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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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마한(馬韓)은 기원전부터 6세기까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분포한 소국들을 일컫는 말이다.
2. 상세[편집]
3세기 중국의 사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마한의 소국명들이 나열되어 있으며, 《후한서》에는 총 54개국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마한 거수국들 중 하나인 백제(伯濟)국이 고대 국가 백제(百濟)국으로 발전하면서 경기·강원 영서, 충청 서북·전북 서북, 충청 동남·전북 동남, 전남 순서로 차례로 병합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마한 거수국들은 6세기 초반까지는 백제의 직접 지배 세력으로 모두 편제되지 않았으나, 문자 기록이 상당히 적은 관계로 가야에 비해서는 덜 조명받고 있다.
하지만 최근 고고학적 연구가 활발해져서,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백제와 마한 사이 관계에 대한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흔히 연맹체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각 세력별로 연합과 대립을 반복했기에 마한 54개 소국 전체가 단일한 연맹체라고 보는 것에는 무리가 많다.
말 마(馬) 자를 쓰고 있는데 무슨 의미인지는 정설이 없다. 진한이나 변한은 왜 진, 변이 붙었는지에 대해 이런저런 해석이 나오지만 마한은 더욱 애매하다. 다만 일본 왜5왕이 중국 유송에 보낸 국서에서 마한을 음이 비슷한 모한(慕韓)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라는 뜻이 중요하다기보다는 그저 고대 한국어를 음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목지국의 유물 중 말 장식이 달린 허리띠 버클#이 자주 발견되는 것을 보아 정말 말 자체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철기문화가 시작되는 기원전 3~2세기경부터 형성된 것으로 본다. 한반도의 고대사 기록이 매우 부실해서[1] 위치나 영역에 대한 것들은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토대로 조사가 진행 중이다. 초기 철기시대에는 고조선에서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이 도피해 세운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건마국이 잠깐 맹주국이었으나, 이후 이 지역이 한나라 및 한사군과의 교역 관계를 통해 성장하는 단계에서는 목지국에게 주도권이 넘어가며 소국 연맹 형태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마한을 구성하는 소국의 개수는 《후한서》에 54개로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달리 말하면, 중국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세력이 큰 마한 내 도시국가체가 54개나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목록을 보면 당시 바다 건너 중국과 교류가 쉬운 서해 및 남해에 인접한 지역 위주다. 따라서 한반도 내륙에도 여러 성읍국가가 있었는데 기록에서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국립청주박물관은 2019년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충북 지역에서도 1~3세기 마한계 소국의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면서 충북 지역 소국들이 《삼국지》 기록에서 빠졌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처음에는 마한 목지국 휘하 거수국 중 하나였던 백제국이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안성천-아산만 일대, 금강 유역권 일대, 섬진강 유역과 남해안 일대, 전남 서남부 일대의 소국들을 차례대로 해체시켜가면서, 중앙집권 체제 하에 완전히 합병한 것으로 여겨진다.
마한 소멸 시기 및 백제로의 편입과정에는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일단 《삼국사기》 초기 기록대로 근초고왕 당시 모든 마한 거수국을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제했다는 학설은 거의 부정된 편이다. 마한 연맹에 속했던 모든 지역은 백제가 다분히 일방적으로 짜놓은 병합 프로그램에 따라 공납-간접 지배-직접 지배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다만 이 병합 진척도가 대체로 백제국에 보다 가까웠던 순으로 경기-충청-전라 순이었던 것이었고, 특히 전라도 중에서도 목지국이 거수국이었던 시절부터 실력이 만만찮았던 전남 서남부 일대가 적어도 6세기 전반까지 자치력을 더 강하게 지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세부적으로 보면 충청도 남부 일대는 목지국의 저항 탓에 전북 서북부보다 백제 직접 지배화가 늦어졌고, 전라도 동부 일대는 간접 지배로는 백제에게 더 일찍 영향권에 들어갔으나 반로국이 주도하는 가야 연맹의 일원으로 포섭되어 아예 백제의 영향권 자체에서 이탈하다 백제와 무력 대결까지 벌이는 등 소소한 차이가 꽤 많다.
단, 마한이라는 호칭 자체의 사용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미 4세기 초에는 소멸했다고 봐야한다. 282년 신미국이 서진에 조공을 보낼 때 마한이란 명칭을 사용하여 해당 호칭이 목지국이나 백제국만의 전유물은 아님을 입증했지만 그 이후에는 아예 사용례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히 백제의 강력한 견제와 압력 때문이다.
3. 기록과 역사[편집]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각각의 사서에 기록된 첫 문장은 이렇다.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城郭.
마한은 서쪽에 있다. 그 백성은 정착하여 농경을 하는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는 법을 알고 면포(綿布)를 만든다. 나라마다 각각 우두머리가 있어서 세력이 큰 사람은 스스로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고 성곽이 없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한(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개국이 있다. 북쪽으로 낙랑, 남쪽으로 왜(倭)와 접한다.
《후한서》 〈동이열전〉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았고,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후한서》 〈동이전〉
위에서는 삼한 중에서 마한이 가장 강력하다고 나온다.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변한·진한 24국) 가운데 12국은 진왕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임금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임금이 되지는 못하였다.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中 변진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古之辰國也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2]
《삼국지》(三國志). 한(韓)의 기록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 凡七十八國 … 皆古之辰國也
한은 세 갈래가 있는데 마한, 진한, 변진(변한)이 있으며... 모두 78개국이다... 전부 옛날의 진국이다.
