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다 세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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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가수이자 배우이며 1980년 4월, 18세의 나이에 싱글 <맨발의 계절>로 데뷔했다.
일본에서의 애칭은 세이코의 신분인 오히메사마(お姫様), 또는 세이코의 이름을 줄여 세코탄(セコたん)으로 불리며 한국에서의 애칭은 세이코(聖子)를 음독한 '성자', 혹은 세이코의 본명 노리코(法子)를 음독한 법자로도 가끔 불리기도 하지만 젊은 여성팬들 사이에선 일본의 오히메사마(お姫様)를 번역해 '공주님'이나 세코탄으로 불린다.
음반 총판매량 2,963만 장으로 쇼와 시대 가수 중 총판매량 1위를 기록했으며 역대 가수 중 15위를 차지했다.[7]
2. 연예계 활동[편집]
2.1. 데뷔까지[편집]
부친이 고위 공무원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집안은 좋았다. 친가인 카마치 가는 후쿠오카 현 지역에서 꽤 전통 있는 명가로, 현재 야나가와시에 해당하는 야나가와성의 성주 가마치 아키모리의 삼남인 카마치 무네야스의 후손이자 에도 시대에는 야나가와번의 12만석의 다이묘였던 타치바나 씨의 가로(家老, 최고 가신) 집안이었다.
외가도 마을의 촌장인 쇼야(庄屋) 집안으로 명가였다. 위로는 8살 연상인 오빠 카마치 미츠히코가 있었는데, 명문대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태어날 당시 난산이었기 때문에 가사 상태였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소아 천식이 있는 등 어린시절엔 몸이 약했기 때문에 부모님의 걱정을 샀다고 한다. 아라키 중학교를 나와 미션스쿨 신아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도쿄로 상경해 연예 활동이 가능한 호리코시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1978년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유수한 연예인들을 배출한 '미스 세븐틴 콘테스트'에서 사쿠라다 준코의 '気まぐれヴィーナス'(제멋대로 비너스)를 녹음한 데모 테이프를 보내 지방 예선에서 우승. 같은 나이의 세이코가 동일한 곡을 불러 녹음한 다른 데모 테이프 데뷔 당시의 캐치 프레이즈는 '끌어안고 싶어! 미스 소니'. 당시 세이코가 다니던 학교는 규정이 엄격한 미션스쿨이라 연예계 데뷔나 오디션을 나가면 퇴학을 당하는 학교였고다녔던 학교에 대해 말하는 세이코 인터뷰(52초부터), 엄격한 집안에서 자라 가수 데뷔에 대한 부모의 반대가 심하였지만[8] 세이코의 노래를 들은 소니 측에서 "이 아이는 반드시 팔린다."고 확신하여 스카우트되었다.
처음에는 가수로 데뷔할 생각이 없었으나 어릴 적부터 놀이터와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막대기를 마이크 삼아 노래를 불렀고, 직접 카세트테이프에 학창 시절 유행했던 캔디즈나 이시노 마코 등의 아이돌 노래를 모창하는 것을 녹음할 정도로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결정적으로는 1977년 고향인 구루메 시의 사진관 촬영 모델에 응모하여 선출된 것을 계기로 연예계를 목표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데뷔 이후의 탄탄대로와는 다르게 앞서 언급했듯 데뷔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1978년 '미스 세븐틴 콘테스트'에서 사쿠라다 준코의 '気まぐれヴィーナス'(제멋대로 비너스)를 불러 규슈 예선에서 우승했으나 엄격한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로 데뷔가 무산된 것. 그리하여 1년간 부모님을 설득하여 허락받은 끝에 고교 졸업 이후 데뷔하여 보통 데뷔 시기가 10대 중반이었던 여타 아이돌에 비해 다소 늦게 데뷔하였다.
규슈 예선에서 그 목소리에 감탄해 세이코를 발굴해 낸 CBS소니의 음악 프로듀서 와카마츠 무네오(若松宗雄)의 소개를 통해 1978년, 대형 연예 기획사인 와타나베 프로덕션 산하인 음악학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소속사 측은 본사에서 보내져온 데모 테이프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고 O자 다리처럼 찍힌 시골 소녀 느낌이 나는 스타일이 안 좋았던 당시의 프로필 사진만 보고 기획사 채용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79년, CBS소니의 와카마츠 무네오는 그녀가 다른 5개의 소속사에 거절당하자 마지막으로 이후 세이코의 커다란 인연이 되는 선 뮤직 프로덕션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9] 를 직접 만나 세이코를 적극 추천하였다.
그러나 아이자와 사장과 중역이었던 후쿠다 토키오[10] 또한 그녀의 계약을 보류한 상태였다.
최초에 선 뮤직 측은 마츠다 세이코를 아이돌로서 세일즈하려는 생각조차 없어서 다른 소속사와 같이 거절하려고 했고, 데뷔하고나서도 CF에 얼굴을 비추는 대신 다른 연예인을 기용할 정도로 기대치가 낮았다고 한다.
하지만 데모 테이프를 들은 소속사 측은 좋은 목소리와 가창력을 높히 평가하여 후쿠다 전무가 세이코가 사는 구루메 시의 자택까지 찾아서 완강한 부모님을 설득[11] 해냈고, 데뷔 후 3년 동안 잘되지 않으면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한 후 완전히 허락을 받았다. 이후 그해 고등학교 3학년 여름에 직접 도쿄로 상경한 세이코 본인의 가창력과 의지를 보고 나서야 극적으로 계약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가족이 있는 고향을 떠나 1979년 도쿄로 상경한 세이코는 소속사를 선 뮤직 프로덕션으로 옮겨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의 집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연예활동이 허가되는 호리코시 고등학교로 전입.
우여곡절 끝에 소속사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이 당시의 선 뮤직은 사쿠라다 준코를 배출해냈긴 하지만 비교적 소형 기획사였고, 세이코보다 앞서 2년 동안 다른 신인을 데뷔시키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고 스카웃한 나카야마 케이코(中山圭子)라는 기대주의 대형 신인이 데뷔를 앞두고 있어 세이코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언제 데뷔할지 불투명한 상황이었으나 정작 세일즈 성적이 좋지 않아 소속사가 난관에 빠지자 다음 타자라는 카드를 꺼내든 소속사 측과 세이코 본인의 강한 의지를 본 나카야마 케이코가 양보를 해주어 겨우 데뷔할 수 있었다고 한다.
2.2. 데뷔 후 ~ 90년대[편집]
2번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3번째 결혼, 출산, 수많은 루머와 스캔들을 이겨내고 데뷔부터 44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아이돌이라 불리고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 영원의 아이돌.
음반은 1980년부터 1988년까지 24곡 연속으로 오리콘 차트 1위를 달성. 이는 당시 9곡 연속 오리콘 1위를 달성했던 핑크 레이디의 신기록을 화끈하게 갱신한 것으로, 이후 B'z가 25곡 연속 1위로 갱신하기 전까지 초유의 기록이었다.
1980년대는 일본의 경제적 호황에 힘입어 아이돌 붐이 장기간 지속되었던 시기였는데,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아이돌 중에서도 인기는 그야말로 당해낼 자가 없을 만큼 압도적이어서 당시 대항마라고 할만한 아이돌이 없었는데 데뷔 시기가 다르지만 유일한 인물로는 나카모리 아키나가 있다.
