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 아리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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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사례
3.2. 기타 민족
3.3. 한정된 예시
3.3.1. 유대인
4. 흑인의 경우
5. 남아공의 명예 백인 제도
5.1. 일본인
5.2. 중국인
5.3. 한국인
5.4. 대만인
5.5. 그 이외의 경우
6. 인터넷에서 떠도는 일본 관련 루머
6.1. 인종 개량론에 대한 와전과 거짓 혼혈 정책 루머
6.2. 메이지 덴노의 사진을 조작했다는 루머
6.3. Takao Ozawa의 미국 시민권 취득 소송에 대한 오해
6.4. 그 외의 사례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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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아리아인(독일어: Ehrenarier, 영어: Honorary Aryan)이란 나치의 인종조사국이 생물학적으로 아리아인의 일원이 아니지만, 독일 경제에 이바지하거나, 나치 사상에 빠져 동조, 협조한 이민족에게 준 호칭이다.

명예 아리안(Aryan)의 지위가 왜 나치에 의해 북유럽 계통이 아닌 다른 비북방계, 아니 그보다 덜 비포함적으로 인도-이란/유럽계 사람들에게 부여되었는지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으로는 그러한 국민들의 봉사가 독일 경제나 전쟁 노력에 이익이 되는 귀중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 배경[편집]


처음에는 나치가 우생학을 통해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과정에서, 히틀러를 포함한 상당수 당원들의 인종적 특징이 이상적인 아리아인의 특징과 상충되는 치명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일종의 우회등록 기법이었다.[1] 제도 도입 초기에는 아돌프 히틀러와 그 측근들을 아리아인으로 포장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한다.[2] 괜히 나치의 사상보급에 이바지한 사람이란 널널한 조건이 추가로 붙은 것이 아니다. 이후 경제활동에 이바지한 경우라거나 전쟁에 참가한 경우가 추가 되며 나치에 협조하거나 돈을 내거나,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에게도 뿌려지게 된다.


3. 사례[편집]



3.1. 일본인[편집]



1941년 나치 독일을 방문한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일본 외무대신

히틀러 청소년단(유겐트)의 일본 방문 중 나치 깃발을 들고 있는 일본제국 소녀들

일본인은 게르만인과 생물학적으로 별개의 종이나, 아리아인과의 동맹이 될 자격을 갖추었다.


카를 하우스호퍼는 아시아에서 체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을 형제의 나라로 봤다.

1936년, 나치 독일은 소련코민테른에 대항하기 위해 방공 협정을 일본 제국과 체결하는데, 이 조약을 현장에서 주도한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히틀러는 일본인을 명예 아리아인으로 취급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 조약에 따라 독일 정부와 우생학자들은 일본인을 명예 아리아인으로 취급했다.

히틀러는 "아리아인의 문화가 없다면 일본이나 중국은 다시 근대화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며 일본인보다 아리아인이 위대하다는 걸 확실히 해두기는 했지만,[3] 일본과 추축 동맹을 맺은 후엔 독일에 사는 일본인들을 명예 아리아인이라 선포하고, 심지어 여러 번 아시아와 접촉하고 나서는 아시아인의 고대 문명이 우리의 것보다 우수하다고 믿는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을 명예 아리아인 취급한 것은 어디까지나 방공 협정의 수월한 집행을 위한 보너스였다. 모든 독일인들이 일본인을 환영한 것은 아니라, '날생선을 먹으며 이해할 수 없는 문화를 지닌 야만인'으로 취급한 독일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심지어 나치당원이 길을 가던 일본 외교관의 뺨을 친 적도 있었다.[4]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의 엄청난 성공에 크게 열정적이지 않았고, 그는 영국이 그 일본 황인종을 격퇴시키는 것을 돕기 위해서, 영국에게 20개 사단을 기꺼이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발언했다.

출처- Milan Hauner, Did Hitler Want a World Dominion? 중

이후 일본제국이 동남아시아를 침공하면서 영국령을 점령할 때, 히틀러가 '그 노란 원숭이들의 만행에 분노하며 백인 형제인 영국에게 지원군을 파병해줄 수도 있다'라는 제의가 있었다는 일화를 보면 히틀러도 나치도 근본적으로 일본인들을 인종적으로 멸시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호주에 대해서는 "범죄자 후손들에 대해서는 알 거 없고 그냥 일본에게 줘버리자"라는 반응이었다.

한편 이와 별개로 서양에서는 북이스라엘이 망하고 유대인 12지파 중 잃어버린 10지파가 이곳 저곳으로 이동하다가 일본에 정착해 일본인의 기원이 되었다는 일유동조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서양의 반유대주의를 생각하면 의아해 할수도 있으나 영국인이 10지파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브리티시 이스라엘리즘(British Islaelism)"이 영국에서 민족주의 고취, 우월감의 수단으로 이용된 사례 처럼 오늘날에는 서양의 극성 와패니즈들이 일본인을 "백인의 후예"로 추켜세우는데 사용되고 있다.

