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센의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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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
막시밀리아네 빌헬미네 아우구스테 조피 마리
Prinzessin Marie von Hessen und bei Rhein

파일: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jpg
이름
독일어
막시밀리아네 빌헬미네 아우구스테 조피 마리
(Maximilianne Wilhelmine Auguste Sophie Marie)
러시아어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출생
1824년 8월 8일
독일 연방 헤센 대공국 다름슈타트
사망
1880년 6월 3일 (향년 55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
배우자
알렉산드르 2세 (1841년 결혼)
자녀
알렉산드라, 니콜라이, 알렉산드르 3세, 블라디미르, 알렉세이, 마리야, 세르게이, 파벨
아버지
헤센 대공국의 대공 루트비히 2세
어머니
바덴의 빌헬미네
형제
루트비히 3세, 카를, 엘리사베트, 알렉산더
종교
루터교회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 세례명: 마리아)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어린 시절과 출생에 관한 스캔들
3.2. 결혼과 황태자비
3.3. 러시아의 황후
3.4. 사망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5. 기타



1. 개요[편집]


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바덴의 빌헬미네의 막내딸로 제정 러시아의 명군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 니콜라이 황태자, 알렉산드르 3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의 어머니다.

또한 니콜라이 2세,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그리스의 니콜라오스 왕자비 옐레나의 친할머니이며 루마니아의 왕비 마리, 러시아의 빅토리아 표도로브나 대공비, 갈리에라 공작부인 베아트리스의 외할머니[1]다.

루트비히 4세[2],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3]의 고모이기도 하다.[4]

2. 작위[편집]


파일:Lesser CoA of the empress Maria Alexandrovna of Russia.svg
파일:Imperial Monogram of Empress Maria Alexandrovna of Russia.svg
문장
모노그램

3. 생애[편집]



3.1. 어린 시절과 출생에 관한 스캔들[편집]


1824년 8월 8일, 헤센 대공국의 대공인 루트비히 2세바덴의 공녀 빌헬미네의 다섯째이자 막내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막시밀리아네 빌헬미네 아우구스테 조피 마리(Maximilianne Wilhelmine Auguste Sophie Marie)로 지어졌으며, 헤센 대공가 사람들에게 빌헬미네로 불렀다. 하지만 러시아로 일찍 시집가 러시아식 이름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로 불리게 되면서, 후대에는 마리 혹은 헤센의 마리라는 이름이 가장 잘 알려지게 된다.

마리의 어머니인 바덴의 빌헬미네는 바덴의 대공세자 카를 루트비히와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의 딸이였다. 빌헬미네의 자매들이자 마리의 이모들은 각각 바이에른의 왕비[5], 제정 러시아알렉산드르 1세의 황후[6], 그리고 스웨덴의 왕비[7]였다. 이러한 가족관계가 훗날 마리가 러시아 황태자의 유력한 신부 후보가 되고 그와 결혼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마리의 아버지인 루트비히 2세와와 어머니인 빌헬미네는 사촌이었고 서로 11살 정도의 나이 차이가 났으며, 성격 간의 차이로 인한 갈등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804년에 결혼한 이후 세 아들을 낳으면서 후계 문제를 해결했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부부가 떨어져 지내게 되면서 별거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남편과 별거한 빌헬미네는 3남을 낳은 지 11년 만에 연년생으로 1남3녀를 더 낳았는데, 당시 유럽의 궁정에서는 그 아이들이 빌헬미네의 남편인 루트비히 2세가 아니라 시종무관의 자녀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루트비히 2세는 이러한 소문에 대해서 마리를 비롯한 아이들을 공식적으로 자신의 자녀라고 인정하며 헤센 대공가의 적자로 받아들였다. 이후 루트비히 2세와 빌헬미네는 1829년에 은혼식을 치르면서 부부 사이가 평온해졌고, 1830년에 루트비히가 헤센의 대공이 되면서 사이가 완전히 원만해진다. 어머니 빌헬미네가 대공비가 된 후 다름슈타트에서 지내는 날이 많아졌지만, 마리는 오빠 알렉산더와 교용인들과 하일리겐베르크 성에서 행복하게 지냈다.

