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모토 타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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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모토 타카시
松本(まつもと(たかし| Takashi Matsumoto
출생1949년 7월 16일 (75세)
도쿄도 미나토구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거주효고현 고베시
직업작사가, 드러머, 프로듀서
활동1968년 – 현재
수훈자수포장(2017년 수훈)
학력게이오기주쿠대학 (상학부 / 중퇴)
자녀장녀 마츠모토 미오(1972년생)
링크파일:트위터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2.1. 데뷔 이전
2.2. 호소노 하루오미와의 만남
2.4. 작사가 활동
2.4.1. 1970년대
2.4.2. 1980년대
2.4.3. 1990년대 이후
3. 가사의 특징
4. 수상
5. 관련 아티스트
6. 여담
7.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일본작사가이자 드러머.

핫피 엔도 활동 시절에는 드러머인 동시에 밴드의 작사 담당으로 일본어 가사로 록을 부를 것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러한 고집으로 자국어로도 록을 부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본 대중음악계에 제시하게 된다. 핫피 엔도 해체 이후에는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내며 국민 작사가 반열에 올랐다.


2. 생애[편집]



2.1. 데뷔 이전[편집]


도쿄도 미나토구의 아오야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 살 아래 동생인 유타카는 레코딩 엔지니어가 되어, 후일 마츠모토가 작사한 사이토 유키의 '졸업'의 엔지니어링을 담당했다.[1] 아오야마는 지금은 빌딩이 늘어서 있지만, 당시에는 공터가 많았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에는 1964 도쿄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한 도시계획으로 퇴거당하고 만다.[2] 마츠모토가 고향을 잃은 상실감은 핫피 엔도의 앨범 '風街ろまん'에서 볼 수 있다. 아버지는 대장성의 공무원으로 부족함 없는 유년기를 보냈다. 이후 비교적 명문 학교였던 세이난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고등학교는 모두 게이오기주쿠대학 산하에서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의 마츠모토 타카시는 몸집이 크고 키는 반에서 항상 첫번째 아니면 두번째일 정도로 컸다. 당시 무엇을 해도 눈에 띄었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자주 혼났다고.[3]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해서, 닥치는대로 독서를 했다고 한다. 일본 시인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미야자와 겐지나카하라 츄야는 굉장히 좋아했으며, 만화도 자주 읽었다고.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전기축음기를 사준 것이 계기였다. 전기축음기는 전후 무렵부터 국산품도 출시되었는데, 당시에는 매우 고가였다. 아버지의 동료 중에 오디오 마니아인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손수 만든 것을 사다 주었다. 그런데 중요한 레코드판을 살 돈이 없었는데, 당시 레코드판은 비싸서 초등학생의 용돈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었다.

소노라마 시트라는 잡지의 덤에 붙어 있는 것 같은 얇은 LP에 홈이 나 있는 저렴한 것이라면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화 음악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중학교 1학년 때 마츠모토가 용돈으로 처음 산 싱글 레코드는 페기 마치라는 미국 인기 여가수의 'I Will Follow Him'다. 이때부터 서양음악을 즐겨 듣게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가요곡(歌謡曲)이 유행하고 있어서 하시 유키오, 후나키 가즈오, 사이고 테루히코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 마츠모토는 서양 음악을 더 좋아했다. 또한 이때부터 마츠모토 자신이 직접 악기를 연주를 했는데,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벤처스(The Ventures)[4]의 영향이 컸다. 다만, 록 음악은 좋아했지만, 아메리칸 팝이나 흑인 음악은 별로 관심없었다고 한다.

당시, 젊은이들은 모두 일렉트릭 기타를 사서 벤처스의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 후에 비틀즈가 데뷔하고, 1964 도쿄 올림픽이 끝난 뒤 고등학교 2학년 때 일본에서 비틀즈가 콘서트를 했다. 이 무렵에 마츠모토는 이미 드럼을 치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이 드럼을 사줬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드럼 전국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대회 출전자가 오로지 드럼을 치는 드럼 배틀 같은 대회였다. 마츠모토는 우승의 보상으로 아침 TV 프로그램에 나오게 되어 드럼 솔로를 선보였다. 고등학교 때는 음악은 취미의 범주였지만 이 전국대회 우승과 TV 출연을 계기로 점점 음악에 빠져든다. 그리고 게이오기주쿠대학 상학부에 입학 후 아르바이트이긴 했지만 개런티를 받고 디스코에서 연주도 했다.

이 디스코 아르바이트생 중 한 명이 바로 후에 핫피 엔도를 함께 결성해 보컬과 베이스를 담당하게 되는 호소노 하루오미다.


2.2. 호소노 하루오미와의 만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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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노 하루오미(왼쪽)와 마츠모토 타카시

당시 마츠모토는 고등학생 때 결성한 '반즈(バーンズ)'[5]라는 아마추어 밴드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반즈는 1967년 야마하 주최의 제1회 라이트뮤직 콘테스트인 간토 고신에츠 대회에 출전해 록 부문 3위에도 올랐다.[6] 그러나 베이스 담당이 공인회계사가 되기 위해 공부에 전념한다고 해서 그만두는 바람에 밴드의 빈자리가 생겼다. 빈 자리를 채워야겠다는 생각에 친구에게 좋은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릿쿄대에 베이스 천재가 있다'고 대답했다. 그게 바로 호소노 하루오미였다.

마츠모토는 즉시 연락을 취해 호소노를 만났고, 밴드에 합류시켰다. 호소노는 릿쿄대에서 '천재 베이시스트'라고 불렸다. 원래는 포크송을 하고 있었고, 미국 포크 그룹 '킹스턴 트리오'의 카피 밴드 같은 것을 했다. 호소노는 이때부터 오리지널 곡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어서, 마츠모토는 몇 가지 작품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마츠모타와 호소노는 함께 연주 활동을 하게 되면서 바다의 집(海の家) 같은 곳에서 연주하거나 나가노 가루이자와에 있는 옛날 귀족의 관 같은 작은 호텔에서 연주하는 등 활동 범위가 넓어졌다.