《후한서》(後漢書) . 한(韓)의 기록
3.1. 온조왕의 마한 경략[편집]
한국 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다. 〈백제본기〉의 온조왕 대 기록은 백제의 건국세력인 온조 집단이 한강 유역에 남하하여 마한 영역을 할양받아 정착한 이후 마한을 정복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온조왕 대 마한 관련 기사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초기 마한과 백제의 관계에서는 마한이 우위에 있어, 공물을 바치거나 천도와 강역 확정 시에 마한에 알리고 전리품인 전쟁 포로를 마한 왕[3] 에게 보내는 등 복속 의례를 다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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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기원전 9년) 가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아 마한(馬韓)에 보냈다.13년(기원전 6년)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다.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으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18년(BC 1년)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하여 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산채로)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시간이 좀 더 지나 백제의 영역 확장과 국력의 성장으로 마한왕과의 갈등이 발생하는 등 관계 변화가 언급된다. 서기 7년에는 온조가 진한과 마한을 병합할 계획을 가졌다는 기록이 나오고, 이어 마한 통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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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서기 6년)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디딜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 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25년(서기 7년) 봄 2월, 왕궁의 우물이 갑자기 넘쳤다. 한성(漢城)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우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크게 일어날 징조이고,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합병할 징조입니다." 임금이 듣고 기뻐하며 드디어 진한과 마한을 합병할 마음을 가졌다.
다음해인 서기 8년 10월 온조왕이 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마한을 공략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온조왕이 동년 7월에 마한 병합을 계획했다는 기사로 미루어 보아 준비 기간만 3개월이 넘게 걸린 듯 보이며, 원산성과 금현성은 이듬해 4월까지 함락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온조왕 대에 마한은 멸망했으나, 이것은 고고학적 연대 및 중국 사서의 기록과 맞지 않으므로 실제로는 책계왕 시대에 벌어진 일을 소급해서 끌어다 집어넣은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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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서기 8년) 가을 7월, 임금이 말하였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마한이 다른 나라에게 흡수되면 순망치한의 격이 될 것이니 뉘우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후환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
겨울 10월, 임금이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병사를 내어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27년(서기 9년)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그 후 재위 34년째인 16년에 마한의 옛 장수였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4] 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이 병사 5,000명을 이끌고 이를 제압했다는 기록을 끝으로 한동안 등장하지 않는다.
[ 펼치기 · 접기 ] 34년(서기 16년)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친히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36년(서기 18년) 가을 7월에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대두성(大豆城)의 민가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쌓았다.
이후 100여 년이 지나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마한 세력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이는 《후한서》 〈효안제기〉 및 〈동이열전〉에서 인용해온 기사로, 상술한 온조왕 대의 마한 정벌 기사와는 달리 연대를 어느 정도 취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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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이 마한과 예맥의 병력 10,000명을 이끌고 현도성을 공격했다는 기사다. 《삼국사기》의 편찬자도 "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 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멸망한 후 다시 일어난 것인가?"[5] 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김부식 등 《삼국사기》 편찬진도 고려시대 당시에 존재하던 여러 옛 기록을 모아서 《삼국사기》를 쓰고 있었지만, 애초에 이 옛 기록들이라는 것부터가 기전체 같은 체계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구성이었고, 초기 기록의 연대도 자국의 역사를 늘리고 싶었던 후대인들에 의해 앞당겨지는 바람에 중국 사서와 비교했을 때 앞뒤가 안 맞았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어디까지나 삼국시대가 끝난 후에도 수백 년은 지난 고려시대 중반에 쓰인 역사서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6]
이 밖에도 《삼국지》 이후의 시대인 《진서》에서도 열전에 마한을 다루고 있고, 마한이 함령 3년(277년)부터 태희 원년(290년)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쓰여진 《삼국사기》 중 온조왕 대 마한 정복으로부터 250년이 지난 시점의 기록이 된다.
결론적으로 온조왕 대 백제의 마한 관련 및 정복 기사들은 연대가 어긋나긴 했지만 일관성과 상호 연관성만큼은 뚜렷하여 역사적 사실이 반영된 사료임을 인정받고 있다.[7] 다만 주류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은 3세기 말엽에서 4세기 정도의 고이왕 대 이후의 사건이 백제 초대 국왕인 온조 대로 소급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3.2. 근초고왕의 침미다례 정벌[편집]
자세한 내용은 근초고왕/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라타와케(荒田別)와 카가와케(鹿我別)를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개국[8]
을 평정하였다. 이에 병사를 서쪽으로 이동시켜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만(南蠻)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도륙하고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 역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그때 비리(比利), 벽중(辟中), 포미(布彌), 지반(支半), 고사(古四)의 읍[9] 이 스스로 항복하였다.3월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근초고왕 대에 마한을 완전히 멸망시켰다고 추정했으나, 여기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사실 근초고왕의 마한 경략에 대한 기록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근초고왕이 실제 마한을 공격했는지조차도 불확실한 점이 있다. 다만 정황상 근초고왕 시절에 마한 지역의 대부분을 정복해 직할지로 삼았으리라 추정했을 뿐이다. 명확한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설은 2000년 무렵까지는 정설로 취급했으나, 이후 문헌 연구 및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이러한 결론은 현재 부정되고 있다.
일단 근초고왕의 마한 정복설에 대해 문헌 사학자들의 잇따른 반론이 제기되었다. 기존의 문헌 사학자들은 상술한 《일본서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침미다례가 '남만(南蠻)'이라 표현된 것은 당시 왜(倭)의 입장에서 남쪽이 한반도일 수 없으니 해당 기사가 본래 백제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라는 증거라고 해석했다. 즉 주어를 왜에서 백제로 바꿔서 신공 49년(서기 369년) 백제 장군 목라근자가 남쪽에 위치한 마한을 정복했다고 본 것이다.
위의 주장이 근거로 한 논거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나, 침미다례가 마한 전체를 뜻하는 용어로 쓰인 적이 없다는 점, 남쪽에는 마한뿐만 아니라 가야도 있으니 침미다례를 마한의 한 국가인 신미국(新彌國)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 진구 황후의 실존 여부 자체에 대한 논란, 고고학적 성과와의 불일치 등을 들어 일본서기의 기사는 단순히 마한 남부의 잔여 세력을 간접 지배했다는 의미일 뿐, 근초고왕이 마한을 완전 정복하여 직접 지배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11]
일각에서는 위의 《일본서기》 〈신공기〉 기록에서 정벌의 주체로 기록된 '왜(倭)'가 '예(濊)', 즉 예맥을 음차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는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 우선 해당 가설의 근거 중 "조선시대까지 왜(倭)의 발음은 '예'였다"는 부분은 단지 일본을 지칭하는 한국어 고유어를 한자음으로 착각한 것에 불과하며[12] , 역사적으로도 왜라는 한자가 예맥을 지칭하는 경우는 전혀 찾을 수 없다. 3세기의 《삼국지》에서도 예(濊)와 왜(倭)라는 표현은 각각 동예와 일본 열도의 열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명확히 구별된다.
