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신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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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관련 사료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면신례(免新禮), 면신(免新) 또는 신래침학(新來侵虐)은 조선시대에 신입 관료가 치렀던 가혹한 신고식이다. 자의로 풀어보면 '신입, 신진을 면한다'라는 의미가 된다. 명백한 악습이며 그 행태들을 보면 양반 관료들이 한다는 것 말고는 요즈음의 군대대학똥군기 잡기와 별 차이가 없다. 정도가 심하면 사람이 죽는 경우까지 있었는데, 요즘으로 따지면 신입생 환영회에서 과도한 술 강요 등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고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2. 내용[편집]


이 행위는 고려우왕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권문세족의 자제들이 음서 등의 방법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일이 빈번해였다. 그러자 이들에게 질투심을 가진 기존 관료들이 기를 꺾고 상관에게 복종시키기 위한 명목으로 시작하였고, 이것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왔다.

그러나, 시작은 조선 시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입의 아버지가 자신의 상관급인데 그 아들이 자신보다 낮은 직급으로 왔다고 해서 업무로 굴리는 것도 눈치보이는데, 기를 꺾기 위해 장난을 친다? 그게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 때의 면신례는 그 정도가 조선 시대보다는 약하거나 형식적인 의례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고려에서 시작했다는 것 역시 특별한 기록보다는 면신례를 옹호하던 조선의 관리들이 전통이라하며 고려를 예시로 든 것이라 신빙성이 높다고는 할 수 없다.

면신례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을 제수할 때 신임 관리는 기존의 상관들을 찾아가 인사를 하는데 이를 허참례(許參禮)라 한다. 이를 풀이하면 그 집단에 참여를 허락한다는 뜻이다. 이 때는 거창하게 술상을 차려서 대접함은 물론이고 상관들의 각종 벌칙들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 허참례 때 대접해야 하는 술상이 정말 상다리가 부러지는 수준으로 대접을 해야 했다. 하지만 과거에 갓 급제한 신입들에게 이 술상비용을 댈 돈이 있을 리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신입들의 집안에서 이 비용을 댔고, 이 술상비용 때문에 가산이 거덜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어지간한 부잣집조차도 부담이 될 정도의 비용이었다고. 그래도 이 비용은 개개인이 아니라 같이 급제한 신입들이 돈을 모아서 댔기 때문에 같이 급제한 동기들이 많다면 그나마 부담이 좀 덜하긴 했다.

허참례가 끝나면 곧이어 본격적인(?) 면신례를 행하는데 이 때도 다시 음식 대접 및 벌칙이 이어졌다. 벌칙의 종류도 얼굴에 으로 낙서하기, 더러운 것을 만지게 하고 손을 씻은 뒤 그 물을 마시기, 진흙탕에서 구르기 등 매우 다양했다. 당연하지만, 이 과정에서 신입 관리가 실제로 사망하는 사건도 종종 터졌다. 이 경우 보통은 술 강요 때 주는 술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먹다가 과도한 음주로 사망하거나, 벌칙 수행 과정에서 선배들이 요구한 온갖 기상천외한 짓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그대로 하다가 죽기도 했다. 이 면신례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관리 조직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예외 사례가 있다면 율곡 이이로, 이이는 이 면신례를 거부했다가 다른 관료들에게 오랫동안 따돌림을 받아야 했다.

과거 급제와는 별개로 면신례 통과일에 따라 승진 순서 등을 정했으며 이 면신례를 거부할 경우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상관들은 해당 인물에게 관리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 또한 상관에 대한 접대로 인해 경제적인 부담이 클 뿐만 아니라 벌칙 때문에 신체적인 고통도 상당했으며 이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정몽주의 손자인 정보에겐 아들이 2명 있었는데, 이 중 차남 정윤화가 이 면신례를 행하다 그만 사망했다. 유림들에게 그토록 존경받는 인물의 후손도 이런 수모를 당할 정도로 면신례는 엄격했을 정도로 공정(?)했다.