두 사람의 음악적 스타일이 판이해서 더욱 부각되었으며 세이코는 해의 아이돌, 아키나는 달의 아이돌이라는 타이틀로 아직까지도 일본 연예계의 대표적인 라이벌로 손꼽히지만 방송계가 만들어 낸 라이벌 구도일 뿐 정작 본인들의 사이는 좋다.
이 둘은 80년대 아이돌의 대명사로 당시 아이돌들 중 2~3천만 장 가량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다. 단순히 가수로서뿐만이 아니라 본인의 이름을 딴 머리스타일, 일명 세이코쨩 컷과 세이코의 방송 이미지에서 유래된 말인 부릿코 등 여러 가지를 유행시키며 수많은 전설들을 남겼다.
그녀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음악은 나츠메로라는 1980년대 아이돌의 음악 장르로 밝지만 무게감 있는 목소리, 단지 목소리와 가창력으로만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충분했다.
마츠다 세이코를 발굴해 낸 와카마츠 프로듀서는, 그녀를 발탁한 이유가 무엇보다 목소리의 '투명감', '세기', '오락성', '지성'이라고 얘기했으며 데뷔 초기의 힘 있고 스트레이트한 창법은 당시 활동했던 시기부터 후대까지도 높게 평가 되고 있다.
또한 오오타키 에이치, 호소노 하루오미 등등 일본의 음악씬에서 빼놓을 수 없는, 1980년대 당시 일본 뉴뮤직의 선구주자였던 각종 최고의 뮤지션들의 역량이 집결된 정규 4집과 5집 앨범은 일본 팝 역사에 남을 명반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데뷔 초기의 악곡들은 주로 현재도 현역으로 활동중인 작사가 미우라 요시코(三浦徳子), 작곡은 오다 유이치로(小田裕一郎)로 밝고 풋풋하며 활기찬 소녀의 이미지를 그렸고, 이후부터는 작사가 마츠모토 타카시[12] 가 1981년부터 세이코의 작사가로 발탁됐다. 싱글 뿐만 아니라 앨범의 수록곡도 전부 작사했으며, 작곡가, 편곡가도 본인이 직접 섭외하는 등 프로듀싱적인 일도 담당했다. [13] 작곡은 마츠토야 유미[14] 가 맡아 섬세하고 달콤한 감정의 여성의 이미지를 그리며 수많은 곡들을 만들어 내고, 또 히트시켰다.
목소리는 데뷔 초 일정한 무게감이 있는 시원스런 목소리였으나 가혹한 스케줄로 목을 혹사 당해 성대결절이 생겨 노래 부를 때의 목소리가 변했다,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노래를 불렀다고 생각하면 된다. 한창 인기가도를 달리던 81~82년 경 영상을 보면 고음을 힘겨워 하는 모습과 음이탈이 나는 세이코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목소리가 변하고 쉽게 올라가던 음역대가 올라가지 않아 이 부분에 대해서 엄청난 좌절을 했었다고 한다. 1981년 연말 '바람이 부는'의 무대 영상을 보면 결국 정신적, 육체적 피로, 성대결절로 인해 무대 도중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후 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부터 창법을 바꿔 전과는 다른 간드러지는 하이톤으로 변하게 되었다. 일명 캔디보이스. 특히 고음 부분에서 큰 차이가 나는데, 데뷔 초엔 시원하고 묵직하게 뻗어나가는 고음이었다면, 이후로는 고음을 얇고 부드럽게 내는듯한 느낌이 난다.
전성기에는 매우 빡빡한 일정을 감당해야 했기에 곡을 받아서 연습을 할 시간이 없이 음반 녹음 당일 데모곡을 듣고 바로 녹음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겨우 2~3번 데모곡을 들었음에도 곡을 이해하고 금세 불렀기 때문에 프로듀서들에게 '감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0년 4월 '맨발의 계절'로 데뷔하여 데뷔 3개월여만인 7월에 이미 5,000여명의 팬클럽 인원이 모였다. 동년 8월 '푸른 산호초'로 일본 레코드 대상 신인상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10개의 각종 신인상을 독차지하며 데뷔 1년이 채 지나지않아 당시 전국 아이돌 인기의 바로미터라 불린 브로마이드 포스터 판매량이 1위로 오르게 되었다.
1985년 결혼과 1986년 출산 이후 활동 당시 부모님께 딸의 육아를 부탁하였는데 보수적이었던 80년~90년 초반 사회에서는 무책임한 어머니, 드센 아내라며 숱한 돌려까기와 신랄한 비난을 받았고 심지어 밤의 히트 스튜디오 MC들에게 대놓고 이지메를 당했다.
이 당시 콘서트에서 세이코는 팬들에게 여러분들이 더 이상 저를 원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어요, 그래서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응원과 힘이 되어준 여러분들에게 보답하고 싶어 두렵지만 나섰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결국 눈물을 터트렸고 세이코가 힘들었을 걸 아는 팬들도 세이코의 말을 듣고 눈물을 터트렸다.
팬들의 응원에 힘 업어 마츠다 세이코는 의지를 멈추지 않고 해외 진출을 하는 등 당당한 모습을 보여 이후 많은 여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성공한 여성, 커리어 우먼의 아이콘이 되었다. 선 뮤직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가 말하길 그때의 세이코는 "마음만 먹으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성격이었다. 나도 그런 면이 있긴 했지만 세이코는 그 이상이었다."고 표현했다.
"온갖 루머와 인신공격으로 힘들어도, 부상이 있어 휠체어에 앉아 노래하는 한이 있어도 팬들과의 약속은 절대 져버리지 않는 프로 중의 프로."라는 평판이 나올 정도.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작사와 작곡, 프로듀싱까지 본인이 직접 하며 아티스트의 영역으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96년 본인이 직접 작사를 맡은 싱글 'あなたに逢いたくて〜Missing You〜'(당신과 만나고 싶어서~Missing You~)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밀리언셀러를 달성하며 역대 최고 판매량인 110만 장 판매는 물론, 약 8년 만의 초동 1위 달성으로 셀프 프로듀싱 또한 재능을 빛냈다.
'소중한 당신', '빛나는 계절로 떠나자', '이별의 순간' 등을 직접 작사하고 히트시켜 단순 아이돌이 아닌 아티스트로 거듭해 셀프 프로듀서의 능력도 인정받았다.[15] 작사가로서는 개인적인 감정을 적나라하게 투영하는 가사, 아니면 매우 긍정적인 가사를 자주 쓴다. 작곡가로서는 장조의 곡을 좋아하는 경향이 보인다.
2.3. 2000년대 이후[편집]
2006년 이전에 발매한 74매의 CD를 엮어 만든 10만엔대의 초고가 앨범 'seiko matsuda'의 판매량은 2억엔을 기록.[16]
이 전까지 앨범 판매량에서 최고액의 앨범으로 기록된 건 전설적 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6만엔대 앨범이었는데 이 기록을 16년 만에 갱신하였다. 발매 예정이었던 1만 세트를 모두 완매시켜, 판매량만 10억엔이 넘었다고 한다.