어쨌든 마리는 어머니와 오빠 알렉산더와 함께 하일리겐베르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어머니가 마리의 교육을 담당했는데 스스로 프랑스의 문학과 역사를 가르쳤다. 하지만 1836년에 어머니 빌헬미네가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마리는 오빠 알렉산더와 함께 다름슈타트로 가게 되지만, 아버지인 루트비히 2세는 두 남매에게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리는 다름슈다트에 가게 되면서 자신의 출생에 대한 소문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소문이 약점이 되어 결혼을 하지 못 할 까봐 걱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리는 훗날 엄청난 상대와 결혼하게 된다.


3.2. 결혼과 황태자비[편집]


1839년에 마리의 아버지인 루트비히 2세가 당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황태자를 다름슈타트에 초대하면서, 알렉산드르 황태자는 다름슈타트에 하루 정도 머물게 되었다. 사실 당시의 알렉산드르 황태자는 자신의 신붓감을 찾기 위해 유럽의 여러 곳을 여행하는 중이었기 때문에[9], 어쩔 수 없이 다름슈타트에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기회를 잡은 루트비히 2세가 알렉산드르를 초대하게 된 것이다.

루트비히 2세는 저녁에 알렉산드르 황태자를 다름슈다트에 있는 극장으로 초대해서 오페라를 보고 자신의 가족들을 소개시켰다. 그 중에는 마리도 있었는데 당시 마리는 15세 밖에 안 된 어린 나이였지만 늘씬한 키에 성숙해 보이는 미인이였다고 한다. 이때 체리를 먹다가 알렉산드르 황태자를 소개 받아서, 체리 씨를 손에 들고 있는 상태 그대로 대면했다. 이 모습을 본 알렉산드르 황태자는 마리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다.[10]

알렉산드르 황태자는 부모인 니콜라이 1세 부부에게 마리랑 결혼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알렉산드르의 어머니인 알렉산드라 황후(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11]가 이 결혼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했다. 그 이유는 마리의 출생 신분이 불안할 뿐더러 나이도 매우 어렸기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마리의 이모 바덴의 루이제알렉산드르 1세의 황후였고 알렉산드르도 마리와 꼭 결혼해야겠다고 고집을 부린 데다가, 다정하고 인정 많은 인품을 가진 마리를 보고 흡족해 한 니콜라이-알렉산드라 부부는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줬다. 마리는 16세가 되자마자 러시아로 건너가 수많은 환영을 받았다. 이후 마리는 1840년 12월에 종교를 루터교회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러시아식 이름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로 개명하며 1841년에 알렉산드르 황태자와 결혼하였다.

파일:젊은 시절의 알렉산드르 2세와 마리야.jpg
러시아의 황태자비가 된 마리야는 자신이 살았던 고향과 전혀 다른 러시아에서의 적응을 조금 어려워했다. 이로 인해 평생 한적한 삶을 그리워했지만, 황위 계승자의 아내인 자신의 역할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였다. 이후 마리야는 황태자비로서 궁정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며 수많은 명사들과 교류했다고 한다.

황위 계승자 시절부터 알렉산드르-마리야 부부는 매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 마리야와 알렉산드르 모두 서로를 매우 사랑했고 극진히 돌보았다고 하며, 특히 남편 알렉산드르는 아내 마리야를 자상하게 챙기는 것을 좋아했다고.[12]알렉산드르는 아내가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면서, 마리야가 러시아 궁정에서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결혼한 지 1년 4개월(1842년)에 장녀 알렉산드라[13]를 출산했으며, 1년 후에 장남 니콜라이를 출산했다. 이후 알렉산드르 3세, 블라디미르, 알렉세이, 마리야, 세르게이, 파벨을 낳았다.[14] 3남이자 셋째인 블라디미르를 출산하고 건강이 안 좋아져서 온천으로 휴양을 가기도 했다.