대학교 2학년 때, 호소노로부터 '더 플로럴이라는 밴드가 있는데 베이스와 드럼 멤버 2명이 빠진다네. 나랑 들어갈래?' 라고 권유를 받고, 둘이서 오디션을 보고 들어가게 된다.[7] '더 플로럴'은 오디션을 통해 그룹이 결성된 미국 록 밴드 몽키즈의 팬클럽 일본 지부의 멤버 공모로 선정된 5인 그룹이다. 이후 마츠모토와 호소노가 합류하고 이름을 '에이프럴 풀'로 바궜다. 밴드는 신주쿠 디스코틱에서 라이브 하우스 밴드로 활동했다. 전속 밴드로서 매일 밤 연주했는데, 이 활동으로 연주력이 향상되어 이 시기에 마츠모토의 드럼도 호소노의 베이스도 상당히 좋아졌다.[8] 에이프릴 풀 활동 당시 늘 책을 손에 지니고 다녀 밴드 멤버들에게 '문학 청년'으로 불렸는데, 이를 지켜몬 호소노가 "마츠모토, 가사를 써봐"라고 제안해 작사가로서의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마츠모토: 실제로는 핫피 앤도 이전에 호소노씨가 '마츠모토, 가사를 써라'라고 해서 5~6곡 같이 만들고 있었어요.

호소노: 내가 가사를 쓰라고 했나?

마츠모토: 기억 안 나요?

호소노: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구나(웃음). 원래 너는 그런 소질이 있으니까. 내가 말했다기보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 거야.

2015년 대담 #


하지만 '에이프럴 풀'은 인기를 끌지 못하고 실패하게 되는데, 녹음을 한 후 목표로 하는 음악의 방향성이 밴드 내에서 양분되어 버렸다. 결국 음반 발매와 동시에 해산 콘서트를 했다. 해산 이후 호소노와 함께 마츠모토는 새로운 밴드 결성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츠모토와 호소노, 코사카 츄[9] 3명과 당시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스즈키 시게루까지 4명이서 밴드를 만들 생각이었다. 스즈키 시게루는 당시 '천재 기타 소년'이라고 불리며 호소노 하루오미가 눈여겨보고 있던 인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난항을 겪었는데,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일본판에 코사카가 참가하게 되어 밴드 활동을 계속하지 못하자 이탈해 버렸다. 당시 마츠모토와 호소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한다.


2.3. 핫피 엔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핫피 엔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코사카의 탈퇴 선언으로 인해 호소노는 기타리스트 오오타키 에이이치를 밴드에 영입시켰다. 새 밴드의 이름은 '발렌타인 블루'였는데, 이후에 밴드명을 '핫피 엔도'라고 바꿨다. 이들은 밴드 결성과 동시에 바로 곡 만들기를 시작했다. 마츠모토 타카시는 곡 만들기 콘셉트에 대해서 '일본어로 록을 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일본 록계는 서양 음악의 카피가 많았고 가사도 원곡인 영어 그대로 부르는 것이 주류였다. 그러던 중 '우리들만의 오리지널 가사로 곡을 만들자'고 마츠모토가 제안을 했다.

하지만 '그럼 어떤 가사를 쓰면 좋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다들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호소노가 '마츠모토 너가 써봐. 록 가사를 쓸 수 있다고 너가 강하게 주장했는데 네가 써보면 되지 않을까. 항상 책을 가지고 다녔고 틈만 나면 책을 읽으니까 쓸 수 있겠지."라고 제안했다. 이렇게 마츠모토는 '핫피 엔도'에서 작사가를 맡게 됐다. 호소노로부터 '이런 가사를 써봐'라고 수입반의 레코드를 건네받은 마츠모토는, 가사를 친구에게 번역시켜, 나름대로 흉내내어 가사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금언이 생각나는 부분. 이것저것 모색한 결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심상을 '데스마스죠(ですます調)'로 그린다는 스타일을 확립했다.[10]

또한 마츠모토는 '핫피 엔도'와 같은 레코드 회사에 싱어송라이터 엔도 켄지, 타카다 와타루, 오카바야시 노부야스같은 당시 '칸사이 포크'라고 불리던 인기 포크 뮤지션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핫피 엔도'는 초기에 '칸사이 포크'의 백밴드로 부탁받아 투어를 함께 다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었다. 마츠모토는 '칸사이 포크'가 '데스마스죠'로 가사를 만들고, 거기에 곡을 붙이는 것을 고집하는 것을 가까이서 듣고 있어서 너무 신선했다고 한다.

마츠모토: 당시에는 록은 영어로 부르는 것. "일본어 록은 있을 수 없다"고 주창하는 사람들이 주류였습니다. '핫피 엔도'가 결성한지 얼마 되지 않은 우리는 아류이고 무명. 승부도 안 될 정도로 힘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화제가 됐으니까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재미없겠죠. '일본어 록'은 논쟁이 되어, 텔레비전이나 음악 잡지등을 무대로, 공개 좌담회[11]

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


그때 저는 아직 19살이에요. 그런 애송이에게 30, 40대 중진들이 '너희가 하는 짓은 괘씸하다'며 뭉뚱그려 몰아붙였어요. 하지만 우리가 하려는 일은 옳을 것이라는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략) 저희는 일본어로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와 같은 수준으로 음악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 결과 싱글 앨범이 팔리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처음부터 포기했습니다. 저희 생각의 올바름은 이후 역사가 증명해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결과 일본 음악은 독특한 진화를 이루었습니다. 세계 기준과는 다른 갈라파고스 뮤직이라고 야유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로 그것이 신선하다고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아 '핫피 엔도'를 포함한 1970년대, 80년대 일본 음악이 재평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


마츠모토는 '일본어로 록 가사를 쓴다'라는 참신한 스타일로, 일부 리스너들과 평론가들에게 열성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어는 록 멜로디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해 영미 추종이라 하더라도 진짜 록 음악을 지향한다면 원곡인 영어 그대로 불러야 한다고 고집하는 영어파 아티스트들의 반발도 불러일으켰다. 이를 통해 "일본어로 록을 부르는 것이 적합한가?"라는 떡밥의 '일본어 록' 논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후 일본어 록 논쟁은 핫피 엔도가 1971년 발표한 두 번째 앨범 '風街ろまん'이 록 멜로디에 일본어 가사를 잘 싣는 데 성공해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일단락됐고, 이 논쟁도 진정됐다. 또한 핫피 엔도 활동 중에 마츠모토는 이츠츠노아카이후센(五つの赤い風船)의 곡 '엔단(えんだん)'의 작사가로 참여하며, 처음으로 밴드 외부에 가사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2.4. 작사가 활동[편집]



2.4.1. 1970년대[편집]


1972년 핫피 엔도가 음악 노선 차이로 해체됐고, 마츠모토는 직업 작사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원래는 음악 프로듀서가 될려고 했다. 그래서 밴드 '문 라이더즈'에 참여하며 작사가 겸 프로듀서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프로듀싱한 음반들이 전혀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당시에 본인의 색채가 너무 강해 "이건 당신 앨범이잖아요."라는 팩폭을 듣고 프로듀서로서의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문 라이더즈에서 탈퇴하고 프로듀서 직에서도 물러나 작사가로서의 작업에 전념하게 된다. 이런 상태로는 '자신의 가족을 부양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작사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오카바야시 노부야스의 매니저를 맡고 있던 타카기 테루모토가 마츠모토를 도시바 EMI의 프로듀서였던 닛타 카즈나가에게 소개했다.

