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형제

덤프버전 :





막스 형제
Marx Brothers

파일:막스 형제.jpg

구성원
치코 막스 (1887~1961, 향년 74세)
하포 막스 (1888~1964, 향년 75세)
그루초 막스 (1890~1977, 향년 86세)
구모 막스 (1892~1977, 향년 84세)
제포 막스 (1901~1979, 향년 78세)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직업
배우, 코미디언
활동 기간
1904년 ~ 1949년
1. 개요
2. 초창기
3. 무대 전성기(1920년대)
4. 영화계로 진출(1930년대)
5. TV로 진출(1940년대 이후)
6. 은퇴 후
7. 여담



1. 개요[편집]


막스 형제는 미국의 코미디언 단체이자 배우이며 독일, 프랑스 출신의 유대인 이민자들의 아들이다. 190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코미디와 영화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구성원은 위의 사진에서 왼쪽부터 하포, 제포, 치코, 그루초, 구모 막스로 5형제이다.[1]

당대의 엄청난 인기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엔 많이 잊혀졌으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아는 이가 별로 없다. 이는 이들이 찰리 채플린이라는 거인이 활동하던 시기에 같은 분야에서 활동한데다가 순회공연, 무대, 영화 등 활동 분야도 겹쳤기 때문에 채플린의 그늘에 가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막스 형제의 코미디 스타일은 슬랩스틱도 포함되어 있긴 하나 기본적으로 말로 웃기는 코미디라 영어식 말장난이 많은데 이를 번안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물며 이들이 인기 얻을 당시 한국은 일제강점기 시절이라[2] 일본어 자막을 보며 웃어야 하는 이중의 난관이 있었던 편.

채플린이 은퇴한 후[3] 미국에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자 막스 형제도 TV로 활동 분야를 옮겼는데, 여기서는 또 애벗과 코스텔로, 쓰리 스투지스 등 후배 코미디언들과 경쟁해야 했다. 이렇다보니 여러 미국 코미디언들 중 하나 정도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들이 코미디계에 남긴 유산은 엄청나며 이후 코미디언들의 활동 포맷 자체를 이들이(특히 그루초 막스가)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그루초 막스 문서를 참고하자.


2. 초창기[편집]


막스 형제는 19세기 말에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독일계 유대인 부모의 아들들이다. 구성 멤버는 다음과 같다.
  • 레오나드 조세프 막스: 예명은 "치코"(Chico). 1887년생으로 맏이다. 사실은 레오나드보다 먼저 태어난 아들이 있었지만(맨프레드) 생후 7개월에 병으로 죽었다. 예명인 치코는 "치킨"에서 유래한 것으로, 치코가 여성을 좋아하는 바람둥이 캐릭터이기 때문이다(당시엔 젊은 여성을 속어로 치킨 또는 칙 chic이라 불렀다).
  • 아돌프 막스: 예명은 "하포"(Harpo). 1888년생으로 둘째. 하포는 악기 하프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돌프 막스는 뛰어난 연주가로 다양한 악기를 다룰 줄 알았으며 하포는 극중에서 음악 연주를 종종 한다. 초창기에는 노래도 많이 했지만 하포라는 캐릭터가 완성된 후에는(하포는 벙어리 캐릭터다) 노래는 그만두고 연주와 몸개그를 담당했다. 참고로 시오니스트였다고 한다. 이름은 아돌프지만 성향은 정반대
  • 줄리우스 헨리 막스: 예명은 "그루초"[5]. 1890년생으로 셋째. 그루초라는 예명의 유래에는 당대에도 여러가지 설이 있었는데, 영어로 그라우치(grouch)가 심술장이라는 뜻과 구두쇠라는 뜻이 있으며 둘 다 줄리우스 헨리/그루초에게 해당하기 때문이다. 줄리우스 헨리 막스는 상당한 구두쇠로 돈과 물건을 아껴 썼으며, 그의 캐릭터인 그루초는 좀 심술궂은 얼굴로 분장을 하고 있으며 남에게 핀잔을 주거나 쏘아붙이는 것이 트레이드마크인 소위 "모욕 코미디언"(insult comic)이었다.[6] 줄리우스 헨리 자신은 이 두 가지 설을 다 부인했으며 어느 만화 캐릭터의 이름을 딴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구두쇠/심술장이 설이 너무 설득력이 있어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 밀튼 막스: 예명은 "구모". 1893년생으로 넷째. 연기를 너무 싫어해 일찌감치 팀에서 빠졌다.
  • 허버트 맨프레드 막스: 예명은 "제포". 1901년생으로 막내다. 미들네임인 맨프레드는 아기때 죽은 맏형을 기리는 이름이라 한다. 허버트 막스는 형들의 연기를 보며 자랐으며 성대모사 능력도 뛰어나, 필요할 경우 언제라도 형들의 대역을 할 수 있었다. 넷째 형인 밀튼이 팀에서 하차한 후에는 허버트가 제포 막스로 정식 참가하게 된다. 예명인 제포도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형인 줄리우스 헨리의 설명인 "제펠린에서 딴 별명이다"가 유명하다.[7]