물론 대부분의 신고식과 마찬가지로 비공식이고 불법이었다. 앞의 음서 드립은 말 그대로 명분에 불과한 것이, 음서 제도는 고려 시대에나 횡행했지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음서제의 제한이 대폭 강화되었고, 그마저도 과거 안 치고 음서로 들어오면 신참례고 뭐고 대놓고 멸시하는 분위기였다.[1] 과거 시험이 부정부패로 물들었던 때라고 하더라도 다들 형식적으로라도 과거 급제를 해야 관직에 들어올 수 있었다. 실제로는 신참에 대해서 망신주고 기를 꺾으면서 자기들이 이득을 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악습이건 뭐건 없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국왕이나 고위 관료들은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없애라고 계속 명령을 내렸으나, 이것도 관행이다라고 대놓고 버티기도 하는 등의 저항이 잇달아서 꾸준히 문제시되었다. 그리고 관료들의 신고식이라고 하는데, 이게 사헌부 감찰을 비롯한 신임관료들에 대한 신고식에서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기존관료들도 전임관료가 신임관료에게 공공연하게 받아 먹는 향응접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는 윗물이 썩으면 아랫물이 썩는다는 법칙에 의거해서, 군대도 예외가 아니라 장군들과 장교들은 물론 일반 병사들까지 이를 따라하는 폐단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이를 행하지 않으면 기수열외를 해버리거나, 혹은 대놓고 "면신례를 안하다니 잘라버리죠. "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조선시대 왕들은 계속해서 이를 폐지하고 처벌해야 했다. 사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군대의 막장문화는 다를 바 없었다는 소리.


3. 관련 사료[편집]


신 등이 삼가 살피건대, 《대전(大典)》 금제조(禁制條)에 이르기를, '신속(新屬)을 침학(侵虐)하는 자는 장(杖) 60대를 때린다'고 하였으니, 나라의 제도가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지금은 국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침해하는 자가 그 기세가 대단함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우선 승문원(承文院) 한 사(司)를 가지고 말하면, 아무개가 새로 정자(正字)에 제수되면 반드시 공궤(供饋)할 물건을 거두는데, 명칭을 '징구(徵求)'라고 하여 3에서 수(數)를 시작합니다. 이를테면 청주(淸酒)가 세 병이면 무슨 물고기가 세 마리, 무슨 고기가 세 마리, 무슨 과일·무슨 나물이 세 반(盤)이라고 하여, 무릇 백 가지 먹을 만한 것은 여기에 맞추지 아니함이 없고 하나라도 갖추지 아니하면 견책(譴責)이 따릅니다. 이처럼 하기를 반드시 다섯 차례를 지난 뒤에 다시 5의 수로 시작하여 앞에 말한 것과 같이 하고, 이처럼 하기를 반드시 세 차례를 지난 뒤에야 7의 수로 시작하여 9의 수에 이른 뒤에야 그만둡니다. 한 번 '징구'하는 물건이 한 번의 큰 잔치를 준비할 만하니 그 비용이 너무 많으며, 또 허참연(許參宴)이 있고 면신연(免新宴)이 있으니 모두 큰 비용입니다. 자신이 부잣집 자제가 아니면 비록 살림을 다 기울여 없앤다 하더라도 한없는 비용을 대기가 어려워서 반드시 남에게 빌린 뒤에야 겨우 미치기를 바랄 뿐입니다. 승문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저 성균관(成均館)이며 교서관(校書館)이며 예문관(藝文館)이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는데, 예문관은 네 관(館) 가운데 더욱 심한 곳입니다. 그 '징구'가 승문원에 비하여 갑절이며 면신연과 허참연도 승문원에 비하여 갑절입니다. 또 중일연(中日宴)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다른 관에는 없는 것이고 예문관만 있는 것으로 그 비용이 또한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 네 관(館)은 그래도 규찰(糾察)하는 관원이 있지만, 저 감찰(監察)하는 자는 자신이 법관이 되어 스스로 예법(禮法)을 벗어나 방종하니 누가 규찰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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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18년 기록 중 일부.


도총관(都摠管) 변종인(卞宗仁)이 와서 아뢰기를,

“신이 군사(軍士)의 연재(鍊才) 때문에 훈련원(訓鍊院)에 앉아 있었는데, 본원(本院)의 권지(權知) 등이 신에게, '허참례(許參禮)를 행하지 않았다.' 하고는 지영(祇迎)[2]

하지 않고 이름을 들어 욕하였습니다.[3] 청컨대 피혐(避嫌)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비관(卑官)으로서 재상(宰相)을 욕보임이 옳으냐?”

