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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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가 생성된 전투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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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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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루거우차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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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상하이 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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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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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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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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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 대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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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동계공세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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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힌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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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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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단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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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창 해전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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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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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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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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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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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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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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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셜-길버트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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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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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 전투
공격측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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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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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우드 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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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론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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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틀 특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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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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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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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류샨 열도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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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다 트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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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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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라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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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나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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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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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니카우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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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솔로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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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페란스 곶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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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크루즈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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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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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사파롱가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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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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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독 잠수함 합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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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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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방가라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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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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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건빌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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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스터 곶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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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일스톤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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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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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타통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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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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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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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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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렐리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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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가우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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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보에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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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항공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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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탈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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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 만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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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본토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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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폭탄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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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리 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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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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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대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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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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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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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레 군항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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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탕 굽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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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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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전략 공세 작전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파일:몽골 인민공화국 국기.svg 몽골 인민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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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할린 침공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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슘슈 섬 전투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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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구분은 전투 및 교전 발생 일자 기준, 전투 기간(및 결과)는 개별 문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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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99
||<tablewidth=100%><width=10%><colbgcolor=#536349><rowbgcolor=#536349><tablebgcolor=#FFF,#1f2023> {{{#FFF '''연표'''}}} || {{{#FFF '''사건'''}}} ||
|| [[제2차 세계 대전/연표#1936년|{{{#FFF 1936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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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국공합작#s-3|제2차 국공합작]]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8월}}} [[상하이 전투]]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12월}}} [[난징 전투]]([[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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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오스트리아 병합]]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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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하산 호 전투]]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9월}}} [[뮌헨 협정]] ||
|| [[제2차 세계 대전/연표#1939년|{{{#FFF 1939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5월}}} [[할힌골 전투]]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9월}}}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11월}}} [[겨울전쟁]] ||
|| [[제2차 세계 대전/연표#1940년|{{{#FFF 1940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4월}}} [[노르웨이 침공]]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9월}}} [[삼국 동맹 조약]]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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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 대전/연표#1941년|{{{#FFF 1941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6월}}}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
|| [[제2차 세계 대전/연표#1942년|{{{#FFF 1942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4월}}} [[둘리틀 특공대]]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
|| [[제2차 세계 대전/연표#1943년|{{{#FFF 1943년}}}]]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9월}}} '''[[이탈리아 전선(제2차 세계 대전)|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이탈리아 내전]] 발발)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
|| [[제2차 세계 대전/연표#1944년|{{{#FFF 1944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4월}}} [[대륙타통작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작전]] · [[필리핀 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7월}}} [[금본위제도#s-5.3|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8월}}} [[바르샤바 봉기]]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9월}}} [[마켓 가든 작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10월}}} [[레이테 만 해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12월}}} [[벌지 전투]] ||
|| [[제2차 세계 대전/연표#1945년|{{{#FFF 1945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5월}}} [[승리의 날#VE Day|'''나치 독일의 항복''']]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7월}}} [[포츠담 회담]]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의 항복|일본 제국의 항복]]'''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0px 5px; border-radius: 4px; background: #999; color:#fff; font-size: 0.88em"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2> {{{-1 {{{#FFF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각주]

말레이 해전
Naval Battle of Malaya
マレー沖海戦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Prince_of_Wales_and_Repulse.jpg
▲ 공격받고 있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리펄스[1]
날짜
1941년 12월 10일
장소
남중국해
교전국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일본 제국|

일본 제국
display: none; display: 일본 제국"
행정구
]]

지휘관
파일:영국 국기.svg 톰 필립스 경
파일:영국 국기.svg 존 리치
파일:영국 국기.svg 윌리엄 테넌트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오자와 지사부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미야우치 시치조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쇼지 하치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나카니시 니치
전력
전함 1척[2]
순양전함 1척[3]
구축함 4척
뇌격기 34기
공격기 51기
정찰기 3기
피해 규모
전함 1척 침몰
순양전함 1척 침몰
840명 전사
항공기 4기 손실
항공기 28기 손상
수상기 2기 실종
18명 전사
결과
일본 해군의 승리
영향
태평양에서 영국 왕립해군의 영향력 상실, 일본의 남중국해 제해권 장악

1. 개요
2. 명칭에 대해
3. 배경
4. 진행 과정
4.1. 영국 해군의 전략 기동
4.2. 일본군의 남방작전
4.3. 영국 해군의 오판
5. 결과
6. 평가
7. 여담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태평양 전쟁 초기인 1941년 12월 10일에 일본군의 남방작전에 대응하고자 출격한 영국 해군 Z기동함대와 이를 요격하기위해 나선 일본군 해군 항공대 사이에 벌어진 해전. 제공권을 잃은 해군이 어떻게 되는지를 확실히 보여준 전투이며, 실론 해전과 더불어 영국 해군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이다.

또한 비스마르크 추격전, 야마토 격침과 더불어 해전의 주도권이 전함을 비롯한 거함에서 항공모함과 함재기/항공기로 넘어간 것을 상징하는 해전이기도 하다.


2. 명칭에 대해[편집]


영미권에서는 해전 명칭을 붙이지 않고 'Sinking of Prince of Wales and Repulse(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의 격침)'으로 주로 표현한다.

이렇게 적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 Naval Battle로서 성립하려면 함대함 교전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일본과는 달리 영국은 공군이 독립되어 있었고, 미국 역시 사실상 독립한 상태인데다가 해군 항공 주특기가 주요 분야로 있었기 때문에, 영미권에서 항공모함의 기여도가 없거나 미미한 상태에서의 항공기 VS ETC라면, Air Strike and Result 로 간주된다.[4] 반면 일본은 항공대가 그만한 지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육군 혹은 해군의 것으로 쳐서 '해전'이 된다. 영미권에서 이 문제는 생각보다 까다롭다. 왜냐하면 Naval Battle이라고 하면 '뱃놈'들이 뭘 해줬는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고, 그런게 없는데도 해전이라 부른다면, 예나 지금이나 항공 주특기의 독립성에 시비를 거는 것이거나, 파일럿들이 X빠지게 해놓은 성과에 수상함들이 숟가락을 올리는 것이기 때문. 이러한 이유로 해전이라 부를 것 같은데 해전이라 부르지 않는 다른 예시로는 과달카날 해전의 '막간극'이라든가[5], 포클랜드 전쟁의 셰필드 격침을 들 수 있다.[6] 같은 이유로, 노르웨이 침공에서는 해군 함선없이 육상 포격으로 격침시킨 블뤼허의 격침을 해전으로 보지 않는 반면, 구축함 VS 중순양함의 교전에 불과했던 글로웜의 최후는, Final Battle이라고 불러준다.