파일:realmarxbrothers.jpg
↑ 왼쪽부터 치코(레오나드), 그루초(줄리우스 H), 하포(아돌프), 구모(밀튼). 제포(허버트 M)는 없다. 그런데 막스 형제들의 말로는 "우린 다 똑같이 생겨서 분장을 안하면 누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상관 없습니다"라 한다. 실제로 치코는 하포의 분장(가발과 모자)을 하고 하포인 척 하는 짓을 잘했으며, 영화에서 제포가 그루초의 분장을 하고 그루초의 대역을 한 적도 있다.

막스 형제들의 본모습이나 본명은 왠만한 막스 형제 팬이 아니면 모른다. 이들은 자신들이 연기한 캐릭터("페르소나")로 훨씬 잘 알려져 있으며 본명보다 예명이 훨씬 유명하기 때문이다.

파일:Marxbrothers_persona.webp
↑ 왼쪽부터 제포, 하포, 치코, 그루초. 여기서는 구모가 빠졌는데, 이는 구모는 연기를 싫어해 제1차 세계 대전[8] 때 미군에 입대하면서 막스 형제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구모는 종전 후에도 무대에 복귀하지 않고 사업가로 변신해 대성했다.

막스 형제의 집안은 원래부터 코미디언 집안으로, 모친, 외삼촌이 모두 보드빌에서 인기있던 코미디언들이었다. 막스 형제들은 어릴 적부터 연기, 음악, 춤 등을 교육받았으며 특히 하포/아돌프는 여러 가지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연주자였다. 막스 형제가 처음으로 무대에 데뷔했을 때에는(1905년경) 코미디언이 아니라 음악과 노래를 주특기로 삼았으며, 연주/노래 사이에 농담을 던져 관객들을 웃기던 것이 점점 발전해 결국 메인은 코미디, 음악은 곁들이기인 포맷이 된다.

막스 형제의 관객들은 대부분 가난한 미국 이민자들이었으며, 막스 형제는 이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내용의 코미디를 많이 했다. 자신들도 독일계/유대계 이민자 가정 출신임을 이용해 독일계 억양이나 독일어를 코미디에 종종 이용했으며, 치코의 경우 이탈리아 이민자 캐릭터였는데 이는 치코는 어릴때부터 집 바깥에서는 이탈리아 억양을 구사하고 있었기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9]

그런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인들 사이에 반독일(인) 정서가 팽배하게 되고, 막스 형제는 독일 억양을 무대에서 구사하는 것을 그만두게 된다. 막스 형제의 어머니자 매니저였던 미니 막스는 농부는 징집 면제라는 점을 노려 일리노이에 농장을 사서 형제들에게 닭을 키우게 했지만, 밀튼/구모는 "연기보다는 차라리 전쟁이 나아"라며 미군에 자원 입대해버렸다. 막스 형제는 닭들을 키우며 종전 후에 선보일 코미디를 갈고 닦았으며, 1920년대는 막스 형제의 무대 전성기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


3. 무대 전성기(1920년대)[편집]


1920년대에 막스 형제들은 보드빌브로드웨이를 섭렵하며 당시 무대 코미디언들 중 최고급의 인기를 누렸다. 팀의 리더는 맏형인 치코였으나, 개그를 생각해내고 각본을 집필한 것은 셋째인 그루초였다. 당시는 미국 대공황 직전이었으며, 일반 대중이 특히 좋아하는 토픽은 사회 상류층/부유층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었다. 그루초의 특기인 독설은 이 시절에 완성된 것이다. 허나 1920년대 말에 미국이 대공황을 겪게 되면서 브로드웨이에 일반 대중의 발길이 끊기자, 막스 형제들은 대공황 시절 서민들을 달래주던 유일한 오락거리인 영화극장으로 무대를 옮기게 된다.