하고, 권지(權知) 이극달(李克達) 등 14인을 불러 물으니, 모두 대답하기를,

“무과 출신인(武科出身人)은 당상(堂上)·당하(堂下)를 묻지 않고 모두 주효(酒肴)[4]

를 판비(辦備)하여 본원(本院)의 남행(南行)과 서로 만나본 연후에야 선생안(先生案)에 제명(題名)하고, 선생(先生)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당상(堂上)이라도 지영(祇迎)하지 않고, 신래(新來)의 이름을 부르니, 이것은 옛 풍습입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변종인(卞宗仁)은 일찍이 참판(參判)을 지냈으니, 바로 지위(地位)가 높은 재상(宰相)이다. 권지(權知) 등이 신래(新來)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비록 옛 풍습이라고 하나 혁파(革罷)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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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성종 25년의 기록이다. 왕보고 이건 우리 관습이라고 대놓고 반박하고 있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이의손(李懿孫)이 와서 아뢰기를,

“김점(金岾)이 종5품(從五品)으로서 훈련 부정(訓鍊副正)에 승수(陞授)되었으니, 추이(推移)하여 의망(擬望)하게 하소서. 비록 승전(承傳)함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와 같이 관등(官等)을 뛰어넘는 것은 불가합니다. 또 훈련원(訓鍊院) 13원(員)은 변종인(卞宗仁)을 '신래(新來)'라고 불렀다 하여 모두 파직(罷職)되었으니, 선진(先進)과 후진(後進) 사이에 웃음거리가 될 만한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경하일(慶賀日)과 같은 경우는 사관(四館)이 재상(宰相)의 위에 자리하는데, 이는 비록 법(法)에는 합당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풍교(風敎)를 유지함에는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훈련원에서 면신(免身)한 뒤 허좌(許坐)하는 것은 곧 옛날의 풍속입니다. 법사(法司)에서 추핵(推劾)하는 것은 진실로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나, 이로써 파직함에 이르는 것은 아마도 미안(未安)할 듯합니다.”

하고, 또 박숙무(朴叔楙)가 나주(羅州)에 합당치 않다고 논하였다. 전교하기를,

“김점(金岾)은 과연 외람되다. 개차(改差)하도록 하라. 훈련원(訓鍊院)의 일은 내가 들으니, 신래(新來)를 침학(侵虐)하는 것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어서 의관(衣冠)을 더럽히고 훼손함이 배우(俳優)와 같음이 있다고 한다. 비록 옛날의 풍속이라고는 하나, 이것이 어찌 가하겠는가? 변종인(卞宗仁)은 재상(宰相)이 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도총관(都摠管)으로서 훈련원에 자리하였는데, 갑자기 '신래(新來)'라고 부르니, 이런 풍속은 혁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파직(罷職)시키지는 않도록 하겠다. 박숙무(朴叔楙)의 일은 들어줄 수 없다.”

하였다. 이의손(李懿孫)이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조달생(趙達生)과 더불어 다시 박숙무의 일을 아뢰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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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 기사에서 1달 후의 기사로, 사간부에서 면신례는 당연한 거라고 하면서 반대하고 있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대사간(大司諫) 최숙생(崔淑生)·지평(持平) 소세량(蘇世良)이 전의 일을 논계하고, 최숙생이 또 아뢰기를,

“새로 급제한 사람이 분관(分館)되면 반드시 허참례와 면신례를 해야 하는데, 정응(鄭譍)은 이 예를 행하지 않고서 갑자기 홍문관 정자로 임명되었으니 미편(未便)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사관(四館)의 옛 풍속은 비용만 허비하는 외람된 일로서 유폐(流弊)가 습속을 이루어 치화(治化)를 크게 손상시켰으니 간관 된 사람은 마땅히 혁파(革罷)하기를 청해야 할 것인데도 최숙생이 이와 같이 외람되게 아뢰었으니, 번세(煩細)한 것만 살피고 대간의 대체는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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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9년 기사. 이제는 사관도 비난한다. 위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간관(諫官)이란, 임금의 잘못된 행실을 고치도록 권하고, 벼슬아치들의 비행을 고발하는 직책이다. 그런데 벼슬아치의 비행을 고발해야 할 인간이 오히려 비행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저 최숙생이라는 사람은 그런 간관의 우두머리인 대사간의 직책에 있는데도 저런 소리를 임금에게 대놓고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사관은 그것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헌부가 아뢰기를,