다른 두번째는 Battle이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의 문제다. 즉 Battle은 양자가 교전에 참여한 상태(Engagement)[7]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공방전(Decisive Results)이 되어야 한다. Engagemet만 있고 Decisive Results가 없는 경우, 굳이 이것들을 따로 분류해야 하는 경우에 skirmish라고 부른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과는 달리, 잠수함들이 항공모함이나 전함을 격침시켜도 Battle이라는 꼬리표를 절대 안붙여주는 이유는 당연히 격침된 대상이 잠수함을 대상으로 Engagement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침공의 HMS 글로리어스가 격침될때, 호위함이었던 Acasta, Ardent의 교전은 Engagement라고 표현하지만. Glorious는 그냥 Engagement없는 sinking이다.
Decisive Results 의 경우는 어느 정도 가치판단이 있을 수 밖에 없으므로, 이 부분에서 서로의 평가가 다르다면 함선끼리 교전했을지라도 명칭이 다를 수 있다. War가 Decisive Results를 낳는 일련의 Battle로 구성된다고 볼때, 페낭 해전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반면 그 기준이 전과라고 친다면, 일본 기준으로 해전이 될 것이다. 글로웜의 경우는 더 적절한 예시인데, 큰 흐름에 영향이 없다고 보는 입장에서는[8] Action이라고 평가하고,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이 본격적으로 충돌하게 되면서, 어드미랄 히퍼를 강판시키는 바람에 1차 나르빅 해전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면 Battle로 간주하게 된다.

그 결과, 말레이 해전은 일본 기준으로는 해전이지만, 영미권 기준으로는 영국의 태평양 영향권 상실이라는 Decisive Result가 확실하긴 하나 함대함 교전이 아닌 수상함 VS 항공기의 대결이고, Z부대가 작전 목표를 가지고 일본 항공 세력과 충돌한 것이 아닌 일방적인 공습을 당한 것이므로, 이 전투는 그냥 파일럿들의 Trophy로서의 Sinking이 된다. 서로의 호칭을 바라보는 경우, 일본에서 보기에는 전과를 축소한걸로 보이지만, 영국 기준에서는 일본은 부사관 파일럿들이 해군 장교 지휘 하에 종속되어 있었고 독립성이 없었으니 그렇게 부르겠네... 정도로 생각하게 된다.

덧붙여서 저러한 차이를 잘 알 수 없었던 일부에선 서구 측에서 전투의 결과로 자신들이 당한 일방적인 패배를 정확히 묘사하지 않고 의미축소 했다는 오해가 생긴 적도 있다.


3. 배경[편집]


1941년 10월에 일본에서 온건한 노선을 밟던 고노에 내각이 몰락한다. 일본과의 전운이 감돌자, 영국 전시 내각에선 태평양 영국령의 방위를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한다. 이때 해군에서는 넬슨급 전함리벤지급 전함을 보내는 것을 제안하였으나, 넬슨은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고, 로드니는 승조원 휴가에 소규모 개장이 예정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현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리벤지급 전함과 넬슨급 전함은 속도도 느렸기 때문에[9] 이탈리아가 버티고 있는 지중해를 포기하고 희망봉을 돌아 싱가포르로 간다면, 제때 도착할 수 있을지나 문제였다. 타란토 공습이 성공하긴 했지만 아직 이탈리아 해군은 지중해 항로의 큰 위협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칠의 제안을 따르지 않는다면 영국은 답이 없는 두 가지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다. 하나는 지중해를 통해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이탈리아 해군&공군과 한판 붙고 나서 손상을 겪지 않은 함대만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것인데, 이건 추축국에게 영국 함대가 대거 동아시아로 이동했다고 광고까지 하는 꼴이 되고, 반면 희망봉을 통해서 빙 돌아가는 루트는 함대 자체의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지만, 정작 함대가 일본이 침공하는 시점에 제때 도착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다수의 전함을 동원한 영국 해군은 무력하게 패배하진 않겠지만, 태평양의 영국령들은 영국 해군이 도착하지 못한 탓에 일본 해군과 싸우지도 못하고 굴복하게 될 것이었다. 덧붙여서 이때 리벤지급 전함이 지중해로 갈지 희망봉으로 갈지는 논의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10월 20일, 내각에서는 논의 끝에 리벤지급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가용한 전함이던 킹 조지 5세급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를 남아프리카 케이프 타운으로 보내기로 한다. 이후 극동의 상황을 봐가면서 이 전함을 다시 싱가포르로 보낼지 여부를 결정할 것이었다. 혹시 모를 본토의 위기가 온다면, 이 전함을 다시 영국으로 불러들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자, 일본군이 서방 국가들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철수하기는 커녕 프랑스인도차이나를 침공하는 막장 행보를 보여주었다. 이제 영국 내각에서 극동에서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해야하는 시점이 왔다. 여기서 해군참모총장이던 더들리 파운드 경의 계획은 넬슨급 전함인 넬슨과 로드니, 그리고 리나운급 순양전함 리나운리벤지급 전함 4척을 파견하여 9척의 일본 전함과 맞서는 것이었고, 이는 최신예 전함인 킹 조지 5세급 전함과 예비용 기동 부대 역할의 리펄스를 독일의 전함 티르피츠샤른호르스트의 2척 및 이탈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본토에 남겨두고, 그를 제외한 영국의 모든 전함을 투입하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하지만 독일, 이탈리아의 해군과 치고받는 와중에 그런 계획이 통과될리가 없었다. 당장 호송 전단 하나당 전함이 2~3척씩 투입되는게 현실이었다. 그래서 애초에 더들리 본인도 통과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의문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으며, 10월의 계획을 조금만 바꿔서 동어 반복하며 내각의 군사적 비 전문성을 조롱한게 아닌가 하는 말도 있다.