닛타는 당시 싱글을 발매 중이던 인기 그룹 튤립의 담당 프로듀서인데, "대박을 터뜨린 '마음의 여행(心の旅)' 다음에 낼 곡이 암초에 걸려 있다"며, 마츠모토에게 가사를 써 주지 않겠느냐고 의뢰했다. 그래서 가사를 쓴 게 직업 작사가로서 데뷔작인 '여름빛 추억(夏色のおもいで)'이다. 이 곡은 당시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내면서 일본 최고 인기 작곡가의 위상을 누렸던 츠즈미 쿄헤이(筒美京平)[12]가 굉장히 좋아했다. 후일에 전설적인 마츠모토 & 츠츠미 작사, 작곡 골든 콤비가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된다. 마츠모토는 이 곡을 작업한 것과 같은 시기에 인기 아이돌 아그네스 찬의 노래도 작사하면서 작사가로서 주목을 받게 됐다.

마츠모토: 해체 후에 3명 정도의 친구들에게 '작사가가 되고 싶은데 일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상의해서 처음 온 게 튤립의 작사 일이었어요. 그 뒤에는 아그네스 찬의 음반용으로 두 곡을 썼더니 호주머니 가득 찬 비밀(ポケットいっぱいの秘密)이라는 곡이 싱글컷됐죠. 그래서 조금씩 일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에는 '핫피 엔도' 시대의 연장으로, '팔리는 가사'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근데 '이걸로 팔리나'라고 반신반의로 쓴 '여름빛 추억'의 가사에 눈독을 들인 사람이 있더라고요. 당시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와 '또 만날때까지(また逢う日まで)'같은 노래를 연달아 히트를 날리던 가요계의 제왕 츠츠미 쿄헤이 씨입니다. #


그런데 마츠모토 타카시는 가사를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짝을 이룰 작곡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지금 일본에서 가장 재능 있는 작곡가가 누구일까?'라고 스스로 질문을 했는데 머리에 떠오른 것은 츠츠미 쿄헤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마츠모토는 당시 가요계에서 막 등장한 신인 작사가였고, 인기 작곡가인 츠츠미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츠츠미 쪽에서 마츠모토에게 만나자고 전화가 왔다. 디렉터 사카이 마사토시(酒井政利)로부터 연락이 왔다. 사카이는 야마구치 모모에, 마츠다 세이코, 미나미 사오리, 캔디스같은 수많은 스타를 세상에 내보낸 소니의 유명 디렉터다. 사카이는 '츠즈미 쿄헤이 씨가 마츠모토 군을 만나고 싶다고 하시기 때문에, 함께 일터에 가 주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츠츠미 쿄헤이는 마츠모토가 작사한 '여름빛 추억'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이거야말로 히트곡이라는 거야. 이 가사는 훌륭하다'고 칭찬을 했다. 그리고 츠츠미는 1년 정도 나와 함께 일해 주지 않겠느냐고 마츠모토에게 제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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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츠미 쿄헤이(왼쪽)와 마츠모토 타카시

마츠모토: 가요계에서 1부터 100까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쿄헤이 씨뿐이었어요 뉴뮤직계에는 호소노(하루오미)씨나 오오타키(에이이치)씨와 같은 핫피 엔도 멤버나 유밍(마츠토야 유미)이라는 동료들이 있었지만, 가요계에서 그런 존재였던 것은 쿄헤이씨뿐이에요. 아무말 안해도 가사만 건네주면 되는 곡을 붙여줬으니까. #


이후에도 마츠모토는 여러명의 유명 작곡가와 콤비를 짜서 곡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츠츠미와의 콤비가 각별했다고 말한다. 츠츠미 역시 "어쩌면 마츠모토군이 작사가라고 부를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처럼 일본어 말의 울림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나오지 않을까."라고 말하며 마츠모토의 가사를 높게 평가했다. 츠츠미와 콤비로 작업해서 만든 노래 중에서 처음으로 히트한 노래는 오타 히로미의 무명 손수건(木綿のハンカチーフ)이다. 밥 딜런의 가사에서 영향을 받은 곡으로, 1번부터 4번까지 있는 긴 가사를 썼다. 당시 일본 가요계에서 아이돌 곡뿐만 아니라 이렇게 긴 가사는 없었다.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 같은 노래가 하나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길게 가사를 작성했다. 작곡가 츠츠미가 "이 곡에는 가사를 붙이지 못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하자 간단하게 가사를 붙였다는 일화가 있는데, 마츠모토는 인터뷰에서 "(츠츠미가) 그런 말씀은 안하셨어요."라고 말했다.

마츠모토, 츠츠미 콤비의 노래 '무명 손수건'은 오리콘 차트에서 연간 4위[13]를 기록했으며, 누적 판매량은 85만장 이상이라는 대히트를 쳤다. 이 노래로 마츠모토는 단번에 인기 작사가가 됐다. 그 후, 붉은 하이힐(赤いハイヒール), 구월의 비(九月の雨)[14] 등의 명곡을 오타 히로미에게 제공해 큰 인기를 얻었다. 1977년부터는 데뷔 당시 천재 싱어송라이터로 주목받았던 하라다 신지(原田真二)의 작사가로 활동했다. 마츠모토의 섬세한 가사의 세계가 초창기 하라다의 인기에 큰 역할을 했다.

