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전략 공세 작전/작전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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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전 진행
2. 자바이칼 전선군의 공세
2.1. 만주 서부의 관동군 방어계획
2.2. 자바이칼 전선군의 공세 계획
2.3. 제6근위전차군의 진격
2.4. 제39군의 진격
2.5. 제36군의 진격
2.6. 플리예프 기병-기계화 집단의 진격
2.7. 제17, 53군의 진격
2.8. 작전 결과
3. 제1 극동 전선군의 공세
3.1. 만주 동부의 일본군 방어계획
3.2. 제1극동 전선군의 공세 계획
3.3. 제5군의 공격(8.9~8.11)
3.4. 제1적기군의 공격(8.9~8.11)
3.5. 제35군의 진격
3.6. 후터우 요새 공방전
3.7. 제1적기군의 진격(8.11~8.15)
3.8. 제5군의 진격(8.11~8.15)
3.9. 무단장 전투
3.10. 제25군의 진격
3.11. 작전 결과
4. 제2 극동 전선군의 공세
4.1. 만주 북부의 일본군 방어계획
4.2. 제2극동 전선군의 공세 계획
4.3. 제15군의 공세
4.4. 제2적기군의 공세
4.5. 제2극동 전선군의 공세 종결


1. 작전 진행[편집]


바실렙스키의 작전은 이전에 바실렙스키가 짠 작전답지 않게 단순하지만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소련군의 공세는 기본적으로 3개의 축선으로 진행되었다. 목적은 만주 전체를 장악하고 관동군을 모두 섬멸하는 것이었다.

자바이칼 전선군은 제1극동 전선군이 만주 동쪽에서 치고 들어가는 동안 만주 서부에서 공세를 가할 것이었다. 이 두 축선에서의 공세는 신경, 장춘, 하얼빈, 길림을 손에 넣는 것이 목표였다. 제2극동 전선군은 만주 북부에서 조공을 가해 하얼빈과 치치하얼로 진격하는 것이 목표였다.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 내 작전은 만주에서의 성공에 따라 결정될 예정이었다.

작전 계획은 재빠른 기동을 통한 일본군 방어 계획의 무력화와 장기전 회피, 그리고 일본군이 서방 연합군에 항복하기 전에 만주를 장악하는 것에 중요도를 두었다는 걸 반영해 준다. 극동전략방면군 사령부가 7월 25일까지 모든 공세 준비를 마치라고 명령했지만 전 병력의 공세 준비는 8월 7일에 끝났다. 이 시간 동안 극동전략방면군 사령부는 자바이칼 전선군과 제1극동 전선군의 공세에 대한 도상 연습을 실시해 보고 계획을 조정했다. 초기 계획은 자바이칼 전선군이 제1극동 전선군보다 먼저 공세를 하는 것이었다.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짐에 따라 공세를 결정할 시간은 이틀로 좁혀졌다.

극동전략방면군 사령부는 자바이칼 전선군에 제일 강력한 주공과 작전 기간 10~15일 동안 관동군에 대한 350킬로미터 깊이의 전략적 쐐기를 밖아 넣는 것을 명령했다. 두 제병협동군(17군과 39군)과 제6근위전차군이 제1제파로 자바이칼 전선군의 주공을 맡아 할룽-아샨 오새 지대를 남쪽으로 피해 우회하고 장춘으로 진격할 것이었다. 주공의 제1목표는 서부 만주의 관동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다싱안링 산맥을 넘어 공세 10~15일 후 루페이아 솔룬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최선봉인 제6근위전차군은 내몽골 사막 지대를 넘어 다싱안링 산맥을 넘고 공세 5일째에 350킬로미터를 주파해 루페이를 함락하고 치흐펑을 공략해 신경과 장춘으로 치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자바이칼 전선군은 주공을 도울 2개 축선의 조공을 조직했다. 소련-몽골 기병-기계화 집단은 내몽골 사막을 건너 다싱안링 산맥 남쪽에서 칼간과 돌리노어로 진격할 것이었다. 제36군은 두로이와 스타로-츠루카이투이에서 아르군 강을 건너 만주 서부 관동군의 핵심 요새인 하일라얼을 점령하기 위해 다싱안링 산맥 북서부 일대의 일본군을 축출할 것이었다. 거친 지형과 전선군 단위에서 접촉하기에는 너무 넓은 공세 정면 때문에 자바이칼 전선군과 제2극동 전선군의 전투 지경선을 그을 필요는 없었다. 자바이칼 전선군의 제2제파는 제53군으로 다싱안링 산맥을 넘어 제6근위전차군을 후속하는 것이었다.

자바이칼 전선군의 성공은 속도, 기습, 그리고 관동군의 전 방어선에 대한 대대적인 선제공격 효과에 달려 있었다. 속도와 기습을 위해 모든 제대에 전차, 기계화보병 제대가 배치되었다. 전선군급 선견 제대로 제6근위전차군이 있었으며 제39군의 경우 유일하게 전차 사단을 선견 제대로 배속받았다. 기타 야전군 사령부 직할로 1~2개 전차여단을, 군단급에 1개 전차 여단을, 필요하면 사단급에도 1개 전차 여단이 배치되었다. 기동 선견대들은 본대에서 20~30킬로미터 선봉에서 평균 70킬로미터 이상의 속력을 내야 했다.

자바이칼 전선군의 작전에는 큰 위험부담이 있었는데 바로 다싱안링 산맥을 넘어가는 것이었다. 관동군이 다싱안링 산맥에 소규모라도 병력을 배치하거나 아니면 산맥으로 재빨리 기동해 방어선을 형성할 경우 자바이칼 전선군의 진격은 한없이 느려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산맥 넘기가 실패한다는 것은 작전의 실패와 전선의 장기화를 의미했다. 하지만 소련군은 결국 이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1개 전차군과 1개 제병협동군을 산맥을 넘게 했고 그리하여 엄청난 효과를 보게 된다.

제1극동 전선군은 만주에 2번째로 전략적인 쐐기를 박을 것이었다. 제1극동 전선군의 임무는 만주 동부의 일본군 요새 지대를 우회하거나 돌파하여 15일에서 18일까지 진격해 폴리를 지나 무단장에서 왕칭으로 도달하는 것이었다. 2개 제병협동군(제1적기군과 제5군)과 제10기계화군단이 주공이 되어 블라디보스토크 북서쪽의 그로데코바에서 출발해 무단장으로 진격할 것이었다. 두 번째 목표로 길림과 장춘, 하얼빈을 장악하며 자바이칼 전선군과 합류한는 것이 주어졌다. 2개 야전군에 전선군의 대부분의 지원이 집중됐다.

제35군은 한카 호수 북쪽의 레소카봇스크-이만 지역에서 출발해 밀산, 링커우, 그리고 폴리를 공격할 것이었다. 제25군은 우수리스크 북서쪽에서 출발해 퉁닝, 왕칭, 그리고 옌지 지역을 손에 넣을 것이었다. 제25군은 관동군 병력이 한반도로 탈출하는 것을 차단하고 한반도로 진격할 것이었다.

제1극동 전선군은 1개의 진격 축선으로 전력을 집중시켜 일본군 요새 지대를 뚫어버릴 계획이었다. 제10기계화군단은 이를 위해 제5군 진격 지역에 배치되었다. 전선군 에비대인 제87소총병군단, 제88소총병군단, 제84기병사단은 일본군의 방어가 완강할 경우 투입될 것이었다. 일본군의 빽빽한 방어를 뚫고 제1극동 전선군 병력들은 매일 8~10킬로미터를 주파하며 무단장과 왕칭을 점령해야 했다.

자바이칼 전선군과 제1극동 전선군이 장춘에서 합류하면 자바이칼 전선군 병력들은 랴오둥 반도로 몰려가 뤼순을 점령할 것이었다.

제2극동 전선군은 하바로프스크 남쪽의 블라고브쉬첸스크에서 작전을 개시해여 아무르 강과 우수리 강을 도하할 것이었다. 제2극동 전선군의 공세는 관동군이 자바이칼 전선군과 제1극동 전선군의 공세를 막느라 예비 전력을 동서로 보내는 사이 증원을 받을 수 없게 된 만주 북부의 일본군에게 강력한 압박이 될 것이었다. 제병협동군인 제15군이 전선군의 주공으로서 아무르 강을 레닌스코예에 지역에서 건너 송화강 남쪽 지대로 진격할 것이었다. 제15군의 제1목표는 아무르강과 송화강 유역의 일본군 요새 지대를 고립시키고 무너트린 다음 강 유역의 모든 일본군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제15군은 다음으로 산싱과 하얼빈으로 진격해 제1극동 전선군 병력들과 합류할 것이었다.

제2극동 전선군에는 2개의 조공 축선이 할당됐다. 제2적기군은 아무르 강을 블라고베쉬첸스크에서 도하해 순우로 진격해 치치하얼로 진격할 것이었다. 제5독립소총병군단은 하바로프스크 남쪽 우수리 강을 따라 배치되어 비킨에서 공세를 시작해 파오칭을 장악할 것이었다. 그리고 군단은 폴리로 진격해 제1극동 전선군 병력들과 합류할 것이었다.

작전이 개시되면 소련군의 재빠른 진격으로 인해 관동군은 중국 북부나 조선의 일본군에게서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이었다. 소련군은 관동군이 모든 지역을 방어하려고 하게 몰아붙일 것이었다.

극동전략방면군 사령부는 8월 9일 새벽이나 아침에 공세를 개시할 것을 결정했다. 바실렙스키를 비롯한 작전 입안자들은 공세의 제1국면은 국경지대 방어선을 돌파하거나 우회한 부대들이 만주 중부로 빠르게 기동하는 것이고 제2국면은 포위당하거나 우회당한 일본군 방어 거점들을 섬멸하는 것으로 예상했다.


2. 자바이칼 전선군의 공세[편집]



2.1. 만주 서부의 관동군 방어계획[편집]


만주 서부의 일본군은 만주 북서부와 마찬가지로, 대싱안링 산맥과 내몽골 사막의 험준한 지역을 이용한 방어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공세계획 속에도 방어계획이 들어있을 정도로 관동군은 나름 방어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만주 서부의 험한 지형과 열악한 도로 사정, 철도 사정은 방어자 입장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처럼 보였다. 한다가이에서 우챠커우로 가는 길은 철도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8월달만 되면 장맛비로 쓸 수가 없었고 타오얼호로 가는 우회 철도로도 마찬가지였다. 이 무시할 수 없는 자연적 방해물은 물론이고 주요한 진격의 장애물로 산맥 너머에 일렬로 늘어선 일본군 방어 요새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르샨으로 가는 철도망에 늘어선 이 요새들은 한다가이로 가는 철도 교차점을 보호하고 있었다. 요새들의 감시 초소들은 일본군 대대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아베 코이치 소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제107보병사단은 우차커우에 사령부를 두고 왕예마오로 가는 단선 철도를 지키고 있었다. 17사단은 제44군의 하위제대로, 한다가이에서 만주 내부로 가는 길을 지키고 있었다. 임무 수행을 위해, 44군은 107사단에 한다가이-왕예마오 지역을 배정하고 제117보병사단을 근처 파이쳉주에 주둔시키고 제63보병사단을 남쪽 텅랴오에 주둔시켰다. 기타 2개 대대가 왕예먀요에서 107 보병사단을 지원할 계획이었다. 45년 7월에 제44군은 그들이 맡은 지역의 방어를 위한 계획 수립을 끝내고 야전군의 주력 병력들을 만주 중부로 보냈다. 결국, 44군은 만주 남서쪽의 텅화를 중심으로 한 사각형 지대에 위치하게 됐다.

44군 사령부는 107사단에 특별히 명령을 내렸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107사단이 위수하고 있는 철도 지대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못한다면 소련군의 재빠른 기동이 가능해져 44군 후방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07 보병사단은 제90연대와 제117연대와 예비인 제178연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90연대 소속 제1대대는 어루스를 지키며 한다가이 외곽을 지키고 이루스 서쪽의 몽골 국경을 방어했다. 제2대대는 아르샨 서쪽의 요새 지대들을 맡고 있었다. 나머지 제117연대와 사단 직할 2개 대대는 사단 사령부가 있는 우차커우와, 솔룬에 주둔했다. 그리고 우차커우로 만주국군 2개 기병사단이 지원을 위해 도착했다.

제1방면군 사단들은 사단 인원수는 충분했지만 중장비가 열약하다는 난점을 앉고 있었는데 대본영에서 본토결전을 위해 사단 소속 중포들과 대전차포들을 일본 본토로 이송해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관동군은 대싱안링 산맥의 험난한 지형을 믿고 장비의 부족 문제를 그다지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다.


2.2. 자바이칼 전선군의 공세 계획[편집]


만주 서부에 주둔한 관동군의 방어선을 뚫을 자바이칼 전선군은 만주 서부에서 작전을 개시, 서부 만주로 제6근위전차군과 북서부 만주로 제36군으로 충격을 가하며 거대한 쐐기를 형성하고 만주 중심으로 치고들어갈 계획이었다. 전체적으로 자바이칼 전선군은 대싱안링 산맥을 넘어 일본군 방어 병력을 박살내고 주력 병력은 다반샨과 너머 루페이에서 솔운까지 15일 동안 진군하기로 되어 있었다.

작전 개시 10일만에 제6근위전차군은 장춘으로 진격, 확보하며 뒤따르는 제대들이 다다를 때까지 적 예비대를 묶어 놓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후속 제대들이 공세를 가해 치흐펑-무단장-샨토아이커우-장춘-장란툰 라인을 구축할 것이었다.

서부 만주의 험한 지형에서 대대적인 기계화 공세를 펼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난점이 따르지만, 바실렙스키는 이 약점을 역이용, 대규모 기계화부대를 대싱안링 산맥을 넘게 만들어서 험한 산맥을 믿고 대 기계화전 준비를 소홀히 하며 다싱안링 산맥 부근에 배치할 병력을 최소화한 서부 관동군의 약점을 대대적으로 파고 들 작정이었다. 전체 작전 계획에서 설명했듯이 다싱안링 산맥에 조금이라도 일본군 병력이 배치되어 있다면 공세 전체에 차질이 생길지도 몰랐지만 관동군의 대응 시나리오에는 이 경우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 또한 일본군의 공세적 방어 지역인 하일라얼을 정면으로 칠 필요가 없어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데다가 산맥 너머 만주의 무방비 상태인 공세로를 돌파하여 만주국의 수도인 신경과 주요 도시 장춘을 점령함으로서 종심전투교리에서 상정하는 적국에 대한 적군의 정치적, 심리적 마비를 가져올 수 있었다.

자바아칼 전선군 사령관 말리놉스키는 제39군, 53군, 17군, 제6근위전차군으로 공세를 가하기로 결정하고 39군, 17군, 제6근위전차군을 제1제대로 세우고 53군을 제2제대로 후속하게 했다. 제39군은 제6근위전차군과 더불어 몽골 동쪽으로부터 거대한 쐐기를 만주에 밖을 예정이었다. 제36군은 만주 북서부에서 공세를 가해 하일라얼을 손에 넣을 계획이었다.


2.3. 제6근위전차군의 진격[편집]


안드레이 크랍첸코의 제6근위전차군은 전선군의 선봉으로서 서부 만주에서 거대한 쐐기를 형성했다. 서부 만주에서 제6근위전차군이 8월 9일 새벽, 무인 지대인 국경 지역을 넘어서며 다싱안링 산맥을 넘기 시작했다. 제6근위전차군은 2개의 진격 축선을 통해 내몽골로 진입했다. 제9기계화군단이 제5근위전차군단을 후위에 두고 야전군 우측에서 선봉에 나섰다. 그곳에서 북서쪽으로 7~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제7근위기계화군단이 진격해 들어갔다.

모든 군단은 4개에서 6개의 진격 대형을 이루고 거대한 기계화 라인을 이루고 진격했다. 제6근위전차군은 소규모의 저항만 받으며 급속도로 진격했다. 해질녘에 모든 선견대들은 150킬로미터를 진격해 호로혼 고속도로 서쪽과 다싱안링 산맥 서쪽 고개에 도달해 휴식을 취했다. 험한 산맥과 악천후가 기계화부대들의 진격을 방해했지만 그럼에도 전군 차량화가 완료된 전차군의 진격은 상당히 빨랐다.

8월 9일 저녁, 제6근위전차군의 선견대들이 다싱안링 산맥을 넘기 시작하자 크랍첸코 상장은 산맥을 넘을 부대의 배치를 수정했다. 왜냐하면 진격 중 예상 외의 문제가 발생했는데 미국이 랜드리스로 공여해 준 M4 셔먼 전차의 험지 기동력이 형편없었던 관계로 셔먼을 주력 전차로 사용하던 제9근위기계화 군단의 진격이 예상보다 느려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T-34를 장비한 제5근위전차군단이 마지막 진격에서는 선두에 나섰다. 8월 10일 오후에 크랍첸코의 명령이 온전히 시행되어 좌익의 제7근위기계화군단은 모고단 근처에 도달해 철도로 이동을 시작했고 우익의 제5근위전차군단은 유코토 동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제5기계화군단은 10일 오후에 모두 산맥을 넘었고 제7근위기계화 군단은 다음날 아침에 산맥을 넘었다.

8월 9일 이후 일본군은 소련의 대규모 기계화부대가 다싱안링 산맥을 넘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경악했다. 신경과 장춘 등 만주국의 중심부로 몰려올 제6근위전차군의 앞을 가로막을 일본군 부대는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일본 제3방면군 사령관 우시로쿠 대장은 휘하 병력들을 신경 북쪽과 서쪽에 배치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우시로쿠 대장의 단독 결정으로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대장은 이 결정에 화를 내며 신경을 포기하고 더 뒤에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명령했다. 이 상반된 명령은 일본군에 혼란을 일으켰다.

8월 10일 2300시, 제5근위전차군단은 츠곤다보에 도달했는데 이곳은 다싱안링 산맥의 최고로 높은 지대였다. 제5근위전차군은 이곳을 넘어 7시간 동안 40킬로미터를 진격했다. 더 북쪽에서는 제7근위기계화군단이 11일 저녁 동안 산맥을 다 넘었다. 두 기동 군단은 마침내 만주 평원에 도달해 동쪽으로 쉴새 없이 진격했다. 8월 11일 제5근위전차군단의 선봉 여단이 뤼페이에 도착했다. 다음날 제7근위기계화군단의 선견대가 투추안에 도착했다. 제6근위전차군은 작전 개시 4일 동안에 5일간 진격해야 할 목표를 모두 주파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없었다.

이 대담무쌍한 진격은 소련군의 예상도 뛰어넘는 진격 속도를 자랑했다. 제6근위전차군은 험지에서 450킬로미터를 3일 동안 달렸으며 일본군 병력이 급조된 방어선조차 구축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험지와 보급이 문제였지 제6근위전차군의 진격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8월 12일 이후 소련군을 방해하는 것은 약간의 보급 문제뿐이었다. 서부 만주의 모든 일본군은 붕괴되고 있었고 후퇴하여 제대로 된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예홀에 있는 제108사단은 치흐핑에 1개 대대를 린흐시에 1개 중대를 두고 제17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다. 일본 제63사단은 퉁랴오에서 카일루에 1개 대대를 배치시켰다. 하지만 북서쪽에서 제6근위전차군의 진격을 막을 사단은 한 개 사단도 없었다. 일본 제117사단은 타오난에서 1개 대전차 대대를 배치시키고 투추안 서쪽으로 이동해 소련군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같은 날 일본 제44군은 제63사단과 제117사단 모두 신경과 장춘 방어에 투입시킬 것을 명령했다. 내몽골에서 소련군의 진격을 막을 부대는 오직 일본 제108사단과 몽강연합자치정부 병력들 뿐이었다.

제5근위전차군단은 8월 11일에 뤼페이를, 제7기계화군단은 츠추안을 점령함에 따라 작전 개시 4일 만에 작전 목표들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8월 15일, 제6근위전차군의 선봉은 산을 넘어 만주 평원으로 내달렸다. 이 당시 크랍첸코의 진격 부대는 항공기로 연료를 재보급받는 선견대만 있었지만 그래도 적에게 충분히 타격을 가한 셈이어서, 우회된 일본군이 필사적으로 싸우기는 했어도 주력부대는 완전히 고립되어 결과와 무관한 전투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6근위전차군은 8월 15일에 진격을 계속하며 일본군 제63, 117사단과 만주국군 기병들을 상대했다. 제7근위기계화군단은 장춘 동쪽으로 진격하고 제9근위기계화군단과 제5근위전차군단은 신경 남쪽으로 진격했다. 이 두 축선에서의 진격은 100킬로미터에 이르는 틈을 발생시켰다.

8월 16일 제5근위전차군단과 제9근위기계화군단의 선견대가 각각 퉁랴오와 카이퉁을 확보했다. 두 기동군단은 만주국의 수도인 신경 외각의 모든 교통, 통신 시설들을 점령해 신경을 사실상 마비시켰다. 8월 21일, 제6근위전차군 병력들은 무력화된 신경과 장춘으로 돌입해 점령했다. 연료 부족으로 인해 새로 생긴 목표인 뤼순은 기차와 수송기를 타고 가서 점령해야 했다.


2.4. 제39군의 진격[편집]


제6근위전차군과 함께 쐐기를 형성해야 할 제39군 사령관 류드니코프 상장 또한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류드니코프는 재빠른 기습으로 상대할 일본 제107사단이 후퇴해 재집결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작전 목표선까지 들이쳐 저지선을 형성할 생각이었다. 그는 또한 대싱안링 산맥에서의 적에 대해 피해 심한 정면공격을 회피할 생각이었다.

이 야심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39군은 제6근위전차군의 우익에서 하루당 5~6킬로미터의 행군속도를 유지해야 했다. 그래야만 솔룬에서 하일라얼까지 탄탄히 확보함으로서 제6근위전차군의 우측방을 방호할 수가 있었다.

제39군이 최종적으로 정한 계획은 2단계의 작전으로 7일 동안 전선군 사령부에서 떨어진 작전목표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첫번째 작전 동안 39군은 일본 방어군을 우회하여 대싱안링 산맥을 넘고 주공 병력은 Dzurkin Harul과 Boto Nela를 통해 Tiikhonera-Kakusupera 라인을 확보해야 했다. 첫 4일동안 1단계 작전이 수행되고, 2단계 작전으로로 솔룬과 하일라얼을 공격해 일본군을 분쇄하고 점령하는 일이 2~3일 할당되었다.

제39군의 작전 편성은 이 목적을 재빨리 달성하는 데 맞춰졌다. 39군은 3개 소총병군단의 제대로 되어 있었으며 주공 축선으로 제61 전차사단이 야전군의 기동군을 이끌게 되어 있었다. N.N. 올레셰프 중장의 제113소총군단과 I.S 베쥬글리 중장의 제5근위소총군단이 저차 사단을 따라서 4~5킬로미터의 공세 전면을 책임질 것이었다. 두 군단 모두 전차여단 1개씩을 선견대로 두고 있었다. 각 군단급 제대는 트럭에 탄 차량화소총병대대들과 1개 자주포대대, 1개 야포 대대, 1개 대전차대대, 그리고 2개 박격포 대대의 지원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61전차사단과 각 군단 직속 전차여단들, 그리고 2개 소총병사단이 제1제파로 들이치고 뒤따르는 소총병사단들이 제2제파로 후속할 것이었다. 하일라얼을 향한 2차 공세 축선은 I.I 포포프 소장의 제94소총병군단이 제1제파로 들이칠 것이었고 제94소총병군단 소속 제124소총병사단이 야전군 예비대로 할룬-아샨 요새화 지대에 대한 공세를 지원할 것이었다.

전선군은 상당한 기갑과 화력 지원을 39군에게 지원하여 39군이 재빨리 일제히 화력을 퍼부어 일본의 국경 요새들을 가루로 만들 것을 약속했다. 39군은 지원받은 모든 기계화 전력들을 각 제파에 공급했다. 사실 39군은 기습적인 공세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포병전력은 필요가 없었지만, 돌파 이후 가해질 주공 축선을 형성할 군단마다 1개 박격포 연대와 1개 포병사단이 지원되었다. 2,000문의 야포와 박격포가 주공 지역에 포화를 퍼부울 것이었다.

진격에서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된 것은 대규모 중장비들의 진격이 선견대의 진격과 보조를 맞추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포병의 진군이 철저하게 짜인 시간표를 통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제12항공군 소속 1개 항공연대가 빠진 1개 항공사단이 39군의 공세를 지원할 것이었다. 작전 첫째날, 항공전력은 솔룬, 하일라얼 그리고 할룬-아샨의 요새화 지대와 일본 비행장들을 날려버릴 계획이었다. 각 군단마다 증강된 공병들이 대싱안링 산맥의 장애물 많은 험지에서의 진격로의 확보와 유지를 위해 지원되었다.

8월 2일, 말리놉스키가 39군 사령부를 시찰하고 류드니코프의 계획을 승인하고 39군에게 집결 지대로 움직이라고 명령했다. 그날 저녁, 야전군 병력들은 120~130킬로미터에 이르는 행군을 시작했다.

제113소총병군단은 2개 종대로 행군해 8월 4일 0600시에 Ara Bulagin Obo에 도착했고 제5근위소총병군단은 3개 종대로 행군해 8월 5일 0600시에 집결 지역에 도착했다. 제94소총병군단(제124소총병사단이 빠진)은 Herempte Nur에 8월 3일 0600시에 집결했다.

제124소총병사단은 8월 5일에 집결지역에 합류했다.
8월 6일에는 39군 전체가 그날 밤까지 집결지역에 합류, 긴 행군의 휴식을 취했다.

8월 8일, 제39군은 행군 강도에 비해서는 짧은 휴식을 끝내고 모든 공격 태세를 마쳤다.

39군은 작전 암호 '몰니아'(번갯불)가 발동되고 자바이칼 전선군 참모장 M.V 자하로프 대장은 39군에 공세 시간을 제대로 맞춰야 한다고 주문했다. 수색 병력들과 선견대의 소총 사단들이 진격로를 확보한 후 공세를 원할하게 할 교통정리를 8월 9일 0005시까지 마쳤다. 주력 병력은국경지대에서의 공세를 0430시에 실시하고 항공 전력들은 0530시에 출격할 것이었다.

다른 야전군들과는 달리, 39군의 공세 지역의 하늘은 맑았고 공세 또한 완벽하게 진행됐다.

작전 개시 시간, 항공지원과 화력지원 없이, 제39군은 소만 국경을 넘었다. 야전군 선견대인 제61전차사단과 군단 선견대들이 본대에서 20~30킬로미터 앞서서 진격하고 1제대의 소총병군단 소속 사단의 선견대와 정찰대들도 본대와 15킬로미터 정도 앞서서 진격했다. 국경을 넘는데 성공하자 대대적인 포격이 진격종대 앞에서 작렬하며 화망을 형성했다.

좋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울퉁불퉁한 도로 상황과 너무 화창한 날씨가 39군의 진격 속도를 조절하게 만들었다. 거친 길은 타이어와 무한궤도의 운행을 방해했고, 후방 보급부대들은 선견대에 비해 지나치게 뒤쳐졌다. 게다가 8월의 뜨거운 기온이 연료 소모를 더 심하게 만들었다.

소련군 군의관들은 갑자기 바쁘게 움직여야 했는데 아무리 39군이 사막에서 적응 훈련을 했다고는 하지만 8월 한여름의 화창한 날에서 햇볓을 그대로 내리쬐느라 지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각 사단마다 30~40명 씩은 일사병 증세를 호소했고 보급된 물은 열을 내리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결국 30~40퍼센트의 장병들이 수통의 물을 다 비워버렸다.

이런 악재에도 불구하고, 113소총병군단과 5근위소총병군단은 공세 첫날이 저물 때 대싱안링 산맥에 도달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하루 동안 더 진군하니 대싱안링 산맥은 병사들의 뒤에 있게 되었고 일본의 국경 요새 지대들은 죄다 우회당해 버렸다.

39군의 본대가 대싱안링 산맥을 넘느라 고생할 동안, 제94소총병군단은 만주 북동쪽에서 진군을 시작했고 1939년에 할힌골 전투가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를 지나갔다. 221소총병사단과 358소총병사단은 진격하면서 40킬로미터가 넘는 진격로를 확보하며 흩어져 있던 일본군 기관총 진지들과 만주국군 기병들의 산발적인 공격을 처리하며 하일라얼에서 남서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던 후이 골에 도착했다. 94소총병군단이 하일라얼을 향해 진군할 때 124소총병사단은 일제히 할힌골 남쪽에서 포진해 할룬-아샨 국경 요새지대에서 뛰어나올 일본군의 공격을 경계했다.

