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덤프버전 :

분류



[ 펼치기 · 접기 ]

황하 문명
하(夏)
상(商)
주(周)
서주(西周)
동주(東周)
춘추전국시대
춘추시대
전국시대

진(秦)
장초(張楚)
후초(後楚)
서초(西楚) | 십팔제후왕
한(漢)
전한(前漢)
신(新)
현한(玄漢)
후한(後漢)

삼국시대
위(魏) | 촉(蜀) | 오(吳)
진(晉)
서진(西晉)
동진(東晉)
환초(桓楚)
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
송(宋)
북위(北魏)
제(齊)
양(梁)
후한(侯漢)
후량(後梁)

서위(西魏)
동위(東魏)
진(陳)
북주(北周)
북제(北齊)

수(隋)
당(唐)
무주(武周) | 호연(胡燕)

오대
후량(後梁)
십국
탕구트
요(遼)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

송(宋)
북송(北宋)
서하(西夏)
남송(南宋)
서요(西遼)
금(金)
원(元)

북원(北元)
명(明)
순(順) | 서(西) | 남명(南明) | 후금(後金)

오주(吳周) | 동녕(東寧)
청(淸)
태평천국(太平天國)

중화민국
(中華民國)

군벌
청나라 소조정 | 임시정부(臨時政府)
북양정부(北洋政府)
중화제국(中華帝國) | 호법정부(護法政府)
국민정부(國民政府)
우한정부(武漢政府)
일치시기

소비에트 지구
중화소비에트공화국
만주국
(滿州國)


중화민국(中華民國)
대만(臺灣)

중화인민공화국
(中华人民共和国)









대명
大明 | Ming dynasty

파일:명나라 국새 인영.svg
국새

파일:589px-Ming_Empire_cca_1580_(en).svg.png
1580년대의 명나라
1368년 ~ 1644년 (276년)[1]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남명


포르투갈령 마카오
위치
중국, 베트남 북부[2]
국호
대명(大明)
역사
[ 펼치기 · 접기 ]
1356년 주원장 세력의 독립
1363년 파양호 대전
1368년 칭제건원(건국)
1382년 천하통일
1399 ~ 1402년 정난의 변
1421년 베이징 천도
1449년 토목보의 변
1457년 탈문의 변
1550년 경술의 변
1571년 융경의 화의
1573 ~ 1582년 장거정의 개혁 시작
1581년 일조편법 시행
1619년 사르후 전투
1622년 서홍유, 백련교도 봉기
1623년 위충현 실권 장악
1627년 농민 반란 확산 / 위충현 실각
1636년 청 건국 / 이자성, 틈왕 자칭
1644년 멸망
1662년 남명 멸망

수도
난징 응천부, (1368 - 1421),
베이징 순천부 ,(1421 - 1644),
면적
9,970,000km² (1422년 기준)
6,500,000km² (1450년 기준)[3]
인구
(추산)

6,500만명(1393년)
1억 2,500만명(1500년경)
1억 6,000만명(1600년경) 출처
민족
한족, 묘족, 장족, 바이족, 후이족, 몽골족, 여진족, 둥족, 그 외의 피지배층 민족
언어
근고한어, 한문, 오어 등등의 방언
문자
한자
종교
유교(성리학) (국교), 티베트 불교, 대승 불교, 도교(무당파), 이슬람교, 경교, 백련교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皇帝)(천자)
주요 황제
[ 펼치기 · 접기 ]
초대 홍무제 주원장 ,(1368~1398),
3대 영락제 주체 ,(1402~1424),
5대 선덕제 주첨기 ,(1425~1435),
6대 정통제 주기진 ,(1435~1449)(1457~1464),
9대 홍치제 주우탱
,(1487~1505),
11대 가정제 주후총
,(1521~1567),
13대 만력제 주익균
,(1572~1620),
16대 숭정제 주유검
, (1627~1644),,,

국성
(朱)
통화
홍무통보(洪武通寶), 대명통행보초(大明通行寶鈔)[4]
현재 국가
[[중국|

중국
display: none; display: 중국"
행정구
]]

[[대만|

대만
display: none; display: 대만"
행정구
]]
(일부)[5]
[[미얀마|

미얀마
display: none; display: 미얀마"
행정구
]]
(일부)[6]
[[인도|

인도
display: none; display: 인도"
행정구
]]
(일부)[7]
[[몽골|

몽골
display: none; display: 몽골"
행정구
]]
(일부)
[[베트남|

베트남
display: none; display: 베트남"
행정구
]]
(북부)[8]
[[라오스|

라오스
display: none; display: 라오스"
행정구
]]
(북부)[9]

1. 개요
2. 역사
3. 행정과 조세
3.1. 행정구역
4. 경제와 대외 교역
4.1. 명나라의 경제발전에 대한 비판적 시선
6. 외교
8. 여담




1. 개요[편집]


중국 역사상의 통일 왕조들 가운데 하나로 1368년 주원장원나라를 북쪽으로 쫓아내고 건국한 마지막 정통 한족 통일왕조다.

정식 국호대명(大明)[10]이며, 국성을 따서 주명(朱明)이라고도 한다. 모두 16명의 황제가 있었고 1368년부터 1644년까지 276년간 존속했다.

국명은 중원의 한족 왕조들 사이에서는 특이하게도 춘추전국시대에 존재했던 국명이 아닌 새로 '명(明)'이라는 이름을 만들어서 정했다. 이는 태조 주원장이 믿었던 백련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국명으로, 백련교에서는 흑암(黑暗)이 물러가고 광명(光明)이 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흑암인 원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나라라 하여 명이라는 국호를 쓴 것이다. 사실 중국 역사에서 왕조를 건국하면, 건국자가 기존에 하사받거나 불리던 작위가 고스란히 황제로 격상되면서, 그와 동시에, 작위에 설정되어 있는 봉지가 왕조의 국호 그 자체로 격상되는 경우가 많았는데[11] 주원장은 황제가 되기 전 오왕(吳王)이었음에도 이를 쓰지는 않았다. 오(吳)라는 글자에 강남을 가리키는 지역색이 너무 강하게 들어 있어서 중국 전체를 포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홍무제는 건국하면서 수도를 난징으로 정하였으나 이후에 영락제[12]가 수도를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베이징으로 옮겼다.

건국 초기에는 만리장성 이남의 중원내몽골 남쪽 일부, 만주 일부에 이르는 지역까지 장악하였다.[13] 또 15세기 중엽까지 대대적인 원정을 통해 국가의 위세를 떨쳤다. 조선, 류큐 왕국, 대월 등이 사대의 예를 취하였으며,[14] 일본무로마치 막부 초기부터 명나라에 조공하기 시작했다.

중화제국이 세계관의 일부였던 원나라, 청나라와 달리 중화제국의 정체성이 강해 앞뒤 왕조에 비해 국토 면적이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15]

농민에 의해 건국되고 농민에 의해 멸망한 나라이기도 하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주원장이 몽골 제국원나라북쪽으로 몰아내어 건국되었으나, 만주족청나라가 남하 침략하여 나라가 어려워지고 폭정으로 농민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역시 가난한 농부였던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 북경이 함락되고 황제인 숭정제가 자살함으로써 명나라는 멸망하였다. 이후 최후까지 저항하던 남명과 타이완의 세력마저 청나라에게 항복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

명나라의 존속 기간은 한국사고려 공민왕 ~ 조선 인조(남명 포함 시 현종까지) 시기에 해당한다.


