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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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명예 훈장 수훈자
파일:미합중국 육군 명예훈장.png
날짜
1941년
이름
더글러스 맥아더









1983년 국방부 선정 6.25 전쟁 4대 영웅
월튼 워커
더글라스 맥아더
김홍일
김종오


General of the Army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파일:general-douglas-macarthur.jpg

본명
Douglas MacArthur
더글러스 매카서[1]
출생
1880년 1월 26일
아칸소리틀록
사망
1964년 4월 5일 (향년 84세)
워싱턴 D.C.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복무
미합중국 육군
필리핀 자치령 육군
복무 기간
1903년 ~ 1937년
1941년 ~ 1964년[2]
최종 계급
미합중국 육군 원수 (General of the Army U.S. Army)
필리핀 육군 원수 (Field Marshal Philippine Army)
근무
유엔군사령부
지휘
유엔군 사령관
참전
멕시코 혁명(1910 ~ 1920)
제1차 세계 대전(1917 ~ 1918)
제2차 세계 대전(1939 ~ 1945)
6.25 전쟁(1950 ~ 1953)
서명
파일:DMacarthur_Signature.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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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미국육군사관학교 (학사)
신체
183cm
정당

종교
개신교 (장로회)
가족
아서 맥아더 주니어 (부)[1]
1845년 6월 2일 ~ 1912년 9월 5일 (향년 67세)
메리 핑크니 하디 맥아더 (모)
아서 맥아더 3세 (형)
1876년 6월 1일 ~ 1923년 12월 2일 (향년 47세)
맬컴 맥아더 (형)
1878년 ~ 1883년 (향년 5세)
진 마리 페어클로스 맥아더 (재혼)
1898년 12월 ~ 2000년 1월 (향년 101세)
헨리에타 루이즈 크롬웰 브룩스 매카서 애트윌 하이버그 (이혼)
1890년 ~ 1965년 5월 30일 (향년 75세)
아서 더글러스 맥아더 (장남)
1938년 2월 21일 ~ (85세)
훈장
명예 훈장, 수훈 십자 훈장, 육군 수훈 복무 훈장, 해군 수훈 복무 훈장, 공군(전) 수훈 십자 훈장, 은성 훈장, 청동성장, 공군 수훈장, 퍼플 하트 훈장[2]
훈장 내역 정리 (영어)


1. 개요
4. 어록
5. 후손
6. 기타
7. 대중매체
8. 둘러보기
9.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미국군인이자 정치가. 통칭 맥아더 장군.[3] 미국 역사상 매우 유명한 장성 중 한 명이다. 일찍이 군인이 되어서 제1차 세계 대전용장, 제2차 세계 대전명장 등 20세기에 벌어진 주요한 전쟁에 모두 참전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집안 역시 명문 군인 가문이어서 아버지 아서 맥아더는 육군 장성으로서 필리핀의 군정 총독이기도 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미 1910년~1920년 대에 국가적 영웅이었는데,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최연소 육군 사관학교 교장, 최연소 육군 소장, 최연소 육군 대장이자 육군 참모총장, 육군 원수까지 군의 주요지위를 거쳤으며, 태평양 전쟁과 일본의 전후처리에서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였다. 또한 한국6.25 전쟁에서도 인천 상륙작전을 세우고 총지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에서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 육군 원수로서 지휘[4]했으며, 우스갯소리기는 하지만 푸른 눈의 쇼군 내지는 백인 천황, 일본 대통령으로 불렸을 정도로 종전 이후 연합군 점령하 일본에서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5] 그렇기에 전후 일본 사회의 구조에는 그의 입김이 많이 남아있다. 그 때문인지 2006년 타임지가 선정한 60년 동안의 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 포함되기도 하였다.[6][7] 6.25 전쟁에서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북한군이 우세한 상황을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성공적으로 반격하였으며 한국인들 사이에서 높은 인지도와 명성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들도 맥아더를 고평가하는데, 점령군의 사령관인데도 일본인들이 맥아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일본에 가혹한 벌을 내리지 않고 최대한 선처해주었으며 은퇴 이후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핵 공격을 "잔인했다"며 간접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8]

수여받은 약장은 매우 비범하다. 약장 목록을 보면 알겠지만 명예 훈장부터 시작해서 하나 받아도 가문의 영광인 수훈십자장 3회 수훈(천만에 가까운 미육군 누적 참전 병력 중 현재까지 겨우 13,000명만 수훈받았다.), 하나 받아도 베테랑 병사 취급받는 은성훈장 6회 수훈, V기장(영웅적인 행동을 한 군인에게 수여)이 달린 동성훈장 수훈, 육군 수훈복무훈장 4회 수훈, 대통령 부대 표창 6회 수훈, 대한민국 정부의 무공훈장 중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훈장 수훈[9], 그 외에도 육군항공 조종사 마스터 기장, 소총, 권총 특등 사격기장까지 약장만 봐도 어마어마한 명장(名將)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문제를 노출하였다. 현역군인이 퇴역군인을 쏴죽인 보너스 군대 사건으로 엄청난 오명을 얻었으며, 6.25 전쟁 당시 핵무기 사용과 중국으로의 확전(擴戰)을 반대한 군 통수권자인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다가 해임되는 등, 미군 역사에서 문민통제(文民統制)에 역행했던 대표적 장성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더글러스 맥아더/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더글러스 맥아더/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어록[편집]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유효한 수단을 동원해 신속히 그 전쟁을 끝내는 것 말고 달리 대안이 없다. 전쟁의 최고의 목표는 우유부단하게 끄는 것이 아니라 승리이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10]

이제 나는 군인으로서 생애를 마치고 사라진다.[11]


나는 항상 웨스트포인트로 돌아옵니다. 의무(Duty), 명예(Honor), 국가(Country)[12]

가 항상 울려 퍼집니다. 오늘은 당신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합니다. 강을 건널 때 마지막으로 남은 인식 있는 생각은 생도대, 생도대, 그리고 생도대(The corps, and the corps, and the corps)가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작별을 고합니다.[13]


마지막까지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용기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용기, 확신을 갖는 용기, 꿰뚫어 보는 용기이고, 세상은 항상 용기있는 사람을 모함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군중의 고함에 맞서는 양심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은 역사만큼 오랜 싸움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용기는 역사를 이끌어 간다.


실제로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성경을 읽지 않고 밤을 보내거나 잠을 잔 적이 없다.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In war, there is no substitute for victory.)[14]


우리는 이제 실업자가 되겠군.[15]


나는 돌아올 것입니다. (I shall return.)[16]


자유의 목소리인, 맥아더 장군이 말합니다. 필리핀의 국민들께: 제가 돌아왔습니다. (People of the Philippines: I have returned.)[17]


일본은 12살의 소년이다.[18]


"조종사라는 고급 인력을 무의미하게 소비하다니. 나였으면 그런 명령을 내린 놈을 그 자리에서 쏴 죽였을 것이다."