일본군 제44군에게 공세가 가해진 8월 9일 0200시에 일본군 제3방면군 사령부는 하일라얼과 왕예먀오를 비롯한 주요 거점들에 소련군의 폭격이 쏟아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제44군은 0300시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시 방어 계획을 가동시켰다. 0500시에 제107사단 참모장이 전화를 통해 소련군의 공세에 사단이 궁지에 몰렸다고 보고했다.

"아샨 요새 지대로 전차를 동반한 적의 소총 사단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적 전차들이 국경을 넘어서 Sankuoshan의 남쪽으로 파고들어서 사단의 배후를 들이치고 있다. 적 무선 통신을 감청했는데 우리 사단에 대한 적들의 공격 계획이 완성되어 간다 한다. 사단은 소련군에게 진짜로 공격받고 있고 소련군은 이곳에서 우리 사단을 분쇄할지도 모른다!"


일본 제107사단에게 닥친 치명적인 문제는 이 다양한 축선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위협을 어떻게 막아내느냐는 것이었다. 일본 제44군은 근처의 117사단과 63사단에게 107사단을 지원하라고 명령했지만, 107사단을 조여오는 공세를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음날, 제3방면군 사령부는 제44군에게 107사단으로 쏟아지는 적 공세를 다시 판단하고 Paichengtzu-Arshaan 라인과 Hsinganling 터널을 비롯한 적의 진군을 도와줄 만할 모든 교통 시설들을 파괴하고 장춘 근처로 사단을 후퇴시켜 제30군 경계 지역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8월 10일의 늦은 시각, 소련군은 107사단과 44군의 통신망을 차단해 107사단이 상위 제대로부터 명령을 받을 수 없게 만들었다. 궁지에 몰린 107사단은 일본군 답게 최후까지 저항하며 솔룬과 왕예마오로 가는 철도선을 내주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대항했지만 작전 종료까지 소련군을 좀 짜증나게 만드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8월 10일에서 12일까지 소련군은 고생하며 우차커우 남쪽의 대싱안링 산맥을 넘었고 일본군의 소규모 병력이지만 그 지역에서 중요한 군사적 거점을 점령한 일본군과 맞닥트렸다. 다행히도 전날만 해도 최고기온이 섭씨 35도까지 치솟았던 무더위는 난데없이 만주의 변덕스러운 기온 변화 덕분에 19도에서 22도로 급락했다.

소련군은 다양한 지형의 계곡을 지나쳤지만 땅이 말라있어서 진격에 영향을 주진 않았다. 문제는 이 계곡 지대를 건너자 공병 지원 없이는 지날 수 없는 뻘흙 지대가 펼쳐졌다. 소련군 공병들은 고생고생 하며 진격로를 열고 유지했다.

강들 또한 전술적 장애물이 되었다. 산맥 서쪽의 Sel'zhin Gol 과Siaburutan Gol 강은 장마철이 오며 불어났고 주변을 뻘밭으로 만들었다. 소련군 공병들은 이 강들에 6개의 가교를 부설했다. 대싱안링 산맥을 넘는 것은 연료 소비를 극심하게 만들었다. 뜨거운 태양이 엔진을 가열했고, 험한 길이 엔진을 혹사시킴으로서 모든 차량들과 전차들이 할당량의 50퍼센트가 넘는 연료를 사용했다.

류드니코프는 어떻게든 우회로를 찾으려 했지만 지도가 워낙 부정확해 어떻게 상황을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L.G 바사네프 소장의 제192소총 사단은 이 바위투성이 산맥을 2달 동안 넘어야 했다.

이런 어려운 문제에도 불구하고, 5근위소총병사단과 13소총병군단은 61전차사단을 선봉으로 세워 8월 12일에 일본군의 옆구리를 파고드는데 성공했다. 솔룬과 왕예마오로 가는 진격로가 열렸고, 일본군은 소련군을 조금 성가시게 할 정도의 저항밖에 하지 못했다. 이미 우회당해 버린 제107사단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제39군 부사령관 G.K 코즐로프 중장은 제94소총병군단에게 소규모 일본군 초소들을 쓸어버리고 하일라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8월 11일 저녁에 야전군 선견대가 하일라얼 남쪽에서 들이칠 동안 군단의 주력이 Dunda-Khana에서 1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Bualuto로 진격했다.

그런데 하일라얼이 소련 제36군에게 우회당하여 제94소총병군단은 더 이상 하일라얼에 붙잡혀 있을 필요가 없게 되자 제94군단은 새 목표를 갱신했다. 군단 소속인 V.N. 쿠쉬나렌코 소장의 제221소총병사단은 대싱안링 산맥 동쪽의 부차적인 일본군 저항 거점들을 쓸어버리면서 태흐르쑤 강과 태흐르치 강의 계곡을 통해 루순 트시히로 가는 길인 Tagan-Dabe를 장악했다. 제358소총병사단은 남쪽으로 진군해 할룽 아산 요새지대를 공략하는 제124소총병사단과 합류해 요새지대를 진압하게 되었다.

제39군 병력들이 일본군을 요새 지대에서 끌어내는 동안, 제124소총병사단은 8월 10일에 요새 지대로 직접 치고들어가 8월 10일에 일본군 제90연대를 박살냈다. 그날 아침에 D.M. 렐레코프 대령의 제622소총병연대가 할힌골을 넘어서 할흐 강 북쪽의 일본군 전초부대를 괴멸시켰다.

8월 10일과 11일 동안 124소총병사단은 요새 지대 깊숙히 뚫고 들어갔고 일본군 요새들과 초소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해 나갔다. 잠깐 북쪽으로 진군로를 돌려 사단은 이얼수와 아샨에 12일날 도착했다. 그날 저녁에 일본군은 아샨의 남동쪽과 북동쪽에서 역습을 가해 왔지만 124소총병사단은 이 역습을 간단히 막아내고 되려 일본군을 우챠오커우로 몰아냈다. 일본군 제107사단이 지키던 요새 지대의 대부분의 중요 장소들은 전부 124소총병사단에게 넘어왔고 124사단이 뚫어놓은 진군로를 따라 제5근위소총병군단이 솔룬 남서쪽으로 들이치기 시작했다.

8월 12일에 제5근위소총병군단과 제113소총병군단은 울란 호 북쪽에서 동쪽을 향한 진격을 완수하고 솔룬과 테포씨 남서쪽의 구릉지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제5근위소총병군단의 선견대가 하일라얼로 향하는 철도망을 장악하고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을 태우고 솔룬으로 향하던 일본군 열차를 우연히 만나 신나게 때려부셨다.

솔룬으로 가는 길이 열리자 예상하지 못한 지형상의 난점이 군단을 솔룬에서 재집결하는 것을 방해했다. 울란 호와 다른 강들의 계곡들이 솔룬으로 가는 길과 철도 라인을 막고 있던 것이다. 소련군 차량들은 강 주변의 늪지에서 벗어나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 상황은 소련군 병력들을 울란 호 일대에 흩어지게 만들었다. 소련군 공병들이 죽을힘을 다하고 다른 병과 병력들이 공병들을 도와서 길을 개척해서야 이 난감한 상황이 그나마 해결될 수가 있었다.

이 정체 상황은 소련군 병력들이 10킬로미터나 되는 지대에 늘어지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단 선견대들은 하루에 40~80킬로미터를 넘게 진군하는데 성공했다. 8월 12일 오후 제5근위소총병군단은 솔룬 남서쪽에서 집결하고 군단 선견대인 제44전차여단과 제19소총병사단, 제17소총병사단을 앞세우며 솔룬 시로 돌입했다. 제44전차여단과 제17소총병사단이 솔룬 시가지에서 일본군을 정리할 동안 제19소총병사단은 솔룬 남서쪽의 철도망을 장악했다. 그날 저녁, 대대적인 항공지원과 포격지원이 솔룬에 떨어진 이후에 제5근위소총병군단 병력들은 도시의 심장부를 장악했다. 도시를 지키던 일본군 제107사단 소속 제178연대와 제2만주국군 기병사단은 도시 북서쪽을 통해 퇴각하면서 소련군을 향해 계속해서 반격을 시도했지만 별 성과를 얻지 못한 채 격퇴당해야 했다.

소련군은 솔룬 남쪽으로 이동해 테포씨로 향하는 철도를 장악했다. 같은 날, 제5근위소총병군단의 제2선견대인 제735돌격포연대는 1개 포병대대, 제7대전차대대, 제508자주포대대가 소속되어 있는 제45포병연대를 대동하고 테포씨 서쪽으로 진격했다. 선견대는 테포씨 마을에 진입하자마자 솔룬에서 탈출하던 일본군 차량화 병력들을 박살내고 일본군 유류 창고를 접수했다.

735돌격포연대는 솔룬에서 본대와 합류하고 철도를 따라 도망가는 일본군 병력들을 추격하며 섬멸했다. 제5근위소총병군단이 테포씨를 확보할 동안 제44전차여단과 제17소총병사단은 8월 13일에 솔룬 역을 장악했다. 제19소총병사단은 제61근위소총병연대와 508돌격포대대를 이끌고 솔룬 서쪽의 치니잉커우 역을 장악했다. 그곳은 하필이면 일본군 107사단 소속 병력들이 재집결하기로 되어 있던 장소였다.

그 무렵 제124소총병사단은 12일과 13일 동안 우챠커우를 지나 도시 외각의 일본군 요새 지대를 우회하면서 흐시커우 동쪽의 철로를 따라 진격했다. 그 도시의 일본군 제90연대와 제117연대는 동쪽과 서쪽에서 밀려오는 소련군의 대공새를 이틀 동안 받아내야 했다.

그리하여 일본군 제107사단은 8월 15일에 산맥 북서쪽에서 축출당하고 겨우 재집결한 후 소련군을 향해 반격을 가했지만 보잘것없는 성과만 나오고 말았다.

제5근위소총병군단이 솔룬을 점령해 일본군 107사단을 절단할 동안 야전군 선견대인 제61전차사단과 제113소총병군단은 울란 호 계곡 따라 진군하여 하일라얼, 쿠에일리우호를 지나 왕예먀오로 쇄도했다. 그런데 만주의 험한 지형 때문에 차량들의 연료소비가 예상보다 급증함에 따라 제39군 전체의 유류 보급 상황에 적신호가 걸렸다. 선견대에 비해 본대가 뒤쳐지기 시작하자 류드니코프 상장은 소속 모든 제대의 지휘관들과 참모들에게 최대한 연료 소비를 줄일 방법을 찾아보라 명령하고 전 군의 진격 속도를 10킬로미터 내외로 유지하라 명령했다.

8월 14일에 제44전차여단은 솔룬에서 북서쪽으로 6킬로미터 지점에서 가해진 일본군의 역습을 가볍게 막아냈으며 제5근위소총병군단의 다른 병력들은 솔룬 남쪽에서 들어오는 엇비슷한 규모의 일본군 공세를 역시 가볍게 격퇴했다. 제124소총병사단과 제19소총병사단이 박아 넣은 쐐기는 솔룬 서쪽으로 향하는 회랑을 열었고 그 회랑으로 제61전차사단과 제113소총병군단이 돌입하여 왕예마오 북서쪽의 일본군과 교전했다. 15일, 제39군의 선견 병력들은 왕예마오를 장악했다.

다음 이틀 동안 제5근위소총병군단과 제113소총병군단은 왕예마오에 입성했다. 솔룬과 왕예마오가 소련의 손에 떨어지자 관동군의 할룽-아르샨-우챠커우 요새 라인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소련군은 일본군 107사단의 퇴각로를 차단하기 시작했고 107사단이 다른 일본군 제대와 만주 중심에서 합류하는 것을 틀어막았다. 산맥 북서쪽에서 소련 제124소총병사단이 일본군 107사단을 몰아낼 동안 후방에서 온 제221소총병사단이 요새지대 소탕에 성공하였다.

제39군이 일본군 107사단의 잔존병력 소탕을 끝낼 동안 I.I. 포포프 중장의 제94소총병군단은 2개의 축선을 통해 만주 중심으로 진격하다가 일본군 제10방면군 사령관인 호우린 대장의 항복을 받았다.

그날, 94소총병군단 소속 제358소총병사단은 할룽-아샨 요새지대 남쪽으로 진군해 8월 14일에 제124소총병사단, 제221소총병사단과 합류하여 일본군 소탕 작전을 지원했다. 모든 퇴각로가 다 끊겨버린 제107소총병사단은 일본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계속 저항하다가 차례차례 소탕되었고 결국 8월 30일에야 일본군 패잔병들은 치치하얼 남서쪽의 차일라이에서 항복했다.


2.5. 제36군의 진격[편집]


6월 28일에 말리놉스키는 극동전략방면사령부 명령으로 루친스키 상장의 제36군이 제39군이 대싱안링 산맥을 돌파하고 만주에 돌입하는 대로 투입되어 하일라얼을 접수하고 찰라툰 시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말리놉스키는 제36군의 공세가 10일이면 끝날 것이라 예상했다. 말리놉스키는 제36군의 주공 병력으로 제2, 86소총병군단(5개 소총병사단이 증강된)을 지정하고 군의 좌익을 맡겼다. 36군의 주공은 아르군 강을 도하해 하이루칸산을 확보하고, 하일라얼 북부를 공략할 교두보를 마련하면서 하일라얼 북동쪽의 요새 지대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 지역의 모든 관동군을 분쇄해 버리는 것을 작전 목표로 삼았다. 또한 특별히 구성된 작전 집단이 야전군의 우익을 맡으면서 조공을 가할 것이었다. 이 조공은 찰라이노어-만주리 요새 지대를 뚫고 들어가면서 두 도시를 확보하고, 관동군 병력들을 철도망 동쪽으로 쫓아버리는 것이었다.

자바이칼 전선군 소속의 다른 야전군들이 공세 전면으로 100~120킬로미터를 할당받은 반면 제36군의 공세 전면은 250킬로미터에 달했다. 주공과 조공은 각각 100킬로미터 넘는 공세 전면을 할당받았으며, 두 그룹은 하일라얼에서 합류할 것이었다.

말리놉스키가 내린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루친스키의 야전군은 2개 소총병군단과 1개 작전 집단 예하 7개 소총병사단, 2개 국경수비연대, 1개 전차여단과 기타 포병부대들을 예하에 두게 되었다.

6월 중순에 바실렙스키와 말리놉스키가 제36군 사령부를 방문하자 루친스키는 공세 작전안을 내놓았다. 작전안에 따르면 5개 소총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이 제36군의 주공으로서 아르군강을 도하해 하일라얼로 쇄도한다. 제2소총병군단과 제86소총병군단이 북동쪽에서 하일라얼로 가는 진격로를 열고 일본군의 야코신으로 가는 퇴각 루트를 차단하면서 하일라얼 요새 지대의 일본군을 분쇄한다. S.S. 포멘코 소장의 작전 집단은 2개 소총병사단과 2개 기관총 여단으로 구성되어 찰라노어-만주리를 꿰뚫고 나가 하일라얼 동쪽의 철도망을 차단하고 하일라얼의 주공과 합류한다. 야전군 선견대인 제205 전차여단과 V.A. 부르마소프 소장의 제86소총병군단이 선두에서 주공을 이끌고 8월 9일 저녁까지 모어 골에 도달할 것이었다.

같은 날 저녁, 선견대의 선두 부대들은 다른 부대들이 하일라얼 외곽부터 공략하는 동안 하일라얼 강의 철교들을 장악할 것이었다. 군 직할 포병 집단은 2개 포병군단과 기타 7개 포병대대로 구성되어 아르군 강 도하를 지원하고 일본군 요새들을 박살낼 것이었다. 작전 집단의 공세 준비 포격이 10분간 이어지며 찰라이노어-만주리 지대의 일본군 방어를 뒤흔들 것이었지만 기습을 위해 아르군 강의 도하점에 대한 준비포격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었다. 루친스키는 선견대에 일본군 지역으로 깊숙히 진격할 동안 확실한 화력 지원을 약속했다.

제12항공군의 1개 폭격기사단이 일본군의 요새 지대, 비행장, 집결지를 타격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제36군은 전차 전력이 부족한 편이었는데 제205전차여단이 핵심 기동 전력이 되었으며 기타 2개의 독립전차대대가 차량화부대의 화력을 지원할 것이었다. 자바이칼 전선군 사령부는 아르군강 도하를 위한 대규모 공병들을 제36군에 지원해주었다. 제35군은 제68공병여단을 배속받았는데 이 여단은 4개 공병대대(제295, 296, 297, 298대대)와 2개 독립차량화부교대대(제12, 7대대), 그리고 제12 부교연대가 지원되었다. 제36군은 8월 8일에 아무르강 부교가설 작업을 시작하는 동시에 미국에게 랜드리스로 지원받은 DUKW 수륙양용차량을 사용하는 제653 도하대대가 아르군 강을 건너 도하점을 확보할 것이었다.

식수 문제가 관심사로 떠오르자 루친스키는 아무르 강과 하일라얼 사이로 진격하는 사이 제90급수중대를 편성해 아르군강의 식수를 될수 있는 대로 챙기고 몇 안되는 수원지에서 식수를 확보할 것을 계획했다. 이 중대는 급수 차량과 물탱크를 갖추고 수원지를 찾아다니며 물을 모으고 목마른 병사들에게 식수를 제공할 것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소련군이 가진 만주 지도가 부정확하여 제대로 된 수원지를 찾고 확보할 지는 미지수였다는 것이었다.

루친스키는 또한 아르군강을 도하해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했다. 아르군강의 강폭은 150미터에 달했다. 게다가 유속은 시속 20킬로미터로 빠른 편이었고 도하점은 차량이 빠져나가기 쉽지 않은 습지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68 공병여단의 공병들은 도하점에 통나무 발판을 설치하고 목재 부교를 임시로 부설할 것이었다. 자바이칼 전선군의 공병총감인 A.D 트실린 대장은 많은 목재들을 제68 공병여단에 지원해 주었다. 제68 공병여단은 이 목재들을 위장막 속에 잘 숨겨놓았다.

8월 8일 0060시 경에 제36군은 소만 국경에 도달하여 짧은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고, 선두의 2개 소총병사단 소속 공병들은 국경지대 지뢰 제거 작업을 시작했다.

8월 9일 0020시, 국경 수비 연대소속 병력들이 아르군강을 도하하기 시작하며 강 남쪽 둑의 일본군 초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계획대로 군 직할 포병 집단이 찰라이노머-만주리 요새 지대에 10분간의 준비 포격을 가하며 작전 집단의 공세 서막을 열었다. 칠흑같은 밤에다가 안개까지 낀 침투하기에는 최적의 기상 상황에서, 소총병사단의 선두 대대들이 보트를 통해 도하를 시작했고 도하에 성공한 공병들은 부교를 놓느라 죽을 힘을 다했으며 강습 병력들은 재빨리 2km에 이르는 도하점을 확보하고 공병들의 부교부설작업을 엄호했다.

1시간 후, 제17부교대대가 무게 30톤, 폭 30미터의 부교를 아르군 강에 가설하는 데 성공했다. 그 동안 제2소총병군단 소속 5개 대대 병력이 도하에 성공하고 있었다. 제2소총병군단의 좌익에서는 제635도하대대가 Staro Tsurukhaytuy에 2개 소총병연대 병력을 25분만에 상륙시켰다. 도하한 공병들은 이 지점에 5개의 부교를 가설했다. 계속된 부교가설 작업으로 제2소총병군단과 제86소총병군단은 30시간만에 전군이 아르군강을 도하해 만주로 돌입할 수 있었다.

아르군강을 도하한 강화된 205전차여단은 Staro Tsurukhaytuy와 하일라얼을 잇는 도로로 진격해 확보하고 1500시에 모어 곳과 토우츠샨으로 가는 교두보롤 확보했다. 205전차여단은 최대 속도로 남쪽으로 쇄도하며 일본군 저항 거점들을 마주치지 않고 2000시에 Burkhata Valley 계곡의 Postoianyi Dyor에 당도하여 도시와 주변 요새들을 8월 10일 아침까지 점령했다.

부르마소프 소장은 이 도시에서 수색대를 보내고 여단에 밤새 진군을 독려했다. 수색대가 동쪽 방면의 정찰을 마치고 돌아와 하일라얼 북쪽의 일본군 요새 위치들을 보고하자 부르마소프는 이 요새들을 우회하고 1개 소대병력만이 지키고 있는 하일라얼 철교를 공격하기로 했다. 8월 10일 2130시에 이 다리는 소련군의 손에 들어왔고 205전차여단은 하일라얼 강을 건널 다리를 확보했다. 여기까지 제205전차여단이 소모한 시간은 고작 12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

205전차여단과 다른 제대들의 대부분의 병력이 하일라얼 부근에 도달했고 1개 차량화소총병대대는 안보산 북쪽의 일본군과 맞닿트려 교전을 벌였다. 부르마소프는 동부 고지대를 확보해 저지선을 만들고 하일라얼 북동쪽으로 치고들어가 철도역을 확보한 후 도시 중심으로 돌진하라고 명령했다. 제152소총병연대가 2300시에 기동 지점으로 기동하며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도시 북서쪽의 오보토산에는 일본군 중포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도시에 소련군이 돌입한 걸 알고 놀라며 제205전차여단을 향해 포격을 가하며 여단의 진격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고 제205전차여단은 재정비 후 진격을 다시 시작했다. 반면 제152소총병연대는 일본군의 저항에 진격이 더뎌졌고 하일라얼의 일본군이 밤새 죄다 소탕된 뒤에야 제205전차여단과 합류할 수가 있었다.

8월 10일 동안 205전차여단은 하일라얼을 확보하고 고지대로 진격해 성가시게 굴던 일본군 포병들을 처리했다. 루친스키는 I.V 자마하예프 소장의 제94소총병사단에 205전차여단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8월 10일 2400시에 205전차여단이 구축한 하일라얼 요새 지대에 대한 얇은 포위망을 제94소총병사단이 합류함으로서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제205전차여단이 하일라얼을 접수할 때 제2소총병군단은 동쪽과 남쪽으로 진군하여 드라고젠카와 나키크불카, 야코신의 일본군 병력들을 섬멸했다. 제86소총병군단은 제205전차여단의 후속으로 하일라얼에 입성했고 작전 집단은 만주리와 찰라이노어 요새 지대를 무너트리고 하일라얼로 향했다.

제36군의 공세는 일본군에게 완벽한 기습으로 나타났다. 제36군은 만주리와 찰라이노어 수비 병력들을 삽시간에 큰 어려움 없이 압도해 8월 9일 저녁에 하일라얼에 다다랐다. 하일라얼을 수비하던 일본군 제80독립혼성여단은 끈질기지만 헛된 반격을 205전차여단에게 가했지만 후속으로 온 제86소총병군단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군 제119사단은 제4독립야전군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대싱안링 산맥에 구축된 운노어흐르 요새 지대로 재빨리 들어가 대싱안링 산맥으로 진격하던 제205전차여단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제205전차여단의 종심 깊은 공세와 기습은 대부분 목표를 달성했지만, 하일라얼의 일본군을 완전히 포위하는 데는 실패했다. 만주국 기병부대들은 하일라얼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최소한 제80독립혼성여단은 하일라얼에 완전히 갇혀버렸고 포위된 다른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무너져. 소련군의 무자비한 포격과 좁혀드는 포위망 안에서 제80독립혼성여단은 8월 18일에 만신창이가 된 채 3,827명이 항복했다. 일본군 제119사단 또한 4일간의 대싱안링 산맥 방어를 뒤로 한 채 소련군의 폭격, 포격에 시달리며 동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2.6. 플리예프 기병-기계화 집단의 진격[편집]


이사 플리예프 상장의 플리예프 기병-기계화 집단은 끝없는 사막을 건너 베이징 서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소련-몽골 기병-기계화 집단은 각각 200킬로미터에 이르는 2개의 진격 축선을 두고 진격했다. 각 진격로의 선견대로 제25기계화여단과 제43독립전차여단이 배치되었다.

8월 9일 해질 무렵에 기병-기계화 집단 선견대가 돌리노어와 칼간 남쪽을 통해 55마일에 이르는 내몽골 사막 지대를 주파하며 소규모 몽강자치연합 기병들을 일소했다. 8월 12일과 13일 사이에 플리예프가 지휘하는 소련-몽골 기병-기계화 집단은 내몽골 사막지대를 내달려 돌로노어와 칼간으로 하루 당 100킬로미터를 진군했다. 플리예프는 그의 부하들이 사막 지대에서 겪을 식수, 식량, 고온건조한 기온을 염려해야 했다. 그날 일본 제1기병사단의 소규모 병력이 칼간 북쪽의 국경 초소를 지키다가 기병-기계화 집단의 공격을 받아 후퇴했다.

8월 14일에 기병-기계화 집단은 돌로노어에서 저항하는 소규모 만주국군 기병대를 섬멸하고 돌로노어를 점령했다. 그 후속으로 제17군이 진군하여 성공적으로 대싱안링 산맥을 넘어 플리예프 기병-기계화집단이 우회한 일본군 병력들을 타오판신에서 사로잡았다.

8월 15일, 기병 기계화 집단은 계속해서 내몽골 사막을 건너며 몽강자치연합정부군의 제3, 5, 7기병사단을 칸바오에서 상대해야 했다. 기병 기계화 집단의 선견대인 제27차량화여단이 앞장서서 이 기병들을 격퇴시켰다. 이틀 간의 전투 끝에 기병 기계화집단은 1,635명의 포로들을 잡고 도시를 점령했다. 8월 18일에 소련-몽골군은 칼간을 향해 넘어서 계속 진군하며 몽강자치연합정부의 모든 영토를 점령했다.

일본이 8월 15일에 항복하고 관동군도 8월 18일에 항복을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관동군은 칼간 북쪽의 요새 지대에 틀어박혀 저항하고 있었다. 8월 21일까지 기병-기계화 집단은 이 헛된 저항을 쓸어버리고 만리장성을 넘는 퍼포먼스를 한다. 그리고 베이징으로 행진하면서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 팔로군과 합류한다.


2.7. 제17, 53군의 진격[편집]


다닐로프 중장의 제17군은 2개의 진격 축선에 선견대로 제70전차여단과 제82전차여단을 두고 내몽골로 진입했다. 해질 무렵에 제17군 선견대는 본대를 20킬로미터 뒤에 두고 70킬로미터를 진격했다.

제17군은 치흐펑으로 진격, 식수 부족과 태양과 모래에 시달리면서도 일본군 108사단의 저항을 쓸어버리고 치흐펑을 8월 17일에 점령했다. 그리고 산해관과 핑추안, 링관을 손에 넣으며 요동반도로 진격, 발해만에 도달했다.

제2제파인 마나가로프 상장의 제53군은 8월 10일에 제6근위전차군의 뒤를 따라 몽골에 도착했다. 제53군은 8월 15일에 제17군과 제6근위전차군의 틈을 매꾸면서 카일루를 확보하기 위해 진격했다. 진격은 방해받지 않았고 9월 1일에 제53군은 카일류, 차오양, 푸신, 그리고 Gush anbeitseifu를 점령했다. 53군 선견대는 요동만의 칭쳐우 지역을 점령했다.


2.8. 작전 결과[편집]


자바이칼 전선군의 성공은 산맥을 넘어 기계화부대를 기동시킨 대담한 작전과 관동군의 경직된 대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관동군은 소련군이 대싱안링 산맥을 넘어올 것이라는 생각은 그들의 대응 시나리오에서 예상하지 않았었고 이는 결국 소련군의 산맥 기동으로 말미암은 기습으로 인해 제107사단과 제80독립혼성여단은 심리적, 물리적 마비 상태를 겪으며 우회당하고, 포위당하고, 포위망에 갇혀 차차 섬멸되었다. 또한 일본군의 공세적 방어 거점이자 공들여 새운 하일라얼 요새 지대는 결국 우회당해 버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소련군의 조공에 발이 묶이고 포위당해 무력화 되었다.

하지만 험지 기동을 통한 소련군의 여러 문제들인 예상보다 더 빠른 유류 소비, 병사들의 체력 고갈 등을 이용한 관동군의 수비는 없지는 않았다. 일본군 제119사단은 재빨리 대싱안링 산맥에 만들어 둔 요새 지대로 기동하여 소련군의 진격을 끈질기게 저지하는 데 성공하며 험지 방어의 모범사례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모든 힘은 관동군을 압도하며 혼란에 빠진 관동군 사령부를 마비시키고 극동전략방면군 사령부와 전선군 사령부의 고위 사령관들, 고위 참모들을 흡족하게 만들어 주었다. 만주 서부의 험한 지형을 극복한 자바이칼 전선군의 결정적인 공세는 험지에서의 기동작전의 모범적인 교과서가 되었다.