3.2. 기타 민족[편집]


히틀러는 일본과 적대국인 중국인도 명예 아리아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화민국의 관료 쿵샹시는 독일을 방문했을 때, 히틀러의 대접을 받기도 했다. 이는 삼국동맹이 체결되기 전까지 나치 독일중화민국은 서로 협력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태도는 일본인과 달리 어디까지나 외교적인 수사 정도였고,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나치는 독일 내 일본인과 중국인을 구별했고, 화교를 탄압했다.

원래 핀란드인은 북방 노르딕민족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나[5] 겨울전쟁으로 소련과 적대하게 되면서 북방민족 취급을 받게 되었다.#

슬라브족은 나치의 절멸 대상[6] 중 하나였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의 경우 주류민족이 슬라브족이지만 극우 단체 우스타샤의 지도자인 파시스트 얀테 파빌리치가 유고슬라비아인들을 75만이나 학살하는 등 나치 독일에 점령된 국가 중 제일 적극적으로 협력하자 고트족의 후예라면서 명예 아리아인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독일 영내에 분포하는 소수민족소르브인카슈브인 역시 슬라브계 민족이지만 원래 아리아인이지만 모종의 사정으로 슬라브어를 쓰게 된 것으로 보고 명예 아리아인으로 대우했다. 그래서 소르브어카슈브어의 사용과 교육, 출판을 금지하는 등 독일인으로 강제 동화를 시도했다.

원래 나치 이론에 따르면 아랍인 또한 유대인 친척인[7] 열등한 민족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영국 등에 맞서 아군을 모으기 위해 기존의 발언을 철회했다. 대표적으로 아민 알 후세이니가 명예 아리아인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아랍인들은 여전히 반원숭이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출처]

3.3. 한정된 예시[편집]



3.3.1. 유대인[편집]


막스 플랑크가 "똑똑하고 실력 있는 유대인들은 차별하지 말고 명예 아리아인처럼 대접해달라"고 히틀러를 설득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우리를 언제 배신할지도 모르는게 유대인일세"라며 무시당했다는 일화가 있으나, 유대인들조차도 명예 아리아인 취급을 받은 사례가 있다.

헤르만 괴링이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라고 한 적도 있고 무엇보다도 히틀러 본인도 어렸을 때 어머니를 치료해줬던 유대인 의사 에두아르트 블로흐(Eduard Bloch,1872~1945.1)[8]와 1차세계대전때 본인이 속한 연대의 지휘관이었던 에른스트 헤스(Ernst Moritz Hess/1890~1983)를 특별히 봐준 적도 있다. 거기에 에밀 마우리스(Emil Maurice,1897~1972) 또한 유대인 혈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뮌헨 폭동에도 참가하는 등 나치 당원 초기부터 같이 지내던 친맥으로 하인리히 힘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직접 명예 아리아인 칭호를 주면서 슈츠슈타펠 장교로 올려줬다. 마우리스는 2차대전이 끝나고 4년 징역형 및 벌금형을 받긴 해도 복역하고 나와 시계 가게를 차려 조용히 살다가 천수를 누렸다. 스테파니 줄리엔 리히터는 유대인이었지만 오스트리아 귀족인 홀렌호헤 고문과 결혼하고 나치 독일의 첩자로 협력해 1935년에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명예 아리아인이 되었고, 1972년까지 천수를 누렸다. 작곡가 프란츠 레하르의 아내 소피 레하르는 결혼과 동시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까지 유대인이었다. 히틀러는 레하르의 음악을 즐겼고 나치는 그것을 선전용으로 사용했다. 요제프 괴벨스가 레하르를 대신해서 개입한 후, 부인은 레하르는 1938년에 결혼으로 "명예 아리안"의 지위를 얻었다. 이것은 확실히 그녀의 생명을 구했고, 전쟁 동안, 그녀를 추방하려는 시도가 적어도 한번 이루어졌지만 그녀의 지위 때문에 중지되있다.


4. 흑인의 경우[편집]


당시 거의 모든 서양인들이 흑인은 인간이 아닌 짐승, 노예라는 인식을 당연시 하고 있었다. 윈스턴 처칠 또한 대부분의 영국인들답게 흑인들은 인간 이하로 봤다. 그리고 당시 미국은 쿠 클럭스 클랜이 합법적 단체였다.

나치 독일도 크게 다를 바는 없었지만, 서방 세계와 자신들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흑인들을 더 존중해 주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육상 4관왕을 한 미국 흑인 제시 오언스에게 히틀러는 축하를 건넸고,[9] 경기장에 모인 독일인들은 기립박수를 치며 열렬히 축하해줬다. 심지어 제시 오언스는 히틀러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반박까지 했는데, 히틀러는 시상식 전에 일이 있어, 떠나야 했기 때문에 떠난 것 뿐이지 자신을 무시한 적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떠날 때 근처에 지나가던 자신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까지 해줬고, 그런 히틀러를 비난하는 건 악취미라고 했다.[10][11] 후에 제시 오언스는 다시 한 번 히틀러는 나를 무시한 적이 없고, 오히려 나를 무시한 건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였다고 말했다.[12]