1970년대 당시 일부 사람들에게 '록 뮤지션'에서 '가요곡 뮤지션'으로 갈아탔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상업주의에 영혼을 팔았다'고 욕을 많이 먹었다고. 마츠모토 본인은 이런 비판에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한다. #


2.4.2. 1980년대[편집]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내며 인기 제작자 반열에 오른 마츠모토, 츠츠미 콤비는 쟈니스 사무소로부터 인기 아이돌의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이 아이돌이 바로 드라마 '3학년 B반 킨파치 선생님'의 제1시리즈에 학생역으로 출연해 인기가 불이 붙은 콘도 마사히코다. 쟈니스의 사장 쟈니 키타가와는 마츠모토에게 "타하라 토시히코의 데뷔곡인 '애수로 가득 차(哀愁でいと)'는 50만 장이 넘는 히트를 연발하고 있는데, 팬레터의 수는 콘도가 배 정도 많다. 그래서 레코드도 2배 팔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즉 밀리언(100만장)을 달성해야 한다고 대놓고 말한 것이다. 마츠모토는 후일 인터뷰에서 "등골이 추워질 정도로 압박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콘도 마사히코는 타하라의 데뷔로부터 반년 후인 1980년 12월, 마츠모토와 츠츠미가 작사/작곡한 스니커즈 부루~스(スニーカーぶる~す)로 데뷔했다. 이 노래는 오리콘 주간 차트에서 사상 최초의 '데뷔 싱글로 첫 등장 1위를 획득한 싱글'이 된 것 외에, 1981년 오리콘 연간 차트 4위, 판매량은 쟈니즈 사무소로서는 처음으로 100만장이 팔리는 메가 히트곡이 됐다.

마츠모토, 츠츠미 콤비가 만들어낸 또 다른 히트곡으로는 쿠와나 마사히로의 섹셜 바이올렛 No.1(セクシャルバイオレットNo.1), 사이토 유키졸업(卒業), 첫사랑(初恋), 정열(情熱), C-C-BRomanticが止まらない, Lucky Chanceをもう一度, 나카야마 미호건방짐(生意気), 비틀비틀하게 노네(ツイてるねノッてるね), 야쿠시마루 히로코의 '당신을·더·알고 싶어(あなたを・もっと・知りたくて) 등이 있다. 마츠모토가 작사한 전체 2136곡 중, 츠츠미 쿄헤이와 협업한 작품은 390곡 일정도로 상당히 많은 작업을 했다.

1980년대에 마츠모토 타카시와 작사, 작곡 콤비로 활동한 대표적인 아티스트로는 포크 뮤직계의 전설 요시다 타쿠로[15], 핫피 엔도 해체 후 솔로 뮤지션으로 활동중인 호소노 하루오미오오타키 에이이치, 뉴 뮤직의 선구자이자 당대를 대표하는 인기 싱어송라이터 마츠토야 유미, 튤립자이츠 카즈오 등이 있다. 핫피 엔도가 해체로 치닫을 무렵에는 오오타키 에이이치의 첫 솔로 앨범 <大瀧詠一>에 '에도몬 단테스(江戸門弾鉄)' 명의로 작사에 참여했다. 또 호소노 하루오미와 콤비를 이뤄서 만들어낸 노래 중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동명의 주제곡이다.[16] 또 1981년 마츠모토와 호소노는 이모킨 트리오의 테크노송 'ハイスクールララバイ'을 작사, 작곡해 대히트를 기록했는데, 무려 160만장이 팔리는 대박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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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마츠토야 유미, 마츠다 세이코, 마츠모토 타카시

마츠모토: 신기하게 제가 가사를 쓰고 오무라 군이 재편곡하면 누구나 사랑하는 '세이코 월드'의 토대가 마련될 거예요. 그리고 개성이 강한 노래의 여러 가지를 세이코씨가 전부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버렸죠. 보통 가수는 할 수 없어요. 세이코씨는 (노래를) 소화해 자신의 혈육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녀는 그렇게 커졌습니다. #


마츠모토의 작사가 커리어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아이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츠다 세이코다. 마츠모토가 지금까지 가장 많은 노래를 만든 가수가 마츠다 세이코다.[17] 섬세하게 요동치는 소녀의 마음을 엮은 세이코의 풋풋한 가사들은 대중들과 평론가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마츠모토가 세이코의 가사를 쓰게 된 것은, 6번째 싱글 '하얀 파라솔'부터였다.[18] 이후에는 작곡가, 편곡가의 선택을 포함해 프로듀싱적인 일을 음반사 CBS 소니로부터 떠맡게 됐다. 세이코를 발굴한 소니의 디렉터 와카마츠 무네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싱글에는 제 이미지가 있기도 했지만, 나머지는 거의 마츠모토씨가 마음대로 써주셨다고 해도 괜찮겠죠. 제가 이런 내용으로 가사 스토리를 이렇게 해주세요 이런 말은 한마디도 한 적이 없어요. 그가 훌륭한 가사를 써서 그녀가 부르면 이렇게 될 거라고 매번 생각했죠. (중략) 마츠모토 씨가 대단한 작사가라는 것은 오타 히로미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사람이 써달라고 하면 노래의 가치가 올라가죠. 그녀의 표현력은 뛰어나니까 토대가 탄탄한 것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돌이지만 음악성도 있고 문학성도 내고 싶어, 이것뿐이에요. #


마츠모토는 세이코의 음악을 작곡할 사람으로 '핫피 엔도'의 멤버였던 오오타키 에이이치호소노 하루오미를 데리고 왔으며, 마츠모토의 옛 친구인 싱어송라이터 마츠토야 유미도 설득해서 세이코의 작곡가로 발탁시켰다.[19] 앨범 수록곡의 작곡가로는 마사미치 스기, 하야시 테츠지, 하라다 신지, 미나미 요시타가, 야노 아키코, 타마키 코지 등 쟁쟁한 멤버들을 섭외해 앨범의 퀄리티를 높였다. 당시 자신의 주변에 있던 중요한 아티스트들에게 부탁하러 다녔다고 한다. 편곡자는 세이코의 두 번째 싱글 '푸른 산호초'부터 담당하고 있는 오오무라 마사아키에게 맡겼다.[20] 지향하는 음악성이 자신과 굉장히 가까워서 앨범 만드는 것도 쉬웠다고 한다.

마츠모토가 만든 최초의 마츠다 세이코의 노래인 하얀 파라솔은 세이코의 첫 미디엄 템포의 노래였다. 마츠모토가 작사를 맡은 이후 세이코는 노선 변경을 한 것인데, "별로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마츠다 세이코의 성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노선 변경 후, 세이코는 노래를 촉촉하게 불러내는 가수로 변모하며 전성기를 맞는다. 마츠다 세이코의 24곡 연속 오리콘 1위 중 17곡을 마츠모토가 작사했다. 이후 마츠모토는 마츠다 세이코의 4집 앨범인 '風立ちぬ'부터 결혼하기 전 마지막 앨범인 'Windy Shadow'까지 초창기 앨범 수록곡과 싱글 대부분을 작사했다.[21]