3. 제1 극동 전선군의 공세[편집]



3.1. 만주 동부의 일본군 방어계획[편집]


제1극동 전선군이 만주 동부에서 중심부로 치고들어가는 직접적인 진격로는 하얼빈에서 무단장 사이의 구릉 지대와 우수리 강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만주 동부의 철도는 이 길에 놓여 있었으며 관동군은 이 지대에 마치 마지노 선처럼 촘촘하고 강력한 요새 방어망을 건설해 놓아 소련군의 전략적, 작전적 기동을 차단하려 했다. 게다가 이런 요새들은 앞서 서술한 공세계획중에 공세적인 목적으로도 사용하려고 중화기를 가득 배치했을 뿐 아니라, 관동군은 이 요새 지역이 험한 구릉지와 빽빽한 삼림으로 들어차 있어 아무리 현대화된 군대라도 통과하기는 어렵다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예에서 보듯이 지형과 요새만 믿고 있다가는 낭패를 크게 볼 수 있었다. 일본군 참모들 일부도 1940년의 사례를 들며 만주 동부의 요새 라인과 지형에만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의견을 냈지만 소수에 그쳤다.

일본군 요새 지대는 남북으로 40킬로미터에 이르렀으며 수이펜호로 향하는 주요 도로들과 철도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요새들은 10~15킬로미터에 이르는 종심을 가지고 건설되었으며 주요 도로지대를 지키는 요새들은 30~35킬로미터의 종심을 가지고 있었다. 국경 요새 지대는 4개의 지구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 중 북동쪽과 동쪽을 지키는 수이페호 요새지대는 북쪽으로 10~12킬로미터의 정면과 2.5~9킬로미터의 종심을 확보하고 철도들을 지키고 있었다.

20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볼린스크 지구는 삼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수이페호 남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루민타이 요새 지구가 있었으며 제1극동전선군과 마주보는 형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해 8월의 동부 요새지대에는 295개의 콘크리트 특화점, 145개의 통나무 특화점, 58개의 콘크리트 방공호, 69개의 포탑, 29개의 관측소와 지휘소, 그리고 55개의 포대가 있었다. 기관총 특화점들은 250에서 300미터마다, 대전차포, 야포 특화점들은 500에서 700미터당 하나씩 있었다.


3.2. 제1극동 전선군의 공세 계획[편집]


붉은 군대는 당연히 관동군보다 프랑스 전역에서 더 많은 걸 배웠지만, 그래도 애로사항은 많았다. 일본군이 제법 종심 깊게 설치한 요새 지대는 종심 작전을 힘들게 만들었고 어려운 도로 상황에서 통신선과 보급선을 어떻게 유지할 것이냐도 문제였다. 이는 결국 부딪쳐 봐야 하는 것이었다. 극동전략방면사령부는 메레츠코프 원수의 제1극동 전선군에게 만주 동부 공략을 맡겼다.

6월 28일에 스타브카에서 극동전략방면사령부를 통해 제1극동 전선군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2개 제병협동군으로 주공을 형성하고 만주 동부의 요새 지대에 구멍을 내버리고 작전 개시 15~18일 쯤에 무단장-왕칭 라인을 형성하라는 것이었다. 이후 병력이 무단 장 동부에 집결하면 왕칭을 거쳐 옌지와 길림, 그러니까 간도로 공세를 가할 것이었다.

메레츠코프는 주공이 될 2개 야전군으로 니콜라이 크릴로프 상장의 제5군과 벨로보로도프의 제1적기군을 두었다. 제5군은 무단장으로 쳐들어가 그로데코바 북쪽에서부터 12킬로미터에 달하는 돌출부를 요새 지대에 뚫고 볼슨크의 일본군 방어를 분쇄하며 요새지대 중심으로 치고들어가고 타이핀링을 고개와 수이펜호를 작전 개시 4일만에 점령할 것이었다. 메레츠코프는 제5군이 작전 개시 8일째에 제5군이 무단 강을 건너 무단장을 확보해 제1적기군과 합류할 것을 예상했다. 무단장을 점령하면 메레츠코프는 제10기계화군단을 제5군 지역에 투입시켜 길림을 향해 공세를 펴고 자바이칼 전선군 병력과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3.3. 제5군의 공격(8.9~8.11)[편집]


제5군의 야심만만한 공세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크릴로프의 병사들이 지형의 어려움과 요새 지대 깊숙히 들어가면서 펼쳐질 관동군의 강력한 저항을 이겨내야 했다. 일본군 요새 지대는 남북으로 40킬로미터에 이르렀으며 수이펜호로 향하는 주요 도로들과 철도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요새들은 10~15킬로미터에 이르는 종심을 가지고 건설되었으며 주요 도로지대를 지키는 요새들은 30~35킬로미터의 종심을 가지고 있었다. 국경 요새 지대는 4개의 지구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 중 북동쪽과 동쪽을 지키는 수이펜호 요새지대는 북쪽으로 10~12킬로미터의 정면과 2.5~9킬로미터의 종심을 확보하고 철도들을 지키고 있었다.

20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볼린스크 지구는 삼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수이펜호 남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루민타이 지구가 있었으며 제1극동 전선군과 마주보는 형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해 8월의 동부 요새지대에는 295개의 콘크리트 특화점, 145개의 통나무 특화점, 58개의 콘크리트 방공호, 69개의 포탑, 29개의 관측소와 지휘소, 그리고 55개의 포대가 있었다. 기관총 특화점들은 250에서 300미터마다, 대전차포, 야포 특화점들은 500에서 700미터당 하나씩 있었다. 특화점 주변에는 철조망 라인이 구축되고 지뢰들이 매설되었다. 요새 지대뿐 아니라 볼슨카강과 무단강 주변의 빽빽한 삼림들도 소련군의 진격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뽑혔다.

이 지대를 지키는 일본군은 제5군으로 수이펜호 요새 지대는 시이나 소장의 제124사단, 그리고 126사단, 제128사단이 있었다. 124사단은 물렝, 수이양, 그리고 흐치아쳉즈 지대를 지키고 있었으며 126사단은 파미엔텅에 사령부를 두고 제124사단의 좌익에 위치했고 128사단은 롯조커우에 사령부를 두고 제124사단의 우익에 위치했다. 하지만 각 사단들의 담당 지역이 너무 넓어서 각 사단간의 유기적인 협조는 기대하기 많이 힘들었다.

메레츠코프는 이 요새 지대를 돌파하기 위해서 제5군을 개편했다. 제5군은 요새 돌파를 위하여 그 규모가 다른 소련의 야전군들보다 커졌고 화력 또한 크게 증강되었다. 그 결과 제5군은 12개 소총병사단, 1개 요새수비대, 5개 전차여단, 5개 중돌격포여단, 22개 포병여단, 4개 공병여단, 1개 방공사단, 그리고 기타 지원연대를 포함하여 총 692개의 전차와 돌격포, 2,945문의 야포와 박격포, 그리고 432대의 카츄샤를 배속받았다. 메레츠코프는 제9항공군에게 5군을 항공지원할 것을 명령했다.

1945년 7월, 제5군은 독일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출발하여 극동까지 길고 긴 여정 끝에 우수리스크에 도착했다. 짧지만 달콤한 휴식이 끝나자 제5군 병사들은 만주 동부의 삼림 지대에서의 작전을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훈련을 끝낸 제5군은 8월 1일에서 6일까지 국경 지대로의 이동을 끝냈다. 기습을 위하여 엄청난 양의 위장막이 제5군에게 지급되었고 작전 시작 전까지 국경에서의 움직임은 최소화 되었다. 모든 무선통신은 최소화되었고 철저한 통제하에 들어갔다. 공병들은 지급받은 위장막을 주요 작전 지역마다 펼쳤는데 위장막의 길이는 1,151개의 소련군 주둔지를 죄다 덮을 정도였다.

작전을 위하여 5군 사령관 크릴로프는 5군 소속 제대들을 2개 제파로 나누었다. 제1파는 제65, 72, 17소총병군단으로 구성되었으며 1개 국경수비대가 배속되었다. 제2파는 제45소총병군단으로 제1파 후방 25에서 30킬로미터 지점에서 진군할 것이었다. 모든 소총병군단들과 소총병사단들은 좁은 공세로를 할당받았고 구릉과 삼림 지대를 통과해야 했다.

한편 크릴로프는 고민 끝에 기습을 위하여 작전 바로 전날에 공세를 위한 준비 포격을 생략시키고 쓸데없는 과잉화력을 사용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휘하 지휘관들은 독소전 때처럼 무지막지한 화력 지원 속에 기동하고 싶어 했지만 크릴로프는 기습효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부하들을 설득했고 적의 포진지는 어떻게 처리할 거냐는 질문에는 야습을 통해 침투한 강습병들이 포진지들을 기습해 처리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크릴로프는 또한 휘하 전투공병들에게 삼림 지대에서의 침투로 개척과 작전을 위한 적 소규모 초소 제압과 확보를 지시했고 명령은 제대로 시행되고 있었다.

작전 당일, 제5군의 모든 준비가 끝났다. 마침 장맛비가 내려주는 지라 소련 제5군 병력들은 어둠 속에 완벽히 숨어들 수가 있었다. 한편 제5군의 대공세를 상대해야 할 일본군 제124사단 병력들은 이런 날씨에 소련군이 군사적 행동을 취할 리가 없다 생각하며 마음 푹 놓고 자고 있거나 경계근무를 허술하게 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사단장은 무단장에서 열리는 일본군 제5군 사령관들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에 없던 상태였다.

8월 9일 0100시, 제5군의 소총병대대들이 전차와 돌격포와의 합동 아래 어둠과 장맛비 속에서 국경을 넘어 일본군 초소들을 하나하나 점령하기 시작했다. 준비 포격이 없어 공격은 아무 징후도 없이 조용하게 진행되었고 관동군 병력들은 완벽한 기습에 직면했다. 삽시간에 대부분의 국경 초소들이 정리되거나 포위되어 버렸고 소련군 보병들은 저항하는 일본군 병력들을 일소했다. 소련군이 공격시 피해가 클 것이라 예상했던 주요 토치카나 요새들도 조용한 야간 기습에 힘 한번 못써보고 허물어져 버렸다.

관동군의 만주 동부 국경 방어망에는 그날 밤 새에 구멍이 뚫려버렸다. 제5군의 우익인 제65소총병군단의 진격로에서는 제190과 제97소총병사단이 빽빽한 삼림지대를 뚫으며 카멜 요새지대 북쪽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0400시까지 두 사단은 6킬로미터를 침투해 들어가며 슌리엔추안 강을 건너 카멜에 도달했다. 동시에, 제144소총병사단의 선두 연대인 글라주노프 소령의 제785소총병연대가 카멜 지대에 도달했다. 일본군은 785소총병연대의 1차 공격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0700시에 ISU-152 중돌격포를 대동한 소련 소총병대대들이 공격을 재개했다. 10분간의 준비 포격 이후 글라주노프 소령은 제4,5중대를 ISU-152의 직사 화력 지원 하에 요새로 돌격시켰고 제6중대는 카멜 남쪽으로 기동해 덤벼들게 했다. 이 동시다발적인 공격에 카멜 요새지대는 제144소총병사단에게 완전히 점령되었다.

볼린카 강 남쪽에서는 제72소총병군단 소속의 제215와 제63소총병사단의 선두 대대들이 샤프, 오피레츠카이아, 피어라는 소련군이 붙인 암호명으로 표현되는 화력특화점으로 진격했다. 제215소총병사단 소속의 제707소총병연대 제3대대는 샤프 특화점으로 0100시까지 진격했다. 3대대 소속 쉬체르바코프 대위의 중대가 선봉에서 샤프 특화점을 최초로 공격했다. 중대는 요새 공격 전에 신중을 가하기 위해 요새와 그 주변의 초소를 잇는 모든 통신망을 제거하고 요새 돌입을 위한 강습 부대들을 편성했다. 나침반에만 의존하며 사전 작업을 벌이길 2시간, 0300시에 전투공병들이 지뢰와 철조망들을 제거하자 중대는 관동군 요새로 침투를 시작했다. 0315시에 샤프 특화점은 포위되었고 모스칼레프 대위가 이끄는 1개 대대병력이 특화점 공격에 합류했다. 기습을 위해서 포격과 전차 지원을 생략한 채 소련 강습부대들은 요새로 돌입하며 참호와 총안구에 수류탄과 화염병을 까넣고 기관단총을 난사했다. 0500시, 샤프 특화점은 소련군에게 점령되었다. 피어 특화점 또한 같은 과정을 반복하며 샤프 특화점과 함께 점령되었다.

더 남쪽, 제17소총병군단의 담당 구역에서 수이펜호로 통하는 기차 터널들을 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제187소총병사단의 선두 대대들이 터널을 지키는 일본군 토치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대들이 철도를 지키는 일본군 병력들을 공격할 동안 제20강습전투공병여단은 지뢰지대를 제거하고 전차들과 함께 일본군 측면으로 치고들어갔다. 제20전투공병여단은 5개 초소를 박살냈고 대대들은 8월 9일 0600시까지 수이펜호로 통하는 철도를 확보했다. 각 담당 공세전면에서 진행된 요새 정리와 철도 점령 작전들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크릴로프는 적어도 0830시에 임무가 완수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0600시에 끝나버렸던 것이다.

소련군의 야간 기습은 대대적인 기습 효과를 발생시켰다. 밤인데다가 비까지 오고 숙달된 소련군의 요새 침투술과 잘 조율된 화력은 일본군 방어망을 완벽히 마비시키고 무력화시켰다. 일본군 요새들과 초소들, 특화점들은 기습으로 인해 넋이 나가서 앞뒤가 맞지 않고 혼란스러운 무선을 보냈고 그 결과 일본군 제3군 참모들은 소련군이 전면적인 공세를 시작한 건지 아니면 국경에서의 사소한 충돌일 뿐인지에 대해서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심지어 제3군 참모들의 대부분은 1200시까지 소련군이 공세를 시작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공세가 시작된지 11시간이나 지났는데도 말이다!

일본군 제5군은 제3군보다는 형편이 나았다. 소련군의 공세를 즉각 보고받은 제5군은 야간 항공 정찰을 통해 소련군의 공세를 파악하고 제1방면군 사령부에 회의차 가 있던 참모들을 불러모았다. 0300시에 예흐호 장교 클럽에서 모인 지휘관들과 참모들은 소련 포병대가 국경으로 이동 중이며 소련 보병들의 요새 강습이 시작되었다는 것에 대해 대책을 논의하고 휘하 제대들에 명령을 내렸다.

"군의 계획은 국경 수비군이 끝까지 버텨 주며 군의 주력 병력이 도달할때까지 각자 위치에서 국경을 지키는 것이다. 제124사단은 위수 지역인 루민타이, 수이펜호, 쿠아니우헤흐타이를 사수하며 중점 방어선에서 오는 적의 공격을 막고 지원이 올 때까지 기다려라."


각 지휘관들은 유선전화로 사령부의 명령을 전달받고 각자 위치로 돌아갔다. 무단장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했던 124사단장 시이나 소장은 급보를 듣고 급히 무단장에서 출발해 소련군의 폭격이 쏟아지는 물렝에 도달했다. 시이나는 사단 사령부로 가서 사단 병력이 어떻게는 주 방어선을 사수하고 소련군의 공격을 차단하고 몰아낼 것을 궁리해야 했다.

시이나는 수이펜호와 쿠아니우에흐타이를 지키는 병력들에게 소련군의 공격을 지연시킬 것을 명하며 제217연대장인 아수 대좌를 관리자로 보냈다. 그리고 국경 요새들과 물렝에 쌓여 있는 비축 물자들이 소련군에게 넘어가기 전에 빨리 무단장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시이나는 물렝 강 서쪽의 이코코 산으로 사령부를 옮겼다. 시이나의 명령은 적절한 편이었지만 통신상의 혼란과 각 제대간 잘 협조가 되지 않아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이 계속 발생했다.

일본군이 8월 9일 아침에 소련군의 공세를 파악했을 때, 소련군은 공세를 가속화시키기 시작했다. 선두 대대들은 일본 요새망에 회랑을 열었고 후속 병력들이 그 회랑으로 쏟아져왔다. 하지만 밤새 전투에서 우회되어 아직 점령되지 않은 주요 요새가 있었는데 제65소총병군단의 진격 지역에 있었다. 카멜 요새를 점령한 제144소총병사단과 제97소총병사단이 요새 점령을 위해 달려왔고 0930시에 이 요새 또한 점령되었다. 양 사단의 1개 전차여단, 1개 돌격포연대, 그리고 선두 대대들이 선견대를 구성하고 20킬로미터를 진격해들어갔다. 제144소총병사단은 랴오차이잉에, 97소총병사단은 만치아오역을 점령했다.

볼린카 강의 남쪽, 제72소총병군단은 샤프와 피어 요새 지대의 일본군 요새들을 하나씩 무너뜨리고 있었다. 8월 9일 12시까지 제215소총병사단은 샤프 요새지대 서쪽에서부터 요새지대 남북을 잊는 주요 철도선과 통신선을 끊어버렸고 국경선에서 5킬로미터를 파고들어갔다. 제63소총병사단도 피어 요새지대를 차근차근 점령하고 있었다. 제215소총병사단의 선견대인 제210전차여단과 제333중돌격포 연대가 보병을 수반하고 수이양 서쪽에 1500시에 도달했다. 군단 직할 선견대도 215소총병사단 선견대와 병렬진격하며 구멍을 크게 뚫어놓았다. 그날 저녁, 제72소총병군단선견대는 15에서 18킬로미터의 진격로를 뚫어놓았다. 제277소총병연대가 후속으로 투입되어 아직 남아있던 일본군의 저항을 일소했다.

8월 9일 일몰때, 제5군은 소만 국경에서 35킬로미터 이상 돌파해 들어갔다. 소련군은 이 정도 기동을 하는데 3일 정도 걸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해본 결과 하루 만에 끝내버린 것이다. 제5군의 야습은 일본군을 완벽히 혼란에 빠트리는데 성공했으며 따라가기 힘든 빠른 진격은 일본군의 방어 계획들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소련군 대대들은 최후의 1인까지 옥쇄하겠다며 버티는 일본군 요새들을 정리하며 지쳐버렸지만 결국 ISU-152나 SU-152, SU-122 등의 무지막지한 직사화력은 일본군의 저항도 헛되게 특화점과 벙커들, 요새들을 허물어트렸다.

한편 8월 9일 오후, 도쿄의 일본 대본영은 소련군의 공격을 보고받았으나 그 규모가 크지 않다고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관동군 사령부 또한 소련군의 공격이 3개 사단과 3개 여단 규모일 것으로 판단해 버렸다. 물론 실제로는 15개 사단과 8개 전차여단이 공세에 나서고 있었다.

제1방면군 사령부는 소련군이 제124사단 지역의 국경 돌파에 성공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124사단과 제126사단의 경계로 소련군이 몰려들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소련군 기갑세력이 수이펜호와 무단장을 잇는 철도를 노리고 있다 판단한 제1방면군 사령부는 제5군에 명령을 내려 제135사단에서 2개 대대를 차출해 제124사단에 증원하라고 명령했다. 제124사단의 아수 대좌는 제271연대를 이끌고 수이양에 1200시에 도착하여 물자 하역과 도시 소개 작업을 시작했다.

아수는 다음날 저녁까지 물자들을 물렝 강을 건너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상관인 시이나 소장이 소련군의 진격을 차단하기 위해 물렝 강의 다리들을 최소한만 남기고 폭파했다는 것이었다. 아수는 배에다 물자를 실은 차량들을 태워 건너보내려 했지만 배들이 트럭의 무개를 견디지 못하는 등 계속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271연대는 적잖은 차장물자를 남겨두고 후퇴해야 했다.

그런데 비슷한 사례가 발생했다. 제5군 사령부는 무단장에서 1개 중야포 연대를 제124사단에 보내기로 결정했는데 문제는 결정을 하고 보니 막상 야포들을 나를 차량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군은 하나라도 아까운 75밀리 포와 90밀리, 150밀리 포들을 눈물을 머금고 파괴해야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사기는 높았고 시이나 소장은 이것에 고무되어 물렝 강을 도하하는 소련군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8월 10일, 소련군은 국경지대를 더 깊숙히 파고들어가기 시작했다. 제65소총병군단은 타이핀링과 모운을 잇는 철도망을 점령하며 2개의 진격 축선을 뚫었고 만치아초역을 점령했다. 제72소총병군단은 수이양으로 행군하고 물렝으로 진격하며 만치아오를 점령한 제65소총병군단과 연결했다. 제17소총병군단은 수이펜호로 진격하는데 성공하여 전선군의 최우익에서 진군하던 치스차코프의 제25군과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각 군단 선견대들은 군단 주력에서 10~15킬로미터를 앞서 나갔다.

소련군의 재빠른 공세는 일본군이 새로운 방어선을 급조하게 만들며 일본군 방어선이 제대로 조직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8월 10일 저녁에 소련 제5군은 18에서 30킬로미터를 추가로 진격했고 돌파구를 50에서 70킬로미터로 확장했다. 8월 11일 아침에 소련군은 80킬로미터의 쐐기를 만주 동부 요새지대에 밖아넣었고 물렝 강에 도달하여 일본군이 물렝강과 이코코산에 조직한 방어선과 요새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이 승리 끝에, 제5군은 무단장으로 쳐들어갈 모든 준비를 마쳤다.


3.4. 제1적기군의 공격(8.9~8.11)[편집]


수이펜호 북쪽부터 한카 호수는 울퉁불퉁한 산악 지대였다. 한카 서쪽에서부터 40킬로미터는 개활지였지만 습지와 개울이 많았다. 더 서쪽으로는 가라 프라파스치라 불리는 고지대가 있었다. 가라 프라파스치 서쪽에서 8킬로미터 가면 파그라니치늬 고원이 있었는데 빽뺵한 삼림으로 뒤덮혀 있었다. 여기서 남쪽으로가면 무단장과 왕칭에 도달할 수 있었다.

메레츠코프 원수는 이 고지대를 돌파하는 임무를 벨로보로도프상장의 제1적기군에 맡겼다. 제1적기군은 이곳을 돌파함과 동시에 양 옆의 제5군과 제35군의 공세를 지원하게 되었다. 벨로보로도프는 이 지대가 기갑 전력을 통과시키기에는 무척 어려운 곳이라고 판단했다. 메레츠코프는 7월 8일에 제1적기군에 파미엔퉁 서쪽을 거쳐 돌파하면 제5군과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벨로보로도프의 군대는 작전 개시 3일동안 30킬로미터의 종심을 주파해야 했고 산들과 타이가라 부르는 북극권 삼림지대를 돌파해야 했다. 작전 개시 8일에 제1적기군은 팜미엔퉁과 린커우 시를 짐령해야 했다. 그 후에 제1적기군은 무단 강에 도달해 무단장측면으로 진격해 제5군과 협격하여 무단장을 포위한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동시에 제1적기군의 우익은 북쪽인 칸카 호수 서안으로 치고들어가 일본군의 밀산 요새 지대를 박살내고 제35군의돌입을 도와줄 것이었다.

그 관계로 제1적기군은 8일 동안 150에서 180킬로미터를 진군해야 했고 하루당 진군속도를 평균 8에서 10킬로미터로 맞춰야했다. 제일 위험한 부분은 첫날에 8에서 20킬로미터의 삼림을뚫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이 삼림지대는 2명도 통과하기 어렵다고 마음 놓고 있었지만 벨로보드로프는 이 삼림지대로 6개 소총병사단과, 포병사단, 400대가 넘는 전차와 자주포, 돌격포들, 1개 중야포여단과 2개 전투공병여단, 그리고 천여 대의 모터사이클을 통과시킬 것이었다. 메레츠코프와 벨로보드로프는이 지역은 통과하기 어려운 만큼 일본군의 방어도 허술할 것을예상하고 있었다.

이곳의 일본군은 제126사단으로 노미조 카즈히코 중장이 지휘하고 있으며 팜미엔퉁에 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이 사단은 80에서 100킬로미터의 종심을 두고 120킬로미터의 국경을 방어해야 했다. 126사단의 최전방 방어선은 2개의 축선으로 되어있었는데 하나는 핑양 시를 지키는 것이었다. 남쪽의 밀산에는 제135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135사단은 핑양과 팜미엔퉁이 뚫릴때를 대비한 제2방어선을 전개하고 있었다. 제135사단의 방어정면은 40킬로미터로 칭쿠링먀오에서 주몬지 교차로를 방어하고 있었다.

주요 방어 지역은 상치툰, 판치에호, 난샨, 그리고 흐샤오루타이였고 모두 2대 대대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어야 했지만 계속되어병력이 빠져나가 중대 규모의 1개 소대씩밖에 주둔하지 못했다.여기의 일본군의 임무는 핑양을 방어하여 소련군을 상대로 지연전을 벌이고 본대의 지원을 기다리며 지키는 것이었다. 흐샤오루타이의 주둔군의 경우 최후의 1인까지 위치를 사수하란 명령이 있었다. 팜미엔퉁 지역의 일본군 병력은 돌파당할 경우 적지에서 유격전을 벌이게 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팜미엔퉁과 리슈첸 라인에 제3방어선을 설정해 놓았는데 이 라인은 물렝강을 중심으로 그려졌고 위험시 물렝 강의다리들을 파괴할 계획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제126,124, 135사단은 강을 건너 후퇴할 것이었다. 벨로보로도프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이 험지를 어떻게 통과하고 통과한 이후에도 어떻게 보급선과 통신선을 유지할 것인가였다. 그래서 벨로보로도프는숲에서 겨우 개척한 오솔길을 일렬 종대로 통과시킬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비좁은 단선 도로를 지나고 있을 때 숨어 있던 일본군이공격을 하다가 전차가 길 위에서 한대라도 주저앉기만 하면 끔찍한 수준의 교통정체가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이 위험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전차 위에는 항상 전투공병들이 탑승하여 전차를 보호하고 길을 개척해야 했다. 7월 12일에 벨로보로도프는 제1극동 전선군 사령부를 찾아 메레츠코프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메레츠코프는 2개의 진격로마다 3개 소총병사단이 통과할수 있다 말했지만 벨로보로도프는 1개의 진격로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고 메레츠코프를 설득했다. 메레츠코프는 벨로보로도프의 계획을 승인했다.

7월 24일, 제1적기군이 집결 장소에 모두 모인지 이틀 후, 벨로보로도프는 병사들에게 공격 게획을 설명했다. 군의 우익에서칸카 호수부터 파그라니치늬 고원을 넘어 밀산 요새화 지대로 진격할 부대는 제112국경수비대와 제6국경수비대가 될 것이며 밀산 요새 지대에서 반격을 위해 나오는 일본군을 차단할 것이었다. 더 서쪽의 핑양 요새지대 공략에는 제59소총병군단 예하 제397소총병연대가 투입될 것이었다. 벨로보로도프의 부관인 막시모프 소장이 제1적기군의 우익 부대를 통합 지휘하며 2개 돌격포 연대와 제60대전차여단을 지원받을 것이었다.

제1적기군의 주공은 군의 좌익에서 진행될 것이었다. 이 좁은 지대에 A.В. 스크보로초프 중장의 제26소총병군단과 A. С. 크세노폰토프 중장의 제59소총병군단이 각각 2개 소총병사단을 1파로 내세워 일본군 방어선에 구멍을 내고 팜미엔퉁과 리수첸으로 진격해 철도망과 통신망을 끊고 점령한 뒤 물렝 강으로 진격할 것이었다. 그 이후 2개 군단은 링커우와 무단장 북쪽으로 향하는 진격로로 갈라져 무단장을 향해 공격을 퍼부울 것이었다.

첫 계획이 이렇게 발표되자 벨로보로도프는 이 작전을 어떻게 지원할 것이냐에 대해 관심을 돌렸다. 포격 지원은 지형상의 난점으로 매우 힘들었다. 야포를 이곳으로 나르려면 인력이 잔뜩 동원되어야 했다. 벨로보로도프는 이 지대에서 선제 포격을 동원한 일본군 제압은 매우 힘들 걸로 파악했다. 다행히도 제9항공군이 대대적인 지원에 들어갔고 의외로 소련 포병들이 근성을 발휘해 제1적기군의 야포들은 그 지대에서 50퍼센트의 가동률을 보이게 됐다.