처칠은 이에 반대하고 신형 전함인 킹 조지 5세급 1척과 리나운급 순양전함 리펄스,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인도미터블로 구성된 최신예 주력함들을 소수 정예로 파견하는 것만으로도, 통상 파괴전을 수행하려고 하는 일본 해군을 상대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파병 반대파와 해군 참모 총장을 설득하기 위해, 북대서양과 지중해에서의 독일과 이탈리아의 활동이 모든 함대를 영국 본토에 두어야 할 정도로 활발하지 않을 것이어서 함대를 보낼 여유가 있으며, 해당 함대가 일본의 작전에 잘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을 보였다. 또한, 처칠 본인은 구형 전함은 최신예 주력 전함에게 질 수 밖에 없는게 상식이던 당시의 관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이 자신감은 과거의 나온 서적에서는 꽤나 조롱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실은 이미 이 시기에 울트라 작전을 통해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고, 일본의 암호 해독에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해군의 기동을 미리 알 수 있으므로 교전 선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 자신감이었다.[10][11] 그리고 실제로도 티르피츠의 출항 여부를 예보하는 용도로 써먹고도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처칠은 파병할 생각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군인들은 보급이 나오고 그걸로 싸워서 이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내각은 그 보급을 만들어야 하고, 국민들에게도 나누어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원과 자본이 필요하다. 영국의 경우 아시아 지역의 주요 식민지는 인도, 버마, 말레이시아, 호주뉴질랜드가 있었고, 이들을 통제하는 핵심 거점이 싱가포르였다. 그리고 거기서 중국의 해안선을 타고 올라가면 중국과의 무역을 위한 홍콩상하이가 있었다. 일본과 전쟁을 하는 경우, 홍콩, 상하이를 지킬 것이라는 기대는 아무도 하지 않았으며, 실제로도 군대가 지키지 않고 싱가포르로 철수해버린다. 하지만 싱가포르, 인도, 버마, 호주는 사수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인적 물적 자원의 역내 교역을 할 수 없고, 영국 본토로 자원도 자본도 인력도 들어오지 않게 된다. 그러면 당장의 전투는 이기더라도 전쟁은 지는 꼴이니, 영국령을 내줄 것이라면 애초에 왜 함대를 보내는지조차 의문스럽게 된다. 그리고 이 우려는 현실이 되어, 말레이 해전의 패배, 이탈리아의 지중해 봉쇄,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모든 영국의 식민지 교역로가 폐쇄되었고, 영국은 미국에게 카리브 해의 섬들을 내주며 북미 대륙에 생명선을 이은 채로 연명해야 했다. 그리고 누적된 전쟁 적자 때문에 전후에는 열강국의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그러니 처칠은 그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 아시아에 해군을 보내야 했고, 일본의 진공 속도에 맞춰서 가용할 수 있는 주력함 중에서 가장 빠른 것들을 골라내서 태평양에 보내야했기에 앞서 말한 소수 정예의 파견을 주장한 것이다.

4. 진행 과정[편집]



4.1. 영국 해군의 전략 기동[편집]


결국 처칠의 주장대로 톰 필립스 경을 사령관으로 함대[12]를 싱가포르로 파견했다. 10월 23일에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구축함만 데리고 홀로 출발해서, 11월 16일에 케이프 타운에 도착한다. 이 시점에 이미 지침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보급을 받고 나서 싱가포르를 향해 바로 떠나게 된다. 함대는 11월 28일에 실론 섬 콜롬보에서 보급을 받기 위해 기착했고, 여기에 주둔하고 있던 리펄스가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합류한다.

그런데, 당초에 함대에 합류하기로 했던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인도미터블은 11월 3일에 카리브 해에 있는 자메이카 킹스턴 항구에서 프린스 오브 웨일즈 함대와 합류하기 위해 출항하다가 항구에서 육지 위로 배가 올라가버린 상태였다. 인도미터블은 미국 버지니아 주 노퍽에서 12일간 수리를 해야했고, 함대에 합류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보급을 받은 케이프 타운에는 항공모함 허미즈가 별다른 임무가 없는 상태였지만, 영국 해군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프린스 오브 웨일즈만 파견한다.[13]

그리고 그렇게 항공모함 없이 인도양에서 결집한 함대는 1941년 12월 2일에 싱가포르에 입항했고, 여기서 Z함대(Force Z)가 결성된다. 이 함대는 내각의 지시에 따라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며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영국령으로 침입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후 리펄스는 2척의 구축함을 데리고 호주로 출발하지만, 싱가포르 방어를 위해 회항한다.

처칠은 '일본 해군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2척의 전함을 싱가포르로 보냈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한다.

4.2. 일본군의 남방작전[편집]


12월 7일(싱가포르 시간으로 8일. 이후 서술은 싱가포르 시간.)에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했고, 영국에도 그 소식이 전해졌다. 언뜻 생각하기에 독일과 사투를 벌이던 영국에게는 좋은 소식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처칠과 영국 전시 내각 역시 Z 함대의 전함 2척만으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지키면서 일본 해군을 저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처칠은 싱가포르가 공격받는 경우에는 진주만에 있는 미 해군 전함들의 도움을 받고, 그렇지 않다면 영국 전함을 진주만으로 보내서 미국 태평양 함대의 해군력을 증강시키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는데, 도와달라고 하려 했던 그 전함들이 진주만에서 거진 절딴난 것이다.[14][15]

진주만 공습이 성공하자, 홍콩과 필리핀에 대한 공세를 시작으로 일본군의 남방작전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중국 본토의 육군과 바다의 해군으로 홍콩을 칭칭 둘러싸고 영국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진주만 기습이 끝나자마자 선전 포고 없이 8일부터 공세를 벌인다. 영국군은 홍콩에 주둔중이던 함대를 전부 싱가포르로 철수시킨 상태였으나, 홍콩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 육군, 도와주기 위해 도착한 캐나다 육군, 그리고 예비역 지역방위대인 홈가드는 일본군과 사투를 벌였으며, 25일이 되어서야 홍콩이 함락된다.