아무튼 마리야는 10년 넘게 러시아의 궁정에서 사는 동안 지위가 안정되었고, 황실 가족들과 궁정 사람들에게도 긍정적 평가를 얻게 되었다. 시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는 똑똑하고 순종적이며 손자들도 많이 낳았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교육에 매우 헌신한 큰 며느리인 마리야를 예뻐했다. 오빠인 헤센의 알렉산더가 스캔들을 일으켰음에도[15] 불구하고 마리야의 지위는 더욱 굳건했다.

장녀인 알렉산드라의 사망 이후 알렉세이(1850년)와 마리야(1853년)를 출산하였다. 둘째딸인 마리야는 사실상 고명딸로 자라게 되어 알렉산드르-마리야 부부가 매우 금지옥엽으로 키웠다고 한다.

마리야는 독서를 매우 좋아했는데, 그 중에서도 당대 여러 러시아 작가들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또 어렸을 때 한적한 시골에 살았던 영향으로 원예와 가드닝을 좋아해서 정원 꾸미기를 즐겼다고 한다. 마리야는 남편이 정무를 보러나간 뒤 자신에게 공적인 일이 없다면 시녀들과 산책을 하거나, 아이들과 함께 피아노를 치면서 놀아주거나, 태피스트리를 만들거나, 실내를 장식하는 등, 당대 상류층 여성들의 평범한 취미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매우 지적이면서 진지한 인물이었던 마리야는 역시 남편의 일과 신분에 대해서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고 행동했다. 마리야는 정치적인 면에서 전적으로 남편 알렉산드르 2세를 지지했고, 남편이 하는 일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다.


3.3. 러시아의 황후[편집]


파일:알렉산드르 2세와 마리 황후.jpg
1855년 2월에 시아버지 니콜라이 1세폐렴으로 사망했다. 니콜라이 1세가 사망했을 당시 러시아 제국크림 전쟁에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로 인해 남편인 알렉산드르 2세는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대관식은 차질없이 진행되었고 1856년 9월 7일 모스크바에서 알렉산드르와 마리야는 러시아의 황제와 황후로 즉위하였다.

파일:차르 알렉산드르 2세와 마리야 황후.jpg
마리야는 임신과 출산의 반복으로 건강이 점점 나빠졌다. 특히 5남 세르게이를 출산하고 나서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졌고, 6남이자 막내인 파벨을 출산하자 더욱더 약해져서 정무를 보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하지만 파벨이 태어난지 몇 달 뒤 시어머니인 샤를로테 황태후마저 사망하고 말았다. 마리야는 시어머니가 보던 업무를 물려받았는데, 자선사업뿐만 아니라 여성 교육에 관련된 사업도 물려받아 추진했다.

마리야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매우 엄했으며, 자녀 교육에 굉장히 신경 썼다고 한다. 특히 지적이고 연약한 자신을 쏙 빼닮은 장남 니콜라이 황태자를 많이 예뻐했다.[16]

점점 건강이 나빠지는 마리야에게 의사는 따뜻한 곳으로의 요양을 권유했다. 또한 이때부터 마리야는 건강 문제로 공무를 제외한 궁정에서 열리는 파티와 모임에 참여하지 않기 시작했다. 마리야는 의사의 조언을 새겨듣고 크림 지방으로 요양하러 갔다. 남편 알렉산드르 2세도 아내를 위해 폴란드 귀족의 집을 사서 선물했다.

마리야는 남편, 파벨과 세르게이, 알렉세이와 함께 크림 지방으로 방문했을 때 그곳의 따뜻한 기후와 아름다운 집에 반했다고 한다. 마리야의 건강이 추운 러시아에 있는 것조차 어려운 상태였기 때문에, 왔다 갔다하는 식으로 따뜻한 곳으로 요양했다가 러시아로 잠깐 돌아왔다고 한다.