아무튼 백제의 영향력은 영산강 일대를 비롯한 전라남도 지역에 4세기 후반부터 침투하는 모습이 나타고 있어[13] 이를 근거로 문헌사학계에서는 5세기 경에 영향력이 미치거나 간접 지배가 실시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 후 동성왕 시절의 탐라 지역에 대한 무력 시위 기록에 주목하여 동성왕이 탐라, 다시 말해 제주도를 정벌하러 가는 과정에 무진주에서 탐라의 항복을 받았다는 내용이라 직접 통치까지는 아니라도 전남 지역이 이미 백제의 지배력은 미치고 있는 지역으로 보기도 한다.[14] 적어도 동성왕 시기에 이르러야 지배력 강화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본다. 일부 문헌사학자들은 《일본서기》에 성왕이 여러 나라를 정벌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을 마한으로 해석하여 성왕 대에 마한을 정벌했다고 해석한다.
일단 현재 주류 문헌사학계는 늦어도 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전남 지역 전체에 대한 직접 지배가 이뤄졌다고 보며, 무령왕이 상차리(上哆唎), 하차리(下哆唎), 사타(娑陀), 모루(牟婁) 등 4현을 합병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이 지역들을 섬진강 유역이나 가야 일부 지역으로 해석해 간접 통치하에 있었던 영산강 일대와 달리 별개의 독립 세력으로 있다가 무령왕 대에 섬진강 유역을 합병했다고 보기도 한다.
최근 전라남도 지역에서 발견된 여러 고고학적 성과들, 특히 전라남도 남해안과 내륙 지방에서 마한의 독자적인 고분 축조가 6세기까지 이어졌다는 사실 등은 남해안 소국들이 6세기까지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했다는 주장에 결정적인 힘을 실어줬다. 2015년과 2016년에는 전라남도 내륙 지역인 나주시와 화순군의 발굴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나주 복암리 고분 발굴 결과 적어도 5세기까지 나주 지역에 마한의 독자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5] 2016년에는 전라남도 내륙 지역인 화순군 회덕 고분군 발굴 결과가 새로 발표되었는데 6세기에 대규모의 독자적인 세력이 이 지역에 존재했으며, 이 세력은 백제, 왜, 대가야와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사
2018년 발표된 전라북도 정읍시 지역의 고고학 연구 결과는 동진강 이남의 전라북도 지역에도 역시 6세기초까지 강력한 독자적인 세력이 존재했으며, 이들 세력이 몰락한 것은 전라남도 소국 세력의 직접 지배 기반 해체와 거의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진강 이북의 익산시, 전주시, 완주군 지역에도 오랫 동안 여러 소국들이 유지되었으나 한성백제의 웅진 천도 이후 몰락하게 된다. 이러한 고고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현재 고고학계[16] 에서는 6세기까지 전라남도 지방에 독자적 소국 세력들이 여전히 온존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17]
한편 2000년대 들어 풍납토성 발굴로 온조왕 대에 이미 백제의 국력이 상당했지 않느냐는 추정이 나오면서, 온조왕 대의 마한 정벌도 사실로 보는 학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풍납토성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고학 자료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것이며 풍납토성은 온조왕대에는 현재 발굴된 상태에 훨씬 못 미친다. 또한 이는 2010년대 이후 밝혀진 충청도와 전라남도 지역의 고고학적 성과들에 의해서 완전히 부정되고 있다.
해외와도 무역을 했는데, 함평에서 일본의 스에키 도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
위치나 영역에 대한 것들은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토대로 조사가 진행 중이다.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목지국을 중심으로 소국 연맹 형태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3.2.1. 마한 정복 시기에 대한 문헌사학계의 반론[편집]
윗 문단의 내용은 주로 고고학을 증거로 한 것으로, 근초고왕 이후로도 마한 세력이 잔존하다 무려 6세기, 백제의 웅진 천도 시기나 되어서야 마한계 반독립적인 소국 세력이 소멸하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윗 문단 각주에 서술한대로 문헌사학계에서는 근초고왕 대 마한 완전정복을 대체로 인정하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일본서기》 〈신공기〉에 대한 불신을 근거로 근초고왕의 마한 정복을 부정할 수 없다.
- 고고학적 변화는 문헌적 변화보다 늦게 나타난다.
이상의 근거들을 통해, 문헌사학계는 학자마다 조금씩 이견이 있기는 하나 독립적인 세력으로서의 마한 집단은 근초고왕 대에 소멸된 것이 맞다고 본다. 상술한 바와 같이 고고학적으로도 4세기 후반 이후부터는 백제의 강력한 영향력이 충청도 및 전라도에 미치는 것으로 나타나는 이상, 이는 문헌학계만의 의견이 아니다.