1988년까지 발매된 세이코의 정규 앨범 12장 중 마츠모토가 전곡의 가사를 쓴 것은 8장이며, 한 곡만 세이코 자신이 쓰고 있는 83년 유토피아를 더하면 9장이다. 모든 앨범이 차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세이코의 전성기 시절을 대표하는 노래들을 이 사람이 대부분 작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수많은 명곡을 만들었다. 마츠모토가 작사한 세이코의 노래 중 가장 인기가 많은 노래는 유밍이 작곡한 '붉은 스위트 피'다. 이 노래로 세이코는 여성팬이 증가했으며, 지금까지도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로 꼽힌다. 평론가 타케 히데키(田家秀樹)는 마츠모토를 "1980년대 마츠다 세이코의 거의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했다. #

마츠다 세이코 노래의 가사를 쓰기 시작하게 된 마츠모토는 같은 해, 또 하나의 메가 히트곡을 만들었다. 바로 테라오 아키라의 '루비의 반지(ルビーの指環)'이다. 이 노래 이전에도 테라오가 마츠모토에게 노래의 가사를 써달라고 의뢰를 했는데, 마츠모토가 거절한 이력이 있다. 별 다른 이유없이 당시 너무 바빠서 거절했다고 한다. '루비의 반지'는 테라오의 4번째 싱글 'SHADOW CITY', 5번째 싱글 '출항 SASURAI'에 이은 6번째 싱글로서 1981년 2월에 발매됐다. 마츠모토는 이 노래에서 남자의 댄디즘을 그려냈다. 발매 이후 '루비의 반지'는 1981년 최고의 히트곡의 반열에 올랐으며[22], 같은 해 12월 기준으로 160만 장의 판매량을 올렸다. 당시 테라오의 소속사 관계자들은 이 노래가 이렇게까지 팔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23] 세이코에 이어 테라오의 메가 히트곡을 만들어내며, 쇼와 시대 일본 음악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국민 작사가로 자리매김 했다.

1981년 3월에는 마츠모토 타카시가 작사가로 참여한[24] 오오타키 에이치의 걸작 앨범 'A LONG VACATION'가 발매됐다. 그런데 마츠모토 타카시의 여동생이 1980년 이른 나이에 사망해, 당시 작업 중이던 'A LONG VACATION'의 작사를 그만 둘 뻔하기까지 했다.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을 잃은 지 약 3개월 후, '카나리아 제도에서(カナリア諸島にて)'와 '그대는 천연색(君は天然色)'의 두 곡 분량의 가사를 썼다. 이 두 곡을 시작으로 앨범의 대부분의 노래를 작사했다. 특히 '그대는 천연색'은 마츠모토가 완전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된 곡이었다. 반년 넘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던 오오타키는 가사를 한눈에 보고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A LONG VACATION'은 지금까지 일본 대중음악 역사상 길이 남을 명반으로 꼽힌다. 앨범 발매 3년 뒤인 1984년에 오오타키, 마츠모토 콤비는 'EACH TIME'이라는 또다른 명반을 만들었다.

1980년대에 수많은 히트곡의 가사를 쓰면서, 마츠모토 타카시는 아쿠 유(阿久悠)와 더불어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작사가가 됐다. 지금까지도 마츠모토가 작사한 히트곡들은 일본 음악계의 명곡으로 남아있다. 이 시기의 마츠모토는 엄청나게 바빴다고 한다. 스스로를 '일본에서 가장 바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가사를 제공했다.

마츠모토: 그 시절은 아직 젊었기 때문에 힘들지만 충실하기도 하고 재미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힘들었던 것은 매주 판매량 순위가 발표된다는 점이죠. 1등을 해야하고 아프면 2등, 3등. 영원히 시험 쉬는 날이 없는 시험이 계속되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그것이 괴로운지 충실한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하지만 뭐, 저런 생활을 자주 계속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



2.4.3. 1990년대 이후[편집]


80년대 당시 마츠다 세이코 이외에도 야쿠시마루 히로코[25], 나카야마 미호, C-C-B, 사이토 유키의 곡들을 많이 작사했다. 하지만 1989년에 일에 지쳐서 '잠시 휴식하겠다'고 인터뷰에서 발표했고, 작사가 활동을 잠시 휴지했다. 작사가 활동을 쉬면서 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휴식을 선언하고 5년 뒤인 1994년 작사가로 복귀했다.

작사가 복귀 이후에 마츠모토 타카시를 대표하는 노래는 KinKi Kids유리의 소년(硝子の少年)이다. 1980년 작곡가 츠츠미 쿄헤이와 콤비로 제작한 콘도 마사히코의 데뷔곡 '스니커즈 부루~스'가 대박 히트하고, 17년 뒤인 1997년 쟈니스 사무소 사장인 쟈니 키타가와로부터 또다시 100만장이 팔리는 데뷔곡을 써달라고 요구받게 된다. 당시 마츠모토와 작곡가 야마시타 타츠로도 어떻게 히트곡을 만들지 상당히 난감했다고 한다. 마츠모토는 당시 원조교제가 사회 문제화되고 있어, 그런 세태를 한탄하며 '그런 작은 보석으로 미래를 팔아넘기는 그대가 안쓰러워'라고 '유리의 소년'의 가사에 썼다. 상처받기 쉬운 10대 소년의 마음을 그린 '유리의 소년'은, 젊은이부터 중장년까지 폭넓은 층의 공감을 불러 누적 판매량은 180만장 가까이 기록해 메가 히트곡이 됐다.[26]

2000년대 들어서는 애니메이션 음악의 작사가로도 참여해 새로운 세대들과 리스너들에게 존재감을 어필했다. 가장 유명한 애니송 작사 작품이라면 마크로스 프론티어의 '성간비행'이 있다. 이외에도 짱구는 못말려, 포켓몬스터 DP, 은혼, 유희왕 등의 애니메이션에도 참여했다. 2000년대 이전에도 다수의 애니송을 작사했다. 대표적으로 천공의 성 라퓨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메종일각, 란마 1/2, YAWARA!, 아리온, 소년 아시베의 애니송을 작사했다. 또 게임 용과 같이 5: 꿈을 이루는 자에서 마츠모토가 작사한 히무로 쿄스케의 노래 '영혼을 안아줘(魂を抱いてくれ)'가 삽입되기도 했다.