2. 역사[편집]


원나라 말기에 홍건적의 난과 군벌들의 봉기와 수많은 한족 백련교도들의 중심 반란으로 전국이 어지러워지자 일어난 주원장은 처음엔 백련교-홍건적에 몸담았다가 두각을 나타내 지도자가 되어 오왕을 자칭하였다. 그 후 각지에서 한족 군벌들과 원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황제가 되어 명나라를 세운 뒤 대도를 함락시켰다. 황제 혜종은 베이징을 버리고 몽골 고원으로 도망쳤고 만리장성 이남은 명나라의 깃발 아래 통일 되었다. 홍무제(주원장)는 난징을 수도로 하고 대규모 숙청을 일으켜 공신들을 제거하면서[16] 명나라의 기초를 닦았다.

홍무제 재위시절 황태자인 주표가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손자인 주윤문이 황태손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홍무제는 자신의 장남인 태자 주표외에 다른 아들들은 번왕으로 임명하여 약간의 병사를 주고 마치 지방 제후처럼 역할을 주고 있었다. 홍무제가 죽자 2대 황제에 오른 손자 건문제(주윤문)는 신하들의 요청에 따라 삼촌인 번왕들을 숙청하려다 오히려 홍무제의 넷째 아들이자 가장 강력한 군사를 가지고 있던 연왕 주체가 일으킨 정난의 변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연왕은 스스로 3대 황제에 올라 영락제로 즉위하였다. 영락제는 환관 정화를 시켜 남해안을 탐사하게 하고 몽골(타타르), 오이라트와 계속 전쟁을 벌여 북방을 억제하였으며 베트남을 점령하여 중국의 영토로 만든다. 영락제의 손자인 선덕제 시기에는 비록 베트남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선덕제의 현명한 통치로 번영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정통제가 즉위하자 환관 왕진의 국정농단으로 국정이 혼란스러워진다. 또한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위기가 찾아와 북쪽에선 오이라트에센 칸이 침공해오며 남쪽에선 왜구가 해안가를 약탈한다. 명은 이에 맞서 싸웠으나 오히려 에센에게 대패하여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토목의 변이 일어났다. 그래도 에센 칸이 내분으로 살해되고 명나라 군대가 몽골족을 격파하여 위기는 벗어났으며 천순제(정통제)가 돌아와서 수습하게 된다. 이후 성화제홍치제가 선정을 펼치면서 평화와 안정을 찾아 번영한다. 다만 이 시기부터는 더이상 주변국에 패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17]

이후 무능한 황제들이 즉위하면서 명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특히 북로남왜의 위기가 다시 찾아왔는데 계속된 다얀 칸알탄 칸을 비롯한 북방 유목 민족의 침입에 시달렸으며, 수도까지 위협받는 사태가 벌어진다. 남쪽에선 왜구가 해안가를 자주 침입하여 약탈을 하고 지방을 초토화하는 위기가 찾아왔다.(북로남왜) 게다가 명나라 황제들의 무능과 누적된 정치-경제 위기는 사회적 불안을 가져왔다.

1572년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 황제 만력제가 즉위하였는데 초창기 신하 장거정에게 정치를 맡겼을 때는 장거정이 비전있는 정책으로 국가를 안정시켰으나, 장거정이 죽고난 후부터는 만력제가 정치에 흥미를 잃었고 국정을 내팽개치면서 무능한 정책을 남발하였다. 거기다 만력 3대정으로 재정은 파탄나고 무거운 세금에 시달린 농민들의 불만은 커졌고 농민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 이후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동림당과 반 동림당과의 갈등과 위충현을 비롯한 환관 세력의 정치 농단으로 명나라의 정치 혼란은 심해졌다. 한마디로 명 4대 암군 시기부터 명나라의 국운은 결정적으로 기울어진것을 넘어서 멸망에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숭정제가 즉위하여 위충현을 제거하였지만 명은 이미 누적된 정치 혼란과 경제 혼란으로 막장이 된 터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변방의 만주에서 여진족만주족을 자칭하여 후금을 세우고 굴기하여 명을 위협하게 된다. 명은 이를 조선과 연합해 제압하려했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요동과 여진족에 대한 패권을 최종적으로 상실하였다. 후금은 이후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과 국교를 수립하고 몽골 부족들을 점진적으로 복속하였다. 이후 청나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에 즉위하여 명나라와의 대결 노선을 확실히 했다.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완전히 복속시킨 청나라가 송산 전투에서 명나라에 대승을 거두자 명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이 위태로워졌다.

이때 이자성, 장헌충 등이 일으킨 이자성의 난과 같은 농민 반란이 전국을 휩쓸고 농민군이 수도 베이징으로 몰려오는 사태가 발생한다. 정예군이 청나라(후금)와의 결전에서 전멸한 상태에서 변경 수비대만으로 북방을 막고 있던 명나라는 농민의 대병력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그나마 남아있던 지방군마저 모두 반란군에게 패배하면서 더는 반란군을 막을수 없었다. 결국 베이징이 이자성군에 함락되자, 숭정제는 자결하면서 명나라는 사실상 무너졌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를 막기 위해 오삼계 등이 지휘하던 명나라 군대가 적이었던 청나라에 투항하자 산해관입관한 청나라 군대는 이자성군을 순식간에 격파하고 베이징을 점거한다.

입관 이후 명청교체기 동안 이어진 중국 대륙 정복 전쟁에서 이자성-장헌충 반란 세력과 남명 정권은 연달아 패배하고 청나라는 천하를 통일하였다. 남명의 영력제가 살해당하면서 주씨의 후손은 끊겼고,[18] 청나라에 투항했던 옛 명나라 장군 출신 번왕이 숙청당하는 과정에서 삼번의 난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마지막으로 타이완 섬동녕 왕국(명정시기)도 펑후해전(澎湖海戰)에서 청나라한테 대패하여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명나라의 잔존 세력은 그렇게 청에게 굴복해 완전히 멸망했다. 그러나 남아있던 명나라 유민 가운데 일부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구호 아래 청나라 시대 내내 비밀결사의 형태로 남기도 했다.[19]

3. 행정과 조세[편집]


명은 원으로 인해 타격을 받은 소박한 농촌 공동체의 이상을 구축해 회복하려고 했고 상당한 성과[20]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1] 자급자족 농민 질서의 회복을 추구한 것은 농민 반란을 주도하며 성장한 명 태조 주원장의 출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때문에 문제도 있었다. 예컨대 '장성'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성벽이 제일 길다는 남경성을 쌓을 때에도 현장에 공장을 세워서 벽돌을 생산하는 대신 일정 지역의 마을에서 벽돌을 십시일반으로 제공하게 했다. 벽돌을 만드는 일을 맡은 가구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 벽돌을 남경까지 운반하는 부역을 맡게 된 가구에는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쾌락의 혼돈」(티모시 브룩 저)에 따르면 전근대 시기에 이렇게 전국적으로 통일된 행정 집행이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업적이었다고 평가한다.