1864년 말에는 니스에 머물게 되었는데 장남인 니콜라이 황태자도 어머니를 보러 니스로 찾아왔다. 당시 니콜라이 황태자는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9세의 차녀이자 영국알렉산드라 왕세자비의 큰 여동생인 덴마크의 다우마와 약혼한 상태였다. 하지만 결핵균척수로 침범해 건강이 악화되다가 결국 1865년에 사망하였다.

장남이 갑작스레 죽자 알렉산드르-마리야 부부는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마리야는 장남의 죽음으로 인해 가뜩이나 안 좋은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지만, 그럼에도 남편과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종교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부부관계는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남편 알렉산드르 2세는 마리야가 러시아를 떠나 있는 동안 수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등 외도를 저질렀다.[17] 그중에서도 스몰니 학원의 학생이었던 19살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Екатерина Михайловна Долгорукова)와 사랑에 빠져, 그 사이에서 사생아 4명을 낳기까지 했다.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는 알렉산드르 2세의 정부가 된 뒤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에 머물렀으며 거의 비공식적으로 '황후'의 지위를 누렸다. 이를 안 마리야는 굉장히 충격받았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2세가 저지른 외도는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알렉산드르 2세의 차남 알렉산드르 대공은 (생전에 형이 남긴 부탁에 따라) 요절한 형의 약혼녀인 다그마르와 결혼했는데, 오로직 아내만 바라보며 정부조차 들이지 않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18] 차녀인 마리야 여대공도 아버지의 불륜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으며, 이러한 영향 때문에 가족을 떠나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인 알프레드와 결혼하면서 도피성 시집을 가버렸다. 하지만 마리야 여대공과 알프레드의 부부관계는 좋지 않았다.

파일:알렉산드르 2세 부부와 둘째 아들.jpg
남편 알렉산드르 2세, 차남 알렉산드르 3세와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러시아의 황제-황후로서 각자의 삶을 살았다. 남편 알렉산드르 2세는 자신의 정부와 사생아들과 노는 삶을 영위하고, 마리야는 러시아를 떠나 여행을 하였다. 특히 친정 헤센 대공국[19]에 자주 방문했다.

이후 자녀들이 장성해서 하나 둘씩 결혼하게 되었다. 차남 알렉산드르 황태자는 형 니콜라이 황태자의 죽음으로 그의 약혼녀였던 다우마와 결혼했는데, 마리야는 며느리인 다그마르에게 매우 잘해줬기에 고부 관계는 좋았다.

알렉산드르와 마리야의 부부 관계는 이미 끝났지만 마리야는 여전히 러시아의 황후였기에 알렉산드르 2세의 정치적 파트너 역할을 톡톡히 했다. 알렉산드르는 마리야의 말에 무조건 귀를 기울였으며, 마리야도 남편을 위해 정치적인 조언을 아낌없이 해줬다고 한다.


3.4. 사망[편집]


1880년에 마리야는 러시아로 돌아가 겨울 궁전에서 지냈는데, 이때 이미 건강이 매우 나빠져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2세는 위에서도 언급된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 그리고 톨고루코바가 낳은 자신의 사생아들도 같은 겨울 궁전에서 지내게 했다. 마리야가 침실 바로 위에서 돌고루코바의 사생아들을 뛰어놀게 하면서 사실상 마리야의 죽음을 앞당기다시피 했다. 당연히 알렉산드르 2세와 돌고루코바의 이런 행동은 자녀들, 마리야의 오빠인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 러시아 귀족들의 공분을 샀다. 특히 러시아 궁정의 여성들이 돌고루코바를 가장 적대시했다.