2015년 8월에는 '마츠모토 타카시 작사가 활동 45주년 기념 오피셜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마츠모토가 작사를 제공한 아티스트들이 많이 출연해 마츠모토 자신도 핫피엔도 드러머로서 무대에 섰다. 이 공연은 무려 3시간 30분이나 되는 긴 공연이었으며, 1만명의 관중을 동원했다. 마츠모토에게 헌정하는 트리뷰트 앨범도 발매됐다. 스핏츠의 쿠사노 마사무네, YUKI, 안도 유코, 사이토 카즈요시, 하나레구미 등이 참여했으며,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가사 낭독집의 디렉터로 참여했다. 또 마츠모토의 가사의 세계를 정리한 8장의 박스셋 '풍가도감 COMPLETE 1969-2009'도 발매했다.[27] 45주년을 기념해 NHK의 음악방송 'SONGS'에서 마츠모토 타카시에게 헌정하는 스페셜 방송을 방영했다. 이 방송에서 마츠모토의 작사에 의해 대표곡을 많이 불러 온, 마츠다 세이코킨키 키즈가 출연해 노래를 불렀다. 또 마츠토야 유미도 출연해 마츠모토 타카시와 마츠다 세이코와 대담을 했다.

2017년에는 그동안의 업적을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계 훈장 중 하나인 자수포장을 받았다. 기자 회견을 실시한 마츠모토는 기쁨을 이야기하면서 수상 소감을 말했다.

인생의 늦가을에, 이런 찬란한 빛을 비춰 주셔서, 깊이 감사합니다. 70년대 일본어 록을 제창해 영미의 흉내가 아닌 음악 창작에 언어적으로 비력하면서도 나날을 보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노력이 보답을 받은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서쪽 땅에 자리를 잡고, 봄에는 벚꽃 터널을 통과하고, 가을에는 마른 잎의 원색이 지는 길을 산책하고 있습니다. 사이교 법사, 마쓰오 바쇼, 다이구 료칸같은 시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남겨진 나날을 노래를 위한 말을 적으며 살려고 합니다.

예상치도 못했습니다. 대단히 훌륭한 상을 받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요즘은 같은 세대에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오타키 에이이치 씨도 없고, 엔도 켄지씨도 최근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은 인생이 다할 때까지 노래를 만들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2020년에는 '마츠모토 타카시 작사 활동 50주년 기념 오피셜 프로젝트'를 실시해, 연말에 50주년 트리뷰트 앨범도 발매했다. B'z, 엘리펀트 카시마시의 미야모토 히로지, 이쿠타 리라, Little Glee Monster, 미우라 다이치 등이 참여했다. 2021년 연말에는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개최했다. 콘서트는 일본 무도관에서 이틀동안 열렸으며, 마츠모토가 작사를 제공한 아티스트나 인연이 있는 아티스트 40팀 이상이 출연해 마츠모토의 노래를 불렀다. 또한 마츠모토는 호소노 하루오미스즈키 시게루와 함께 36년 만에 핫피엔도의 드러머로서 출연했다.


3. 가사의 특징[편집]


일본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작사가 마츠모토 타카시 씨가 만들어내는 가사는 폭넓은 세대의 대중의 마음에 자연스럽지만, 깊이 스며들고 있다.

문화청 #


마츠모토랑 작업 할 때는 꼭 가사가 먼저지. 가사의 세계가 음악을 형성해 가는 약간 스릴 있는 방식이야. 처음에 멜로디를 만들어 버리면 딱 꽂히니까.

호소노 하루오미 #


가요 작사를 하게 되면서 어려운 비유를 그만두게 됐다. 어떤 일정한 교양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재미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비틀즈의 영향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혁신적이었던 점은 양방향 무브먼트를 일으켰다는 데에 있다. 예술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대중의 힘을 받고 다시 던지는 것이다. 지식 없이는 알 수 없는 현대시 같은 말은 방해가 된다. 어려운 비유 표현을 쓰지 않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핫피 엔도와는 다른 무대를 얻을 수 있었다. 난해한 말은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주제는 바뀌지 않았다. 그 시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 지금 부족한 것을 쓰고 싶다. 달리 말하면 일상의 균열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균열 너머로 뭔가가 보인다. 유토피아가 보이거나 디스토피아가 보이거나. 천국도 지옥도 있다. 뭐가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균열이 가사이고, 록이라고 생각했다. 여자 아이돌 가사에서도 뿌리는 같고 어미가 조금 다를 정도다. 직접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디테일을 쌓아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의식하고 있다.

마츠모토 타카시 #


마츠모토 타카시가 가사를 생각하는 데 중요하게 여겨 온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눈 앞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일상에서 벗어나면 설득력이 없어진다고 밝혔다. 마츠모토는 "나의 경우 가사는 삶의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

많은 음악 관계자들은 '마츠모토 타카시의 단어 고르기 센스는 천재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색을 표현하는 가사'에 대해서는, '봄색(春色)', '가을색(秋色)', '영화색(映画色)', '유리색(瑠璃色)'이나 '천연색(天然色)' 등 뛰어난 단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평가가 높다. 마츠모토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가사 안에서 발랄하게 쓰여도 의외로 마음을 쓰지 않거든요. 하지만 주변 경치를 내고 그 안에 인간을 그려주면 마음에 와닿습니다. 색깔은 등장하는 인물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해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표현들은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의 가인들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가사를 쓸때는 어느 정도 구성을 생각해서 멜로디를 붙이기 쉬운 단어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정형인칭대명사는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고 한다 #. 또 자신의 드러머 경험이 말의 리듬을 맞추는 데 유리하다고 말했다. 마츠모토는 "노래로서 완성된 형태까지 내다보고 가사를 만들 수 있다. 음악에 대한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 특히 리듬을 알고 쓴 가사는 작곡도 편곡도 수월할 것이다. 리듬은 완전히 내 몸에 들어 있다. 생각 안 해도 돼. 내가 쓰면 자연스럽게 음운이 맞춰진다. 멜로디와 함께 말이 뛴다. 뛰는 말에는 쾌감이 있고 기억에도 남기 쉽다. 이런 부분은 다른 작사가들보다 유리한 부분인 것 같아."라고 말했다. #

가사가 여리고 상냥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린시절부터 선천적으로 병약한 여동생을 둔 탓이 아닐까 회고하기도 했다. 특히 마츠모토의 가사는 상당히 세련됐고 여성적이고 서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마츠토야 유미는 "가사에 대해서는 다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마츠모토씨 안의 소녀성에 굉장히 감탄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 마츠모토는 인터뷰에서 "예쁜 일본어로 항상 쓰고 싶네요. 저는 말을 짧게 해서 전달을 잘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소설가로 적합하지 않죠."라고 말했으며 #, "불행한 것과 어울려서 상처를 서로 핥는 듯한 말은 쓰지 않습니다. 실연당하고 우울해도 어떻게 거기서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찾는 것이 기본적인 주제입니다. 불행한 채 끝나는 가사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