4. 백제와의 관계 및 정복 과정[편집]
종전에는 《삼국사기》 기록을 근거로 백제 온조왕 때 맹주국인 천안 목지국을 정벌해 경기도와 충청도를 제패하고,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대에 해남 신미국을 정벌함으로써 마한 전 지역을 완전히 병합해 직접 통치를 시행한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 연구 결과 온조왕은 커녕 그보다 훨씬 후인 3세기 중반, 즉 고이왕 대에 들어서면서 목지국 세력이 약화되었고, 책계왕 혹은 분서왕 시대가 되어야 그 세력이 크게 꺾이면서 경기도 지역을 제패하게 되었으며, 목지국의 저항 여력이 완전히 없어진 건 4세기 초 비류왕 대였다고 드러났다.[22]
목지국의 저항 역량이 없어지기 전까지 충청도 서북부에 백제의 영향력이 제대로 나타나지 못했다는 점은 목지국이 그렇게 순순히 패권을 내놓지 않았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근초고왕 대에도 금강 유역권, 영산강 유역권, 섬진강 유역권의 소국들은 여전히 목지국 시절처럼 자체적인 국력과 자치성을 보존하고 있었고, 영산강 유역권은 한성이 함락되는 475년 이후 백제의 국력이 약화된 틈을 타 오히려 크게 성장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후 백제 동성왕 대에 탐라 정벌을 시도했으며, 무령왕 대에 상차리, 하차리, 사타, 모루 네 현을 합병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가 마한 전역을 복속해 직접 지배지로 편성한 것은 6세기 초인 무령왕 대이고, 전 지역을 일원적인 지배 체제로 편성해 행정망을 완비한 것은 538년 사비 천도를 전후한 성왕 시기로 보인다. 즉, 웅진백제 이전의 백제사는 마한 전역을 자치 세력에서 간접 지배지로, 그리고 간접 지배지를 직접 지배지로 전환하는 긴 과정이었으며 이러한 과정이 무령왕 대에 종결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론이다.
이 부분에서 대중에게 퍼진 큰 오해는 마한 전체가 마치 제대로 된 하나의 고대 국가로서 백제와 맞서면서 영토를 점점 잃어가며 저항하다가 전남까지 밀렸다는 것인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 백제는 마한과 별개의 정치체로 공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백제는 고구려계 유이민과 한강 토착 세력[23] 이 융합한 백제국으로 시작했으며, 마한의 구성국 중 하나였던 백제국이 세력을 키워서 기존 종주국이었던 목지국을 타도한 후 목지국 대신 마한의 종주국이 된 것이었다.
다만 백제는 기존의 연맹국가 단계였던 목지국 체제와 달리, 고구려계 유이민의 선진 문물을 기반으로 한 백제국이 그 구성국들을 직접 지배 체제로 편입시키겠다는 확고한 장기적인 목표 아래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마한 소국들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 확대 양상은 시기별로 백제의 국력과 거리, 대외 상황, 그리고 각 소국의 자체 역량에 따라 달라졌던 것이지, 마한 전체가 하나의 국가로서 백제에게 차례차례 영토를 잃어가며 정복당했던 것은 아니다.
한성백제, 웅진백제 시기의 소위 "잔여 마한 세력"이라고 잘못 이해되는 전라도 일대 소국들도 백제와 무관하지 않았으며 하나의 단일 고대국가도 아니었다. 근초고왕 시절부터 백제가 힘을 투사해오던 전북 군산 일대 및 익산, 전주, 완주 지역은 웅진 천도 무렵의 5세기 후반까지 유지되었으며, 동진강 이남의 전북 지역과 전남 영산강 지역, 남해안 지역, 섬진강 지역의 소국들은 그 이후 6세기 초까지 유지됐었는데 이들은 저마다 세력 규모나 문화의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금동관, 금동신발 등의 금동 위세품이 전라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서울 풍납토성에서 영산강 토기가 출토된 점을 통해 직접 통치 시기가 아니었더라도 백제의 영향력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중에서 영산강 세력이 자리한 전남 서남부는 나름대로 세력이 강성했기에 남해안과 전남 동부보다도 약간 늦게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때문에 전남 서남부 영산강 유역은 마치 백제 유민 의식이 없었던 것처럼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래봐야 전남 서남부 지역이 백제에 완전히 편입되는 시기는 다른 전라도 지역과 30~50년밖에 차이나지 않으며, 직접 지배 시기에만 지배 하에 있었다고 보는 것도 합리적인 견해는 아니다. 오히려 사비백제의 백제계 유물은 영산강 유역에서도 풍부하게 발굴되고 있는 형편이다.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국가 정체성이 없었다고 보는 견해도 사실과 다르다.[24]
마한과 백제의 관계성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고대 국가의 행정 특성을 알아야 한다. 국가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개 삼국시대의 지방 행정력은 조선시대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일례로 삼국 중 가장 발전 속도가 빠르고 선진적이었던 고구려만 보더라도 기록상 한사군을 정벌한 시점은 4세기 초인 314년이었는데, 정작 이 시기 이후에도 한동안 고구려와 차별화되는 한사군계 토착 유적이 4세기 중·후반 무렵까지 발견된다. 옥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로 고대 국가의 행정이 정교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둘째로 행정의 변화가 토착민 생활 양식의 즉각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마한에서 6세기 초까지 백제 조정과 차별화되는 흔적이 드러난다는 것이 마한과 백제의 무관계성을 담보하지는 않으며, 아무리 늦어도 6세기 초 이전에는 백제의 직접 지배지로 완전히 전환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올바르다. 고고학적 성과를 놓고 미천왕의 한사군 정벌 기록을 부정하며 소수림왕이나 광개토대왕 대에 와서야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먼 훗날인 후삼국시대에 전남 나주 일대의 영산강 유역 호족들이 견훤의 후백제 대신 바다 건너에 있는 고려의 편에 서서 후삼국시대 내내 후백제의 배후를 노리는 형국이 되었는데, 이것이 삼국시대 백제와 전남 '마한'의 대립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애초에 영산강 유역, 즉 침미다례는 가장 잘 나갈 때도 전남 중부 및 동부 해안 일대에는 발도 뻗치지 못했기에 '전남 마한'이라 칭할 수조차 없으며 백제와 그다지 척질 일도 없었다.[25] 이건 그보다는 이전 마한 시기부터 있었던 광주와 나주의 대립 구도에서 비롯된 일이다.