행정 제도로는 소박한 농촌 공동체의 이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데서 나온 '이갑제' 를 실시했는데, 주원장은 이러한 이갑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토지대장인 어린도책(魚鱗圖冊)과 조세대장/호적인 부역황책(賦役黃冊)을 통해 농촌공동체를 자세히 조사하면서 전 지역에 균질적인 농촌 공동체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갑제는 기본적으로 '이장', '이노인' 등의 유력 계층을 포괄하면서 성립되었기에 빈부격차를 결국 인정한 것이었고, 이갑제는 얼마 못가 한계를 드러냈다.[22] 주원장 자신도 말년에 이갑제로 이루어진 농촌 내에서도 상당한 빈부격차가 있는 것을 인정했다. 중요한 건 주원장 시기, 즉 명이 건국된 직후에도 실효성이 바라던 만큼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주원장 시기의 이갑제는 최소한 상당히 정확도 높은 인구 조사 제도로서 기능했던 것은 사실이며, 이갑제를 통한 최초의 인구 조사는 실제 인구와 10여 %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건 전근대 시기의 인구 조사로써는 상당히 높은 수준에 달한 것이다. 일반적인 인구 사학자들은 중국사에서 믿을만한 인구 통계가 명 초 1393년 인구 조사를 시작으로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23]

홍무제는 관에서 농민으로부터 세금을 걷어서 다시 군인에게 봉급을 주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서 각 농민이 할당된 군인에게 직접 쌀을 전달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이는 부대를 다른 곳으로 재배치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상당히 복잡해지는 상황이였으며[24] 결국 이것도 명 중기 이후에 병사들에게 은을 월급으로 주고 알아서 곡식을 사먹게 하는 형태로 변화한다.[25] 이러한 조치는 은근히 상업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었고 약탈보다는 낫지만 현지 조달의 또다른 형태에 불과했다. 결국 보급 문제는 임진왜란이나 청나라와의 전쟁, 심지어는 농민군과의 전쟁에서도 여러 차례 명군의 발목을 잡는다.

어쨌든 중기 이후 명은 수입을 판단하고 거기에 맞춰 지출을 결정하는 양입제출이 아니라 지출을 결정하고 거기에 맞춰 세금을 거둬들이는 양출제입에 가까운 국가 운용을 했으며, 이는 토목의 변 이후 높아진 방위 부담을 고려하면 어쩔수 없어 보이긴 하나 또한 재정 운용의 방만함과 높은 세율을 낳았다. 정부가 알아서 지출을 조절해야 하는데 지출이 늘면 늘었지 조절은 안 됐다.

물론 명 조정이 노는 것만은 아니었고, 꾸준히 조세 구조를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강남에서 쌀을 걷어서 위로 올라오는 사이 발생하는 부정 부패를 막기 위해 조세가 서서히 은납화된 것도 그러했고, 지나치게 과중해지는 잡역도 서서히 은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는 방식으로 대체해 나갔다. 법제적으로도 이갑제 하의 갑을 묶어 행정을 재정비하고 재산에 따라 세금을 거두게 하는 균요법, 조세의 단계를 나누어 차등적으로 세금을 거두는 십단법, 호의 등급에 따라 세금을 달리 거두자는 문은과 정은 제도, 세금을 지세와 인두세로 통합하자는 일조편법 등이 지역별로 시행되어 나갔다. 중요한 것은 첫째로 조세가 서서히 은납화되어 나갔다는 것이고, 둘째로 지역별로 다양한 개혁책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지역별로 다양한 개혁책이 나타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제 이갑제를 벗어났던 지역의 행정 단위를 나름대로 탄력적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지방관들의 노력과 여기에 자발적인 사회 지배 계층들과의 협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외적의 침입과 잦은 반란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신사들이 일조했다. 이때 두각을 보인 인물이 십가패법과 남가향약을 중심으로 지역 단위의 자치 집단이자 방위 집단을 구축하려 했던 왕수인, 즉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이었다. 16세기 초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으면서, 명 후기에는 중국 전역에 향촌이 재건되었고 이를 명 정부에서도 행정 단위로 활용하게 된다. 따라서 명 말기에는 이갑제를 보갑제가 대체하는 모습도 보였다.

전국에서 다양하게 진행되던 조세의 개혁은 명재상이던 장거정이 대대적인 토지 조사와 통합적인 일조편법을 진행하면서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그러나 조사를 기획, 실현하자 지주층과 황족, 관리층을 비롯한 특권 계층에서 엄청난 반발을 나타냈고 장거정은 수많은 정적들의 공격 끝에 사후 모든 명예를 몰수당하게 되는것은 명나라가 목표로 했던 '농촌 공동체'의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를 잘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장거정이 살아있을 때도 몇몇 사람들이 '당신은 부국 강병만을 신경쓸 뿐 성현의 도에는 신경쓰지 않으니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며 매도한 바 있고, 이에 장거정은 칭찬이 지나치십니다라고 받았다고 한다.

3.1. 행정구역[편집]




명나라는 원나라의 행성 제도를 계승했으며, 행중서성과 중서성이 폐지된 뒤 행성을 대신하는 승선포정사사, 제형안찰사사, 도지휘사사를 두어 이를 삼사로 하였다. 승선포정사사는 민정을, 제형안찰사사는 형법을, 도지휘사사는 군사를 담당했다. 정난의 변을 거쳐 북평부는 북직례가 되었고 기존의 직례였던 남경은 남직례가 되었다.


4. 경제와 대외 교역[편집]


파일:external/www.transpacificproject.com/ZhengHe-1.jpg

명대에는 전통적인 식량 생산의 농업에서 탈피하여 상품 작물의 재배가 활발했는데 이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분업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이런 원료를 싸게 사서 직공들에게 비싸게 팔고 가공물을 싸게 사들여 비싸게 팔아 차익을 남겼다 일반적으로 송, 원 대에 개방적으로 세계 곳곳의 기술들을 받아들이던 모습과 대비되어 15세기 ~ 17세기에 중국이 유럽에 따라잡히고 형세가 역전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는 이 시기에 서유럽이 급작스레 등장한 아메리카와 대항해시대에 활발한 대외 원정을 통해 급격히 발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명대의 중국 경제가 황제까지도 대외 무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여했던 남송 대까지와는 달리 내수에 중점을 두고 폐쇄적인 사회를 지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교역의 문을 닫은 것은 아니었다. 정화가 대선단을 이끌고 아프리카 원정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 원정을 지원한 영락제는 황위를 탈취한 상황에서 주변 우호국들을 늘려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이러한 항해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고 다시 재개하려면 국세가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신하들은 극구 반대했다. 특히 황제가 정화의 원정기를 읽어보려고 하자 신하들이 임의로 불태워버리고는 소실되었다고 거짓 보고를 올리거나 채근담 같은 서적에서는 이러한 기록말소를 미담처럼 기록해놓을 정도로 대외교류에 부정적이었다. 때문에 정화가 정확히 어디까지 갔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게 되었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중국 도자기나 도편 등을 토대로 그 루트를 추측하는 상황이다. 결국 영락제와 정화가 사라진 이후에는 해상 진출에 대한 원동력이 없어진 중국은 "해금령"을 통해 공식적인 해상 활동을 억제하게 되었다.

해금령은 화둥 지방의 푸젠 성의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푸젠 성은 바다에 면해 있으면서도 산악 지역인 데다 질 좋은 목재가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성의 경제는 어업, 해운업 등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해금령으로 인해 푸젠 성의 산업이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푸젠 성 주민들은 밀무역에 종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기 왜구에 가담하기까지도 했으며 가왜(假倭)로 왜구인 척하면서 중국 해안을 노략질하곤 했다.