가사에 바람()이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마츠모토는 그 이유에 대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바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움직이고 있어요. 굉장히 보편적인 느낌이 들었죠. 예를 들면 바람은 국경과는 상관없이 불죠. 구분 없이 기분 좋은 바람은 불고 날뛰면 난리 나죠. 그런 움직이는 것으로 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바람 쪽으로 끌려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

평론가 스지 스즈키(スージー鈴木)는 마츠모토 타카시의 가사를 아래와 같이 분석했다. #

마츠모토 타카시의 가사에는 '작풍'이 있다. 아쿠 유나 아키모토 야스시보다도, 그 '작풍'이 각 작품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도는 강하다. 그럼, 구체적으로, 그 '작풍'을 해석해보자. 우선 훌륭한 심리묘사다. 조금 파고들어 말하면 그것은 형용사나 동사가 아니라 구체적인 명사를 동반시켜 미묘한 심리를 캐치하게 표현한 '마츠모토 타카시 펀치 라인'으로 상징된다. 묘사력 뿐만 아니라, '펀치 라인'으로서 캐치에 도달하게 하는 표현력도 포함해,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말의 리듬감'을 지적하고 싶다. 마츠모토 타카시의 가사에는 단어가 너무 적고 글자가 부족하다. 그래서 훌륭한 심리묘사를 한 단어도 단어 편중의 가사가 아니라 불러서 기분 좋은 가사가 되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작풍을 지탱하는 근본사상으로서의 개인성에 대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내가 DJ를 맡는, bayfm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마츠모토 타카시의 가사에 나오는 남자아이 총선거'라고 하는 기획을 개최했다. 그러자 지지받는 남자아이들이 모두 예민하고 순진하며 약간 망설이는 남자아이들뿐이었던 것이다. 반대로 마츠모토 타카시 작품에 나오는 여성에게는 많은 마츠다 세이코 노래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다움을 확실히 가지고 있어 남성을 위로(아래로도) 보는 일이 없는 캐릭터가 많다.

즉 쇼와 시대에 지금보다 지배적이었던 남자다움 여성다움의 굴레에서 자유롭다. 나아가 성별보다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성을 존중하는 자세가 엿보인다.



4. 수상[편집]


날짜시상식명수상 부문작품
1981년
12월 31일제23회 일본 레코드 대상대상루비의 반지
(ルビーの指環)
작사상
금상
1982년
12월 31일제24회 일본 레코드 대상작사상연갈색의 머메이드
(小麦色のマーメイド)
금상
성・소녀 (聖・少女)
1983년
12월제16회 일본작사대상[28]대상겨울의 리비에라
(冬のリヴィエラ)
12월 31일제25회 일본 레코드 대상특별금상
금상유리 사과
(ガラスの林檎)
미드나잇 스테이션
(ミッド・ナイト・ステーション)
1984년
12월 31일제26회 일본 레코드 대상금상핑크 모차르트
(ピンクのモーツァルト)
1985년
12월 31일제27회 일본 레코드 대상금상로맨틱이 멈추지 않아
(Romanticが止まらない)
1986년
12월 31일제28회 일본 레코드 대상금상운이 좋구나 신이 났구나
(ツイてるねノッてるね)
베스트 앨범상SUPREME
2016년
3월 9일제66회 예술선장문부과학대신상없음[A]
2017년
11월 2일2017년 자수포장 시상식자수포장없음[A]
2021년
12월 31일제63회 일본 레코드 대상특별상없음[A]


5. 관련 아티스트[편집]


마츠모토 타카시와 협업하거나 마츠모토에게 가사를 제공받은 아티스트들을 정리하는 문단. 지금까지 2,000곡이 넘는 노래를 작사 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아티스트들이 전부가 아니다. 일본어 위키백과 참고.

리스트를 보면 알겠지만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돌들과 매우 많이 작업했다.



6. 여담[편집]


  • 2015년 기준 역대 일본 작사가 판매량 3위를 기록하고 있다. 누적 판매량은 4,985만장이다. 오리콘 싱글 차트 1위는 47번 기록했는데, 이 기록도 역대 3위의 기록이다. 또 130곡 이상이 오리콘 톱 10에 진입했다. #

  • 미국, 중국, 한국 등 일본 외 다른 나라의 대중문화를 접하는 데 부지런한 편이다. 한국 대중문화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은데, 2020년 9월 24일 주간문춘과의 인터뷰에서 20년 동안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았다고 밝혔다.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는 응답하라 시리즈로, '보지 않으면 인생의 손해'라고 생각할 정도라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영상

  • 자신의 라이벌로 쇼와 시대의 전설적인 작사가 아쿠 유(阿久悠)를 꼽았다. #

아쿠상은 굉장히 존경하고 있습니다. 저는 멋대로 미야모토 무사시사사키 코지로 같은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겼어, 졌다는 게 아니라 '명승부'가 생기지 않았을까. 아쿠상과 싸울 수 있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


  • 전업 작사가로서의 데뷔는 튤립의 '여름빛 추억'(1973년)으로 되어 있지만, 자신으로서의 발화점은 1981년 1월에 발매된 '느린 부기로 해줘'(미나미 요시타카)라고 밝혔다. #

  • 호소노 하루오미를 처음 만났을 때, 호소노에게 "너는 드럼이 형편없구나"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드럼을 잘 못하는걸까?"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훗날 호소노가 YMO으로 대히트하면서 마츠모토에게 작사를 의뢰해 함께 테크노 가요를 만들면서[30], "마츠모토, 좋을 때 드럼 그만뒀구나"라고 말했다. #

  • 굉장한 다작 작사가로, 지금까지 2,100곡이 넘는 곡을 작사했다. 대부분 1980년대의 만든 노래들이며, 많을 때는 하룻밤에 6곡을 작사했다고 한다. #

  • 노래가 팔리고 안 팔리는지 본능적으로 안다고 한다. 가사와 곡과 가수의 목소리, 어레인지가 합쳐졌을 때의 첫인상이나 녹음 시의 공기감 같은 것으로. #

  • 오오타키 에이이치가 사망했을 때,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만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반신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찢어져 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상실감에 사로잡힌 것은 틀림없습니다." #

좋은 파트너였어요. 물론 호소노 씨도 스즈키 시게루도 친한 친구입니다. 하지만 오오타키상이 제일 제 가사를 사랑해준 것 같아요. 핫피 엔도 해산때는 기분이 엇갈려 소원해져버린 시기도 있었지만, A LONG VACATION를 만들때 '이건 마츠모토에게 부탁해야지'라고 생각해주고, 집까지 부탁하러 와줘서….산도 있고 계곡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를 대신할 파트너는 없습니다.