“예조 정랑 양팽손(梁彭孫)은 패륜한 일이 많아서 조정의 반열에 있을 수 없으니 속히 파직시키소서. 부장(部將) 김자연(金自淵)은 전에 상주 판관(尙州判官)으로 있을 때에 잘못된 바가 많아서 논박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그가 발언한 자를 미워하여 항상 중상(中傷)할 것을 모색, 이에 '아무개가 간흉에게 빌붙었다.'는 말을 꾸며서 몰래 청촉하여 죄에 빠뜨리고자 합니다. 그의 마음 쓰는 것이 지극히 음험하니 이러한 풍조를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를 파직시키고 말을 꾸며 남을 죄에 빠뜨리려 하는 폐풍(弊風)을 막으소서.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 이종(李琮)은 모든 신래가 면신례를 할 때면 친히 그 집에 이르러 '내가 근일 거관(去官)하게 되었는데 그러면 감찰(監察)이 될 것인데 면신에 쓸 물품을 미리 비축하여 두고자 한다. 그대는 반드시 면신에 쓸 물품을 많이 준비하였을 것이니, 나에게 나눠준다면 그대의 면신례도 또한 쉽게 하도록 하겠다.'고 하는데, 신래들이 거의 다 두려워하여 나눠줍니다. 또 지난 6월의 도목(都目)의 천장(薦狀)[5]

을 쓸 때에 권지 봉사(權知奉事) 윤사상(尹思商)에게 많은 뇌물을 받고, 당상(堂上)의 하명이라고 거짓 일컬으면서 드디어 사상을 천거하였으니 비루함이 말할 수 없습니다. 치죄하소서. 윤사상 또한 천직(遷職)의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이종에게 뇌물을 주어 차례를 뛰어넘은 추천을 받으려 하였으니 조관(朝官)의 소행에 매우 어긋납니다. 아울러 추고하여 치죄하게 하소서.

소각사(小各司)의 서원을 혁거하는 것과 서리를 선정(選定)하여 보내는 일은 이미 아뢰었습니다. 다만 이조에서 때맞추어 정송(定送)하지 않으면 소각사가 스스로 이조에 진술할 길이 없으니, 이조에게 문자(文字)를 해득하는 쓸 만한 서리들을 《대전(大典)》에 규정된 숫자대로 때맞추어 정송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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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33년 기사. 이제는 면신례를 이용해서 돈 뜯은 내용까지 나온다.


헌부가 아뢰기를,

“급제(及第)하여 출신(出身)하는 것은 곧 선비가 벼슬길에 들어가는 처음이므로 마땅히 예모(禮貌)를 삼가고 기개(氣槪)를 양성하여 임용(任用)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체 신래(新來)라 이름하여 멋대로 침학(侵虐)하기를,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온 낯에 오물을 칠하며, 잔치를 차리도록 독촉하여 먹고 마시기를 거리낌없이 하되,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그의 몸을 곤욕(困辱)하는 등 갖가지 추태를 부리고, 아랫사람들을 매질하는데 그 맷독[楚毒]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신래인 사람들이 밤낮으로 뛰어다니며 지공에 대응하기에 바쁘며, 비천(卑賤)하고 오욕(汚辱)스러워 모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들도 달갑게 여기며 해야 합니다. 가져다 쓰느라 허비하는 물건값이 수만 냥(兩)이 되는데 신진(新進)인 빈한한 선비들이 스스로 마련할 길이 없으면 구걸하여 빌려주기를 청하기를 서울이고 외방(外方)이고 할 것 없이 하여, 오직 눈앞의 급한 대로만 하고 염치를 돌보지 않습니다. 그중에 스스로 마련할 수 없는 사람은 간혹 부유한 장사치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이 일을 의뢰하기도 하니, 몸을 망치고 이름을 떨어뜨리는 짓을 함이 이처럼 심합니다. 또한 침학할 때에는 되도록 가혹하고 각박하게 하여 더러는 겨울철에 물에다 집어넣기도 하고 한더위에 볕을 쪼이게 하기도 하므로 이로 인해 병을 얻어 생명을 잃거나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리게 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니 폐해가 또한 참혹합니다. 사대부(士大夫)들 사이에서 먼저 이런 풍습을 주창했기 때문에 미관말직(微官末職) 및 잡품(雜品)과 군졸 및 복례(僕隸)와 같은 미천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감찰(監察) 및 법사(法司)의 관원들도 오히려 세속을 벗어나지 못하여 다투어 서로 본받아 하느라 가산(家産)을 모두 탕진하고도 또한 감당해 내지 못하여, 더러는 논밭과 노비를 팔고 더러는 집까지 팔게 됩니다. 폐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는데 혹시라도 고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들 '신래들의 뻣뻣하고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 버려야 한다.'고 말을 하니, 이는 더욱 생각해 보지 않음이 심한 일입니다.