그래도 나치는 명예 아리아인에 흑인을 포함시켜줄 마음까지는 없었다. 나치가 주장하던 아리아인 개념과는 거리가 먼 동북아시아인에게 명예 아리아인 칭호가 부여된 이후부터는 허들이 낮아졌고, 심지어 나치가 운용하는 강제수용소에 끌려온 사람들에게도 노역의 대가로 칭호를 주기도 했지만, 흑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심하게 차별받던 영국 흑인들의 배신을 유도하고 내부협조를 얻기 위해 칭호를 뿌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음에도 나치 상부는 흑인은 명예 아리아인도 되면 안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5. 남아공의 명예 백인 제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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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백인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에서 비백인으로 취급되었던 사람들에게 거의 모든 권리와 특권을 부여하는 데 쓰여진 용어이다. 나치의 명예 아리아인의 남아공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개인 뿐만 아니라 단체 사람들을 선발하기 위한 사례 별로 지정되어 졌으며, 특히 명예 백인으로 여겨지는 동아시아인들에게 특히 그랬다. 일본인, 대만인들은 이 명예 백인의 지위를 부여 받았고, 후에 다른 중국인과 다른 다양한 인종에서 개별적으로 지명된 인물들도 추가되었다.

5.1. 일본인[편집]


이 지명은 1960년대에 모든 일본인(나치 독일에 의해 아리아인들은 나치 독일에 의해 명예라고 여겨졌다. 이 지정은 1960년대 초 도쿄의 야와타 철강이 2억 5천만 달러 이상의 남아프리카산 선철 5백만 톤을 10년 동안 구입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남아프리카와 일본 사이에 맺어진 무역 협정에 도움이 되었다.[출처] 이 같은 대규모 협상과 함께 헨드릭 버워드 총리는 일본 무역 대표단이 정기적으로 남아프리카를 방문해 사업을 벌이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에게 다른 민족과 같이 제한을 가하게 되는 무역 협정은 현명하지 못하고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후, 프리토리아의 지방 자치 위원회는 모든 일본인들이 백인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요하네스버그시의 관계자들은 심지어 "무역협정을 볼 때" 시립 수영장이 모든 일본인 손님들에게 개방될 것이라고 결정했다.[출처]

일본은 당시 남아공의 대표 교역국이었고 특히 인종 차별로 유럽 국가들이 국교를 단절하자 남아공의 대외 무역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13] 그런 판국이니 일본 상사원이 남아공을 방문할 때 인종으로 문제가 되면 남아공이 손해이기 때문에 컬러드였지만 아파르트헤이트 후반이 되면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제외한 거의 모든 권리를 보장받게 된다. 그렇지만 당시 컬러드들도 위낙에 당한게 많았던 데다가 컬러드 의회의 권한도 그리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컬러드들도 투표에 불참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이나 호주와 달리 일본인 들이 남아공에 완전히 정착하는 경우는 드물어서 현재도 남아공 내 일본인 사회는 주재원들을 제외한다면 없는 것 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지정은 일본인들에게 백인과 거의 같은 권리와 특권을 주었다. 1970년대 초까지 야당 정치인들과 언론들은 왜 일본이 인종차별정책과의 모순을 이유로 특권을 부여 받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출처]


5.2. 중국인[편집]


일본인들에게 부여된 새로운 지명은 남아프리카의 작은 중국 공동체(당시 약 7,000명)에게 매우 불공평하게 보였지만, 그들은 일본인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할 것 같았다. 타임지는 케이프타운의 한 주요 중국 사업가가 "만약에, 우리는 일본인 친구들보다 더 얼굴이 하얗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또 다른 이는 "백인이 된 일본인들이 부도덕한 법을 위반하지 않고는 우리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뜻인가?"라고 분개했다. 다른 동아시아인들을 명예 백인으로 포함시키는 것은 중국인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중국인에 대한 인종차별 정책은 각 부서와 지방마다 다양했다. 현지인들은 이 아시아인들을 서로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84년, 중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가 백색 지역으로 선포한 지역에 중국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안에 있는 시설을 사용하도록 단체 지역법이 개정되었다. 중국계 남아프리카인들은 백색 지역으로 이주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허가를 신청해야 했다. 월스트리트 저널 기사 그 신청을 받아들이려면 교외의 모든 이웃들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했다. 홍콩인들은 같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영어가 능통하며 교류가 많아서 명예 백인 대우를 했다. 일본과 함께 남아공의 대외 무역에서는 홍콩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기도 했다.

1970년대에 남아공에서 중국 음식점이 유행하자 중국인이 운영하는 중국집이 급증했는데 유색 인종이 운영하는 곳이라 백인 출입이 불가능해 백인들이 항의를 하자 중국집에 한해 '백인 이용 가능'으로 지정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기존의 중국인들이 중국집에서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결국 중국집에 한해 중국인도 백인이 이용 가능한 식당에 출입 가능으로 만들었다.


