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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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大夏

Dà Xià
1363년 ~ 1371년
이칭
명하(明夏)
위치
중국 사천성
수도
중경(重慶)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국성
(明)
주요 황제
태조 명옥진
언어
중국어
문자
한자
종교
미륵 신앙
종족
한족
주요 사건
1357년 중경 점령
1361년 반독립 정권 수립
1363년 대하 건국
1371년 대하 멸망
성립 이전
원나라
멸망 이후
명나라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
2. 역사
3. 역대 황제




1. 개요[편집]


원나라 말기와 명나라 초기 시대에 오늘날 사천성 일대에 건국된 왕조. 황제의 성씨를 따 명하(明夏), 혹은 하(蜀夏), 명촉(明蜀)이라고도 한다.


2. 역사[편집]


원나라 말기의 군웅 명옥진은 1351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서 홍건적 천완국(天完國)의 서수휘(徐壽輝)의 군세가 강성해질 무렵 군을 이끌고 합류한다. 이후 서수휘 휘하에서 원수로 활약하여 중경을 점령하고 촉(蜀), 오늘날 사천성 일대를 차지한다. 1360년에 서수휘가 진우량에게 살해당하고 진우량이 대한(大漢)을 세워 자립하자 명옥진은 단번에 진우량과 관계를 끊고 농촉왕(隴蜀王)을 자칭하면서 사실상 자립하기에 이른다. 이후 참모 유정(劉楨)의 건의에 따라 1363년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하(大夏)라 하고 수도를 중경에 두었다. 그러나 사천성이 고립된 곳이라 다른 군웅들에 비하면 그 세력이 약소하였기에[1] 1363년에는 원나라 황족인 양왕(梁王)이 다스리는 운남을 공격하였으나 좌절되고, 적극적인 대외 진출보다는 내정의 정비에 힘쓰게 된다. 명옥진은 명교(明敎)와 미륵 신앙을 결합한 백련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유독 미륵을 신앙하여 불교와 도교를 금지했다. 내정을 잘 하였기 때문에 그의 통치 하에 서촉은 평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366년 명옥진은 36세로 요절하고 만다. 그는 아들 명승(明昇)과 신하들을 불러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서촉은 험하고 고립되어 있으니 좌우 측근과 세자가 한마음으로 협력하면 능히 지킬 수 있다. 그렇지 아니하면 후사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명옥진이 죽은 후 10살 밖에 안된 어린 나이에 즉위한 명승은 허수아비였고, 황태후 팽씨(彭氏)가 섭정을 시작했으나 공신들끼리 다툼이 벌어지게 된다. 먼저 만승(萬勝)이 장문병(張文炳)을 죽이고, 장문병의 지인이었던 명소(明昭)가 만승을 죽이고, 그 명소를 오우인(吳友仁)이 죽이고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문제는 이때 죽어나간 사람들이 하나같이 공신들이었다는 것이었다. 이미 주원장의 세력이 최강으로 자리잡은 시점에서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내분까지 일으키니 그야말로 자멸행위였다.

결국 1368년 주원장이 대도를 함락하면서 사실상 패권의 향방은 정해졌고, 명승은 주원장의 대도 함락을 칭송하는 글을 올린다. 1369년에 주원장은 대놓고 사천성에서 인재를 구한다는 글을 보냈고, 마침내 그 해 겨울에는 최종적으로 항복을 권한다. 이때 주원장 말고도 그의 휘하에 있던 양경(楊璟)이 항복을 권고하는 글을 보낸다.

이후 오우인이 명나라에게 털려 흥원(興元)을 빼앗기고 만다. 1370년에는 탕화(湯和), 요영충(廖永忠)의 수군이 장강의 협곡인 구당(瞿塘)을 거쳐서 중경으로 진격하였고, 부우덕(傅友德)과 고시(顧時)는 육군을 거느리고 농을 거쳐 진격해 들어갔다. 당연하게도 명하군은 저항하는 족족 무너져 내렸고 권신 오우인은 명승에게 항복을 권고하게 된다. 결국 명승은 자기 자신을 포박하고 옥을 입에 문 채 항복을 한다. 1371년, 주원장의 공격을 받고 항복해, 명하는 8년만에 멸망했다.

명승은 항복 후 명나라 수도 응천부(남경)로 이송되어 귀의후(歸義侯)에 봉해졌으나, 명하의 유신들의 일부가 명나라에 저항하다가 진압당한 것이 빌미가 되는 바람에 이듬해 남녀 28명과 함께 고려로 보내져 서촉 명씨, 승씨(昇氏)의 시조가 되었다. 명하 왕족의 후손들은 한반도에 6만명 가량, 중국에 2만명 가량이 있는데 중국의 명씨들은 대부분 감씨로 개명했다.


3. 역대 황제[편집]


대수
묘호
시호
칭호
성명
재위기간
-
-
흠혜황제(欽惠皇帝)
-
명랑(明郞)
-
-
-
장혜황제(莊惠皇帝)
-
명자성(明子成)
-
-
-
소순황제(昭順皇帝)
-
명여해(明如海)
-
-
-
선무황제(宣武皇帝)
-
명학문(明學文)
-
1대
태조(太祖)
흠문소무황제(欽文昭武皇帝)
농촉왕(隴蜀王)
명옥진(明玉珍)
1362년 ~ 1366년
2대
-
-
귀의후(歸義侯)
화촉군(華蜀君)[2]
명승(明昇)
1366년 ~ 1371년

[1] 열전에는 정예병이 1만이 되지 않는다고 나온다. 물론 정예병 숫자이고, 전시에 일반 백성들을 징발하면 병력 수는 몇배로 늘어날 것이다. 그래도 주원장과 진우량이 파양호 대전에서 20만 대 60만을 쏟아부은 것을 생각한다면 미약하다.[2] 조선에서 받은 봉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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