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크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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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 제국 제3대 술탄
말리크샤 1세
ملکشاه


파일:Malik-Shah_I.jpg

본명
잘랄 알다울라 무이즈 알두냐 발딘 아부알파테 이븐 알프 아르슬란
سلطان جلال الدولہ معوذ الدنیا و الدین ملک شاه بن محمد الپ ارسلان قسیم
출생
1055년 8월 16일
페르시아 이스파한
(現 이란 이스파한)
사망
1092년 11월 19일 (향년 37세)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
(現 이라크 바그다드)
재위
셀주크 제국 술탄
1072년 12월 15일 ~ 1092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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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알프 아르슬란
어머니 미상[1]
배우자
주바이다 카툰
테르켄 카툰
타지 알단 카툰 사파리야(첩)
아들
바르키야루크
무함마드 타파르
아흐마드 산자르
마흐무드 1세
아흐메드
다우드
투그릴
아미르 쿠마린

마히 물크 카툰
시타라 카툰
테르켄 카툰
가와르 카툰
이스마흐 카툰


1. 개요
2. 생애
2.1. 즉위
2.2. 호라산 원정
2.3. 아르메니아 문제
2.3.1. 캅카스 평정
2.5. 투투쉬의 시리아 정복
2.7. 말년
2.7.1. 니잠의 죽음
2.7.2. 칼리파 문제와 죽음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동방과 서방의 술탄

ㅡ 압바스 칼리파가 말리크 샤에게


부왕인 알프 아르슬란에 이어 활약한 명재상 니잠 알 물크의 보좌를 받아 제국을 상당히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그의 치세에 시리아와 아르메니아, 트란스옥시아나 (우즈벡) 등이 정복되며 셀주크 제국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니잠이 아사신에게 암살되었고 아나톨리아의 튀르크 인들이 독립 기류를 보이는 등 치세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쇠퇴의 모습을 보였다. 말리크 샤는 각각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왕을 뜻하는 말리크와 샤가 합쳐진 칭호이다. 이는 튀르크 혈통인 그가 서아시아의 주 민족인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의 통치자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2. 생애[편집]


본명은 무이즈 앗 두니야 와 앗 딘 (معزالدنیا و الدین)으로, 1055년 8월 16일 이스파한에서 태어났다. 그는 밝은 피부와 큰 키에 거구였다고 한다. 1064년 9세의 나이로 니잠 알 물크와 부왕 알프 아르슬란의 캅카스 원정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1066년 메르브에서 부왕에 의해 후계자로 봉해졌고 이스파한을 영지로 하사받았다. 그는 또한 카라한 왕조의 공주 테르켄 카툰과 정략 결혼하였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당시 그는 후방인 알레포에서 전황을 지켜보았고 이듬해엔 카라한 원정에 동참하였다. 그 과정에서 부왕 아르슬란이 불의의 습격으로 사망하자 말리크 샤가 그 뒤를 이었다. (1072년 12월 15일)

2.1. 즉위[편집]


나는 (가문의) 연장자이고, 너는 어린 아이이다. 나의 형제인 알프 아르슬란의 계승에 있어 내가 더 우위를 지닌다.

ㅡ 쿠부르트[1]

가 말리크 샤에게


아들이 있을 시 형제는 상속권이 없습니다.

ㅡ 말리크 샤의 답장


하지만 불과 17세에 불과했던 말리크 샤의 입지는 불안했다. 숙부인 쿠부르트는 자신이 정복한 케르만을 거점으로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고, 결국 형제 상속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자칫하다간 단종(조선)이나 에드워드 5세와 같은 운명을 맞을 수 있었다. 건국의 주축인 튀르크 군부의 지지를 바탕으로 쿠부르트는 말리크샤의 영지이자 제국의 수도인 이스파한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말리크샤는 10대에 어울리지 않는 침착함을 발휘하며 제국의 서부에서 군대를 재건, 하마단 인근에서 쿠부르트와 맞섰다. (1073년 5월 중순)

말리크의 군대는 아랍, 쿠르드 등의 굴람 (맘루크)로 이루어진 다민족 혼성군이었고 쿠부르트 군은 튀르크 기병대였다. 이에 말리크 진영의 튀르크 인들이 동족과의 전투를 거부하며 종군을 거부하는 악재가 있었음에도 말리크는 침착히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3일간 이어진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쿠빌라이 칸 vs 아릭 부케[2] 생포된 쿠부르트는 살려만 준다면 남쪽 변방인 오만에서 은거하겠다고 하며 애원하였다. 작은아버지의 간청에 말리크샤의 마음이 흔들렸으나 재상 니잠 알 물크가 후환을 없애야 한다며 단호하게 처형을 주장하였다.