5.3. 한국인[편집]


일본과 달리 한국은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남아공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꺼렸다. 남아공은 1961년 두 나라가 외교관계를 협상할 때 한국 국민들에게 명예 백인의 지위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은 1978년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항의로 남아프리카와의 관계를 단절했고, 1992년까지 양국간의 완전한 외교 관계는 다시 수립되지 않았다. 한국인은 백인 대우를 국가적으로 받은 게 아니라 그냥 일개 몇몇만 운좋게 일본인이나 홍콩인인 줄 착각해서 받았다고 한다.[14] 공식적으로는 당시 한국도 다른 나라들처럼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표시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92년까지 단교국가, 여행 제한 국가였다. 이게 꽤나 중요한게, 남아프리카 공화국 성립 전인 남아프리카 연방은 엄연히 6.25 전쟁 때 한국에 전투 병력을 파병한 16개 군사 지원국들 중 한 곳이다. 대한민국은 이에 보답하는 뜻에서 휴전 후 세계 각국과 외교 관계를 맺을 때 가장 먼저 이 군사 지원국들과 수교를 맺었고 그게 현재까지 단교없이 지속되어 왔다. 그런데 남아공 만큼은 예외로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날 때까지 유일한 단교국으로 남은 것이다. 이 당시에 수교협상이 있었고, 남아공측에서 한국인들을 명예백인으로 대우해주겠다고 나섰지만, 외교관들이 이 명예백인 시설 개방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해서 수교는 없던 일이 되었다. 또한 한국측에서 체제경쟁과 UN가입등의 사안에 대해서 타 아프리카 국가와의 관계를 맺는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일부로 수교를 안 한 것도 있었다.

그래도 경제, 문화 교류는 있었다. 또한 남아공은 아프리카에서 경제규모가 가장 컸던 나라였기 때문에 아파르트헤이트 당시에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의 무역 상대국의 하나였다. 대한민국 기업이 남아공에 지사도 내고 교민도 건너가서 살기까지 했다. 다만 공산 국가는 아니었지만 1956년부터 사전 허가가 없는 경우 여행제한국가로 지정되었고[15] 한국인은 방문하면 인종 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불편함에 따른 우려로 방문을 꺼렸다. 당시에는 방문하려고 해도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고 제3국에서 비자를 발급받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래도 한국인은 대만인과 같이 반공정신이 투철한 터라 어느 정도 좋은 대접을 받았다고 현지서 아파르트헤이트를 겪은 교민 1세대들이 증언한다.


5.4. 대만인[편집]


대만이 포함된 것은 남아프리카와 대만의 중요한 관계 때문이었다. 1979년까지 대만이 남아프리카의 5대 교역국이 되었다. 중국 공산당이 본토를 장악한 뒤에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중국 민족주의자들을 계속 지지하자 두 나라 관계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면서 비슷한 처지에 동변상련하여 매우 가까워 졌다. 단순히 관계가 좋은 수준이 아니라 대만인은 아예 공식적으로 백인으로 인정받았다. 외교적 고립이 심했던 대만은 아파르트헤이트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남아공과 수교를 했고, 남아공은 이런 대만을 배려해서 대만인을 공식 백인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 대륙 출신의 본토 중국인은 컬러드로 인정해서 차별 대상이었다고 한다. 사실 화교유입은 19세기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청나라 멸망-중화민국 수립-중국 공산화를 거치면서 여러번 국체가 바뀌었는데 남아공은 물론이고 정착한 화교들의 반공정신이 투철한 터라 유색인종 중 가장 대접을 받았다.

거기다 남아공에 진출한 대만 사업가들은 상대적으로 값싼 흑인 노동력을 제공받았다.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자 대만정부는 비상이 걸렸다. 아파르트헤이트 폐지와 함께 중국, 일본, 한국 등 다른 아시아 기업들이 남아공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새로 정권을 잡은 흑인들은 과거에 아파르트헤이트를 인정한데다 자신들에게 갑질을 일삼았던 대만인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 수교국 하나라도 아쉬웠던 대만은 경제 지원 등의 조건을 걸며 단교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반대로 이제 고립에서 벗어나 하나도 아쉬울 게 없었던 남아공은 1998년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한다.[16] 그래도 이런 역사가 있어 현재 남아공 토착 화교들은 상당수가 대만 출신이라는 정체성이 있다.


5.5. 그 이외의 경우[편집]


  • 남아공은 팔라비 왕조 시절의 이란과 사이가 우호적이었다. 이때 팔라비 왕조는 남아공에 석유를 수출하는 등 경제, 문화적으로 교류가 많았다. 황제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남아공을 방문했을 때는 남아공 정부에서 그를 백인으로 우대해주었다. 하지만 이란 혁명이 일어나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 들어선 시아파 신정 정부가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난하면서 단교했다. 다만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남아공이 이란을 간혈전으로 지원했다.

  • 일부 다른 유색인종들도 명예 백인이라며 우대했다. 미국에서 성공한 흑인 농구 선수뉴질랜드마오리족 럭비 선수를 명예 백인이라고 부르며 우대하기도 했다. 당연히 미국 흑인 선수들은 대부분 응하지 않았고 미국에서 벌어지는 반아파르트헤이트 시위에 동참하거나 지지했다.[17] 다만 뉴질랜드 마오리족 럭비 선수들은 입국했는데 남아공 백인들의 인기 스포츠인 럭비 경기에 뉴질랜드 대표팀을 초청했는데 거기 포함된 마오리족 선수들을 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명예 백인'들도 같은 유색인종을 차별할 때가 있었다고, 하지만 반대로 명예 백인으로 대접한다고 해 놓고선 남아공 당국에서 뒤통수 치는 사례도 많았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헨드릭 페르부르트의 암살범 디미트리 차펜다스가 그런 경우인데 그리스계 흑백혼혈이었지만 그는 서류상 '백인'으로 되어 있었고[18] 당연히 백인들만 쓸 수 있는 공공 시설도 문제없이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외모 때문에 진짜 백인계들은 그를 사적으로 차별했고 결국 페르부르트를 죽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6. 인터넷에서 떠도는 일본 관련 루머 [편집]


