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타카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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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利隆元
1523년 ~ 1563년 9월 18일

1. 개요
2.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모리가 제53대 당주. 모리 모토나리의 장남이자 모리 테루모토의 아버지.

모리 가 3형제의 장남. 아버지인 모토나리나 동생들인 킷카와 모토하루, 코바야카와 타카카게[1] 당시 기준으로 꽤 오래 살았던 것과 달리, 타카모토는 아버지인 모토나리보다도 먼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물론 모토나리가 도중에 은거해서 타카모토가 당주가 되긴 했지만, 당시 다들 그랬듯 은거는 실제 은퇴가 아니고 실권은 모토나리가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모리 가의 실질적 권력은 바로 손자 모리 테루모토에게 넘어갔다.

부드러운 성품의 인물로, 개성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판도가 넓어진 모리 가문을 다스리기에는 적합한 인물이었다는 평이다.

15세 때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인질로 보내어져서 야마구치(山口)에서 3년 여의 인질 생활을 보냈는데, 인질이라기보다는 손님으로서 대접을 받으면서 우아한 생활을 즐겼다.[2][3] 요시타카 자체가 온화한 성격이기도 했으려니와 거기에 용모가 단정했던 타카모토를 마음에 들어하여 제대로 대우해주었다고 한다. 원복(元服, 성인식) 때에는 요시타카가 자신의 이름 중 한 자(隆)를 주었고, 나중에는 자신의 양녀를 타카모토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했다.[4]

타카모토의 인질 시절은 실보다 오히려 득이 많은 성공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데, 우선 모리 가문은 당시의 강대 세력이었던 오우치 가의 신뢰를 얻으면서 세력을 키워나가게 되고 인질 시절에 오우치 가문의 여러 가신들[5]과도 친교를 쌓아 훗날 외교 관계에도 플러스 요인이 되었으며, 타카모토 자신도 요시타카의 영향을 받아 지식과 교양을 몸에 익혔다. 단 이 부분은 타카모토의 성격에도 큰 영향을 미쳐, 지나치게 온화한 성격이 되었다고.[6]

1540년에 가문으로 복귀, 1546년에 아버지 모토나리의 급작스러운 은거로 당주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7] 하지만 이는 좀 더 자유로이 모략 활동을 하기 위한 모토나리의 책략이어서, 당주이기는 해도 실권은 모토나리가 그대로 쥐고 있었다. 당장 후술할 이츠쿠시마 전투도 은거했다는 모토나리가 친정했다. 그 뒤로 모토나리가 진짜 은퇴를 하려고 한 적도 있는데 그럼 자기도 아버지를 따라서 아들에게 다 물려주고 은거하겠다고 억지를 부려서(...) 계속 모토나리가 뒤를 봐줬다고.

1551년에 스에 하루카타에게 오우치 요시타카가 죽음을 당하게 되자(다이네이지의 변), 타카모토는 분노하여 스에 하루카타 타도를 주장하게 된다. 배신자에게 복수하겠다는 명분 챙기기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보살펴 주었던 요시타카에 대한 보은의 의미도 담겨있었을 것이다. 아버지 모토나리는 신중하고 미온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나[8] 타카모토의 주장이 가신들에게 설득력을 얻게 되자 모토나리도 움직이게 되고 결국 1555년 이츠쿠시마 전투에서 스에 하루카타를 멸망시키고, 실제로 권력을 가진 하루카타가 허망하게 죽자 오우치 가문은 허울만 남았다. 이어서 1557년에는 남은 오우치 가문을 멸망시킨다.

구 오우치 가문의 영토를 둘러싸고 오토모 소린아마고 하루히사 등과 싸움을 벌이던 중이던 에이로쿠 6년 9월 1일(서기로 치면 1563년 9월 18일) 아마고 씨 공격에 참가하기 위해 이동하다가 산하에 있던 고쿠진 와치 마사하루(和智 誠春)의 접대를 받은 후 원인불명으로 급사했다. 그의 급사의 원인은 식중독 또는 독설설이 제기된 바 있다. 아버지 모토나리는 장남의 갑작스런 죽음에 비탄에 빠졌고, 독살의 혐의를 씌워서 여러 명의 가신들을 주살하기도 하였다.

