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밴 뷰런

최근 편집일시 : 2023-09-11 19:10:41





마틴 밴 뷰런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미합중국 제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
Martin Van Buren


파일:1280px-Martin_Van_Buren.jpg

출생
1782년 12월 5일
미국 뉴욕주 킨더후크
사망
1862년 7월 24일 (향년 80세)
미국 뉴욕주 린더널드
재임기간
제8대 부통령
1833년 3월 4일 ~ 1837년 3월 4일
제8대 대통령
1837년 3월 4일 ~ 1841년 3월 4일
서명
파일:마틴 밴 뷰런 서명.svg

[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아브라함 밴 뷰런 1세
어머니 마리아 호스 밴알렌
배우자
한나 호이스 밴 뷰런(1783~ 1819, 사별)
자녀
아브라함 밴 뷰런 2세, 존 밴 뷰런 포함 5명
학력
해당사항 없음
종교
개신교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장
168cm[1]
최종 당적
[2]
별명
작은 마술사(The Little Magician)[3],
킨더후크의 붉은 여우(The Red Fox of Kinderhook)[4]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rtin_Van_Buren_by_George_PA_Healy,_1858.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약력
3. 생애
4. 여담
4.1. 이름 관련



1. 개요[편집]


미국의 제8대 부통령이자 제8대 대통령.

최초의 독립세대 이후에 태어난 대통령이다.[1]


2. 약력[편집]




3. 생애[편집]


뉴욕주의 킨더후크에서 출생. 그의 아버지 에이브러햄 밴뷰런은 시작은 선술집 주인으로 "보통 사람"이었다. 미국은 신분이 없는 공화정 민주주의 국가였지만 밴뷰런이 활동했던 당시에는 국가의 주요 요직을 '귀족'이나 다름없는 명문가의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마틴 밴뷰런은 그런 점에서는 당대 거물 정치인 앤드루 잭슨과 함께 '평민' 출신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출신 성분은 그의 정치적 커리어에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능력 좋아 말솜씨가 좋아 킨더후크의 유명한 변호사 밑에서 법률 공부를 받은 적은 있지만 정규 교육과정은 거친 적이 없다. 어쨌든 그 능력으로 변호사가 되었으며, 그 후 정치에 진출하여 민주공화당에 입당한 그는 뉴욕주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1815년 뉴욕 검찰 총장이 된 것을 시작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상류층의 예의범절을 완전하게 익히게 되는데, 그런 과도하게 드러나는 "배운 예의범절"이 데이비드 크로켓 등에게는 위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1824년 자신이 지지했던 앤드루 잭슨존 퀸시 애덤스에게 낙선 아닌 낙선을 당하게 되자 강력한 선거 조직의 필요성을 느껴 자신을 정상으로 한 파벌을 만들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현대 정치의 시작이라고 보게 된다. 그가 미국 정치에 남긴 영향으로는 직업 정치인으로서 '머신(Machine)'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머신이란 대중을 투표에 동원하는 촘촘히 구축된 선거조직을 말한다. 이렇게만 보면 멀쩡해 보이는 '머신'이 왜 문제가 되냐면,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대중 동원이라는 게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를 떠올리게 하는 금품 살포를 비롯한 부패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런 머신은 구축과 유지에 큰 비용이 드는 탓에 한 사람이 쓰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후계자가 물려받는 경우가 빈번하고, 따라서 "계파"의 구축과도 친연성이 크다. 그래서 영단어 "머신 폴리틱스(Machine Politics)"에는 부정적 의미가 짙게 깔려 있다. 그 만큼 밴뷰런의 악평도 높은 것.

그리하여 1828년 잭슨이 당선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되어 국무장관에 오르게 되었고 1832년에는 부통령 존 C. 칼훈이 사직하자[2] 잭슨은 그를 부통령으로 지명하였다.