필리핀의 미군도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결국 3월 12일에 더글라스 맥아더가 호주로 탈출하고, 6월 9일에 필리핀이 함락된다.

일본군은 말레이시아의 코타바루에 상륙했고, 말레이 반도의 영국 공군기들을 차례로 파괴해 나갔다. 동남아에 주둔중인 영국 공군은 전투기의 주종이 F2A 버팔로로 성능이 크게 뒤떨어지는다가 숫자도 부족했고, 조종사들의 실력도 중일전쟁을 치르고 온 일본 조종사들에 비해 보잘 것 없었다.[16] 게다가 일본군의 남방 작전은 기밀 사항으로 꽁꽁 숨겨두었던 일본 육군의 Ki-43 하야부사가 데뷔한 전투였으니,[17] 항공기의 전투 교환비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말레이 반도의 영국 공군력은 사실상 소멸하고 만다.

홍콩과 필리핀, 말레이에 대한 공세와 거의 동시인 8일 아침에 싱가포르도 일본 항공기의 공습을 받았다. 그리고 싱가포르를 공습한 항공기 부대로부터 싱가포르에 전함 2척이 정박중이었다는 사실이 보고되자, 당시 남방함대사령장관이었던 오자와 중장은 제22항공전대에 즉시 공격명령을 내린다. 제22항공전대는 처칠의 공개발표를 듣고나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Z 함대를 저격하기 위해 G4M 폭격기 36대를 증강시켜 준비한 항공기 부대였다.


4.3. 영국 해군의 오판[편집]


현지에 있던 Z 함대 지휘관이었던 톰 필립스 제독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의 영미연합군 수뇌부와 미팅을 마친 상태였고, 2척의 전함으로는 어림도 없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하지만 말레이시아로 침공해 들어오는 일본군의 공세를 저지하라는 지시를 받고, Z함대는 싱고라에 있을 것이라 예상된 일본 함대를 저지하기 위해 출항해야 했다.

다만 공군으로부터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제독은 상황을 너무나 낙관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군의 항공기가 대양에서 작전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전투가 벌어진다 해도 함선들이 일본 항공기의 공격 정도는 무난히 막아낼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18] 사실 이러한 오판을 마냥 비난할수도 없는 것이, 말레이 해전 직전까지 "작전 항행 중에 항공기의 공습으로 침몰한 전함"은 단 한척도 없었다. 진주만 기습에서 보듯이 항공기에 의한 전함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 까지는 인지하고 있었으나 원양에서 작전 항행할 경우 비행기의 항속거리 등에 따라 공습이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항공기의 구조와 조종사의 안전을 희생해가면서까지 항속거리에 목숨을 건 데다가[19] 이미 실전경험까지 풍부하게 장착한 일본.

제22항공전대는 명령에 따라 오전에 바로 정찰기를 출격시켜 Z함대를 찾기 시작했다. 정찰기는 영국 전함이 싱가포르에 정박중이라는 오보를 전했고, 일본 항공대는 그에 따라 폭탄을 장비하고 출격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오후 3시에 I-65 잠수함이 Z함대를 발견하고는 위치를 보고했고, 항공대는 폭탄 무장을 어뢰로 교체하는데 시간을 낭비하느라 출격했을때는 이미 오후 7시가 넘은 시점이었다. 이때 Z함대는 항공 엄호 없이는 작전수행이 힘들 것이라는 해군 중장 필립스 제독의 판단에 따라 이미 싱고라 공격을 포기하고 싱가포르로 회항하는 중이었다. 한편 오후 5시 30분에 보고를 받은 오자와 중장은 중순양함 5척을 포함한 수뢰전대를 이끌고 Z함대의 요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고 스콜과 같은 날씨때문에 Z함대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 되자 영국 함대는 일본 항공대를 피해 싱가포르로 귀항할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일본 항공대는 자국 중순양함 쵸카이를 프린스 오브 웨일스로 착각하고 조명탄을 발사하는 등 수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20]

10일, 일본군은 새벽이 밝자마자 정찰기를 띄워 Z함대를 찾기 시작하면서 발견되기도 전에 공격대를 미리 발진시켜놓고 영국 함대가 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에 Z함대는 일본군 잠수함 I-58에 의해 발각되었으나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 무렵 Z함대는 쿠안탄 해안에 일본군 함대가 있다는 오보를 받았다. 필립스 중장은 무전을 받고는 보고 없이[21] 쿠안탄으로 향했고, 함대가 쿠안탄으로 이동하겠다는 보고를 받지 못한 사령부는 항공엄호를 보내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서 추가하자면 필립스 제독은 출항하기 전 10일 낮 동안 싱고라 상공에 전투기 엄호를 요청하였다.

그후 8일에 출항한 Z함대는 5시간후인 오후 10시 43분에 전문을 받았다. 그 내용은 10일에는 전투기에 의한 엄호는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싱고라 상공이라는 말이 빠져있었다. 이를 본 필립스 제독은, 상황이 매우 나빠 싱고라 상공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든 항공엄호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항공엄호를 요청하지 않고 무선침묵을 지켰을 가능성이 높았다.[22] 이는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어뢰에 맞고 나서도 전투기의 엄호를 요청하지 않고 오히려 구축함 파견을 요청한 것을 볼때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히려 교전 1시간후에 리펄스의 함장이 필립스 제독이 아직도 항공지원을 요청하지 않은 것을 뒤늦게 알고 경악하며 긴급히 영국 공군에 항공지원을 요청했지만 벌써 적절한 시기를 놓친후였다.

만약 항공요청이 제대로 되었다면 영국함대는 생존할 가능성이 있었다. 일본 해군 항공대는 항속거리 문제로 호위 전투기가 전혀 없이 베트남 사이공에서 공격기들만 출격했기 때문에, F2A 버팔로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오인 정보로 인해 해안을 수색하는데 또다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한 Z함대는 쿠안탄에 일본 함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퇴각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쿠안탄을 비행하던 일본군 정찰기가 그들을 발견한 뒤였다.