견훤이 세력을 모으는 과정에서 순천의 박영규와 김총, 광주의 지훤 등 전남 내륙 호족들을 규합하게 되는데, 영산강 유역 호족들이 전남 내륙 및 남해안 일대 호족들과 이해관계가 더 가까웠던 견훤에게 냉소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학계 일각에서는 왕건의 집안이 경기만 일대의 해양 호족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영산강 일대의 해양 호족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나말여초 서남해 일대는 동아시아 문물 교류의 중심지인 청해진의 근거지일 정도로 해상세력이 융성했던 곳으로, 이 지역을 두고 왕건과 견훤이 얽혀 후삼국시대 내내 나주 공방전이 일어나며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후삼국통일 주도권 다툼으로 이어졌다. 이후에도 왕건은 2대 혜종을 낳은 장화왕후의 고장인 나주를 특별구역으로 편제해 특별기구인 나주도대행대를 설치하고 시중(국무총리급)을 파견할 정도로 중시했으며, 현종은 개경과 서경에서만 행하던 국제행사인 팔관회를 나주에서도 개최하게 하였다. #
2014년에는 5~6세기에 조성된 경북 의성 지역 고분에서 전형적인 백제식 금동관모[26] 가 출토되어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이 지역은 진한 소국 중 하나인 조문국이 있었던 지역으로서, 백제식 금동관모와 함께 '의성양식 토기'[27] 와 규두대도, 삼엽문 환두대도 등의 최상위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도 출토되었다. 지역 사학자들은 이 유물들을 두고 당시 의성 일대의 진한 세력이 《삼국사기》의 기록[28] 과 달리 신라에 합병되지 않고 상당 기간 독자적인 세력이나 정치체제를 유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신라뿐만이 아닌 백제와도 교류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하였다. #
이후 후삼국시대에는 경북 상주시 지역 호족인 아자개와 경북 의성군 지역 호족 홍술(洪術)이 고려에 귀부하는 일이 있었고, 경북 안동시 지역 호족들이 고려의 편에 서서 고려 개국공신(안동 삼태사)이 된 사례도 있다. 이후 고려시대에 있었던 신라부흥운동이 경주, 운문(경북 청도), 초전(울산)으로 주로 경북 남부에 편중되었던 것을 보면 전남 지역과 마찬가지로 경북 일대 전체에 맹주국 신라의 강력한 직접지배가 미치진 않았으며, 통합 이후에도 행정력이 열악해 소국들의 사회공동체가 해체되기 힘들어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기 때문에 당연했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후백제왕 견훤이 경북 상주 출신이었다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29]
다만 마한-백제 관계와 진한-신라 관계는 몇 가지 비슷하지만 전제 조건은 크게 다름을 명심해야 한다. 이를테면 진한의 사로국은 마한의 목지국과 비슷한 존재였지만, 목지국과는 달리 그 휘하 소국에게 당하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압독국이나 조문국 정도의 소국이 갑자기 세력을 키워서 그 상전인 사로국을 힘으로 무너뜨린 것인데, 사로국이 처음부터 착실하게 힘을 키운 덕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목지국은 불행히도 한군현과 보다 가깝다는 이점을 충분히 살려 한강-임진강 일대를 통합한 백제국에게 하극상을 당해 갑자기 쓰러지고 만 것이다. 그래도 마한과 진한이 비슷한 점은 맹주국 휘하 소국들이 자체적인 외교력을 한번에 전부 잃지는 않았다는 점이며, 이는 백제국 또한 경험했던 현상이다.
마한의 영역은 단순히 비교해도 진한의 2~3배에 달했고, 진한은 문화권이 하나였으나 마한은 독자적인 수계만 따져도 무려 여섯 계였으니, 통합의 과정은 비슷한 면도 있었지만 난이도나 전개 양상은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목지국이 능력이 모자라서 마한을 통합하지 못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드는 부장품만 봐도, 백제가 마한의 맹주국 지위를 확고히 한 4세기 전반에마저 생활 양식이 백제와 같지만 묘제는 다른 지역, 묘제는 비슷해져도 생활 양식은 달랐던 지역, 혹은 무기나 위세품은 많이 출토되어도 금은 장신구는 크게 적은 지역 등 중앙과의 관계가 다양했는데, 이는 백제의 마한 통합이 매우 어려운 과정이었음을 방증한다.
흥미로운 점은 변한과 형세가 비슷했다는 것이다. 변한의 경우 함안의 안라국이나 고성의 고자국이 마한 백제국과 비슷한 포지션에 있었고, 안라국 또한 백제국이 목지국에게 그랬듯 대놓고 금관국을 무력으로 꺾기 위해 포상팔국의 난을 통해 고자국과 연합하여 도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관국은 신라를 끌어들여 방어에 성공했지만, 목지국은 백제와의 국력 차가 이미 너무 벌어졌던데다 백제의 기습이 워낙에 급작스러웠고, 지원해줄 수 있었을 대방군마저 백제 왕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며 도움을 요청할 경로 자체를 백제가 완전히 다 장악한 상태라 도무지 막아낼 수가 없었다. 안라국은 이후 금관국이나 반로국과 쓸데없는 다툼은 피하면서 그들의 우위는 인정했지만, 실력이 워낙 만만찮아 정말 다루기 힘든 동맹국이었다.
부하가 상전을 완전히 격파해서 자리를 빼앗는 데 성공한 후 나머지 거수국들을 흡수하여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한 마한의 상황, 맹주국이 휘하 거수국들을 잘 추스리며 흡수하여 중앙집권 국가로 거듭난 진한의 상황, 마한과 진한의 상황이 섞여 이도저도 아니게 된 변한의 상황이 묘하게 대조된다.
