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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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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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達
?~228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유봉과의 마찰과 관우의 죽음
2.2.1. 상용에서
2.2.2. 관우에게 원군을 보낼 수 있었나?
2.2.3. 맹달의 지원군?
2.3. 위나라에 투항하다
2.4. 다시 위나라를 배반하다가 죽다
2.5. 맹달과 제갈량의 계획
3. 평가
4.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이자 후한의 양주자사 맹타의 아들. 자는 자경(子敬)이었는데 유비의 숙부 이름이 유경(劉敬)이었기 때문에, 피휘하여 자도(子度)로 바꾸었다. 옹주 부풍군 미현 사람.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건안(建安; 196년 ~ 220년) 초기, 동향 사람 법정과 함께 기근을 피해 으로 들어가 익주(益州)자사(刺史) 유장을 섬겼다. 별가(別駕) 장송이 유장에게 조조와 관계를 끊고 유비와 결탁하여 한중을 뺏을 것을 권하자, 유장은 법정과 맹달에게 각각 2천 명의 병졸을 주어 유비를 지원하도록 했다. 하지만 법정과 맹달은 유비가 입촉(入蜀), 즉 익주를 정복하는 것을 도와줬고, 유비가 유장을 항복시킨 후 맹달은 의도군(宜都郡) 태수(太守)에 임명되었다.[1]


2.2. 유봉과의 마찰과 관우의 죽음[편집]



2.2.1. 상용에서[편집]


서기 219년, 유비는 조조를 몰아내고 한중을 손에 넣고 맹달과 유봉에게 상용군(上庸郡)을 공격하게 했다. 맹달은 자귀현(秭歸縣)에서 출정하여 방릉군(房陵郡)을 쳐서 방릉군 태수 괴기(蒯祺)[2]를 죽였다. 그리고 나서 한중에서 출정하여 면수를 타고 내려온 유비의 양아들 유봉과 함께 상용군을 공격하여 상용태수 신탐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과정에서 신탐 형제를 휘하에 거느리게 된다.

그 해에 관우(關羽)가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제 막 복속시킨 군들을 동요시킬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그런데 관우가 패사하는 바람에 유비가 이 일을 원망하였다.[3] 더구나 유봉과 화합하지 못해 군악대를 뺏기기도 하였다.[4]

유봉전에는 이 당시 상황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상용태수 신탐은 사람들을 인솔하여 투항하고 처자와 종족 사람들을 성도로 보내 인사하도록 했다. 유비는 신탐에게 정북장군의 지위를 주고, 상용태수 원향후를 이전처럼 겸임시켰으며, 신탐의 동생 신의를 건신장군ㆍ서성태수로 임명하고, 유봉을 부군장군으로 승진시켰다.

- 촉서 유봉전


신탐, 신의 형제에게 유비는 충분한 대우와 벼슬을 주었으며 거기에 이 형제들은 스스로 처자와 일족 모두 성도로 보내기까지 했다. 항복했다고는 해도 상당한 대우를 받았고 일족을 굳이 성도로 알아서 보냈다는 거 자체가 당시 천원돌파하던 유비군에 기세에 가세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득이라고 판단했다는 것.[5] 조금만 유봉이 신경 썼더라면 상용은 안정적으로 관리될 수도 있었다.


2.2.2. 관우에게 원군을 보낼 수 있었나?[편집]


관우가 원군을 꾸준히 요청한 건 7군 수몰 이후 번성포위망을 구축하고 병력을 충원해달라는 그 시기다. 즉, 관우는 빨리 번성을 함락시키고 수비를 굳건히 하려는 거지 연의에서처럼 서황에게 패한 다음, 형주가 함락되고 맥성에 포위되고 병력이 해체되었을 때서야 요화를 시켜 뒤늦게 상용에 원군을 요청한 게 아니다. 당시에는 서황조차 병력의 질과 양이 부족해 관우를 치지 못하고 있었고 이 상황이 무려 두 달간이나 이어졌다. 이 상황에서 얼마간의 지원군이라도 더 보탬이 되었다면 관우의 번성 함락 가능성은 조금이나마 더 올라가는 것이다. 물론 상용의 안정을 희생해야 한다는 리스크가 존재하긴 하지만 말이다.