이 지역을 안정적인 속도로 통과하기 위해서 제1극동 전선군 사령부는 제1적기군에 1개 독립전차여단과 1개 독립돌격포연대를 지원했다. 제1적기군은 그리하여 3개 전차여단과 3개 돌격포연대, 그리고 1개 중전차연대를 가지게 되었고 각 사단당 1개 돌격포대대를 추가로 지원받았다. 벨로보로도프는 2개 전차여단과 1개 중돌격포 연대를 공병 지원하에 선봉에 내세워 험지 통과 이후 선견대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제1극동 전선군 사령부는 추가적인 공병들을 제1적기군에 지원했다.

벨로보로도프의 명령에 따라 각 군단은 2개 사단을 제1파로 세우고 1개 사단을 제2파로 세웠다. 전차와 돌격포는 제1파에 중점적으로 배치되었다. 제1파의 소총병사단들은 공병들을 통해 2~3개의 진격로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K. Г. 체레바노프 소장의 제300소총병사단이 이 임무의 선봉에 서서 대대적인 진격로 개척에 나섰다.

8월 8일 저녁 1800시, 제300소총병사단이 진격로 개척을 마친 차에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령관들 몇몇이 진격로를 밝히기 위해 탐조등을 사용하자고 건의했지만 벨로보로도포는 그럼 야습 효과를 크게 떨어트릴 것이라며 탐조등 사용을 금지했다. 되려 벨로보로도프는 장맛비와 천둥소리가 야습을 숨겨줄 것이라며 좋아했다.

8월 9일 0110시, 제1적기군의 제1파가 숲 지대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제300소총병사단 지역에서 2개 종대로 진격하던 소련군은 최대한의 침묵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모든 전차와 돌격포, 차량에는 수풀로 덮은 위장막이 덮였다. 공병들은 후속하는 부대들이 오기 편하도록 길을 개척하느라 애를 썼다. 비로 생긴 진창과 뻘밭에 고생하면서도, 제300소총병사단의 장병들은 계획된 시간 아래 조용히 숲을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숲을 통과한 300사단의 연대급 부대들은 치우피커우의 일본군 초소를 발견했다. 제1051소총병연대가 이 지역의 초소들을 기습해 장악하고 후속 부대들은 서쪽의 시투호 강으로 진격했다. 그날이 끝나갈 때 제1051소총병연대는 시토우호와 남서쪽의 748고지를 확보하고 제1049소총병연대는 티에르시이하오 산을 오르고 나머지 2개 대대는 시토우호 강을 건넜다. 제1049연대의 제3 대대는 파닌 중령이 이끌고 있었는데 연대 포병들이 강을 건너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두 연대는 첫날에 5킬로미터를 뚫고 가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저항이 없어도 이 험지를 통과하는 것은 정말 힘들고 지겨운 행군이었다. 대비를 했는데도 계속 문제가 발생하자 사단장 체레파노프는 휘하 대대들에 길을 더 넓히고 통신선을 더 확실히 하라고 명령했다. 8월 10일 아침에, 사단의 선견대인 제277전차여단이 시투호강 서안에 도달해 팜미엔퉁으로 돌진할 준비를 했다.

그 무렵, 제126사단 참모장인 다나카 마사시 대좌는 소련군의 공습과 무선통신망의 마비를 보고하고 있었다. 판치에호의 일본 주둔군 사령부는 제126사단으로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됐음을 알아차렸다. 사단 정보장교는 한밤중에 일어나 소련군 폭격기들의 프로펠러 소리를 들었다. 조금 후에 핑양과 팜미엔퉁 지대는 대대적인 폭격을 받게 되었다. 일본군 제277연대 소속 제1대대는 소련군 폭격기들이 구축한 바리케이드와 후퇴한 다리를 다 부셔놓는 것을 보고 망연자실해 했다.

8월 9일 1000시에 리샨에 주둔한 일본군은 치우피커우에 주둔한 대대 병력이 12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는 보고를 들어야 했다. 이 대대적인 항공 공격은 소련 지상군이 그곳에 도달하지도 않았음에도 소련군이 이미 주요 지역들을 점령했다는 괴소문을 퍼지게 만들었다. 보고를 들은 제5군 사령부는 제126사단에 제31독립대전차대대와 제20중포대대를 증원했다. 증원된 병력을 인솔하기 위해 126사단장이 차를 타고 직접 팜미엔퉁으로 향했다.

8월 9일 저녁에 제126사단 사령부는 치웅산으로 보낸 정찰대와의 통신이 두절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고 헤일링산 또한 마찬가지의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날 밤에 소련군 병력들이 판치에호 동쪽으로부터 진격해 들어왔다. 계속되는 사태에 질려 있던 일본군 지휘관들은 이 병력을 1개 사단 병력으로 과대평가했다. 버틸 수가 없다고 판단한 사단장은 핑양첸으로 후퇴할 것을 결정했다. 핑양첸에서 집결하는 대신에 일본군은 판치에호와 흐샤오루타이로 진격해 오는 소련군을 핑양첸 서쪽에서 막아내기로 결정했다.

8월 9일 저녁 팜미엔퉁 지역의 일본 주둔군은 칭쿠링먀오와 리샨의 일본군이 동쪽과 남동쪽에서 소련군의 공세에 직면하였다는 보고를 들었다. 일본군이 소련군의 공세를 확인했을 때는 이미 소련군 제300소총병사단은 시터호강에 도달해 있었다. 공세의 우익에서는 제22소총병사단이 느리게 칭쿠링먀오를 압박하고 있었다. 더 동쪽에서는 제59소총병군단이 핑양 방어지구 중심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8월 10일 0500시에 제1049소총병연대와 1051소총병연대는 시터호 강에 도하점을 마련하고 남아 있는 8에서 10킬로미터의 숲을 돌파하며 팜미엔퉁의 개활지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아직 제 위치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었다. 진격을 서두르기 위해서 사단 선견대인 Г. С. 아니쉬치크 중령의 제257전차여단은 선봉에 서서 일본군 특화점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 임무를 지원하기 위해서 벨로보로도프는 여단에 25대의 전차와 1개 공병소대, 1개 기관총 중대를 지원했다.

아침 동안, 증강된 제257전차여단은 서쪽으로 진격해 748.8고지 북쪽으로 들어가 리앙츠 호로 통하는 계곡에 들어섰고 팜미엔퉁으로 향해 북서쪽으로 달렸다. 제1052소총병연대는 리샨의 일본군 요새들을 제압했다. 북쪽에서 제1049소총병연대는 서쪽으로 진격해 시터호 계곡에 도달했고 제22소총병사단도 더 서쪽으로 진격했다. 소련군은 일본군 막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불이 숲에 옮겨붙으며 잠깐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어쨌든 계속된 진격의 결과 소련군은 전차포의 지원 아래 이 지역 일본군의 측면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했고 이곳의 일본군 지휘관인 카와카미 소위는 그의 소대를 북서쪽으로 철수시켰다.

같은 시간에 제1051소총병연대는 리샨에서 일본군의 증강된 1개 중대를 상대하고 있었다. 소련군의 첫번째 공격으로 리샨의 일본 주둔군은 포위되었고 엄청난 포격이 리샨에 쏟아졌다. 그날 오후, 제1051소총병연대는 리샨을 점령했다. 그날 저녁에 이곳의 대부분의 일본군이 최후를 맞았고 소련군은 이 험지를 점령했다.

8월 10일 내내 칭쿠링먀오의 일본군 중대는 험한 지형을 이용해 소련군 제22소총병사단의 공세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소련군에 제1049소총병연대가 증원되었고 일본군은 남쪽으로 후퇴했다. 후퇴한 일본군은 겨우겨우 팜미엔퉁에 도착했고 흩어졌던 14명의 병사들이 합류했다.

그동안 증강된 제257전차여단은 팜미엔퉁으로 진격했다. 1600시에 팜미엔퉁 북쪽으로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전차여단은 일본군 제277연대 소속의 2개 중대와 맞닥뜨렸다. 대전차 무기가 없던 일본군은 소련 전차여단을 상대로 육탄공격을 시도했지만 전혀 큰 피해를 입힐 수가 없었다.

제257전차여단은 제78급강하폭격기연대의 지원을 받았다. 급강하 폭격기들이 일본군 포병들을 삽시간에 제거하자 소련 포병들은 마음 놓고 방열하며 일본군에게 포화를 날렸다. 8월 10일 2000시에 제300소총병사단과 제22소총병사단은 제257전차여단을 후속하며 쏟아져나왔다. 소련군은 3개 축선에서 일본군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서쪽으로 밀려나며 쯔싱툰 방어선으로 퇴각했다.

일본군에게 압박을 가하던 소련군 부대들은 2100시에 도시 북쪽 방어선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박살내고 물렝 강의 다리와 기차역을 점령하며 팜미엔퉁 북쪽을 확보했다. 8월 11일 이른 아침에, 도시 남쪽과 동쪽의 방어선 또한 붕괴되었다. 오후에 일본군 주둔병들은 완전히 붕괴되고 400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 일본군은 기껏해야 전차 2대를 주저앉히고 7대를 전투불능으로 만들었다.

8월 11일 아침에, 팜미엔팅을 점령하기 위한 마지막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벨로보로도프는 제257여단에 도시 점령을 끝내고 곧장 서쪽으로 진격해 후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제26소총병군단과 같은 성공이 다른 지역에서도 발생했다. 제257전차여단이 제26소총병군단의 선두에서 돌진할 때, 제59소총병군단의 선견대인 제75전차여단도 리수첸와 링커우를 돌파하고 점령했다. 제1적기군의 우익인 막시모프 중장의 임시편성 부대도 칸카 호수의 일본군 방어 병력을 박살내고 밀산 요새 지대를 남쪽에서 위협하기 시작했다.

다른 소련군 지역과 마찬가지로 제1적기군 병력도 험한 지형에서의 난점을 해결하며 돌파에 성공했고, 설마 그곳으로 쳐들어오기는 힘들 것이란 관동군의 예상을 철저히 짓밟았다.


3.5. 제35군의 진격[편집]


바실렙스키, 메레츠코프와 기타 소련군 참모들의 불유쾌한 문제는, 만주 동부가 산뿐만 아니라 늪과 소택지도 참 많았다는 것이었다. 라스푸티챠 뺨치는 이 뻘흙지대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일반 평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보급품 소비를 예상해야했다.

칸카 호수의 남쪽으로는 남북으로 200킬로미터에 달하는 소택지 지대에서 진격하는 부대는 제35군이었다. 제35군의 임무는 단순했다. 칸카 호수 서쪽으로 진격해서 밀산 요새지대를 무너트리고, 고립시키며 확보한 후 후터우 요새 지대를 박살낸 후 폴리로 진격하며 제1극동전선군의 우익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이 소택지 지대는 늪과 습지, 소택지로 가득 차 있었으며 서쪽으로는 송화강과 우수리 강이 있고 남서쪽으로는 완타 산이 있었다.

이 지역을 지키는 일본군은 후터우 요새지대와 밀산 요새지대가 있었는데 후터우 요새지대는 우수리 강과 물랭 강 북안을 지키고 있었으며 밀산 요새지대는 칸카 호수 북쪽을 지키고 있었다. 메레츠코프는 이 두 요새지대를 골치거리로 여겼으며 제35군이 10킬로미터도 돌파하기 힘들 거라고 판단했다.

일본 제5군은 이 지역을 히토미 요이치 소장의 제135사단에게 맡겼으며 사령부를 퉁안에 두었다. 그리고 이곳에 제15국경수비대를 증강했다. 제135사단이 너무 넓은 지역에 흩허져 있어서 충원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35사단 소속 제386연대는 후린에 사령부를 두고 무단장 북쪽의 치흐싱에 2개 대대를 배치해 방어시설을 꾸렸다. 그리고 2개 중대를 차출해 파오칭에 배치하고 우수리 강 북쪽의 자오호에도 병력을 배치했다. 제370연대는 링커우에 본부를 두고 치흐싱에 1개 대대를 두었다.

제135사단은 국경 지대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후터우의 남쪽 북쪽과 칸카 호수의 북서쪽에 제369연대 병력이 자오호에 배치되었고 자오호에는 386 연대 소속의 1개 소대 병력이 배치되었다. 칸카 호수 동쪽에는 368연대의 1개 중대가 소규모 요새지대를 이루었다. 135사단이 주 방어선으로 삼은 치흐싱은 제5군의 주 방어선이기도 했다.

제15국경수비대는 4개 중대와 2개 포병중대, 1개 공병소대로 이루어진 1,500여명의 벙력이었으며 후터우 요새지대에 주둔했다. 7킬로미터의 길이와 10킬로미터의 종심을 갖추고 9개의 요새로 이루어진 이 요새 지대는 만주 동부에서 관동군이 구축한 단일 요새 지대 중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135사단이 지키는 다른 요새지대는 후린과 밀산에 있었다. 작은 편인 후린 요새지대는 20~30개의 벙커, 토치카 등을 갖추고 있었으며 후터우와 밀산을 연결하는 50킬로미터의 도로를 지켰다. 마산 요새지대는 밀산 시와 칸카 호수 남단을 에워싸는 형국이었다.

제135사단의 방어 계획은 제5군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았다. 135사단은 치흐싱을 방어선으로 삼고 밀산을 교두보로 삼아 칭커우와 치흐싱을 연결하는 도로를 지켜야 했다. 1개 대대와 1개 포병대대, 그리고 기타 공병 제대들이 밀산 요새를 지켰다. 치흐싱 방어선에는 8개 대대가 포병과 공병의 지원을 받으며 적의 공격을 방어하고 지원을 기다릴 것이었다. 여기에 별로 믿음직하지 못한 만주국군 제1사단이 증강되었다.

소련 제35군은 후터우와 밀산 지대에서의 일본군 저항을 뚫어야 했다. 제1적기군이 제35군의 좌익에서 진격할 동안 메레츠코프는 제35군 사령관 N. D. 자흐바타예프 중장에게 임무를 맡겼다. 특히 메레츠코프는 후터우 요새 지대를 고립시키고 무력화시키는 것을 제1순위에 두라고 명령했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제35군은 3개 소총병사단과 2개 요새주둔군을 증강받았다. 특히 이 습지대를 통과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병이 지원되었다. 요새 지대를 뚫기 위해서 제1극동 전선군 사령부는 10개 포병대대와 3개 대전차포대대, 2개 방사포대대를 지원해 주었다. 여기에 또 추가로 1개 공병대대가 증원되었다.

자흐바타예프 중장은 메레츠코프에게 최종 계획안을 전달했다. 자흐바타예프는 제파 구분 없이 제35군을 통째로 진격시키며 일본군의 방비가 제일 약한 송화강 지역을 도하해 공격할 계획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S.D 페첸넨코 대령의 제363소총병사단과 F. K. 네스테로프 대령의 제66소총병사단이 제125전차여단과 제209전차여단과 함께 공세를 가하고 공세에 제215포병여단, 제54박격포여단, 제62대전차포 여단의 지원을 받을 것이었다. 송화강을 건너면 35군은 2개의 축선으로 진격하며 8에서 10킬로미터의 공세정면을 확보하고 3킬로미터 이상 진격할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제31 부교대대가 송화강에 다리를 놓고 기타 제대들도 보트를 지급받을 것이었다.

사단과 연대 포병들은 화력지원을 위해 3단계의 포격 전술을 사용할 것이었다. 송화강을 도하하기 전에 50분간의 준비 포격이 강 너머에 떨어진다. 도하 중에 포병들은 1시간 동안 포격한다. 도하 이후 6시간에서 9시간 후, 포병들은 보병들의 진격로 앞을 청소해 준다.

송화강을 도하한 2개 사단과 2개 전차여단은 송화강 서안의 일본군을 일소하고 타챠오-페이링치-파이시흐센 축선으로 진격하고는 궁극적으로 후린과 밀산을 잇는 교통로와 통신망을 잘라버릴 계획이었다. 제264소총병사단이 후터우로 진격해 밀산 요새지대를 박살낼 것이었다.

2개 소총병사단이 주공을 가하는 동안 V. L 비노그라도프 소장의 제264소총병사단은 우수리강을 도하해 서쪽에서 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이만을 고립시키고 후터우 요새지대로 진격해 후터우와 후린을 잇는 길을 점령하고는 주공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203밀리 곡사포로 무장한 제224포병여단이 지원할 것이었다. 기습을 위해서 모든 부대들은 야습을 할 것이었다. 공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제35군의 공병들은 야간에만 작업했으며 7월 말에는 56킬로미터의 참호 지대와 9개의 사령부 시설, 그리고 100개의 포대를 건설했다. 그리고 늪지대에 12km 길이의 진격로를 만들었다.

8월 8일 저녁, 자흐바타예프의 진격 명령이 떨어졌고 제35군은 송화강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군의 좌익인 제363소총병사단은 6킬로미터의 공세 정면에 G. N. 골루브 소령이 이끄는 제404소총병연대를 우익으로 배치했고 우익에는 N. A. 마티노프 중령의 제395소총병연대를 배치했다. 제363소총병연대의 진격로 남쪽과 북쪽에는 3개의 요새화된 마을이 있었는데 각각 중대 규모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제404소총병연대는 제1대대와 제3대대를 제1파로 배치해 말리 훈캉 요새화마을과 타치하오 요새화마을을 점령하고 송화강을 도하시켰다. 제2대대는 제1파를 후속하면서 진격로 측방을 보호했다. 제395소총병연대도 송화강을 도하하면서 좌측에 있는 말리 나간 마을과 타이양캉 마을을 그날 밤에 점령했다. M. L. 그루디닌 소령의 제488소총병연대는 제404소총병연대를 후속하며 404연대의 우측방을 보호했다.

제66소총병사단은 제363소총병사단의 우측익 6킬로미터 지점에 파블렌코 중령의 제341소총병연대와 츠아레프 소령의 제33소총병연대를 배치했다. 제66소총병사단은 송화강을 건너고 일본군 방어시설들을 무력화시키고는 타치아오로 제404연대와 제363연대와 함께 진격할 것이었다. 타치아오가 확보되면, 사단은 페일링치 북쪽으로 진격해 후린과 밀산을 잇는 도로를 점거할 것이었다. 제125전차여단가 제209전차여단은 보병사단들의 후속으로 강을 건널 것이었다.

8월 9일 자정이 지나자, 제35군 머리 위에 장맛비가 쏟아졌다. 8월 9일 0100시, 제57국경수비대 병력들이 송화강과 우수리강을 보트로 건너기 시작했다. 보트 엔진의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서 엔진에는 담요를 덮었다. 준비포격이 시작되자 강 서안의 모든 일본군 초소들이 쓸려버렸고 0200시에 마지막 초소가 무너졌다.

사단 소속 수색대대들이 국경수비대를 후속했다. 2개 수색 집단이 제363소총병사단의 제118독립수색중대 소속의 말리 훈강의 일본군 지역에 대한 수색을 시작했다. 0215시에, 포격이 끝나고, 4개 대대가 강 서안으로 뻗어 있는 다리를 점령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없었다. 공병들은 부교를 가설하기 시작했고 0700시와 0800시 사이에 제1파인 소총병연대가 완전히 송화강을 건너고 진격을 준비했다. 계속 내리는 비가 강 서안의 소택지를 지나가기 힘들게 만들었다. 이 지역을 지나기 위해 4개 공병대대와 3개 소총병대대가 애를 써야 했다.

이 작업이 끝난 후 제66소총병사단 소속의 제33소총병연대는 순조로운 진격을 시작했다. 적 저항을 일소하며 소택지를 지나가던 연대는 8월 9일 2000시에 타치아오 북서쪽 2킬로미터 지점에 도달했다. 여기에 잠깐 정지하는 동안 연대 소속 정찰병력들이 페링치로 향했다.

제66소총병사단이 일본군에게 방해받지 않을 동안, 제363소총병사단은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아침 내내 제363소총병사단은 첫 제파를 강 너머로 보냈다. 사단 병력들은 포와 박격포에서 습기를 제거하느라 애를 써야 했다. 그날 아침 해가 떠오르며 8월의 열기가 올라오자 363사단 병력들은 습지대를 빠져나오는데 더 힘을 써야 했다. 마침내 굳은 땅으로 올라오자 404연대 소속 제1소총병대대의 N. I. 보도라즈킨 대위는 동쪽의 말리 훈캉을 점령하란 명령을 받았다. I. G. 리알리킨 대위의 제2대대가 지원할 것이었다. 5개의 토치카가 있던 말리 훈캉에는 소련군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감시탑이 있었다.

1300시에 소련 포병들이 보도라츠킨의 대대의 진격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보도라츠킨은 직사 화력의 지원을 원했지만 그러기에는 포병들이 늪지대를 빠져나오느라 너무 뒤쳐져 있었다. 할 수 없이 소련 보병들은 포병들이 야포를 늪지에서 끌어 내는 걸 도와줘야 했다. 8월 9일 1500시, 제501포병연대의 76밀리 포 4문과 제187독립대전차포대대의 1개 포대가 방열하고 일본군 토치카로 직사를 날리기 시작했다. 제404연대는 1, 3대대에 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직사로 쐈는데도 일본군 토치카에는 별다른 손상을 입히지 못했다. 소련 포병들은 그럼에도 계속 포격을 날렸고 마침내 1800시에 제501포병연대는 일본군 관측탑을 날려버리는 데 성공했다.

1800시 이후, 1대대와 3대대가 돌입해 일본군 방어시설들을 정리했다. 1900시에 말리 한캉은 제404소총병연대 손에 떨어졌다. 그 동안에 제395소총병연대는 남쪽으로 가서 말리 난강을 접수하고 서쪽의 타이양캉으로 항했다.

어스름이 질 때, 제404소총병연대는 제468 독립돌격포대대와 제501포병연대를 대동하고 남쪽 2~3킬로미터 떨어진 타치아오로 진격했다. 제395연대는 제472박격포연대와 제187독립대전차포대대를 대동하고 타이양캉을 청소하고 북서쪽 3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한 마을로 진격했다. 제125전차여단의 10대의 전차가 말리 훈캉에 도달했고 그걸 시작으로 전차여단 전차들이 송화강 도하를 시작했다. 8월 9일 저녁에 제66소총병사단과 제363소총병사단은 늪지대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고 타치아오의 모든 일본군 저항을 무너트렸다.

더 북쪽의 제264소총병사단 지역에서는 제109국경수비대와 제8국경수비대가 후터우를 향해 0100시에 공세를 개시했다. 소련군은 15분간의 포격을 후터우에 쏟아부으며 조직적인 포격으로 후터우의 일본군 요새들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일본군은 포격을 맞자 이만으로 통하는 시베리아 철도를 부수었고 소련군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IL-4 폭격기 49대를 보내 후터우에 폭탄을 퍼부었다.

화력지원 속에서 제264소총병사단 소속의 제1056소총병연대와 제1060소총병연대는 우수리 강으로 선봉 대대들을 보냈다. 8월 9일 1100시, 제1060소총병연대의 선봉 대대들이 후터우 북쪽으로 가는 도하점을 마련하고 제1056소총병연대의 선봉 대대들은 후터우 남쪽으로 가는 진격로를 개척했다. 밤이 되자, 후터우 남쪽의 숲으로 소련군이 진격했다. 더 남쪽에서는 제1058소총병연대의 제5소총병중대, 제109국경수비대, 제8국경수비대 소속 1개 중대가 송화강을 건너 후터우 남서쪽의 철도역을 점령하고 후터우와 후린을 잇는 철도망을 장악했다.

8월 10일, 제35군 병력들은 진격을 계속했다. 제264소총병사단은 후터우에서 힘든 전투를 치러야 했다. 제1058소총병연대가 도시 남쪽에서 힘들게 진격하고 있을 동안 제1056소총병연대는 제109국경수비대를 대동하고 후터우 동쪽의 선착장에서 전투를 벌였다. 몇 번의 일본군 공격을 격퇴하고 제1058과 제1056소총병연대는 도시를 3방면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8월 10일 저녁, 선착장과 도시는 소련군의 손에 떨어졌다. 그 동안, 북쪽과 북서쪾의 후터우 요새 지대에서는 아직 저항이 계속되었다. 자흐바타예프는 제1056소총병연대와 제109국경수비대에 명령을 내려 다른 제대들이 서쪽으로 통과할 동안 강력한 포격지원 아래 요새지대를 무력화시고 일본군을 묶어 두라고 명령했다.

8월 10일, 제264소총병사단이 후터우에서 싸우고 있을 때, 제66소총병사단과 제363소총병사단은 타치아오와 페일링치를 통해 밀산에 공격을 시작했다. 제125전차여단의 제3전차대대가 선봉이 되어서 제473독립돌격포대대와 합류해 포화를 퍼부었다. 이 선견 부대의 목적은 후린과 밀산을 잇는 철도를 8월 11일 저녁까지 점령하는 것이었다. 제125전차여단의 다른 병력들은 제468독립소총병대대와 함께 제363소총병사단의 진격을 이끌 것이었다.

일본군이 몇 안되는 길로 빠르게 철수하고 소규모 저항을 벌이자 소련군의 진격 속도는 둔화되기 시작했다. 소련군 병사들은 늪지대에서 무거운 무기를 나르기 무척 힘들어했다. 자흐바타예프는 모든 소총병연대들은 어떻게는 늪지대에 도로와 다리를 개척하기 전에는 진격을 쉬라고 명령했다. 어찌어찌 진격로는 개척했지만 전차와 차량들이 연로 부족이 문제가 되었다. 8월 9일에 연료들이 손에 손을 거쳐 전차부대에 전달되었다. 그럼에도 연료 문제는 심각해서 제363소총병사단은 전차 없이 진격해야 했다. 8월 10일 저녁, 제66과 제363사단은 페이링치에 도착했다.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8월 9일의 소련 제35군의 공세는 일본군에게 기습으로 다가왔다. 제135사단의 사단장인 히토미 중장과 제15국경수비대 사령관 니시와키 다케시 대좌는 0300시에 제5군 사령부에 공격받고 있다며 보고를 보냈다. 히토미는 소련군의 공격에 대해 지연전을 펼 것을 명령하며 치흐싱과 마샨에서 소련군을 상대하기로 결정했다. 두 지휘관은 0600시에 기차역에서 만나 후퇴를 시작했다.

사단 사령부가 있는 퉁안에 도착한지 12시간 후에, 히토미는 전술적 상황을 검토하고 송화강과 우수리강이 소련군에게 넘어가기 직전이며 그곳에 주둔한 부대들의 통신이 두절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히토미는 남은 부대에게 치흐싱가 마산으로 퇴각하라 명령했다. 제15 국경수비대는 제5군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위치를 지켰다. 한밤중에, 히토미와 그의 참모들은 차를 타고 폴리로 향해 14시간 후에 도착했다. 여기서 히토미는 무단장까지 후퇴해야 되는 거 아니냐며 고민했다. 후퇴하는 병력들은 어쩔 수 없이 물자를 남기고 퇴각해야 했다. 제368연대는 후린에서 축출당해 한밤중에 완타 산을 넘어 린커우로 가야 했다. 퉁안과 페이테의 병력들은 폴리로 후퇴했다. 국경의 병력들은 이미 소련군에 의해 무력화 되었다. 실제로 오직 3개 제대 분량의 잔여 부대가 후린과 퉁안에 남아 어떻게는 소련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려 애를 쓰고 있었다.

8월 11일, 소련 제35군 병력은 일본군의 저항을 무너트리며 진격했다. 지형상의 어려움은 다행히도 극복했다. 8월 11일 1100시에 군 선견대가 페이링치를 점령했다. 그러나 연료 부족 해결을 위해 전차들이 기차역의 확보 전에는 국경으로 되돌아가 연료를 재보급받아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8월 12일 아침, 전차 4대와 돌격포 6대가 밀산에 도착했다. 후속부대들은 30킬로미터 뒤에 있었다. 13일 저녁, 제66소총병사단이 퉁안에 입성했고 다음 날에는 제363소총병사단과 합류해 밀산 요새 지대를 점령하고 일본군을 축출했다. 제1058소총병연대는 제109국경수비대와 후터우로 재진격했다.


3.6. 후터우 요새 공방전[편집]


후터우는 사방이 고립된 지대지만 일본군의 만주 동부 방어선에 전략적으로 무척 중요한 지역이었다. 후터우의 고지대에서는 소련의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단선 철도를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터우 요새는 밀산과의 단선 철도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고지 주변은 늪으로 뒤덮혀 있었고 동쪽에는 국경인 우수리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일본군은 후터우 고지대에 1933년부터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요새에 7,000 병력으로 이루어지며 대대 당 3개 중대로 구성된 4개 대대, 1개 포병연대 1개 공병중대로 구성된 제4국경수비대를 배치했다. 관동군은 후터우 요새를 난공불략이라 여기며 후터우 특별요새란 명칭을 붙여줬다. 후터우 요새 방벽은 현지 노동자들을 징집해 만든 철근 콘크리트 방벽으로 두께가 3미터에 웬만한 포격은 거뜬히 막아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후터우에 전방 300미터를 전부 뒤덮을 수 있는 촘촘한 교차 화망을 구축했다. 화망은 특별한 경우 1개 중대병력이 이 화망 전체를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자동화가 되어 있었다. 후터우 요새는 완성됐을 때 관측소들, 요새 포들과 기관총 화점들, 반격을 위한 출구들, 기상 관측소 등을 전부 갖추었다. 지하에는 통신시설, 숙소, 보급품 저장소, 발전기가 설치되었다. 후터우 요새는 8000미터의 정면과 6000미터의 종심을 갖추었다. 제4국경수비대는 요새 지대에 완전히 배치된 상태였다. 일본군은 후터우에 총 59문의 야포를 배치했으며 8문의 중박격포, 80문의 대공포, 10문의 대공 기관포를 설치했다. 그것들은 요새의 세 방향을 담당했다.

