 군대. 메디치 가문의 검은 군단은 그들을 고용한 교황이 죽자 팔에 검은 띠를 두른 것에서 부대명이 유래했으며 마차시의 검은 군대는 검은 빛의 갑옷을 입어서 검은 군대라 불렸다는 설과 마지막 지휘관이던 하우크비츠의 별칭인 검은 하우크비츠에서 따왔다는 설, 너무나 약탈을 많이 해서 생긴 악명으로 말미암아 검은 군대라 불렸다는 설등 다양한 설이 있다. 이들은 1458년부터 1494년까지 활동하였으며, 처음 창설되었을때는 6~8천 정도로 시작했으나 점점 수가 늘어나 1485년이 되면 2만 8천 명까지 늘어났는데 그 중 기병만 2만에 달했다. 오스만 제국과 헝가리를 제외하면 동시대에 상비군을 두었던 유일한 유럽 국가인 프랑스는 가장 규모가 컸던 15세기 후반을 살펴보아도 겨우 4천 명에 불과했다는 걸 생각하면 2만 8천명은 엄청난 수치다. 또한 검은 군대는 중기병에 경기병, 보병까지 다양한 병종을 두었으며 총기를 받아들인 반면, 프랑스의 4천명은 몽땅 중기병이었다는 점도 다르다. 본디 검은 군대는 독일인, 보헤미아인, 세르비아인, 폴란드인과 같은 외국인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지만 1480년부터는 헝가리인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들이 해체되고 얼마 안가 헝가리가 조져진 탓에 왜 해체했냐는 비판도 있지만 헝가리 귀족들 입장에서도 나름 할 말은 있었는데 너무나도 많은 유지비로 귀족과 평민 모두의 부담이 가중된 상태라 그 부담을 줄여야 했고 오스만의 잦은 국경 약탈로 대규모 상비군보단 빠른 국경 방어에 걸맞는 속도와 효율을 갖춘 군대의 가치가 커지는 방향으로 전장 페러다임이 교체되면서 그에 따른 변화가 필요해졌기 때문이었다.[2] 오늘날 베오그라드세르비아의 수도지만, 당시에는 헝가리 남부의 가장 크고 중요한 요새가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3] 현재 세르비아 푸토그(Футог).[4] 베틴 가문의 초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동생으로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공동 설립자.[5] 현재 루마니아 리포바(Lipova).[6] 현재 오스트리아 귀싱(Güssing).[7] 현재 루마니아 클루지나포카의 마나슈투르 지구.[8] 현재 루마니아의 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9] 어차피 황제(독일왕) 선거는 만장일치가 아니라 과반수였기 때문에 블라디슬라프가 승인하건 말건 막시밀리안의 독일왕 선출은 인정되었다.[10] 에른스트의 동생으로 베틴 가문 알브레히트계의 시조.[11] 어찌보면 역사의 가장 큰 분기점인게 원역사에서 마차시 1세는 사생아인 야노시 코르빈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으나 왕비와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는데 여기서는 동로마의 봉신이 되면서 그 계승법을 따라갈 수 있다는 명분이 생겼고(마침 동로마의 황태자도 사생아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녀와 아들을 약혼시키면서 합스부르크도 야노시를 지지하게끔 만든 것이다. 동로마+신성로마라면 나폴리 공주 출신인 왕비와 헝가리 귀족들을 따위로 만들어버릴 권위를 지니고 있는지라 군소리없이 야노시를 지지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반발한 귀족들은 폴란드 왕실을 끌어들이려다 검은 군대에게 대가리가 터졌으며 왕비도 본가인 나폴리 왕가가 루도비코 스포르차와의 내전에서 패해 나폴리 왕위를 상실하며 자신을 도울 힘이 없어져버려 사생아의 계승에 어거지를 놓을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