나치 독일의 명예 아리아인 제도, 아파르트 헤이트 시기 남아공의 명예 백인 제도,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가 시사신보에 게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탈아론에 대한 오해와 반감이 합쳐져 탄생한 일본 관련 루머가 꽤 많다. 개중에는 괴담 수준의 이야기도 있다.


6.1. 인종 개량론에 대한 와전과 거짓 혼혈 정책 루머[편집]


일본은 혼혈 정책을 시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일본 제국 시절 그들의 사상적 헤게모니는 일본 민족(야마토 민족)이 가장 우수하므로, 열등한 외국인과 혼혈을 배척하고, 순혈 일본 민족(야마토 민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19][20]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미치지 않고서야 그 어떤 국가의 정부가 본토의 자국민을 대상으로 대규모의 혼혈 정책을 시행하겠는가? 애초에 실현 가능한 방법도 없지만, 그 당시 근대 국가의 강한 원동력이었던 '우리 민족이 가장 위대하다'라는 명분을 버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또한 당시 일본은 국수주의자들이 매우 극성이었기 때문에, 만에 하나 저런 정책을 시행하려 했다면 정부가 전복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영어의 공용어화를 주장한 적이 있던 일본의 초대 문부대신 모리 아리노리는 국수주의자의 칼에 찔려 죽었다.

메이지 유신은 조선으로 치면 개화파의 반대 세력인 위정척사파에 해당되는 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것이다. 메이지 유신의 가장 강력한 명분은 '천황의 일본'을 오랑캐(서양 세력)로부터 지켜내기 위함이었다.[21] 이 '천황의 일본'이라는 것은 일본의 전통, 정신, 고유한 것 등을 내포한 개념이었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서양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실제로 메이지 유신부터 시작한 일본 제국의 근대 사상의 헤게모니아시아주의로 시작하여 대동아공영권으로 종결되는 일본식 중화사상에 가까웠다.(중국은 세계의 중심 -> 일본은 신의 나라, 중국 중심의 책봉과 조공 관계 -> 일본 중심의 대동아공영권) 단, 대동아 공영권은 무력에 의한 팽창주의였고, 책봉과 조공은 중국의 권위를 인정하고 주변국의 독립과 안정을 보장하기 위하여 타협과 동의로 이루어진 사전에 갈등을 방지하는 시스템이었다.

특히 다카하시 요시오(1861.10.2 ~ 1937.12.12)[22]라는 작가가 주장한 '일본 인종 개량론'이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 퍼져서, '일본 정부가 혼혈 정책을 시행했다' 혹은 '하려고 했다' 라는 식으로 왜곡, 와전되었다. 사실 다카하시 요시오는 저런 괴상한 극렬 주장으로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다. 사업가이자 다인(茶人)으로서 차(茶)에 관련된 책을 내는 문인이였고, 대표작들도 전부 차(茶)에 관련된 저서들이다.

문제는 이 사람이 20대 초반에 냈던 데뷔작이 일본 인종 개량론이었다. 그런데 데뷔작 이후 인종 개량론과 관련된 저서가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을 보면, 데뷔할 때 시선을 끌기 위해 일부러 괴상한 내용의 책을 냈던 걸 수도 있다. 평생 출판했던 저서들을 살펴보면, 일본 인종 개량론 하나 빼고, 전부 차(茶)와 관련된 저서뿐이다. 애초에 인종 개량이 본인의 관심 분야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등단하면서 시선을 끌기 위해 저런 극렬 주장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충분히 가능하다. 요즘으로 치면 다른 분야로 출세한 사람이 20대 초반 청년 시절 디시에 한번 뻘글 올린 게 쓸데없이 주목받은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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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인종 개량론에 대해 설명할 때 한국 인터넷에서 흔히 사용되는 이미지들이다.
모두 다카하시 요시오의 주장에 대한 것들이다.[23]

다카하시 요시오의 일본 인종 개량론을 요약하면, 일본인은 열등하니 서양 여자들을 수입하여 혼혈을 낳게 하고 육식의 비중을 늘려 고기를 많이 먹어서 인종 개량을 하자" 이다. 구체적으로는 일본 남자들을 해외로 보내 서양 여자들과 결혼 시켜 일본으로 데리고 와서 아이를 낳게 한다는 것인데, 그때 당시에도 괴상한 헛소리로 들리는 건 마찬가지여서 조롱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정작 다카하시 요시오 본인은 토종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

당시의 인종 개량에 대해서 외국인과의 혼혈만을 주장하는 것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건 인종 개량 중에서도 매우 극단적인 생각이었고, 당시에 인종 개량이라 하면 보통 의식주 같은 환경의 개량을 통한 인종 개량을 뜻했다.