이 해금령도 결국엔 명나라의 왜구 토벌이 종결된 1567년 푸젠성에서 제한적으로 개항을 허가했다. 곧 동남 해안 지역 전체에 급속도로 허가되어 융경 개관과 만력 중흥 등 명조 중후기의 잠시동안의 번영과 일조편법의 전국 확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분위기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를 해상 세력에 대한 견제나 유교적 이상주의에 바탕을 둔 '폐쇄적이고 자급자족적인 농촌 사회'를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하기도 한다.

전세계를 배회하던 은이 중국에 도착하면 마치 여기가 자연의 중심이라는 듯이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

- Gomes solis, "은에 대해서 논함(Arbitrio sobre la plata)", 1621


그러나 명의 대외 무역은 민간 무역의 영역에서 상당히 활발했으며 특히 은 본위 경제를 본격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한 중기 이후의 명은 대외 무역이 활발하여 전세계의 은을 긁어 모았다. 연구에 따르면 멕시코(누에바에스파냐)의 아카풀코 → 필리핀 → 명으로 이어지는 무역 루트를 통해 유입된 은은 아메리카 전체 은 산출량의 절반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근대에서 공식 무역은 조공 무역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명 조정은 공식적인 무역으로는 조공 무역 외에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간 무역, 비공식적인 무역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기간동안 방관하는 상태였다. 가끔씩 해안선을 비워버리는 폐쇄령이 내려지기도 했지만(특히 북로남왜의 화 시기에) 일시적인 일에 그쳤다. 뭣보다도 그러면 세금이 안 들어오니까. 게다가 해상 활동 없이는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푸젠 성 사람들에게 해금 정책은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기에 밀무역이 창궐했고, 중국에 창궐한 후기 왜구를 방관하거나 비밀리에 협조하기도 하였다.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것도 명 중기이며 포르투갈이 명 지방 정부에 불만을 품고 마카오를 폐쇄하자 상인들이 반발하며 들고 일어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라 한 적도 있다. 결국 1509년 광저우를 조공국에 한해 개방하고, 1567년 제한적으로 푸젠 성 장저우에서의 무역을 허가했으나 명나라 상인들은 그러한 제한을 무시하고 급속히 사무역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이러한 바람에 명나라 정부도 어쩔 수 없이 허가 무역선 규모를 늘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명 중기 이후 15세기부터 금, 은이 다시 화폐로 유통될 수 있었는데 일단 황폐해진 토지가 정리되고 평화가 지속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였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외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은의 수입이 증가했다. 민간에서 유통되는 은의 양이 늘어나면서 세금을 은으로 걷기 시작하였고 중앙에서 꾸준한 회수를 통해 주도적으로 화폐 경제를 운영할 수 있을 만큼 은을 확보할 수 있었다. 즉 잠재 역량을 깨우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던 것이지 명나라의 경제가 침체되었다거나 그런건 아니었다.

세수를 통해서 비교해 보면 명대의 경제력이 송대를 따라잡지 못했고 강남 지역만을 확보했던 남송 대와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수치 상으로는 따라잡지 못했다'는 말에 불과하다. 송대에는 아직 화폐 경제가 완성되지 못해서 화폐상의 경제력과 실제 경제력에 거품이 끼어있었고, 도량형의 단위도 더 작았기 때문이다. 결국 송대에 경제가 융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명, 청을 능가했다는 주장은 허구다.

비슷한 예로 북송의 동전 발행량이 명, 청대보다 많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단지 동의 가격이 올라갔기 때문이다.[26] 마찬가지로 송대의 경제력이 전세계의 50%였다는 계산도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과장된 감이 있다고 한다.

명나라의 전 시기인 몽골 진출 초기와 원 제국 초기, 그리고 말기에 엄청난 난세로 인해 인구가 급감하고 경제가 쇠퇴한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몽골 진출 극초기의 학살[27], 그리고 원나라의 가혹하고 무능한 통치와 극심한 인종 차별,[28]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염병[29]의 발병으로 인해 중국의 인구는 많게는 30 ~ 40%가 감소했으며, 특히 북중국 지역은 4천만을 바라보던 인구가 1천 5백만 이하로 감소해 버렸다. 사실 경제에 관해서는 원대 대부분 중상주의적 정책과 항저우와 대도(베이징)를 잇는 대운하, 그리고 원의 국내 상업로와 국제 무역선의 연결을 통한 수공업 생산과 판매와 톈산 남북로를 통한 내륙의 상업로등의 이유로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했다.[30] 애초에 몽골 제국의 업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역전 설치와 도로 정비 등을 통한 동서 문물 교류 촉진'이다. 원이 말기에 유목민 지배층의 낭비와 엄청난 군사비로 인한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교초를 대량으로 발행하여 지폐 가치가 폭락하게 한 것을 제외하면[31], 원의 경제는 대체적으로 대호황이었다. 즉 말기를 제외하고는 원의 경제엔 문제가 없었고, 항주 같은 곳은 이전보다 더 잘 나갔다. 명 초기에 자급자족의 경제 정책을 선택한 원인은 단지 교초 대량발행으로 인해 화폐 경제가 무너져 버린 탓이다.

중국에서도 자생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이 가능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의 관점에서 보면 명 후기의 경제적 발전 양상은 매우 주목받는 시기이기도 하다.[32]

하지만 고대 중국부터 당나라 대까지 중국의 중심이었던 관중 지방은 생산력이 계속 감소하여, 다른 지역으로부터 식량을 조달받는 상황이 된다. 게다가 명나라 말기에 황제와 환관들의 부패로 관중 지방이 식량을 제대로 조달하지 못하게 되자 지역민들의 반발심은 커져 갔고, 결국 이자성의 난이 관중 지방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이전 시대에 비해 양쯔강 중류 지역에 대한 개발이 많았는데, 이런 과정에서 현대의 호북성호남성에 해당하는 호광성[33]은 엄청난 곡창 지대로 발전해 湖廣熟 天下足(호광숙 천하족)이란 말이 생길 정도였다. 원대 부터 명대 초기까지 호광성은 그간 전란에 휘말리면서 내지 변방에 해당할 정도로 피폐한 지역이었으나, 명 중기부터 정부 차원에서 호광성에 대한 개발을 장려하는 것으로 바뀐다.


4.1. 명나라의 경제발전에 대한 비판적 시선[편집]


사실 명의 경제발전은 유럽인이 연 대항해시대와 신대륙 경략으로 신대륙산 금은귀금속과 신대륙산 작물 유입과 동방무역이 원인이라는 시각이 있다.

상시 만성적인 귀금속 부족에 허덕여서 시장에 화폐공급량이 지나치게 부족했던 전대 황조의 환경은 상공업 발달에 심각한 족쇄로 다가왔다. 교초 지폐로 화폐경제를 보조하긴 했으나, 교초의 신용을 보장할 중앙정부의 무능으로 원말 교초하이퍼인플레 동아시아판 대공황으로 물물교환 경제로의 퇴화등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어디까지나 유럽덕인 신대륙산 금은귀금속의 유입으로 은화가 보급되었고,이로인해 세수를 은자로 통일하는 일조편법이 가능해 농민들은 세금에 바칠 은자를 얻기위해 환금성 작물을 키우거나, 부업으로 수공업에 뛰어들거나, 적어도 주곡작물을 시장에 내다파는등의 행동으로 인해 급속도로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여기에 대항해시대로 해외 무역시장이 활짝 열린것과 신대륙의 은을 수입하기위해서라도 도자기등 수출용 공업이 크게 발전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가져왔다.