4.4. 영국동양함대궤멸[편집]


12월 10일 오전, 일본군 정찰기 중 1기가 쿠안탄에서 끝내 Z 함대를 발견하여 G3M[23] 폭격기들이 2차례에 걸쳐 출격했고, 오전 10시 및 11시 13분경에 각기 폭격을 실시했다. 이 폭격에서는 단 1발만이 리펄스의 4번 포탑에 명중했으며, 그나마도 별다를 피해를 주지 못했다. 또한 이 폭격을 기점으로 영국 함대는 일제히 대공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진짜 타격은 뇌격기 편대에 의해 이뤄졌다. 17기의 일본군 G3M 편대가 11시 40분경에 뇌격을 실시했고, 여기서 어뢰들 중 1기가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B번 엔진실에 명중해 침수됐고, 한쪽 스크류를 잃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속력은 최대 항속의 절반인 16.5노트(30km/h)로 떨어졌다. 12시 20분경에 G4M편대가 추가로 뇌격을 실시했다. 상처입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어뢰 3기가 적중했고, 리펄스에도 어뢰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리펄스는 우수한 조함 실력으로 어뢰들을 회피했지만 거기까지였다. 1발의 어뢰가 좌현에 명중한 것을 시작으로 3발 이상의 어뢰가 리펄스를 강타했다. 안타깝게도 리펄스는 1차대전때 건조된 노령함인데다가 자매함 리나운과 달리 대개장도 받지 않아서 어뢰공격을 받아도 버텨낼 벌지도[24], 현대적인 장갑도 갖추지 못했다. 결국 난타당한 리펄스는 6분만에 함수쪽으로 전복되어 침몰했다. [25]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단 하나의 스크류만이 남은채 끈질기게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12시 40분경에 추가로 달려든 일본군 폭격기들이 갑판에 폭탄을 명중시켰고, 부상당해 쓰러져 있던 수많은 영국 승조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더 이상의 저항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필립스 제독은 퇴함을 명령했고, 몇분 지나지 않아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침수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이 시점에서 전멸 직전에 이른 Z함대는 무선침묵을 깨고 모스 부호로 SOS 신호를 타진했다. 이에 깜짝 놀란 호주 제453비행중대의 F2A 버팔로 10대가 부리나케 달려와 오후 1시 15분에 도착했지만 이미 일본 항공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물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과 리펄스의 잔해를 구경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참고로 이들이 조금만 더 빨리 출격했다면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격침을 피할 수 있었다는 말이 있으나, 애초에 F2A 자체가 좋다고 말하기 어려운 전투기인데다가, 머릿수가 너무 적어서, 이들이 조금 더 일찍 도착했어도 Z함대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다행히 호위구축함들이 신속히 구조작업을 했기 때문에 많은 승조원이 구조될 수 있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구축함 익스프레스가, 리펄스의 승조원들은 구축함 일렉트라와 뱀파이어가 구조했다.

필립스 제독은 만류하는 참모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배를 빠져나가지 않고 배와 운명을 함께 했다. 부하들에게 건낸 필립스의 마지막 유언은 "굿바이." 함장 존 리치 대령[26]은 마지막까지 퇴함을 지휘하다 최후의 순간 탈출했지만, 함이 침몰하면서 발생한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목이 부러져 전사했다.[27]

한편 일본은 1941년 12월 10일 당일 영국동양함대궤멸이라는 군가를 만들어 방송하며 전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5. 결과[편집]



영국 해군이 자신있게 파견했던 함대의 궤멸은 영국 및 연합국에게 충격을, 일본에게는 환희를 안겨줬다. 총리 윈스턴 처칠은 아침에 전화를 받기 위해 깨어나서, 그 전화 통화로 동양함대가 사실상 소멸하였다는 보고를 들었으며,[28] 충격으로[29] 입을 열지 못했다고 하며 말레이 해전에서 상실한 2척의 전함 피해 보고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충격을 안긴 일이라고 자신의 회고록에 기록하였다.[30] 그리고는 이제 태평양에 배치된 영국과 미군의 해군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포에 사로잡힌다.

영국 해군은 태평양에서 더이상 의미있는 작전을 펼칠수 없다고 보고 태평양에서 철수한다.[31] 싱가포르를 떠난 영국 해군 함선들은 실론섬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인도네시아)로 다시 전개되었다. 이어진 자바 해전에서 미국, 영국, 호주, 네덜란드로 이루어진 연합군 해군 함대가 사실상 전멸하면서, 영국군이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로 전개한 해군력도 소멸하고 말았고, 태평양의 연합군 해상 세력은 미국이 진주만 공습에서 보전했던 미약한 함대만 남았다.

영국군은 실론섬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HMS 워스파이트와 4척의 리벤지급 전함을 추가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다음 해인 1942년 2월 15일에 싱가포르 전투를 통해 싱가포르까지 함락시키고 기세가 오른 상태였다. 4월 초에 일본 해군은 인도양까지 진출해서 실론섬을 공습하기까지 했으며, 이때 영국 해군은 교전을 회피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국 항모 허미즈와 순양함 2척이 일본 해군의 공격으로 추가로 침몰했다. 실론 해전의 결과, 일본군의 폭격으로 콜롬보와 트링코말리의 해군 기지 배후 시설이 타격을 입었고, 더 이상의 작전 지원이 어렵게 되었다. 영국 해군은 배치한 전함을 다시 다시 동아프리카와 지중해로 철수시키고, 이렇게 해서 영국 해군은 태평양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지, 일본 해군 역시 실론섬의 해군 기지를 파괴하고, 영국 해군의 반격이 없을 것이라는 점에 만족했다. 그리고 나서 일본 해군은 미군과의 함대 결전을 준비한다.