심지어 알렉산드르 2세는 마리야에게 대놓고 정부 돌고루코바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들을 축복해달라고까지 했고 이에 마리야는 그들을 축복해줬다고 한다.

1880년 1월에 마리야의 오빠인 헤센의 알렉산더와 그의 아들 루트비히가 건강이 안 좋았던 마리야를 보러 러시아에 방문했다. 두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러시아의 황실 가족들이 모두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갔는데 폭설이 내려 기차가 30분 정도 연착했고, 황실 가족이 겨울 궁전으로 돌아오는 시점에 식당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만일 기차가 연착하지 않았다면 황실 가족 모두가 식사를 하고 있었을 시간에 폭탄이 터졌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위험한 순간에마저도 알렉산드르 2세는 마리야가 아니라 돌고루코바와 그 자식들의 안위만 챙겼다고 한다.[20] 이 꼴을 보다 못한 알렉산드르 2세의 딸이자 당시 에든버러 공작부인이던 마리야는 완전히 폭발해 아버지와 거하게 말다툼을 벌였고, 결국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자식들을 겨울 궁전에서 쫒아내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

결국 마리야는 1880년 6월 3일에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리야는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2세는 마리야가 사망한 지 고작 1년 만인 1881년에 정부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귀천상혼으로 재혼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마리야가 죽은 지 1년 후인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역시 폭탄 테러로 암살당하면서 마리야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이후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그녀가 낳은 사생아들은 알렉산드르 2세가 사망하자마자, 연금만 지급받은 채 러시아 황실에서 쫒겨나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해외를 전전했다. 또한 알렉산드르 3세는 그 이후로도 계속 이들을 감시했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헤센 대공국의 공녀 마리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
(Grand Duke Ludwig II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 루트비히 1세
(Grand Duke Ludwig I
of Hesse and by Rhine)

헤센-다름슈타트의 방백 루트비히 9세
(Louis IX, Landgrave of Hesse-Darmstadt)
팔츠-츠바이브뤽켄의 카롤리네 여백작
(Countess Palatine Caroline of Zweibrücken)
헤센-다름슈타트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Hesse-Darmstadt)
헤센-다름슈타트의 게오르크 빌헬름
(Prince George William of Hesse-Darmstadt)
라이닝겐-다그스부르크-팔켄부르크의 마리 여백작
(Countess Maria Louise Albertine Leiningen-Dagsburg-Falkenburg)
바덴의 빌헬미네 공녀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바덴의 카를 루트비히
(Charles Louis, Hereditary Prince of Baden)
바덴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
(Charles Frederick, Grand Duke of Baden)
헤센-다름슈타트의 카롤리네 루이제
(Princess Caroline Louise of Hesse-Darmstadt)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
(Princess Amalie of Hesse-Darmstadt)
헤센-다름슈타트의 방백 루트비히 9세
(Louis IX, Landgrave of Hesse-Darmstadt)
팔츠-츠바이브뤽켄의 카롤리네 여백작
(Countess Palatine Caroline of Zweibrücken)


4.2. 자녀[편집]


파일:알렉산드르 2세의 자녀들.jpg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Alexandra Alexanderovna)
1842년 8월 30일
1849년 7월 10일

1남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Tsesarevich Nicholas Alexandrovich)
1843년 9월 20일
1865년 4월 24일

2남
알렉산드르 3세
(Alexander III)
1845년 3월 10일
1894년 11월 1일
덴마크의 다우마[21]
슬하 4남 2녀[22]
3남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Grand Duke Vladimir Alexandrovich)
1847년 4월 22일
1909년 2월 17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23]
슬하 4남 1녀[24]
4남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Grand Duke Alexei Alexandrovich)
1850년 1월 14일
1908년 11월 14일
알렉산드라 주콥스카야
슬하 1남
2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야
(Maria, Grand Duchess of Saxe-Coburg and Gotha)
1853년 10월 17일
1920년 10월 24일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드[25]
슬하 1남 4녀[26]
5남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Grand Duchess Sergei Alexandrovich)
1857년 5월 11일
1905년 2월 17일
헤센의 엘리자베트[27]
6남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Grand Duke Paul Alexandrovich)
1860년 10월 3일
1919년 1월 28일
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28]
슬하 1남 1녀
올가 발레리아노브나 카르노비치
슬하 1남 2녀