― 전후의 더글러스 맥아더, 자신의 자서전에서 카미카제에 대한 감상[19]


일본인은 쇼군에게 칼을 대지 않는다.[20]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21]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자는 아마 자동화기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Whoever said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obviously never encountered automatic weapons.)


우리는 돈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싸웠고, 대공황의 해법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지 손을 벌리는 것이 아니다.


일본 사회는 철학을 잊어버리고, 윤리를 등한히 여기며 미학을 멀리한 사회이다.


우리는 모든 전력을 다하여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인천상륙작전은 5000대 1의 도박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만 나는 그런 모험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며 적을 분쇄할 것이다.


공산주의는 사상이 아니라 강도짓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기업을 만들고 기업을 운영해서 이윤을 남기고 정당하게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을 부르주아라고 부르며 전제군주제의 세습 신분인 거마냥 선동해서 그들의 사유 재산을 강탈해서 공유하자고 하는 강도질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우리 미국은 칼 마르크스 라는 악마가 만든 공산주의에 맞서 신성한 사유재산을 수호해야하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지켜야 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나긋나긋한 무릎이 아니라 씩씩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정열을 가리킨다. 그것은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이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선호하는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20세 청춘보다 60세 인간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더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아이러니의 눈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20대라도 인간은 늙지만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80세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22]


나는 조국의 안녕에 대해 걱정을 금할 수가 없다. 미국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끊임없이 미국을 전복시키려는 내부의 적이다.


러시아군의 노력은 규모나 장엄함에 있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적 업적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23]


미국인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Americans never quit.)


군인들은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평화를 바란다. 전쟁에서 고통받고 가장 아픈 상처까지 견뎌내야 하는 사람이 군인이기 때문이다. (The soldier above all others prays for peace, for it is the soldier who must suffer and bear the deepest wounds and scars of war.)


이 나라가 (대한민국이) 다시 재건하는데는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 하지만, 맥아더의 예상과 다르게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해내면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5. 후손[편집]


명성과 경력을 비롯한 스케일에 비해 의외로 자녀 수는 매우 적었는데 아들인 아서 더글러스 맥아더 4세 한 사람 외에는 자녀가 없었다. 맥아더의 외아들인 아서는 아버지의 소망과 달리 군인이 되지 않았고 맥아더라는 성마저 버렸다. 맥아더가 지은 시인 "아들을 위한 기도"는 한국에서 꽤 유명한데, 이 시의 주인공인 그의 외아들 아서 맥아더 4세는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아예 자신의 성을 바꾸며 집안과 끊다시피 하고 잠적했으며, 친한 친척들하고만 연락이 되고 있고 다른 행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에 의해 뉴욕시에 거주한다는 것 정도만 알려진 상태다. 2000년에 어머니인 진이 사망했을 때도 언론에는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들이 햄버거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완전 허구다. 오죽했으면 2000년대 중반쯤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그와 연락이 되는 친척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너무나 유명한 아버지로 인해 세간의 관심을 지나치게 받았다. 아버지가 원수 계급장을 달 정도가 되면 대개의 경우 그 아들은 이미 장성해서 사회의 중견이 되어 있지만[24], 아서 맥아더 4세의 경우 맥아더가 58세가 되어서야 본 늦둥이라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맥아더는 미군 최고위 장성이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맥아더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자 늦둥이 아들이자 유일한 자녀인 그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비상해져서 어렸을 때 이미 라이프 지의 표지 모델이 될 정도였다. 또 맥아더가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을 때도 그는 고작 7살의 꼬마 소년에 불과했다. 이 정도면 한 나라의 왕자나 다름 없는 위치였고 지금으로 따지면 셀럽과 같은 상황이었으며 세간의 관심 또한 평범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몰라도 장성하면서 그는 이런 세간의 관심을 점점 견디지 못했고 결국 아버지가 죽자 성을 바꾸고 은거하게 된다. 그의 친척들도 이런 그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절대 그에 대해서 노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어린 아이를 지나치게 스타로 만들면 안 된다는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

더글러스 맥아더는 형인 아서 맥아더 3세와 매우 사이가 좋았는지, 서로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형제 이름을 붙여줬다. 그래서 미국의 외교관으로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더글러스 맥아더 2세(1909~1997)는 실제로 더글러스 맥아더의 조카이고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들 이름은 개명 전까지 아서 맥아더 4세였다.


6.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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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옷차림새가 대단히 특이하다. 필리핀 육군 원수 정모에 짙은 레이밴 선글라스,[25] 수제 콘파이프 담배인 옥수수 자루로 만든 담배 파이프가 트레이드 마크. 필리핀 원수 정모,[26] 선글라스와 함께 맥아더의 아이콘으로 유명한 콘파이프지만 사실 그는 싸구려 콘파이프를 그다지 애용하지 않았고 실제로는 브뤼에르 나무로 만든 고급 수제품을 애용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일부러 검소한 이미지로 보이려고 콘파이프를 사용한 건 아니고 바빠서 고급 파이프를 챙기지 못해 여벌로 준비해놓은 콘파이프를 물고 있을 때 사진을 찍혔는데 하필 이 때의 사진이 대단히 유명해져서 콘파이프가 그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던 것. 맥아더 자신이 이런 이미지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라 그 뒤로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거나 대중 앞에 나설 때는 항상 콘파이프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정치인들조차 대부분 이런 식의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쓰지 못하던 시절에 그는 시대를 앞서 이미지 관리의 중요성을 알고 실천했던 사람이었다.[27][28] 콘콥은 가격이 저렴하기는 하지만 내구성(특히 내열성)이 별로라 오래 쓸 수가 없다. 애초에 콘콥은 소모품이고, 2020년 한국 기준으로 보더라도 저렴한 것은 만원 대 가격이다. 저렴한 것은 6만원 정도로 구입할 수 있는 브라이어(브뤼에르) 목재 파이프의 경우 저가 보급형이라도 관리만 적당히 해주면 반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데 비해 콘콥은 가격은 만원 대지만 잘 써도 1년을 쓰기가 어려우니 싸지만 오래 쓸 수 없어서 오히려 비경제적인 것. 따라서 보급형에 가까운 콘콥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주로 애용하는 파이프는 따로 있지만 파이프 관리가 힘든 상황에서 막 쓰는 파이프로 사용하거나 굳이 을 주고 파이프를 사지 않고 본인이 직접 제작해서 사용하는 경우다.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짓는 미국 농촌에서는 직접 농사를 짓거나 이웃집 옥수수대를 얻어서 햇볕에 말려뒀다가 직접 속을 파내서 파이프로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한다. 즉, 맥아더의 아이콘인 콘콥의 경우 여기저기 전쟁터로 다닐 일이 많은 맥아더가 예비용 파이프로 가지고 있던 것을 들고 있다가 우연히 사진이 찍혔고[29] 이후 대중적 이미지 조성과 득표를 위한 호응[30]을 위해 사용했다고 보는 정도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특히 주로 사진에 나오는 콘콥은 실제로 물어보면 더럽게 크고 무겁다. 요즘에도 '맥아더 콘콥'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판매되고 있는데 일반적인 파이프보다 거의 3배는 무겁고, 일반적인 파이프로 1시간 정도 피울 수 있는 담배를 3배는 오래 피울 수 있다. 그러니 맥아더가 콘콥을 떡하니 물고 사진은 맥아더다운 멋부림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 그의 화려한 사관학교 시절 성적이 증명하듯 매우 유능한 군인이었고, 교양과 학식 또한 높았다. 그가 남긴 많은 명언들이 그렇듯 언어를 구사하는 데 있어서도 특출난 재주가 있었다. 외모 또한 큰 키에 귀족적인 풍모가 있어서 정말 누가 보아도 엘리트 군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이승만과는 자신이 소령일 때부터 알고 있었다고 하며 두 사람은 돈독한 사이였다. 말년에 그에 대해 “평생을 조국을 위해서 싸웠으며 정치를 할 때 다소 잘못이 있었더라도 고국에 들어가서 명예로운 최후를 마쳤으면 좋겠다”고 하였다.[31]

