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우스 헤체나우어

덤프버전 :


1. 개요
2. 활약
3. 기타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img842.imageshack.us/l5jp.jpg
Matthäus Hetzenauer
(1924.12.23 - 2004.10.3)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최고의 저격수. 최종 계급은 육군 산악[1][2]상병(Gefreiter).


2. 활약[편집]


오스트리아 티롤 출신으로 안슐루스독일군 육군 제3산악사단으로 참전해 소련군을 상대로 동부전선에서 활약하며, 총 345명을 사살했다. 핀란드시모 해위해소련바실리 자이체프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최고 기록으로 1,100미터로 적을 사살한 적이 있으며[3] 다수의 적을 사살하는 듯 여러 일화가 있다. 더욱 놀라운 건 그가 저격수로서 활동한 시기는 겨우 10개월에 불과한 짧은 기간이며, 이 짧은 기간 동안 이 모든 전적을 세웠다는 사실이다.

1943년에는 산악병으로 기본교육을 받다가 사격에 특출나게 두각이 보이자 슈타이어마르크에서 저격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44년 3월 27일에서 7월 16일까지 저격수 교육을 받은 후 제3산악사단에 배속되어 볼트액션 소총인 Kar98k반자동 소총Gewehr 43을 사용하였다. 그 후에 카르파티아 산맥, 헝가리, 슬로바키아에서 소련군에 대한 맹활약을 보여주었다.

헤체나우어는 특별한 지원 없이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최전선의 은폐된 진지에서 소련군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퍼부었다고 증언했다. “아군 부대가 공격을 개시하기 전날 밤, 포병공격준비사격을 했지만 우리는 수적으로 열세했고 탄약도 부족해 오히려 적의 대 포병 사격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단독으로 적 지휘관과 포병만을 골라 장거리 저격을 가했다. 결국 적은 잠잠해졌고 아군의 공격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1944년 11월 6일에 그는 적의 포병 사격에 의해 머리에 부상을 입어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은 후 3일 뒤에 전상장(Wound Badge)을 받았다.

대전 말기에 당시 사단장이었던 파울 클라트(Paul Klatt) 장군은 포병의 지원을 받는 소련군의 2개 중대의 공격을 헤체나우어가 저격을 통해 물리쳤다는 보고를 해 그의 뛰어난 저격술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이후 해체나우어는 1945년 4월 17일 히틀러로부터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고, 1945년 5월에는 소련군의 포로로 잡혔다가 5년간 포로수용소에서 억류당한 후 풀려나왔다.

3. 기타[편집]


해체나우어가 주로 사용한 소총7.92×57mm 마우저탄을 쓰는 볼트액션 소총인 Kar98k과 반자동 소총인 Gewehr 43인데 Kar98k는 특유의 정확도와 유효사거리로 스코프를 장착해 저격용으로 많이 사용하였으며, "한발로 반드시 한명씩 죽인다"[4]라는 그 만의 스나이퍼 법칙을 고수했다. 한편으로는 진정한 저격수라면 결코 반자동식 무기가 필요치 않다고 강조하기도 해 Gewehr 43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면에선 시모 해위해와 전투방식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전투에서는 더욱 꼼꼼하고 생각하고 깊으며, 두뇌가 우수한 사람이 적과 대결해 승리할 수 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저격 기록 2위인 요제프 알러베르거(Josef Allerberger, 1924~2010)[5]와 같은 사단 소속이기도 했다.

수용소에서 석방된 후에는 고향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회고록 등을 자주 내놓던 다른 저격수들과 달리 은거하면서 조용하고 평범하게 80세까지 살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자신이 맞서 싸우던 소련이 세월에 휩쓸려 사라지는 것[6]까지 보고서...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7 05:00:10에 나무위키 마테우스 헤체나우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당시나 전후 독일 연방군이나 육군의 산악 병과는 일종의 정예 보병으로 대한민국 육군특공대 정도에 해당하는 전력이다. 때문에, 유명한 저격수도 이 병과에서 많이 배출됐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의 독일군 측 저격수인 쾨니히 육군소령도 산악병과 장교로 설정되어 있다.[2]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면, 군대에서 지고 다니던 군장을 지고 등산로도 없는 산을 오르내린다고 생각해 보자. 어지간한 사람은 체력적으로 하기 힘든 일이다.[3] 당시 독일 저격수들은 관측병과 저격병을 2인 1조로 운영했으며, 관측병이 적을 사살할 거리를 대략 계산할 수 있다. 사살되면 관측병에 의해 기록이 남는 것이다. 둘이 짜고 친다면 지어낼 수 있는 거라지만, 전적으로 항시 기도비닉을 유지하고 한 발 한 발에 목숨을 담보로 하는 그들에게 전적으로 모두 지어내기란 힘들 것이다.[4] 말년에 인터뷰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망원경을 단 Kar98k로 700~800m에 서 있는 적을 사살할 수 있다라고 했다. 즉 Kar98k의 유효사거리가 500~1000m 인데 바람의 영향이나 목표물까지 거리의 계산을 해도 당시의 기술로는 쉽지않음에도 불구하고 저 말을 지켰다는 걸 보면 탄도계산능력이나 조준술이 뛰어나다는 반증이다.[5] 이 사람도 정말 대단한 저격수인데 독소전 당시 소련 육군이 노획해 굴리던 하노마크 장갑차운전병을 관측구(가로 30cm 세로 10cm) 사이로 저격해 전복시키는 기예를 선보인 바 있다. 소련군이 노획한 하노마크를 막기 위해 분석을 한 결과, 하노마크의 구조상 운전수가 죽으면 다른 인원이 바로 대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운전석 공간이 좁기 때문에 변변한 대전차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 하노마크를 막으려면 하노마크가 기동 중인 상태에서 운전수를 죽이는 것 밖에 없다는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관측수의 눈이 보일 정도의 근거리에서 쐈다지만 총알 한 발로 정면에서 달려드는 장갑차를 제압하는 일은 보통 실력과 담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12대의 하프 트랙 중 7대를 관측구 저격으로 정지시켰다.[6] 우연이지만 소련의 저격수인 바실리 자이체프는 소련이 무너지기 10일 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