5. 기타[편집]


  • 시어머니인 알렉산드라 황후처럼[29] 건강이 안 좋았다. 알렉산드라와 마리야 모두 따뜻한 독일 출신이였는데 추운 기후였던 러시아로 시집을 간 뒤 잦은 임신과 출산으로 건강이 악화돼서 여행을 자주 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
  • 황후로서의 인품과 외모는 완벽한 사람이였다. 나이가 들은 뒤에도 훨씬 더 젊어보였으며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다 못해, 매우 마르고 연약해보이는 미인이였다고 한다. 이런 외모 때문에 초상화에서의 마리는 병약한 모습으로 자주 묘사된다. 이때문에 많은 이들이 마리를 처음 봤을 때 그렇게 아름다운 부인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차츰 매우 우아하며 늘 성모 마리아처럼 자애로운 표정을 짓는 사람이라는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30] 또한 시어머니인 알렉산드라 황후를 닮아서 시아버지 니콜라이 1세가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품도 다정하고 인자했고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남편을 열심히 내조했으며, 자식들에게 헌신했고 러시아 궁정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며 황후로서의 의무에도 충실했다고 한다.
  • 영국오스트리아를 혐오했다.[31] 때문에 영국에서 거주하는 딸 마리야 여대공과 조카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가 영국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돈이자 영국의 여왕이었던 빅토리아 여왕도 싫어했다.[32]
  • 이렇게 영국을 싫어한 것과 별개로 마리는 자식들과 조카들을 통해 영국 왕실과 겹겹히 인척 관계를 맺었다. 우선 차남 알렉산드르 대공의 처형인 알렉산드라[33] 당시 영국의 왕태자비였고, 차녀인 마리야 여대공의 남편이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였다. 또한 친정조카 루트비히의 부인도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공주였다. 다그마르의 언니인 알렉산드라는 앨리스 공주의 오빠인 웨일스 공과 결혼했으며, 앨리스는 오빠인 웨일스 공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마리는 딸 마리야 여대공을 데리고 친정 헤센 대공국에 자주 방문했는데, 이때 마리야 여대공이 누나 앨리스 대공비를 자주 방문했던 알프레드와 만나게 되어 결혼했다.[34]
  • 마리가 러시아 궁정으로 갓 시집온 초기에 영향을 미친 인물은 남편 알렉산드르의 작은 어머니였던 옐레나 파블로브나 대공비였다. 옐레나 대공비는 시조카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였으며, 똑똑하고 정치적 관점이 명확한 사람이기에 마리도 시숙모랑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 조카 루트비히 4세의 막내딸인 알릭스에게 황후가 될 거라고 예언한 사람이다. 친정인 헤센에 방문한 마리가 조카손녀인 알릭스를 보고, 자신의 시녀에게 "저 아이의 손에 키스 해줘요, 당신의 황후가 될거예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 며느리들과의 고부관계도 대체로 좋았다. 그중에서도 명랑한 성격이었던 덴마크의 다우마[35] 굉장히 아꼈다고 한다. 반대로 다그마르는 자신의 며느리이자 시어머니의 조카손녀인 헤센의 알릭스와 서로 사이가 나빴다.
  • 역대 러시아 제국의 황후들은 모두 부군을 먼저 떠나보내고 황태후가 되었으나, 헤센의 마리만이 유일하게 남편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황태후가 되지 못했다.