2010년에는 일본 게닌그룹 야지마 미용실과의 콜라보로 '아이돌처럼 노래하게 해 줘'를 발매. 뮤비에서 당시 47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컨셉으로 역시 영원한 아이돌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SMAP×SMAP, 뮤직페어 등에 출연해서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2014년에는 처음으로 홍백가합전의 오오토리(마지막 무대)를 맡았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프로그램의 엔딩을 장식하는 것으로 가수들에게는 매우 영광스러운 자리. 겨울왕국의 안나 역을 더빙한 딸 칸다 사야카도 홍백가합전에 함께 출전하게 되어 딸의 무대를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부른 곡은 본인의 작사곡이자 최대 히트곡인 'あなたに逢いたくて〜Missing You〜'(당신과 만나고 싶어서~Missing You~)로 출연 시 47.5%라는 순간 최고 시청률로 1위를 기록해 50대 중반에도 식지 않는 인기를 자랑하였다.
이때, 동시대에 활동하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2010년대 들어 활동 휴지를 선언한 나카모리 아키나가 시련을 딛고 홍백가합전에서 복귀를 선언해 80년대의 가희 두 사람이 오랜만에 한 무대에 서게 되었는데[17] 세이코는 당해년도에 처음으로 홍백의 '오오토리'. 즉 피날레 무대를 맡았고 시청률이 뜨자 기자들은 '세이코, 아키나에게 압승'이라는 등의 헤드라인을 뽑아냈다.[18]
2014년, 2015년에는 홍백가합전 첫 출장이었던 1980년 이후로 한 번만 맡아도 영광이라는 NHK 홍백가합전의 오오토리(마지막 무대)[19] 를 2년 연속으로 맡는 영예를 안았다.
2016년에는 이례적으로 X JAPAN의 Yoshiki에게 제공받은 곡인 '薔薇のように咲いて 桜のように散って'(장미처럼 피어나 벚꽃처럼 지네)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인기몰이를 했다. 2017년부터는 새로운 도전으로 'SEIKO JAZZ'라는 이름의 재즈 콘서트를 열고있다. 기존의 재즈 넘버들을 커버하여 부르는 콘서트라고 한다.
2020년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4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 이벤트를 준비하였으나, 코로나 19로 인해 콘서트가 전면취소되는 등 악재를 겪었다. 9월 30일 정규앨범을 발매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하였다. 또한 37년만에 여름의 문과 같은 여러 히트곡을 작곡한 자이츠 카즈오와 재회하여 "바람에 맞서는 한 송이의 꽃(風に向かう一輪の花)"을 발매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2021년 4월 1일, 데뷔 41주년을 기념하여 푸른 산호초 리메이크 버전을 발매하였다.
2021년 6월 2일과 10월 7일, 데뷔 41주년을 기념하여 시간 나라의 앨리스, 눈동자는 다이아몬드의 셀프커버를 발매하였다.
2021년 10월 20일, 위의 셀프커버곡과 체리 블로섬, "시간여행"의 셀프커버를 추가해서 SEIKO MATSUDA 2020의 자매 앨범인 SEIKO MATSUDA 2021을 발매하였다. 셀프커버 5곡, 신규발매 5곡 수록.
만 18세에 데뷔한 이래로 6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매년 콘서트를 열고 있다. 90년대 말에는 디너쇼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공연마다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고 있는 세이코는 1992년부터 매년 12월 31일의 연말 디너쇼를 진행하고 있으며, 그 티켓 또한 한화 48만원, 4인 세트는 무려 220만원에 이를 정도로 일본의 모든 연예인들 중에서도 탑클래스의 부류에 들지만 발매하는 즉시 완매하며 끊이지 않는 인기를 과시하고 있다.
매년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투어를 돌고 앨범을 내는데, 쇼와 아이돌의 대명사인 만큼 여전히 최전성기 시절과 다름없이 2만 명 가까이 수용할 수 있는 무도관과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공연을 할 정도로 충성심 깊은 팬층이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 것이 특징.
콘서트의 마지막 순서인 '80년대 히트곡 메들리' 코너에서는 그 충성심 높은 팬들의 떼창을 감상할 수 있는데, 젊은 여성팬들의 목소리도 꽤 많이 들린다. 세이코가 여름의 문을 가창하면서 무대의 좌우를 뛰어다니며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마무리되는 것이 최근 10년 간 콘서트의 의례이다.
그러나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가운데 2021년 12월 18일 외동딸 칸다 사야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참척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출연이 예정되어 있던 2021년 홍백가합전의 출연은 세이코 측의 뜻이 밝혀질 때까지 결정을 보류하겠다고 발표했다.#
링크된 기사의 댓글에는 세이코가 장례를 마칠 때까지[20] 딸의 마지막 길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니 올해 홍백에는 출연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대다수이고, 일부는 NHK가 현재 세이코의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출연을 강행시키려 하는 게 아니냐며 NHK를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여기에 더해 만약 세이코가 홍백에 출연한다고 쳐도 NHK 측과 언론이 프로 정신 운운하면서 '슬픔을 딛고 열창'이라는 식으로 멋대로 미화하여 시청률 확보 소재로 이용당할 것을 경계하는 의견도 상당수다.[21]
다행스럽게도 올해 홍백에서 세이코가 출장하지 않는다는 공식입장을 내놓아서 위 우려는 기우에 그치게 되었다. NHK 측은 곡과 연출 변경, 사전녹화 형식 등 여러 가능성을 검토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세이코의 뜻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내린 결정이라고 밝혔다.
다만 앞으로 그녀의 활동 자체가 불투명해졌다는 점에서 다른 의미에서의 우려가 많다. 일단 향후 활동에 대한 우려와는 별개로 홍백에 출장하지 않는다는 세이코의 결정에 대해 대중들은 대체적으로 존중한다는 반응이 많았고, 정상급의 연예인이기 이전에 딸을 잃은 어머니로서 슬픔을 추스리는 것이 최우선이니 당연한 결정이라며 지지하는 의견이 다수이다.[22]
한편으로 세이코 관련 보도는 이제 자제하고, 세이코 본인이 직접 언급하기 전까지는 건드리지 말았으면 좋겠다며 언론의 취재 경쟁 과열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딸의 비보로부터 약 3개월 후인 2022년 4월 9일부터 디너 쇼 개최를 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러나 2022년 홍백가합전 출연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 2023년 홍백가합전 출연자 목록에도 세이코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아 앞으로의 홍백가합전 출연 여부 자체가 미지수로 남게 되었다.
SEIKO MATSUDA 재즈 앨범 제3탄 「SEIKO JAZZ 3」 2024년 02월 14일에 재즈 앨범 발매가 있을 예정이다.
3. 성격 및 캐릭터[편집]
3.1. 희대의 아이돌[편집]
마츠다 세이코는 단순히 노래뿐만 아니라 패션이나 스타일링 또한 당시 여성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헤어스타일과 관자놀이 블러셔, 생김새나 행보 하나하나가 커다란 화제를 일으켰다. 그런 세이코의 80년대 전성기 당시 인기와 그녀의 캐릭터를 짧게 요약할 수 있는 단어로는 세이코짱 컷(聖子ちゃんカット)과 부릿코가 있다.
그러나 정작 세이코는 본인의 세이코짱 컷이 한창 유행하던 1981년 연말에 성인이 된 만큼 성숙해 보이고 싶다는 말과 함께 숏컷으로 머리 스타일에 변화를 주었다. 이 시기 세이코는 푸들 세코탄으로 불렸다.