술탄은 재상에게 설득당하여 쿠부르트에 대한 교수형과 그의 일곱 아들 중 성인 둘을 맹인으로 만들 것을 언도하였다. 말리크샤는 이후 반란에 가담했던 이란 중남부 파르스와 동부 케르만의 총독을 각각 자신의 심복인 쿠틀루그 테긴과 사브 테긴으로 교체하였다. 한편, 내전 당시 말리크샤를 도운 몇 안되는 튀르크 장군인 아르투크는 이후 중용되어 예루살렘 총독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일가지는 알레포 총독이 되어 아르투크 왕조로 이어진다. 즉위 직후인 1073년 말리크샤는 이스파한 천문대의 도움으로 페르시아 달력을 개정하였다. (گاه‌شماری جلالی, 잘랄리 달력)

2.2. 호라산 원정[편집]


셀주크 제국이 아르슬란 사후 약 6개월간의 내전을 겪는 틈을 노려 카라한 왕조가 호라산 동부를, 가즈니 왕조가 호라산 북부를 침공하며 문제를 일으켰다. 말리크샤의 동생이자 호라산 총독인 아야즈가 카라한 군대에 패하여 전사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내분을 수습한 말리크샤의 첫 임무는 그들과 대적하여 제국의 동부를 지켜내는 것이었다. 먼저 가즈니 왕조로부터 토하리스탄을 탈환한 말리크샤는 평화 협정을 맺고 딸 가우하르 카툰과 가즈니 술탄 이브라힘의 아들 마수드 3세와의 혼인 동맹을 체결한 후 메르브를 지나 동쪽으로 향하였다.

샤의 동생을 전사시키고 아무다리야 강 북안에 위치한 셀주크령 전초기지 테르메스[3]를 점령한 이는 서카라한 조의 나스르 칸이었다. 그는 말리크샤의 여동생 아이샤와 혼인한 상태였고 말리크샤는 나스르의 여동생 테르켄 카툰의 남편이었으므로 처남이자 매부인 관계였다. 친동생이 처남에게 죽은 것 역시나 어렵지 않게 테르메스를 수복한 말리크샤는 케르만 총독 사브 테긴에게 도시를 맡겼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말리크샤는 막내 동생 샤히브 앗 딘 테키쉬에게 후방의 발흐[4]와 토하리스탄을 맡기곤 국경을 넘어 진군하였다.

1074년 말리크샤는 서카라한 조의 수도인 사마르칸트까지 이르렀고, 나스르 칸은 항복하였다. 이로써 서카라한 조는 셀주크 제국의 속국으로서 동쪽 국경의 완충지대가 되어주었다. 부왕의 원정과 동생의 복수를 완수한 말리크샤는 아르메니아 재정비를 위해 회군하였다. 그 과정에서 사브 테긴이 테르메스로 떠난 후 비어 있던 케르만을 예전 주인이었던 쿠브르트의 남은 아들들에게 봉토로 하사하였다. (케르만 셀주크) 한편 발흐를 맡은 테키쉬는 반란을 일으켰고 말리크샤가 2번의 친정을 한 끝에 그를 진압하였다. 반란의 대가로 테키쉬는 눈을 잃었다. 이후 1077년 말리크샤는 이란 남부 파르스를 평정하였다.

2.3. 아르메니아 문제[편집]


파일:Caucasus_1090_AC_de.png
11세기 말엽 캅카스 (코카서스) 일대

10세기 압바스 왕조가 붕괴하고 동로마 제국이 중흥하며 서북아시아의 형세는 급격히 변하였다. 이슬람의 지배에 순응하던 아르메니아 인들은 바그라투니 왕가를 중심으로 재차 왕국들을 세웠고 동시에 시르반샤쉬 (마즈야드 왕조)와 샤다드 왕조, 티플리스 아미르 등의 이슬람 왕국들도 독립하였다. 그러나 1042년 콘스탄티노스 9세의 원정으로 아르메니아의 여러 왕국들은 동로마에 복속되었고 샤다드 왕조의 샤부르 1세만이 아르메니아에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던 1055년, 셀주크 제국이 바그다드를 정복하자 샤부르 1세 역시 그에 복속하였다.