북쪽에는 위군, 남쪽에는 오군이 있는데 강릉을 빼앗겼을 때 관우와 약간의 상용군이 같이 있었던 상태였다면 관우는 상용군과 함께 상용 쪽으로 이동할 수 있다. 관우가 결정적으로 패망한게 형주군의 가솔들이 모두 인질로 잡히는 바람에 휘하 병력을 모두 상실했기 때문인데 상용군은 형주군과 달리 가솔들이 붙잡혀 있을 가능성이 없으므로 관우는 어느 정도 병력을 가지고 안전을 도모한 채로 상용으로 귀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6]

관우가 죽은 곳이 임저다. 임저에서 서북쪽 안으로 들어가면 상용 소속 방릉현이다. 방릉은 남쪽에 각각 임저, 의도로 향해 강릉으로 갈 수 있는 허브지점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 요충지였다. 따라서 임저를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면 관우가 살아남을 가능성도 컸다. 상용을 정벌할 때 맹달이 의도에서 출발하는데 의도는 임저보다 남쪽이다. 관우가 임저를 돌파할 병력만 있었어도 상용 귀환은 무리가 아니었다.


2.2.3. 맹달의 지원군?[편집]


맹달을 옹호할 요소가 한 가지 있다면 (건안 24년(219) 11월[7]) 방릉태수 등보, 남향태수 곽목을 육손이 공격해 대파했다는 육손전 기록이다. 방릉은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임저와 가까운 곳이고 남향군은 관우가 태수를 잡아 복속시킨 지역으로 상용의 동쪽이다. 게다가 방릉은 유봉과 맹달 소유의 상용군 일대이니 상용에서 군사를 내 관우를 구원하려고 했다는 정황증거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맹달이 유비를 저버리고 위나라에 항복하면서 했던 '형주가 패배하여 괴멸되자, 대신은 통제하지 못해 백의 하나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신만이 일을 찾아 스스로 방릉(房陵), 상용(上庸)에 이르러 몸을 구걸해 밖에서 자방(自放)했습니다.'라는 말은 맹달은 유봉과 불화하면서 여의치 않은 상황에도 뒤늦게나마 따로 최대한 여력을 내어 등보와 곽목을 보내 관우를 지원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변명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맹달의 잘못은 경감될 여지가 생긴다.

실제로 익주와 형주는 큰 산맥으로 떨어져있지만 대신 장강을 타고 내려가긴 편하고 유비가 미리 파군태수로 장비를 임명하는 등 배후지인 파군의 군사력도 강화시켰던 상태였다. 그래서 관우를 구하려던 촉군이 의도군 현지의 호족과 연계하여 육손과 싸웠던 기록이 있는데 맹달 역시 이에 합세해 공격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2.3. 위나라에 투항하다[편집]


맹달은 관우의 죽음에 대해, 조정에서 그 책임을 물을 것이 두려웠다. 여기에다 또 자치통감에 따르면 유봉이 맹달을 침해하고 능멸하니 맹달이 부아도 치밀어 자신의 부곡을 무려 4천 여가(家)(자치통감)[8]나 이끌고 유비에게 작별 편지 하나 남긴 채 위나라로 귀순하였다.

엎드려 생각컨데 전하가 장차 이, 여의 업을 세우고, 환, 문의 공을 쫓아 큰일을 시작하고 오, 초를 빌려 있음으로 선비들이 취지를 깊이 바라 볼것입니다. 신이 헌신한 이후 죄의 눈물이 산을 이루어 신이 여전히 스스로 아니 하물며 군주께서 모르겠습니까?! 지금 왕조가 흥함으로서 영준익(英俊鱗) 군집하였는데, 신은 안으로는 보좌의 그릇이 없고 밖으로는 장령의 재주가 없으나 공신의 열에 오르니, 살펴보면 스스로 부끄럽습니다.

...(중략)...형주가 패배하여 괴멸되자, 대신은 통제하지 못해 백의 하나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신만이 일을 찾아 스스로 방릉(房陵), 상용(上庸)에 이르러 몸을 구걸해 밖에서 자방(自放)했습니다. 엎드려 생각컨데 신의 마음을 근심하시고, 신의 거동을 애도하시는 전하의 성은은 느끼어 깨닫습니다. 신은 진실로 소인이라 처음부터 한결같이 그것을 알 수 없었으니 감히 죄가 아니라 말할수 없었습니다! 신은 매 사이를 절교할 때마다 나쁜소리가 없었으며 나아가 원한없이 떠나니, 신은 군자의 가르침에는 틀렸으나 원컨데 군왕께서는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조비는 맹달에 대한 높은 평가를 익히 들었던 터라 매우 기뻐하였다. 그 등을 어루만지며 유비의 자객은 아닐 것이라는 농담과 함께 자신의 수레에 태워 환영하였다. 위나라의 안목 있는 여러 고관들도 맹달을 악의에 비견하며 장수의 재목이라거나 재상의 그릇이라고 평하였다. 그리고 조비는 맹달의 외모를 매우 좋아했다. 산기상시(散骑常侍), 건무장군(建武將軍)에 임명되고, 평양정후(平陽亭侯)에 봉해졌다. 또 상용군, 방릉군, 서성군(西城郡) 3군을 합병하여 새로 만들어진 신성군(新城郡)의 태수까지 겸하여 위나라 서남방의 일을 맡게 됐다. 오직 유엽사마의만이 맹달을 믿을 수 없다며 중용해서는 안 된다고 간했는데 조비는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 장담하였다.[9]

조비가 황제에 오른 후 하후상, 서황과 함께 상용 일대를 공격하여 유봉을 성도로 쫓아냈다.