일본군은 항상 후터우 요새를 우선시했고 주요 신형 장비나 보급 우선순위를 후터우 요새의 제4국경수비대에 두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 계속되자 후터우 요새의 대부분의 대공 장비는 신형 편제된 제122사단에게 넘어갔다. 관동군은 1945년 7월에 제4국경수비대를 제15국경수비대로 개편하고 600명의 병력을 충원해 주었다.

후터우 요새 공략은 제35군에게 맡겨졌다. 제35군의 임무는 후터우 요새로부터 튀어나오는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 철도를 차단하는 걸 막는 것이었고 후터우 요새를 점령하면서 제1극동 전선군의 남쪽 공세에서의 좌측방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소련군은 후터우를 공략하기 힘든 요새라고 여기고 있는 한편 만주 중부로 치고들어갈 수 있는 열쇠로 생각했다. 소련군은 후터우를 처음부터 공략하지 않고 우회할 계획을 세웠다.

자흐바타에프는 파블로-페도로브카 서쪽의 늪지대에서 일본군의 저항이 약할 만할 곳을 찾았다. 제35군의 주력은 후린을 공격해 후린과 밀산을 잇는 철도를 차단하고 제264소총병사단과 제109국경수비대에게 후터우 요새 공략을 맡겼다. 두 부대는 후터우 남쪽에서부터 요새로 쳐들어가 밀산의 일본군을 축출한 제1적기군 병력의 지원을 받을 것이었다.

후터우 시에서 남동쪽으로 7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소련의 이만 시에는 제57국경 수비대가 있었으며 2,300명의 인원과 6척의 고속정이 있었다. 대부분 독소전쟁 기간 동안 이만에 머물러서 참전 경험은 없었지만 후터우와 그 주변 지대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제57국경수비대 뿐만 아니라 제109요새주둔군이 공세를 위해 이만에 도착했다.

공세가 시작되기 전, 일본 제15국경수비대는 일상적인 정찰 활동을 하고 있었다. 15국경수비대장 니시와키 다케시 대좌는 예흐호의 제5군 사령부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던 차라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15국경수비대의 정찰대는 소련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했지만 제5군 사령부는 대수롭지 않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관동군 사령부는 소련군이 9월쯤은 돼서야 군사행동을 취할 수 있다고 잘못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8월 5일과 6일 사이에 소련군이 우수리강에 부교 가설 작업을 하는 것을 관측해도, 그것은 소련군의 하계 훈련으로 판단할 정도였다. 게다가 8월 9일 밤부터 소련군의 준비 포격이 쏟아질 때도 관동군 사령부는 이것을 소련군 훈련의 일환으로 여겼다. 천둥 번개 속에서 소련군의 대대적인 포격이 우수리강 너머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대적인 포격은 후터우 주변의 도로, 철로, 유선 통신망을 박살내 버렸다. 우수리강의 일본군 초소들은 소련군이 0100시에 우수리강 도하를 시도하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 짧은 준비 포격 이후 제57국경수비대 소속 병력이 중대, 소대별로 우수리강을 건너왔다. 같은 국경수비대 소속 다른 중대들이 우수리강 북안에서 도하를 시도해 강 너머의 일본군 80여명을 0200시까지 전멸시켰다. 포격 지원 아래서 제1058연대도 우수리강을 도하해 후터우 시 남쪽으로 가서 일본군 초소들을 박살내고 밀산으로 가는 철도를 장악했다.

0500시에 포격이 끝나자 겨우 정신을 차린 후터우 요새 간부들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요새 밖에 있던 모든 병력들을 요새 안으로 불러모았다. 1시간 후 소련군의 포격이 재개되었다. 이 1시간 동안의 공백은 소련군의 포격이 그저 무력도발에 불과하지 침공의 의도는 아니라는 것이라고 일본군을 착각하기 위한 책략이었다. 일본군은 혼비백산하며 요새에서 한 발짝도 나가진 못했지만 소련군의 포격 정밀도가 좋지 않아서 별다른 피해는 주지 못했다.

0800시에 제1056소총병연대의 거의 2개 대대 병력이 후터우 시 남쪽에 도달해 도시 남과 북을 잇는 다리를 공격했다. 1100시에 소련군은 일본군의 박격포 공격을 받으면서도 다리 확보에 성공했다. 아직까지는 소련군이 후터우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피하고 있었다.

이 시간 동안 일본군의 포격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소련군 또한 포격을 중지하고 있었다. 후터우 요새에는 일본군이 자랑하는 400밀리 구경이 넘는 거대한 요새포가 있었지만 숙련 운용 인력이 부족해 소련군을 향해 제대로 된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게다가 요새의 포병 지휘관인 오키 마사오 대위는 사령관 부재 상황이라 요새 사령관 역할까지 다 해야 하는 지라 포병 관리할 여유도 없었다. 게다가 동원할 수 있는 거대 열차포들은 밀산 요새지대로 잠깐 옮긴 상황이었다.

오키 대위는 이게 소련군의 공세라는 걸 알았지만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다. 사령관 니시와키 대좌가 자기 없을 때 소련군이 쳐들어 왔을 때의 가이드라인을 세워놓지 않고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소련군의 포격이 유선 통신선을 끊어놓는 바람에 예흐호에 있는 사령관과 연락할 수도 없었다.

1100시에 드디어 예흐호에서 상황을 보고받은 제15국경수비대 사령관은 현지 상황을 모르는 상황에서도 부하들에게 요새에서 튀어나와 우수리 강 서안으로 도하한 소련군에게 포격을 가하고 역습을 시작하라 명령했다. 포격 목표도 세세하게 결정해 줬는데 400밀리 요새포는 우수리강 철교를, 150밀리 야포들은 소련군 포병을 향해 쏘라는 것이었다.

원시적인 컴퓨터를 사용해 계산한 일본군의 포격은 정확하여 우수리강 철교는 삽시간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예상보다 강력한 일본군의 포격을 받자 열 받은 소련군은 일본군 포대들의 좌표를 갱신하고 대포병 사격을 시작했다. 한편 하늘에서는 IL-14 폭격기 50대가 달려들어 2시간 동안 요새 지대에 폭탄을 떨어트렸다. 소련 포병들은 콘크리트 속에서 포신을 삐죽 내민 일본군의 400밀리 요새포를 제1목표로 삼았다. 그럼에도 요새 속에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소련군을 괴롭히던 400밀리 포는 74번이나 위용을 과시하다 8월 12일에야 직사를 얻어맞고 무력화되었다.

포병과 공군 지원 하에 소련군은 계속 우수리강을 건넜다. 제1056소총병연대가 후터우 남쪽과 동쪽을 돌파하여 후터우 남쪽의 일본군 초소 2개를 박살냈다. 제109요새주둔군 소속의 2개 중대와 제1058소총병연대의 1개 중대, 제8야전요새주둔군의 1개 중대가 강을 건너 왔다. 제1056소총병연대는 후터우 시 북쪽과 일본군의 관측소가 있는 린코다이로 진격했다. 제1058소총병연대와 제109요새주둔군은 다른 부대들이 후터우 시 서쪽으로 진입할 동안 도시 남서쪽의 유해하 철도역으로 진격했다. 그리고 제1058, 1056소총병연대는 후터우 남쪽으로 가서 후터우와 밀산을 잇는 철도를 제거했다. 2개 연대가 도시를 확보하자 제1060소총병연대가 후린을 향한 진격을 준비했다. 이 연대들의 상위 제대인 제264소총병사단은 사단 우익 지대를 온전히 확보함으로서 후터우 요새를 종합적으로 고립시킬 것을 하달했다.

후터우에 모두 집결한 제264소총병사단은 포격, 전차, 항공기의 지원을 받으며 도심으로 진격, 요새를 고립시키려 했다. 일본군은 초소와 토치카에서 뛰쳐나와 요새로 퇴각했다. 일본 제2포병중대는 강 너머에서 쏟아지는 소련군의 포화 속에서 운 좋게도 포와 보급품을 죄다 챙겨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부대들은 이와 같은 운이 별로 따라주지 못한 편이었다.

8월 10일에 날은 갰지만 포연과 타는 연기가 후터우를 뒤덮고 있었다. 0630시에 소련군과 일본군은 다시 포화를 주고받았다. 이 포격전은 소련군 경폭격기들이 날아와 일본군 포대에 폭탄을 던짐으로서 끝났다. 대부분의 일본군 대공포가 밀산으로 옮겨진 덕택에 소련군 폭격기들은 마음 높고 폭격을 해 댈 수 있었다.

소련군은 후터우 시 남쪽과 북쪽에서 요새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제1056소총병연대와 제109요새주둔군 소속의 기관총 대대는 후터우 동쪽 마을을 확보하느라 힘든 싸움을 해야 했다. 제1058소총병연대는 남부 거주지를 공격하며 일본군을 몰아냈다. 소련군은 일본군 제1중대를 상대로 백병전을 벌이면서 잠깐 남쪽으로 물러났다. 밤이 되어도 후터우 시가전은 계속되었다. 소련군은 들인 노력에 비해서 적은 성공밖에 얻지 못했다. 백병전 끝에 포로로 잡혔다가 후터우가 함락되면서 풀려난 소련군 중위는 일본군이 지난 3일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서 소련군은 돌격 집단을 편성했다. 요새로 돌입할 돌격 집단은 1개 전투공병 대대와 기타 소총병중대들로 편성되었다. 요새를 밖에서 공략할 돌격 집단은 1개 소총병 소대와 1개 전투공병 분대, 1개 대전차 분대, 화염방사기병 2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날 저녁, 소련군이 후터우 시를 완전히 점령한 다음 다시 한번 대대적인 포격이 후터우 요새지대에 쏟아졌다. 화망 아래서 제1056, 1058소총병연대와 제109요새주둔군은 선봉 대대들을 요새로 진격시켰다. 밤의 어둠이 소련군의 공격을 가려주어서 소련군은 기습에 성공했고 주 요새 주변의 자잘한 토치카와 벙커들은 대부분 소련군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주 요새에 대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요새 공략이 실패하자 소련군은 더 신중해질 필요를 느꼈다. 제35군 사령부는 제1056소총병연대와 제109요새주둔군에 더 조직적으로 요새를 공략하라고 주문했다. 제1058소총병연대는 밀산과 후훈으로 향하던 제1060소총병연대와 합류했다. 소련 포병과 폭격기들이 다시 후터우 요새에 포격을 가했고 소련군 선두 대대들은 전차와 돌격포의 지원을 받으며 다시 일본군 방어선으로 쳐들어갔다. 돌격 집단들은 도시 중앙에 포위되어 있던 잔존 일본군을 섬멸하고 요새지대 북서쪽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대낮에 소련군 2개 소총병중대가 도시 남쪽과 북쪽의 경게선인 119고지를 공격해 소대 규모의 일본군을 상대했다. 같은 시간에 8명의 일본군이 지키고 있던 남쪽의 90고지도 포위당했다. 소련군은 90고지의 일본군을 위협적이지 않다 판단하고 포위만 해둔 채 그대로 두었다. 그날 오후 일본군 제2포병 중대는 300밀리 거포를 가지고 나와 103고지에서 소련군을 향해 포화를 날렸다. 그러자 소련군 3개 소총병중대가 103고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결국 후퇴하며 아까운 거포를 파괴해야 했다. 그런데 소련군이 119고지를 점령하면서 제2 포병 중대는 포위된 형국이 되어버렸다. 제2포병 중대는 8월 26일까지 포위되어 있어야 했다.

소련군은 8월 12일까지 대대적인 포화를 고지들에 퍼부었다. 90고지와 119고지는 소련군의 포격에 노출되었고 일본군은 제대로 대포병사격을 가하지 못했다. 포격이 끝나갈 무렵에 소련군은 요새에 대한 재공격 준비를 끝냈다.

8월 13일 다시 요새로 포격이 쏟아지면서 소련 보병들이 전차 지원 하에 후터우 요새로 진격했다. 소련군은 린코다이 관측소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돌격 집단이 선두에 서서 요새 서쪽의 토치카와 벙커로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동쪽에서는 소련군이 일본군 제3중대를 축출했다. 한편 소련 전투공병들은 지하에 설치된 요새를 공략하는 새로운 기술을 사용했다. 전투공병들은 일본군의 벙커와 지하 통로마다 가솔린을 쏟아붓고 불을 붙였다.

전투가 일어나는 동안 소련 전차 한 대가 일본군 포대에 난입하여 일본 제2포병중대의 150밀리 포들을 직사로 날려버렸다. 돌격 부대들도 포대에 난입해 일본군 포들을 박살냈다. 그날 하루만 일본군은 30문의 150밀리 포를 잃었다. 제109요새주둔군도 공세에 합류했다.

린코다이에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던 일본군 소대는 4일 동안이나 격전을 치렀다. 50명의 일본군은 8월 13일까지 린코다이 고지에서 버티다가 최후의 돌격을 시작했다. 이 역습은 소련군을 놀라게 했지만 결국 소련군은 머리수에서 일본군을 압도했다. 치열한 백병전 끝에 일본군 50명은 전원 전사하고 소련군은 린코다이 고지에 붉은 깃발을 꽂았다. 린코다이가 소련군 손에 완전히 들어옴으로서 소련군은 후터우 내부를 세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날 밤에 숨어 있던 일본 장교 하나가 군도를 뽑아들고 소련군에게 달려들었지만 유탄에 맞고 사망했다.

8월 14일 소련군 소총병대대 하나가 103고지를 조직적으로 포위했다. 고지의 일본군은 야음을 틈타 겨우 탈출할 수 밖에 없었다. 소련군이 요새 주변의 고지와 관측소를 전부 손에 넣음에 따라 요새에 남아 있던 포들은 사격 재원을 전달받지 못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대부분의 포병들이 '돌격' 부대(대전차자폭조)로 임무가 변경되었다.

한편 유무선 통신이 죄다 차단된지라 후터우 요새의 일본군은 천황의 종전 선언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하늘이 맑아지자 소련군은 고립된 일본 제2 포병 중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 포병들은 직사를 쏘며 소련군을 막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 소련군의 전차 50대가 103 고지 북쪽 사면에서 접근해 와 1시간 동안 포화를 퍼부었다.

8월 16일, 103고지에 대한 공격이 재개되었다. 더 서쪽의 145 고지에 소련 전차들이 나타나 일본 제2중대를 공격했다. 중대장인 소위는 37밀리 대전차포로 소련군 T-34 전차를 파괴하려 했지만 T-34는 37밀리에 맞고도 아무 손상이 없었다. 제2중대는 그렇게 희망 없는 싸움을 벌이다 죽어갔다. 16일이 끝나갈 무렵 소련군은 103고지도 점령했다. 나머지 제일 높은 고지의 일본군은 계속 고립되어 있다가 8월 26일에 전원 자살했다.

한편 소련 전투공병들은 요새 주변의 일본군 지하통로들을 찾아다녔다. 소련군은 통로로 통하는 틈이나 환풍구, 입구 등을 발견하면 공병들은 주저 없이 가솔린을 들이붓고는 불을 붙였다. 불의 열기 뿐만 아니라 가솔린이 타면서 발생하는 일산화탄소가 일본군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후터우의 일본군은 그렇게 고통을 겪으면서도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8월 17일, 소련군은 사절단을 보내 일본이 이틀 전에 항복했다며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하라는 권유를 했다. 일본군은 당연히 요구를 거부했고 사절단은 돌아와 일본군 중위 하나가 칼을 빼들고는 항복하자는 부하를 참수했다는 걸 보고했다.

소련군은 그 대가로 폭격과 포격으로 다시 요새를 두들겼다. 소련 돌격 집단은 114고지를 공격하며 일본군 제3중대와 사투를 벌였다. 그날 밤, 소련군은 114고지 정상을 점령하고 포를 끌고 와 일본군에게 고지 위에서 직사를 퍼부었다. 일본군이 대포병사격을 가하여 소련군 포 2문을 주저앉혔지만 더 엄청난 포화가 그 답변으로 날아왔다. 대대적인 화력 속에서 소련 돌격 집단은 114고지의 남은 일본군을 섬멸했다. 고지가 소련군 손에 넘어오자 114고지 전체에 소련군 야포들이 배치되었다.

같은 날, 일본 제4중대는 후터우 북쪽 마을에서 소련군의 공격을 받았다. 소대 규모로 줄어든 4중대는 사투 끝에 소련군의 공격을 격퇴시켰지만 150명 밖에 남지 않았다. 중대장은 필사의 돌격을 감행하여 요새로 퇴각하려 했지만 대부분 죽거나 사로잡혔다. 중대장은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죽었다.

17일 2200시, 소련군은 일본 제2포병중대를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2포병중대가 그나마 보전하고 있던 150밀리 포들은 하나 하나 파괴당했다. 18일 새벽, 소련군은 제1056소총병연대 소속으로 추측되는 1개 대대와 제109요새주둔군 전체 병력이 전차, 자주포, 제97독립포병대대의 지원을 받으며 치고 올라갔다. 혈투 끝에 소련군은 결국 제2포병중대를 섬멸시키고 고지 위에 203밀리 곡사포를 끌고 와 후터우 요새에 직사를 가했다.

다음날, 소련군은 요새를 계속 공격했지만 다른 야전군들이 작전 목표 달성에 성공함에 따라 후터우 요새는 더 이상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후터우가 소련군의 관심에서 멀어짐에 따라 소련군은 그렇게까지 애써 싸울 필요는 없어졌다. 그래도 포격과 폭격이 쉴새 없이 요새를 뒤흔들고 일본군 저항거점을 일소했고 중돌격포들이 투입되어 저지대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을 일소했다. 소련 소대들은 일본군과 백병전을 벌이며 제2포병 중대와 요새와의 통신을 모두 차단했다.

지상 위의 요새 구조물들에서 벌어진 전투는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일본군은 격전 끝에 요새 지하로 내몰렸다. 지하가 아닌 다른 곳으로 탈출하려던 일본군은 죄다 사살당했다.

그러나 몇몇 항복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살아남은 600명의 일본군은 끝까지 요새 지하에서 저항했다. 8월 20일까지 소련군의 최후통첩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항복하지 않자 소련군은 마침내 8월 22일에 요새 지하로 독가스를 흘려보냈다. 몇 회의 포격과 폭격이 그친 후에, 소련 제109요새주둔군은 후터우 요새를 점령했다.

그리하여 만주의 철옹성 후터우는 소련 제35군의 손에 넘어왔다.


3.7. 제1적기군의 진격(8.11~8.15)[편집]


무단장은 만주 동부의 교통 중심지로 만주 동부 철도들의 교차점이었고 만주국의 핵심인 중부 만주로 들어가는 철도가 여럿 있었다. 또한 일본군 제1방면군 사령부이자 이웃인 예흐호에는 일본군 제5군 사령부가 있었다. 무단장은 무단강 서안에 위치했고 서쪽으로는 수이펜호, 물렝, 남서쪽으로는 팜미엔퉁, 남쪽으로는 링커우와 통했다. 일본군이 이 지역으로 후퇴하기 위해서는 무단장을 거쳐야 했다. 무단장 동쪽에는 700에서 1000미터의 고지대인 요령 산맥이 있었다. 요령 산맥은 무단장 동쪽을 남북으로 가로질러서 천혜의 장애물이 되어 주었다.

일본군은 무단장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원래 계획은 요령 산맥과 물렝 강을 중심으로 무단장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첫번째 방어선을 요령 산맥에, 두번째 방어선을 물렝 강에 세웠는데 세번째 방어선을 새로 랴오예흐링 산맥에 세웠다. 무단장으로 후퇴한 제124, 126, 135사단 병력들이 방어선에 투입되었다. 일본군은 소련군이 무단장만은 함락시키지 못하며 결국 중부 만주로의 진격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틀렸다.

국경에서 벌어진 소련군의 기동전으로 대부분의 일본군 병력이 혼란에 빠져버렸고 일본군 제5군이 설정한 방어선은 서류상에서만 막강했지 실제로는 엉망인 상황이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무단장으로 어떻게든 후퇴하려는 일본군을 끈질기게 추적하며 그 숫자를 착실히 줄여나가는 중이었다.

8월 11일 이후, 일본군 제5군의 방어 지역에서 소련군은 모든 일본군을 압도했고 국경에서 80킬로미터 이상 진격해 들어가 팜미엔퉁, 리슈첸, 그리고 물렝을 손에 넣었으며 남쪽과 동쪽에서 밀산을 압박하고 있었다. 국경 지대에서 일본군은 완전히 쓸려버렸다. 일본군 제135사단장 히토미 소장은 자오호, 후터우, 밀산에서 퇴각한 패잔병들을 끌어모아 치흐싱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는 링커우, 쿵안, 후린의 패잔병들에게 빨리 치흐싱으로 오라고 재촉했다.

일본군 제370연대와 만주국군 1개 대대가 마산에서 나와 최대한 빨리 가려고 노력하며 링커우에 도착했다. 그와 동시에 제369연대가 퉁안에 남아 일본군의 후퇴를 뒤에서 보호했다. 8월 10일 저녁에 제5군 사령부는 제135사단에 명령을 내려 예흐호로 병력을 배치하는 대신 제126사단과 합류하여 무단장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다음날 368연대의 1개 대대와 370연대의 1개 대대가 예호에 도착해서 무단장 북쪽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병력이 너무 적어 제5군 사령부는 그냥 치흐싱을 수비할 것을 포기했다.

마찬가지로 제5군은 제126사단에 팜미엔팅에서 퇴각해 예흐호로 향하라고 명령했지만 츠후싱툰 지역으로 이미 제126사단이 후퇴한 뒤였다. 제126사단장은 야마기시 중위에게 츠후싱툰과 792고지를 279연대의 1대대와 277 연대의 제3대대, 제31대전차대대의 1개 중대, 그리고 1개 '돌격'중대(대전차자폭조)를 가지고 지키라는 명령을 했다. 야마기시는 제1 대대와 대전차중대, 돌격 대대를 츠흐싱툰 서쪽에 배치해 사단의 철수를 뒤에서 보호했고 제3대대는 792고지에 배치해 제124사단의 좌익을 보호하게 했다.

제126사단장 노지모 소장은 예흐호에 도착해 11일에 제5군으로부터 명령을 하달받았다. 11일 아침, 제124사단은 물렝 서쪽에 구축된 주방어선에 도착했다. 그곳까지 살아남은 패잔병들도 소련군 정찰 부대들의 후방 급습에 시달려야 했다. 겨우 재배치를 끝낸 제124사단은 소련군의 공세를 기다렸다. 일본군은 예흐호 북쪽 무단 강에도 진지를 구축했다. 마산과 츠흐신퉁에도 제124사단 병력들이 도착했다. 일본군은 고생고생 하며 방어선 구축을 마쳤다.

8월 11일 아침에 제1적기군 사령관 벨로보로도프 상장은 물렝강 라인을 확보하고 링커우 북서쪽과 무단장 남서쪽으로의 진군을 명했다. 일본군에게 재배치와 재정비를 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 군 선견대 전차여단들은 빠르게 기동했다. 쿠로페츠코이 중령의 제75전차여단은 제59소총병군단의 선봉에 서서 제257전차여단이 제26소총병군단의 선봉에 설동안 진격했다. 8월 11일 오후에 전차여단은 물렝 강을 도하해 일본군 배후로 기동했다.

제75전차여단은 제254소총병연대 소속의 1개 기관총 중대를 증강받고 리수첸에서 마산을 거쳐 링커우로 향했다. 제39소총병사단이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벨로보로도프는 전차여단에 링커우의 철도망을 점령해 일본 제135사단 병력들이 밀산 요새지대에 집결하지 못하도록 만들게 하라고 명령했다. 12일 0600시, 제75전차여단이 마산에 접근하다가 흐시아 물렝 강 뒤에서 집결중이던 일본군 제370연대 소속 1개 대대와 만주국군 1개 대대와 맞닥뜨렸다.

장맛비로 강이 범람하는데도 불구하고 강의 2개의 다리는 멀쩡했다. 75전차여단 전차들 몇대가 강을 건너려 다리 위에 올랐는데 일본군이 다리에 설치한 함정으로 인해 두 다리 모두 무너지고 전차 몇대도 손실되었다. 열받은 전차들이 강 너머로 포격을 할 동안 여단 소속 공병들이 재빨리 도하점을 마련했다. 그 사이에 제39소총병사단 사단장인 V. A. 세모노프 소장이 마산에 도착해 공세를 준비했다.

일본군은 강 북안으로 이동해 소련군의 측면 공격을 방지하려 했다. 마산 역 북동쪽 구릉지에 참호를 판 일본군은 본대의 좌측을 보호하려 했다. 12일 1100시, 포격 지원 아래 소련 제75전차여단이 마산 동쪽의 언덕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1800시에 제50소총병연대 예하 제1대대가 75전차여단과 합류해 고지의 일본군을 일소하고 포위하며 마산역에서 일본군을 축출했다.

마산에서의 전투는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일본군이 소련군에게 역습을 가했지만 조금 떨어진 투타오로 소련군이 잠깐 물러나게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제254소총병사단은 흐샤 물렝강에서 일본군이 파괴한 다리를 복구하고 강을 건너며 일본군을 몰아냈다. 링커우로 가는 도로를 지키던 일본군이 전멸하자, 제75전차여단은 링커우에 입성하고 몇시간 후에 뒤에서 따라오던 제39소총병사단과 합류했다. 일본군은 링커우의 주요 시설들을 불태우고 자살 특공대를 남겨 두어 소련군에게 손실을 입히려 했다. 대부분의 일본군이 링커우에서 쫓겨나 무단장이나 북쪽 산악 지대로 도망쳤다. 그 이후 제59소총병군단 전원이 링커우에 집결해 무단장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제59소총병군단이 링커우를 확보할 동안 제26소총병군단의 제257전차여단은 팜미엔팅에서 서쪽으로 출발해 흐시엔퉁 역으로 향했다. 전차여단의 임무는 적의 방어를 돌파하고 무단장 근처까지 12일 저녁까지 가는 것이었다. 츠흐싱툰에서 257전차여단은 야마기시 중위의 지대와 마주쳤다. 야마기시의 부대는 고지를 선점하고 있었지만 소련군 전차에 손상을 입힐 방법이 없어서 결국 서쪽으로 패퇴할 수 밖에 없었다.

257여단의 T-34 전차 65대는 고지를 넘어 흐시엔퉁으로 향했다. 그 동안 야마기시 중위는 그의 패잔병들을 끌어모으고 다른 고지로 올라가 소련군을 기다렸다. 12일 100시, 제300소총병사단의 선견 부대들이 포격지원 아래 일본군의 방어지역에 도착했다. 정오에, 강력한 포격이 북쪽에서부터 야마기시의 부대를 두들겼다. 잠시 후에 소련군은 북쪽에 자리잡고 야마기시를 압박하기 시작했지만 야마기시는 그 자리에 박혀 함부로 대응하려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소련군은 포격 위치를 바꾸어 야마기시의 부대를 서쪽 고지로 후퇴하게 몰아붙였다.

한밤중에 소련군 보병들이 왼쪽 측면으로 돌아서 일본군을 포위하고 북쪽으로 뻗은 길을 확보했다. 야마기시는 역습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포위된 야마기시 지대는 남쪽의 숲으로 도주하다가 아침을 맞았다. 야마기시 지대는 400명에서 650명을 손실했고 4문의 대전차포와 2문의 야포, 3정의 기관총을 상실했다. 다음날, 야마기시 중위는 남서쪽 산을 넘어 무단장으로 가려 했다. 이틀 후, 만신창이가 된 야마기시 지대는 예흐호 북서쪽에 도착했지만 보이는 것은 소련군 뿐이었다. 이곳을 지나는 소련군은 둥칭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무렵 츠흐싱툰의 일본군을 두들긴 제300소총병사단은 흐시엔퉁으로 향했다. 8월 12일 동안 제300소총병사단은 야마기시 지대를 도울려고 츠흐싱툰에서 달려온 일본군 부대들과 전투를 벌이고 제257전차여단은 무단장으로 가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12일 0900시, 여단은 흐시엔퉁에 도달했고 1시간 동안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1900시에 흐시엔퉁 역을 점령하고 일본군의 보급창고를 점령했다. 추가로 전차여단은 흐시엔퉁의 일본군 유류창고 4개를 접수하고 남쪽 링커우로 후퇴하려는 일본군으로 가득 찬 열차 하나를 날려버렸다.