  • 맥아더는 연설 마지막에 자주 주기도문으로 끝마치는 버릇이 있어 주기도문 맨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식 연설에서, 그리고 9.28 서울 수복 후 중앙청 연설에서도 그는 주기도문으로 연설을 마무리 하였다.

  •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9일 맥아더는 수원비행장에 도착해서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며 전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후퇴하지 않고 참호 속에 남아 있던 어느 한국군 병사에게 맥아더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고 묻자, 그 병사는 "상관의 후퇴 명령이 없습니다. 명령이 있기 전에는 이 참호를 지켜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탄복한 맥아더가 무슨 소원이 없냐고 묻자, 병사는 "국군에는 소총밖에 지급되어있지 않고 그나마도 탄약이 부족합니다! 적들을 저지하기 위해 필요한 충분한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32] 이에 감격한 맥아더는 바로 지원군 파견을 결심했다는 일화가 있지만 이 일화는 6.25 전쟁 참전 국군 장성들의 회고록 등을 통해 퍼진 일화로 미국 맥아더 기념관에 문의한 결과 맥아더 장군과 국군 병사의 일화는 맥아더 회고록과 미국의 6.25 전쟁 전사 등 맥아더 개인 및 미국 공식 기록과 자료에서 찾을 수 없는, 다시 말해 진실임을 입증할 명백한 근거가 부족한 일화로 신빙성 논란이 존재한다.[33] 참고로 이때 맥아더의 시찰 비행 기록은 현재까지 남아있다.# 한편 조선일보에서는 맥아더와 만났던 국군 병사의 주인공이 2013년에 작고한 신동수 일병이라고 보도하였는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는 당시 신동수 일병의 소속부대인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제18보병연대가 맥아더의 한강방어선 영등포지구 시찰 이후 배치되었기 때문에 신동수 일병은 맥아더를 시간순서상 만날 수가 없다고 발표하였고 이에따라 조선일보에서도 정정보도 기사를 발행하였다.(정정보도 기사 원문)[34]

  • 6.25 전쟁에 참전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이 나라가 재건되는데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다."라는 예상을 했다. 그러나 한강의 기적으로 산업화를 완성하면서 예상이 빗나갔다.[35][36]