1064년, 아니를 점령한 것을 시작으로 알프 아르슬란은 동로마 원정에 앞서 아르메니아 정복에 착수하였다. 이때 샤부르 1세도 참가하였고 아르메니아 최고의 요새인 위즈인 요새를 함락하였다. 이에 술탄은 샤부르에게 아니를 하사하였다. (1065년)[5] 이후 셀주크 군대는 아제르바이잔의 시르반 왕조를 침공하였고 파리부르즈 1세는 3만 디나르의 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067년) 같은해 샤부르 1세가 사망하고 아들 파즐 2세가 계승하자 술탄은 친히 샤다드 왕조의 수도 간자를 방문, 많은 재물을 챙겨갔다. 1068년 술탄은 시르반 군대와 함께 조지아를 공격, 티플리스[6] (트빌리시)를 점령하였다.

2.3.1. 캅카스 평정[편집]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아르슬란은 자신의 굴람 (맘루크) 야그마를 시르반샤의 영토인 데르반트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파리부르즈 1세는 별다른 저항 없이 도시를 내주었다. 그러나 이듬해 아르슬란이 살해되고 셀주크 제국이 내전에 빠진 틈에 샤다드 왕조의 파즐 2세가 데르벤트를 점령해버렸다. 이에 말리크샤가 개입하게 된 것이다. 비록 1073년 파즐 2세는 아들 파즐 3세에게 폐위되었지만 말이다. 1074년에는 말리크샤가 카라한 원정에 나선 틈에 아르가르 이븐 부카라는 장수가 시르반샤 왕조의 수도 샤마키에 나타나 스스로 술탄으로부터 시르반샤를 하사받았다며 횡포를 부렸다.

파리부르즈 1세는 아르가르를 돈으로 회유한 후 급습하여 그를 잡아 감금하였다. 그러다 말리크샤의 보복이 두려워 그를 손수 풀어주었고 선물을 안겨주어 돌려보냈다. 하지만 아르가르는 이내 군대를 모아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약탈하였다. 이때 막 사마르칸트에서 회군하던 말리크샤가 개입하여 아르가르로 하여금 제국의 충실한 신하인 파리부르즈 1세에게 배상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제국을 배신한 샤다드 왕조에 대한 응징으로 사브 테긴을 파견, 그 수도인 간자를 정복하였다. (1075년) 이후 사브 테긴은 간자 총독으로 봉해졌고, 폐위된 파즐 3세는 고르간의 영지가 주어졌다.

한편, 셀주크 제국이 아르메니아 대부분을 장악하자 위기를 느낀 아르메니아계 카케티 왕국의 아그사르탄 1세는 조지아 왕국기오르기 2세와 연합하였다. 이에 사브 테긴 등의 셀주크 영주들이 공격하였으나 파르츠키시 전투에서 조지아 군에 패배하며 캅카스에서의 셀주크 영토 확대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1080년대 초엽 기오르기 2세는 셀주크 제국과 강화를 맺었다. 이에 말리크샤는 기오르그에게 카케티를 하사하고 셀주크 군대를 빌려주어 그 정복을 돕게 하였다. 연합군은 카케티의 베지니 요새를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하였다.

이후 카케티의 아그사르탄 1세는 말리크샤에게 복종하곤 신임을 얻기 위해 이스파한 궁정에 찾아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기까지 하였다. 이로써 카케티는 셀주크 제국의 충실한 동맹이 되었다.[7] 1084년 평화를 이룩한 아그사르탄 1세가 사망한 이듬해, 간자 총독 사브 테긴이 사망하자 파즐 3세가 돌아와 부흥을 시도하였다. 이에 1086년, 말리크샤가 친정하여 그를 축출하고 셀주크 영토로 확정지었다. 다만 말리크샤에 변함없이 충성한 파즐 3세의 숙부인 마누치흐르는 계속해서 아니를 다스릴 수 있었다. 따라서 샤다드 왕조는 방계로나마 1세기 더 존속할 수 있었다.