이미 중원은 수나라시기 내륙 수계 운하망을 통일했고, 오대십국-송 사이에 갑문 시스템을 완성시켰기에, 이미 북송기 1억이 넘는 중원의 시장을 하나로 묶어서 각각이 대국규모인 성(省 행정구역. 송나라시기엔 로路)간 무역만으로도 수공업공장인 민간주도 매뉴팩쳐의 시장수요와 물류망과 여유노동인력을 충족했고 분명히 도입압력이 충분했었으나, 은화 통화량 부족때문에 꺾여 버렸고, 내륙수계 교역규모가 일정이상 커지질 못했다.

더군다나 명나라의 일조편법처럼 조세를 은자로 통일함은 생각하기 힘든 기발한 제도이거나,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도입이 힘든것이거나 한것이 아니다. 원역사 일조편법의 기득권 저항은 미등록 토지를 장부에 올리고 세금을 거두는것에 저항이 있었지, 조세를 은자만으로 거두는것은 세금을 내는 입장에선 징세가 일원화되고 곡물이나 비단등 현물납부의 세금 가치가 시장과 괴리된 모순이 사라지고 합리적으로 변해서 납세의 부담이 줄어든다. 반대로 징세하는 입장에선 세운비용이 확 감소하고, 행정과 예산관리의 효율이 크게 증가해 마찬가지로 이득이다. 소작농부터 자영농,대토지 지주,공인,상인,관료,군주 모두 이익이 되고 도입필요성을 절실히 공감하는데도, 단순히 금속화폐 통화량 부족 때문에 역대 황조가 도입하고 싶어도 못한것이다.

명나라기 민간주도 매뉴팩쳐와 국제무역에 버금가는 내륙수운 성내 무역 물동량은 이미 북송때 모든 조건이 마련되었음에도 금속 화폐의 통화량 부족이 발목을 잡아 못 이뤄진것이다.

또 명나라의 발전에, 유럽을 통해서 들어온 신대륙 작물인 고구마 도입으로, 푸젠성과 광둥성, 광시성, 윈난성등 산투성이 남쪽 지역이 급속도로 개간되기 시작했다. 대항해시대로 인한 남중국해 무역 활황과 더불어서 미개척지에 가깝던 위 지역의 농업과 상공업이 골고루 발달해서, 중원의 새로운 경제중심지가 된다 [34][35]

여기까지 유럽이란 외부요소로 이뤄진 성장이고, 명나라 내적인 요인인 화북 목화 플랜테이션과 면직물을 필두로 한 장강삼각주 도시화, 그리고 호광지역 곡창 개발에 대해서 살펴보자.

목화 플랜테이션은 산업의 근본적인 성격으로 환금성이 좋으나,토질을 심각하게 황폐화시키고 또 조면기 개발전엔 자유의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노동강도가 필요하기에, 필연적으로 지역 주민들을 노예로 예속시키거나 노예에 준하는 인신구속으로 돌아가기에 해당 지역은 목화생산외의 모든요소둘, 사회경제산업의 구조가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

목화원료를 공급받은 장강삼각주 지역은 모직물 산업으로 커다란 산업발달이 일어나고 번영의 극치를 누렸겠으나, 정작 원료 생산지엔 암적인 요소밖에 안된다. [36] [37] 원명청대의 중국의 남북경제격차가 강남의 개발과 소빙기로 인한 북중국의 한랭화만이 아니라, 강남을 위한 원료 공급지로 희생되었던 지분도 크다.

그리고 흔히 이뤄지던 호광지역 개발방식이, 장강지류들을 둑으로 막고 뭍으로 드러난 강바닥을 개간하는 식으로. 당연히 수계를 건드리는 일은 소련의 중앙아시아 개간처럼 극심한 환경교란을 가져다주고 역설적으로 장강 하구 지역의 농업에 커다란 타격을 가져다주었다. 장강 삼각주의 인구밀집과 도시화로 인한것도 있지만 위의 요소까지 더해서 삼각주가 곡창지대에서 식량수입지방으로 변했다.

즉 명나라의 내제적인 발전요인을 보면 사실 장단점이 극명하고, 근대산업화를 받아들이기 유리한 사회구조랑 역행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5. 군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명나라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외교[편집]






6.1. 조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명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2. 여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명나라-여진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3. 누에바에스파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누에바에스파냐-명나라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왕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명나라/왕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여담[편집]


  • 15세기 후반부터는 조세 제도의 혼란과 향촌의 해체로 국가 재정이 악화하는 한편 민간 교역이 성하였으며, 이는 필리핀을 통해 유입된 스페인 등의 영향으로 은 본위 경제 체제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장거정의 개혁으로 일조편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국가의 재정 악화, 무능한 황제들의 실정, 북로남왜 등의 침공, 만주 왕조의 대두 등으로 세력이 약화되다가, 빈발하는 농민 반란 속에서 직접적으로는 이자성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청나라가 이자성과 장헌충 등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중국 내륙으로 장악하여, 명나라로부터 천명(天命)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며 통일 왕조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멸망 이후에도 청에 대항하여 남명의 부흥 운동, 정성공대만 세력, 삼번의 난 등이 일어났으나 모두 청나라에 의해 진압되었다.

  • 이민족과 공존하는 시대를 넘어 중화 제국의 구도를 완성한 점, 초기 자급자족적 질서를 추구하기도 했지만 활발한 대외 무역을 통해 흡수된 은 본위의 화폐 제도가 운영된 점, 마테오 리치를 필두로 가톨릭 선교사가 활동하는 등 서양과의 접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였고 필리핀과 일본 등으로부터 수입된 은 무역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킨 점, 양명학 등 보다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이 추구되어 기존 주자학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적극적으로 전개된 점 등으로 인해 세계사적으로는 대개 중세를 완전히 넘어선 근세 왕조로 취급받고 있으며, 중국의 마지막 왕조가 하필이면 이민족인 만주족에 의해 건립된 청나라인 탓에 중국, 특히 한족들 사이에서는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조금 더 치켜세워지고 있는 왕조이기도 하다.[38]

  • 사실 명나라에 대한 재평가는 그동안의 이미지가 청나라의 편향적인 역사 서술에 의해 폄훼되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점, 송나라와 비교하여 폐쇄적이고 상업적으로 다소 쇠퇴했다는 기존의 이론[39]이 흔들리면서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실제로 최근 나오는 사료나 기록에서도 과거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는 것들이 많이 나와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례로 명을 방문한 스페인 신부 라스 코르테스는 "아무리 가난하고 형편이 어려워도, 문자를 읽고 쓸 줄 모르는 어린이는 거의 없었다"고 하며 놀라워하기도 했다.[40]

  •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장강 유역에서 시작한 통일 국가였다. 초기 근거지였던 남경(난징시)은 장강이 관통하는 하류 지역에 있는 곳으로, 장강 이북과 이남의 경계에 위치한다. 이후 북경(베이징시)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 상당한 국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암군들 때문에 국력에 비해 영 저평가당하는 비운의 왕조이기도 한데 사실 명나라에서도 영락제, 선덕제명군이 있었고 어느 왕조나 명군암군이 모두 있지만 명나라의 경우 불행하게도 말기암군들이 거의 연달아서 즉위했으며 그 중에서도 가정제만력제라는 진짜 개노답 암군 두 명이 너무 오래동안 재위했다는 게 문제였다. 특히 명은 북송과도 비슷한 면이 있는데 북송은 인구가 1억이 넘는 인구대국에다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국가였고 화약무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국가였음에도 이전 왕조들에 비해 군사적인 면에서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국력에 비해 저평가받는데 명나라는 말기에 나타난 암군들의 추태 때문에 국력에 비해서 저평가당하는 점이 북송과 비슷하다.