실제로 세이코 본인이 세이코짱컷을 하고 있었던 시기는 채 2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세이코가 숏컷을 하자 숏컷 열풍이 불었다. 그 이후 세이코는 세이코짱컷을 한 번 더 했었는데 이는 출산 후 인터뷰에서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이코의 얼굴이 바뀌어 예전의 매력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출산 후 다시 세이코짱컷을 한 모습이나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얼굴을 보면 세이코의 얼굴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세이코는 무쌍커풀 눈이지만 눈을 치켜뜨거나 유독 피곤한 날 쌍커풀 아웃라인이 잡혔었고 이로 인해 테이프를 붙이기도 했었다, 애초에 부모님 두 분이 다 쌍커풀이 있어 세이코는 쌍커풀이 생길 눈이였던 것.
특히 홑꺼풀 여성들 중에서 뷰러로 속눈썹을 집어올리거나 마스카라를 진하게 칠하면 속눈썹이 들어올려지는 힘 때문에 쌍커풀이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눈의 소유자들은 나이가 먹어 눈두덩의 지방이 빠지면서 진한 쌍커풀이 생기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24]
어쨌든 세이코짱컷은 워낙 대유행한 스타일이기 때문에,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여성 출연진들이 일제히 세이코 컷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헤이세이 시대의 스타 하마사키 아유미도 더 베스트 텐을 오마주한 M/V에서 세이코짱컷을 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각종 신인상을 수상할 때마다 눈물이 적게나는 탓에 억지로 우는 것처럼 보여 당시 '마츠다 세이코=거짓눈물'이라는 이미지가 팽배했다.#[25]
1982년 FNS 가요제에서 '들장미의 에튀드'로 대상을 수상하였을 때 세이코가 마스카라 번져가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사회자가 "이번엔 진짜 눈물이 나오나 봅니다."라는 발언을 하여 팬들에게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결국 사회자는 1년 뒤 FNS 가요제에서 당시의 멘트에 대한 사과를 한다. 잡지 등에서는 세이코를 이때다 싶어 "거짓눈물 세이코"라고 신랄하게 까내렸다. 하지만 이후 활동에서 30대의 세이코도, 40대의 세이코도, 50대의 세이코도, 60대가 된 지금도 울컥하는 모습이나 우는 모습을 보면 울 때 표정이 한결 같아서 "마츠다 세이코는 원래 울 때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다." 라는 여론이 생겼다.
그리고 세이코의 부릿코 컨셉은 무대 위에서의 컨셉으로, 라디오 등 자신 본연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곳에서는 꾸미지 않은 원래의 장난끼 많고 털털한 모습을 보인다. 한 인터뷰에서 마츠다 세이코에게 "왜 부릿코를 고치치 않는 것인가" 라고 묻자 "아이돌이라는 직업이 대중들에게 꿈을 주는 일이기 때문에 고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소속사 사장이었던 아이자와 히데요시는 "팬들이 원하는 걸 즉각적으로 판단하여 그 자리에 맞는 분위기를 만드는 머리의 비상함과 프로 근성이 만든 '교묘한 자기연출'이 마츠다 세이코라는 가수를 만들었다"고 얘기하였으며, 그녀를 키운 후쿠다 전무는 "마츠다 세이코는 스스로 운을 붙잡았다. 더욱이 그녀가 성공한 이유는 목소리가 뛰어난 것과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이야기 했다.
이러한 그녀의 스타성은 당대 일본의 다양한 서브 컬처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순정 만화는 물론이고 애니메이션, 영화, 소설 속에도 실제의 명의로 언급되거나 본인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들이 탄생되곤 하였다.
일본의 국민 순정 청춘만화 터치의 여주인공 아사쿠라 미나미가 그녀를 모티브로 한 대표적인 여자 캐릭터. 80년대에는 그야말로 모두가 '마츠다 세이코'라는 존재에 푹 빠져 있다고 해도 무방했을 정도였다.[26]
실제로 마츠다 세이코의 팬이라 자처하는 연예계 종사자들이 매우 많은데, 라이벌이라 칭해지는 후배인 나카모리 아키나도 그녀의 팬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닐 정도였으며[27] 80년대 중반 일본의 국민 아이돌 그룹이었던 오냥코클럽의 주요 멤버 유우유는 팬이었던 마츠다 세이코와의 만남으로 감동받아 그 자리에서 울었다고 한다.
건담 누나로 유명한 가수 모리구치 히로코는 자신이 게스트인 방송에서 세이코의 베스트 앨범 자랑과 종이로 90%이상이 가려진 세이코의 자켓 사진만 보고도 어떤 싱글인지와 수록곡까지 맞추는 등 10분 가까이 세이코에 대한 덕심을 열렬히 표현했다.# 성우 타무라 유카리도 그녀를 동경하여 아이돌을 목표로 삼다가 현재의 성우 아이돌이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외에도 와타나베 마리나, 이시바시 타카아키, 히라이 켄, 린드버그의 보컬 와타세 마키, 뉴하프 연예인 하루나 아이, Every Little Thing의 모치다 카오리, 모닝구 무스메의 이이다 카오리, 미치시게 사유미, AKB48의 카시와기 유키와 NMB48의 와타나베 미유키, 오덕계의 아이돌 나카가와 쇼코 등이 마츠다 세이코의 팬으로 유명하다.
특히 나카가와 쇼코는 다수의 세이코팬 중에서도 매우 열광적인 세이코팬으로 유명하여 자신의 개인 방송에서 마츠다 세이코의 전 앨범 곡을 전부 나열하며 찬양하거나 항상 어딘가에서 세이코를 언급할 때 '신', '세이코사마'라고 부르고 있다.
실제로 마츠다 세이코를 방송에서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카가와 쇼코는 세이코 본인이 부담스러워 할 정도로 엄청나게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1980년대 중,후반에 데뷔한 여성 아이돌들의 대다수는 인터뷰에서 '마츠다 세이코를 동경해 아이돌이 되었다' 라고 인터뷰한 경우가 많았으며[28] 후대의 아이돌들 또한 세이코의 팬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마츠다 세이코의 팬이 되었다고 밝히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여타 방송에서는 따로 코너를 만들어 마츠다 세이코에 대한 에피소드에 대해 인기 연예인들이 코멘터리를 나누거나 연예계 내에서 세이코의 팬이라 자처하는 방송인들을 모셔놓고 누가 더 세이코 덕후인지 맞추는 퀴즈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연예인들의 연예인.