2.4. 룸 술탄국 격파[편집]


1063년 알프 아르슬란의 계승에 반기를 들었다가 패배한 후 사망한 그의 오촌 당숙 쿠탈미쉬에겐 4명의 아들이 있었다. 4형제는 당시 제국의 서쪽 끝이던 타우루스 산맥의 험지로 들어가 은거했는데, 아르슬란의 집요한 공격으로 잡혀 죽고 쉴레이만 혼자만 살아남았다. 이후 사면을 받은 쉴레이만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활약하며 두각을 드러낸 후 아나톨리아의 총독으로 봉해졌다. (1077년) 그러던 1078년, 니키포로스 3세의 반란에 직면한 동로마 황제 미카일 7세가 쉴레이만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그는 오히려 반군의 편으로 귀순해버렸다. 그 대가로 쉴레이만은 서부 아나톨리아, 그것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바다를 두고 마주한 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1080년 미카일 7세을 지지했던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니키포로스 3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쉴레이만 등의 튀르크 인들이 그에 동참하였다. 병력이 부족했던 멜리시노스는 점령한 서부 아나톨리아의 도시들에 튀르크 병력을 배치하였는데 비록 1081년 니키포로스 3세를 축출한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반란은 진정되었지만 쉴레이만은 자신에게 주어진 니케아니코메디아를 장악한채 자립하였다. 손쉽게 비티니아 지역을 얻은 쉴레이만은 술탄을 칭하곤 영토 확장에 나섰다. 1084년 아불 카심을 섭정으로 앉힌 후 니케아를 떠나 동쪽으로 향하였다. 1085년 쉴레이만샤는 동로마 영토였던 안티오크를 함락하였다. 이때 학살과 성 카시아누스 성당에 대한 약탈 및 모스크 개조가 이어졌다.

자신감을 얻은 쉴레이만샤는 내친김에 시리아까지 침공하려 하였으나 투투쉬 1세의 공격을 받아 안티오크 인근의 아이누 세일렘에서 대패하고 사망하였다.[8] (1086년) 이로써 레반트에 통일된 국가를 세우려던 쉴레이만샤의 꿈은 좌절되었다. 다만 시리아와 아나톨리아의 지배자를 칭한 투투쉬 역시 아나톨리아를 손대지 못하였는데, 이미 니케아의 아불 카심, 스미르나의 차카, 에페소스의 탕기페르네스, 서부 비티니아의 엘칸, 아마시아의 다니슈멘드 가지, 그리고 폰투스의 여러 영주들 등 이미 제후들이 산재해 있었고 투투쉬에 대한 연합도 불사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한편 남은 안티오크에 말리크샤는 야기 시얀을 총독으로 앉히는데 그는 1차 십자군 때까지 집권한다.

2.5. 투투쉬의 시리아 정복[편집]


파티마 왕조가 쇠퇴하던 11세기 후반, 팔레스타인의 총독이던 아트시즈 이븐 우바크라는 호라즘 출신 튀르크계 용병이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를 점거하고 압바스 칼리파에게 충성을 서약하며 사실상 독립하였다. (1071년) 그는 이집트 본국을 공격하는 모험을 감행하였으나 패배하고 오히려 파티마 군대의 반격에 마주하자 셀주크 제국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말리크샤는 동생 투투쉬 1세를 파견하였다. (1078년) 다마스쿠스를 포위한 이집트 군대를 격퇴한 투투쉬는 이내 아트시즈를 감금하였고 곧 살해하였다.[9] (1079년) 이로써 시리아 남부는 셀주크 영토가 되었다. [10]