다카하시 요시오의 주장을 비슷한 시기 다른 일본인 유명 인사가 한 것처럼 왜곡한 경우도 있다. 한국 인터넷에는 모리 아리노리와 후쿠자와 유키치가 서양인과의 혼혈을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퍼져있는데, 거짓이다. 아마 모리 아리노리가 일본어 대신 영어를 공용어화 하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했고[24], 후쿠자와 유키치가 탈아론으로 유명한데다, 다카하시 요시오를 가르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와전되어 퍼진 루머인듯 하다.[25]

다카하시 요시오의 일본 인종 개량론은 그 당시 일본 내에서 매우 극단적인 생각 취급받았다. 한국 인터넷에는 마치 일본이 국가적으로 주도해 혼혈 정책을 펼쳤다는 루머가 퍼져있는데 잘못된 사실이다. 오히려 제국주의&군국주의 시절 일본은 귀축영미보다 일본 민족이 훨씬 우월하니 더러운 혼혈을 배척하고, 순혈 일본 민족을 지켜야 한다는 사상이 매우 강했다.[26]


6.2. 메이지 덴노의 사진을 조작했다는 루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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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터넷에서는 메이지 덴노의 사진을 일본 측에서 고의로 위엄 있어 보이게 보정 내지는 조작하였다는 루머를 종종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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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이런 방식으로 메이지 덴노의 사진이 조작되었다며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단 이미지의 맨 왼쪽의 인물은 메이지 덴노가 아니다.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伏見宮貞愛) 친왕이다. 사진 중앙의 인물을 화질이 안 좋은 상태의 이미지에서 발췌한 것. 화질만 다르지 둘 다 같은 사진이다.

중간 부분의 인물은 메이지 덴노를 촬영한 사진이 맞다. 1873년에 촬영한 사진에서 얼굴 부분을 확대하여 발췌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작되었다고 흔히 알려진 세번째(맨 오른쪽)의 사진은 메이지 덴노가 맞지만, 애초에 사진이 아니라 초상화이다. 정확히는 초상화를 사진으로 촬영한 것. 그러니 맨 오른쪽의 사진을 보고 메이지 덴노의 사진 조작이라 하는 건 틀린 말이다. 물론 초상화를 의도적으로 상당히 미화하여 그렸다고 할 수는 있겠다. 게다가 중간의 사진과 맨 오른쪽의 초상화는 20년 가까이 되는 시기 차이가 있다. 거기다 아래의 초상화 원본과 비교하면 알 수 있듯이 위의 오른쪽 초상화의 모습은 원본을 포토샵으로 보정한 것이다.

원래 사진에 서양인 필터(?)를 껴서 서양인처럼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마 지폐 시절의 백원권 이야기가 와전된 듯. 이 시절 백원 지폐에는 세종대왕이 그려져 있었는데 디자인과 제작을 영국에서 했기 때문에 초상화가 서구형으로 생긴 데다 실제 새종대왕과 다르게 날렵하게 생겼다.

그러나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는 해당 초상화가 그냥 사진인 것처럼 소개되면서 돌아다니고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오해를 낳았다.

초상화를 사진 촬영한 이유는 장년기(30 ~ 40대)의 어진영을 갱신해야 하는데, 스무살 쯤 사진(어진영)을 촬영한 이후 일본 정부에서 다시 사진 촬영을 요청하자, 메이지 덴노 본인이 절대 사진을 안 찍는다며 단호히 거부하는 바람에 못 찍고 대신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메이지 덴노는 사진 촬영을 극도로 혐오했다.[27][28] 그렇기에 남아 있는 사진이 별로 없다.[29][30]

해당 초상화는 이탈리아 출신의 지폐・우표 인쇄 회사 직원이자 화가 에도아르도 키오소네(Edoardo Chiossone)[31]가 그린 초상화이다. 이 키오소네의 그림을 다시 사진가 마루키 료우(丸木 利陽)가 사진 촬영한 것이다. 이게 공식적인 기록이고 일본 정부가 일부러 초상화를 채택했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에도아르도 키오소네는 유럽이 국가 원수의 초상을 지폐와 우표에 많이 넣기 때문에, 메이지 덴노의 초상 도안을 제시하며 지폐, 우표에 넣을 것을 제안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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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oardo Chiossone가 그린 초상화이다. 이 초상화를 사진 촬영한 것이다.

반면에 이후 다이쇼 덴노, 쇼와 덴노부터는 이런 조작 논란과 루머가 전혀 없는데, 이 둘은 사진 찍는 걸 싫어하지 않아서 촬영한 사진(어진영)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32]

유튜브나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 옛날 일본인들의 같은 인물임에도 다르게 찍힌 사진들을 근거로 사진, 외모를 조작했다는 영상이나 글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 당시에도 사진 찍는 걸 직업으로 하는 사진 기사가 있었고, 기사마다 촬영 실력과 기법이 달랐으며 사진기의 성능도 지금보다 훨씬 떨어졌기에, 사진 기사에 따라 같은 인물이라도 사진이 천차만별로 나왔다. 현대에 찍은 사진도 조명과 각도, 렌즈 등에 따라 왜곡이 있다.### 거기다 19세기의 사진 기술이 현재보다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사람에 따라서는 사진이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보통 남아있는 사진 중 여성의 경우 게이샤인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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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Takao Ozawa의 미국 시민권 취득 소송에 대한 오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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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일본계 Takao Ozawa의 미국시민권 취득 소송에 관한 당시 기사

파일:1579231999.jpg

위의 이미지들이 인터넷에서 '일본인은 자기가 백인이라고 주장한다'는 증거로 돌아다닌다. 심지어 하나는 옛날 영문 위키피디아의 개요 부분을 캡쳐한 것이다. 최신 영문 위키피디아에 서술된 것과 비교해보면 저 이미지의 내용은 악의적이고 오해를 하게끔 서술돼있다.