타카모토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타카모토의 어린 아들인 테루모토가 가문을 잇게 되었는데, 너무도 어렸기 때문에 모토나리가 계속해서 모리 가의 실권을 쥐었다. 일설에는 테루모토가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가독을 넘겨주고 모토나리는 정말 은퇴하려고 했는데 테루모토曰 "아버지는 마흔이 다 될 때까지 후견을 봐주셨으면서 저한테는 왜 벌써 다 넘기려 하십니까?"라고 딴지를 걸었다고도 한다(...) 아버지가 겹쳐보인다면 기분 탓이다. 테루모토는 천성적으로 유약하고 우유부단했기 때문에 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판단을 잘못하고 집안을 말아먹는 계기를 제공했다.

모리 타카모토는 군사 및 정치에도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온화하고 효심 지극한 성격으로 인해 한 가문의 당주임에도 적극적인 주도를 하기보다는 아버지의 밑에서 지시를 따르는 쪽을 따랐던, 전국 시대를 살아가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비운의 인물이었다. 잘난 동생과 전설적인 업적을 세운 아버지 사이에 끼어서 늘 자기 자신을 '쓸모없다', '능력이 없다'며 비하하는 등, 자존감이 크게 결핍된 인물이었음을 알려주는 서찰과 자료가 많이 남아있다.


2. 창작물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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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모리 모토나리>에서는 순박하면서도 성실하지만 역시 역사처럼 자존감이 다소 부족한 인물로, 급 열혈한인 킷카와 모토하루, 발랄한 지략가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명목상 당주가 되긴 하지만 실권은 아버지에게 있는데다가, 오우치 가에 신세를 많이 진 탓에 약체화된 오우치 가를 자비없이 뜯어먹으려는 아버지와 다투기도 하는데, 갈등이 극에 다다랐다가 막 원만히 화해하려는 시점에 암살당하고 만다. 모토나리는 '우리 타카모토! 우리 타카모토가-!!'라면서 절규하고, 격노하여 책임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을 가차없이 숙청해버린 뒤 성격이 비뚤어진다[9]. 후반에 급격히 흑화되어 각종 잔인한 책략을 구사하고 정복 전쟁을 벌이는 모토나리의 흑화 원인을 제공한 인물.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무(武)로 치우친 모토하루나 지(智)로 치우친 타카카게와 달리 평범한 능력치지만 그나마 정치력은 쓸만한 수준이고 아들인 테루모토보다는 훨씬 낫다. 정말 당주용 능력치. 수명도 이전 작에서는 사실처럼 단명하곤 했지만 노부나가의 야망 천도에서는 사실보다 길게 설정되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편이다. 군웅패권에서 백성들에게 인기 많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한 백성과 나누는 이야기가 동생들이 너무 잘나서 형인 자신이 힘들다는 것, 타카모토의 대답은 자기도 그 마음 안다는 것이다.

창조에서는 모리 가문 전국전에선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오우치 가문에서 돌아온뒤 온갖 문화에 대해 배운 것을 아버지에게 자랑하다가 혼쭐이 나는 등장을 한다. 그래도 모토나리는 아버지라고 그런 타카모토를 보고 속으론 소중히 여긴다. 이후 스에 하루카타가 하극상을 일으킨뒤 모리 가문에게 영지를 내놓으라고 하자 타카모토는 지금 영지를 내놓는다면 모리 가문은 방어적인 자세로 나갈수밖에 없다며 싸울 것을 주장한다. 이는 모토나리와 다른 형제들도 원하던 바였고 이츠쿠시마 전투 전국전으로 이어진다. 이츠쿠시마 전투를 앞서고 만에 하나의 경우 모리 가의 뒤를 잇도록 타카모토만은 후방에 두려고 했지만 타카모토는 그답지 않게 고집을 부리며 아버지와 함께 가겠다고 한다. 이를 본 타카카게는 어차피 형님 혼자만 있으면 모리 가는 끝장이다라며 타카모토를 데려가는 것에 찬성한다. 이후 타카모토는 아버지에게 동생들에게 뒤쳐지지 않도록 활약해야 했다며 이츠쿠시마에 따라간 이유를 밝힌다. 이후 이벤트를 통해 사망하고모토나리는 대성통곡을 한다. 이후 이런 아버지를 본 모토하루와 타카카게는 형은 뒤에서 중심을 지키는 중요한 사람이었다며 형을 그리워한다.

