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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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명일의 수상 내역 및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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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챔피언 결정전 우승 반지
2004
2008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등번호 9번
허재
(1997~1998)

표명일
(1998~2000)


이병석
(2000~2002)
전주 KCC 이지스 등번호 6번
김태진
(2001~2002)

표명일
(2002~2007)


배길태
(2007)
원주 동부 프로미 등번호 6번
배길태
(2006~2007)

표명일
(2007~2010)


석명준
(2011~2012)
부산 kt 소닉붐 등번호 6번
양우섭
(2009~2010)

표명일
(2010~2012)


박성은
(2012~2013)



대한민국의 농구인

파일:표명일 농구인생.jpg
표명일
表明一

출생
1975년 12월 23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망
2022년 1월 12일 (향년 46세)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본관
신창 표씨
종교
개신교무종교[1]
신체
신장 182cm|체중 79kg
가족 관계
배우자 정현희
아들 표승우, 표시우[2]
직업
농구 선수 (포인트 가드 / 은퇴)
농구 코치
학력
서울행당초등학교 (졸업)
양정중학교 (졸업)
양정고등학교 (졸업)
명지대학교 (학사)
프로 입단
1998년 드래프트 1라운드 8순위 (부산 기아)
현역시절 등번호
9번 - 부산 기아
6번 - 전주 KCC / 원주 동부 / 부산 kt
병역
상무 농구단 (2000~2002)
소속
선수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1998~2002)
전주 KCC 이지스 (2002~2007)
원주 동부 프로미 (2007~2010)
부산 kt 소닉붐 (2010~2012)
코치
원주 동부 프로미 (2014~2017)
양정중학교 농구부 (2018~2019.01.)
양정고등학교 농구부 (2019.01.~2022.01.)

1. 개요
2. 아마추어 시절
3. 프로 선수 시절
4. 지도자 시절
5. 사망
6. 모래반지 빵야빵야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농구선수. 대학 시절 때 겪었던 혹독한 훈련을 극복하고 프로에서 성실한 플레이와 뛰어난 수비력 그리고 센스있는 리딩으로 뛰어나지 않은 신체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백업 뿐만 아니라 주전으로서 팀에 꼭 필요한 선수로 꼽혔다.


2. 아마추어 시절[편집]


초등학교 때는 원래 태권도가 꿈이었으나 다소 과격한 운동이라 안 된다는 부모님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학교 운동장에서 놀다가 농구부 코치의 권유로 농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명지대학교 시절 주전 포인트 가드였지만, 인지도가 아주 높지 않았다. 팀 전력도 약했고, 가드로서의 역량도 신기성에게 밀렸다. 그래도 1998년 프로 첫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8번에 지명되어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로 들어가게 되었다.


3. 프로 선수 시절[편집]



3.1.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편집]


생각보다 프로에서 쏠쏠한 활약을 보여줬다. 루키 시절에는 강동희의 백업 포인트 가드로 상당히 준수하게 활약한 것. 물론 강동희를 능가한 것은 아니었지만, 강동희에게 휴식 시간 정도는 벌어줄 역량은 보였다. 두 시즌 밥값은 한 후, 군에 입대해서 상무에서 복무하던 도중에 트레이드 소식을 접했는데 기아의 색깔을 지운 모비스의 최희암 감독이 그도 트레이드 카드로 썼다. 2002년 5월 1일, 3:3 트레이드의 대상자가 되어 그렇게 팀을 전주 KCC 이지스로 옮겼다. 본인을 포함해 김동언, 송태영이 전주 KCC로, 구본근, 이상영, 김태진이 모비스로 가는 트레이드였다.