연의에서는 이후 위나라가 오로 연합군을 결성해서 촉한을 공격할 때 상용에서 한중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자 제갈량은 맹달의 친구인 이엄이 쓴 것처럼 꾸민 가짜 편지를 맹달에게 보냈고, 맹달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병을 핑계로 임무에서 빠졌다고 묘사한다.

의외로 삼국지 팬덤에서 묻히는 부분이 있는데, 조비는 촉의 국력 상황보다는 촉은 어떠한 요리를 즐기고 발달해있는가에 훨씬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촉이 꿀과 엿을 활용한 고기 요리가 발달했다는 말을 듣자 단맛이라면 환장하는 조비가 놀라서 신하들한테 "촉은 고기 요리에도 단맛 식재료를 쓰는데, 우리도 그렇게 하자." 말했을 정도다. 이를 통해 오늘날에는 맵고 자극적인 맛으로 유명한 사천 요리가 1900여 년 전에는 오히려 단맛을 선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


2.4. 다시 위나라를 배반하다가 죽다[편집]


226년 맹달을 총애하던 조비가 죽었다. 친하게 지내던 환계와 하후상도 이미 세상을 떠났었다. 항복한 장수 출신인 데다가, 이미 국경 지방에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던 맹달로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매우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225년 촉한의 대군이 남중을 지나 북으로 돌아와 주제군에 이르렀을 때 위나라에서 투항한 이흥이 제갈량에게 이번에 촉으로 오면서 공교롭게 북으로 와서 위나라에 항복한 왕충을 만났는데 그는 맹달의 처소에서 제갈량이 이를 갈며 맹달의 처자를 죽이려 한 걸 유비가 만류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제갈량은 본말을 잘 살피는 사람이라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오" 이는 맹달이 제갈량에게 아직 존경심을 품고 있는것을 뜻하니 제갈량은 장완과 비시 두 사람에게 맹달에 서신을 보내겠다고 했다. 이렇게 촉의 제갈량이엄이 접근해왔다. 오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227년(태화 원년) 한중에서 북벌을 시작하려던 제갈량은 거사를 벌이기로 한 맹달이 언행(言行)을 늘 이랬다저랬다하여 자꾸 고쳤고 또 그가 화를 일으키기를 염려했다. 당장 촉에서도 맹달에 대해 우려하는 반응이 있었다. 비시는 맹달은 이미 여러번 배반한 자이며 관성(款誠)이 없으므로 믿어선 안 된다고 했다. 제갈량은 그렇기에 그동안 맹달의 거듭한 배신, 변심(反覆)행위를 할까 우려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결국 맹달의 거사를 재촉하고 그의 태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곽모를 위흥태수 신의에게 위장 귀순시켜 그간의 모의를 흘렸다.[11]

≪전략(戰略)≫에 따르면 곽모와 신의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

태화 원년, 제갈량이 성도로부터 한중에 도착하자 맹달이 또한 제갈량에 호응하고자 하여 제갈량에게 옥결(玉玦), 직성장즙(織成鄣汁), 소합향(蘇合香)을 선물로 보냈다. 제갈량은 곽모에게 거짓항복하여 위나라로 가게 했다. 위흥태수 신의(申儀)는 맹달과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는데 곽모가 신의에게 말했다.

옥결은 모책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말이고, 직성(織成)은 모책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말이고, 소합향(蘇合香)은 일이 이미 합해졌다(事已合)는 말입니다.


맹달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신의는 표를 올려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누설을 알게 된 맹달은 서둘러 거병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예는 맹달이 은밀하게 촉과 밀통하고 있다는 표를 믿지 않았다. 맹달에게는 좋은 기회였지만 이에 남양군 완현(宛縣)에서 정무를 보던 표기장군 독형예이주제군사(督荊豫二州諸軍事) 사마의는 맹달이 신속하게 거병하여 나설까 두려워하여 서신을 보내 그를 회유했다. 이는 당시 사마의가 맹달이 신속히 거병하면 이를 막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뜻한다. 마침 조예는 맹달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믿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편지를 보내 그를 회유하려 했던 것이다.