  • 한국에서의 임팩트는 정말 커서 일부 무속 신앙에서 신앙의 주체로도 나타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외국 담배가 법적으로 금지되었던 시절. 그를 모시는 무속인들이 양담배를 불법으로 입수하여 제물로 써서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지금도 그를 모시는 무속인들이 남아 있다. 실제로 맥아더를 무속신으로 모시는 사당이 현재도 인천광역시에는 다수 있다.사례 1 사례 2 웹툰 와탕카에도 등장. # 여담으로 맥아더 본인의 종교는 개신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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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광역시 자유공원에는 시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그의 동상도 서 있다. 그러나 2005년에 NL성향 시민사회단체가 나서서 이 동상의 철거를 요구한 일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의 성금으로 세운 기념물의 주인공이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든 존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관철되어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서울 자하문 터널 옆에도 동상이 있다고 잘못 아는 경우가 있는데, 자하문 고개에 있는 동상은 김신조 외 20여명이 박정희를 암살하러 왔던 1.21 사태 당시 현장에서 순직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다. 그외 맥아더 장군 동상은 경복궁 경내와 반공회관(현 광화문 KT 사옥) 앞에도 1960년대 말까지 있었다.
  • 호주에서도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호주는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 영연방의 일원으로서 주력 사단이 대부분 북아프리카 등 유럽 전선에 파병나간 상황이라, 예상되는 일본의 공격에 상당히 취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맥아더가 미국의 급조된 2선급 사단과 준정규군인 호주 민병대를 이끌고 뉴기니 전선에서 악전고투,[37] 일본군의 전력을 야금야금 깎아 먹으면서 버텨내고, 산호해 해전에서 미 함대가 극적인 무승부를 이끌어내면서 호주는 일본의 위협에서 한숨 돌리게 되었다. 이후 뉴기니 전선에서, 그리고 미군의 과달카날 상륙 이후 과달카날에서 일본군 지상 전력이 급격히 소모되면서, 호주에 대한 일본군의 위협은 완전히 일소되었다. 소규모 일본군 병력이 호주 서부에 상륙했다는 떡밥이 있긴 한데, 어차피 전황에 손톱만큼도 영향을 주지 않은 관계로 무시당했다. 이렇게 보면 호주에서 맥아더를 높이 평가해야 맞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평가는 높지만, 막상 미군이 태평양 전선에서 공세로 돌아선 이후로는 맥아더는 호주군의 주 업무를 전략적으로 가치가 떨어져 미군이 지나친 섬들에 대한 토벌전 정도로 한정지었다. 개전 초기, 가장 어려운 전선에서 열악한 여건에도 용감히 싸웠던 호주 사람들은 당연히 격분했다. 다만 이것은 맥아더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한숨 돌린 1943년 후반 이후 미국은 전후 국제정치 판도를 설계하기 시작했는데, 호주군이 필리핀 상륙까지 동행하면서 남서태평양 일대에서 종주권을 행사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만약 호주가 그럴 수 있었다면 전후의 인도네시아 독립과 엮여 어쩌면 태평양권의 군도 몇 군데를 확보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38]
  • 3인칭화로 자신을 지칭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 화법은 전근대 유럽 군주들의 화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냥 웃을 수만도 없다. 예를 들어서 미국 역사뿐 아니라 세계 역사의 최초의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이 자신을 3인칭으로 칭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39] 이건 맥아더가 스스로 황제나 대통령으로 인식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걸 부하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대통령 특사나 장차관들 앞에서도 종종 이런 말투를 썼다고 한다. 처음 접한 사람들은 다들 기겁했다고.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맥아더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런 식으로 말한 꼴이다. 트루먼을 무시하고 문민통제에 반하는 행적을 보였던 사람임을 생각하면 이걸 확대해석이라고 볼 여지가 줄어든다. 최대한 축소해서 봐도, '내가 나인데' 급의 권위주의자였다고 해석해야 한다. 이런 3인칭 화법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면 나오는 것이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야기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런 3인칭 화법을 썼던 것으로 유명하다.[40] 소문으로는 맥아더 본인도 자신을 카이사르의 환생으로 생각했다고 하나 실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전기작가 중에도 이런 떡밥을 문 사람이 있는지 자신의 맥아더 전기 제목을 'An American Caesar(미국의 카이사르)'라고 지었다.
  • 맥아더는 군생활을 공병 장교로 시작했다. 당시 미군에서는 엘리트 코스가 공병이었다고 한다. 이는 이종찬과 비교되는 점이라는 말이 있다.
  • 맥아더는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6개의 펜을 사용했다. 평소에 사용하던 만년필 외에 5개의 펜을 더 사용한 것인데, 이는 종전 문서에 서명한 펜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5개를 더 만든 것이다. 이 중 2개는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항복조인식에 초대된 조나단 웨인라이트 미 육군 중장과 아서 퍼시벌 영국 육군 중장[41]에게 각각 1개씩 선물로 주어졌다. 1개는 아들에게 물려줬고, 1개는 웨스트포인트 미국육군사관학교에 보냈고, 마지막 1개는 미국 국립 문서보관소에 보냈다. 맥아더라는 인물의 치밀함과 동시에 정치적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행동이다.[42] 여담의 여담으로 이 만년필은 모두 Parker사의 듀오폴드 만년필로, 이 때문에 파커 사는 맥아더를 기리는 한정판을 발매하기도 했다.
  • 1890년대 아버지 맥아더가 조선을 방문했었고 고종으로부터 향로를 하사받았고 이를 가보처럼 맥아더 역시 부대에도 가지고 와 전시하고 그러다 필리핀에서 퇴각할 때 분실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게된 이승만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식에 참석한 맥아더에게 똑같은 국보급 향로를 선물로 전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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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맥아더 원수의 무공 훈장에 네 번째 백엽 장식을 서훈하는 트루먼 대통령. 사진 맨 오른편은 오마 브래들리 원수.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 섬.
  • 웨이크 섬의 회담에서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을 마중하기 위해 몇 시간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시간 동안 잠시 눈을 붙인다고 한 게[43]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수하들이 감히 그의 잠을 깨우지 못한 건지 모르지만 트루먼이 도착해서 비행기 문이 열릴 때까지 미처 마중 나가지 못하고 트루먼은 비행기 문에 서서 마중나오는 그를 한참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그 뒤에 트루먼의 표현을 빌자면 "70살 처먹은, 그것도 원수라는 인간이 19살 소위처럼 빌어먹을 선글라스와 채우지도 않은 상의와 부착물들이 잔뜩 달린 모자를 쓰고 나온" 맥아더를 접견하고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트루먼이 "난 당신을 만나려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왔소.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따위 것이 아니오. 당신이 해리 트루먼이란 인간을 어떻게 대접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난 신경 안 쓰지만 다시는 군 통수권자를 기다리게 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하시오. 알아들었소?"라고 말하며 무안을 주었고 맥아더는 이때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44]
  • 제46대 미합중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2016년 대선 토론 중 맥아더를 언급하여 다시금 화제가 되었다.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맥아더 원수를 가장 좋아하는 장군으로 언급하며, 반대로 제임스 매티스 장군은 가장 과대 평가된 장군이라며 평가절하하고 있다.
  • 2017년 12월 17일, 6.25 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측근이었던 에드워드 라우니가 별세했다. 최종 계급은 예비역 중장으로 향년 100세.
  • 여러 모로 맥아더의 파면은 이승만 입장에선 상당히 아쉬운 일이었다. 1951년 당시엔 중공군의 참전으로 눈 앞에서 통일을 놓치게 된 상황에서 휴전에 대한 관심이 쏠리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염원하였으나, 미국 정부의 상당수 요인들은 제3차 세계 대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북진통일을 할 생각이 없었고 따라서 기존의 남한 영토를 어느 정도 수복하고 나면 바로 휴전을 할 생각이었다.[45] 맥아더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이승만과 뜻을 같이하여 북진통일을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었는데 맥아더가 파면되었으니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든든한 후원자를 놓친 셈이었다.
  • 맥아더의 시계는 예거 르쿨트르의 리베르소 모델이다.
  • 뉴욕 주 롱아일랜드롱아일랜드 맥아더 공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헌데 맥아더는 이곳 출신도 아니고 공항을 방문하거나 한 적도 없었다. 그의 필리핀 탈출 무용담이 전해지자 지역 주민들이 그의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해서 붙여진 이름.
  • 서울 워커힐호텔의 더글라스 하우스는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헌데 이곳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워커힐호텔은 1963년 미군 휴양지로 개관을 한 까닭에 호텔 내 건물 모두 참전 미군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 패전 후 일본인들이 맥아더를 숭배한 바 있다. 우상숭배 항목에도 언급될 정도로 강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 최고사령관 재임시절 일본인들의 편지가 44만여 통이나 왔고 대부분 맥아더를 구세주, 신과 같은 자비 등등으로 표현하고 심지어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내용까지 있어 담당관들이 당혹스러워했다고. #
  • 신체 스펙을 보자면 당대 한국인 성인 남성 평균 신장은 160~165cm 사이에 미국 성인 남성 평균 신장이 175cm 안팎이었는데 맥아더는 이렇게 따진다 하더라도 덩치가 큰 편에 속했다. 그래서 6.25 전쟁을 묘사한 창작물에서는 기본적으로 한국인 성인 남성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큰 거인으로 묘사된다. 실제로도 히로히토와 나란히 찍은 사진을 보면 키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심한데, 이건 당대 기준으로 보면 히로히토가 평범한 신장이고 맥아더가 거인인 것이다.
  • 세븐브로이(7 Bräu)라는 국내 양조장에서 맥아, 더(麥芽, more!)라는 이름의 엠버 에일 (Amber Ale) 맥주를 시판한다. 편의점에서 구할 수 있다.