한편 전라남도 해남군 군곡리 패총에서 마한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슴 뿔을 깎아 만든 투창기가 발견되었으며,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 바로 이 군곡리 일대가 신미국이 위치했던 곳이다.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발굴된 봉덕리 고분은 고창의 마한세력이 백제식 묘제를 도입한 고분으로 파악되고 있다.#
5. 왕사[편집]
기록에 따르면, 기자의 후손으로 고조선의 왕인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갔다. 《후한서》에서는 "준왕이 마한의 왕을 격파하고 '한왕'이 되어 삼한을 지배했다"고 기록했다. 준왕의 시호를 '무강왕(武康王)'이라고도 하는데 《고려사》 등에 "금마군(익산)에서 도둑이 호강왕(=무강왕)의 무덤을 도굴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존재를 증거하기도 하나 무강왕은 백제 무왕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추정된다. 자세한 것은 서동 설화 문서의 해당 문단 참조.辰卞二韓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진, 변 두 한(韓)은 나의 속국이다. 근래 몇 년 동안 공물을 바치지 않으니 사대(事大)의 예가 어찌 이러한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발췌. 신라의 성장을 견제하는 마한 왕의 발언이다.
또한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행주 기씨,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이천 서씨는 그 후손을 자칭한다. 준왕에서 이어지는 마한의 계보가 이들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대에는 후대의 부휘로 보아 청주 한씨 족보의 기록은 신뢰하지 않으며, 익산의 왕릉은 백제 무왕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로 삼한을 다스리는 진국(辰國)의 왕인 진왕(辰王)[30] 은 항상 마한 목지국의 왕이 맡아 계승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문헌의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였을 때 왕사를 표로 작성한다면 다음과 같다. 다만 앞서 '온조왕의 마한 경략' 문단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마한 관련 기사는 고고학적 편년 및 당대 중국 사서와 앞뒤가 맞지 않는 관계로 후대인들이 연대를 앞당긴 것으로 유력시된다. 따라서 마한 목지국이 기원후 8년에 멸망했다고 볼 수는 없다.
6. 특징[편집]
6.1. 사회[편집]
마한 전체를 통솔하는 진왕(辰王)을 제외하면 지도자는 있지만 각 소국을 다스리는 수준의 힘만을 가진 듯 보인다. 지도자를 신지(臣智), 그 다음 관직을 읍차(邑借)라 했고 나머지 관직들로는 위솔선(魏率善), 읍군(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장(伯長)이 있었다. 진왕이 있던 목지국 말고도 신분활국과 신운신국의 지도자는 각각 이아불예(離兒不例)와 견지보(遣支報)라는 특별 우대 호칭이 있었다고 언급되므로, 이 두 소국이 마한 내에서 세력이 컸던 것으로 파악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비록 여러 나라의 도읍에 우두머리가 있지만 읍락에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는 기록도 남아있어 제정이 분리되어 있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의 중심에는 소도(蘇塗)라는 것을 세우는데 이는 큰 나무에 방울과 북을 매달고 귀신을 섬기는 곳을 뜻하며, 이곳에 들어오면 사람들이 잡지 못하게 되어 마한 사람들이 도둑질을 즐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제정분리 사회 양상은 고조선 초기의 제정일치 사회와 대비된다.
인구수는 큰 나라는 1만여 호(戶), 작은 나라는 수천 가(家)라고 하는데 이는 마한 뿐 아니라 진한과 변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과 가까운 북쪽 나라들은 예의를 비교적 알았으나 남쪽에는 그렇지 못했고, 멀리 떨어진 지역은 마치 죄수와 노비가 모여 사는 곳과 같았다고 한다. 다만 《삼국지》는 중국의 관점에서 작성되었으므로 이 서술은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해석하자면 마한 소국들이 거리별로 중국에 대한 관심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나타내는 서술에 가깝다.[31]
농사의 경우 5월에 씨를 뿌려 10월에 수확한다는 기록이 나타나며, 농경 이외에도 누에치기를 하며 뽕나무를 가꾸고 길쌈하여 베를 짜기도 했다. 마한에서 생산되는 특산물로는 크기가 배만큼 큰 밤과 꼬리가 5척이나 되는 닭이 있었다고 한다.
6.2. 거주지[편집]
이러한 기록을 통해 마한인들이 기초적인 형태의 거주 시설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공주시 탄천면 장선리에서 발견된 수혈주거지 유적을 초옥토실로 보기도 한다.집은 초옥토실(草屋土室)[32]
의 형태를 띠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과 같았으며 출입하는 문은 윗부분에 있다. 온 집안 식구가 그 속에 함께 살며, 남녀나 나이의 구별이 없이 지낸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6.3. 의복[편집]
그 풍속에 의책(衣幘)[33]
을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下戶)들도 군(郡)에 가서 조알할 때는 모두 의책을 빌려 입는다. 스스로 인수(印綬)를 차고 의책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된다....