장군은 옛날 유비를 버리고 우리나라에 몸을 맡겼소. 장군에게 변방의 요직을 맡기고 장군으로 하여금 촉을 도모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가히 마음이 백일을 꿰뚫었다고 할 만 하오. 촉의 사람들로 말하면 어리석든 지혜롭든 가리지 않고 모두 장군에게 이를 갈고 있소. 제갈량은 그대를 파멸시키고자 하지만 오직 방법이 없는 것만 걱정했소. 곽모의 말은 작은 일이 아닌데, 제갈량이 어찌 이를 가벼이 여기고 누설할 수 있겠소? 이는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오.


맹달이 서신을 읽고 안심하며 거병을 하지 못하고 또 망설이며 결단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마의의 태도가 바뀐다. 사마의는 참군 양기(梁幾)를 파견해 실상을 조사하는 한편 맹달에게 입조를 권하였다. 사마의의 편지로 인해 거병을 망설이던 맹달은 놀라서 비로소 난을 일으켰다. 명제기에 보면 227년 12월, 마침내 조예는 표기장군 사마의에게 맹달의 난을 토벌하게 했다. 처음 신의가 표를 올렸을 때는 맹달의 반란을 믿지 않던 조예가 이렇게 태도를 바꾼 것은 그 사이 누군가가 조예의 판단 과정에 개입을 했다는 증거이고 이는 즉, 사마의가 맹달에게 편지를 보내 맹달이 준비하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아군이 준비할 때까지 시간을 끄는 사이 군주 조예가 뜻이 바뀐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즉, 사마의는 우선 맹달에게 편지를 보내 그가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안심시킨 후 낙양에 표를 보내 조예를 납득시켰을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신성군의 지세는 맹달이 일찍이 백마새(白馬塞)에 올라 '유봉과 신탐은 이런 금성천리(金城千里)에 웅거하고도 땅을 잃다니!'라고 놀랐을 정도로 깊고 험했다. 맹달이 사마의가 자신이 반란했다는 사실을 알고 낙양의 조예에게 표를 보내고 토벌하라는 명을 받는 데는 시간이 걸릴 테고 바로 사마의가 직접 오진 않을 테니 걱정없다고 방심하였는데 이미 사마의는 맹달을 토벌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맹달이 거사하자 신속하게 은밀히 병사들을 보내 전진하여 맹달을 토벌하였다. 사마의는 주태(州泰)를 선봉에 세우고 바로 출진한 데다 1,200여 리 길을 두배의 속도로 강행군하여 8일 만에 신성군 상용현에 도달했다. 사마의의 신속한 공격에 상용은 쉽게 무너졌고[12], 촉나라와 오나라의 원군은 상용에 다다르지 못해 맹달을 구할 수 없었다.[13] 사마의가 맹달의 대장 이보와 맹달의 조카 등현을 유인하자, 등현 등은 성문을 열고 군대를 맞아들였다. 맹달은 16일 만에 사로잡혀 참수되었으며, 그 머리는 낙양으로 보내져 불태워졌다. 제갈량의 북벌이 바로 시작되던 228년 정월이었다.[14]

"宛去洛八百,去此千二百里,聞吾?事,當表上天子。比相反覆,一月閒也;則吾城已固,諸軍足辨。吾所在深險,司馬公必不自來。諸將來,吾無患矣。"

("남양군[15]

은 낙양과 800리 떨어져 있고, 이 곳 상용군과는 1,200리나 떨어져 있습니다. 제가 거병을 했다는 소식을 들어도 먼저 천자께 아뢰어야 합니다. 말이 오고가다 보면 한 달은 걸릴 겁니다. 그러는 사이에 제 성의 방비도 강화되고, 군사 준비도 끝마쳤을 것입니다. 제가 있는 곳은 외지고 험한 지형이니, 사마의는 분명히 직접 오지 않을 겁니다. 여러 장수가 와도 저는 걱정이 없습니다." - 제갈량에게[16])

"吾起事八日,而兵至城下,何其神速也!"

("제가 거병한지 8일밖에 안됐는데, 벌써 적군이 성 밑에 와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나 빠를 수가 있다니요!" - 사마의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제갈량에게)

- ≪화양국지(華陽國志)≫ 권2ㆍ<한중지(漢中志)> 제9[17]


맹달이 죽은 후에 반역의 고장 신성군은 신성군, 상용군, 석군으로 3분할되었다. 한편 촉에 남기고 온 아들 맹흥(孟興)은 의독군(議督軍)으로 있다가 촉이 멸망한 후 264년(함희(咸熙) 원년) 부풍군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유봉의 아들 유림(劉林)은 하동군(河東郡)으로 이사갔다. 위나라에서의 가족 기록은 없다.