7. 대중매체[편집]


  • 특유의 독특한 인상덕에 조지 S 패튼과 더불어 2차세계대전/디젤펑크 당시 미군 장군이나 미국을 모티브로 한 세력의 장교, 장성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다. 괄괄한 성격에 별단 철모 쓴 양반이 패튼이라면 정모쓰고 담배물고 선글라스 썼다면 이사람 패러디.
  • 닐 스티븐슨의 소설 <크립토노미콘>에 보면 강력한 포스를 뿜어내는 동시에 은근 웃기게 나온다.
  • 일본 우익 만화나 가공전기에선 포로로 잡혀 참수당하기도 한다. 과거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지배받던 시절의 열등감 때문인지 열에 아홉은 맥아더의 상징인 옥수수 파이프를 입에 물려놓고 참수한다.
  • 일본 작가 모토 라이치의 가공전기 만화 몽환의 전함 야마토에서는 주적으로 등장. 다만 육군이라 주인공인 쿠루스와 별 접점이 없어서 비중은 낮다. 어째서인지 실제보다 젊은 모습으로 나오며 상당히 경박한 모습이다. 작가인 모토 라이치는 후에 아사히 신문사에서 출간한 주간 망가 일본사에서 맥아더의 연합군 최고사령부 일본 점령 통치기를 그렸다. 여기서 맥아더는 일본인을 사랑한 푸른 눈의 쇼군으로 군국주의 일본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국가로 만들었다고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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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연히 영화로도 나왔다. 1977년 영화 맥아더에서는 그레고리 펙이 주연을 맡아 열연했다. 펙을 캐스팅한 이유는 실제 맥아더와 닮아서라고. 하지만 연기 자체는 별로였는지 그레고리 팩은 이 영화로 골든 라즈베리상에서 남우주연상을 탔다는 루머까지 돌고 있다. 하지만 실제 골든 라즈베리는 1980년부터 시상을 시작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이야기. 아래의 '오! 인천'의 로렌스 올리비에와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62년 5월 맥아더가 모교인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하여 후배 생도들에게 고별 연설을 하는 장면을 시작과 마지막에 넣고, 그 사이에 2차대전과 6.25 전쟁 시절을 회상 방식으로 보여주는 구성이다. 흥행이나 평가는 그다지 안 좋은데 감독은 바로 죠스 시리즈를 끝장낸 죠스: 더 리벤지 감독인 조셉 사전트(1925~2014)이다.
2차대전 장면은 적절한 고증을 보여 주지만... 2차세계대전이 끝난지 한참 후에야 개발되어 1958년에 첫 시험 비행을 시작한 F-4가 나오는 고증 오류가 있다. 맥아더 미화 때문에 트루먼이나 루즈벨트가 약간 찌질이로 나오지만 의외로 맥아더에 대한 연대기 서술이나 보통은 잘 잊어버리는 일본 군정 시기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KBS 방영판에서 맥아더 성우는 유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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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설의 망작 오! 인천에도 당연히(?) 나온다. 당연히 그레고리 펙을 캐스팅하려고 했지만 통일교 문제로 시끄러워서 본인이 거부하고 로렌스 올리비에가 캐스팅되었다. 상당히 망작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변명하자면 이 영화 촬영 전에 그가 사경을 해맬 정도로 힘든 수술을 했다는 점이다. 사실 그런 점에서 나름 싸게 먹혔고 본인도 돈이 궁했다는 게 정설. 그 자신도 이 영화를 흑역사로 생각해서 언급을 안한다. 그나마 로렌스에게 긍정적인 것은 수술비와 재정 문제를 개런티로 잘 해결할 수 있었다는 점.
  • 한국 드라마에서는 주한미군이나 외국어 강사 등을 섭외해서[46] 지나가는 역이나 공기급 캐릭터로 묘사했다. KBS1에서 1984년에 방영한 2부작 다큐드라마 <전쟁 6.25>와 <휴전 6.25> 연작에서는 당시 유명한 외국인 배우 데니스 크리스틴이 열연했다. 그는 미국 유타 주에서 태어난 백인-원주민 혼혈로, 1966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에 재학 도중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교환학생으로 유학하여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귀국 후 1972년부터 배우가 되어 <스타스키와 허치> 등지에서 조연과 단역을 넘나들다가 1981년 2월 19일 한국으로 또 오면서 정착하여 KBS1 특집극 <코리아환상곡>을 통해 국내 데뷔했고, 대하드라마 <풍운>과 한미수교 백년 특집극 <맥토>, <현대입지전> '북청 물장수', <고교생 일기>, <함 사세요> 등지에 나오며 여느 외국인 배우들보다 활발히 활동했으며, 영화 <경의선>과 <서울이여 영원하라> 등지에도 나왔다. 망작인 <죄 없는 병사들>의 주연 겸 감독이기도 했고 MBC 특별기획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장하림의 상관으로 나왔다. 연기생활 와중인 1984년부터 1년여 간 에 '여의도에 살며' 칼럼을 연재한 바 있으며 1986년에 탤런트 서은경과 결혼해 아들을 뒀다.(1982년 동아일보 기사, 1987년 7권 43호 p51) 반면 1985년작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더글러스 혼이 연기했다. 2020년 JTBC 수목드라마 <쌍갑포차>에서 제임스 니프시가 특별출연해서 연기했다.
  • 당연히 북한 영화에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대전 전투를 다룬 북한 영화에서는 남조선군을 선발에 세우고 부상병을 대포밥으로 만들어라라고 킬킬대는 싸이코 기믹으로 나온다. 물론 따까리는 윌리엄 딘 소장, 결국 영화에서 맥아더는 발리고 딘은 찌질하게 손을 들고 투항한다. 외국인 연기자를 구하기 어려운 나라인지라 딘이나 맥아더 모두 북한 배우들이 연기했고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 한국 NL운동권 세력에게도 매우 부정적인 대상으로 간주되는데, 대표적으로 김남주 시인이 지은 시 <남의 나라 장수 동상이 있는 나라는>[47]과 2005년 강정구 교수의 칼럼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 민중가수 박성환[48]]의 <맥아더>가 있었다. 특히 박성환이 부른 해당 곡은 당시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과 맞물려 논란을 일으켰는데, 이 소식은 2005년 9월 9일 <데일리안>을 통해 처음 보도된 후 연합뉴스 등지 여러 언론에 보도되어 파문이 커졌으며 박성환의 개인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비난 여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해당 노래 가사에는 맥아더의 양민 학살 지시 여부, "서울을 탈취하라, 그곳에는 아가씨도 부인도 있다" 발언 등 사실관계가 불분명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반면 박성환 측은 <미디어오늘> 인터뷰를 통해 다른 입장을 보였다.
  • 같은 시기에 가수 송만기[49]는 박성환의 곡에 응수해 <맥아더를 사랑하자>란 노래를 발표했으며, 2016년 5집 발매 시 <맥아더 장군을 아시나요>로 제목이 바뀌어 나왔다.
  • 미군은 지금까지 그 어떤 무기에도 맥아더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있다.[50] 같이 윗사람에게 대든 알레이 버크 제독의 이름이 이지스 구축함에 붙어있는 걸 보면 맥아더가 얼마나 정치가들에게 미움을 받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일반 시민들의 지지는 높아 맥아더의 이름을 딴 공공건물이나 도로, 거리 이름은 어지간한 대통령보다도 많다. 그 중 하나는 로스앤젤레스의 맥아더 공원.[51] 간헐천으로 유명하고 덕분에 영화 볼케이노에서는 화산 폭발이 일어난다.도나 서머의 노래 'MacArthur Park' 로도 유명한데 디스코음악 전성기 시절 처음으로 빌보드 1위를 하게 해준 노래.