그리고 4년 뒤에는 잭슨의 인기를 등에 업고 마침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부통령을 역임하고 대통령이 된 경우는 일반적으로 이 경우를 최초라고 본다.[3] 그러나 대통령이 되자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 1837년의 공황이 터지고 만 것. 이 공황의 규모는 1930년대 대공황 만을 기억하는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공황 발생 전에는 사상 최악의 공황으로 꼽힐 정도였다. 이로 인해 그의 인기는 급락하고 말았다. 근데 사실 이건 잭슨 때 연방은행 없에겠다고 뺀 돈을 사은행들한테 넣어놨더니 돈놀이나 마구 하다가 거품 꺼졌는데 영국 자본까지 함께 빠져나가면서 생긴 문제였는지라, 본인의 전적인 책임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헨리 클레이가 극구 반대하며 협력을 요청할 때도 멍때리고 돕지 않았던게 밴뷰런이었던 지라, 본인의 책임이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또한 타 국가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텍사스 공화국의 연방 가입을 거부하는 등, 화끈했던 전임자 잭슨에 비해 우유부단하게 비춰졌고 이를 두고 휘그당에서는 그의 이름을 빗대 Martin Van Ruin(마틴은 폐허를 만들었다!)라는 식으로 공세적인 선거를 펼쳤다. 캐롤라인호 사건을 윈필드 스콧 장군을 파견해 미영간의 분쟁을 차단한 것, 제2차 세미놀 전쟁(인디언 전쟁의 일부)을 승전으로 이끌고 아메리카 원주민 이주 정책을 유지하는 등 대외적으로는 업적을 세웠지만 크게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다.

이미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도 잭슨 밑의 많은 이들도 등을 돌린 상태였고, 결국 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서 후보분열이 일어나 런닝메이트도 없을 정도였다. 1840년 결국 재선에 실패, 윌리엄 해리슨에게 패하고 백악관을 나오게 되었다.[4] 사실 선거인단에 비해 선거 격차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고 한다. 127만표 대 112만표. 6.1% 격차였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대통령에 도전했고 기어이 1848년에는 독자 출마를 감행하였다. 그가 새로 만든 자유토지당은 서부개척지를 노예제로 부리지 말고 해방 노예들이 토지를 일구게 하는게 경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낫다는 개념있는 주장을 했다. 자유토지당은 비록 선거에서는 실패했지만 하원과 상원에서 4년간 의미있는 제3당으로 자리매김했다. 밴뷰런의 선전 (10% 득표)은 민주당의 표를 일부 갉아먹어 재커리 테일러의 당선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참고로 자유토지당은 1852년 공화당에 합류하지만 마틴 밴뷰런은 민주당으로 복당하여 죽을 때까지 민주당원으로 남았다. 정계 은퇴 후에는 조용히 살다 1862년 세상을 떠났다. 강력한 노예제 반대입장으로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어느정도 역할을 한 셈이다.

4. 여담[편집]


파일:MartinVanBuren.jpg

키가 168cm이었는데 23대 대통령인 벤저민 해리슨과 같으며 163cm였던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과 더불어 역대 미국 대통령 중 단신 라인이다. 그래도 밴 뷰런은 위 사진에서 보듯 비율이 좋아 170cm 중후반 정도로 보일 만큼 더 커보이는 편이다. 이는 벤저민 해리슨도 마찬가지다.

그의 낙선 이후 20여년간 누구도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는 이것을 모두 지켜보고,[5] 링컨의 당선까지를 보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게다가 존 타일러까지 사망하는 것도 보고 죽었다(타일러와 밴뷰런 모두 1862년 사망인 건 같지만, 타일러가 먼저 죽었다). 퇴임 이후 살아생전에 무려 8명의 후임 대통령을 보고 죽은 인물이다.[6] 역대 최장수 대통령인 지미 카터(39대)도 조 바이든(46대) 임기 내에 사망하게 된다면 이 기록을 아깝게 세우지 못한다.[7]