2.5. 맹달과 제갈량의 계획[편집]


관우의 번성 공방전, 유비의 이릉대전의 실패 덕에 일방향으로 나갔던 제갈량의 북벌이지만, 어디까지나 융중 초려에서 최초로 세웠던 계획은 진천/완락 동시 진공이었다. 형주를 잃은 이상 완락 방면으로 나가는 역할은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는데 살펴보니 조비 죽고나서 인맥빨로 살아온 놈 하나가 위나라 복판에서 삐걱거린다? 더군다나 맹달이 당시 진수했던 신성군(방릉-상용-서성)은 양번, 완으로 대표되는 위나라 형주 북부와 굉장히 맞닿아 있는 지역. 게다가 맹달은 원래 촉한 소속에 팔랑귀(...)이니 쉽게 변절했고 227년 한중 주둔부터 1년간 작업에 들어갔을 것이다.

자치통감을 보면 맹달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구원하러 온 것은 당연하게도 목란새 방면의 촉군과 뜬금포인 서성 안교 방면의 오군, 물론 맹달이 오와도 교류를 했다곤 하나, 사실상 남의 나라 카드임에 분명한(촉이건 위건) 일개 태수를, 전혀 관계없다해도 무빙한 오가 굳이 병력을 동원해 구원한다? 그것도 맹달을?

제갈량의 북벌 당시 촉군과 오군의 연계는 5차북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바로 이때가 최초라고 추정할수 있다. 맹달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도, 촉 뿐만이 아니라 촉-오의 긴밀한 커넥션 하에 주도된 일이며,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공을 들여 맹달이 형주 북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주기만 한다면, 그걸 기점으로 오는 합비 내지는 형북으로 진출하고(이로서 맹달과의 커넥트 및 완락 진공) 촉은 기산 제갈량, 야곡(진천방면) 조운 식으로 총 3방향 진공작전을 펴러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리되면 서북/동남방면 양방향 구원군이었던 조진/장합의 관중군 전력도 1차보다 더 크게 분산시킬 수 있고[18] 장합이 석정 때처럼 사마의(조휴) 구원군으로 가고, 야곡에서 종래대로 조운이 조진을 낚는다면, 제갈량은 옹주에 사실상 무혈입성하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이렇게만 본다면 실로 그 모든 드림 시나리오의 키포인트를 쥐고 있던 인물로 반란을 부추긴 것도 시일이 너무 지체될수록 좋을 것 없으니 마치 시한폭탄 원격조종해서 터뜨리듯 선택지 하나밖에 없도록 만든 건데 글쎄 이놈이 사마의 늦게 올 거예염 데헷(...)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걸 또 구원하러 가던 촉/오군의 심정은 그냥...아예 버리는 카드였다면 굳이 양군이 모두 구원하러 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사마선왕이 맹달의 대장 이보(李輔)와 맹달의 조카 등현(鄧賢)을 유인하자, 등현 등은 성문을 열고 군대를 맞아들였다.

"맹달의 군사가 적어 그 식량이 1년을 지탱할 수 있었으나 우리의 장병들은 맹달의 군사보다 네 배에 달해 한 달을 버틸 수 없었소. 병력은 넷으로 하나를 공격하는 것이니 설령 그중 절반을 잃더라도 도리어 당적할 수 있었소. 그리하여 사상자를 헤아리지 않았으니 이는 군량으로 더불어 경쟁한 것이오."


각각 명제기 주석 위략과 진서 선제기, 자치통감의 기록인데 사마의의 말에서 '맹달의 병력은 적고 물량 우리가 쩌니까 죽는거 신경안쓰고 걍 닥돌했다'[19] 하는 걸 보면 16일간의 공성에서 어처구니 없이 무너진 것도 그렇고 사마의가 공성할 때 결정적으로 대장 이보와 맹달의 조카 등현을 유인하자 등현 등은 성문을 열고 군대를 맞아들였다는 걸 보면 내부 결속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방심하고 있다가 병력을 다 미처 집결하지 못하고 성방어를 강화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이 성공적으로 돌아갔다면 맹달이 당시 부여받았을 역할은, 사마의가 인정했던 그 막대한 군량과 맹달 스스로가 감탄했던 천연의 요새인 상용성을 무기로 그 옛날 후음이 완에서 그랬듯 사마의+추가로 투입해야 할 위군을 붙들어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병력 크게 상관없이) 굳이 진공 안 해도 영토 한복판에 천연 요새 끼고 앉아 저항하는 것만도 큰 부담이었을 테니까. 사마의 본인도 이걸 굉장히 두려워해서 절묘한 편지로 마음을 돌린 기록이 있을 정도니... 그 사이에 촉군/오군이 침공하여 '진공'의 역할을 맡고.