동시대와 현대의 음악 평론가들 또한 세이코를 '대 아이돌'이라 부르며 라디오와 방송 등지에서 그녀가 끼친 영향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세이코 매니아 퀴즈, 세이코를 너무 좋아하는 연예인들 모임, 마츠코 디럭스가 말하는 세이코, 아카시야 산마가 말하는 데뷔초의 인상, 요시다 타쿠로의 세이코 예찬, 이토 아사코가 되고싶은 아이돌
이처럼 마츠다 세이코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은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심지어, 전설의 최초 2차원 아이돌로 불리는 마크로스 시리즈의 린 민메이 역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29] 마츠다 세이코와 같은 가수가 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30]
3.2. 스캔들[편집]
일본의 국민 게닌 아카시야 산마는 그녀를 두고 "그 많은 스캔들과 루머를 견디면서도 지금까지도 활동하는 걸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라고 발언했다.[32]
그러나 사귈 당시 히로미와 세이코의 전화 음성 유출본을 들어보면 통화 내용에서 이미 히로미와 세이코는 이미 헤어짐을 앞둔 상황이다.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세이코가 히로미를 붙잡고 히로미가 먼저 세이코에게 이별을 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은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세이코는 여러 인터뷰 등에서 "결혼은 일 때문에 신중할 수 밖에 없어요." 답변했고 고 히로미는 "결혼을 하면 당연히 가정주부로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일본 대중들 사이에선 고 히로미의 여자 문제가 꽤나 복잡한 것을 우린 생각 해야한다., '고 히로미의 소속사(바닝프로덕션)가 얼마나 무서운지 당신들은 모르나? 바닝은 자기 연예인을 위해 타 연예인 매장 시키는 건 손 쉬운 일이야, 그러니 당연히 여자인 세이코를 앞세워 손을 썼을 수도 있지'라는 말이 많이 나왔다.[33]
그리고 세이코는 고 히로미와의 연애는 어떻냐는 질문에 식사라든가 영화를 본다든가.. 일반적인 데이트를 자주 하지 못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데뷔때 부터 고 히로미의 팬이라고 꾸준히 말한 세이코와 당시 남자 톱 아이돌이던 히로미의 화제성을 이용해 방송용 연인사이, 쇼윈도 커플이 아니였을까 하는 의심도 꽤 있다.
당시 여성의 인권이 존중받지 못했던 시절이라 악명 높은 고 히로미의 소속사 바닝프로덕션에서 '세이코가 독박을 쓰는 것으로 정하자'식의 판을 깔았다는 이야기가 단순 루머가 아닌 충분히 먹힐 수 있는 이야기란 말이 있다.
후에는 고 히로미 측에서 먼저 듀엣을 제안해 고 히로미와 세이코는 2000년에 듀엣곡 <True love story>을 작업하고 뮤직비디오도 찍었다. 80년대 전설의 커플이었던 두 사람의 듀엣곡이 반응이 뜨거워 고 히로미는 만족했는지 듀엣을 한번 더 하자고 제안했지만 세이코 측에서 거절했다.
고 히로미와의 이별 1달 후 세이코를 친동생처럼 여겨온 스폰서 이시하라 유지로[34] 에게서 소개받은 12살 연상의 배우 칸다 마사키와의 교제를 인정했고, 2개월 후인 1985년 4월, 23세의 나이로 전격 결혼을 발표했다.
당시 둘의 이혼에 대해 안티들은 또 가정에 충실하지 못 한 여자, 그러니 이혼은 엄연히 세이코의 탓, 그녀의 남성 편력은 칸다씨도 감당 못 한다.라는 반응을 했다. 하지만 고 히로미 때와는 사뭇 다르게 이에 대해 반박하는 반응이 꽤나 컸다.
대중들은 세이코씨 정말 힘들겠어요, 고 히로미와의 연애 때에는 바닝프로덕션이 문제고, 칸다씨와의 결혼 생활에선 이시하라 군단 때문에 문제고, 역시 세이코씨에겐 자유가 어울려요.라는 말과 왜 칸다씨의 바람기는 쏙 빼놓고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세이코씨는 늦은 밤에도 돌아오지 않는 칸다씨를 기다리며 외로웠고 자신의 본업을 충실히 임하기 위해 일하러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이 양육은 엄마 혼자서 하나요? 칸다씨도 부모님 중 하나잖아요!
이혼 인터뷰를 보고 세이코씨가 마사키씨를 정말 좋아했다는 걸 느꼈습니다, 눈치 없는 사람이 봐도 알 걸요? 모든 일들이 항상, 언제나 세이코의 탓이 되지만 세이코씨는 일절 상대방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소문들에 굳이 말을 더 얹지 않은 겁니다. 고 히로미 때를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라는 반응을 해주었다.
89년 1월 23일 콘도 마사히코와 나카모리 아키나는 파리에서 가구를 구입하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하와이로 이동한 후 아키나만 홀로 귀국했고 콘도는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 무렵, 뉴욕에는 전미 데뷔 준비를 하고 있던 세이코가 있었다.
세이코가 묵고 있던 파크레인 호텔의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일본인들이 많이 이용하지 않는 에어 프랑스 호텔에서 89년 2월 2,3일에 걸쳐 세이코와 콘도가 밀회하고 있는 것이 프라이데이와 여성 주간지 '미소'[35] 에 의해 포착되었다.
1989년 6월에 세이코는 앨범 발매 기자회견에서 '일 관계로 만났으며 주변에는 다른 스탭들도 있었다, 교제따윈 있을 수 없다'고 완전 부정하는 질의응답을 하기도 했다.
영상에서 화난 세이코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덤, 쟈니스 측에서도 완강히 부인했다."콘도 마사히코 씨와는 오랜 친구죠. 레코드 회사도 같고요. 관계자분이 콘도가 뉴욕에 왔으니 다같이 한 잔 하자고 만났을 때 사진이 찍힌 거예요."
"여러분(기자들)이 가장 잘 아시겠지만 교제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다 아시면서 자꾸 물어보시네요."
"그냥 가볍게 들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다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저희 자리 바로 앞에 커플이 있었어요. 남성 분은 외국인에 여성 분은 영어를 쓰시는 일본인 같았고요. 두 분이 굉장히 끈적하게 스킨쉽을 하셔서 놀란 맘에 콘도 군이랑 '저것 좀 봐~','저 사람들 대단하다~'이런 얘기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어요. 찍힌 사진을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그게 안고 있거나 키스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들 하시더라고요. 아무튼 그러고 저희 일행이 이만 그 바에서 나가기로 하고 현관으로 쪽으로 나갔는데, 그때 사진찍는 소리가 났고 콘도 군이 '그만해주세요!' 라고 했어요. 저흰 그때 찍힌 줄 알았죠 그런데 이미 전에 안에 있던 상황을 찍은 모양이더라구요. 그러고 바에 다시 들어가서 그 얘기를 하고 있는데, 아까 그 커플이 기자한테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일본어로 인사하고 가셨어요. 저희를 자극하려고 한 거겠죠? 덫이었어요. 요즘 주간지의 기자들은 그런 수까지 쓰시네요."