츠흐싱툰 전투에서 소련군은 많은 연료를 소비해서 더 이상의 진격이 무리하다는 말이 나왔지만 여단장 아니쉬치크 중령은 남쪽으로 진격을 속개해 무단 강을 건너 후아린으로 향하는 중요한 철도를 점령하게 했다. 13일 0500시, 전차여단은 후아린에 도달해 후아린 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후아린에서 나오는 무단 강을 건널 다리를 지키기 위해 후아린 역으로 향했다. 타키카와 소좌는 제370연대의 1개 대대와 연대 소속 야포 몇문을 이끌고 역으로 진격했다. 257전차여단은 자주포 지원 하에 이 대대와 맞섰다. 전차들이 먼저 역을 점령해 버리자 타키카와는 대대를 다리 건너로 후퇴시킨 다음 다리를 포격할 것을 명령했다. 다리가 무너져버리자 257여단은 얕은 도하점을 찾아 강 저편의 일본군 야포에 대응사격을 하며 도하를 시작했지만 도하점 너머의 지뢰지대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그때 일본군 대전차 자폭조가 포격지원 아래 달려들어서 전차들을 당황하게 만들며 진격을 저지시켰다. 대전차 자폭조는 자폭에 실패하고 모두 사살되었지만 전차여단은 2시간 동안 진격이 정체돼야 했다. 2시간 후 공세를 재개한 257전차여단은 다시 달려드는 대전차자폭조를 모두 처리하고 공병들이 지뢰를 제거하자 강을 완전히 건넜다.

한편 일본군은 T-34를 파괴할 방법이 없어서 절망해야 했는데 제5군 사령부에서 나온 보고서 하나가 이걸 증명해 준다.

"우리 포병들이 적 전차 근처에 지근탄을 날렸다. 그러나 적 전차들이 멈추기는 했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않아 보였으며 장갑도 뚫리지 않았다. 적 정비병들은 여유롭게 우리 앞에서 멈춘 전차를 손보고 있었다. 놈들 얼굴은 우리의 무력함을 비웃는 것처럼 오만하고 건방졌다."


1800시에 아니쉬치크 중령은 전차들을 다시 후아린에 돌입시켜 후아린 역에 방어선을 구축하게 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257여단은 역에서 후퇴해 북쪽으로 후퇴한 다음 무단 강 유역에 정차했다. 일본군의 거센 반격으로 여단은 7대의 전차를 손실했다.

257전차여단이 정지했음에도 일본군은 또다른 소련군의 전술적 접근을 상대해야 했다. 13일 아침에 제135사단장 히토미 소장은 무단장에서 링커우로 제370연대의 1개 대대와 1개 포병대대를 불러왔다. 소련군이 이곳에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자 히토미는 이 소련군을 막아내기로 결정했다. 2010시에 후아린에서 온 열차가 제1방면군에서 온 증원부대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때 제257전차여단 소속 전차들이 이 열차를 발견하고 냉큼 쏴버렸다는 것이다. 히토미 소장과 제135사단 병사들은 절망에 빠졌다.

히토미는 겨우겨우 패잔병들을 추스려 무단장으로 후퇴할 것을 결정했다. 하지만 후퇴 중에도 제135사단 병력들을 태우고 철수하는 열차에도 포격과 항공 공격이 날아왔고 그 결과 6개의 기관차가 날아가고 거기에 탑승한 900명의 병력들이 죽었으며 24개의 야포 30개의 트럭, 30량의 탄약수송차량과 차량 안에 실린 800정의 소총, 100정의 기관총을 손실했다.

자정 이후, 아니쉬치크 중령과 그의 제257전차여단은 휴식을 취한 후 공세를 재개했다. 여단으로 다음 날 아침에 증원군이 도착했다. 제300소총병사단과 제22소총병사단이 팜미엔퉁에서 출발해 2개 돌격포대대를 이끌과 와 제257전차여단과 합류했다. 북쪽에서는 제59소총병군단이 제75전차여단에게 남쪽으로 진격해 링커우와 후아린을 잇는 철도망을 점령하게 했다. 전차여단이 철도망을 지키는 병력들을 일소할 동안 오직 방해물은 비에 젖은 땅이었다.

아침에, 제1적기군은 후아린으로의 성공적인 진격을 마치고 무단장 북쪽에서 무단장을 향한 공세를 준비했다.


3.8. 제5군의 진격(8.11~8.15)[편집]


8월 12일에서 14일 사이, 제1적기군은 팜미엔퉁과 리수첸에서 출발해 링커우와 츠흐싱툰을 거쳐 후아린에 도달했다. 제5군은 일본군 제124사단을 무단장 동쪽에서 공격했다. 제124사단장 시이나는 물렝 서안에서 남북으로 25킬로미터의 방어 정면을 가지고 소련군을 대적했다. 일본군 제273연대는 1개 대대를 잃었고 제272연대는 1개 중대를 잃으면서도 물렝에서 무단장으로 향하는 길을 방어해 냈다. 제271연대는 1개 대대를 잃으면서 길 남쪽의 8킬로미터의 정면을 방어해 냈다. 124사단 포병들은 1개 대대를 소련군의 포격으로 잃으면서도 제5군 사령부에서 제1독립포병연대와 제20포병연대가 도달할 때까지 버텨 냈다.

비교적 성공적인 방어를 치뤄내고 있는 이 지역을 강화하기 위해 제5군 사령부는 제1공병연대장인 사사키 대좌에게 임시로 편성된 지대를 이끌고 제124사단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사사키 대좌의 지대는 제368연대의 1개 대대, 제370연대의 1개 대대로 구성되어 타이마커우로 가는 동쪽 길을 방어하게 되었다. 8월 11일 저녁, 시이나 소장은 소주 산으로 사단 사령부를 옮기며 소련 제5군의 공세에 역습을 가할것을 꾀했다. 그 무렵 새로운 보고가 도착했다. 그날 저녁에 기계화된 2개 사단 병력쯤 되는 소련군이 수이펜호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의 보고대로 8월 11일에서 12일 사이 제97소총병사단과 제144소총병사단의 선견 부대가 전차여단을 앞세우고 물렝 강을 건너 물렝 시를 확보했다. 그 뒤로 제215, 190, 371소총병사단이 후속하여 흐샤쳉츠에서 물렝으로 가는 도로를 장악하고 제363소총병사단은 남서쪽에서 물렝으로 접근했다. 나머지 제5군의 부대들은 마챠초 역에서 수이양 역까지 늘어져 있었다.

메레츠코프 원수는 제5군이 무단장으로 가는 속도가 너무 늦다고 질책하며 크릴로프에게 선견대를 훨씬 더 강화시켜서 무단장으로 가는 길을 확실히 뚫고 막으려 드는 일본군을 가차없이 섬멸하라고 명령했다. 크릴로프는 메레츠코프의 명령을 듣고 제76전차여단을 선견대로 지정한 후 제478돌격포연대와 2개 소총병대대를 제76전차여단에 증강해 주었다. 12일 저녁, 소련군의 포격이 길 남쪽의 일본군에게 떨어지는 동안 제76전차여단은 일본군 제272연대의 좌익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포격이 소련군을 잠깐 가로막았다.

제76전차여단은 플리부치 역에서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을 만나야 했다. 역에는 272연대 소속 1개 대대 규모 병력이 야포와 박격포, 2량의 무장 열차의 지원 아래 강력히 저항하고 있었다. 제76전차여단은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 냈지만 앞으로 전진할 수가 없었다. 공세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크릴로프는 전차여단에 제785소총병연대의 2개 대대와 제233소총병연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보내 주었다. 30분 후 역에 대한 준비 포격이 시작되고 소련군은 마침내 전방 4킬로미터 이내의 모든 일본군 저항을 박살내고 타이마커우 외각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무단장 외곽 중앙의 방어가 무너지고 소련군이 타이마커우로 몰려들어도 일본 제5군 사령부는 소련군의 돌파구를 막을 부대를 편성하지 못했다. 그 시간에 시터우에 있는 만주국군 군관학교의 사관생도 1,000명이 몰려왔고 제20중포병연대의 1개 포대가 도착해 제3국경수비대의 대장인 고바야시 대좌의 지대에 합류했다. 그리고 모타오시흐에 진을 치고 무단장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12일 저녁, 소련군은 증강된 제76전차여단을 선봉으로 삼아 사사키 지대의 방어를 뚫고 타이마커우로 향하며 모타오시흐에서 고바야시 지대를 상대할 것이었다.

8월 13일 내내 소련군은 일본군의 강한 저항을 돌파해야 했다. 제63소총병사단과 제144소총병사단은 전차와 돌격포를 앞세우고 5에서 7킬로미터 깊이의 회랑을 열었다. 일본군은 소대 규모에서 중대 규모까지 야포와 박격포 포격 아래 줄기차게 반격을 가해 왔다. 계속된 전투 끝에 고바야시 대좌는 전사하고 13일 1200시에 그의 지대는 박살났다. 생존자들은 동쪽에 있는 예흐호로 도망쳤다. 13일 밤에 소련군 부대들이 요령 산맥을 지나 예흐호의 일본군 주방어선에 도달했다.

소련군이 제124사단의 방어선을 넘어서는데 성공하자 제124사단의 잔여 부대들은 제위치를 지키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13일 0900시에 시이나 소장은 제272연대에 이렇게 명령했다.

"위치 고수가 어려운 관계로, 272연대는 지금부터 적 공격에 역공을 가한다. 이게 아마 마지막 명령일 것이다."


시이나는 잠시 후 제272연대가 싸우다가 모두 옥쇄하겠다고 답한 전문을 받았다. 제272연대는 소련군의 무자비한 포격과 항공공격을 받아 내며 덤벼들었다.

오후와 저녁에 제63소총병사단과 제144소총병사단이 예흐호 외각에 도달하는 동안 다른 소련 사단들은 패잔병들을 남쪽과 북쪽으로 쫓아보냈다. 제97소총병사단과 제371소총병사단은 제272연대의 반격에 남쪽 사면에서 가로막혔다. 그 동안 제215소총병사단과 제277소총병사단은 제271연대의 좌익을 강타하고 있었다. 동시에 제190소총병사단과 제157소총병사단은 대대적인 포격지원 속에 제272연대의 방어 지점을 급습했다. 다음날 새벽에 소련 제190소총병사단은 제124사단의 좌익은 제273연대를 강타했고 그 동안 제97소총병사단과 제371소총병사단은 남쪽에서 공세를 재개하여 제272연대를 소주산 남쪽의 구릉지로 퇴각하게 만들었다. 0900시, 시이나는 사령부를 소주산 남쪽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후 소련군의 화력이 소주산 정상을 두들겼다. 잘 조율된 소련군의 공세는 막대한 화력 속에 일본군의 방어를 압도했다. 일본군 제20포병연대의 연대장과 무단장 포병연대의 연대장은 소련군의 포격에 전사했고 대다수의 화력을 상실했다. 시이나 소장은 산산이 부서진 다른 부대들과의 통신이 차단되었다. 제124사단은 일본군의 다른 사단들과는 달리 비교적 성공적으로 소련군의 공격을 막았지만 그래도 무너져 버리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무렵 8월 15일이 되자, 라디오를 통해 천황의 정전 선언이 전달되었다. 제124사단은 이 선언으로 결정적으로 와해되었다. 제 살길을 찾으려는 일본군 병사들은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뿔뿔이 흩어지거나 소련군에게 항복해 타이마커우와 모타오신 사이를 지나는 끝도 없는 전차, 돌격포, 자주포, 장갑차, 트럭의 물결을 우울한 눈으로 봐야 했다. 아직 시이나 소장의 명령을 받는 부대들은 산을 넘어 닌간 지역에 도착했고 관동군이 8월 22일에 정식으로 항복했을 때 전원 항복했다.

제124사단의 저항이 무너지자 소련 제5군은 진격로와 통신선을 온전히 확보했다. 소련 제5군은 계속 서쪽으로 진격, 북쪽에서 제1적기군과 합류했다. 제65소총병군단 소속 제144소총병사단과 제63소총병사단, 그리고 제72소총병군단은 무단장 동쪽의 일본군 방어선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제97, 371, 190소총병사단은 물렝과 무단장 북쪽의 일본군 제124사단의 잔존병력을 소탕했다. 제215소총병사단과 제277소총병사단은 일본군 제271연대를 소탕했다.

제215소총병사단은 모타오시흐 역 남서쪽 10킬로미터를 진군했고 제277소총병사단은 물렝 남서족 25킬로미터를 진격했다. 제45소총병군단은 제159소총병사단과 마치아초에서 흐치아쳉츠로 향해 군의 우익을 형성했다. 제157소총병사단과 제184소총병사단은 수이양으로 향하는 도로를 행군했다. 8월 15일, 제84기병사단이 물렝 경계에 도착해 물렝 남서쪽 산악지대로 이동해 타쉬히터우 계곡을 따라 요령 산맥을 통해 닝안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4기병사단은 물렝을 통해 타이펜창에 도착한 소련 제25군과 합류했다.

8월 15일에 소련 제5군은 요령 산맥을 넘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제124사단에서 아직 투쟁 의지가 남아 있는 병력들이 요령 산맥으로 숨어들어가 지치지도 않고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도망쳐서 갈곳 없는 병력들도 무단장으로 후퇴하여 무단장 시의 일본군 방어선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제5군은 진격 시간표를 꼼꼼히 맞추긴 했지만, 아직 물리쳐야 할 일본군은 적지 않았다.

제5군이 접한 문제 때문에 메레츠코프는 전선군의 기동 예비인 제10기계화군단을 제25군의 진격로 남쪽으로 투입한 후 무단장으로 일본군 가는 병력들을 차단하며 무단장 포위를 지원했다. 이것으로 제5군의 문제는 해결되었고 제5군은 제1적기군과 협력하여 무단장으로 쳐들어갈 준비를 끝냈다.


3.9. 무단장 전투[편집]


8월 13일 저녁, 무단장을 향한 소련 제1적기군의 공세는 타키가와 소좌의 대대가 후아린에서 공세를 차단함으로서 잠시 주춤했다. 그 동안 소련 제5군은 모타오신에 친 일본군의 방어망을 뚫어버리고 무단장 동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많은 병력을 잃었지만 아직 건재했던 일본군 제126사단과 제135사단은 일본 제5군의 명령에 따라 8월 12일 1200시에 무단장으로 후퇴했다. 제126사단은 도시 남서쪽에 자리를 잡고 사실상 대대급으로 축소되어 버린 제277연대를 잉치툰 남쪽에, 1개 대대를 잃은 제278연대는 남서쪽에 제279연대는 북쪽의 쑹타오링과 371고지에 배치하며 방어선을 구축했다. 사단 포병연대는 쑤타오링 서쪽에 위치하여 371고지를 사수하는 화력을 제공할 것이었다. 자살공격대는 개인호를 파고 땅 속에 숨어서 예흐호에서 오는 소련군을 급습할 것이었다.

일본군 제135사단은 무단장 북소쪽에 위치해 후아린에서 예흐호로 가는 길을 막으려 했다. 1개 포병대대가 증원되었으며 대대급으로 병력이 축소된 제370연대는 좌익에 위치했고 제369연대는 1개 대대를 전방에 1개 대대를 예비대로 배치한 후 공병중대를 배속받아 우익을 지켰다. 타키가와 소좌의 대대는 제135사단 후방에 위치해 후아린에서 오는 소련군에게서 사단을 지키려 했다. 야포 방열과 참호선 구축은 8월 13일 저녁에 끝났지만 시간 부족으로 이래저래 빈틈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철조망과 대전차 방해물, 그리고 부족한 야포를 가지고 있었다. 제126사단은 그저 20문의 야포만, 제135사단은 10문의 야포만 가지고 있었다. 대전차포는 한 문도 없었으며 손으로 다 셀 정도의 전차만 있었다.

8월 14일 아침, 제1적기군 소속의 제257전차여단이 제26소총병군단으로부터 2개 돌격포 대대와 제300소총병사단과 제22소총병사단의 선견대를 배속받아 증강되었다. 여단장 아니쉬치크 중령은 후아린 역을 재공격하라는 명령을 갱신받았다. 14일 오후, 후아린 역을 확보하려고 오던 타키가와 소좌의 대대와 소련 제257전차여단 소속 전차 3대가 마주쳤다. 타키가와 대대는 이 전차 3대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제135사단의 우익에서는 14일 내내 소련군의 대공세는 오지 않았다. 이는 소련군이 공세를 위해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어선을 건드려 보는 소련군의 소규모 공격은 계속되었으며 일본군은 하나 둘씩 쓰러져 갔다.

14일 저녁, 제257전차여단과 제22, 300소총병사단이 후아린에 도달했다. 도로가 좁은 관계로 사단들의 집결 시간은 계속 느려지고 진격 대열 동안 무척 좁아서 사단 병력들과 차량들은 일렬로 늘어진 형국이 되었다. 게다가 일본군이 무단 강의 모든 다리를 파괴하는 바람에 행군 속도는 계속 늦어졌다. 제1적기군 사령관 벨로보로도프는 제257전차여단에 나머지 부대들이 후아린을 포위할 동안 일본군 방어선을 돌파하라고 명령했다. 벨로보로도프는 강 양안에서 일본군을 협격해 포위할 생각이었다.

8월 15일 아침, 제257전차여단이 일본군과 교전을 시작했을 때 제300소총병사단과 제22소총병사단, 제77전차여단이 후아린에 도착했다. 그들의 상관인 제26소총병군단장 스크보로체프 중장은 즉시 두 축선에서의 공세를 15일 오후까지 준비했다. 제22소총병사단은 무단장 북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후아수링츤에 도착했다. 그리고 북서쪽에서 도시에 대한 공세를 준비했다. 제257전차여단과 제300소총병사단은 후아린과 예흐호 도로의 일본군 방어선을 오후에 공격할 것이었다.

제22소총병사단의 제1049소총병연대와 훈련대대는 SU-76M 자주포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사단 우익에 있는 츠메이홀로에 돌파구를 만들고 무단 강을 건너며 무단장 동부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제1051소총병연대는 자주포 대대와 제257전차여단의 지원을 받으며 예흐호 역인 사단 좌익을 무단 강을 건너며 공격해 도시 남동부로 진격했다. 제52박격포여단과 제54방사포연대가 지원했다. 이 합동 공격은 타키가와 소좌의 대대를 츠메이홀로로 퇴각하게 만들었고 소련군은 대대의 모든 수비 지역을 점령했다.

하지만 무단장을 공략하기에는 아직 힘들었다. 너무 좁은 진격로와 영 좋지 않은 도로 상황 때문에 사단 전체 병력이 공세에 참여할 수 없고 조금씩 축차투입만 하다 막혀버릴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제1적기군은 동쪽에서 예흐호에 접근하던 제5군 소속 제65소총병군단과 접선했다. 그 무렵 제300소총병사단은 무단장을 향해 계속 힘든 진격을 하고 있었다. 벨로보로도프는 공세 중인 제300소총병사단에 대한 현지 시찰을 나갔다가 사단장 체레바노프 소장이 진두지휘하다 중상을 입은 걸 보고 군단장 대리로 나온 루뱌긴 대령에게 사단 지휘를 맡겼다. 한편 파닌 중령의 제1049소총병연대는 예흐호 역으로 진격하면서 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일본군 대전차 자폭조들을 처리했다.

15일 밤, 제300소총병사단, 제257전차여단, 제77전차여단은 츠메이홀로 북쪽으로 가는 5킬로미터 폭의 진격로 하나를 더 열었다. 벨로보로도프는 사령부로 돌아와 제22소총병사단이 무단 강으로 중화기를 더 옮기기 힘들어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제22소총병사단 소속 제221, 246소총병연대는 무단장 북쪽 4에서 5킬로미터 지점에 있었지만 전차와 자주포의 지원을 받지 못해 공격이 지연되고 있었다. 22소총병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벨로보로도프는 8월 16일 아침에 강 양쪽에서 협격 공세를 가할 계획을 수립했다. 군 사령부 직할의 포병들이 무단장으로 준비 포격을 한 이후 제때 도착한 전차와 돌격포, 자주포들이 양 사단에 합류할 것이었다.

제1적기군의 군대가 14일과 15일 사이에 후아린 남쪽에서 진격이 지체될 동안 제5군은 무단장 동쪽에서 공세를 준비했다. 8월 13일 저녁에 제218전차여단과 제395돌격포연대를 대동한 제144소총병사단과 제210전차여단과 제479중돌격포연대를 대동한 제63소총병사단이 쑤타오링 동쪽 2킬로미터 지점과 371고지 남동쪽 3킬로미터 지점에 도착했다. 제144소총병사단은 도로 북쪽으로 부대를 배치하고 제63소총병사단은 도로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8월 14일 1100시, 소련 포병들이 쑤타오링 북쪽 언덕으로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 일본군 포대들을 지워버렸다. 2시간 후에 소련군은 고지로 화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제218전차여단은 보병 지원을 받으며 밤새도록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내면서 제371고지를 돌파하기 시작했다. 1500시 이후 일본군은 전멸했다. 잠시 후에 제144소총병사단 병력들은 제371 고지를 점령했다. 그 동안 제210전차여단과 제63소총병사단은 쑤타오링 고지에서 일본군 제279연대와 격전을 벌였다. 처음 공세로 소련군이 고지를 점령하는 데 실패하자 4시간 동안 고지로 소련군의 포화가 쏟아졌다. 63소총병사단 소속 제226소총병연대가 고지를 점령했다. 저녁에 쑤타오링 고지는 소련군의 손에 떨어졌다. 일본 잔존병들은 쑤타오링 마을로 도망친 후 중야포의 지원을 받으며 고지를 탈환하려 했다. 일본군은 여기서 소련군 전차 6대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밤 동안 일본군 제126사단의 대전차 자폭조 대대가 고지로 덤벼들었으나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제279연대는 고지 탈환에 실패했다.

14일 밤 내내 소련군은 어떻게든 고지를 탈환하려는 일본군을 상대했다. 고지 위로 옮겨진 전차들과 야포들이 고지 아래의 일본군 거점에 포화를 퍼부어 일본군의 25개 포대를 날려버리고 전차 4대와 대전차포를 파괴했다. 포격을 쏟아붓는 동안 제63소총병사단은 고지 아래로 공세를 재개했다. 제63소총병사단은 일본 제278연대의 하부 제대들을 포위하고 사단 사령부와의 연결을 차단했다. 소련 전차들은 제126사단 사령부에 도달해 포화를 퍼부었는데 사령부에서 튀어나온 대전차 자폭조들에 의해 전차 5대를 잃었다. 대전차 자폭조의 공격이 효과를 보자 기겁한 제210전차여단 전차들은 쑤타오링으로 잠깐 후퇴해 재정비를 했다. 사령부까지 공격을 당하고 사단 소속 야포가 죄다 날아간 일본 제126사단은 결국 1800시에 최후의 돌격을 준비했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126사단 병력들은 옥쇄하며 산화하겠다는 생각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며 최후의 돌격을 주저했다.

일본 제126사단의 완강한 저항은 소련군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어서 메레츠코프 원수는 제5군에 내린 명령을 수정해야 했다. 메레츠코프는 제5군에 일본군의 저항이 강한 무단장 남쪽은 우회하고 그곳에는 일본군의 후퇴를 차단하고 제1적기군과 협동한 병력만 남겨 놓은 채 떠나라고 했다. 8월 15일 1645시에 명령이 하달되었고 제5군은 무단장 남쪽을 떠나 닝안에서 쿠린을 통해 장춘으로 향했다.

8월 16일 아침, 제1적기군 소속 제65소총병군단은 무단장을 동쪽과 남동쪽에서 공격했고 그 동안 제26소총병군단은 남서쪽과 북동쪽에서 무단장으로 치고들어갔다. 제26소총병군단은 예흐호를 확보하고 무단강을 건너 무단장으로 돌입했다. 예흐호가 제257, 77전차여단에 의해 확보되자 두 전차여단은 후속하던 제26소총병군단에 예흐호를 넘겨주고 제5군의 65소총병군단을 지원하려 달려갔다. 그 동안 벨로보로도프는 16일 0700시에 일본군 제135사단을 끝장내 버릴 공세를 준비했다. 무단강 동쪽에서 제300소총병사단은 2개 전차여단의 지원을 받으며 제1049소총병연대를 우익에, 제1051소총병연대를 좌익에, 제1053소총병연대를 예비로 두고 예흐호 북쪽에서 무단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무단강 서안에 있던 제22소총병사단은 공세를 위한 휴식과 재정비를 끝낸 후 무단장을 북쪽과 북서쪽에서 공랙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일본 제5군은 재앙에 직면했다. 그 전날 제1방면군 사령관 기타 세이이치 대장은 제5군에 무단장을 수비할 수가 없으면 퉁화나 헹타오호츠로 후퇴하라고 명령했었다. 제5군 사령관 노리츠메 시미즈 중장은 명령을 받고 8월 15일 1200시부터 헹타오호츠로 자정 이후에 철수할 것을 결정했다. 철수 계획에 따라 제126사단은 무단강을 건너 예흐호 남쪽으로 철수하고 제135사단은 무단강을 건너 예흐호 북쪽으로 철수할 것이었다. 만주국군 사관생도들이 예흐호 동쪽으로 가며 제5군의 철수를 후방에서 엄호할 것이었다.

계획은 좋았지만 소련군의 공세는 일본군이 철수를 마음먹었을 때 들이닥쳤다. 제126사단의 제278연대와 타키가와 대대, 제135사단은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느라 후퇴를 실행에 옮길 겨를이 없었다. 제126사단은 8월 15일에 제278연대가 고립당한 채 흐싱링 다리를 건너 빠져나갔다. 제135사단은 새벽에 빠져나갔고 타키가와 대대가 후방을 맡으며 소련군의 공세를 받아 내야 했다.

16일 0700시, 무단장을 향한 소련군의 마지막 공세가 타키가와 대대를 분쇄하면서 시작됐다. 무지막지한 포탄과 로켓들이 무단장 시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타키가와 대대의 생존자들은 이 불지옥 속에서 어떻게든 방어 위치를 지킬려고 애를 썼다. 0900시에 파닌 중령의 제1049소총병연대가 예흐호 역을 완전히 확보했다. 제77전차여단의 전차들이 무단 강 다리를 넘어 무단장에 돌입했다. 이 다리는 일본군이 미처 파괴하지 못한 다리였다. 한편 제1051소총병연대는 무단강을 도하하며 죽어라 저항하는 일본군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0900시에 제22소총병사단도 북서쪽에서 무단장으로 돌입했다. 0600시에 무단장으로 가는 교두보를 마련한 사단은 제221소총병연대를 선봉으로 무단장 시로 0900시에 공격을 시작하며 무단장 역을 목표로 진격했다. 이 공격은 일본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어 0920시에 무단 강 북서쪽을 지키던 일본군은 시내로 후퇴했다. 제246소총병연대가 도시 북쪽에서 철도망을 따라 도시로 진입했다. 제300소총병사단도 곧이어 도시 진입에 성공했다. 제1049소총병연대는 1100시에 무단 강을 넘어 도시로 진입했고 제1053소총병연대는 츠메이홀로 남쪽을 통해 들어왔다. 잠시 후에 제1051소총병연대는 제1049소총병연대와 합류했다.

1300시에 일본군의 후방 부대들이 동쪽 남쪽 북서쪽에서 동시다발적 공격을 당하며 궤멸당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건물 지하실 등지로 숨어들어가며 건물이 무너질 때까지 끝까지 저항했다. 제300소총병사단은 건물 하나하나를 확보해 가며 오후까지 무단장 남서부를 확보했고 제22소총병사단은 무단장 서부를 확보했다.

제300소총병사단이 무단 강을 건너는 동안 제257, 77전차여단은 남쪽으로 가서 제5군 소속인 제144소총병사단과 합류했다. 이 부대는 무단장 남쪽 3킬로미터 지점의 예흐호 산을 합락하고 무단장 동남쪽으로의 일본군 탈출로가 될 다리를 무너트렸다. 8월 16일 1000시에 소련 제65소총병군단은 예흐호 남서부를 완벽히 확보하고 일본군 제278연대의 잔존 병력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1200시에 일본군 제278연대의 잔존 병력들은 연대장 야마나카 하지마 대좌가 든 연대기 아래로 몰려들었다. 대좌는 연대기를 불태우며 광신적인 부하들을 이끌고 소련군이 몰려오는 남쪽으로 돌격하다 전사했다. 한편 제3대대장이었던 우에다 소좌는 소련군을 노려보며 그 자리에서 할복자살했다.