여담이지만 화양국지 한중지에서도 보면 촉한의 제갈량, 이엄이 편지를 보내고 오왕 손권 역시 맹달을 불러서 맹달이 마침내 위나라를 배반하고 오와 촉과 교통했다 하는 거나 통전 154권에서 보면 오와 교통하고 촉과 굳게 맺어져 중원을 은밀히 도모할 모의가 있었던 듯 한데, 상기 전략을 구상했다는 가정 하에, 여러모로 정말 아쉬운 작전인 듯하다.


3. 평가[편집]


오늘날에는 여포를 잇는 배신아이콘으로 꼽히는 인물이긴 하지만, 그의 능력은 제법 뛰어나서 형주, 익주, 사례(司隸) 3주가 연결되는 요충지인 한중군 동부 일대를 얻어냈다. 위에 투항한 뒤에도 중앙으로 완전히 편입되지 않고, 이 일대에서 세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였다. 다만 호족 세력들에 의해 옹립된 반쯤 독립한 세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해당 호족은 원래부터 이곳에서 세력을 키웠던 신탐, 신의 형제이며 신의는 바로 이웃인 위흥군(옛 서성군)의 태수로 있으면서 맹달과 반목했다.

맹달은 남들보다 품위가 있고 말과 글솜씨가 뛰어나 타국에도 명성이 알려졌다. 위나라의 안목 있는 여러 고관들은 악의에 비견하며 장수의 재목이라거나 재상의 그릇이라고 평하였다. 자신의 실력과 명성에 항복한 장수로서의 공적까지 겹쳐 조비에게도 총애받았다. 맹달의 명성은 촉나라에 있을 때부터 위나라에 알려졌으며 하후상, 환계 등의 고관은 맹달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한중군 동부 일대는 오지로써 오고가기도 매우 힘든 곳이었다. 유비 역시 유봉을 질책할 때 관우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맹달을 핍박한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잘 생겼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명성 역시 조비가 맹달을 신용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한편으론 그렇다해도 조비의 총애나 신용이 과도했다고 볼 수도 있다. 측근인 유엽사마의 등은 맹달은 믿을 수 없다며 큰 권한을 주어선 안 된다고 간했었다. 명제기 주석 위략에 따르면 신하들 중 어떤 사람은 그가 지나치게 분수를 넘는 대접을 받는다고 여겼고, 또 그에게 한 지방의 임무를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후일의 일을 생각한다면 결국 후환을 남긴 인선이 되어버렸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맹달과 친했었던 환계, 하후상, 조비의 사후에 터진 일이었다. 조비 사후 맹달은 비빌 구석들이 사라져버렸고 특히 이상할 정도로 지속적으로 맹달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마의는 아예 독형예이주제군사로서 맹달의 직속상관이었다. 맹달은 자신을 믿어주던 조비 시절엔 일을 저지르지 않았고, 자신을 믿어주지 않던 사마의가 직속 상관일 때 일을 저질렀다. 즉 맹달의 반역을 부른 것은 결국 사마의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연의 속에서 반골의 상이라며 제갈량에게 무시당했던 위연의 실제판이라고 볼 수도 있다.[20]

삼국지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미지 정립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의 별 볼일 없는 묘사와는 달리 맹달은 엄청난 미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건 이래저래 말이 많지만 적어도 심미적인 측면에선 뛰어난 자질과 세련된 안목을 겸비했던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문학가' 중 한 명인 조비에게 인증받은 외모이니 맹달은 최소 당대 기준으로는 엄청난 미남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맹달의 생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176년생으로 알려진 법정과 동향 절친이었으니 대략 동년배일 것이고,[21] 조비에게 항복한 연도는 이릉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221년쯤 됐을 것이니 이때 조비를 대면했을 때 맹달의 나이는 40대 중반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참고로 조비는 187년생으로 알려졌으니 30대 초중반의 나이. 보통 사람이라면 으레 외양이 스러지기 마련인 40대 중반의 중년의 연령에도 불구하고 외모빨로 출세가도를 달린 맹달은 아무래도 삼국시대 대표미남이 맞을 것이다. 아무리 고대사회에서 지금과는 미의 기준이 달라 중후한 인상이 지금보다 더 높게 평가받는 걸 감안한다 치더라도 중년의 외모가 10대, 20대 외모보다 더 낫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나이 페널티를 감수하고도 외모로 인증 받은 맹달은 삼국시대 외모 분야에서 레전드로 봐도 무방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맹달과 똑같이 정사 공인 미남으로 인증받은 주유, 손책, 원상 등 같은 경우를 보면 이들은 소시적부터 외모로 높게 평가받고 전부 다 요절한 인물들이다.