다만 영국의 내각이 태평양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지중해 항로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영국 해군은 말레이 해전 이전까지는 타란토 공습, 마타판 곶 해전같은 일련의 전투가 있기는 했으나, 독일 해군의 전함들에게 보여준 집착들과 비교해볼 때, 이탈리아 해군을 파괴하려는 시도는 상대적으로 심드렁한 편이었다.[32] 하지만 이 사건 이후로는 지중해 항로의 가치가 도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1941년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이어진 3차 몰타 항공전에서 영국이 낼 수 있는 최상의 카드였던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3월 초에 과감하게 투입하게 된다. 그리고 수세로 일관하던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공세를 재촉하다가, 1942년 8월에 사령관 오킨렉을 해임하고 새로운 사령관을 부임시키는 강수를 두게 된다. 하지만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은 완강히 저항했고, 북대서양노르웨이, 그리고 몰타 섬의 사투가 종반전을 치닫은 1943년 겨울이 돼서야, 발등의 불로부터 한숨 돌리고 태평양에 다시 해군력을 투사할 여력이 생긴다.

영국해군이 지중해와 대서양에서의 전투를 마무리하던 시기였던 1943년 기간 동안, 태평양에서는 미군과 영연방인 호주군이 뉴기니와 솔로몬제도 일대의 정글에서 사투를 벌인 끝에 남부 태평양에서 승기를 굳혔다. 이후, 1944년 1월에서 2월에 걸쳐 미군이 마셜제도를 손에 넣고 일본해군의 핵심기지였던 트럭 섬에 공습을 가해 무력화 시킴으로서 중부 태평양을 장악하기 시작하고 그 여파로 남부태평양도 사실상 확보하였을 때, 영국 해군이 태평양에 복귀했다. 그리고 곧바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일본군이 벌인 임팔 작전에 맞선다.

대략 2년 뒤에 돌아온 영국 동양함대의 기함으로 스리랑카에 전개된 주력함은 리펄스의 자매함이었던 리나운이었다.[33]


6. 평가[편집]


말레이 해전은 진주만 공습, 비스마르크의 침몰과 함께 해전의 주도권이 함선에서 항공기로 완전히 옮겨졌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 전투이자 전함으로 대변되는 거함거포주의에 사형선고를 내린 사례로 역사에 남았다.

전함이 항공기의 공격을 받은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고, 타란토 공습과 같이 항공공격만으로 전함이 상실되는 전례도 있었다. 하지만 타란토의 경우 정박중인 함대를 급습한 것이었다. 비록 항공엄호가 제공되지 않았지만 전투태세를 갖추고 정상적으로 항해중인 전함이 다른 요소는 일절 배제된 채 오로지 적 항공기의 공격에 의해서만 대파, 격침된 사례는 이전까지 없었다. 이 때문에 당시 각국의 군 지휘부 상당수는 항공기가 가지는 군사적 가치를 실제보다 낮게 보고 있었다. 정상적인 교전상황에서는 전함을 항공기만으로 격퇴하기는 어렵거나 최소한 입증되지 않았다는 인식이 강했다.

거기에다 당시 일본의 항공기술에 대한 과소평가는 연합군 지휘관들의 판단을 더욱 흐리게 만들었다. 일본에겐 독일과 이탈리아가 가진 장거리 대함공격능력이 없다는 것이 당시 연합국 지휘관들의 통념이었던 것이었다. 실제로는 추축국 중에서 제일 가는 장거리 대함공격능력, 특히, 뇌격능력을 가진 것은 일본이었지만 연합군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과 편견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 및 리펄스의 격침과 함께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상기한 처칠의 반응은 이러한 인식이 제대로 박살난데 따른 충격이었다. 처칠뿐만 아니라 당시 군부 및 정치계, 나아가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그 파급력은 매우 컸다. 그럴만한 것이 당시 전함이 가지는 전략병기로서의 가치와 인식은 전후에 핵병기가 가지게 된 그것과 동급이었기 때문이며, 게다가 이러한 전략병기가 '동양인 군대'에게 무력화되었다는 충격이 시너지를 일으켰다.

그 충격에서 벗어난 뒤 각 국 해군 수뇌부들 사이에서는, 해군의 함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도 효과적인 항공엄호가 필요하며, 각 함선의 대공화기도 대대적으로 증설 및 개량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함대 상공의 제공권을 쥐지 않으면 함대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양상은 이후에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당시 영국함대의 상공 엄호에 투입할수 있었던 항공세력은 호주방면에 배치된 10기의 F2A 버팔로뿐으로 항속거리에 비해 배치지점이 너무 멀었고, 수량도 모자라니 지속적인 항공엄호는 꿈도 못꾸는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싱가포르에 주둔하던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소속의 버팔로 전투기들은 쿠안탄까지 항공지원이 가능했다. Z기동함대 투입 초기에 전열에서 이탈해버린 항공모함 인도미터블과 남아프리카에 입항했던 시점에 별다른 임무가 없던 허미즈를 Z함대에 포함시키지 않은것도 아쉬워지는 대목이다. 항공모함이 있다 한들 당시 투입 가능한 영국군 함재기들의 수량과 전투능력 역시 모자라기는 매한가지였으니[34]일본군 항공세력과의 정면대결은 무리였지만, 항공세력을 함대 상공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만큼 적어도 당시에 전투기 엄호가 전혀 없는 일본해군 공격/폭격기 편대에 대한 대응은 훨씬 수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오히려 일본해군 장거리 공격기 편대들이 영국공군에게 걸려서 큰 피해를 입었을게 확실한 상황이었다.

한편, 영국 해군이 자랑하던 대공포폼폼 포는 열대 해역에서의 작전에 많은 문제를 보여주었다. 우선 열대 해역의 습기 때문에 탄약 불량이 자주 발생하였고, 예광탄이 없는 문제도 있었다. 대공포 자체의 문제와는 별개로 개별 함정에 배치된 수량이 부족하다는 점까지 겹쳐서 항공공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가 없었다. 적기를 저지한 시점에서 이미 적기는 무장을 투하한 뒤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해전은 비스마르크 추격전야마토의 격침과 더불어서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항공기의 성능이 급속히 발달했음과 동시에 서서히 해전의 주도권이 대형군함에서 항공기로 이동되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각국의 함선, 특히 전함을 비롯한 주력 함선들은 대공포를 최대한 많이 부착하고, 구식 대공포를 몽땅 교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형 함선들은 이후 작전운용에 크게 제약을 받게 되었고, 반대로 대공방어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던 쪽은 이후의 전투에서 주역으로 나서게 된다. 특히, 미국의 경우 레이더 관제에 의한 대공사격 집중방식과 VT신관의 조합이 매우 효과적이어서 공격해들어오는 적 항공세력을 대공포화만으로 죄다 잡아버린 사례도 있다.