1080년, 투투쉬는 셀주크 제국의 속국인 우카일 왕조를 끌어들여 시리아 북부를 지배하던 알레포미르다스 왕조를 멸망시켰고 이듬해엔 하란누마이르 왕조를 멸하였다. 연이은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우카일 왕조의 샤라프 앗 다울라 무슬림은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자립하려 하였고 패배하였으나 말리크샤의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샤라프는 1085년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남하한 룸 셀주크의 쉴레이만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의 동생 이브라힘은 모술을 이어받았고 알레포는 민병대장 하산 이븐 히바트가 맡았다. 하산은 알레포를 내주기로한 투투쉬와의 약속을 어기고 말리크샤에게 의탁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1086년 5월, 투투쉬는 알레포를 공격하여 시타델을 제외한 도시를 장악하였고 얼마후 쉴레이만샤를 전사시키며 시리아 전역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하산의 편지를 받은 말리크샤가 알레포를 향해 진군하자 투투쉬는 10월 다마스쿠스로 돌아갔다. 그해 12월 알레포를 접수한 말리크샤는 아크 산쿠르 알 하집[11]을 알레포 및 하마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투투쉬를 견제하였다. (1087년) 말리크샤 사후 벌어진 내전에서 산쿠르는 1093년 투투쉬 대신 술탄 바르키야루크를 선택하였다. 그러자 투투쉬가 북진하여 산쿠르를 패배시키고 처형한 후 알레포를 점령하였다. (1094년) 그러나 이듬해 라이에서 투투쉬 역시 바르키야루크에게 패해 전사하며 레반트는 재차 분열되었다.

2.6. 카라한 칸국 정벌[편집]


1074년 셀주크 제국에 복속한 서카라한의 나스르 칸은 1080년에 사망하였다. 뒤이어 동생 히지르가 계승하였으나 1년 후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아흐마드 1세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아흐마드는 종교계 (울라마)와의 갈등을 제어하지 못하였고 이에 사마르칸트의 원로들이 말리크샤에게 개입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1088년, 셀주크 군대는 부하라, 사마르칸트, 외즈겐트 등 서카라한의 주요 도시들을 단숨에 점령하였다. 사마르칸트에는 셀주크 총독이 부임하였고, 아흐마드는 이스파한으로 압송되었다.

하지만 카라한 조의 핵심 세력인 치길 부족은 셀주크 지배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셀주크 총독을 축출하고 아흐마드의 8촌이자 동카라한 조의 초대 술탄 쉴레이만의 아들 야쿠브를 칸으로 옹립하였다. 그러자 1089년 재차 원정에 나선 말리크샤는 사마르칸트를 함락하였고 야쿠브는 페르가나로 도주하였다. 내친 김에 말리크샤는 투르키스탄까지 진격하여 동카라한 조의 부그라 하산의 복속을 받아내었다. 이후 충성을 다짐한 아흐마드를 다시 서카라한의 칸으로 복위시킨 말리크샤는 이란으로 돌아갔다. 다만 아흐마드는 말리크샤 사후인 1095년 울라마에 의해 배반자라는 혐의로 처형되고 만다.

2.7. 말년[편집]


말리크샤는 1082년에 장남 다우드, 1088년에 차남 아흐마드가 사망하는 아픔을 겪으며 후계자 문제가 복잡해졌다. 남은 아들들 중 연장자는 셀주크 가문의 공주가 낳은 바르키야루크였고 그 다음은 첫 부인 테르켄 카툰이 낳은 나시르 앗 딘 마흐무드였다. 그리고 대재상 (그랜드 와지르) 니잠 알 물크와 군부가 전자를, 황후 테르켄 카툰과 재상 타즈 알 물크가 후자를 지지하며 파벌이 생겨났다. 사실 말리크샤 본인 역시 부왕 때부터 조정을 움켜쥐고 있던 니잠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니잠의 아들 자말이 부친을 모함한 자를 마음대로 살해하자 말리크샤가 자말에게 사약을 내린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니잠은 별다른 내색 없이 말리크샤에 충성하였다. 니잠의 정적인 타즈 알 물크가 그를 부패 혐의로 고발하였지만 이번엔 말리크샤가 반응하지 않았다. 서로를 불편히 여기면서도 필요한 관계였다. 니잠은 살해되기 직전의 연설에서 '재상이 쓰러지면 왕권 역시 무너진다'라는 의미심장한 발언 예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2.7.1. 니잠의 죽음[편집]


1091년은 이스마일파 (일곱이맘파)가 기승을 부렸다. 아라비아 반도의 카르마트바스라를 습격했고 하산 사바흐의 아사신이 알라무트를 점령하였다. 이에 니잠은 알라무트를 포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그리고 1092년 10월 14일, 가마를 타고 바그다드로 향하던 니잠은 나하반드 인근에서 수피로 위장한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암살자는 곧바로 니잠의 경호원들에게 살해되어 그 주모자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말리크샤 즉위의 1등 공신이자 문무를 겸비하여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던 명재상 니잠의 죽음으로 말리크샤는 최대의 조력자를 잃게 되었다. 니잠의 사후 그의 경쟁자이던 타즈 알 물크가 대재상이 되었다. 그는 이스마일파였다. [12]