사실은 그 당시 재판기록을 보면 단순히 정신나간 일본인이 '나는 백인이다' 라고 주장한 사건이 아니다. 당시 재판기록을 보면 당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수 있는 건 "자유 백인(free white persons)" 과 "아프리카계(african)"뿐이었기 때문에 Takao Ozawa는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했으며, 그래서 "free white persons" 이라는 용어의 모호함을 들어 소송을 걸었다.

그 모호함의 근거란 "white"라는 기준을 정할 때 "코카시안(caucasian)인종"만을 뜻하는게 아니었다는 것이었고[33] 자유인(free)이고 white에 속할수 있는 나(person)는 기준에 부합하므로 시민권을 취득할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법원은 white는 코카시안 인종만을 뜻한다면서 거부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계 시크교도인 Bhagat Singh Thind라는 사람이 자기는 과학적으로 코카시안이 맞으므로 시민권을 취득할수 있다고 소송을 걸었다.

그러나 법원은 과학적으로 인도계는 코카시안 인종, 즉 백인이 맞지만, 일반적인 인식(common sense)은 그렇지 않다면서 거부했다. 어떻게 보면 그 당시 차별받던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처절한 발악이라고도 볼수있다. Takao Ozawa나 Bhagat Singh Thind가 '인종차별' 그 자체에 대한 항의를 하지 않은 것을 두고 조롱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192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야 한다. 그 당시는 전세계가 인종 분리를 당연하게 생각하던 시대였다.


6.4. 그 외의 사례[편집]