제278연대가 전멸함으로서 소련군은 무단장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 4일간의 무단장 전투에서 제1적기군의 빠른 진격 속도는 일본군의 무단장 방어 계획을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일본군 제126, 제135사단은 병력을 계속 손실당한 채 무단장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제124사단은 그래도 자리를 지키며 소련 제5군의 공세를 저지하려 했지만 역시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제126사단은 2050명이 전사했고 제135사단은 3000명이, 일본 제5군 전체로 따지면 2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9300명이 전사했다. 86문의 포와 80문의 박격포가 박살났다. 소련군은 무단장 전투에서 일본군 40000명이 죽었다고 발표해지만 글랜츠는 일본 쪽 통계가 더 정확한 것으로 판단했다. 일본 제1방면군 사령부는 7000명에서 10000명의 소련군 사상자를 발생시켰다고 발표했다.


3.10. 제25군의 진격[편집]


1945년 6월 24일, 대독승전 기념인 퍼레이드가 한창인 모스크바에서 42년부터 45년까지 제6근위군 사령관을 맡으며 독소전쟁에서 활약했던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차코프 상장은 크렘린궁의 대기실에서 스탈린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스탈린이 나타나 집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치스차코프의 회고록 <조선의 해방>에서 적힌 대화 내용은 이렇다.

스탈린: 장군은 전쟁 전에 극동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가?

치스차코프: 예, 있습니다!

스탈린: 장군은 어느 전선을 잘 알고 있나?

치스차코프: 저는 6년 전 연해주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그로데코브에서 핫산에 이르는 국경 지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스탈린: 치스차코프 동무는 그곳 제25군에서 군단장으로 근무했기에, 일본군과 틀림없이 교전하게 될 제25군 사령관에 장군을 임명하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치스차코프: 최고 사령관 스탈린 대원수 동지! 감사합니다!

스탈린: 이틀 후 비행기 편으로 극동으로 가게 될 것이오. 귀관의 성공을 기원하네.

치스차코프: 스탈린 대원수 동지! 저는 3년 동안 제6근위군을 지휘해 그들과 친숙해져 있습니다. 극동으로 가기 전 제 부하들과 작별할 시간을 갖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스탈린: 그렇게 하시오. 내일 아침 귀관을 비행기로 보내라는 명령을 안토노프 동무에게 전하겠네.


그리하여 8월 폭풍 작전 계획에 따라 한반도 북부로 진격하고 미군과 합의된 대로 38선에서 진군을 멈추며 한반도 북부에 주둔하며 군정을 하고, 결국 북한 정권의 모태를 만들 소련 제25군 사령관에 치스차코프 상장이 임명되었다.

치스차코프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극동으로 향할 장군들은 제25군 부사령관 P. F 라구틴 중장, 참모장 펜콥스키 중장, 포병사령관 G. A 마카로프 중장, 후방사령관 V. S 체렌코프 소장, 통신사령관 보로바긴 소장 등이었다.

치스차코프는 6월 29일에 극동으로 출발했다. 비행 끝에 극동 지역 보로실로프 시에서 조금 떨어진 보즈드워젠카 비행장에 도착해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메레츠코프 원수의 제1극동 전선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메레츠코프에게 신고를 하고 상황 브리핑을 받은 치스차코프는 제25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참모들에게 신고를 받고 제25군 정치장교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그로모프 대령 등과 제25군의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이들 중 레베데프와 그로모프는 나중에 평양에 주둔하면서 북한 정권을 창출하는 주역이 된다.

치스차코프는 줄곳 극동에만 있어서 실전경험이 없던 제25군에 독소전에서 숙련된 고참들을 배속시키고 맹훈련을 시켰다. 하지만 최후방 부대의 풀어진 군기는 어쩔 수 없었다.

제25군은 제1극동 전선군 최남단에서 작전을 시작했다. 치스차코프는 2개의 축선에서 공세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3개 소총병사단으로 이루어진 제39소총병군단과 제259전차여단, 제5군에서 빌려온 제72전차여단이 노보게오르기예프카 역에 집결해 공세를 준비했다. 제39소총병군단의 임무는 퉁잉 요새 지대를 고립시키고 퉁잉을 함락하며 왕칭으로 향해 만주와 한반도의 일본군 연결을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군의 좌익에서는 국경수비대와 제108, 113요새주둔군이 훈춘으로 압박을 가하고 두만강을 건너 훈춘과 한반도의 일본군을 상대할 것이었다. 39군 좌익의 공세 전면이 너무 넓어서 제106, 109, 110, 111요새주둔군이 증원되었다. 제88소총병군단은 예비대로 배치되었다가 남진하며 한반도로 진격해 웅기, 나진, 청진을 점령할 것이었다.

제25군의 상대는 일본 제1방면군 소속 제3군이었다. 제1방면군 지역에서 4개 보병대대와 1개 기병대대로 이루어진 제132독립혼성여단이 퉁잉에 주둔하며 남북 30킬로미터의 방어 정면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제128사단 사령부와 2개 연대는 퉁잉에서 남서쪽 8킬로미터 지점의 롯조커우에 주둔하고 있었다. 128연대의 나머지 1개 연대는 퉁잉 서쪽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타치엔창에 있었다. 한편 근래에 제3군은 휘하 사단, 여단, 독립연대들을 재배치했다. 제112사단은 두만강 북안에 주둔해 훈춘 서쪽을 지켰고 제79사단은 투멘 남서쪽에 배치되었으며 제280 연대는 우차이츠 인근에 주둔했다. 제101독립연대는 웅기 북쪽에 제1기동여단은 시흐핑에 주둔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배치가 바뀌자 제25군은 빨리 공격을 해야 했다. 치스차코프는 제39소총병사단의 공격시간을 8월 8일 저녁으로 하고 국경수비대들을 선봉으로 내세웠다. 치스차코프는 국경수비대가 이 지역에서 오래 복무했기 때문에 더 확실한 일본군 화점 제압과 돌파구 형성해 공헌할 것이라 판단했다. 전차여단들이 국경수비대를 따라가며 지원할 것이었다. 기습을 위해서 준비 포격은 생략되었다.

강습 부대들과 선봉 대대들은 공격 위치에 2330시까지 전원 집결했다. 2400시에 공병들이 비 속에서 국경선의 철조망을 제거한 후 9일 자정에 메레츠코프 원수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소련군 머리 위로 비가 쏟아졌지만 되려 비 덕분에 기습 효과는 극대화 되었다. 일본군은 소련 전투공병들이 초소들을 점령할 때 까지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0100시까지 국경의 모든 일본군 초소들이 정리되었고 0300시에 선두 대대들이 진격해 들어갔다. 제259전차여단을 선두로 제40소총병사단과 제105소총병사단이 0830시에 패드 센나야강과 계곡 북안의 퉁닝 요새지대로 진격로를 뚫었다.

투멘으로 통하는 철도를 따라가 퉁잉 마을에서 전투를 벌였다. 다른 소련군 병력은 국경 요새에서 나와 퉁잉 남쪽의 친겐과 더 남쪽의 파이차오산츠와 투멘츠로 진격했다.

소련군은 8월 10일에 진격을 속개해 일본군의 저항을 상대했다. 제132독립혼성여단장 오니다케 소장은 서둘러서 그의 1개 대대를 요새지대로 보내고 나머지 부대는 서쪽으로 잠깐 퇴각했다. 10일 오후, 제259전차여단과 제40소총병사단이 퉁닝에 입성했다. 그 동안 제384소총병사단은 퉁잉 요새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 무렵 소련 제5군 소속의 제17소총병군단이 남쪽으로 진격해 수이펜호를 공격하다가 제39소총병사단과 통잉 서쪽에서 합류했다. 8월 9일 1700시, 메레츠코프는 제17소총병군단에서 2개 사단을 차출해 제25군에 임시로 배속했다.

한편 메레츠코프는 여기서 전선군 기동예비인 바실리예프 중장의 제10기계화군단을 제25군 지역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8월 10일, 제39소총병군단이 퉁잉 지역의 일본군을 모두 정리했고 제17소총병군단과 합류해 서쪽과 남서쪽으로 진격하며 일본군을 축출했다. 8월 11일, 제17, 30소총병군단이 퉁잉의 철도망을 따라서 왕칭, 투멘, 퉁화, 길림으로 진격했다. 8월 12일 정오, 2개 군단은 남서쪽으로 30~40킬로미터를 행군했다. 돌파구가 순조롭게 뚫리고 안정화되자 메레츠코프는 제10기계화군단을 돌파구를 통해 왕칭으로 진격시켰다.

8월 13일과 14일, 제17, 39, 10기계화군단은 남서쪽으로 진격해 일본군의 단선 군용 철도를 따라 산맥과 숲을 지나 랴오헤이산에서 헤이토사이로 진격했다. 선두의 공병들은 지뢰 제거, 교량 보수, 노면 장애물 청소 작업을 지원했다. 14일 밤, 제25군은 5에서 15킬로미터를 진격했고 행군 대형이 매우 크게 늘어지며 병목 현상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소련군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제132독립혼성여단은 타치엔창에서 패배해 쫓겨났고 제128사단은 롯조커우 지역을 지키느라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일본군은 중대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헤이토사이를 향한 소련군 진격은 2개 축선으로 갈라졌다. 제17소총병군단은 제10기계화군단 소속의 제72기계화여단을 선견대로 세우고 헤이토사이 서쪽으로 타이핀링 도로로 향했다. 제39소총병군단은 제257전차여단과 제10기계화군단 소속의 제72전차여단을 선견대로 세우고 헤이토사이 남서쪽을 통해 왕칭으로 진격했다. 8월 15일, 제17소총병군단은 일본군 제284연대 병력과 헤이토사이 서쪽인 롯조커우에서 교전을 벌였다. 제366소총병사단이 남쪽에서 일본군을 차단하는 동안 제187소총병사단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내며 역습을 가했다. 선견대인 제72기계화여단은 일본군 집결지를 우회해 타이핀링 도로에 도달해 일본군 제285연대와 전투를 벌였다.

그 동안 더 남쪽에서 제72전차여단과 제259전차여단은 왕칭에 도달했다. 후속하던 제40소총병사단은 일본군 제1기동여단과 교전을 벌였다. 잠시 후, 치열한 전투 끝에 소련군은 일본군의 모든 저항을 물리치고 진격을 계속했다. 제39소총병군단의 선견대가 8월 15일 1700시에 왕칭을 점령했다. 제10기계화군단의 나머지 제대들과 제39소총병군단은 210킬로미터의 도로를 뒤로 하고 진격했다. 제39군의 선두 부대들은 왕칭에서 동쪽 3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친창에 도착했다. 나머지 부대들은 헤이토사이에서 나오는 도로에 늘어져 있었다.

제25군과 제10기계화군단의 공세는 다음 날 절정에 달했다. 제187소총병사단의 선견대와 제72기계화여단, 제17소총병군단은 타이핀링 고속도로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투 끝에 저녁이 되자 일본군은 도로에 축출당했고 소련군은 도로를 완전히 점령했다. 같은 날, 제257전차여단의 선두 전차들이 제39소총병군단의 선두 병력과 함께 왕칭에서 남동쪽으로 20킬로미터 있는 투멘으로 진격했다. 제10기계화군단의 선두 부대들, 제72전차여단은 옌지를 향한 공세를 시작했다.

25군 공격지역의 남쪽에도 소련군은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공세 첫날, 제198, 113요새주둔군 병력이 훈춘과 두만강 너머의 일본군을 정리하며 훈춘과 우치아츠 요새 지대를 확보하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으로 진격했다. 이 때가 소련군이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은 최초의 사례이며, 이와 동시에 한반도에서 일본군이 축출되기 시작한 첫 사례다. 소련군은 일본군 제280연대를 우회하여 상챠오셴에 고립시켰다. 8월 11일, 제88소총병군단이 훈춘-투멘 축선으로 진격했다. 그리고 제541소총병연대가 빠진 제393소총병사단이 제113요새주둔군과 합류해 한반도 북동쪽으로 진격했다.

8월 12일 이른 아침, 제393소총병사단은 제113요새주둔군과 산을 넘으며 청학 남쪽에서 일본군 제101독립연대와 전투를 벌였다. 제101 독립연대는 제127사단이 있는 호령으로 퇴각했다. 3시간 후, 0900시, 제393소총병사단의 선두 부대들이 함경북도 웅기에 도착했다.

그 무렵 웅기는 소련군 공군과 해군항공대 폭격기들의 공습을 계속 받은 후였고 어뢰정 6척에 분승한 해군육전대 병력 60명이 1000시에 기습 상륙했다. 12일에는 나진항에 상륙했다. 작전이 시작되기 전 소련군은 웅기와 나진은 일본군의 주요 해군기지여서 격렬한 전투가 될 것이라고 했지만 이 당시 일본 해군은 사실상 전멸상태라서 본토도 방어가 불가능한 실정이었으므로 해상에서 소련군을 막을 수 없어서 해상에서는 사실상 전투가 없었다. 13일 1100시쯤 청진에 상륙하는 과정에서 소련군은 일본군 1개 연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특히 일본군이 미츠비시 제철소로 가는 청진철교를 사수하려고 안간힘을 쏟아 14일 아침부터 14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때문에 해군육전대원 60명 중 3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함포 사격으로 전세를 뒤집었고 8월 15일 오후 4시경 제25군 선견대가 청진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남은 사단이 끝까지 저항하여 청진 전투는 8월 18일에 끝났다. 초기 작전 명령은 동해안을 따라 속초, 삼척, 포항, 부산까지 남하하라는 명령이었지만 8월 20일에 느닷없이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청진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되돌아갔다. 제393소총병사단은 해군육전대와 합류하여 웅기를 점령했고 1개 대대를 남겨둔 채 나진으로 진격해 14일에 함락시켰다. 16일에 393소총병사단은 청진으로 가는 길에서 전투를 벌이며 1500시에 청진 근처에 도착해 청진을 향해 공세를 벌였다.

더 북쪽, 훈춘-투멘 축선에서 제88소총병군단은 훈춘을 확보한 제113요새주둔군과 세해 인안호 강 북서쪽 10킬로미터 지점으로 진격해 일본군 112사단의 격렬한 저항을 상대했다. 15일에 제386소총병사단이 제35군에서 제25군으로 보내 준 제209전차여단의 지원을 받으며 인하호강을 건너 일본군 제246연대와 전투를 벌였다. 소련군의 도하를 막으려는 일본군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날 밤, 제258소총병사단은 군단의 제2파로 진격해 투멘 강을 건너 훈영으로 진격해 일본 사단의 우익을 때렸다. 두만강 남안의 일본군은 은무피를 거쳐 마유산으로 후퇴했다. 그곳에는 제79사단 소속 제291연대가 참호를 파고 방어선을 구축해 놓았다.

소련군은 이 일본군을 우회해 측방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다음날, 제258소총병사단은 두만강에서 서쪽으로 진격을 재개해 마유산 남서쪽의 일본군 방어선을 공격했다. 제113요새주둔군의 다른 병력은 제386소총병사단의 우익에서 진격해 일본군 제112사단의 좌측방으로 진군했다. 이 기동을 통해 일본군 247, 248연대는 112사단과의 연결이 끊어졌다. 일본군은 이 상황을 파악 못하고 계속 자리를 지켰다. 그 결과로 8월 17일, 투멘-옌지 축선의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북쪽, 동쪽, 남쪽에서 일제히 공격을 받으며 괴멸당했다. 또한 만주와 한반도의 일본군 연결은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제25군 더 북쪽에서 일본군은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다. 제10기계화군단 제대들을 포함한 제17소총병군단은 서쪽으로 진격해 타이핀링 도로를 지키려는 일본군 제128사단을 상대했다. 제72전차여단 전차들이 북쪽에서부터 옌지로 진격했고 그 동안 본대는 왕칭에 다다랐다. 제259전차여단의 선두 부대들은 북쪽에서 투멘에 도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88소총병군단이 투멘 동쪽에서 나타났다. 17일, 일본군 제112사단과 제79사단을 둘러싼 포위망이 닫혔다.

제10기계화군단의 선견대는 타이핀링 도로를 6킬로미터 달려서 주요 철로들과 타흐싱처우 교차로를 확보했다. 제10기계화군단의 다른 부대들은 제72전차여단과 함게 왕칭 남쪽에서 니안얀춘에 주둔한 일본군 제127사단과 전투를 벌였다. 제39소총병군단은 제259전차여단과 왕칭 남동쪽에서 진격하며 투멘을 점령하고 일본 제112사단과 79사단의 포위망 돌파 기도를 차단했다. 17일, 제88소총병군단이 마유산의 일본 제291연대를 공격하며 투멘 동쪽 10킬로미터 지점의 함경북도 온성을 점령했다. 포위된 일본군은 항복하거나 자살을 택했다.

일본군 2개 사단이 무너질 동안 제25군은 한반도 북동부를 확보했고 제10기계화군단을 둥화와 길림을 향해 진격시켰다. 제10기계화군단의 선견대들이 제17소총병군단을 뒤에 두고 북서쪽으로 30킬로미터 쯤 진격하여 제5군 부대와 퉁칭쳉에서 합류했다. 퉁칭쳉에는 무단장과 왕칭을 잇는 주요 철도가 있었다. 제39소총병군단과 제88소총병군단은 한반도 북동부의 잔존 일본군과 옌지 남쪽, 투멘의 잔존 일본군을 처리했다. 19일, 제10기계화군단은 서쪽으로 진격을 재개하며 랴오닝 산맥을 재빨리 넘고 청진이 제393, 355소총병사단에게 점령된 날 밤에 퉁화에 도착했다.

한편, 그 전날 관동군의 항복 소식이 무선을 통해 전달되자 대부분의 일본군은 사기가 꺾여버리고 많은 숫자가 저항을 포기한 채 항복을 계속했다.

8월 18일, 바실렙스키 원수는 만주의 전 소련군에게 주요 인구 밀집 지역을 특별 기동 부대를 통해 점거하여 주둔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제1극동 전선군 제대들은 병력들을 차출해 소규모 특별 집단을 만들어서 하얼빈과 길림 비행장을 점거하고 일본군 포로들을 그곳에 임시로 수용시켰다. 제25군 남쪽에서는 88소총병군단과 제10기계화군단 병력들이 38선까지 진격했다.

일본군 최후의 저항은 8월 26일에야 끝났다. 퉁잉 요새지대의 일본군은 소련 제106요새주둔군과 1개 독립포병여단, 2개 포병대대에게 8월 9일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다. 소련군은 차근차근 일본군의 특화점을 제거해 나가고 총 82개의 특화점을 제거했다. 퉁잉은 8월 25일에 함락되었고 다음날 일본군 901명이 항복했다. 관동군의 항복을 인정하지 않는 다른 일본군들이 곳곳에서 소규모로 저항했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항복하거나 전멸당하거나 자살했다.


3.11. 작전 결과[편집]


제1극동 전선군의 공격은 일본판 마지노선이라 불리던 만주 동부 요새지대를 철저히 박살내는데 성공했다. 제1극동 전선군은 준비 포격의 삭제, 야간 기습과 능숙한 침투술을 통해 자바이칼 전선군과 함께 관동군에 대한 총체적 기습을 달성했다. 어려운 지역을 극복하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진격한 제1극동 전선군은 만주 동부의 일본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많이 주지 않은 채 들이칠 수 있었다.

무단장과 왕칭의 점령은 소련군의 성공을 뜻했다. 만주 동부의 교통의 요지들은 모두 제1극동 전선군의 손에 들어왔고 그 결과 더 빠른 진격과 더 안정적인 보급이 제1극동 전선군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후터우, 수이펜호, 퉁잉 등에 포위되었던 일본군은 용감히 저항했지만 이미 의미는 없었다. 그냥 우회하여 포위한 채로 내버려 두면 됐기 때문이다.

메레츠코프의 제1극동 전선군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치스차코프의 제25군은, 8월 24일에 평양에 입성했다.


4. 제2 극동 전선군의 공세[편집]




4.1. 만주 북부의 일본군 방어계획[편집]


만주 북부 아무르강, 송화강 유역의 주요 마을들은 송화강 동안에 있었으며 가장 큰 도시는 지무쓰, 푸친, 그리고 퉁치앙 이었다. 상태가 좋지 않은 도로가 강 동쪽 둑을 따라 있었지만 장마철이 되면 물에 잠기는 경우가 많았다. 잠긴 지대에서 송화강에서 우수리 강으로 가는 도로는 없었다. 아무르강과 우수리강 사이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주요 인구 밀집 지역은 리엔창커우, 흐싱샨첸,호캉, 그리고 로페이였으며 모두 지무쓰 북쪽 아무르 강변의 구릉 지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만주 중부로 가는 길은 송화강에서 지무쓰 사이의 150킬로미터의 평지로 산맥을 뚫고 하얼빈으로 나 있었다.

이 지역의 일본군은 제1방면군 사령부 직할의 제134사단, 제123사단과 제135독립혼성여단으로 이루어진 제4독립군이었다. 제134사단장은 이제키 진 소장으로 지무쓰에 사령부를 두었다. 사단 소속 3개 연대는 각각 지무쓰, 흐싱샨첸, 푸친에 있었으며 아무르강 남안에 초소들을 두었다. 소규모 요새들은 아무르 강 남쪽의 밍샨첸, 퉁치앙, 첸흐칭커우, 그리고 푸얀에 두었다. 이 요새들은 로페이에서 지무쓰로 가는 도로를 통제하고 송화강 동안에서 올 것으로 예상되는 소련군을 저지할 계획이었다.

푸친 요새 지대는 30킬로미터의 정면과 20킬로미터의 종심을 가지고 우얼흐쿨리 산과 푸친 시를 주요 방어 거점으로 지정했다. 푸친에는 1200명의 일본군과 만주국군이 주둔했으며 156개의 강화된 콘크리트와 통나무 특화점이 있었으며 50킬로미터에 거쳐 참호와 대전차 진지가 있었다. 푸친 요새에는 제367연대 소속 제2대대가 주둔했으며 일본 숭아리 전단 소속 1개 해군육전대대가 주둔했다. 추가로 제7만주국군 여단이 푸친 시에 주둔하고 퉁치앙으로 가는 선착장을 지켰다. 일본군 제366연대 소속 제2대대는 흐싱찬첸 요새지대를 지켰다.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합쳐서 25,000명이 지무쓰를 지키고 있으며 상시 요새 지대로 지원갈 준비를 갖추었다.


4.2. 제2극동 전선군의 공세 계획[편집]


자바이칼 전선군과 제1극동 전선군이 만주를 동서에서 협격하며 관동군을 박살내고 있을 때,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의 제2 극동 전선군은 만주 북부에서 조공을 가해야 했다. 이 공세는 자바이칼과 제1극동의 협격을 막으려고 만주 중부로 내려올 북부의 관동군의 행동을 차단할 것이었다.

제2극동 전선군의 기동 또한 지형상의 난점에 부딪쳤다. 만주 서부가 사막과 산맥, 동부가 숲과 고지대였다면 만주 북부는 여러 개의 하천들이 장애물이었다. 게다가 강둑마다 수풀이 빽빽하게 자라 있었고 샤오싱안링 산맥과 늪지가 국경을 넘어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제2극동 전선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 아무르강 남동쪽과 남서쪽에서 하바로프스크에 이르는 2500킬로미터의 공세 정면을 담당했다. 이곳은 우수리강에서 이만으로 이어졌다. 전체 공세 정면에서 소련군은 장마비로 불어날 아무르강과 송화강을 건너야 했다.

제2극동 전선군의 공격 축선은 두 곳으로 갈라졌는데 첫째 축선은 블라고브쉬첸스크의북쪽과 남쪽으로 아무르강에서 강폭이 제일 좁은 곳이었다. 이곳은 샤오싱안링 산맥에서 시작되는 아무르강의 상류였다.둘째 축선은 하바로스프크 서쪽으로 아무르강과 우수리강, 송화강을 모두 도하해야 하는 곳이었다. 또한 아무르강 북안과 우수리강 동안에는 하탈링 산맥과 완타산, 그리고 서쪽에는 샤오싱안링 산맥이 버티고 있었다. 이 고지대는 동서로 300킬로미터 남북으로 100킬로미터에 이르렀다.

푸르카예프의 제2극동 전선군은 이 지역에서 통신과 보급선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더라도 주공을 가해야 했다. 주요 보급선은 송화강을 통한 선박 보급으로 잘 하면 아무르강까지 보급선을 확장할 수 있었다.

제2극동 전선군은 이곳의 일본군을 상대하며 아무르강을 도하해 송화강 일대를 확보한 후 지무쓰를 거쳐 하얼빈으로 진격해 제1극동 전선군 병력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동시에 더 북쪽에서 아이훈-순우 지역을 확보하는 동안 아무르강을 블라고브쉬첸스크에서 건너 치치하얼로 향해 자바이칼 전선군과 합류하는 것이었다.


4.3. 제15군의 공세[편집]


푸르카예프 대장은 S.K 맘모노프 중장의 제15군에 주공을 맡겼다. 제15군은 아무르 분함대와 함께 숭아리강 입구에서 아무르 강을 도하해 숭아리강 일대와 푸친 요새 지대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주력 병력을 후친으로 진격시켜 숭아리강 동안을 확보할 것이었다. 그 이후 지무쓰와 하얼빈으로 가는 돌파구를 확보할 것이었다.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제15군은 3개 소총병사단, 1개 요새주둔군, 3개 전차여단을 배속받아 총 1,433문의 야포와 박격포, 방사포 18문, 그리고 전차와 자주포 164대를 확보하게 되었다.

푸르카예프는 제15군에 일본군 특화점을 제압할 대대적인 화력 지원을 명령했다. 15군 소속 제52, 145, 1120포병연대는 아무르 분함대의 소형 포함, 경비정과 함께 아무르강 너머로 포화를 퍼부을 것이었다. 총 12개 포병연대와 1개 대전차여단, 1개 방공사단, 1개 방공연대, 4개 방공대대가 제15군의 부차적인 진격을 지원할 것이었다. 포병들의 화망 형성 내에서도 제15군은 좋지 않은 도로 사정 때문에 기갑 장비들을 크게 활용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제10항공군이 제15군의 공격을 하늘에서 지원할 것이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제15군도 대대적인 공병 지원을 받아야 했다. 아무르 강 도하와 일본군 초소 제압에는 공병이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 1개 차량화전투공병여단, 2개 공병대대, 1개 도하대대가 제15군이 배속되었다.

3달 동안, 공병들은 266킬로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새로 만들고 1,417킬로미터의 도로를 보수했다. 15군 공병들은 아무르강에 3개의 도하점도 만들고 도하점을 숨기기 위한 위장막도 제작했다. 아무르강과 송화강을 장악하기 위해서, 극동전략방면사령부는 아무르 분함대를 제2극동 전선군에 배속했다. N.V 안토노프 해군 소장의 아무르 분함대는 하바로프스크에 본부를 두고 아무르강에서 작전을 벌일 경비정, 모니터함, 기뢰부설함, 소해정 등을 3개 전대 규모로 구성하고 있었으며 육상 작전을 담당할 해군육전대도 가지고 있었다. 푸르카에프는 대부분의 분함대 병력을 제15군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제45전투기연대가 제15군을 근접지원하게 했다.

맘모노프의 작전 계획은 다른 야전군의 작전 계획과 엇비슷했다. 맘모노프는 주공을 송화강 축선에서 두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송화강을 넘어 진격해 들어갈 것이었다. 제361, 제388소총병사단이 군 대열 중앙에서 주공이 될 것이었다. 아무르 분함대의 제1전대가 레닌스코예와 보스크레센스코예에서 시작될 도하를 근접지원할 것이었다. 도하가 끝나고 다리가 확보되면 2개 사단은 제171전차여단을 선견대로 세워 퉁치앙을 점령하고 숭아리강 동안을 따라 푸친으로 진격한 후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지무쓰를 공격할 것이었다. 군의 좌익에서는 제2전대가 제630소총병연대를 니즈네-스파스코예 축선에서 수성해 후얀과 다른 아무르 강 남안의 일본군 화점들을 소탕할 것이었다.

