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리다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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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79년 12월 10일 중화민국 가오슝시에서 메이리다오[3] 잡지 주최로 일어난 민주화 시위가 당국 경찰과 충돌하게 되어 주최자가 투옥된 사건. 중국국민당 일당독재가 이루어지던 당시의 대만 정부에서는 '가오슝 폭력사건 반란안'(高雄暴力事件叛亂案)이라고 불렀다. 이 사건의 주동자와 변호사들이 모여서 세운 정당이 바로 2000년 3월 제10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진보당(民主進步黨)이고 2016년 재집권에 성공한 현 대만의 집권여당이다.
가오슝 첩운의 메이리다오역의 명칭은 이 사건에서 유래했다. 명명 당시 가오슝 시장은 이 사건의 주동자들 중 한 명이었던 천쥐였다.
전체적으로 한국의 5.18 민주화운동과 유사하다.
2. 상세[편집]
1979년 12월 10일 대만의 급진 성향 민주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잡지 메이리다오(美麗島)를 창간했다. 참고로 당시 대만은 장제스의 사망 3년 후인 1978년 그의 아들 장징궈가 후임 중화민국 총통으로 취임한 지 1년째 였는데 마침 미국이 중국과의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따라 대만과 단교하면서 상당한 정치-사회적 불안이 조성되었다.
이 와중에 메이리다오 잡지사를 위시한 집회 주최측은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에 맞춰 야간 집회 허가를 신청했지만 국민당 당국은 이를 불허했다. 왜냐하면 당시 대만은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 정부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9년부터 계엄령이 쭉 지속되고 있었는데 외견상으로는 특정지역 내부의 일회성 집회 사건 정도로밖에 안 보이겠지만 수십년 동안 계엄 체제가 계속되던 당시 대만의 정치-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이 정도의 집회, 시위도 꽤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당시 가오슝의 분위기는 한국으로 치자면 시위대 발포, 유혈진압만 없었을 뿐이지 1980년 5월의 광주에 가까웠던 셈이다.
하지만 당국의 불허 방침에도 불구하고 집회는 실행되었고 결국 국민당 당국이 헌병을 포함한 물리력을 대거 동원하여 강제 해산에 나서면서 시위측과 진압 병력 사이의 물리적 충돌로 악화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주동자측인 메이리다오 잡지사의 핵심 인사 다수가 투옥되어 군법 재판에 회부되었다.
메이리다오 사건 당시 변호인단의 모습. 참고로 아랫줄 왼쪽에서 다섯번째부터 셰창팅, 쑤전창, 그리고 훗날 민진당 최초의 총통으로 당선되는 천수이볜이다. 천수이볜은 이 사건의 변호인으로 활동한 것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했다.
3. 주요 투옥자[편집]
- 장준홍 : 징역 12년.
- 야오자원 : 징역 12년. 이 사람의 변호사가 셰창팅과 쑤전창으로, 이 두 변호인은 이후 민주진보당의 주석을 지냄.
- 스밍더 : 무기징역. 이후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으며 민주진보당의 주석(대표)을 지냄.
- 황신제 : 징역 14년. 이후 민주진보당의 주석(대표)을 지냄. 참고로 이 사람의 변호사가 천수이볜이었다.
- 천쥐 : 징역 12년. 1986년 가석방. 이후 이 사건의 무대였던 가오슝의 시장이 되었다. 2014년 선거에서도 승리하면서 3선에 성공해 재직했다. 2016년 총통선거에서 차이잉원[5] 의 런닝메이트로도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남성표를 의식해 정부총통 후보자를 모두 여성으로 지명하는 것을 꺼린 민주진보당 지도부에 의해 실제 런닝메이트는 남성인 천젠런이 되었지만. 차이잉원 총통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어 가오슝을 떠났는데 후계자 천치마이가 중국국민당 한궈위에게 밀려 시장에서 낙선하는 변고가 있었다.
- 뤼슈롄 : 징역 12년. 특별사면으로 석방. 이후 천수이볜 정권에서 부총통으로 재임.
- 린홍쉬안 : 징역 12년.
- 린이슝 : 징역 12년. 투옥 중에 린이슝 일가 피살 사건으로 어머니와 두 딸을 잃었고 이후 민주진보당의 주석(대표)을 지냄.
4. 기타[편집]
- 대만의 민주화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으로, 한국에선 부마민주항쟁이나 5.18 민주화운동과 비유되기도 한다. 시기상으로도 부마항쟁으로부터 약 2개월 후 벌어진 사건이라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 이 사건의 도화선이 된 메이리다오잡지사(美麗島雜誌社)는 메이리다오역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역 2번 출구 남측에 위치해 있으며 구글 지도에서 美麗島雜誌社高雄服務處原址로 해당 위치를 검색할 수 있다. 해당 건물은 2000년대 중반까지 상가로 쓰였다가 리모델링 후 오랫동안 공실이었다. 2010년대 중반 이후에는 가구회사 매장이 들어와 있다. 대로변에 있음에도 옥외광고판이 잘 안 팔리는 편이라 선거 때만 사용되는데 의외로 중국국민당 입법위원 후보가 오랫동안 광고를 게시했다.
당시 사건의 주동 인사들이 수감, 군법재판을 받았던 군 형무소는 대만의 민주화를 기리는 문화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징메이 인권문화공원'(景美人權文化園區)이며 위치는 신베이시 신뎬구 부흥로(新北市 新店區 復興路) 쪽이다. 이곳은 메이리다오 사건 외에도 장제스, 장징궈 총통 시절 반(反)국민당,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투옥되었던 곳이다. 한국으로 치면 서대문형무소와 남영동 대공분실이 각각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전환된 것과 비슷한 셈. 타이베이 첩운 쑹산신뎬선의 다핑린역에서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갈 수 있다.
2014년 12월에는 사건 발생 35주년을 맞아 대만의 정계 원로 및 민주화 유공자가 된 당시의 주요 인사들이 가오슝에서 기념 모임을 함께했다. 특히 2016년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의 재집권이 기대되던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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