구슬을 보물로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걸기도 하지만, 금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 머리칼을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는데, 마치 날카로운 병기와 같이 생겼다.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는다. ... 그 고장 남자들 중에는 간혹 문신을 한 사람도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위의 기록처럼 마한의 유적에서는 장신구로 구슬이 많이 출토된다. 유리, 수정, 호박, 마노, 천하석(天河石) 등 다양한 재료를 가공해서 만들었고, 형태도 다양해서 따옴표처럼 생긴 곡옥, 원통형 옥, 둥근 옥, 다면체 옥, 연주옥(連珠玉) 등 여러 형태의 구슬을 장신구로 사용했다. 물론 이런 장신구는 고위층들이 주로 사용했을 뿐, 대다수의 평민들은 《삼국지》의 기록처럼 상투를 틀고 베로 만든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가죽신 또는 짚신을 신었을 것이다. 한편 고위 관료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책(幘)이라는 관모를 쓰기도 했으며, 평민들도 한군현을 방문할 때 책을 빌려 입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금은보화와 비단, 모직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걸기도 한다. 대부분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 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 남쪽 경계는 왜(倭)와 가까우므로 문신한 사람도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
문신 문화가 있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변한과 관련해서도 똑같은 기록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변한과 마한을 구분없이 기록한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후한서》에서는 마한에 문신이 존재하는 것이 왜(倭)와 인접해 있기 때문이라고 언급하여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삼국지》 왜인전에서는 남자들이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을 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마한의 문신 문화 역시 바다 건너 왜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6.4. 성곽[편집]
《삼국지》와 《후한서》에서는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으며 성곽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지》에는 "나라에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하면"이라는 구절도 등장하므로 아주 기초적인 토성 형태의 성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있다. 2000년 해남 옥녀봉에 위치한 옥녀봉 토성이 발굴되었는데, 기원전 3세기경에 지어진 토성의 흔적이라는 동신대학교 이정호 고고학과 교수의 주장이 확실하다면 기초적인 성곽을 가지고 있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6.5. 풍습[편집]
씨뿌리기를 마치는 5월과 농산물을 수확하는 10월 두 번에 걸쳐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 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리지어 노래를 부르고 춤추며 술을 마시고 놀았다고 한다.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줄을 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는 춤을 추었는데, 그 가락과 율동이 마치 목탁을 가지고 추는 중국의 탁무(鐸舞)와 비슷했다고 전한다.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 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은 탁무(鐸舞)와 흡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도 이렇게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삼국지》에 따르면 부여와 고구려에서도 각각 영고와 동맹이라 하여 노래와 춤을 즐기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고 하므로, 이러한 풍습은 3세기 당시 한반도 및 만주에 널리 퍼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다. ... 나라에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하면 여러 건장한 젊은이가 모두 등가죽을 뚫고, 큰 밧줄을 꿰어 1장(丈) 정도 되는 나무를 매달고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며 일을 하는데, 이를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하기를 독려하며, 이를 건장한 것으로 여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가죽에 줄을 꿰고 나무를 메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지게를 과장했거나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당연한 얘기지만, 소독법도 모르던 저 시대에 등가죽을 뚫어 줄로 꿰는 짓을 했다가는 감염이나 과다 출혈로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 여하튼 위의 기록을 해석하자면 마한에서는 성곽을 건축할 때 오늘날의 지게와 비슷한 목제 운반 도구를 밧줄로 묶어 등에 짊어진 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 나라 사람들은 씩씩하고 용맹하여, 젊은이들 중 건물을 짓는 데서 일하는 사람은 매번 밧줄로 등가죽을 꿰어 큰 나무를 매달고 소리를 지르는데 이를 건장한 것으로 여긴다.
《후한서》 〈동이열전〉
6.6. 묘제[편집]
위의 기록은 마한의 무덤 양식이 특별히 외관을 필요로 하지 않는 토광묘제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제로 마한의 주 묘제는 매장주체부 주위에 도랑[35] 을 두르는 주구토광묘(周溝土壙墓)인데, 그 형식은 크게 매장부를 먼저 만들고 그 주변에 눈썹 모양, 혹은 'ㄷ'형의 도랑을 두르는 청당동형[36] 주구토광묘와 무덤의 사방을 전부 도랑으로 두르고 도랑에서 파낸 흙으로 성토부를 만든 다음 그 위에 매장주체부를 만드는 관창리형[37] 주구토광묘로 구분된다.그들의 장례에는 관(棺)은 있으나 곽(槨)은 사용하지 않는다. 소와 말을 탈 줄 모르기 때문에 소와 말은 모두 장례용으로 써버린다.[34]
《삼국지》 〈위지〉 동이전
전자는 내륙 지역에 분포하고 주로 완만한 구릉의 경사면에 입지하고 있으며, 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와 심발형토기(深鉢形土器)를 부장하는 경우가 많다. 후자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서해안 지역에 분포하고, 대개 낮은 구릉이나 대지 위에서 군집을 이루며 성토부는 낮다. 분구묘라고도 부른다.
한성백제 시기의 석촌동 고분군에서 나타나는 묘제이기도 하며, 이 묘제를 쓰는 집단이 고구려식 묘제를 쓰는 집단과 연합하여 백제국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분구묘의 기원에 대해서는 자체 발생설과 일본과의 교류 관계(야요이시대 분구묘)나 중국 동해안 일대(강소성, 절강성, 산동성) 오월 지역과의 교류 관계가 거론되기도 한다. 관창리형은 4세기 이후 규모가 거대해지면서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고총으로 발전한다.[38]
7. 마한 54국[편집]
아래는 최근까지의 학계 연구를 반영한 마한의 구성국 목록 및 추정되는 위치다. 마한의 역사는 아직까지는 추측뿐이라고 한다 이병도설과 천관우설, 정인보설 등등이 있다고 한다. 아래의 비정은 대개 천관우설을 따른 것인데, 물론 네이버 백과사전에 검색하면 나올 정도로 유명하고 비전문가들이 자주 인용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음상사(音相似) 이상의 근거가 마땅치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가 이를 확고한 사실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고 신중론을 취하고 있다. 그냥 지역사 집필을 맡으면 "옛날에 마한 무슨 나라가 있었는데 이 지역이라더라. 아마 유물 많이 나온 여기일 수도 있을 듯." 하고 언급하는 정도이다.
아래 국가 중 비정이 확실하게 인정받는 것은 백제국(서울), 벽비리국(김제), 모로비리국(고창), 불사분야국(순천) 정도이다. 그 외에 그나마 자주 인용되면서 지지를 받는 것은
- 건마국(익산)의 위치
-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조의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가 비리국·벽비리국·불미국·지반국·구소국에 대응된다는 주장
- 국가명에 쓰인 비리(卑離)가 옛 마한 지역의 지명접미사 부리(夫里) 및 진한 지역의 벌 내지 화(火)[41] 에 대응한다는 주장
- 마찬가지로 국명에 쓰인 모로(牟盧)의 경우 후일 진·변한권을 이어받은 국가들에서 보이는 지명접미사 모라(牟羅)에 대응한다는 주장
이들 나라 이름은 중국에서 기록한 것이므로 당시 중국 북방에서 통용되었던 상고한어 발음에 따라 표기되어 있다. 그렇기에 상고한어 발음 정보를 적극 활용하면 이들 나라의 위치 비정에 도움이 된다. 영문판 윅셔너리에 한자 1글자를 검색해 보면 그 글자의 상고한어 발음이 어떠한지 나와 있으니 참고하면 좋다. 다만 해당 재구음은 기원전 11~7세기의 문헌인 시경의 압운과 주변 중국-티베트어족 언어들을 대조하여 재구한 것이기에, 서기 3세기 문헌인 삼국지의 음운 체계와는 거리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확신이 안 간다면 수당시대의 음가인 중고한어 재구음도 활용할 수 있다.