당나라송나라 시대를 살펴보건대, 과거(科擧)로써 선비를 뽑았었지만 신진(新進)인 선비들을 은덕과 영화(榮華)를 극도로 하여 총애(寵愛)하였을 뿐이고 조금도 좌절(挫折)시키거나 모욕을 주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때의 선비들이 이로 인해 교만하거나 건방져져서 부리기가 어려웠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또, 오랑캐인 원(元)나라의 미개한 풍속에도 오히려 이와 같은 짓은 없었습니다. 다만, 전조(前朝) 말엽에 조정이 혼탁하고 어지러워져 권세 있고 부귀한 집의 자제(子弟)들이 뜻을 얻어 교만하고 방자한 짓을 하므로, 선진(先進)들이 이를 염려하여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말류(末流)의 폐단을 막지 못하여 그대로 고질(痼疾)이 되어버린 것을 예사로 보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아서, 우리 동방(東方)의 예의(禮義)의 풍속이 도리어 이와 같은 미개한 풍습이 되어버린 것이니, 매우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신래를 침학하는 짓을 금단하는 법이 국가의 《대전(大典)》에 실려 있고, 지난날에 조정에서 또한 거듭 밝히어 통렬하게 금단하라는 영을 자세하고 극진하게 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고 더욱 심해지기만 하는 것은 한갓 폐단을 금단하라는 영만 있고 신래라는 이름은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후배들과 선배들 사이에 있어서는 품계(品階) 하나의 차이도 엄격한 것이므로 상하(上下)가 서로 접하게 될 적에 본래 그만한 예절이 있는 법입니다. 진실로 선배들이 도리를 잃지 않는다면 후배들이 누가 감히 예를 범하게 되겠습니까.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출신(出身)한 사람이나 감찰(監察)의 유에 있어서 신래라는 이름을 없애 버리고 한결같이 선배와 후배의 예절로 대하게 하며, 허참(許參)·면신(免新), 침학(侵虐)·책판(責辦) 등의 일을 일체 혁파하게 하소서. 하물며 올해는 흉년이 매우 심하여 저자의 베 한 필 값이 겨우 곡식 두어 되[升]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는 비록 일푼(一分)의 쓸데없는 허비라 하더라도 모두 금단해야 마땅합니다. 만일 신래라는 이름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책판(責辦)하여 쓸데없이 허비하고 있는 폐단을 법으로도 금단하기 어려울 것이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말이 매우 마땅하다. 과연 이런 폐단 때문에 쓸데없는 허비와 야비한 곤욕(困辱)을 당하는 일이 많이 있는 데다, 몸을 상하게 되거나 생명을 잃게 되거나 하는 폐해는 또한 큰 일이다. 이 폐단이 어찌 우연히 생긴 것이겠는가. 단지 한때의 금단만으로는 통렬하게 고칠 수 없을 것이니 마땅히 이 일을 가지고 따로 승전(承傳)을 받들라.”

하고, 이어 정원에 전교하였다.

“간관이 아뢴 말을 가지고 승전을 받들 적에, 무릇 신래에 있어서는 사대부로부터 군졸이나 복례들까지 마땅히 모두 통렬하게 고치도록 하는 사항을 아울러 써 넣어서 승전을 받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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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36년 기사. 면신례의 폐단이 사대부를 넘어서 하위 지위까지 퍼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걸로 2번째 없어졌다.


간원이 아뢰기를,

“신래(新來)를 침학(侵虐)하는 것은【새로 과거에 올랐거나 선비로서 처음 서사(筮仕)한 자를 신래라 하는데, 이 신래를 갖은 방법으로 침학하고 괴롭히니 습속(習俗)이 이와 같았다.】 나라에 정법(定法)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날로 더욱 심해져서 떳떳한 관습으로 되었으니 지금 통절히 개혁하지 않는다면 폐단을 구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승문원·성균관·교서관에서는 2~3일 후에 허참례(許參禮)를 행하고 4~5일 후에 면신례(兔新禮)를 행하는데 그 사이에 연회(宴會)를 요구하는 폐단을 일체 혁파하여 영원한 항식(恒式)으로 삼고 법을 범하는 자는 법에 따라 치죄할 것이며, 기타 내금위(內禁衛)·별시위(別侍衛)·우림위(羽林衛)·겸사복(兼司僕)·제사 습독(諸司習讀) 등과 새로 배속된 인원이 있는 곳에서 신래를 침학하는 사례가 있으면 모두 법에 따라 치죄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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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8년 기사. 변한 게 없다.