독립전쟁 이후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8] 역대 미국 대통령 최초로 영국 신민 출신이 아닌, 내츄럴 본 미국인인셈. 퇴임 후 13년 만인 1853년 유럽을 방문해, 유럽을 방문한 최초의 전직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그의 아내인 한나 밴뷰런은 그의 먼 친척이자 어린 시절 짝사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나 밴뷰런이 오래 살지 못한데다가 마틴 밴뷰런 본인의 자서전엔 한나에 대해서 잘 언급되어 있지 않아 아내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다만 마틴이 아내가 죽은 후로도 43년을 살았음에도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나 주변인들의 언급을 볼때 부부애는 각별했던거 같다. 사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는 소꿉친구와 결혼한 케이스가 제법 있다. 밴뷰런, 시어도어 루스벨트, 해리 S. 트루먼이 그 예다.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인해 얻은 별명은 찬양자들 사이에서는 작은 마술사(The Little Magician), 정적들 사이에서는 킨더후크의 붉은 여우(The Red Fox of Kinderhook)라고 불렸다고 한다. 유려함과 우유부단함을 동시에 갖고 있었던 전형적인 정치인이라 부를만 했던 것. 존 퀸시 애덤스는 제임스 메디슨에 표리부동을 겸비한 사람이라며 비판했다. 전체 미국 대통령 중에서는 선호도가 평균~평균 밑 정도에 든다.[9]

대통령이 되기 전 한 상원의원이 밴뷰런에게 "해는 동쪽에서 뜬다고 하는데 자네는 그걸 믿나?"라고 묻자 밴뷰런은 "아침에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것이 상식인 걸 알고 있지만 난 동이 틀 때까지 일어나지 않아서 뭐라고 말할 수 없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밴뷰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 대통령편에서 죽기 직전에 노예제에 대한 대립으로 남북전쟁이 터질 거라는 걸 예견했다고 나와 있는데, 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밴뷰런이 사망한건 1862년 7월이고 남북전쟁이 발발한 건 그보다 한참 전인 1861년 4월이다. 물론 정치적 감각을 보아 그 정도도 눈치 못챌 인물은 아닌 것 같다.[10]

최초로 최연소 기록을 깬 대통령이다. 취임 당시 54세로, 그 이전에 최연소 기록은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57세 67일)이 가지고 있었다.[11][12]

미국 역사에 관심없는 게임덕들이 의외로 이름을 알고 있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다름아닌 반 뷰렌 프로젝트 때문에 반 뷰렌 페이지를 읽어봐도 알 수 있겠지만 인터플레이가 자기네 프로젝트에 이 이름을 붙인 까닭은 처음에 V13 프로젝트라 부르던 것이 VB와 비슷해보이자 아예 대통령 이름을 붙여 부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을 굉장히 좋아하여 대통령 시절 즐겨먹었다.

4.1. 이름 관련[편집]


성은 뷰런이 아닌 '밴 뷰런'이며,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네덜란드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이름은 마르턴 판뷔런(Maarten Van Buren)이었으나 후에 이름 마르턴을 영어식인 마틴으로 고쳤다.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네덜란드어)를 모어로 쓴 대통령.