1989년 6월 6일, 새 앨범 기자회견 질의응답에서
그러다 한참 후 2015년, 혼다 케이라는 기자가 선 뮤직 전 사장으로부터 진상을 듣고 기사를 쓴 적이 있다.[36] 선 뮤직 프로덕션 전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가 타계 2년 전인 2011년 콘도와 세이코의 스캔들은 사실이었다고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
아키나가 2015년 방송활동을 중지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종종 동반 출연도 하였다. 2004년 12월 30일 베스트텐 특집 방송에서 아키나와 세이코가 함께 방송 출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방송이 끝난 후 세이코가 아키나에게 "아키나 짱 건강 괜찮아?" 라고 걱정하자 고마웠던 아키나가 눈물을 보이며 세이코를 끌어안은 사진도 있다. 만약 스캔들이 진짜라면 세이코가 본인의 건강을 나쁘게 만든 사람이 되는데, 아무리 대인배라도 본인을 아프게 한 사람이 자기 건강을 걱정한다고 눈물을 보이며 고마워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지만 이것은 타임라인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2015년 선 뮤직 사장이 콘도와의 밀회의 진상을 밝히기 전에 있었던 일이므로 그전까지는 아키나 역시 사건의 진상을 몰랐었을 가능성이 높다. 콘도와의 밀회 사건은 대부분 사람들도 단순 해프닝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아키나는 자신의 자살 소동으로 인해 세이코가 홍백 퇴출[37] 이라는 불이익을 당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큰 폐를 끼쳐서 미안한 마음뿐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오해였음을 알고 미안한 마음에 세이코를 우호적으로 얘기하거나 세이코의 이미지 회복을 위해 그녀를 자주 언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뉴욕 스캔들 진상이 밝혀진 2015년부터 아키나는 모든 방송활동을 중단하였고 대상포진,우울증 등으로 건강이 악화 되었다.
또한, 세이코는 1990년대에 미국 진출을 도모했는데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멤버[38] 와의 염문설이 돌았다.
세이코가 마사키와의 결혼 후 자주 하는 말이 우리 달링, 우리 부부 절대 이혼 안합니다, 다들 걱정마세요.였고 마사키 또한 일본 전 국민이 못 믿어도 난 내 아내를 믿습니다., 세이코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라며 서로에 대한 애정을 꾸준히 말해왔다. 위 링크의 영상을 보면 한창 세이코와 마사키의 이혼설이 떠돌아 말이 많았던 때인데 이때 콘서트에서 세이코가 당차게 말한다.
"비록 우리 달링은 파리에 촬영을 하러갔지만, 여러분 뭔가 굉장히 걱정하시는 것 같지만.. 괜찮아요! 무사히 6년! 6월 24일! 시간 빠르죠? 여러분 저 결혼 6년차에요, 대단하지 않아요? 맨날 이혼설이 나오지만 저희는 너무 잘 살고 있어요, 내년에는 7년차가 되는데, 늘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라며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 기자들과 비꼬는 대중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1998년에는 6살 연하인 치과의사와 재혼했는데, 당시 기자회견에서 발언한 'ビビビッときた(비비빅하고 (느낌이) 왔다)'는 발언이 유행어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당시의 결혼을 "ビビビ婚(비비빅콘)"이라고 칭할 정도. 당시 약혼 반지 다이아가 3.1캐럿이었는데 다이아가 3.1캐럿인 이유는 세이코의 생일이 3월 10일이기 때문이다. 세이코의 2번째 남편이 이 숫자들을 콕 찝어 다이아 반지를 주문 제작했다고 한다.
위와 같은 일로 대중들의 비난을 산 세이코였지만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결혼과 출산 후에도 은퇴하지 않고 연예계일을 지속하며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마마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등 꾸준한 활약으로 많은 팬들의 지지를 받았다.
일본의 인명색인 랭킹에서는 '마츠다 세이코'가 1위를 하고 있으며, 일본 잡지에 제일 많이 등장한 유명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1995년 집계 당시 무려 3,300건 이상의 등장 횟수를 자랑하였다. 1984년의 앙케이트에선 '결혼하고 싶은 여성 NO.1'에 선정되었다.
90년대에서 2000년대에 걸쳐선 '동경하는 인생의 연예인', '반짝이는 여성 유명인' 랭킹에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매년 황색언론 주간문춘, 주간여성에서 진행하는 악질 앙케이트 '싫어하는 여자 연예인' 랭킹, 월간지 'SPA!'에서 「1998년 남자가 용서할 수 없는 여자」 1위, '주간여성'에서 「2000년도 독자가 뽑는 싫어하는 여자」 5위, '주간문춘'에서는 「2005년도 여자가 싫어하는 여자」 5위로 선정 되기도 했다.
2007년에는 NHK 스페셜 '마츠다 세이코 여성 시대의 이야기'라는 마츠다 세이코의 삶과 그녀를 보며 살아온 동세대 여성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방송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상을 보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생각과 고민을 많이 하는 진지하고 성숙한 세이코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4. 여담[편집]
- 데뷔 이전에는 핑크 레이디의 춤을 따라추고 지각을 자주 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지각을 자주 한 이유는 집에서 중학교 후문까지 10m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업 종이 울리고서야 등교를 했다고 한다. 재학 당시 테니스부 소속으로 미션스쿨이었던 고교에서 학교 행사 때 모두의 앞에서 성경을 읽는 학년 별로 1명씩 뽑는 '여신'이라는 역할에 선출된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데뷔하기 전에는 의사가 꿈이었기 때문에 더 높은 편차치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했으나 생각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아 교복인 점퍼 스커트와 볼레로를 동경했던 미션스쿨에 입학, 약대를 지망하고 있었다고 한다. 중학생 시절의 꿈은 스튜어디스와 보모.
- 2003년 HMV가 선정한 역대 일본 아티스트 10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녀 앞에 있는 여가수는 마츠토야 유미(3위), 현재는 고인인 미소라 히바리(5위), 야마구치 모모에(7위) 밖에 없다.#
- 데뷔 계기가 된 '미스 세븐틴'에 응모를 한 이유는 "너무 좋아하는 미키 마우스를 볼 수 있으니까."[41] 라는 이유였고 대회의 게스트 심사위원이 데뷔 전부터 동경하던 고 히로미였다는 사실에서였다고 한다. 다 함께 응모하였는데 친구 2명은 불합격하고 본인만 합격했다는 듯. 가수를 동경하게 된 계기도 후쿠오카 행사 때 직접 보러 갔던 고 히로미의 모습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연예계 데뷔 이후 그렇게 동경하던 사람과 교제에 성공했다. 오디션을 받으러 왔을 때의 본인에 대해 선 뮤직 프로덕션 사장과 남성 스탭들은 시골에서 막 상경한 별다른 인상이 없는 모습에 흥미를 갖지 않았으나 여성 스탭들이 맹렬히 그녀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데뷔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성 스탭들의 선견지명
- 데뷔곡인 '맨발의 계절'은 시세이도의 세안 용품 'EKUBO'('보조개'라는 의미)의 CM송으로 쓰였는데# 세이코는 볼에 보조개가 없기 때문에(...) 광고 모델을 다른 탤런트로 채용했다.[42] 노래가 알려지긴 했으나 지명도가 낮았기 때문에 광고 모델과 함께 가진 사인회장에서 "저 앤 뭐야?"라며 자신에게 아무도 줄을 서지 않았기에 분했었다고 나중에 회상하였다. 그러고 얼마 안 가서 세이코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치솟으면서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고.
- '마츠다 세이코'라는 예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화가 있었다. 당시 아라타 아키코와 마츠다 세이코라는 두 예명 후보가 있었는데 마츠다 세이코라는 이름은 당시에 잘나가던 자동차 기업 마쓰다주식회사와 지금도 유명한 시계 브랜드 세이코를 본따 두 기업처럼 성공을 바라는 의미로 소속사 사장이 나중에 같은 소속사였던 후배 가수 하야미 유, 오카다 유키코의 예명도 짓게 되는 나고야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성명 판단가인 오키 히로코에게 의뢰해 작명소에서 직접 받아온 이름이라는 것. 데뷔 전 소속사가 뽑아온 두 예명 중 본인이 직접 마츠다 세이코 쪽을 골랐다고 한다. 아라타 아키코라는 예명은 앞서 언급한 기대주의 신인 나카야마 케이코를 위해 만들었으나 불채용된 것이다. 이에 5개월 뒤인 12월 출연이 결정난 드라마 <おだいじに>에서 예명이었던 마츠다 세이코를 배역명으로 써줄 것을 부탁한 것이라고 한다.
