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커 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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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의 대표적인 메이커 사단들.[1][2]
2사단의 경우 과거 보병사단 시절에서 변한 현재의 마크다.
3사단 마크도 육본과 유사했던 시절의 마크에서 졸리 로저가 추가된 것이 현재의 마크다.

1. 개요
2. 상세
3. 일람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육군 내에서 쓰이는 은어. 여러 육군 사단 중에서도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중책을 맡은 한 자릿수 사단들을 일컫는 말이다.

메이커 사단이란 표현은 브랜드의 콩글리시인 메이커에서 따온 것이다. 따라서 '메이커 사단'의 뜻 자체는 실제로는 '메이저(major) 사단'에 가깝다.

2. 상세[편집]


사단 편제가 없고 함대, 비행단 체제로 돌아가는 대한민국 해군대한민국 공군에서는 당연히 사단이라는 용어가 없으며, 대한민국 해병대의 경우 사단 편제는 있지만 두 개 뿐이라 메이커 사단이라는 용어는 오직 대한민국 육군에서만 사용한다.

메이커 사단의 원래 의미는 6.25 전쟁 이전 건군기 시절에 창설된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제5사단, 제6사단, 제7사단,[3] 제8사단에, 6.25 이전까지는 수도경비사령부였다가 한강 방어선 전투 이후 (구)수도사단(현: 7사단)으로부터 1연대와 수도 명칭을 인계받아 수도사단으로 재편된 뒤 메이커 사단에 걸맞는 전과를 낸 수도사단, 전쟁 중반 고지전이 치열할 때 창설된 제9사단을 가리켰다.[4]

기타 사항으로 6사단6.25 전쟁 발발 이전의 연대/여단들을 계속 보유하고 있고, 7사단안강-기계 전투 당시 예속받은 한자릿수 보병연대/여단들을 지금도 보유하고 있다.

《메이커 사단의 6.25 전쟁 주요 업적》
  • 수도기계화보병사단 - 한강 방어선 전투 이후 수도사단으로 재편된 뒤 진천 전투, 청주 전투를 치르며 낙동강까지 내려와 안강-기계 전투에서 후방인 안강-기계면을 방어해 내었다. 그 후 3사단과 함께 최초 원산 입성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를 치뤘다. 또한 압록강변에 도달했던 6사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서 그렇지, 역대 국군 부대를 통틀어 가장 최북단까지 가본 부대[5]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 제1보병사단 - 개전 초 개성-문산 축선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북한군 1사단의 목표 달성을 막아냈고, 낙동강 방어선에서는 다부동 전투의 승리로 북한군 8월 공세를 좌절시켰다. 북진 기간에는 평양 탈환[6]이 대표적인 전과다. 중공군 개입 이후에도 파평산 전투에서 1:8~1:10의 병력차를 극복, 중공군 5차 공세의 주공부대를 저지하는 등 어떤 불리한 상황에 처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아 미군이 한국 육군에서 가장 신뢰한 정예사단으로 이름이 높았다.
  • (구)제2보병사단(현: 제2신속대응사단) - 저격능선 전투,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고지를 어떻게든 지켜내었다.
  • 제3보병사단 - 38선 최초 돌파,[7] 원산 최초 입성.[8] 특유의 구호[9]와 그외의 사건으로 인해 북한군이 가장 두려워한다.
  • 제5보병사단 - 피의 능선 전투, 가칠봉 전투, 백암산 전투에서 맹활약했다.
  • 제6보병사단 - 6·25전쟁 개전 초기 춘천 전투에서 승리해 북괴군의 남침을 유일하게 방어해낸 부대가 되었다. 이후 동락리 전투, 신녕 전투, 초산 전투 등에서 꾸준히 활약하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의 판도가 뒤집힌 후에는 38선을 돌파하여 파죽지세로 북진하고 국군, UN군을 통틀어 전군 최초로 한만국경선까지 진군하여 압록강의 물을 철모로 떠서 이승만에게 헌수했다. 중공군이 참전하여 전선을 대대적으로 물린 이후에는 사단 전력을 재편, 중공군 3개 사단을 궤멸시킨 6·25전쟁 단일 전투 최대 전과 용문산 전투 승리를 이루어냈다.
  • 제7보병사단 - 개전 초기 포천, 동두천, 의정부에서 무참히 밀려나다 1연대와 수도 명칭을 수도경비사령부에 넘기고 해체되기도 했지만, 낙동강 전선에서 재창설된 뒤 메이커 사단에 걸맞는 업적들을 내기 시작했다. 일단 평양 탈환작전이승만 대통령의 밀명으로 8연대가 방향을 바꿔 1사단 작계지를 침범했고, 그 후 9중대가 1사단보다 하루 먼저 입성해 김일성종합대학태극기를 게양하기도 했다.[10] 그 후 피의 능선 전투를 지원한 뒤 전멸 상태에서[11] 백석산 전투를 치루었으며, 휴전을 며칠 앞두고 벌어진 425고지-406고지 전투에서 파로호를 지켜내었다.
  • 제8기동사단 - 개전 초기 강릉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지연전을 펼치며 남하해 영천 전투에서 여러 사단들의 증원을 받아가며 영천을 탈환해 내었으며, 7사단이 절반 가량 점령한 백석산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 제9보병사단 - 비록 시작은 미약했으나 백마고지 전투에서 엄청난 혈전 끝에 고지를 지켜내었다.