4. 영화계로 진출(1930년대)[편집]


무성영화 시대가 찰리 채플린, 해롤드 로이드, 버스터 키튼 등 피지컬 코미디언들의 전성기였다면, 유성영화 시대는 막스 형제의 전성기였다. 채플린, 로이드, 키튼은 과감한 액션과 우스꽝스런 동작으로 관객들을 웃기고 놀래켰지만, 유성영화 시대에서 그들의 인기는 전과 같지 않았다. 유성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소리였으며, 관객들은 코미디언들이 목소리로 웃겨줄 것을 원했다. 막스 형제는 그동안 무대에서 갈고닦은 말개그 및 노래와 춤으로 유성영화계를 주름잡았으며, 수많은 뮤지컬 코미디 히트작들을 배출했다. 또한 막스 형제는 채플린 등의 무성영화 코미디언들과 달리 라디오에서도 활동하는 것이 가능했기에, 헐리웃 영화와 라디오 양면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미국 전역에서 인지도를 높였다.[10]


1941년작인 “The Big Store”(백화점)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치코와 하포. 막스 형제는 악기 연주만으로도 사람을 웃기는 법을 알았다.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가사를 담은 노래로 관객을 읏기기도 했다. 1939년작인 “At the Circus”(서커스에서)에서 개그노래인 “문신녀 리디아”를 부르는 그루초.

이 시기에 다섯째인 제포/허버트 M은 연기를 그만두고 넷째 형인 구모/밀튼의 사업에 동참해 헐리웃의 초 유명 탤런트 에이전시를 운영했다. 때문에 헐리웃 시절의 막스 형제는 주로 첫째, 둘째, 셋째 막스(치코, 하포, 그루초)들로 구성되었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스 형제가 원래부터 이 세명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기도 하다.

이 시절에 막스 형제들이 만든 영화들은 오늘날에도 손꼽히는 고전 코미디이며, 그 중 Duck Soup(식은 죽 먹기, 1933)과 A Night at the Opera(오페라의 밤, 1935)는 National Film Registry에 등재된 영화이기도 하다.

막스 형제들은 1941년에 공식적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했지만, 1946년에 영화를 하나 더 만들었다(A Night in Casablanca). 이는 맏형인 치코가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만든 영화다(평가는 좋았다). 치코는 도박 중독자로 특히 경마를 좋아했으며 온갖 사소한 일에까지 남들과 내기를 하는 것을 좋아해 많은 돈을 탕진했다.

5. TV로 진출(1940년대 이후)[편집]


1940년대에 미국 가정에 TV가 널리 보급되게 되면서 서민 오락이 극장에서 TV 위주로 변화하고, 막스 형제들 역시 TV로 무대를 옮기게 된다. 허나 이 시기는 막스 형제가 아니라 그루초 막스라는 솔로 코미디언의 전성기이다. 그루초는 영화에서도 막스 형제들 중 이미 독보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며, 치코와 하포는 반쯤 은퇴하고 카지노 등에서 가끔 공연을 하는 정도로 한가로운 삶을 즐기고 있었다. 반면 그루초 막스는 고유 컨셉인 핀잔쟁이 코미디언(insult comic)으로 TV에서 인기 절정이었으며, 이후 조니 카슨, 데이비드 레터맨 등의 후배 코미디언들이 그의 스타일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면서 미국 코미디계에 핀잔 코미디가 독자적인 장르로 자리잡게 된다.[11]

6. 은퇴 후[편집]


그루초 막스를 제외한 막스 형제들은 20세기 중후반에는 완전히 은퇴 상태였으며 별다른 연기 활동을 하지 않았다. 구모와 제포는 이미 베테랑 연예 사업가였으며, 치코와 하포는 은퇴 후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일반인이었다.