간원이 아뢰기를,

“수일 전 종루(鐘樓) 근처에서 명화적(明火賊)이 인가에 돌입하여 재산을 약탈해 간 일이 있었습니다. 왕도(王都)에서 이처럼 전에 없는 변이 있었으니, 평상시 기포(譏捕)를 열심히 하지 않아 이와 같은 일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당해 포도 대장은 무겁게 추고하고 종사관(從事官)은 파면하고, 부장(部將)은 가두고 죄를 정하소서.”

하였다. 또 각사(各司)에서 면신(免新) 턱으로 주찬(酒饌)을 책징(責徵)하는 폐단을 논하여 아뢰기를,

“일체 금단하고 만일 전의 습관을 답습하는 자가 있으면 각각 그 관장을 무겁게 죄를 주소서. 이서배(吏胥背) 한 사람이 면신하는 데에 걸핏하면 백금(百金)을 낭비하고 있으니, 역시 법부(法府)로 하여금 통렬히 금단을 가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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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2년 기사.


헌부(憲府)에서 계청(啓請)하기를,

“각 군문(軍門)에 신칙하여 군졸들에 면신례(免新禮)라고 일컬으면서 신군졸(新軍卒)을 학대하여 주식(酒食)을 요구하고 전포(錢布)를 받아내는 폐단을 금단(禁斷)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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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25년 기사. 군졸들 사이에서도 악습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삼사 대간들 사이에서 사라지지도 않았다.


승문원 관원을 모두 삭직(削職)시키라고 명하였는데, 황택인(黃宅仁)을 준점(準點)하여 면신(免新)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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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51년 기사이다. 영조 정도 군주가 되면 삼사 중 하나가 통으로 갈린다.


4. 기타[편집]


오해와 달리 일제강점기 시절 생겨난 악습이 아니라 이미 예전부터 존재해오던 악습이다. 실제로 일본 제국군의 병영 문화에서 유래하는 한반도의 근대적 똥군기와 달리 이런 신입에게 갑질을 하며 위계질서를 다잡는 악습은 전세계에 어디에서도 볼 수 있었고[6] 일제강점기 이전 조선시대에서도 이미 존재했었다. 심지어 완화된 형태로 지금도 볼 수 있다. 대체 이딴 걸 왜 하는 거냐



천일야사의 어사 박문수 코너에서도 면신례에서 자행된 가혹행위[7]로 인해 신입 사관이 자살했던 사건을 다뤘다. 박문수가 그놈의 면신례는 어찌 그리 안 변하느냐고 자조하는 것을 보면 박문수가 신입이었던 시절[8]에도 가혹행위가 심했던 모양.

5. 관련 문서[편집]


[1] 음서로 들어와도 나중에 과거에 합격했다면 그나마 참작해주었다. 그만큼 과거 시험은 조선 시대 관직 출사의 상징이었다.[2] 아래 관원이 상관을 맞이하는 것.[3] 관직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다. 조선 시대에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어지간한 하급자를 대하는 경우에도 예법에 어긋난 것으로 여겨졌다.[4] 술과 안주를 아울러 이르는 말.[5] 추천장.[6] 예컨대 한국식 학번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미국 대학들에서도 헤이징(Hazing)이란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고, 간혹 사망 사건으로까지 비화하여 가해자들이 징계를 받고 언론에 의해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한다. 프랑스는 더 심해서 프랑스의 고상한 분위기만 알았다가는 충격먹는다. 한국하고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심한데다가 이걸 안 하면 주류 엘리트 사회에서 배제되므로 그 폐단이 매우 심각하다. 자세한 건 똥군기/사례 참고.[7] 술 강요 및 술자리에서 이뤄진 동성간의 성추행, 선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요강을 들고 선진의 오줌을 받는 행위,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를 거부할 시 자행되는 물리적인 폭력 등 온갖 반인륜적인 행위가 묘사됐다.[8] 실제 역사에서도 박문수가 관료로 있던 영조 재임 도중에 면신례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박문수 또한 면신례의 폐해를 직접 경험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박문수가 면신례의 악습에 대해 성토하는 것은 그다지 어색한 부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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