타카모토가 사망하면 두 동생이 모두 특성 '백만일심'을 얻을 수 있는데, 이 이벤트 전에 이미 백만일심을 획득한 상태라면[10] 가문이 보유해서 다른 가신에게 나눠줄 수도 있다. 백만일심이 나쁜 특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타카모토를 희생할 정도의 가치가 있냐면 애매하기도 해서 유저의 선택사항이다. 사망 조건은 모리가의 모성인 요시다 코리야마 성에 입성하는 것. 그것만 피하면 사망하지 않는다만, 그러려면 타카모토를 항상 모토나리의 영향권에 데려가야 한다. 안그러면 CPU가 랜덤하게 장수들을 옮기다가...

태합입지전에서도 두 동생에 비하면 초라한 능력치. 무력을 제외하면 70 ~ 80대의 무난한 능력치이지만 기능쪽이 최악이라 수하로 두고 굴리기엔 부적합하다. 직접 플레이할 경우 기능은 배우면 되니 좀 할만 하지만 수명도 워낙에 짧은지라... 3형제 중 하나로 플레이 할 경우 1561년 ~ 1562년경에 세 개의 화살 이벤트를 볼 수 있고 이 때 아버지 모토나리의 카드를 얻을 수 있다.

백만인의 전국무쌍에서도 등장. 소극적이고 자신감 없는 성격이지만, 해야할 말은 똑바로 하는 타입. '세 개의 화살' 이벤트에서 '화살이 세 개라도 부러뜨려 보이겠다'고 대답한 모토하루나 어떻게든 책략을 써서 꺾으라는 의미로 이해한 타카카게와는 달리 아버지의 바람대로 형제의 결속을 빗댄 것이라고 제대로 이해했다. 이는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에서도 마찬가지. 등 뒤에 마네키네코처럼 생긴 고양이가 매달려 있는데 자신을 포함해 영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이 탓인지 아버지 모토나리가 놀랄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운이 강해 우연히 얻은 오래된 무구가 실은 진귀한 골동품이었다든지, 눈을 갖고 놀다가 금화를 발견하는 일까지 있다.

어쌔신 크리드 메모리즈에서 보면, 모리 가문을 약화시키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가 암살했다고 한다.

파일:전국연희 케야키 2.png
전국연희 시리즈에서는 전국연희 EX 参 ~모리 가의 인연 편~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마츠노의 첫째 딸이자, 모미의 양어머니로 진명은 케야키(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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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생들이 성씨가 다른 건 두 가문의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각자 양자로 집어넣고 나중에 계략을 써서 가문을 빼앗았기 때문.[2] 오우치의 본거인 야마구치는 당시 서쪽의 교토라 불리울 정도였고, 요시타카 역시 문화인적인 성격이 강했다.[3] 그리고 애당초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서양이든 일본이든 말이 인질이지 복속한 가신 가문들의 자식들을 주가에서 정중히 잘 대우하고 좋은 교육을 시켜주는 것이 훨씬 더 일반적이었다. 서양에서도 가신 가문들의 아들들이 주가에 어릴 때부터 살면서 시종 노릇을 하는 일이 흔했으며(하인이 아니다) 일본에서 또한 그런 사례가 흔했는데 어지간 해서는 좋은 대우를 받았다. 주가 입장에서도 가신의 아들들은 장차 본가를 보필해야할 미래의 가신들이니 당연히 좋은 교육을 제공하고 좋은 대우를 해서 포섭해 놓는 것이 가문의 장래에 이득인 일이었다.[4] 부인과는 금슬이 아주 좋아서, 타카모토는 평생 측실을 두지 않았다.[5] 그 중에는 훗날 오우치 부흥이자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한 스에 하루카타도 있다.[6]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전국 시대에 있어서는 마이너스가 될 가능성이 크다. 아버지 모토나리가 보낸 서장에 “노라던가 예능 같은 거 다 쓸모없어. 무략과 지략이 있어야지.”라는 내용이 있기도.[7] 실제로는 1557년이라는 설도 있음.[8] 이렇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 것 자체도 하루카타를 방심케하기 위한 모토나리의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다.[9] 타카모토 사후 모토나리가 입 버릇처럼 말했다는 '빨리 죽어서 타카모토에게 가고 싶다'는 대사가 그대로 나온다.[10] 전 능력치 +3 성장일 때 얻을 수 있어서 크게 어렵지도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