맏형 치코는 1961년에 향년 74세로 타계하였다. 치코의 사망 당시 여러 신문에서 향년 70세라고 보도했는데, 이는 치코가 자기 나이를 실제보다 네 살 적게 얘기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둘째 하포는 1964년에 향년 75세로 타계하였다.
그루초 막스는 1977년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86세. 다른 형제들과 달리 말년이 순탄치 않았는데, 이혼과 결혼을 많이 해 자녀와 전처들이 그의 믾은 재산을 두고 다툰데다, 노년에 접어들며 치매 등 노환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그의 높은 인기 때문에 주변에서 그루초를 계속 무대와 방송에 출연시키려 했기 때문이다(거의 노인 학대 수준).
넷째 구모는 1977년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83세.
막내 제포는 1979년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78세.


7. 여담[편집]


  • 막스 형제의 '막스'는 Marx로, 카를 마르크스와 성이 같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혈통도 같지만 친척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나무위키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마르크스, 막스 형제는 막스로 표기되어 있다.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프랑스 등 유럽에서 주로 활동했기에 당대에도 사람들이 '마ㄹㅋ스"로 발음했고, 막스 형제들은 평생 미국에서 활동했고 모든 이들이 이들을 "막스"로 불렀다. 이를 감안하면 마르크스와 막스로 표기를 달리 하는 것도 불합리하지 않을 수 있다.
  • AFI 위대한 배우에 오른 이들 중 유일한 그룹이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7 07:14:43에 나무위키 막스 형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참고로 이 사진은 1957년에 찍은 것으로, 막스 5형제가 모두 TV에 출연한 유일한 사진이다. 제포와 구모는 이 시점에서 이미 연기를 그만둔 지 오래이며 헐리웃의 거물 사업가들이었으며, 하포와 치코는 은퇴했고 오직 그루초 막스만이 현역 코미디언이었다.[2] 일본에서 전성기 영화들이 개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서 식민지 조선에도 개봉했을 거라 유추는 해볼 수 있다.[3] 은퇴라기 보다는 매카시즘의 후폭풍으로 쫓겨난 것에 가깝지만...[4] 스탠드 업, 버라이어티, 토크쇼 등 미국식 코미디의 기본 포맷은 막스 형제가 원조다. 채플린, 키튼 등 선대 코미디언들의 활동은 무대와 은막으로 한정되었는데, 막스 형제가 TV로 코미디의 활동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런 포맷을 만들어냈다. 막스 형제가 개발하지 않은 포맷은 연속 시트콤 정도다.[5] Groucho(ˈɡraʊtʃoʊ)의 실제 발음은 그루초가 아니다. 한국에서 aʊ를 흔히 아우로 옮기기 때문에 그라우초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선 그루초가 관행 표기가 되었는데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루초(グルーチョ)라 부른다.[6] 인설트 코믹은 오늘날에 발에 치이게 많지만 당시엔 획기적인 컨셉이었으며 그루초 막스가 원조이다.[7] 제펠린과 막스 형제 모두 독일계이고, 허버트 맨프레드는 제펠린의 처녀 비행(1900년)으로부터 7개월 후에 태어났다.[8] 제2차 세계 대전을 잘못 쓴 것이 아니다. 그만큼 옛날 연예인들이다.[9] 동네 깡패들이 전부 이탈리아계라, 이들에게 얻어맞지 않기 위해 이탈리아 억양을 익혔다고 한다.[10] 채플린은 물론 유성영화 시대에도 활동을 계속했으며 많은 걸작 유성영화를 남겼다. 그러나 채플린은 무성영화 시대에도 이미 단순한 코미디를 넘어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감동물로 장르를 변경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1921년작 “더 키드”(The Kid)는 남녀노소 모든 관객을 울렸다. 유성영화 시대에도 채플린은 단순히 웃기는 코미디보다는 진지하거나 슬픈 내용이 포함된 작품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냥 배꼽잡고 웃는 영화만 만든 막스 형제와는 경쟁 관계가 아니게 되었다.[11] 미국식 insult comic은 일본의 츳코미와 전혀 다르다. 츳코미는 캐릭터인 보케를 핀잔주는 것이지만 insult comic은 게스트나 관객이라는 실제 인물에게 핀잔을 준다. 때문에 내용과 수위를 잘 조절하지 않으면 게스트/관객의 분노를 살 수 있으며 실제로 이런 일이 종종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크리스 락윌 스미스의 분노를 사 생방송 중에 뺨을 맞은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