다만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위에 언급된 다른 미남들과 달리 '외모가 수려하다, 아름다웠다'가 아니라 '조비가 맹달의 외모를 보고 중용했다'는 쪽이며 당시 맹달의 나이까지 고려한다면 위에 말한대로 꽃미남 타입이 아니라 장수다운 근엄한 외모여서 신뢰를 받고 중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후자의[22]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위나라의 신하들이 모두 맹달을 재상이나 장군감으로 평가하고 조비가 파격적일 정도로 맹달을 신뢰하여 그대로 상용 지방을 맏긴 것도 나름대로의 근거가 생긴다.

그리고 위에선 요절한 미남들만 열거했지만 원소나 제갈량처럼 중년기까지 활동했는데도 용모가 수려했단 평을 받은 인물들도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중년이었던 맹달 역시 단순히 잘생겼다기보단 위엄있는 외모였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이런 인물들은 대중적 인기나[23] 이성에 대한 매력으로서 외모가 아니라 군주가 중용하는 신하로서 매력(맹달), 군주나 실권자로서 매력(원소와 제갈량)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얼굴이 잘생겼다' 수준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4. 미디어 믹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맹달/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연의에서는 법정과 맹달이 애초부터 장송과 함께 행동하며 촉을 유비에게 넘겨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확실히 법정은 친유비 세력이긴 했다.[2] 괴기는 일찍이 제갈량의 큰 누나와 결혼하였으므로 제갈량의 자형인 셈이다.[3] 지도를 보면 상용이 협공하는 모양새라 한중 방향보다 상용 방향으로 진출하고 강릉에서 도와주면 한중 쪽 헬게이트보다 쉽게 풀린다. 상용이 없다면 상용은 한중을 찌르는 창이지만 상용이 있다면 한중의 측면이 안정되고 양번을 치는 창이되기 때문에 있고 없고 단순히 하나의 성차이보다 가치가 크다. 그렇기 때문에 제갈량이 배신한 맹달을 회유하려했고 제갈량 사후 장완도 북벌방향을 수로로 보급이 가능한 상용 쪽 공략을 계획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적극 추진하지 못했었던 것. 맹달이나 유봉이 공격했다면 활로가 뚫려 관우는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상용 쪽에서 원군이 왔다면 오나라의 뒷치기로 함락된 형남으로 후퇴하기보다 앞쪽으로 방향을 뚫는 게 상용과 이어져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3만 명을 포로로 잡을 정도로 그 기세가 엄청나던 관우가 진출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4] 연의: 맹달이 유봉에게 "그대(유봉)는 관우를 작은 아버지로 생각할지 몰라도 관우가 그대를 조카로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지금껏 관우는 유선을 지지해왔다" 라고 하며 원군을 보내주지 않는다.[5] 후일 유봉이 맹달이 배신했을 때 신탐이 배반한 이유도, 이전까지는 자발적으로 항복해 상용의 토착 유력자로 잘 있을 수 있었지만 상황이 바뀌어 촉한의 2인자 관우를 죽게 한 유봉 밑에 있어봐야 더 이상의 이득은 없었기에 배반했다고 봐야한다. 이전까지 위나라와 잘 협력하고 있었으니 다시 돌아가도 위나라로부터 큰 벌을 받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전반적으로 맹달의 이탈 문제도 그렇고 이런 점을 유봉이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은 유봉이 군주로서의 자질이 과연 있었나 의문케 하는 요소. 물론 인질을 보냈어도 봉기를 일으킨 마초나 요동 공손씨를 생각하면 충성에 의문이 든다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저 둘은 중원에서 상당히 떨어진 반독립세력이었고 상용은 한중 바로 옆에 있다는 차이점도 존재한다. 거기에 양주군벌들과 요동 공손씨 정권은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에서 난을 일으켰는데 유봉과 맹달의 불화도 신탐형제에게 그런 종류의 불안감을 주었을 수 있다.[6] 관우가 상용군의 지원을 받으면 두 가지 장점을 얻는다. 첫 번째는 앞서 말한 최소 병력의 보존 문제고, 두 번째는 관우군이 면수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상용에서 수륙양용으로 면수를 통해 지원군을 보내면 관우는 그 배를 타고 도주하면 된다는 것이다. 