3.2. 전주 KCC 이지스[편집]


파일:표명일(2002-03).jpg

파일:/pds/200902/13/52/c0013152_4994ea88390c7.jpg

파일:2003~04 시즌 식스맨상과 기량발전상을 수상한 표명일.jpg

파일:표명일KCC.jpg
전주 KCC 이지스에서는 이적 첫 해 때 전 경기에 다 나오면서 이상민에게 제대로 휴식 시간을 주며 백업 포인트 가드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성실한 플레이에 적당히 준수한 패스와 수비력으로 비록 주전으로는 다소 미흡했다고 하더라도 나무랄데 없는 활약으로 2003-04 시즌 KCC 우승의 한 축을 담당하며 우승 반지도 얻었고, 그 해 KBL최초로 기량발전상과 식스맨상에 선정되는 영광도 안았다. 그렇게 KCC의 백업 가드로서 다른 팀의 주전 제안도 뿌리치고 FA로 KCC에 남았고, 2006-07 시즌에는 득점력도 향상되어 최고의 백업 가드로 명성을 얻었다. 이상민이 시즌 개막 이후 얼마 안되어 부상으로 전력이탈한 와중에 11월 12일 창원 LG 세이커스와의 홈 경기에서 3점슛 10개를 포함해 무려 40점을 넣으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이 경기를 계기로 '표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3]


3.3. 원주 동부 프로미[편집]


파일:표명일_원주동부.jpg
그런데 2007년 1월 KCC와 동부가 3:3 트레이드를 단행하면서 표명일은 원주 동부로 이적하게 되었다. KCC가 포워드가 부족하다고 판단하자 포워드를 얻기 위해 표명일을 카드로 쓴 것. 이 결과 KCC는 김영만, 정훈, 배길태를 얻었고, 동부는 표명일과 변청운, 백주익을 얻었다. 결론적으로 이 트레이드는 동부의 승리. 김주성이 차지하는 샐러리 때문에 특급 가드를 얻기 어려웠던 동부는 표명일의 영입하며 가드진의 로또를 긁었고, 이 로또가 터졌다.

파일:표명일_우승했을 때.jpg
[4]
신기성의 이적 이후, 제대로 된 포인트 가드가 없어 고생하던 동부는 표명일의 이적 이후 구색을 갖춘 가드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고, 표명일은 백업 가드에서 주전 가드로 활약하며 동부2007-08 시즌 완벽한 우승을 이끌면서 주목을 받았다. 물론 성적은 두 자릿수 득점도 아니었고, 어시스트도 특출나지 않았지만, 이 정도 활약만으로도 우승의 주역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3.4. 부산 kt 소닉붐[편집]


파일:전토토_표명일 KT.jpg

2009-10 시즌 이후 FA가 되자, KT로 이적한 전창진 감독은 신기성을 내치고, 그 자리에 표명일을 영입했다. 그런데 영입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연봉이 무려 4억. 게다가 신기성한테 늙었다고 은퇴를 권유하고 신기성은 이를 거절해서 결별하게 된 건데 정작 표명일은 신기성과 동갑이다(...).다행히 KT가 포워드 중심의 농구로 가드진의 부실함을 최대한 만회해서 그렇지, KT의 표명일은 KCC의 특급 백업, 동부의 우승팀 주전 가드의 명성을 다 날려먹으며 표4억으로 까였다(...).

하지만, 이렇게 까였어도 역대 수준급의 식스맨 중에서 표명일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말년에 부진해서 그렇지, 표명일 만큼의 장수한 키 식스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식스맨으로 한정하면, 역대 KBL에서 최고의 식스맨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2011-12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면서 드래프트 첫 세대인 94학번 선수들이 모두 현역에서 은퇴하게 됐다. 이후 KT의 지원으로 2년간 미국 샌디에이고로 건너가 코치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4. 지도자 시절[편집]


파일:이세범_표명일코치 동부.jpg
샌디에이고에서의 지도자 연수를 마치고 원주DB프로미의 새로운 감독인 김영만의 부름을 받아 친정팀의 코치로 복귀하게 된다. 3년간의 코치직을 수행하고 그 후 구단이 김영만 감독과 재계약을 하지 않자 동반사임했다. 2018년에 모교인 양정중학교 코치에 선임되었고기사 참조 그 해 중고농구 대회에서 지도자상을 수상하였다.

2019년 1월에는 양정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후배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5. 사망[편집]


2022년 1월 12일, 향년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그간 간암 투병을 했었다고 하며 사망까지 양정고 코치직을 수행해냈다.