  • 영락제때는 과거 한족 국가였던 북송보다 훨씬 더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영락제대에는 원정군으로 50만을 징집하여 중국에 역사적 골치거리인 몽골을 박살냈다.[41]


  • 명나라는 성리학이 생겨난 송나라와 함께 조선 왕조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중국사 왕조인데 당장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이 입는 용포관복은 명나라 시기의 용포와 관복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비슷하고 조선의 경국대전은 명나라 대명률을 많이 참고했으며 군사적인 면에서도 조선군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원앙진 같은 명나라의 전법이나 당파, 낭선 등 명나라 무기들을 많이 도입했다.

  • 한국에서 환빠가 있다면 중국에는 명나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명빠들이 있다. 이 명빠들은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 시절에 있었던 정화의 대원정 같은 사건들을 가지고 명나라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면서 열렬히 찬양한다. 이런 명빠들은 한때 중국에서도 그리 존중을 받지 못하고 비웃음을 샀으나 동북공정을 포함한 중국의 역사왜곡시진핑 집권기에 들어선 후 유행하게된 강경하고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요즘은 오히려 호평을 받는 경우가 많이 있다.

  • 황제들의 이름을 자세히 보면 항렬자와 오행상생법으로 이름을 짓는 식으로 지었다.[42]


9. 대중매체에서[편집]



  • Hearts of Iron II의 대체역사 시나리오인 Armageddon에서는 무려 19세기(!)까지 살아남았지만 19세기에 접어들어 명나라의 영토가 일본 제국러시아 제국이 만주를 얻기위한 싸움터가 되어버릴 정도로 매우 비참하게 쇠퇴한다. 물론 이런 치욕스러운 모습에 보다못한 민족주의자들에게 멸망한다.

  • 징기스칸 4 파워업키트 시나리오 4에서 사실상 최강국으로 나온다. 다른 시나리오의 제국과는 달리 중원을 통일한 상태로 나오고 컴퓨터가 조종할 때 북원 보다 고려와 일본을 자주 공격한다.

  • 대체역사소설쌀과 소금의 시대에서는 백인흑사병으로 몰락하고 아시아가 크게 부흥한 세계관이라서 엄청난 패권을 휘두르는 대제국으로 등장하는데, 잉저우라는 이름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일본 열도를 정복해 원주민들을 난민으로 만들어 이로쿼이 연맹에 의탁하게 만드는 등 사방팔방으로 날뛴다. 이렇게 본 역사보다 막강해지긴 했지만 결국 본래 역사대로 청나라로 넘어가게된다.

  • 김용녹정기에서 '돌이켜보면 명 왕조의 황제들은 태조가 개국한 이래 마지막 숭정제에 이르기까지, 잔악한 폭정을 하지 않았다면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였다. 솔직히 강희제에 비해 천양지차가 있었다.'라며 모든 황제를 깠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지나치게 명나라를 깎아내린다는 중국 측의 비판도 있다.

  • 각종 무협소설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는 현대 무협소설의 많은 원조 작가들이 대만 출신이기 때문이다. 현대 대만의 정치체제는 1912년에 중국 대륙에서 건국된 중화민국인데 이는 만주족 국가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오랜만에 다시 세워진 한족 위주의 국가로서 만주족을 크게 탄압하고 한족이 큰소리 쳤던 시절인 명나라를 많이 치켜세웠다.[43] 그리고 중화민국이 대륙을 잃고 타이완 섬으로 피난하면서 타이완에서는 "우리야말로 진짜 중국이고, 지금 중국 대륙 본토를 지배하는 중국 공산당 정권은 가짜 중국이다!"라는 식의 프로파간다가 널리 퍼졌는데, 이에 따라 공산주의 이념으로 인해 전통문화에 큰 관심이 없던 대륙보다 전통 한족 문화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그런 차원에서 정통 한족 국가인 명나라에 많이 주목했다. 그래서 대만에서 나온 무협소설들에서는 원말명초[44] 명말청초[45]가 단골 시대로 등장했고, 그런 대만 무협의 영향을 받은 한국 무협에서도 자연히 명나라 시기를 다룬 작품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던 것.