그의 성에 붙은 van은 독일어 von과 의미가 같지만 van은 귀족 성씨뿐만이 아니라 평민의 출신지를 가리키기 위해서도 많이 사용되었는데[13], 그의 성인 '밴뷰런'(판뷔런)은 미국으로 이주한 첫 조상이 자기 출신지인 뷔런(Buren, 네덜란드 헬데를란트 주 뷔런)에서 따와 정한 성으로 귀족 핏줄과는 상관없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01-05 09:19:18에 나무위키 마틴 밴 뷰런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7 05:56:11에 나무위키 마틴 밴 뷰런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즉 처음으로 미국이라는 국가가 생겨난 뒤 태어난 대통령. 다만 후임 대통령인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독립 이전(1773년)에 태어났다.[2] 그와 절친했던 헨리 클레이 때문이었다는 얘기가 있다.[3] 존 애덤스토마스 제퍼슨 같은 경우는 당시 선거 제도가 차점자, 즉 2등을 부통령에 앉히는 식이었다.[4] 그러나 해리슨은 취임식날 내린 비를 철철 맞으면서 장시간 동안 연설하다가 폐렴에 걸려 취임 한달만에 사망했다. 게다가 68세의 고령이였다.[5] 특히 자신의 재선을 막은 윌리엄 해리슨과 이후 대통령인 재커리 테일러가 임기 중 사망한 것도 있었다. 예외는 제임스 포크와 제임스 뷰캐넌. 둘은 재선 출마를 하지 않았고, 특히 포크는 임기 마치고 얼마 후 사망했다.[6] 대한민국의 전두환과 매우 비슷한 케이스이며 전두환은 퇴임 후 문재인까지 무려 7명의 후임 대통령을 봤으며, 밴뷰런과 같이 그의 바로 뒤의 후임 4명이 사망하는 것까지 보았다. 게다가 전두환은 20대 대선 양당 최종 후보까지 결정 짓고 나서 18일 뒤에 사망했는지라 그가 조금만 더 건강했더라면 밴뷰런과 같은 기록을 갱신했을 가능성도 있었다.[7] 카터도 후임 대통령을 많이 보긴 했지만(현 기준 7명), 아버지 부시와 도널드 트럼프를 제외하면 모두 재선에 성공했기 때문에 밴뷰런보다 적을 수 밖에 없었다.[8] 그러나 워싱턴 취임 이후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은 존 타일러이다. 이후 12대 대통령이 되는 재커리 테일러는 밴뷰런과 같이 독립전쟁 이후이자, 워싱턴 취임 전에 태어난 대통령이다.[9] 그래서 C-SPAN이 평가할 때는 재커리 테일러, 러더퍼드 B. 헤이스, 체스터 A. 아서, 벤저민 해리슨과 같이 중하위~최하위권에 속할 정도로 평가가 좀 박한 편이다. 심지어 버락 오바마 퇴임 후인 2017년에는 체스터 A. 아서와 같이 하위 10위권(밴뷰런 34위, 아서 35위)에 들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퇴임 후인 2021년에는 이 둘은 하위 10위권에서 벗어나고 트럼프와 재커리 테일러가 새로 하위 10위권 내에 들었지만, 밴뷰런의 순위는 테일러 바로 위였고 지난 평가와 같은 34위 그대로이다.[10] 다만 아주 오류만은 아닌게 다들 남북전쟁이 4~5년이나 갈 줄 몰랐다. 즉 남북전쟁의 발발이 아닌 남북전쟁의 참혹한 결말을 예견했다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남북 합계 총 63만이 죽고 부상자 37만에 전쟁비용은 북부만 32억 달러로 부채가 30배 가까이 늘었는 결말을 낳았음을 감안해보면(더군다나 전쟁 직후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이는 직전까지 미국 역사상 임기 중에 병사한 대통령은 두번이나 있었지만 링컨은 아예 첫번째로 암살당한 대통령이 되었다.) 거기서 나온대로 '끔찍한 동란' 운운은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11] 밴뷰런 이전의 대통령들은 전부 얼추 비슷한 나이에 취임했다.(존 애덤스앤드루 잭슨은 61세에 취임했고, 나머지는 전부 57~58세에 취임했다.)[12] 이후 최연소 기록은 존 타일러, 제임스 K. 포크, 프랭클린 피어스, 율리시스 S. 그랜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깼다.[13] 다른 예시로 네덜란드 출신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도 성씨 자체가 반고흐(판호흐)다.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혈통의 기타리스트 에디 밴 헤일런(형 알렉스 밴 헤일런도 마찬가지)은 밴헤일런(판할런)이 성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