정치, 군사적으로는 태평양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이 사실상 소멸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41년 말은 대서양 전투가 굉장히 치열했던 시점이었고 급기야 이 시기에는 일부 U보트가 미국 동부해안까지 진출하기 시작해[35] 수세에 몰리고 있던 당시의 영국으로서는 태평양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나설수 있는 여력이 더 이상 없었다. 위에서 언급된 영국 수상 처칠의 반응은 전함 한두척의 손실에 대한 충격 뿐만 아니라, 영국이 태평양에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위세를 떨칠 수 없음을 알게된 절망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마이너 리그 취급받던 중국-버마(현 미얀마)-인도 전선 정도에만 국한되었고, 유럽전선에서 연합군이 확실하게 승기를 잡은 1944년에 이르러서야 영국 태평양 함대 (British Pacific Fleet)를 새로이 조직하여 일선에 뛰어들 수 있었지만 그나마도 미 해군의 연합세력으로서 참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영국 해군은 과거 오대양을 전부 통상 작전영역으로 삼던 대영제국 시절의 위상을 되찾지 못하고 대서양만을 활동 범위로 삼는 지역 해군으로 남아야하게 되었다. 이건 영국 자체의 국력 하락과 식민지 상실이 큰 원인이었지만.


7. 여담[편집]