최근에는 현대에 미국 등 서구 사회에 이주한 아시아계 이민자들을 두고 "모델 마이너리티"(Model Minority)라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직역하면 '모범적인 소수인(민족)'이란 뜻인데, 기존의 사회와 크게 충돌하지 않고 적응하여 잘사는 집단이란 의미이다. 지금은 이런 표현 자체도 인종차별적인 표현이라고 비꼬거나, 학술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의도 외에는 잘 안쓰인다. 저 표현은 주류 인종인 백인 집단과 충돌이 잦은 흑인이나 히스패닉과 같은 다른 인종 집단을 '아시아계 애들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지도 않고 잘먹고 잘사는데 너희는 왜 그러지 못하니?'라는 식으로 비난하기 위해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존경성 정치 문서에서 이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사실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수가 서구권에 많지 않기 때문에 존재감이 클 수가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숫자가 적다는 건 그만큼 목소리도 작다는 의미다.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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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히틀러의 아버지가 유대인 부호의 사생아라는 설도 있다. 이게 맞다면 히틀러는 나치독일 기준으론 유대인이다. 실제 히틀러의 가계도는 뭔가 불확실한 부분이 많은데, 나치당 집권 이후 관련 행정문서를 모두 폐기했다는 의혹도 있다.[2] 실제로 극초기 나치당은 바이에른을 거점으로 한 지역 정당이었기 때문에 상당수 당원들은 갈색머리에 그을린 피부를 지닌 전형적인 남부인들이었다. 당시 우생학 기준으로는 알프스인종이라 불렸다.[3] 정권을 잡기 전에 쓴 책이긴 하지만, 나의 투쟁이라는 저서에서 일본인을 미개하지만 독일의 하인으로 쓰기는 좋은 민족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폄하한다. 물론 이 책에서는 게르만 민족을 제외한 나머지 민족을 깎아내린다.[4] 나치독일의 일본 프로파간다(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양도서 1, 1권/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양도서, 이경분)[5]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아시아인 외형의 사모예드족에 가까운 순록 유목민 또는 수렵채집민들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같은 유목민 출신이 세운 터키, 헝가리와 함께 몽골 취급 당하고 있다.[6] 그러나 당시 슬라브족이 기본적 절멸대상이었는지는 근거가 필요하다.[7] 종교 계보상으로는 유대인과 아랍인의 공동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사악과 이스마엘에게서 갈라져나왔고 이사악의 아들인 야곱의 후손들이 12지파를 형성하였고 이 12지파에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으로 갈라졌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종교적으로는 매우 가까운 편에 속하는 사이다. 혈통적으로도 둘 다 셈족에 속한다.[출처] A B C D : 요하네스버그의 박윤정 박사가 2008년 봄에 발표한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중국인들[8] 가난한 집안이 불쌍해서 치료비를 상당부분 면제해줬다고 하며, 히틀러는 "모든 유대인이 블로흐 같았으면 유대인 문제란 게 있을 수가 없지." 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9] 심지어 당시 경기장에 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신문 편집자 Robert Lee Vann은 히틀러가 제시 오언스에게 경례까지 해주는 걸 봤다고 한다.[10] Owens Arrives With Kind Words For All Officials – The Pittsburgh Press, 24 August 1936[11] Owens, Back, Gets Hearty Reception, Louis Effrat, The New York Times, 1936 8 25 p.25[12] 1936년 10월 9일 볼티모어 공화당 집회에서[13] 한국 병탄이 1910년에 있었는데 같은 해 일본과 남아연방이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일본은 남아공이 아시아 국가와 맺은 외교관계 중 가장 오래된 관계를 자랑한다.[14] 이는 싱가포르도 마찬가지이며 싱가포르는 선진국이었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명예백인 취급받지 못했으며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반발로 단교하였다.[15] 당시에는 권고사항이긴 했다. 이 당시에는 여행금지국가가 아니더라도 해외여행 한번 가기 쉽지 않던 시절이라 남아공까지 가서 사는 사람들은 주재원이나 사업차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는 했다.[16] 단교 선언은 1996년 11월에 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실제 단교가 이뤄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여담으로 단교가 지연되는 도중에 대만에서 이와 관련된 엄청난 사건이 있었는데,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17] 미국의 흑인 스포츠 선수들은 무함마드 알리 시절부터 흑인 인권운동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현재에도 경기 전 국기에 대한 경례 시간에 흑인 특유의 저항적 표현인 무릎 꿇기를 하는 선수들이 다수 있을 정도로 이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남아공의 이런 이율배반적인 행태에 코웃음을 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18] 혼혈이긴 해도, 조상 중에 흑인 피가 섞인 거지 부모님은 각각 그리스인과 포르투갈인이라 피부는 하얬다고 한다.[19] John W. Dower, War Without Mercy: Race & Power in the Pacific War p45[20] "그들은 정신력이라는 우월한 동북아 문명이 서구 문명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이것이 소위 '야마토 정신'이며, 우리 나라(미국)에 대한 경멸의 원인이기도 하다." 미해군 과달카날 전투보고서 中[21] 중국 주나라 시절부터 있던 개념인 '존왕양이'에서 차용하여 '존황양이'라고 하였다. 이는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리고 천황에게 권력이 넘어간 '대정봉환'으로 알 수 있다.[22] 사업가이자 다인(茶人)이자 문인(작가)[23] 한국 인터넷에는 다카하시 요시오가 주장한 일본 인종 개량론이 위 이미지들처럼 여러가지 형태로 돌아다닌다. 종종 다른 사람이 주장한 것처럼 위장된 경우도 있다.[24] 참고로 모리 아리노리는 니시노 분타로라는 사람에게 옆구리를 칼에 찔려서 죽었는데, 이세 신궁 방문 당시 불경하게 굴었다는 이유였다. 니시노 분타로가 쓴 종이에는 천황을 받드는 일본의 기초를 무너뜨리고 멸망시키려 한다고 적혀 있었고, 그 당시 모리 아리노리 같은 급진주의자들을 벼르는 사람들은 매우 많았다.[25] 다만 건강한 일본인끼리의 결혼은 장려했을 수 있다.[26] John W. Dower, War Without Mercy: Race & Power in the Pacific War p45[27] 천연두 자국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며 실제로 메이지 덴노가 20세 시절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티가 날 정도로 턱 쪽에 천연두 자국이 잘 드러난다.[28] 동갑이자 이웃 나라 대한제국황제였던 고종황제가 사진 촬영을 매우 좋아한 것과는 상반 대조적인 부분이다. 또한 아들 다이쇼 덴노도 부황과는 정반대로 사진을 비롯한 서양 문물을 매우 좋아했다.[29] 남아 있는 사진이 상대적으로 얼마 없기 때문에 해당 논란이 생긴 거라고도 볼 수 있다.[30] 사진에 익숙치 않은 옛날 사람들은 사진에 대한 미신 같은 것 때문에 사진에 대한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긴 했다. 그리고 굳이 미신이 아니더라도 당시 사진 기술은 20분 이상 가만히 한 자세와 한 표정을 유지해야 하는 한계상 사진 찍기가 대단히 어려운 시절이기도 했다[31] 원래 인쇄 기술의 자문을 위해 초빙된 사람이다.[32] 여담으로 메이지 덴노보다 더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사이고 다카모리가 있었다. 메이지 덴노는 사이고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명령하였는데 그걸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메이지 덴노의 사진은 그나마 몇 장 존재하지만 사이고의 사진은 지금까지 단 한 장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우연찮게도 사이고 다카모리의 남아있는 초상화 한 장도 에도아르도 키오소네(Edoardo Chiossone)가 그린 것이다. 메이지 덴노는 그래도 중노년기의 사진이 딱 세 장#1 #2 #3 남아 있으니 사정은 훨씬 나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33] 실제로 동북아시아인은 초기 서구의 인종분류에서 white로 분류된적이 있었지만, 나중에 이들에 대한 위기의식과 차별의식 때문에 노란색으로 바뀌어 이미지가 자리 잡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