KCC에서 함께 뛰었던 추승균도 인스타그램에 추모글을 올렸고, 이어 KBL 인스타그램과 표명일이 생전 현역시절 때 몸담았던 전주 KCC 이지스, 원주 DB 프로미, 수원 kt 소닉붐 인스타그램에도 추모글을 올렸다.

파일:표명일의 빈소를 찾은 김주성 코치.png
선수 시절 표명일과 함께 우승을 이끌었던 김주성 원주 DB 프로미 코치도 빈소를 매일 찾으며 넋을 기렸다.

KBL에서는 고인에 대한 애도 차원에서 1월 16일 대구실내체육관에서 개최된 올스타전에서 경기 시작 전 추모 영상 상영과 함께 묵념을 진행했다.


6. 모래반지 빵야빵야[편집]




음성지원 버전.

표명일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위 동영상. 2007~2008년도 사이 쯤의 영상으로 일명 '모래반지 빵야빵야'라 부르는 파레이돌리아 영상이다.[5]

참고로 뒤의 유재학 감독의 '으응?' 하면서 당황하는 장면은 표명일이 화를 내던 때의 경기와 무관한 다른 경기에서 나온 장면을 합친 합성이다. 즉 표명일이 유재학에게 욕한 것은 아니라는 것.[6][7]

실제로는 2007년 12월 7일 원주 동부 vs 전주 KCC 이지스의 경기에서 유독 표명일과 임재현이 서로 몸싸움을 하며 마찰이 많이 일어났는데 몸싸움 도중 심판이 파울을 불자 임재현 선수와 신경전을 가지며 예민해진 분위기에서 상대 외국인 선수 로빈슨이 해당 상황에 대해 비웃는 듯이 웃으며 지나가자 표명일이 화가 나서 욕을 내뱉은 게 임재현에게 한 것으로 와전됐다.[8][9] 그래서 욕설을 했다거나 반칙에 항의하길래 한소리 했다는 등 말이 많았다. 은퇴 후 인터뷰에서 한 번 더 언급했다. # "뭘 반칙이지 말이 많아."라고 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이후 많은 곳에서 패러디 됐다.

후속편이 여럿 나왔다.

양정고 코치로 재직했을 당시에도 그곳 부원들에게 이걸로 놀림 받았던 모양이다...모래반지 누구야.


7. 관련 문서[편집]



[1] 2022년 1월 13일에 방송된 SBS 8 스포츠뉴스에서 제수용품이 놓아진 걸로 보아 기독교인이 아닌 걸로 정식 확인되었다. 개신교도는 제사 때 향을 피우지 않는다. 17초부터 나온다. 과거에는 개신교를 믿었다가 훗날 무종교인이 되었거나 아니면 개신교였다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다.[2] 2019년 DB의 첫 연고 선수로 지명. 연고 지명을 받은 선수는 드래프트와 상관없이 고등학교 졸업 후 입단할 수 있다.[3] 사실 이 별명을 얻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무엇이냐면 이 엄청났던 경기를 어떤 채널도 중계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러니까 경기장에서 직관하던 팬들은 이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봤겠지만 아니었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40득점을 넣었던 것인지 기록지를 보고 믿겨지지 않으니 도시전설 비슷하게 받아들이다 NBA급 별명을 붙인 것이다.[4] 이 사진은 사후 영정사진으로 사용되었다.[5] 시각 자극(입 모양)에 대한 착각 반응이므로 청각적 파레이돌리아를 가리키는 몬더그린은 아니다.[6]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인 대한민국 체육계에서 선수가 감독한테 저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하술하지만 애초에 KCC와의 경기에서 이 짤이 나온것이다.[7] 어떤 짤에는 유재학 감독의 응? 표정 후에 모비스 벤치에서 박수치는 짤까지 합성한 것도 있다.[8] 표명일은 칼 미첼로 알고 있었으나 다시 보니 칼 미첼이 아닌 로빈슨이었다. 이를 안 표명일은 칼 미첼에게 사과했다. 인터뷰 [9] 정황상 해당 욕설은 입모양에서 알 수 있듯 "뭘 봐 X발라마"나 "반칙이지 말이 많아"로 추정된다. 생전 정확히 혹은 비슷하게 어떻게 말했는지 본인의 언급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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