위의 부대들이 좋은 말로는 유명하고 강력하며, 진급이 매우 잘 되는 근무지, 나쁜 말로는 빡세고 죽을 것 같은 근무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오지나 다름없는 최전방 근무.
  • 강도 높고 잦은 훈련 - 더욱이 이들 덕분에 이들과 라이벌 경쟁관계인 다른 사단 또한 이 메이커 사단들만큼 혹독하고 강하다. 대표적인 사단으로 제21보병사단.
  • 상급 부대의 무한한 애정 - 보통 장성급 장교, 상급부대 주임원사, 고위 공무원 및 정치인들이 방문한다. 가끔 대통령이 방문해서 부대가 뒤집어지기도 한다.

제5군단의 경우, 군단급 부대에서 최고의 메이커 부대라고 할 수 있다. 전략적 요충지 철의 삼각지대 철원평야를 포함한 중부전선의 방위를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 육군 군단급 부대 중에서 메이커 사단들을 예하부대로 가장 많이 두고 있다. 제3보병사단, 제5보병사단, 제6보병사단을 예하에 둔다. 과거에는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8기동사단도 예하에 두고 있었다. 메이커 사단의 절반을 보유하고 있던셈.

기준이 모호해서 분류가 자의적인 면이 좀 있다. 훈련병들은 정말 빡빡한 부대라는 이야기를 듣고 두려움에 떨며, 조교에게 실상을 물어보지만 조교가 하는 말은 믿을 이유가 전혀 없다. 이건 잠시만 생각해보면 당연한건데, 육군훈련소 및 사단 신병교육대 분대장이라면 그 부대에는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 군복무 하기 정말로 나쁜 부대는 제22보병사단제28보병사단이다.[12] 진정한 '트러블'메이커 사단인 셈이다.

사실 육군훈련소 분대장 교육대 교육과정 중에 '야전부대 체험'이라는 게 있긴 하지만 1~3일 정도만 머물고 GOP 체험 등에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해당 부대의 특성과 내무 생활을 정확하게 알기는 무리다.

육군 장성들의 경우, 소장 시절에 메이커 사단장을 거친 사람일수록 중장 이상으로의 진급이 쉬워진다.[13] 역대 육군 대장 중 소장 시절 보직이 메이커 사단장이었던 사람들이 많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중장으로 진급할 능력과 인망이 있는 사람을 메이커 사단장으로 임명한다는 뜻이기도 하다.[14]

기타 사항으로 제7기동군단은 메이커 사단의 군단 버전으로, 육본 차원에서 최신 장비와 병력들을 몰아주고 그만큼 훈련도 빡세게 시키기 때문. 또한 제5군단은 휘하에 메이커 사단만 3개를 둔 군단 중 최고 요직이다. 5군단장은 육사 출신만이 부임할 수 있다.

3. 일람[편집]