  • 해리 터틀도브의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북부의 명장이자 맥클레런을 존경하는 다니엘 맥아더로 나온다. 웃긴 것은 실제의 맥아더는 스톤월 잭슨을 존경했다. 다만 이 작품의 시대는 남과 북이 갈려 있으니 이야기가 다르다. 1차 대전 당시 최연소 사단장으로 출연해서 그때까지 살아있는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장군의 경쟁자 겸 수제자로 나온다. 둘이 최초로 조우하는 부분은 명장면.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는 필요하다면 남부연합을 독가스로 선제공격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남부연합 후방 지역에 대한 기습 상륙을 입안하는데... 뒤의 비중은 거의 공기 수준. 다만 등장인물의 언급으로 2차 대전 내내 리치먼드 북방에서 남부연합의 방어망에 걸려서 고전하는 것으로 나오긴 한다.
  • 대체역사소설 스탈린의 편지에서는 소련이 대화상대로 맥아더를 점찍으면서 맥아더의 해임이 취소되고 국방장관까지 오르며 미국과 소련의 비밀 거래를 통해 중국과 북한 전체에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면서 6.25 전쟁동북아전쟁으로 확대되며, 한미연합군의 승리로 종전한다. 이로써 맥아더는 미국에서 살아있는 신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게 된다.
  • 만화 보스의 두얼굴에서는 성기 컴플렉스를 가진 FBI 수사관 맥더아로 패러디된다. 일본의 맥아더에 대한 열폭 때문인지 온갖 찌질한 짓을 하다가 결국 미쳐서 본국에 소환당했다가 나중에 총 맞고 죽는다.
  • Steele에서는 1942년 필리핀에서 탈출할 무렵에 강철의 대통령에 의해서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숙청당한다.
  • 매튜 폭스가 출연했던 미일 합작 영화 에선 토미 리 존스가 분했다. 외모 면에서는 싱크로율이 아주 높지는 않으나 맥아더의 거들먹거리는 모습이나 오만에 가까운 행동거지를 매우 적절히 표현했다. 이 영화는 한국에는 <맥아더: 일본 침몰에 대한 불편한 해석>이란 괴이한 제목으로 개봉했다. 제목만 보면 맥아더가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맥아더의 부관 정보장교였던 보너 펠러스(Bonner Fellers) 준장으로, 이 인물은 덴노의 전범 혐의 수사를 맡았던 일본에서의 행적 외에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행적 또한 논란의 대상이라 후세 전사학자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영화는 가공의 사랑타령 때문에 역사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혹평을 들었지만 맥아더 캐릭터만큼은 좋게 평가받았다. 당당한 미국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 월드 오브 탱크 역사웹툰에도 비중있게 등장한다. 트루먼 대통령과 일본 핵폭격 배틀
  • 강해 설교자로 유명한 미국의 목사 존 맥아더가 더글라스 맥아더의 먼 친척이다.
  • 2016년 개봉한 한국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리암 니슨이 맥아더 역을 맡았다. 근데 평가가 매우 안 좋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고.
  • 2016년 9월 21일, 본격 시사인 만화의 한 편에 주인공으로 출연.#잘알려지지 않은 맥아더의 흑역사를 조명했다.
  • 그보다 앞서 역시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가고일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의 더글라스 맥아더도 카리스마와 권력 그리고 인정사정 없는 성격이 가고일에 버금가는 수준이었기에 말이 되기는 하지만... 사실 나중에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패러디한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거기 써먹을려고 패러디한 것 같고 참고로 네모 선장카를 되니츠다. 작중에는 만화가 유럽전선에 비해 태평양 전쟁은 대충 다루는 것에 불만이 엄청 많은 걸로 나온다. 대놓고 작가에게 불만을 표출했다.
  • Hearts of Iron 시리즈 에서는 육군 원수로 개근하고 있다. 3편, 4편 한정 미국 대선 이벤트에서 공화당의 대선후보로 등장할 수 있다. 4편에서 Man the GUNS DLC를 구매하면 2차 남북전쟁이 활성화되는데 파시스트로 가는 경로를 밟아 내전이 일어나면 비동맹주의와 파시즘 지도자로 등장한다.
  • 위 게임의 대체역사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1936년 미국 대선에서 미국 사회당 잭 리드나 미국 제일당 휴이 롱이 당선될 경우, 혹은 기존의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어도 사회당과 제일당이 지속적으로 혼란을 일으키면 맥아더가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쿠데타를 일으킨다. 통칭 "미국의 카이사르". 맥아더의 쿠데타 시 내전은 러스트벨트 지방의 미노조연맹, 남부의 미연합국, 서부의 태평양 합중국의 4파전으로 일어나고, 맥아더의 미국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이기 때문에 플레이 난이도가 높다. 내전에서 승리했다면 군정을 지속할 수도 있고 민정으로 이양할 수도 있다. 민정으로 이양할 시 공화당 대선 후보로 등장한다.
  • 시드 마이어의 문명 VI에서는 위대한 장군 위인 중 한명으로 등장한다.
  • 도미네이션즈에서 영웅으로 등장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멕아더(도미네이션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더글러스 맥아더(검은머리 미군 대원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도 등장. 한국군이 활약하자 미군도 활약해야한다며 손수돌격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도 유진 킴이랑 친하게 지내는듯.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루즈벨트가 당선에 실패하고 뉴딜이 없어서 대공황으로 막장이 되어버린 미국에 계엄령이 떨어지자 계엄 사령관으로 미국을 통치하는데 빨갱이, 노조, KKK, 우익 민병대, 마피아, 흑인민권론자, 대기업 트러스트, 마약사범들을 좌우 안가리고 평등하게 조져버린덕에[52] 워낙 막장인 미국을 강하게 때려잡아서 어느정도 질서를 유지하지만 역시나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서 미국인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 우익이지만 아버지가 흑인해방을 위해 싸웠다는 것 때문에 흑인민권론자를 때려잡으면서도 흑인들을 차별하지는 않는다. 막장인 미국을 계엄령을 유지하여 질서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의회의 압박에 궁지가 몰려 노스우즈 작전9.11테러를 섞은 자작극을 꾸미다가 적발되어 퇴진한다.
  • 디스트로이 올 휴먼즈 시리즈에 나오는 암퀴스트 장군은 맥아더를 모티브로 했다. 반공주의 장군이지만 주인공에게 살해당한 뒤 거꾸로 용공분자쿠데타를 획책한 것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3부 - 전장의 묵시록中[53][54][55]