  • 80년대의 유명 편곡가인 오오무라 마사아키(大村雅朗)를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 마츠다 세이코의 편곡가로 유명하다. 마츠모토는 오오무라가 너무 빨리 요절해서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오오무라 마사아키는 편곡가라기보다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고뇌하는 예술가였다. 마츠다 세이코의 작품 제작은 거의 곡이 먼저 만들어졌는데, 오오무라는 사운드가 7할 정도 완성된 테이프를 들고 돌아왔다. 오무라 군이 치는 로즈 일렉트릭 피아노 멜로디에, 이제는 가사를 끼울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와 나 사이에 강철의 신뢰가 구축되었다. 세이코의 결혼 때 앨범에서 내 이름이 사라졌지만 이후 SUPREME으로 내가 복귀하자 이번에는 그가 없었다. 나는 그의 섬세함을 지키려고 했지만 결국 그는 조서하고 말았다. 나는 둘도 없는 재능을 잃어버렸다. 오오무라 마사아키, 그의 천재성를 나는 깊고 깊이 역사에 새겨 영원히 남기고 싶다. #


  • 마츠토야 유미는 마츠모토의 가사를 "처음에는 감이 안잡히는데, 막상 불러보고 믹스도 마무리하고 들으면 '오, 그랬군요!'라며 감탄한다."라고 말했다. #


  • 어린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독서가 자양분이 되서 작사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아버지가 코단샤의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과 소년소녀일본문학전집을 사왔는데 각각 전 50권 정도를 다 읽었다고 한다. 또 미야자와 겐지의 팬으로 미야자와의 책은 전부 다 읽었다고 한다. 실제로 마츠모토의 가사는 미야자와의 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장 콕토랭보의 시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


  •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대표적으로 '미열소년(微熱少年)'이라는 소설을 출판했다. 이 소설을 본인이 직접 실사화해 영화 감독으로도 데뷔했다.

  • 결혼을 세 번 했는데, 세 번 모두 이혼했다. 2016년에 서예가와 결혼했는데, 2019년 이혼했음을 발표됐다.

  • 2017년 일본인 3,627명이 뽑은 '좋아하는 마츠모토 타카시 가사 랭킹'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들이 순위에 진입했다. #
[ 리스트 보기 ]
1위 루비의 반지 (테라오 아키라)
2위 붉은 스위트 피 (마츠다 세이코)
3위 유리의 소년 ​​(KinKi Kids)
4위 SWEET MEMORIES (마츠다 세이코)
5위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야스다 나루미)
6위 바람이 부는 (마츠다 세이코)
7위 졸업 (사이토 유키)
8위 겨울의 리비에라 (모리 신이치)
9위 눈동자는 다이아몬드 (마츠다 세이코)
10위 그대는 천연색 (오오타키 에이이치)


  • 2020년 고베신문에 '새벽'을 이미지한 메세지 광고를 게재했다. #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오면서 매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말이 나옵니다..

제 생활이라든가 기분이라든가 마치 마법의 거울이라도 가지고 오셔서 들여다보고 계시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때 그때 제 마음에 딱 맞았거든요.




  • 싱어송라이터 미나미 요시타카(南佳孝)와 절친한 사이다.

  • 2021년 기자가 향후 어떤 활동을 하실거냐고 묻자 "이젠 하고 싶은 거 없어, 다 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


7. 외부 링크[편집]



[1] 젊었을 때는 '호무메이도'라는 밴드를 만들어 형과 마찬가지로 드러머로 활동했다.[2] 터가 있던 자리는 현재 킬라 킬라 거리라고 불리는 도로가 되었다.[3] 반에 한두 명 있는 괴짜였다고 한다. #[4] 당시 일본에서 상당히 인기가 많았던 록 밴드다.[5] 중학교 말부터 동급생과 바바리안즈(バーバリアンズ)라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반즈로 밴드명을 바꿨다. #[6] 이때 포크 부문에서 2위였던 것이 하야카와 요시오가 이끄는 잭스(ジャックス)였다.[7] 참고로 이때 빠진 멤버의 베이스 담당은 마츠모토의 중학교 동창이다.[8] 이 당시에는 마츠모토 타카시가 아닌 '마츠모토 레이(松本零)'라는 예명을 사용했다.[9] 에이프럴 풀에서 보컬을 맡았다.[10] 한국어로 치면 습니다체.[11] 창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음악 잡지 '뉴 뮤직 매거진'에서 지상 좌담회가 열렸다.[12] 역대 일본 작곡가 싱글 판매량 1위의 빛나는 전설적인 작곡가다. #[13] 1위는 시몬 마사토헤엄쳐라! 붕어빵군.[14] 마츠모토는 이 노래를 츠츠미와 만든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로 이 노래를 꼽았다. #[15] 요시다의 솔로곡이 아니라 타 아티스트의 제공곡을 만들기 위해 콤비를 이뤘다.[16] 야스다 나루미가 불렀다.[17] 싱글, 앨범 수록곡 포함 150곡 가까이 된다고.[18] 하얀 파라솔 이전에도 앨범 'Silhouette ~シルエット~'의 수록곡의 작사를 맡은적이 있다. 이 노래가 세이코 목소리랑 너무 잘 맞아서 작사가로 섭외됐다고 한다.[19] 핫피 엔도 시절부터 친한 사이였다.[20] 80년대 일본 음악계를 대표하는 편곡가 중 한 명이다. 마츠모토는 오오무라를 동생처럼 아꼈고, 굉장히 뛰어난 편곡가라고 평했다. 오오무라는 1996년에 호흡부전으로 요절했다.[21] 결혼 이후에도 <Citron> 앨범, 싱글 <Strawberry Time>, <Pearl-White Eve>, <Marrakech〜マラケッシュ〜> 등에서 협업한 예가 있긴 하다.[22] 1981년 오리콘 싱글차트 연간 1위[23] 다만, 마츠모토는 사람들에게 '밀리언 갈거 같은데요?'라고 말했다고.[24] 한 곡을 제외한 모든 곡을 마츠모토가 작사했다.[25] <探偵物語>, <Woman "Wの悲劇"より>가 유명하다.[26] 이 노래는 마츠모토의 작사곡 중 가장 많이 팔린 노래다.[27] 마츠모토 본인이 직접 선곡한 노래들만 수록됐다.[28] 일본작사가협회가 주최하는 상이다.[A] A B C 마츠모토 타카시 개인에게 수여한 상들이다.[29] 마츠모토 타카시가 가장 많은 가사를 제공한 아티스트다.[30] 君に、胸キュン。의 작사가가 마츠모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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