우익에서는 제34소총병사단, 제203전차여단, 제102요새주둔군이 제1전대의 지원 아래 함께 블라고슬로벤노예에서 강을 건너 남쪽으로 진격해 로페이와 지무쓰 사이의 일본군 화점을 공격할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제34소총병사단은 지무쓰를 북쪽과 동쪽에서 공격하면서 주공과 합류할 것이었다. 8월 8일 저녁, 제15군 병력이 도하점에 다 도착했다. 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제1전대는 레닌스코예에, 제2전대는 니즈네-스파스코에에 주둔했다. 맘모노프는 레닌스코예에서 제1전대의 지휘권을 인수받았다. 아무르강 남안의 일본군을 정리하기 위해 50분의 준비 포격이 준비되었다.

8월 9일 0100시, 제15군 병력들이 아무르 강 너머의 일본군 초소들을 죄다 정리하고 선두 대대들과 수색 부대들을 보트에 태워 도하시키기 시작했다. 강을 건너던 소련군은 강 남쪽의 일본군이 점령한 타르타르 섬에 상륙했다. 타르타르 섬은 아무르강의 요지로 송화강으로 가는 입구에 있어서 일본군의 강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무르 분함대 제1전대는 제393소총병사단의 제2대대를 타르타르 섬에 상륙시켰다. 공격 신호인 붉은 신호탄이 오르자 소련군은 비속에서 섬에 상륙했다.

0800시까지 일본군의 저항을 물리친 제2대대는 섬의 일본군 초소들을 점령하고 섬을 완전히 확보했다. 밤새도록 다른 대대들이 아무르 분함대 소속 함선들에 실려서 아무르강의 중요한 섬들을 장악했다.

주공이 진행되는 동안 소련군은 강 남안으로 도하할 발판을 마련했다. 제1전대는 제394소총병연대의 강화된 대대들을 강 남안으로 상륙시켰다. 밤새도록 이 대대들은 산툰의 일본군 주둔지를 기습하며 퉁치앙으로 진격했다. 한편 일본군은 이 지역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부분의 병력이 빠져 있는 터였다. 그래서 오직 약간의 일본군과 만주국군만이 소련군에게 저항했다. 8월 9일 밤 내내 아무르 분함대의 함선들과 바지선들이 제361소총병사단을 산툰과 퉁치앙으로 가는 길로 날랐다. 제361소총병사단의 좌익에서는 제388소총병사단의 2개 연대가 강 남쪽 둑에서 도하하고 있었다.

도하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제1전대가 맡아야 했는데 특히 중장비 도하에 신경을 써야 했다. 바지선 1척 당 60톤 이상은 싣을 수 없었다. 제1전대는 중장비 도하를 위해 4가지 운송 방법을 썼는데 T-34 1대와 T-26 2대, T-34s 2대, T-26s 4대, T-34 1대와 트럭 3대를 같이 나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주 전역에서는 전차의 종류를 가급적 통일함이 보급과 전투에 유리하지만 이 항목을 보면 이상하게도 BT-7이나 T-26 같은 구형 전차들이 의외로 많이 투입되었는데 시베리아에 쌓아 놨던 2선급 차장물자들로 보인다. 그러나 비가 쏟아지면서 도하작업에 계속 차질이 생겨 중장비 도하는 5시간이 소요되었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2~3일 동안에도 1개 전차여단 분량의 기갑장비만을 도하시킬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제171전차여단의 경우 도하에 30시간이 걸렸다. 이 시간 동안에도 여단의 선두 전차들은 100킬로미터 이상 진격해야 했다. 결국 제171전차여단이 사단 선견대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더 많고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아무르 강 근처에서 징집된 증기선들도 도하작전에 동원되었다. 증기선 아스트라한, 그로즈니, 돈바스, 코키난키, 소르모우어와 기타 소형 선박들이 물자와 병력을 실어 날랐고 증기선 치체린, 오스트러우스키, 키로우는 병원선으로 개조되어 부상병들을 강 북안으로 수송했다. 아무르 강에 대한 3개의 도하점이 모두 구축되자 제15군 사령부는 각 도하점의 병력을 작전 집단으로 임시 편성했다. 도하작전은 어려웠지만 소련군의 주력 병력들은 8월 10일 아침까지 모두 아무르 강 도하에 성공했다.

주공 방향인 퉁치앙 마을로 소련 경비정들이 함포를 쏘며 일본군 집결지를 공격했다. 제361소총병사단이 마을에 돌입하자 마을의 일본군은 푸친 요새 지대로 후퇴했다.

퉁치앙이 확보되자 제361, 388소총병사단은 재집결한 후 남쪽의 후친 요새지대로 향했다. 제171전차여단은 기타 지원 제대들을 후방에 두고 땅크 데산트들을 전차에 태운 뒤 남쪽으로 진격했다. 1500시에 맘모노프는 제361소총병사단과 아무르 분함대에 푸친으로 진격해 푸친 시를 11일 0800시까지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맘모노프는 제361소총병사단과 제1전대에 2개의 강화된 소총병대대와 강습소총병중대를 푸친에 가까운 송화강 동안에 상륙시킬 것을 지시했다. 이 공격부대는 푸친에 대해 제171전차여단과 제361소총병사단의 선두 병력들과 북쪽에서부터 도시를 협격할 것이었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 계획의 가장 큰 문제였다. 소련군은 수륙 양면 합동공격을 위해 더 기술적인 방법을 써야 했다.

제1전대는 2개의 해군육전대 제대를 상륙을 위해 배치했다. 해군육전대 정찰 병력은 모니터함과 무장한 경비정과 기뢰부설선이었다. 엄호 부대는 모니터함 2척과 무장 경비정 3척이었다. 정찰 부대는 일본군 위치들을 관측하고는 제1투입 병력을 상륙 위치에 상륙시켰다. 엄호 부대는 15킬로미터 뒤에서 최초 투입 병력을 지원하면서 제2투입 병력을 상륙시켰다.

8월 10일 1630시, 정찰 제대가 제364소총병연대 소속 제3대대를 모니터함 원쑨에 태우고 왔으며 강습 부대들은 경비정 3척에 분승하고 왔다. 제345소총병연대의 제1대대는 3시간 후에 상륙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소련군 함선들은 기뢰를 제거하고 장애물을 피하는데 애를 썼다. 운 좋게도 일본군은 부랴부랴 푸친으로 후퇴하느라 기뢰나 수중 장애물을 설치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8월 10일 2200시, 선견 부대들이 푸친 북쪽에서 37킬로미터 지점인 투치커우에 닻을 내리고 제345소총병연대의 제1대대를 상륙시켰다. 무장 경비정들은 송화강 남쪽이며 푸친 근처 지역에서 일본군 화점들을 정찰했다. 경비정들은 강 지협을 관측하고 기뢰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너무 어두워서 일본군 화점들의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다. 다행히 일본군도 어두워서 경비정들이 정찰을 끝내고 무사히 돌아갈 때 까지 경비정들을 보지 못했다. 정찰 정보를 기반으로 제361소총병사단장은 345소총병연대 제1대대에 강변에서 사단 본대와 합류한 다음 푸친을 향해 육로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제2대대와 강습중대는 수륙 양면 공격을 도시 하부에서 실시하며 지상에서 돌입하는 부대와 협격하라고 명령했다.

8월 11일 0700시, 3척의 경비정과 기뢰부설선 1척이 모니터함을 후속하며 푸친에 접근했다. 20분 후 경비정들과 모니터함이 푸친으로 함포 사격을 퍼부었다. 일본군은 박격포와 야포를 가지고 와서 대응했지만 사거리가 닿지 않았는데 그 일본군에는 75밀리 이상의 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르 분함대의 3척의 모니터함인 크라스니보스토크, 블라디미르 레닌, 쑨원[1]에는 130밀리 함포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경비정에는 소형 다련장로켓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소련 함선들은 130밀리 포와 다련장포로 일본군 방어 거점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모니터함은 5개의 콘크리트 화점과 12개의 나무 화점, 6개 박격포 포대, 기타 탄약창 몇 개를 날려버렸고 무장 경비정들은 10개의 화점을 박살냈다. 1시간 동안의 함포 사격이 끝난 후 경비정들이 강습중대를 상륙시켰다. 0830시에는 제3대대가 모니터함 쑨원에서 상륙했다. 병력들은 강변과 도하점을 확보하고 도시로 진격했다. 강습중대와 제3대대는 도시 외곽에서 모니터함의 함포 지원을 받으며 일본군의 강한 저항을 상대했다. 도시의 일본군은 쑹화 해군육전대 제2대대와 제25경비대대, 기타 만주국군 부대로 감시탑에 틀어박혀서 기관총을 쏴 대거나 도시의 건물 창마다 중기관총을 설치하고 시가전을 벌였다. 한편 도시 북쪽에서 제171전차여단의 선두 전차들과 제361소총병사단 병력이 일본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도시로 진입했다. 0900시 이후 일본군은 푸친 요새 지대를 포기하고 남동쪽으로 탈출해 우얼흐쿨리산 요새 지대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최후까지 저항하던 일본군 초소는 1200시에 점령되었다.

제171전차여단 전차들과 제361소총병사단 병력들은 요새화 된 건물 하나하나에 돌입하며 백병전을 벌였다. 8월 11일에 제171여단과 제355소총병연대는 도시 중심을 확보했다. 그날 밤 일본군은 몇 번 역습을 시도했지만 죄다 실패로 돌아갔다. 다음날 날이 밝자 소련군은 모니터함의 함포 지원을 받으며 전날에 점령하지 못했던 지대로 다시 몰려갔다. 마침내, 8월 13일에 제171전차여단과 제361소총병사단은 푸친을 점령했다. 13일 저녁, 일본군의 저항은 완전히 끝났다. 푸친이 소련군의 손에 들어오자 맘모노프는 병력을 지무쓰로 전진시켰다.

송화를 통해 주공이 벌어지는 동안 소련군의 조공이 제15군 정면에서부터 펼쳐지기 시작했다. 제34소총병사단과 제203전차여단이 15군 우익에서 아무르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소련군은 로페이-지무쓰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했다. 사단의 본대가 물에 잠긴 도로를 따라 흐싱산첸의 주 요새로 진격하는 동안 사단 좌익 병력은 펜흐시앙의 일본군 요새 지대를 상대하느라 뒤쳐졌다. 대대적인 포격과 폭격이 흐싱샨첸에 쏟아져서 결국 그곳의 일본군이 서쪽의 다른 요새 지대나 지무쓰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13일까지 제34소총병사단의 선두 부대들이 리엔치앙커우의 일본군을 남쪽으로 천천히 압박하면서 송화강 북쪽 둑에서 지무쓰로 도하했다.

15군 좌익에서 제388소총병사단의 제630소총병연대가 하바로프스크에서 남서쪽의 아무르 강 남안의 일본군 방어선을 공격했다. 이곳의 가장 중요한 마을은 푸유아안 이었다. 일본군의 방어를 분쇄하기 위해 소련군은 강을 이용해야 했다. 8월 9일 0320시, 포함 프로레탈리와 제2경비정대, 제3기뢰부설대가 니즈네-스파스코예에서 출항해 갑판에 제630소총병연대의 제1대대를 분승해 태우고 나타났다. 모니터함 수에르들로우와 달네우오초츠니니, 콤소몰레츠와 제3경비정대가 푸유안 옆의 말라킨 섬의 일본군 방어망에 함포를 퍼부었다.

말라킨 섬이 정리되고 상륙 병력이 도하점에 접근하자 소련 함선들은 푸유안 요새 지대에 포문을 돌렸다. 상륙한 부대들은 강 부두를 확보하고 도시 동쪽 끝과 서쪽 끝으로 진군했다. 예상 못한 일본군의 저항은 없었지만 제1대대는 일본군의 강한 저항을 상대해야 했다. 제307전투기연대 소속 전투기들이 이곳 하늘을 비행하며 남아 있는 일본군 항공기가 없다는 것을 파악했다. 2개 해군육전대 제대가 제1대대를 지원하며 도시 점령에 합류했다. 0800시 이후 일본군의 저항은 일소되었다.

도시를 확보하자 제1대대는 도시에 주둔해 휴식을 취하며 후속 부대들의 상륙을 기다렸다. 이때 아무르 분함대 제2전대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송화강 입구에 도달하며 친텔리, 오투, 케인치의 일본군을 공격했다. 여기서 소련 함선들은 제630소총병연대 제2대대를 상륙시켰다. 제2전대가 친텔리에 1000시에 도착했을 때, 소련 수병들은 친텔리가 전날 밤에 경비정을 타고 기습 상륙한 아군 부대 손에 이미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포코로브스코에에서 출발한 제3대대 또한 목적지인 오투가 이미 아군 손에 떨어졌다는 것을 보았다.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제2전대는 케인치에 8월 10일 1925시에 도착했다. 모니터함 달네우오초츠니와 콤소몰레츠가 소총병 중대를 케인치 마을 북쪽에 상륙시킬 동안 모니터함 수에르들로우와 경비정 3척은 케인치 강 입구에 병력을 상륙시켰다. 이 마을에서도 대부분의 일본군이 빠져나간 터라 소수의 일본군만이 경비정들의 로켓포 일제발사음을 들을 수 있었다.

8월 10일이 끝나갈 무렵 제630소총병연대와 제2전대는 하바로프스크에서 송화강 입구에 이르는 200킬로미터의 아무르강 남안을 정리했다. 제2전단은 해군육전대 병력들을 점령한 마을에 주둔시켜 일본군을 소탕하게 했다. 또한 전단 함선들은 추가적인 보급과 보충병들을 레닌스코예에서 실어 날랐다. 8월 13일에 2전대의 임무가 끝나자 아무르 분함대 본부에서는 송화강에서 푸친으로 가는 도중에 제2전대에게 제1전대를 지원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우수리 소전대의 경비정들과 해군육전대 병력, 지-부레이스크 전대의 모니터함 악티유니와 포함 크라스나야 주에즈다를 푸친에서 제1전대에 합류시킬 것을 명령했다.

소련군의 기습에 직면한 일본 제1방면군 사령부는 8월 9일 저녁에 제134사단 병력을 모두 지무쓰로 철수시키고 할 수 있으면 펭상까지 철수시키라고 명령했다. 8월 12일에는 제134사단의 전 병력이 후방에 만주국군 부대들만 남겨 두고 전부 지무쓰로 후퇴했다. 소련군이 푸친을 점령하고 지무쓰로 진격하자 제134사단은 지무쓰를 제7만주국군 여단에 맡겨 놓고 송화강을 통해 펭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8월 13일, 푸친에서 제1전대 본부와 제361소총병사단은 지무쓰로 진격할 것을 결정했다. 송화강 남안은 불어난 물로 전부 잠겨 있었다. 공병들의 집중적인 도로 확보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제한적인 공세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계속 험한 지형을 돌파하던 제171전차여단의 유류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직면한 소련군 지휘관들은 송화강을 통해 지무쓰를 공격함으로서 지무쓰를 향한 육상 루트의 일본군을 최소한으로 만들게 하여 일본군 저항을 최소한으로 받을 계획을 세웠다.

아무르 분함대 사령관 N.A 안토노프 소장은 8월 15일에 지무쓰 남쪽 85에서 70킬로미터 남쪽에 제1전단은 쿠호모 호수와 상시첸에 강화된 대대들을 상륙시키고 지무쓰로 투입될 일본군의 이동을 차단하고 제2전대는 지무쓰 근처에 제632소총병연대를 상륙시킬 것을 명령했다.

제1전대 함선들이 제349소총병연대의 2개 대대와 제83소총병연대의 혼성부대를 태우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2개의 도하점을 향해 나아갔다. 소련군은 그곳에 일본군이 없는 걸 확인했지만 수위가 높아진 강물이 지무쓰로 가는 도로에 범람하고 있는 것을 봤다. 결국 소련군은 지무쓰에서 4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후아추안에 내렸다.

8월 14일, 송화강 북안에서 제34소총병사단과 제203전차여단 전차들이 리엔치앙커우를 점령하고 송화강을 건너 지무쓰로 향했다. 하지만 강 너머의 일본군의 강한 저항 때문에 도하가 계속 힘들어지고 있었다. 제34소총병사단이 송화강 도하에 실패하고 제171전차여단과 제361소총병사단이 느릿느릿 진군하자 제2극동 전선군 사령관 푸르카예프 대장은 아무르 분함대에 지무쓰를 강에서 직접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날 저녁, 아무르 분함대의 모든 함선들이 지무쓰로 몰려들었다. 일본군은 강으로 통나무와 불타는 장애물을 던지며 소련 함선들의 접근을 막으려 했다. 소련 함선들은 장애물들을 치우면서 다음 날 아침까지 지무쓰 앞에 도달해 맹렬한 함포 사격을 퍼부었다. 0630시에 제1경비정대가 모니터함 레닌의 지원포격을 받으며 S. M. 쿠즈네초프 대위가 지휘하는 해군육전대 병력을 상륙시켰다. 해군육전대 병사들은 다른 수색부대 병력들과 합세하여 물에 잠긴 도로를 따라 일본군을 압박하며 지무쓰 주재소를 점령했다. 제632소총병연대의 나머지 병력들은 수색부대를 따라 일본군의 산발적인 저항을 물리치며 도시로 돌입했다.

그 동안 만주국군 제7여단이 지무쓰 동쪽의 민갈리로 후퇴해 소련군에게 항복 의사를 밝혔다. 1100시에 제3경비정대가 제632소총병연대 소속 2개기관총중대를 민갈리로 보내 만주국군 3,500명을 인솔하게 했다. 밤이 되자 지무쓰는 완전히 소련군에게 들어왔고 제15군의 주력은 지무쓰에 주둔하여 간만에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제34소총병사단은 저항하는 소수의 일본군을 일소하고 도시 북쪽에서 진입해 본대와 합류했다. 잠깐 쉰 제15군은 송화강으로 후퇴하는 제134사단을 추격해 하얼빈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4.4. 제2적기군의 공세[편집]


제2극동 전선군의 우익에서는 제2적기군이 아이훈과 순우 요새 지대 공격을 위한 배치를 끝냈다. 제2적기군 공격 지역의 중앙과 좌익에 군 사령관 M.F. 테레힌 중장은 제3, 12소총병사단과 제73, 74전차여단으로 이루어진 작전 집단을 구성했다. 작전 집단은 콘스탄티노브카에서 출발해 아무르강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해 순우 시를 확보하고 요새 지대를 고립시킨 후 더 남쪽 페이안과 하얼빈으로 진격할 것이었다. 두번째 작전 집단은 제396소총병사단, 제386산악소총병연대, 제258전차여단으로 구성되어 블라코보쉬첸스크에서 진격해 아이훈 요새 지대를 점령하고 난쳉을 향해 남쪽으로 진격한 뒤 궁극적으로 치치하얼에 다다르는 걸 목표로 했다. 두 작전 집단의 벌어진 틈은 제101요새주둔군이 매꾸며 아무르강 도하를 지원할 것이었다.

제2적기군이 상대할 일본군은 5개 대대로 이루어진 제135독립혼성여단과 제123사단이었다. 제123독립혼성여단은 본대를 아이훈에, 1개 대대를 샨센푸에, 1개 중대를 차오시에 두었다. 제123사단은 순우에 사령부를 두고 3개 연대를 도시 북쪽의 순우 요새 지대에 배치했는데 제269연대의 1개 대대 병력을 순우에서 동쪽으로 오는 길에 배치했고 기타 소부대들을 아무르 강 도하점에 배치했다. 다른 일본군과 달리 2개 제대는 항상 소련의 전면적 공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훈련과 근무를 하고 있었으며 전투태세와 사기가 높았다.

작전 개시 이틀 동안 제2적기군은 위치에서 계속 공격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동안 제2적기군은 아무르강 유역의 제한된 정찰활동만 했고 정찰대는 일본군의 강한 공격을 받아야 했다. 주 병력은 수색부대에서 12에서 18킬로미터 뒤에 떨어져 있었다. 8월 10일, 푸르카예프 대장은 제2적기군에 8월 11일에 공세를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공세 목표인 아이훈, 순후, 흐선호에의 공세에 아무르 분함대의 지-부레이스크 전대가 지원할 것이었다. 8월 10일 늦은 시간에 제2적기군 병력이 공격을 개시했다.

8월 11일 이른 아침, 작전 집단의 선견대들이 준비 포격의 지원을 받으며 헤이호, 아이훈, 그리고 홀로모칭에 상륙해서 일본군 부대들을 상대했다. 선견대들이 일본군을 쫓아내고 아무르강 선착장들을 장악하자 본대가 도하를 시작했다. 제3, 12소총병사단은 각각 1개 연대를 남겨둔 채 콘스탄티노브카 서쪽과 동쪽에서 도하를 시작했으며 제396소총병사단과 제386산악 소총병연대는 블라고베쉬첸스크에서, 제101요새주둔군은 블라고브쉬첸스크 남쪽에서 도하를 시작했다. 보급 물자들을 날라야 하기 때문에 도하에는 5일의 시간이 할당되었다. 다소 느린 도하 속도 때문에 지휘관들은 부대를 소규모로 축차투입해 전투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8월 12일에 후방에서 충원 병력이 도착하는 동안 선견 부대들은 홀로모칭 남쪽과 아이훈 북쪽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다음날 8월 13일, 공격을 위한 충분한 병력이 집결했다. 제3소총병사단은 제70소총병여단과 제74전차여단 소속 전차들을 선두에 세우고 순우 북동쪽 고지대에 주둔한 일본 제269연대의 무라카미 대대를 돌파했다. 순우 동쪽에서 제12소총병사단 소속 제214소총병연대는 치코에서 아무르강을 건너 순우로 가는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진격하며 일본 제269연대 소속 히라미 소좌의 제3대대를 상대하며 일본군 좌익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 동안 제396소총병사단과 제258전차여단, 제668산악 소총병연대는 아이훈 요새 지대의 제135독립혼성여단을 밀어붙였다. 제2적기군의 소규모 부대들이 주공이 벌어지는 더 북쪽인 훔마와 산타오카에 도하에 이곳의 소규모 일본군을 정리했다.

8월 14일과 15일 동안 일본군 요새 지대를 차지하기 위한 격전이 벌어졌다. 제73전차여단의 지원을 받으며 무라카미 대대를 선우탄 지역에서 분쇄하고 히라미 대대를 순우 동쪽의 난양 언덕으로 몰아붙이며 순우 요새 지대의 일본군 제123사단 본대를 공격했다. 두 사단이 요새 지대에서 일본군의 저항을 힘들게 물리치는 동안 제74전차여단은 1개 소총병중대, 1개 포병대대, 1개 대전차연대를 증강받아 남쪽으로 달려 순우를 우회하고 페이안으로 진격했다. 제396소총병사단과 제368산악소총병연대는 제135독립혼성여단을 아이훈 요새 지대에 가둬 버렸다. 작전 집단은 선견대인 제258전차여단을 넨쳉 도로를 따라 남서쪽으로 보냈다. 작전 집단의 모든 제대들은 일본군 요새 지대의 야포들을 정리하고 선견대를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장맛비 때문에 길 상태가 더 안좋아져 진격에 차질이 생겼다. 진격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제2적기군 사령부는 2개 공병대대를 각 선견대에 할당했다. 두 작전 집단은 150킬로미터의 틈을 내며 남쪽으로 진격했다.

아이훈 요새 지대와 순우 요새 지대의 일본군은 소련군의 포위 기동에 맞서 줄기차게 반격을 시도했다. 이에 테레힌 중장은 더 거센 포격과 제18혼성항공군단의 맹렬한 공습으로 대응했고 결국 순우 요새 지대는 17일과 18일 사이에 완전히 무너졌으며 17,061명의 일본군이 항복했다. 아이훈 요새 지대도 제396소총병사단 소속 제614소총병연대와 제101요새주둔군에 맞서 8월 20일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4,520명의 제135독립혼성여단 병력들은 항복하고 말았다.

아이훈과 순우가 무너지자 제2적기군의 선견대는 남쪽으로 천천히 진군했다. 8월 20일과 21일에는 넨쳉과 페이안을 점령했다. 관동군이 항복하자, 제2적기군은 더욱 여유를 부리며 치치하얼과 하얼빈으로 행군했다.


4.5. 제2극동 전선군의 공세 종결[편집]


제15군 병사들은 송화강 남쪽을 따라 산싱으로 쳐들어갔다. 아무르 분함대가 제632소총병연대를 도시에 상륙시킬 동안 함대 소속 경비정들은 산싱 일대의 정찰을 끝냈다. 8월 19일에 이 병력들은 산싱을 확보하고 여기로 도망갔던 일본군들을 포로로 붙잡았다. 제15군은 송화강을 따라 진격을 계속해 8월 21일에는 제1극동 전선군 병력들과 하얼빈에서 합류했다. 20일 동안의 작전에서 제15군은 700킬로미터를 전진했다.

좌익에서 제5독립소총병군단은 자오호, 파오칭, 폴리를 확보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 제390소총병사단과 제172전차여단이 공세 선두에 섰고 제35소총병사단이 후속했다. 8월 9일 0100시, 강습부대들과 수색부대들이 우수리 강을 건넜다. 아무르 분함대 제3전대가 상륙을 지원했다. 강습부대들은 일본 제135사단 소속 제369연대의 1개 중대병력과 교전을 벌였다. 9일 아침에 군단 선견대가 30분에서 50분에 걸치는 준비 포격 이후 강습부대들을 후속해 우수리강 북쪽에서 자오호로 통하는 다리를 확보했다.

주력 병력은 다음 날에 다리를 건너 왔다. 바지선, 증기선, 보트 등을 동원하여 아무르 분함대는 제172전차여단을 50분에 걸쳐 도하시켜 8월 10일에 있을 공세를 준비했다. 10일에 제390소총병사단이 자오호 요새 지대와 자오호 시를 점령하고 다음날 제172전차여단을 선두로 하여 제5소총병군단은 파오창을 향해 남서쪽으로 진격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행군은 힘들었다. 14일에 제172전차여단은 증강되어 파오창에 도착했고 일본군 주둔병들을 물리친 다음 폴리로 진격했다. 8월 19일 제5독립소총병군단 선견대가 폴리에서 제35군 병력들과 합세했다. 제5독립소총병군단은 진격하면서 2,786명의 포로를 잡으며 폴리에 도달함으로서 작전을 마쳤다.

한편 8월 18일에 쿠릴 열도와 사할린 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쿠릴 열도 상륙은 제16군 소속의 L.G. 체레미소프 중장이 지휘하는 제87소총병군단과 A.R 그네츠코 소장의 캄차카 방어구, D.G. 포노마레프 해군 대령의 페트로파블로스크 전대, 그리고 제128공수사단이 맡았다.

그곳의 일본군은 후사키 츠츠미 중장의 제5방면군으로 쿠릴 열도의 시아시코탄, 파라무시르, 슘슈, 오네코탄의 제91사단, 시무시르의 제42사단, 마투아의 제41독립연대, 우루프의 제129독립여단, 그리고 이투루프, 쿠나시르, 시코탄에 주둔한 제89사단이었다.

8월 28일에 소련 해군 기뢰부설함 2척이 작전개시일에 G.I. 브룬슈타인 중령이 이끄는 제113해군육전대의 병력 일부를 이투르프 섬에 상륙시켜 상륙거점을 마련했다. 같은 날에 제87소총병 군단의 병력이 어뢰정, 기뢰부설함, 수송선에 분승해 쿠나시르, 시코탄과 시보츠, 타라쿠, 우리, 아키우리, 수이세토의 작은 섬들에 상륙했다. 이투루프 섬 상륙은 우루프 섬에 상륙한 제355소총병사단 병력이 시행했다.

해양 상륙작전 경험이 케르치 반도 상륙작전 이외에는 없었던 소련군은 상륙에 많은 난항을 겪었다. 그리고 일본군 특공을 상대해 본 적이 없는지라 출동한 일본 특공기의 가미카제 공격을 처리하는 데 애를 먹었다. 어쨌든 소련군이 쳐들어오자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다고 판단한 후사키 중장과 일본 주둔군 20,000명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항복했다.

8월 22일과 9월 4일 사이 소련군은 쿠릴 열도를 더 이상의 저항 없이 손에 넣었다.

북사할린의 제16군 소속 제56소총병군단은 남사할린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사할린 남서 해안에서는 해군육전대의 토루-에스토루 상륙작전이 병행되었다. 남사할린은 8월 25일에 소련군 손에 넘어왔다.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점령한 소련군은 그 다음으로 홋카이도에 진군할 예정이었다. 허나 미국의 압력과 소련군 수뇌부의 반대, 남사할린과 쿠릴 전선에서 발생한 예상 외의 출혈이 겹쳐 스탈린은 작전을 취소했고 홋카이도는 소련의 침공을 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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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쑨원의 중화민국과 소련의 협력이 활발해지자 붙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