8. 둘러보기[편집]






9. 외부 링크[편집]


맥아더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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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발음은 "매카써" 혹은 "머카써"에 가깝다. "맥아더"라는 표기는 영어 철자 th를 θ와 ð 발음 구분없이 "ㄷ"으로 옮기고, 연음에 대한 고려 없이 접두사 "맥"과 어근 "아더"를 따로따로 표기한 뒤 그대로 붙여 놓던, 실제 발음과는 동떨어진 과거의 표기 관행에 따른 것이다. 한국식으로 "매가더"라고 발음할 경우 영어권 화자가 그것이 "MacArthur"임을 알아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본에서는 "マッカーサー(맛카ー사ー)"라고 표기하는데, "맥아더"보다는 실제 영어발음에 훨씬 가깝다. (영국식 영어발음으로 읽으면 거의 차이가 없다.) 비슷한 예시: Thatcher (새처→대처) , throw in (스로인→드로인), Nathan (네이선→나단), Ethan (이선→에단) Heathrow (히스로→히드로)[2] 원수는 정년 없이 종신 복무토록 규정되어 있어, 비록 은퇴하여 실제 근무는 안 하고 그냥 집에서 놀더라도 군에서 받은 의전 예우 그대로 받으면서 지내는 게 가능하다. 원수 개인이 "전역"을 희망하면 예비역으로 신분 전환되는데, 이를 이용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잠시 전역 신청 후 대통령 임기 만료 뒤 육군의 예비역 소집 명령을 받는 식으로 다시 육군 원수 자리를 유지했다.[3] 또는 맥아더 원수.[4] 반대로 아이젠하워는 유럽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 육군 원수로서 연합군을 지휘했다.[5] 사실 연합군 점령하 일본 시기 당시 맥아더의 권위와 권력은 쇼군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였다. 적어도 쇼군은 최고 권력자였지만 천황의 신하인 것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는데, 맥아더는 쇼와 천황과 같이 찍은 사진에서 알 수 있듯 자신이 천황 아래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당시 덴노건 쇼군이건 결국에는 일본 내에서 일본 내의 무언가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지만 맥아더는 미국이라는 엄청난 대국을 뒤에 둔 미국의 고위인사인데다가 2차 세계대전 승전으로 미국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 직접적 패전국인 일본에서 절대자일 수 밖에 없었다.[6]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아시아인들을 선정한 것인데, 이 리스트에서 맥아더는 마하트마 간디, 덩샤오핑, 아웅 산 수지, 리콴유, 코라손 아키노 등과 함께 정치인으로 분류되었으며 정작 일본 태생의 정치인은 리스트에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7] 전후 일본의 경제적 재건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LA 타임즈가 선정한 '20세기 경제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 리스트에도 포함되었으며, 정치인 중에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다음으로 높은 순위를 기록하였다. #[8] 다만 이 비판이 무색하게 맥아더 본인도 6.25전쟁 당시 만주지역에 핵공격을 주장했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결국엔 해임당했다. 하지만 평가 항목의 핵공격 주장을 보면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은 아니였다. 어떻게보면 공개적으로 핵 얘기를 꺼내서 겁만 주는 것으로 끝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해임건도 이것만으로 해임사유는 아니지만 말기에 정치군인의 길을 걷다가 트루먼과 사이가 나빠져 이것으로 해임시킬 마지막 명분이 됐을 뿐이다. [9] 초대 수훈자[10] 본래 옛 군가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인데, 오늘날에는 맥아더가 한 말로 기억되고 있다.[11] 퇴역식의 연설 중 나온 어록이다.[12] 위에 소개된 '노병은 죽지 않는다'와는 달리, 이 말은 맥아더의 오리지널 어록이다.[13] 1962년 5월 모교인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하여 후배 생도들에게 '군인이 명심해야 할 가치'로 역설한 말이다.[14]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에도 쓰여 있는 말이다.[15] 핵무기의 위력을 보고 한 말이다.[16] 일본군의 침공으로 필리핀을 탈출하면서 한 말로, 그는 결국 이 약속을 지켰다.[17] 위 연설과 연결되는 내용으로, 필리핀 수복 직후의 연설이다.[18] 일본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한 말이다. 보통 일본을 놀릴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고 당시 일본인들도 격분했으나 전체적인 내용은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독일이 45세의 지능범이라면 일본은 12세 소년이니 벌을 주기보다는 이끌어 줘야한다고 일본을 쉴드쳐준 것이다.물론 그 이후에도 미국은 계속 일본을 견제했다는게 함정그리고 미국은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19] 수십 억 원을 넘게 쏟아부어 양성한 엘리트 조종사들의 목숨을 물 보듯 하는 비인간적인 측면과, 정작 성공했다고 쳐도 카미카제에 당한 미군의 군함에는 별 피해가 없는, 그야말로 인명 경시와 전력 낭비의 끝판왕이기 때문.[20] 6.25 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에 주둔한 미군이 한국으로 가면 일본군이 반란을 하지 않겠냐는 미국 기자의 질문에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고 한다. 과연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종전 후 맥아더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수많은 일본인들이 울면서 환송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칼 맞아 죽은 쇼군들은 몇 명 있다.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아시카가 요시노리, 아시카가 요시테루 등...[21] 혹은 "전쟁에는 민주주의가 통하지 않는다."[22] 사무엘 울만(Samuel Ulman․1840~1924)의 시로 맥아더 장군이 일본 점령군 사령관 시절 집무실 벽에 걸어 놓고 늘 읽었다.[23]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했던 말이다. 사실 독소전 초기 더글라스 맥아더 뿐만 아니라 니미츠와 아이젠하워를 포함하여 소련군의 군사 업적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발언들을 많이 했다.[24] 체스터 니미츠 원수의 아들인 체스터 니미츠 주니어는 일찍이 아버지와 같은 전장에서 잠수함 함장으로 활약했으며, 1957년에 해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Texas Instruments에 입사하였다. 미 해군사관학교 엘머 B. 포터 교수의 저술로 1977년에 나온 니미츠 전기에 의하면, 니미츠 주니어는 부친의 후광과 그 자신이 전쟁에서 세운 공적으로써 충분히 4성 제독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변질된(?) 해군 장교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이 생겨 결국 전역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니미츠 원수는 아들이 해군을 떠나는 것을 달가워하지는 않았으나, 따뜻한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25] "애비에이터" 라고 부르는 모델로, 탑건매버릭이 썼던 모델이기도 하다.[26] 탈모가 있어서 전쟁 중 사진에는 모자를 벗은 것이 없다. 그나마 모자를 쓰지 않고 찍은 대표적인 것은 히로히토와 나란히 서서 같이 찍은 사진이다. 