2.7.2. 칼리파 문제와 죽음[편집]


파일:Malik-Shah_I_Coin.jpg
말리크샤 1세의 금화

말리크 샤는 노쇠한 칼리파 알 무크타디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조카 자파르를 신임 칼리파로 옹립하려 하였다. 따라서 무크타디에게 바스라로의 은퇴를 명령하였다. 칼리파가 거절하자 말리크샤는 이를 손수 실행에 옮기기 위해 바그다드에 도달하였다. 민심 동요를 우려한 신임 재상 타즈 알 물크[13]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있던 1092년 11월 19일, 말리크샤는 사냥 중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의 주체에 대해서는 칼리파의 지지자들 혹은 니잠 알 물크의 죽음에 분노한 니자미야 대학의 학생들 등이 거론된다. 어찌 되었든 칼리파의 폐위는 무산되었지만 바그다드 칼리파의 셀주크 제국의 헤게모니에 대한 반감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거대하고 불안정한 제국을 지탱하였던 니잠과 말리크샤가 한달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자 셀주크 제국은 극심한 혼란과 분열의 시대로 진입하였다. 아나톨리아에선 쉴레이만샤의 아들 클르츠 아르슬란 1세가 룸 술탄국으로 독립하였고 시리아를 지배하던 말리크샤의 동생 투투쉬 1세는 스스로 술탄임을 선언하였으며 말리크샤의 아들들인 바르키야루크, 마흐무드 1세, 타파르, 산자르는 각각 이라크, 이라크, 캅카스, 호라산을 차지하고 내전을 벌였다. 그외에 다니슈멘드 왕조카파도키아를, 아르투크 왕조자지라를 차지하는 등 지방 분권화는 고착화 되었다. 이러한 혼란기 덕분에 말리크샤 사후 4년 뒤에 찾아올 1차 십자군이 레반트 일대를 쉽게 석권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참고문헌[편집]


  • 터키사 (이희수)
  • 터키사 100 (이희수)
  •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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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48년부터 케르만을 다스린, 케르만 셀주크의 시조[2] 신생 유목민계 정복 왕조가 기존 유목민 vs 토착 민족 세력 간의 내분을 겪는 사례는 셀주크, 몽골 제국 외에도 북위, 무굴 제국, 우마이야 왕조 등 풍부하다. 기존 유목민 세력은 절대왕권에 위협이 되기에 다수인 토착 세력을 왕권의 친위대로 삼는 것이다. 꼭 청나라의 신사 계층처럼[3] 현 우즈벡 남부에 위치. 아프가니스탄과의 접경도시[4] 아무다리야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테르메스에서 40km 떨어져 있다.[5] 같은해 시르반샤시의 파리부르즈 1세는 데르반트를 정복[6] 1062년에 조지아가 티플리스 에미르국을 멸하고 점령. 이때 구원 요청을 받은 샤부르 1세는 부동.[7] 그러나 1105년 결국 조지아에 병탄되었다[8] 수치심에 자살했거나 혹은 투투쉬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한다.[9] 여담으로 아트시즈가 건설하던 다마스쿠스 시타델은 투투쉬가 완성한다[10] 이때 아르투크가 예루살렘 총독이 된 것이다[11] 장기 왕조를 세우는 이마드 앗 딘 장기의 부친이다[12] 다른 설에 의하면 말리크샤가 주재한 수니 vs 시아파 학자 간의 토론회 이후 니잠과 술탄이 시아파로 개종하여 수니파에게 암살당하였다고도 한다. 또다른 설에 의하면 니잠과 말리크샤가 말다툼을 한 후 분노한 말리크샤의 묵인 하에 타즈 알 물크가 니잠의 암살을 주관하였다고도 한다[13] 그는 이후 마흐무드 1세를 지지하며 바르키야루크와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바르키야루크의 사면을 받아 그의 재상이 되었으나 니잠의 추종자들에게 살해되었다 (109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