8. 역사 귀속과 계승 인식[편집]
8.1. 기원[편집]
準與滿戰, 不敵也.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준은 위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했으며, 그의 신하와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거쳐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한씨(韓氏)라는 성을 사칭하였다. 준은 해외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당초 조선왕 준이 위만에 패했을 때 남은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한왕이 되었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조선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난 후 남쪽으로 도망가 마한을 공격하여 왕위를 차지했다고 하는 중국 사서의 기록이 있고, 마한의 옛 중심지였던 오늘날의 익산에는 준왕과 관련되었다고 전해지는 유적들이 있어 마한의 초기 지배층은 고조선에서 침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삼국지》에서 "이후 준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한인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고 한 것을 보면 3세기 당시 건마국의 지배층은 준왕과 계통이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도 익산 건마국의 기원후 3세기 지배 집단은 건마국이 건국된 기원전 194년 당시 지배 집단이었던 한씨조선 직계 집단과 고고학적 계통이 다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8.1.1. 삼한정통론 또는 마한정통론[편집]
삼한 정통론은 마한정통론이라고도 불린다. 이 이론은 조선후기 국학계열의 실학자들에 의해 발흥한 이론으로 기자조선이 위만조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이유는 위만은 찬탈자로 유교적 사상에 근거하면 적통으로 볼 수없고 적통인 기준왕이 쫓겨 내려가 마한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기자조선의 적통은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족보들의 내용으로는 준왕의 씨족은 기씨(箕氏)에서 한씨(韓氏)로 바뀌었다는 내용들이 있다. 그래서 기자의 혈통과 유지는 마한, 더 넓게는 삼한으로 계승되었고 삼한은 한국사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은 현대적인 실증 사관은 아니고 조선시대의 관념론적 사관이라 할 수 있다.
8.2. 계승[편집]
현대에 마한은 백제로 계승된 것으로 보이나 과거에는 어디로 계승되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여 고구려로 계승된다는 주장도 있었고 백제로 계승된다는 주장도 있었다. 또한 삼한이 한국사 국가와 민족을 통칭하게 되면서 마한은 한국 자체를 부르는 명칭으로도 굳어졌다.
당나라에서는 투항한 고구려 장수인 고연수와 고혜진을 병마한 추장이라 했다. 삼국 전체를 삼한으로 통칭했던 여러 사례 중 일부이다.高麗位頭大兄理大夫後部軍主高延壽·大兄前部軍主高惠真等, 幷馬韓酋長.
고려 위두대형 이대부 후부군주 고연수, 대형 전부군주 고혜진은 병마한 추장이다.
《전당문》, 태종황제, 645년
8.2.1. 고구려 계승론[편집]
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엎드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곧 고구려, 변한은 곧 백제,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中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 시중에게 올린 편지
최치원은 마한이 고구려로 계승되었다고 보았다.崔致遠云 馬韓 麗也 辰韓 羅也 本紀 則羅先起甲子 麗後起甲申 而此云者 以王準言之耳 以此知東明之起 已竝馬韓而因之矣 故稱麗爲馬韓 今人或認金馬山 以馬韓爲百濟者 盖誤濫也 麗地自有邑山 故名馬韓也
최치원이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이고, 진한은 신라다." 《삼국사기》 본기에 의하면 신라는 먼저 갑자년에 일어났고, 고구려는 후에 갑신년에 일어났다고 하였다. 이는 준왕을 두고 한 말이다. 이것으로 동명성왕이 일어난 것은 이미 마한을 병탄했기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42]
그래서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한다. 지금 사람들은 혹 금마산이 있으므로[43] 마한은 곧 백제라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얘기이다. 고구려 땅에는 원래 (마)읍산[44] 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마한이라 한 것이다.
《삼국유사》 〈마한전〉
조선시대의 이익은 마한이 고구려로 계승된다는 최치원의 의견에 동조하였다.최치원은, "마한이 고구려가 되고, 변한이 백제가 되었으며, 진한이 신라가 되었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사실이 그렇지 않다고 의심한다. 그러나 최치원은 당시의 사람인데, 어찌 이같은 어긋난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성호사설》 2권 〈삼한금마〉
8.2.2. 백제 계승론[편집]
권근은 《동국사략》에서 최치원과는 다르게 고구려는 변한에서 계승되었고, 마한은 백제로 계승되었다고 주장하였다.권근(權近)이 말하였다. "삼한(三韓)에 대한 설(說)은 서로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조선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서 개국(開國)하여 마한(馬韓)이라 불렸었는데, 백제(百濟) 온조(溫祚)가 즉위함에 이르러 드디어 그를 병합하였다. 지금 익주(益州)에는 고성(古城)이 있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기준성(箕準城)이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마한이 백제가 된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동국통감》 〈외기〉 삼한기
양나라의 〈양직공도〉 제기에서는 "백제는 옛날의 내이(萊夷)이며 마한족이다"라고 했다.
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처하는 일본 오우치 가문에서는 족보에 성왕과 위덕왕을 '백제국 마한황제제왕(百濟國 馬韓皇帝齊王)'이라 기록해 놓았다.
9. 관련 역사기록[편집]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삼국지》, 《후한서》, 《진서》에 실린 마한 관련 기사를 국역문과 함께 제공하고 있으므로 참고하면 좋다. 삼국지 후한서 진서
먼 훗날 발해부흥운동 과정에서 등장한 정안국이 마한의 한 종족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定安國本馬韓之種. 爲契丹所破 保其西鄙.
정안국(定安國)은 본래 마한(馬韓)의 한 종족이다. 거란에게 공파되자 그 서비(西鄙)를 지켰다.
《송사》 〈정안국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