  •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로마노프 왕조의 황족들 중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너무 어린 나이에 황실 무도회에 참석해 어설프게 행동했던 크로포트킨을 마리가 다정하게 대해준 적이 있는데 크로포트킨에게 이 기억이 꽤 인상적이었던 모양.[36] 그는 마리의 소박하고 진심 어린 태도와 개혁적 영향력을 높이 평가했고, 이런 황후를 불륜에 빠진 알렉산드르 2세가 잔인하게 방치했다고 생각해 마리를 깊이 동정했다. 나중에는 알렉산드르 2세가 로리스멜리코프 헌법을 승인한 것에 대해서도 혹시 죽은 황후에 대한 그리움과 속죄 의식이 일부 작용하지는 않았을까 잠깐 생각했을 정도 재밌는 것은 크로포트킨과는 정반대 성향으로 확고한 보수주의자이자 알렉산드르 3세의 멘토였던 포베도노스트체프 역시 마리를 현명함과 우아함을 갖춘 진정한 황후로 칭송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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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리, 빅토리아, 베아트리스 모두 차녀이자 사실상 고명딸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의 딸들이다.[2] 둘째오빠 카를 공자의 장남.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인 앨리스 공주와 결혼하여 2남 5녀를 낳았다. 루트비히 4세의 딸들 중 차녀인 엘리자베트는 마리야의 5남인 세르게이 대공과 결혼했고, 4녀인 알릭스는 마리야의 손자인 니콜라이 2세와 결혼했다.[3] 셋째오빠 알렉산더 공자가 율리아 하우케와 귀천상혼으로 결혼해서 낳은 장남. 이후 본인의 5촌 조카인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랑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았으며 필립 마운트배튼의 외할아버지다.[4] 아이러니하게도 마리야의 두 조카들인 루트비히 4세와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는 사촌 지간임과 동시에 장인어른-사위 관계이기도 하다. 루트비히 4세의 장녀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가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와 결혼했기 때문.[5] 바덴의 공녀 카롤리네.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두번째 왕비다. 카롤리네의 딸들이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조피, 바이에른 공작부인 루도비카이니 마리는 이들과 이종사촌이다. 또한 프란츠 요제프 1세(조피의 장남)와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황후(루도비카의 차녀)는 마리의 5촌 조카가 된다.[6] 바덴의 루이제.[7] 바덴의 공녀 프리데리케. 구스타브 4세 아돌프의 왕비. 딸인 스웨덴의 소피아 공주의 손녀인 바덴의 빅토리아가 구스타프 5세의 왕비가 되었다.[8] 알렉산드르의 어머니 샤를로테의 친정이며, 알렉산드르 본인의 외가이기도 하다.[9] 프로이센 왕국[8]이나 오스트리아 제국의 공주들을 만났으나 딱히 관심이 없었다.[10] 당시 알렉산드르의 가정교사도 알렉산드르가 마리를 아름답고 순수하다는 식으로 묘사했다고 회고했다.[11] 프로이센 왕국의 공주. 본명은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차녀이며, 프리드리히 3세의 큰 고모다. 오빠들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빌헬름 1세 모두 프로이센의 국왕이 되었고, 자매들도 대부분 일국의 왕비 혹은 왕자비가 된 상당히 후덜덜한 집안 출신이다.[12] 물론 이때부터 알렉산드르에게는 정부가 있었다. 하지만 처남 알렉산더에게는 그래도 마리야를 언제나 가장 사랑한다고 말했다.[13] 1849년에 요절했는데 어머니 마리야를 포함한 황실 가족들이 매우 슬퍼했다. 마리야는 매년 장녀 알렉산드라의 기일을 꼭 챙겼고, 알렉산드라를 언급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14] 세르게이와 파벨은 마리야가 황후가 된 뒤에 태어난 아이들이다.