- 1984년 갑작스럽게 하와이에 단기 유학을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계속 짝짝이로 생겨나는 쌍꺼풀 때문에 그동안 붙이고 지냈던 쌍꺼풀테이프를 떼고 수술을 했다. 90년대의 모습은 성형에 당시의 진한 화장 트렌드까지 더해져 데뷔초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43]
- 활동 당시에는 '체리 블로섬'을 싫어했다고 라디오에서 밝힌 적이 있다.
"종종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하시나요?'라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요, 당시엔 싫던 곡도 지금 들어보면 정말 좋다고 생각하는 게 있어요. 처음 1위를 했던 '바람은 가을색' 같은 경우에는 저도 참 좋다고 생각했던 곡이에요. 그다음에 낸 게 체리 블로섬이죠. 실례지만, 너무 싫었어요. 이 곡. 제가 이런 곡 부르는 거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너무 싫어했어요. 그래서 다들 '왜 싫어해?'라고 하는데 그래도 싫었어요. 싫다. 하지만 결국 레코드 발매했더니 대단하게도 1위가 되어 버렸었죠."
"지금까지 나왔던 곡들은 밝은 느낌의 노래가 많았죠? 그래서 이 곡을 처음 받았을 때 굉장히 어둡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건 부르고 싶지 않다고나 할까, 저랑 분위기가 안 맞는 노래라고 생각했죠 레코딩을 해도 맘에 들지 않았고요."
"지금은 좋아하지?"
"정말 좋아해요."
- 현재는 세이코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된 'SWEET MEMORIES'지만 발매 초기에 CM으로 쓰였을 시엔 영어 가사 부분만 흘러나왔고 자막으로 '곡:마츠다 세이코'라는 표기도 뜨지 않았기 때문에 "누가 부르는 건가?" 하는 질문이 속출했다. 그리고 발매 2개월 뒤 음악 방송에서 처음으로 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 80년대를 대표하는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시대적 배경을 나타내는 장치로 문학 소설이나 미디어 매체에서 종종 언급되고는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오쿠다 히데오의 <스무 살 도쿄> 등의 책에서도 그녀의 이름이 등장하는 등등.
- 천사가 가진 순수성을 좋아하여 콘서트에선 천사의 날개를 단 코스튬을 자주 입는다.
- 전세계 K-1 경기장 프리패스권을 갖고 있다.
- 1988년 도쿄 지유가오카에 부티크 '플로레스 세이코'를 개점하며 사업가로도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는 오모테산도에 자신의 팬클럽 이름을 따 리뉴얼하여 영업 중이다. 해당 숍에는 세이코의 굿즈 등이 판매되고 있다.
- 1990년대 초에는 미국 진출을 위해 철저하게 영어를 공부하였지만 아시아의 가수들이 으레 그렇듯 별다른 성과는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 뒤로도 몇 번 미국 진출을 노린 앨범을 발매하였고 90년대 후반에는 할리우드 데뷔를 목표로 하여 오디션을 통해 청춘 코미디 작품에도 출연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영어는 상당히 수준급이다.
- 데뷔 동기인 이와사키 요시미, 하마다 쥬리, 카와이 나오코 등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카와이 나오코와는 지금도 연락을 하며 특히 같은 호리코시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던 이와사키 요시미와는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으며 데뷔 이후로는 동기인 하마다 쥬리와 가장 친했다고. 하지만 데뷔하고 얼마 안 되어 격차가 너무 벌어져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술을 잘 마시지 않아 인간관계를 넓힐 기회가 적었지만, 배우인 모토 후유키와는 가족 모두와 친분이 있어서 사적으로 밥을 먹거나 노래방에 간 적도 있다고 한다.
- 데뷔 동기인 쟈니스 사무소의 남자 아이돌 타하라 토시히코와는 연인 컨셉으로 CF도 찍거나 잡지 표지에도 함께 게재되거나 각종 방송에서 같이 노래부르는 공연, 활동이 매우 많았던 탓에 현재도 친한 사이이나 활동 당시에는 타하라 토시히코의 여성 팬들이 질투하여 '토시 짱과 세이코를 따로 떨어뜨려달라'는 항의 편지가 쏟아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여자 아이돌 킬러였던 타하라와 수많은 남자 연예인과 염문설이 있었던 세이코였지만 드물게도 서로 간의 스캔들은 없었다.
서로 취향이 아니었던 듯같은 쟈니스 사무소의 활동 시기가 겹쳤던 콘도 마사히코와도 친한 누나 동생 관계였다고.
- 인기 절정기였던 1983년, 오키나와 공연에서 갑자기 난입한 팬에게 구타를 당한 사건이 있다.# 범인은 19세의 정신병을 가진 팬으로, 30cm의 쇠몽둥이로 3회 머리 부근을 구타당해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알려졌지만, 영상에 나오듯 3대 이상이었고 플라스틱 파이프라고 전해진다. 생방송으로 진행된 콘서트였는데, 이 사건의 트라우마로 인해 오랜 시간 오키나와에서 공연을 하지 못하다가 23년이 지난 2007년에서야 복귀 공연을 하였다.
- 칸다 마사키와 이혼한 후 6살 연하의 치과의사와 2번째로 결혼하였으나 다시 이혼하고, 2012년 2살 연하인 대학 조교수와의 3번째 결혼을 발표하자 같은 시대에 친분이 매우 깊었던 아이돌 타하라 토시히코는 블로그에서 "다음 번 결혼은 나랑 하자"고 드립을 쳤다.
타하라 또한 유부남
- 2000년 두 번째 이혼 발표를 했다, 이혼 사유는 남편은 미국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세이코는 딸과 자신을 위해 일본에 남았으면 했고, 결국 의견을 좁히지 못해 각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이때 이혼 발표와 더불어 기자회견 뒷배경이 20주년 기념 베스트앨범 홍보 포스터를 부착해 이혼 발표와 앨범 홍보를 한 큐에 해결하는 슈퍼스타의 패기를 보여주었다.
- 미국 드라마 'BONES' 시즌5, 15화에 일본인 저널리스트 역으로 출연했고 2012년 NHK의 대하드라마인 타이라노 키요모리에서는 시라카와 법황의 애첩인 기온노 뇨고 역으로 출연하였다.
- 1982년에 데뷔한 세이코쨩즈(聖子ちゃんず)란 3인조 여성 아이돌 그룹이 있었다. 3명 모두 세이코쨩 컷을 한 게 특징. 마츠다 세이코 본인도 닮았다고 말했었다고.
사실 전혀 닮지 않았다.데뷔 직후 멤버 1명이 은퇴하는 바람에 싱글 하나만 내고 사라진 비운의 그룹이다.