독일군마냥 정모를 찌그려 놓은 게 특징인데 이런 정모를 크러셔 캡이라고 부른다.[27] 이렇게 당사자한테 의도치 않게 이미지를 주게 되는 비슷한 사례로 윈스턴 처칠이 있다. 괴벨스 때문에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슨 마피아 두목과 같은 이미지를 얻게 되었으며 당사자는 무척이나 싫어했지만 정작 국민들은 엄청 좋아했다고 한다. 나치들을 정말로 마피아가 하는 것 마냥 모조리 소탕해버릴 듯한 강인한 지도자의 모습이 연상 되어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이러한 우연을 겪은 또 다른 주인공으로는 KFC의 창업자인 할랜드 샌더스를 꼽을 수 있겠다. 겨울용 검은 정장을 세탁한 바람에 여름용 흰색 양복밖에 고를 수 없는 상황이어서 별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입고 나갔었는데, 되려 긍정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아예 그의 상징으로 거듭나게 되었다.[28] 참고로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가 직접 바닷물을 헤치며 육지로 걸어 올라오는 유명한 사진 역시, 미군의 강인함과 의지를 드러낼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한 사진이다.[29] 근데 이 말은 반대로 말하면 맥아더가 콘콥을 호불호와는 별개로 실제로 자주 썼다는 뜻이다. 콘콥이 소모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젓가락으로 비유하자면 은젓가락이나 자개로 장식된 젓가락과 같은 명품을 애장품으로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바깥에서 식사할 일이 많으면 1회용 나무 젓가락을 자주 쓰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현대에도 여행이나 출장을 자주 다니는 파이프 흡연자라면 훼손 또는 분실되거나 챙기기 번거로우면 버리고 와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콘콥 1~2개를 가방에 쑤셔넣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맥아더의 경우 아버지가 고종 황제에게 선물받은 향로를 전쟁터에까지 가지고 다니며 전시했다고 할 정도로 호사를 즐기는 성격이었다고는 하나 전쟁터를 돌아다니는 군인인 입장에서 파이프와 같은 사소한 물건일수록 쉽게 버릴 수 있는 소모품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30] 대통령 후보 출마 시에 맥아더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은 보수적인 농촌 주민들에게 콘콥은 몇 번씩 직접 만들어서 써 본 소박하고 익숙한 아이콘이다.[31] 林炳稷, 《臨政에서 印度까지 : 林炳稷外交回顧錄》, 1964, 女苑社, p. 389[32] 이 일화는 1985년 KBS 드라마 - 오성장군 김홍일 3부 (1:40:28초 장면) 그리고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도 재현되었다.[33] 맥아더 장군을 감동시킨 국군 병사 일화가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맥아더 장군과 달리 다른 대부분의 미군 장교들은 한국군의 군기와 전투력을 매우 회의적으로 보았다. 문제는 미군 선발대로 투입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군기와 전투력 역시 한국군과 크게 다를바 없었다는 점.[34] 원문에는 제8연대로 오타 실수가 있는데 신동수 일병의 소속부대는 제18보병연대가 정확하다[35] 사실 식민지에서 해방된지 10년도 되지않아 나라가 두동강난데이어 전쟁으로 낙동강 바깥 지역의 국토는 모조리 황폐화되고 수십만의 청년들이 전투에서 죽거나 다치고 심지어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들 역시 폭격, 학살 등으로 엄청난 사상자 발생해서 국가 역량을 책임질 청년층의 감소까지 겪었으니 일반적인 생각으론 나라가 망하지 않는 걸 기적으로 여겨야할 판이다. 즉, 맥아더의 예상은 이런 상황에선 지극히 당연했던 것.[36] "한국의 전후 발전상을 본다면 무덤에서 맥아더 사령관이 일어나 춤을 출겁니다... 오늘날 한국의 모습은 맥아더 사령관이 모든 것을 바쳐 지키고자 한 자유와 번영의 상징입니다" 라는 맥아더재단 사무총장 윌리엄 데이비스의 언급이 전쟁기념관에 기록되어 있다[37]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코코다 트랙 전투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실제로 맥아더는 트롤링만 일삼았고 제대로 싸운 이는 현지의 호주군 지휘관이었다.[38] 동티모르 사태에서도 호주와 인도네시아는 대립하는 관계였다.[39] 물론 이 때는 아직 대통령이라는 직책 자체가 완전히 정의되지 않았던 시기였던 탓이 컸다. 즉, 당시에는 대통령을 전제군주와 구분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태반이었다는 말. 그렇긴 해도 사실 워싱턴은 미국의 왕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지만 임기를 마치자 칼같이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내려온 만큼 그의 어투는 야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그 무욕은 존경받아 마땅하다.[40] 이와 동시에 카이사르처럼 공화정부의 군대를 가지고 당시 정치체제가 자신에게 가하던 견제에 반하는 행동을 한 인물이었단 조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카이사르와 맥아더의 차이는 이런 행보가 성공해서 임기 없는 독재관이 됐냐, 실패해서 정치적 입지와 군사적인 존경을 잃었느냐로 볼 수도 있다.[41] 싱가포르 전투에서 패배하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42] 단 이는 의외로 흔한 사례로, 버락 오바마 미합중국 대통령의 경우에도 한 번의 서명에 20여 개에 달하는 만년필을 사용하기도 했다.[43] 여기서도 맥아더는 잠시 눈을 붙였다고 하고, 트루먼 회고록에서는 쿨쿨 잤다고 깠다.[44] 트루먼이 말년에 쓴 회고록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이 회고록은 맥아더를 사정없이 까는 걸로 꽤 유명하다. 트루먼이 맥아더를 철저하게 미워하게 된 이후의 증언이라 좀 가려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70대의 원수가 19살 소위처럼 군다. 운운하는 이야기도 여기서 나온다.[45] 미국 측도 휴전을 굉장히 하고 싶었다는 점은 여러 모로 알 수 있는데, 우선 회담장을 개성으로 정한 점, 전쟁 중이지만 개성만큼은 절대 점령하지 않겠다는 언질을 공산군 측에 말한 점 등이 대표적이다.[46] 대표적인 예로 MBC 주간드라마 <아버지와 아들>과 <야망의 25시> 등지에 나왔던 크리스티나 한과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에서 손탁 역을 맡았던 게일 제닝스 등이 있다.(참고)[47] 김남주 옥중시집 <저 창살에 햇살이(1992)> 2탄 수록.[48] 부산예술고등학교 및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출신.https://www.mk.co.kr/news/all/2530678[49] 1979년 TBC 전국 대학가요 경연대회 출신이며, 양평군의원 재직 경력도 있다. 2017년 초에 박근혜 대통령 찬양가를 제작해 파문을 일으켰다.[50] 육군 원수 아이젠하워의 이름은 니미츠급 항공모함에 붙어있다.[51] LA 한인타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나 이미 오래 전부터 노숙자들의 천국으로 보통 사람들은 잘 찾지 않는다.[52] 추산치가 사망자 5만에 체포된 사람이 50만명, 200만명이 부상당했고 물론 연방군이 직접 죽인건 10분의 일이라서 그 정도만 발표하고 나머지는 누락했다.[53] 2019년 6월 22일 방송[54] 13:00 쯤부터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맥아더와 시간 순서에 따라 한국 전쟁 당시의 모습까지 간략히 다루고 있다[55] 역사를 움직인 운명의 순간과 전장의 삶과 죽음의 모습에서 펼쳐진 극한의 이야기를 20세기 영상 매체 발명 후 기록된 영상들을 수집하여 대표적인 일부 전투를 통해서 바라본 다큐멘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