[15] 마리야의 시녀이기도 했던 율리아 하우케와 귀천상혼했다. 알렉산더와 율리아의 아들이 바로 위의 각주에서도 언급된 바텐베르크의 공자 루트비히.[16] 장남이면서 사실상 맏이여서 그런지 알렉산드르-마리야 부부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했다고 한다. 니콜라이 황태자도 부모를 닮아 매우 지적이어서 사랑과 기대를 많이 받은 아들이었다.[17] 물론 결혼 초부터 정부들이 있었다. 외도대상은 시녀나 하녀부터 시작해서 심지어는 나이가 최소 20살 이상 차이 나는 스몰니 학원의 여학생들과 관계를 맺기까지 했다고 한다.[18] 사실 알렉산드르 대공에게도 어머니 마리야의 시녀 중 한 명인 마리야 엘리모브나 메셰르스카야 공작 영애, 통칭 '두셴카'라는 연인이 있었다. 하지만 형 니콜라이가 자신에게 다그마르를 부탁하며 죽었고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 또한 다그마르와 결혼할 것을 명령하여, 어쩔 수 없이 두셴카와 결별하고 다그마르와 결혼했다. 이후 두셴카는 러시아를 떠나야 했고 알렉산드르도 두셴카를 떠나보내며 슬퍼했지만, 그래도 다그마르와 결혼한 뒤에는 평생 아내에게 충실하였다.[19] 어릴적 집이자 오빠 알렉산더가 지내던 요젠하임에 자주 방문했다. 워낙 자주 방문해서 요젠하임에는 러시아 하인들의 숙소가 따로 지어져 있다. 특히 자녀들 중 마리, 세르게이, 파벨을 자주 데려갔다. 다름슈타트에서는 좀 떨어진 곳.[20] 마리야의 오빠인 알렉산더는 갑자기 알렉산드르 2세가 사라져 다쳤는지 알고 걱정했다고 한다. 근데 정신을 차려보니 돌고루코바의 애칭을 부르며 정부한테 달려가고 있었다고.[21] 크리스티안 9세의 차녀.[22] 니콜라이 2세,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등.[23] 애칭은 미헨.[24] 그리스와 덴마크의 니콜라오스 왕자비 엘레니 등.[25]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26] 루마니아의 마리아 왕비, 러시아의 빅토리아 표도로브나 대공비 등.[27]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자, 마리야 황후의 조카 루트비히 4세의 차녀.[28] 요르요스 1세의 장녀이자 크리스티안 9세의 손녀이다. 덴마크의 다우마의 친정조카이다.[29] 니콜라이 1세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30] 마리에 대해서 약간 입이 좁지만 우아한 푸른 눈에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자비로운 표정을 지으면 모두가 그녀에게 반했다고 한다.[31] 오빠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웨일스 공이 정말로 러시아인들이 우리 영국을 싫어하느냐 물었다고 전하자 오빠에게 3월 4일에 보낸 편지에서 "Furious, you should have told him. and that we hate the English as much as we do the Austrians."(오빠는 우리가 그들에게 매우 화가 났다고 웨일스 공께 말해야 했어. 우린 오스트리아인을 싫어하는 만큼 영국인도 싫어하잖아.)라는 구절이 나온다.[32] 오빠 알렉산더에게 보낸 편지에서 빅토리아 여왕을 crazy old hag, silly old fool(직역하자면 미친 노인네 혹은 멍청한 늙은이)이라고 표현한 게 많다.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이 죽었을 때 영국에 방문한 오빠에게 정말로 그 인간(빅토리아 여왕)이 미쳤는지 좀 알아오라고 부탁하기도 했다.[33] 며느리 다우마의 언니.[34] 마리야 여대공은 올케 언니인 다우마와는 친한 사이였지만, 다우마의 언니이자 동서 지간인 알렉산드라와는 사이가 나빴다.[35] 차남 알렉산드르 3세의 아내.[36] 당시 마리는 임신 중이었고 니콜라이 1세는 어린 크로포트킨을 자상하게 대해주는 며느리를 보고 이런 아들을 낳으라며 농담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