- 본명이 '카마치' 노리코여서, 본명이 '카마치' 사치코인 자드의 사카이 이즈미와 친척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다. 족보의 기록이 옳다면, 적어도 에도 시대부터 갈라진 먼 친척이라는 설이 다수설이나, 현행법으로서는 친연관계는 없는 셈. 우리나라로 치면 두 사람이 김해 김씨에 하위 계파까지 같은데 족보가 십수대 이상까지 거슬러 올라가 전혀 남남인 경우인 경우와 비슷하다.
- 후쿠오카 출신이어서 그런지 후쿠오카 사투리, 일명 하카타벤을 사용할 수 있다.[45] 하지만 데뷔 이전 출연한 드라마에서 하카타 사투리가 너무 심한 나머지 몇번이고 촬영을 NG내어 대선배였던 배우들에게 민페를 끼쳤다고 본인이 이야기했다. 데뷔 초 테츠코의 방에서 사용한 적이 있고 비트 타케시의 방송에 나가서도 사용했다. 21세기 들어서는 소프트뱅크 CM에서 하카타벤을 쓰거나, 고향에서 열린 본인의 콘서트 MC 도중에 짧게 사용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1987년 일본에서 가수 활동을 하던 조용필의 인터뷰 상대로 KBS 가요대상에 출연한 적 있다.# 조용필은 일본 최고의 여자가수라고 소개했다. 당시 국내에서 일본 대중문화가 금지였기에 대중들은 그녀가 누군지 거의 몰랐겠지만.[46]
- 자신을 묘사한 그림이 있는데, 상당히 잘 그렸다. 그리는 과정
- 임신 당시에는 13kg 이상 쪘다가 출산 이후 1주일 만에 10kg이나 빠져서, 의사가 주의를 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고 한다. 또 자신은 꼭 여자아이를 낳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사야카를 낳고 매우 기뻤으며, '역시!(やっぱり!)'라는 느낌이었다고.
- 80년대 활동 당시 음악 방송에서 국내외 가수의 노래 커버를 굉장히 많이 했다. <Moon River>[47] 나 <When You Wish Upon a Star>[48] 등의 외국 노래뿐 아니라 야마구치 모모에의 <한여름의 경험>, 마츠바라 미키의 <한밤중의 문〜Stay With Me>[49] , 사쿠라다 준코의 <제멋대로 비너스>[50] , <Endless Love>, <Here i am>, <비틀즈 메들리>등을 불렀다.
- 데뷔 초에는 덧니가 완연한 외모였으나, 이후 치아교정을 하였다.[51]
- 세이코가 데뷔 후 처음 맞는 생일 며칠 전 더 베스트 텐에 출연하였을 때[52] 어머니가 케이크를 직접 만들어 보내주셨다. 처음 먹어보는 어머니의 케이크에 노래 중 글썽거리기도.#
- 실물이 더 나은 연예인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데 인기 최고조였던 80년대에는 예쁜 편은 아니란 말을 들어왔던 세이코가 현재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미모와 피부 컨디션을 뽐낸다고 한다. 평소 관리를 열심히 하는 세이코이긴 하지만 팬이 아닌 일반인이 봐도 감탄할 정도라 한다.
- 2013년 콘서트에서 10번째 오리지널 앨범 Windy Shadow 앨범 수록곡 Star를 부르다 눈물을 흘렸다.
- 2018년 콘서트 굿즈로 세이코의 대표곡 중 하나인 8번째 싱글 앨범 붉은 스위트 피에 영감을 받은 '스위트피 스틱'이 출시 되었다. 붉은 스위트피 무대 영상을 보면 종종 마이크에 스위트피가 디자인 되어있다.
- 2016년 「FLORALE by Triumph」라는 프리미엄 속옷 브랜드 모델로 선정 되었다. 2016년 세이코의 나이는 54세.
- 2021년 7월 3일 방송된 THE MUSIC DAY에서 1만 명에게 설문조사한 '사상 최강의 여자아이돌은 누구인가?'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 IVE의 멤버 장원영이 좋아하는 일본가수라고 밝힌 바 있다. 어머니가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가수가 마츠다 세이코였는데, 옆에서 같이 노래를 들으면서 저절로 좋아하게 되었다고. 귀여운 표정과 무대 위의 퍼포먼스가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 2022년 6월 11일 세이코 복귀 콘서트에서 자신의 하나뿐인 딸 사야카를 추모하며 사야카의 노래인 'ever since'를 불렀다. 차분히 노래를 부르다가 노래가 끝날 무렵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쏟아내는 세이코의 모습을 보고 현장에 있던 팬들도 오열을 했다.
- 2023년 가구 매장에서 포착 되었는데 줄곧 해오던 긴 생머리가 중단발 기장으로 바뀌었다.
- 2023년 6월 10일부터 2023 Parade 콘서트 투어를 시작했다. 여름 콘서트는 연례행사로 사이타마를 시작으로 오사카, 가게와 5개 도시를 돈다. 음악 관계자가 걱정스럽게 전한 것은 (세이코씨가) 불안을 안고 있기도 해서 올해는 예년 이상으로 꼼꼼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라고 소식을 전했다.
- 세이코는 데뷔 후 3년까지는 혼자 셀프로 헤어 메이크업을 했었는데, 메이크업 15분 헤어 15분으로 둘 다 완성하는데 30분 밖에 소요되지 않았다고 한다
- 잡지 美的(미적) 메이크업 아티스트 시마다 치아키의 인터뷰에 따르면 80년대에는 아이돌들이 직접 셀프 메이크업을 해왔는데 혼자 일찌감치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메이크업을 받은 아이돌이 세이코씨라고 한다, 데뷔 4년정도 되었을 때부터 세이코의 메이크업을 담당했는데 세이코 씨는 볼 때마다 빛을 더해 바로 커다란 꽃이 개화해 가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인터뷰 했다. 파운데이션을 바르는 방법, 아이섀도우, 립의 색상 선택 등 유행을 함께 반영시켰다고.
- 2024년 2월 14일 본격 재즈 프로젝트의 3집 SEIKO JAZZ3를 발매하기로 23일 결정됐다. 2년 4개월 만의 대망의 신작이며 2017, 19년에 이어 미국 명문 재즈 레이블 'Verve'에서 미국 전역에 발매되는 인기 시리즈. 이번에는 첫 시도로 수많은 자신의 곡 중 시도해 보고 싶었다는 붉은 스위트피(1982년) 재즈 어레인지 셀프 커버에 도전, 세계 7500만 장 이상의 레코드 세일즈, 15억 회 이상의 스트리밍 조회수를 자랑하며 그래미상도 수상한 미국 색소폰 주자 케니G(67)와 꿈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더욱 세련된 멜로디의 '-English Jazz Ver.'로 재탄생 하며, 발매에 앞서 24년 1월 하순에는 앨범의 시청회가 도내에서 개최되는 것이 결정되었고, 시청회에 세이코가 등단할 예정은 없다고 한다.
5. 홍백가합전 출전 경력[편집]
- 데뷔년도인 1980년 두번째 싱글인 푸른 산호초의 대히트로 제 31회 홍백가합전에 첫 출전 이후 1988년까지 연속 출전하였다.
- 홍백가합전 역대 출장 기록 19위 (24회)[53]
6. 음반 목록[편집]
자세한 내용은 마츠다 세이코/음반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