  • HMS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함장 존 리치 대령은 이 해전에서 전사했는데, 아들은 신참내기 해군 장교로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서 복무를 시작할 때 함장으로 부임했기 때문에 아들은 HMS 모리셔스로 전보 조치되었다. 아버지가 말레이 해전에서 전사할 당시 싱가포르에 있었던 아들은 2차대전에서 생존했고, 오래오래 복무하며 해군참모총장까지 올랐다.[36] 바로 포클랜드 전쟁기 영국 해군참모총장으로서 마가렛 대처 총리에게 포클랜드 수복 원정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헨리 리치 제독이다. 그리고 그해 해군 원수로 퇴역하였으며 2011년까지 살았다.
  • 이 전투에서 전사한 톰 필립스 제독은 2차 대전에서 전사한 연합군 군인중 가장 높은 계급(Admiral, 해군 대장)의 전사자이다. 영국 공군의 트래퍼드 리맬러리의 경우 사고로 사망한 경우이고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미 육군의 시몬 버크너 대장은 사후 추서로 전사할 당시 계급은 중장이었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말레이 해전의 결과를 두고 참모와 맥주 내기를 했다는데 야마모토는 리펄스는 격침되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살아 돌아갈 것에 걸었고 참모는 둘 다 격침되는데 걸었다. 결과는 참모의 승리였고 야마모토는 기대 이상의 성과에 기뻐하며 원하는만큼 맥주를 돌리라고 이야기했다.
  • 전투 당시 Z함대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 외에도 구축함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E급 구축함 HMS 익스프레스, HMS 일렉트라, HMS 엔카운터, 그리고 J급 구축함 HMS 주피터가 바로 이들이다. 참고로 이들 구축함들은 모두 하나같이 최후가 좋지 못 했다는 점이 특징인데, 이들 중 일렉트라와 엔카운터는 자바 해전에서 격침당하고 주피터 역시 1942년에 기뢰에 접촉해서 격침당한다. 유일하게 익스프레스만 전후까지 살아남아서 방파제 용도로 자침.
  • 82년이 지난 후인 2023년, 중국 밀수꾼들이 말레이시아 영해 내에서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HMS 리펄스의 잔해를 몰래 인양하다 걸렸다. 해당 함선들의 잔해를 유적으로 간주하던 말레이시아 정부와 원 소유주인 영국 해군은 당연히 격노했다. 그들은 잔해 외에도 함선에 실려 있던 포탄들까지 약탈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BBC보도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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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의 왼쪽 중간에 검은 연기를 피우는 배들 중 사진의 앞쪽에 있는 배가 프린스 오브 웨일스이고 뒤의 배가 리펄스다. 사진 맨 앞의 구축함은 E급 구축함 HMS 익스프레스이다.[2] HMS 프린스 오브 웨일즈[3] HMS 리펄스[4] 해군 수상함도 지상군과 교전하면 Bombardment라고만 부른다.[5] 엔터프라이즈의 기여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6] 사실 포클랜드 전쟁 자체가 엄밀한 기준의 Naval Battle은 없는데 해군 함선은 여럿 가라앉은 이상한 전쟁이다. Naval battle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함선뿐만이 아닌 미사일, 항공기 등이 주가 된 현대 해전을 효과적으로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7] 엄밀히는 사단급 이하, 중대급 이상 규모의 아군과 적군이 작전 목표를 가지고 충돌하여, 어느 한쪽이 목적을 달성하거나 상대의 목적 달성을 좌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첫번째 Naval Battle과도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일반적으로 수상함이 항공기와 교전하거나, 지상군이 포격중인 수상함과 교전하는 경우는 (어느 일방이 너무 불리한 탓에) 작전 목표가 항공기 혹은 포격중인 수상함을 파괴하는 것인 경우는 거의 없다. 수상함이 지상발진 항공기와 교전하는 경우는 작전 목표를 수행하기 이전에 그냥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8] 이것이 주류.[9] 둘 다 최대 23노트였다.[10] 퍼플을 제외한 하급 암호들은 이미 털리고 있었다.[11] 다만 더들리 파운드 경도 울트라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발언이 무지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12] 함대 구성은 각각 전함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 순양전함 HMS 리펄스, 구축함 HMS 일렉트라, HMS 익스프레스, HMS 엔카운터, HMS 주피터.[13] 왜냐하면 허미즈는 최대 항속이 25노트였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은 최대 항속이 30노트였기 때문에 데려가려 한 것인데 25노트는 다른 두 척의 전함보다 너무 느렸고, 함대를 구성한 취지에 어긋나서 데려갈 이유가 없었다.[14] 이 사실을 모르는 채로, 일본이 진주만 공습없이 동남아를 침공한다는 대체 역사 소설들이 꽤 많다.[15] 진주만 공습은 일본 입장에서 전쟁의 초중반 주도권을 쥐기 위한 거대한 작전이었다. 이론상으로는 해당 공습에서 미국 전함들이 격침되는 건 물론이고 항공모함들도 격침되었어야 했다. 그것과 동시에, 미국의 석유 저장고 세트를 파괴하여 태평양에서의 해군작전에 제동을 걸며, 진주만에 있던 대공포나 활주로를 비롯한 대공전투 시설들도 훼손하여 하와이의 전략거점으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최종장인 미드웨이를 미군이 요새화하기 위해 하와이에 정박시켜 둔 물자들도 파괴하여 미드웨이의 요새화를 차단해야 했다. 다시 말해서 진주만 공습은 일본이 그토록 부르짖던 함대결전이었고, 진주만 공습을 실패했다고 하는 이유 역시 저 목표들 중 전함 격침을 제외한 단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16] 경제난도 있었고, 독일, 이탈리아와 치고받던 영국 본토 항공전북아프리카 전역 때문에 슈퍼마린 스핏파이어호커 허리케인의 보급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 전투기는 영국 본토의 환경에 맞춰져 있었고, 열대 지역에서의 작전에 대비된 기체들이 아니어서, 후에 이들 기체를 보급받은 호주군도 곤욕을 치른다. F2A 버팔로는 때마침 미국에서 등장한 가성비 항공기였으나, 실전에서의 성능은 매우 실망스러웠다.[17] 말레이 반도에서 영국 공군의 F2A버팔로를 학살한 전투기는 제로센이 아닌 하야부사로 알려져 있다.[18] 노르웨이 전역, 진주만 공습 등의 전훈으로 대공포만으로는 공습을 막아내기 어렵다는 전훈은 얻었으나 일본의 장거리 대함공격 능력에 대해서 오판한것.[19] 제로센의 정신나간 속력과 기동력, 항속거리를 얻기 위해 치른 대가는 기체의 내구도였다. 제로센은 설정된 최고 속력까지 끌어올리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고 오히려 다른 전투기들을 능가하는 가속력과 선회력을 보여줬지만, 상정된 것 이상으로 속력을 올리면 풍압을 못 이기고 와장창 부서진다.[20] 이때 일본 함대와 영국 함대의 상대거리는 약 10km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일본 항공대가 중순양함 쵸카이에 터트린 조명탄은 영국 함대에서도 육안으로 발견했다. 만약 조금만 더 거리가 가까웠으면 정말로 해전이 벌어졌을수도.[21] 위치가 밝혀질까봐 무선침묵을 지켰다고 한다.[22] 실제로도 말레이 반도의 영국 공군은 치명타를 입어서 지원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23] G4M이 등장하기 이전의 일본 해군 주력 육상공격기. 96식 육상공격기로 칭하기도 한다.[24] 벌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리나운이 킹 조지 5세급의 출현 전까지 영국의 최강 전함이었던 퀸 엘리자베스급의 벌지를 재생해서 장착한 반면, 리펄스는 퀸 엘리자베스급의 건조 비용에 부담을 느끼고 싼맛에 뽑아낸 리벤지 급의 벌지를 재생해서 달았는데다가, 그나마도 리펄스는 이렇게 해도 되는지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 베이스였다.[25] 당시 리펄스의 함장이었던 윌리엄 테넌트 대령은 살아남아, 서인도 제도 함대 사령관까지 승진한다.[26]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 비스마르크의 주포탄이 함교에 명중했을 때도 별다른 부상 없이 살아남았었다. 참고로 이 당시에는 대령 본인과 부하 한 명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원들이 전부 몰살당한 상황이었는데도.[27] 침몰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존 리치 대령의 시신이 발견되었다.[28] 2척의 전함이 격침. 공격자는 항공기로 판단. 사령관 톰 필립스 전사.[29] HMS 리펄스는 구형이니 그렇다쳐도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건조한지 9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일본군을 얕보고 있던데다 최신예 전함이 있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30] 덧붙여서, 처칠은 그에 이은 싱가포르의 함락이 영국 역사상 가장 참담한 패배라고 말한다..[31] 다만 철수하면서 영국 육군과의 정보 교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영국 육군은 싱가포르를 방어하면서 이미 지킬 필요없는 세레타 해군 기지를 지키고 있었다.[32] 수에즈 운하의 알렉산드리아와 영국령 지브롤터로 지중해를 잠가두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개발한 중동 유전으로부터 본토로 수송되는 석유의 수입이 사실상 끊기기는 하였으나, 미국 본토에서 석유를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여전히 미국에게 돈을 주고 석유를 사왔고, 유전의 위치만 바뀐 셈이었다. 알렉산드리아 주둔 함대와 육군이 고립되는 문제가 있긴 했으나, 비용이 많이 들기는 해도 희망봉 항로가 존재했고, 인도를 통해서 보급받는 방법도 있었다.[33] 그러나 말레이 해전과 마찬가지로, 일본과 맞서싸운 주역은 이곳에서도 항공모함이었다.[34] 시파이어는 1942년 11월에 가서야 처음으로 투입되고 그 이전에는 그나마 쓸만한게 시허리케인인데 이 또한 41년 말에나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배치된 함재기들은 페어리 풀머같은 괴작이었다.[35] 심지어 그중에서도 간큰 잠수함 한 척은 야음을 틈타 뉴욕 항구에 잠수상태에서 침투, 다시 부상해 뉴욕의 사진을 직접 찍어온 경우도 있었다. 자세한 건 라인하르트 하데겐 문서 참조.[36] 대전 중에는 듀크 오브 요크의 승무원으로 노스 케이프 해전에 참전했고 한국 전쟁 막바지에 해군 소령 계급으로 참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