위나라는 7군 수몰때 수군이 싹 털려서 번성에서 관우를 격파하고도 면수를 장악당해 양양과 연락이 끊어질 지경이었고 오나라는 장흠을 보내서 관우를 추격하게 하는데 재수없게도 장흠이 귀환하는 과정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즉 관우는 상용과 연결된 면수를 이용하여 상용으로 안전하게 귀환할 가능성이 커지는 셈이다.[7] 이때쯤이면 관우는 근거인 강릉을 잃고 헤매고 있는 상황이다.[8] 말이 4천여 가지 1가를 5명으로 치면 2만명 이상이나 되는 인력이 상용을 빠져나간 것이다. 이러니 유봉이 수비를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말이다.[9] ≪위략≫ ; 배송지 주석, ≪삼국지≫ㆍ<魏書>ㆍ<明帝紀>[10] 애초에 사천 지방의 주민들은 17세기 장헌충의 대학살로 사실상 절멸되었다가 이주민들로 채워진 만큼, 요리 같은 인문문화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11] 곽모를 누설케했다는 것은 ≪화양국지≫ <한중지>에 나오는 사마의의 편지와 ≪전략(戰略)≫, ≪진서≫<선제기>에 나온다.[12] 연의: 서황을 화살로 쏴 맞히는 등 분전한 것으로 각색되었다. (정사에서는 병사)[13] ≪삼국지≫41권 <비시전>과 ≪화양국지≫에서는 제갈량이 맹달을 믿지 못해 구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진서≫<선제기> 와 ≪수경주(水經注)≫, ≪자치통감≫등의 사서와 지리서는 촉과 오에서 지원군을 파견했다고 한다. 수경주, 자치통감 등의 기록에는 촉과 오가 목란새까지 갔다고 하고 자치통감에서는 사마의가 병력을 나누어 촉과 오를 막았다는데 유봉전에 인용된 ≪위략≫에선 신의가 촉길을 끊고 구원하지 못하게 하였다니 촉의 군대가 목란새 서쪽 서성을 관할하던 위흥태수 신의를 목란새까지 밀어붙였으나 그전에 상용이 함락되었든지 아니면 신의가 요지에서 막고 있는 것을 보고 구원을 포기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오의 군대는 위치상 목란새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니 일단 촉군이 목란새까지 돌파했을 가능성은 있다.[14] 진서 선제기는 완으로 끌려간 상용 사람들이 1만여 명이라고 하고 유주로 보내진 맹달의 남은 무리가 7천여 가라고 하였고, 위흥의 신의가 월권행위를 하여 낙양으로 소환되었으며 촉장 요정과 정타가 7천여 명을 이끌고 항복했다고 하였다. 이 중에서 자치통감에 실린 것은 신의의 일뿐이고 나머지는 정사 삼국지와 교차검증이 되지 않고 신뢰도가 부족한지 하나도 적히지 않았다.[15] 사마의는 당시 남양 땅에 있었다.[16] 후에 제갈량은 북벌에서 '전장에선 굳이 명을 받지 않는데 사마의가 조예에게 명을 받으려 함은 제장들을 진정시키는 것'이라고 평했는데 제갈량이 사마의를 그렇게 평가했다면 이 편지를 받고 일을 그르쳤다고 판단했을수도 있다.[17] 출처 [18] 사마의가 상대해야 할 적이 맹달 뿐만이 아니게 된다.[19] 상대적으로 많았다는 것이지 굳이 맹달의 병력이 '적었다'고 언급하는 걸 보면 사마의도 급하게 오느냐고 그 적은 병력의 4배 밖에 동원하지 못했고 급하게 오느냐고 치중도 별로 끌고 오지 못해서 식량이 한 달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맹달이 좀 더 착실히 준비했다면 몰랐던 셈이다.[20] 하지만 맹달의 배신을 유엽과 사마의의 탓으로 돌리기도 마땅치 않은 게, 충성심이 검증되지 않은 이제 막 항복한 항장에게 맹달과 같이 한 지역의 군권을 주는 일 자체가 상당히 드문 일이다. 오자양장 중 항장 출신인 장료, 장합, 서황 역시 조조의 옆에서 군사를 이끌고 싸워 충성심을 검증해야 했으며, 심지어 촉에서 항장임에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대장군까지 오른 강유 역시 몇 년간 중앙에서 문관으로 일했다. 맹달의 위치 자체가 의심받기 쉬운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권을 내려놓고 중앙으로 가는 대신 모반을 택했다는 것은 자신은 당연히 의심받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거나, 상용 지방의 태수 자리를 충성심보다 중요하게 여겼다는 말 밖에 안된다. 모로 가도 좋은 소리를 절대 못 들을 행각이다. 이 쯤 되면 정말로 제갈량에게 경시당한 전적이 있는 삼국지연의 속 위연에게 미안해지는 비교이다. 물론 실제 위연은 그런 거 없다.[21] 삼국지 13에서는 172년생으로 설정되어 있다.[22] 맹달의 풍모가 위엄있고 충성스러운 인상이어서 중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3] 원소의 경우 그의 명망을 높이는데 외모가 크게 적용했다. 그러나 이는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보다는 당대 명사들과 유력자들 사이 명성이었다. 원소든 맹달이든 기본적으로 호감이 갈 만큼 잘생기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위엄이 느껴지는 용모'일 가능성이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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