참고로 6.25 전쟁 막바지와 휴전 이후 창설돼 전공을 세울 기회가 없다시피한 제12보병사단, 제15보병사단[15], 제21보병사단[16], 제22보병사단, (구)제23보병사단[17], 제25보병사단, 제28보병사단[18] 입장에선 근무/훈련 여건이 힘들긴 매한가지이나 아무래도 역사나 전공 면에서 저 사단들에 비할만큼은 안 돼 억울한 감정도 적잖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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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계방향으로 1시 방향부터 1사단~9사단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맹호부대)이다.[2] 제4보병사단이 보이지 않는데, 여순사건 당시 반란에 가담해 강제 해체당했기 때문.[3] 6.25 초창기엔 (구)수도사단이었다.[4] 다만 이 사단의 경우 창설 당시 각 군에서 차출되거나 낙오병, 신병들을 모아 창설되었기에 서로간의 전투욕도, 동질감도, 연대감도 낮았기에 초창기 빨치산 토벌에서조차 연전연패 할 정도였다. 그러다 매봉·한석산 전투에서 좋은 성과를 내었으나, 현리 전투에서 패주해 기껏 탈취한 한석산을 잃기도 했다. 그래도 백마고지 전투에서 이런 오명들을 씻어버렸으며, 정전 이후 벌어진 베트남 전쟁 당시 백마부대라는 이름으로 맹호부대, 청룡부대와 함께 많은 전공을 추가적으로 세웠다.[5] 부령군. 보통 청진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거기서 아주 약간 더 갔다. 이 기사의 사진을 실제로 자세히 보면, 청진보다 약간 더 진격했음을 알 수 있다.[6] 1950년 10월 20일 국군 1사단은 오전 10시 평양시를 완전 장악하였고, 국군 제1사단에 이어 미 1기병사단도 대동강을 도하하였다. 또한 평양 선봉 입성의 체면을 살린 이승만은 1사단에게 '계속 전진하여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라'는 의미로 전진이라는 부대 명칭을 하사하고 사단 장병 전원을 일계급 특진시켰다고 한다. 다만 예하 연대 중 12연대15연대는 서로 자기 연대가 평양에 가장 선봉으로 입성했다고 주장한다.[7] 38선을 최초로 돌파한 1950년 10월 1일은 이후에 국군의 날로 지정된다.[8] 단 원산 최초 입성의 경우 앞서 언급했던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더불어서 누가 먼저 입성했는지에 관해서 논란이 다소 있다. 그래서인지 과거 김백일 1군단장이 이종찬 장군과 송요찬 장군을 불러 공동입성으로 합의(?)를 봤다는 말이 있다.[9] '김정은은 미친 개, 몽둥이가 약!', '북괴군의 가슴팍에 총칼을 박자!'.[10] 다만 아무리 밀명이라지만 1사단 작계지를 멋대로 침범한 것이고 이승만 대통령도 1사단 편을 들었기에 일단 공식적으로는 1사단이 입성한 것이다.[11] 이는 송현리-송정동 전투에서 격전을 벌이고 피의 능선에 가세하는 바람에 전투력이 70% 이하로 떨어졌기 때문이다.[12] 해병대 제2사단까지 합쳐 사고뭉치 삼대장, 여기다가 공군까지 합치면 제20전투비행단까지 총 사대장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국군의 사건, 사고, 부조리를 담당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22사단의 경우에는 전군을 통틀어서 유일하게 해안경계와 철책경계를 동시에 담당하는데, 이들이 커버하는 섹터가 1개 사단은 커녕 3개 사단으로 커버해야할 수준이다. 또한 육군 사단 중 가장 최북단에 있기도 하다. 해병2사단의 경우에는 훈련이 위주인 해병1사단과 달리 경계작전 위주이다 보니 부조리가 심한 편이다. 그리고 20비행단은 기술군인 공군 특성상 부사관 자살 등 간부들을 중심으로 사건사고가 많았으며,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 출신 부사관 2명도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13] 사단장 경력에다가 국가안보실, 국방부, 대한민국 육군본부 또는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경력이 있으면 중장 진급에 좋다. 국가안보실 국가위기관리센터장, 국방부에서는 정책기획관, 육본에서는 정보작전참모지원부장, 합참에서는 작전부장과 작전기획부장, 한미연합군사령부에서는 작전참모차장이 중장 진급률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제2작전사령부제32보병사단장직도 후방 부대 중에서는 중장 진급 커리어를 쌓기 좋다는 말이 있다.[14]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막이 다르다. 메이커 사단은 전방부대 치고는 담당구역의 난이도가 높지 않은데, 7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메이커 사단들은 전부 서부축선에 있다. 이 말은 즉슨 메이커 사단들은 대부분 지자체의 규모가 커 더 많은 지원과 관심을 받고, 상급제대의 관심과 지원또한 지극하며, 서울과 가깝고 부대 주변에 번화가가 들어서 있는 경우가 많아 장병들의 선호도 또한 높다. 반면 강원도에 박혀있는 부대들은 굉장히 암울한데, 15사단을 예시로 들면 화천, 철원에 걸쳐있어 지자체들에게도 무시당하고, 담당 섹터는 산속에 틀어박혀 맥도날드라고 부르는 계곡들이 펼쳐져 있으며, 그나마 27사단이 해체되고책임구역이 넓어진 이후엔 사창리라는 그나마 시골 면소재지 쯤 되는 동네가 섹터에 들어섰지, 2022년 이전엔 15사단 책임구역 내에서 마트는 커녕 영외 PX와 편의점(!)이 유일하게 생필품을 파는 가게였을 정도였다. 오죽 여건이 부족하면 여단별로 회관을 둬서 사단내에 회관이 5개 였을까... 이렇듯 간부부터 병사까지 실력있는 자들은 전부 메이커사단으로 편중되는 현상이 심해질 수 밖에 없어서, 빈부격차가 쭉쭉 벌어지게 된다.[15] 최근 20년 간 대장 진급자 수 1위[16] 제12보병사단과 제21보병사단은 (구)제2보병사단이 폐지되면서 편제와 병력을 이관받았다.[17] 2021년 제23경비여단으로 축소되었다.[18] 2025년에 폐지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