  • 붕괴3rd에서 중국을 모티브로한 신주가 있는데 과거 1470년대에 작중의 등장 조직 천명과 신주의 명 제국이 교전했다고 나온다.
[1] 주원장이 오왕(吳王)으로 자처한 기간까지 따지면 1364년을 명나라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남명의 존속 기간까지 합치면 1662년에 멸망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기간을 포함한다면 298년이 된다.[2] 1407년 - 1428년 교지(명)[3] Taagepera, Rein (1997), "Expansion and Contraction Patterns of Large Polities: Context for Russia",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 41 (3): 475–504. #[4] 1375년부터 발행한 지폐[5] 진먼 현, 마쭈 열도[6] 난칸, 장신포[7] 아루나찰프라데시 동부[8] 교지. 1407년 복속, 1428년 상실.[9] 이 역시 일부 지역이 교지에 해당. 1407년 복속, 1428년 상실.[10] '대명제국'이 아니다. 전근대의 중원에 있는 왕조들은 정식 국호에 '제국'을 넣은 적이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또한 '제국'이라는 표현이 아닌 '천자국', '상국' 등의 표현을 썼다. 동아시아에서 '제국'이라는 표현이 지금과 같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 제국, 중화제국, 대한제국과 같이 근대 이후의 일이다. 1915년 이전 문헌에는 중화제국이란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중화제국이라는 신조어를 말하면 아무도 이해를 하지 못하였다. 현재 중화제국은 1915년도 건국한 중화제국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데 가끔 과도한 찬양 수단으로 과거 국가들을 중화제국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일이며 한나라, 당나라, 명나라도 자신들을 중화제국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명나라를 언급할 때는 '명' 혹은 '대명'이라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많고, '대명국'이라는 표현은 아주 가끔 등장하며 '대명제국'과 같은 정체불명의 조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국체(國體)를 국명에 표현하는 것은 유럽적인 전통이다. Kingdom of England(잉글랜드 왕국)이라든지 Herzogtum Lëtzebuerg(룩셈부르크 공국)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칭했다. 이런 전통이 19세기 이후 서구 문명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에 밀려들면서 전파된 것이고 그 결과로 나온 명칭이 앞에 언급된 일본 제국이니 대한제국이니 하는 명칭이며 현재 한국의 정식 국호인 대한민국 역시 이 점에선 같다.[11] 한태조 유방은 한왕(漢王)이었고, 위태조 조조와 진태조 사마소는 각각 위왕(魏王), 진왕(晉王)이었다.[12] 반란을 일으켜 2대 황제인 건문제를 몰아내고 3대 황제로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13] 단, 만주의 경우 명이 대부분의 기간 동안 랴오둥 반도 일대만을 직접 지배하고 나머지 지역에는 이를 중심으로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이었다.[14] 이 경우 중국과의 조공으로 얻게 되는 정치적, 군사적 안정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현대 들어선 '조공 무역'에 주목한 시각도 부각되고 있다. 단, 사신 접대비나 조선 초(태종~세종) 공녀 문제, 임진왜란 이후 재조지은으로 인한 관계 변질 같은 문제 등은 감안해야 한다.[15] 실제로 몽골인의 국가인 원나라와 만주인의 국가인 청나라는 둘다 국토 면적이 1,300만 km²가 넘어가는 나라다. 반면 명나라는 700만 km²도 안된다. 물론 상대적으로 작다는거지 명나라는 현대의 인도보다도 국토면적이 큰 나라다.[16] 개국 공신 및 그들과 조금이라도 관계된 수만 명을 죽였다.[17] 사실 명은 영락제 이후 식민지인 베트남에서 베트남 독립군에게 패하여 베트남이 독립하고 토목의 변에서도 몽골에게 패하여 수도가 외적의 침공을 받는것에서부터 군사력이 약해졌음이 제대로 드러났다. 그러다보니 명은 영락제 이후로는 더는 주변국에 대한 패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국토를 방어하는 노선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18] 나중에 대왕 주계의 12대 손인 주지련이 옹정제 시기에 벼슬을 받고 명나라 제사를 잇게 되었다.[19] 많은 명 유민들이 전쟁을 피해 외국이나 동남아시아로 이민 가기도 했다. 이들은 현지와 많이 동화됐지만, 초창기 동남아 화교의 기원이 된다.[20] 식량 생산량 증가와 인구 증가[21] '추정' 인 이유는 아래의 이유로 인구 파악이 미비했기 때문이다.[22] 원래의 목적이 세수입을 확보하는 호구 통제 제도였다. 전근대 시기에 호구 조사 하는 이유가 뭘지 생각하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23] 조선만 하더라도 파악 호구수가 실제 인구의 최소 40%가 넘는 격차가 있을 것으로 본다. 국가가 교회를 통해서 세례자 명단만 확보하면 아주 정밀도 높은 인구 조사가 완료되던(실제로 스웨덴, 프랑스 등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유럽과는 상황이 다르다. 거긴 태어나면 기본적으로 유아 세례를 받고 죽으면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며 그 명단이 교회에 올라가니까. 세금을 내야 하지만 종교 문제가 걸려 있으니 농부들은 세금 내기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옛날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라 믿을만한 통계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행정력이 마비되는 시점이 현대에 비해 빈번했는데 그러면 행정 방식이 미흡한 국가에서는 인구가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게 줄기도 했다.[24] 이때 보급로는 재조정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25] 어떤 의미에서 이 제도는 동로마 제국프로니아 제도나 한국 역사의 과전법과 유사하다. 전근대(특히 중세) 기준으로 비용 대비 가장 효율적으로 군사력을 양성하는 방법은 영토를 분봉해주고 그 영토를 기반으로 군사력을 육성하게 하는 봉건제적 방법이었지만, 이 경우 군사력+세력기반까지 갖추고 효율적으로 양성된 그 군사력이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중앙정부가 세금을 수취하여 직접 봉급을 주게 되면 그만큼 군대에 대한 통제력은 높아지지만 전근대의 기술적 한계 때문에 수취-지금 과정에서 폐단이라고까지 할만한 막대한 비효율이 발생하는 것. 따라서 전근대 기준으로 중앙집권을 지향했던 국가들에서는 이 둘의 절충안으로 군인들에게 일정 범위의 농민들에 대한 수취권 제공하여 봉급은 효율적으로 주되 해당 농민들에 대한 지배력은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26] 명은 심각한 구리 인플레이션을 겪던 국가였다. 이건 청대도 마찬가지였고, 조선을 통해 혹은 직접적으로 일본을 통해 교역을 트고 윈난 지방의 개토귀류를 통해 동광을 확보하면서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일본이 교호 개혁으로 동 수출을 금지했을 때 동전 값이 등귀하고 동전에 아연을 더 섞어서 동전이 물러졌다고 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면도 있었다.[27] 이 학살은 오고타이 칸 시절에 끝난다. 북중국을 완전히 정복했기 때문에 정세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쿠빌라이도 북중국 통치를 잘했다. 이렇게 통치를 잘 해서 얻은 세력으로 아리크부카의 난을 진압할 수 있었다. 남송의 경우도 쿠빌라이 칸이 친중적이어서 전과 같은 학살은 없었다. 그래서 학살로 인한 인구 감소는 생각보다 적었다. 오히려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28] 북중국의 경우 쿠빌라이가 다스리는 시기 이후로는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는 등 이 원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고(쿠빌라이 칸 항목 참조), 그 후에도 중국 전체로 보더라도 이 원인으론 인구 감소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가령, 원나라의 인구는 대부분이 한족(몽골과 색목인 층의 수는 약 200만 ~ 300만인데 비해 한족의 수는 일단 한인의 수는 약 1,000만, 남인의 수는 약 6,000만, 합쳐서 약 7,000만 정도. 한인이 아무리 발해인, 거란, 여진 등을 포함한다 해도 원나라 인구의 대부분은 한족이었다.)인데도 계속 늘고 있었다. 1290년에 약 77,000,000, 1293년에 약 79,816,000, 1330년에 약 83,873,000, 1350년에 약 87,147,000, 명나라의 인구는 1393년에 약 65,000,000. 영문 위키 참조.[29] 흑사병의 피해가 중국도 예외가 아니었고 흑사병으로 죽은 인구수는 중국이 유럽보다 더 많았다. 약 3300만명이 죽은 것으로 보여진다. 흑사병 항목 참조.[30] 두산 백과 '원의 사회 경제' 참고.[31]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참고.[32] 중국 학자들 가운데 이미 송대에 자본주의의 맹아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명대나 청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중국본토 뿐 아니라 홍콩대학 소속 학자들이나 대만 학자들도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무조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홍콩대학과 대만 국립정치대학은 서양에서 중국사 사료를 연구할때 가장 많이 자문을 구하는 학교들이다. 홍콩대학은 영국 식민지 시절 설립되어 영어가 쓰이며, 중공 입김에서 자유로웠다. 그래서 중국본토와 달리 보다 정치권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황에서 학문탐구가 가능해 서양 학계에서 적극적으로 자문을 구한다.[33] 삼국지에서의 형주 지방, 청나라의 옹정제 시기 호북, 호남성으로 각각 분리된다.[34] 남중국의 경제력이 북중국의 경제력을 능가한 송나라 시기에서조차 푸젠-광둥-광시-윈난지방은 평야가 매우 빈약한 산간투성이의 볼모지여서, 광저우-취언저우-푸저우등 일부 해안 시박사 물류도시를 제외하곤 인구밀도가 거의 없던등 중원에서 가장 가난한 지방이였다. 송나라-명나라시기 인구밀도 자료#[35] 송기 푸젠성의 경우 취안저우-푸저우-샤먼등의 해안 도시가 워낙 크게 발달해서 부양할 배후지 계곡 지방이 개간되어 중원 평균 이상의 경제력을 지녔으나, 광둥부터는 주강 삼각주 지방조차도 송나라기준 아담한 중소도시 규모인데다가, 주강 삼각주 해안지방을 제외한 광둥-광시 양광지방은 말 그대로 송나라에서 가장 가난하고 인구가 희박하던 지역이였다.[36] 카리브연안의 설탕과 목화 고무등의 플랜테이션으로 인해 토질이 황폐화되고, 흑인노예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시체를 내다버리는등, 생산지에선 영 좋지못했지만 생산품을 이송해 가공하는 유럽은 커다란 번영과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37] 이러한 산업이 이뤄지던 카리브 군도와 브라질 동북부는 황폐화된 토질과 막장으로 고정된 사회경제산업구조로 세계 최빈 지역이다. 미 남부조차도 현대 경제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목화노예경제는 남부의 경제에 해가 되었으면 되었지 이익이 된 적이 없다고 하고, 21세기 선벨트 개발이전까진 풍족한 토지와 풍부한 천연자원과 온난한 기후, 물류에 이로움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방이였다.[38] 중국은 겉으로는 중화사상에 입각, 다민족국가임을 강조하며 요금원청도 모두 위대한 중국의 역사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칭기즈 칸도 세계정복을 이룩한 위대한 중화민족이라며 내몽골에 가짜무덤을 세워놓는 막북공정까지 하고 있다. 당연히 몽골에서는 이를 극도로 증오하고 있다.) 실제로는 요금원청을 발전없이 파괴만 했느니 뭐니 하며 깎아내리고 한당송명을 치켜세우는 등 속마음은 한족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 시진핑 정권의 중국 소수민족 탄압도 그런 한족 민족주의 성향이 제대로 폭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장 이 명나라 문서와 청나라 문서에도 이러한 한족사관의 영향을 받아 '명나라까진 화기 제조기술이 매우 뛰어났었는데 청나라 들어서며 서양에 밀리게 됐다'는 식의 편파적 서술이 보인다. 청나라가 화기의 연구 등을 금지시키거나 게을리한 건 사실이지만 이미 명나라 시절부터 서양에서 들어온 화기가 기존의 명나라 화기를 밀어내고 제식병기 자리를 차지했으며, 자연과학에서도 서양 선교사들이 기존의 한족 천문학자들을 밀어내고 고위직을 차지했으며 오랫동안 믿어온 혼천설을 대체하는 지구 구형론을 전파하는 등의 현상이 있었으므로 '청나라 때문에 서양에 밀리게 됐다'는 건 반만 맞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청나라가 이민족 정복왕조가 아니라 한족 왕조였어도 이런 평가를 했을까?[39] 근대 서양의 충격이 있은 뒤 중국이 유럽보다 뒤떨어지게 된 원인이 언제였냐는 질문에서 나왔다. 기존의 입장은 명나라 시기에 서양에 역전되었다는 관점이 우세했으나 최근 이것을 부정하는 연구가 속속 등장하면서 기존 관점이 흔들리고 있다.[40] 반대로 청나라는 명나라마냥 답이 없는 암군들이 많은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자체의 한계 탓에 명나라보다도 외세에 더욱 밀려 중국에 도움이 안 됐다는 부정적 재평가가 많아지고 있다. 다만 이 또한 한족우월주의 관점에서 지나치게 이민족 왕조인 청을 깎아내린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서양과의 자연과학/기술적 격차가 벌어지는 건 이미 청 건국 이전인 명나라부터 확인된다. 그러나 이 점을 감안해도 청나라 말기의 상황이 명나라 말기보다도 더욱 답이 없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결정적으로 쇄국 정책과 건륭제 시기에 있었던 지나친 문자의 옥으로 인한 폐해가 결과적으로 중국을 엄청나게 퇴보시켰기 때문에, 서구 열강의 청나라 침입과 관련하여 청나라를 무조건 옹호하고 동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과연 청나라 말기가 명나라 말기보다 더 심각하고 답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청나라가 추태를 보여주며 망한 건 사실이다만(애초에 망할 땐 어느 나라든 추하지만) 명나라 역시 만주족이 중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철벽처럼 만주족을 막아내던 자국의 명장 원숭환을 알아서 처형했고 그렇다고 또 다른 별다른 의미있는 개혁을 보여준 것도 아니며 결국 농민반란에 의해 알아서 멸망했고 만주족은 반쯤은 주워먹는 수준으로 중원의 새 주인이 되어 한족들을 핍박하고 학살한다. 이 허무하기 짝이 없는 멸망이 과연 청나라보다 우월하고 멋있는 멸망인가? 차라리 명나라와 청나라의 멸망이 각각 다른 면에서 허무하기 짝이 없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41] 물론 영락제 시절에는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토목의 변을 시작으로 점점 국력이 약해지더니 1550년의 경술의 변에서 몽골군에게 싸우지도 못한채 국토가 유린당했고 척계광원앙진 전법을 고안하기전까지는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가 유린당하는 굴욕을 겪은 적도 있다. 심지어 말기에는 국력에서 매우 열세인 청나라에게 수차례 참패하고 국토까지 유린당했고 나중에는 반란군조차 진압하지 못해 나라가 반란군에게 망하고 만다.[42] 주원장 다음을 기준으로
1세손 3황제 주체(棣) 木 변 항렬
2세손 2황제 주윤문(允炆), 4황제 주고치(高熾) 高 항렬에 火 변 항렬, 주윤문은 당시 황세손이라 맏 윤을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3세손 5황제 주첨기(瞻基) 瞻 항렬에 土 변 항렬
4세손 6황제 주기진(祁鎭), 7황제 주기옥(祁鈺) 祁 항렬에 金 변 항렬
5세손 8황제 주견심(見深) 見 항렬에 水에 해당하는 삼수 변 항렬
6세손 9황제 주우탱(祐樘) 祐 항렬에 목
7세손 10황제 주후조(厚照), 11황제 주후총(厚熜)
8세손 12황제 주재후(載垕) 載 항렬에 土 변 항렬
9세손 13황제 주익균(翊鈞) 18황제 주율건(聿鍵) 翊 항렬에 金 변 항렬, 주율건은 방계로 聿 자를 썼지만 金 항렬이 들어간다.
10세손 14황제 주상락(常洛) 常 항렬에 水 항렬
11세손 15황제 주유교(由校) 16황제 주유검(由檢) 17황제 주유숭(由崧) 19황제 주유랑(由榔) 由 항렬에 木 변 항렬이다.
12세손 주유검의 아들인 주자랑(慈烺) 慈 항렬에 火 변 항렬.
황실이라 그런지, 상당히 엄하게 항렬자를 채용한 황조다.
[43] 청나라가 명나라보다 국력에서 강했다고는 하지만, 청나라 시기 중국의 지배자는 엄연히 만주족이었고 한족은 2등 국민 신세였다. 심지어 만주족 팔기군의 일개 병사가 한 도시를 다스리는 시장을 일방적으로 구타한 사건도 있었는데 그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던 사례도 있었다. 왜냐하면 만주족 병사한테 얻어맞은 시장은 피지배민족인 한족이었기 때문이었다.[44] 주로 이민족인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를 몰아내는 명나라의 시조 주원장이나, 원나라의 잔존 세력인 타타르오이라트를 쳐부수러 북쪽으로 원정을 떠나는 명나라의 3번째인 영락제가 무협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슈퍼 스타들이다.[45] 이민족인 만주족에 맞서 한족의 나라를 지키려는 충의지사들이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7 22:14:17에 나무위키 명나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